중동의 대표적 친(親)서방국가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중동 정세를 안정시키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해왔던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의 관계가 최근 악화하고 있다. 정치·외교적 갈등에 경제적 이득을 놓고 서로 대립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지역 주도권 싸움으로 번지면서 중동의 ‘새로운 골칫거리’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작년 12월 9일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에서 모하메드 빈 살만(오른쪽) 왕세자와 당시 아랍에미리트(UAE) 외교국제협력부 장관이었던 압둘라 빈 자이드 알 나흐얀이 인사를 나누고 있다./YNA 연합뉴스© 제공: 조선일보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4일(현지 시각)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세자이자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37) 사우디 총리와 UAE 수도 아부다비의 왕세제인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 나하얀(61) UAE 대통령이 서로를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매체는 UAE에서 지난 1월 열린 중동 국가 정상 회의에 사우디 왕세자가 참석하지 않았고, 사우디 리야드에서 지난해 12월 열린 중국·아랍 정상 회의에는 UAE 대통령이 불참한 것에 주목했다. 당시 양측 정상의 상대국 행사 불참은 기존 양국 관계에 비추어 이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WSJ는 “양국 관계가 최근 정치·외교·경제 등 여러 면에서 서로 갈등을 빚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빈 살만 왕세자와 알 나하얀 대통령은 본래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0년대 이후 두바이를 앞세운 UAE의 개방·개혁 정책과 이를 통한 경제성장에 빈 살만 왕세자가 큰 관심을 보였고, 알 나하얀이 사우디의 권력을 물려받을 빈 살만 왕세자에게 멘토(조언자) 역할을 하면서 돈독한 관계가 됐다. 또 이란 등에 맞서 긴밀한 군사·외교 협력을 이어나가면서, 대(對)서방 및 이스라엘 관계 등 민감한 문제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눠온 것으로 전해졌다. 두 사람은 휴가 때 수행원 수십 명만 데리고 사우디와 UAE 사막에서 매사냥을 함께 하며 서로 허물없는 사이임을 과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양국 간 해묵은 감정에 새로운 문제들이 더해지면서 정부 간은 물론, 두 사람의 관계도 소원해졌다는 관측이 나온다. 양국은 앞서 2015년 예멘 내전 과정에서 파열음을 냈었다. 사우디와 UAE는 당시 정부군 편에서 이란의 후원을 받는 후티 반군에 맞서 함께 싸웠다. 사우디 다음으로 가장 많은 병력을 파병한 것이 UAE였다. UAE는 그러나 2016년 돌연 “UAE군의 예멘 전쟁은 마무리됐다”며 철군을 선언, 내전에서 발을 빼버렸다. UAE군의 전사자가 77명에 달하면서 자국 내 여론이 나빠지자 상당한 정치적 부담을 느낀 탓으로 해석됐다. 사우디는 이를 ‘배신’으로 받아들였다는 분석이 나왔다.
2020년 UAE가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아브라함 협정’을 맺고 이스라엘과 외교 관계 정상화 및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에 나선 것도 사우디에 충격을 줬다. 이스라엘에 대한 양국의 묵시적 공동 전선을 깼다는 것이다. 반면 UAE는 사우디가 2021년 카타르와 국교 정상화에 나선 것에 불만을 가진 것으로 전해졌다. 이로 인해 2017년부터 3년 넘게 지속해 온 카타르에 대한 봉쇄 정책이 끝났다. 기존에도 카타르와 관계가 좋지 못했던 UAE는 당시 카타르 봉쇄 해제에 불편한 반응을 보인 바 있다. 두 나라는 양국 국경 지대의 ‘샤이바 유전’ 소유권을 놓고도 논쟁을 벌여왔다. 이렇게 정치·외교적으로 누적되어 온 ‘섭섭함’에 경제적 대립이 불을 질렀다. 사우디는 지난해 러시아와 남미 국가들이 참여하는 산유국 협의체 오펙플러스(OPEC+)를 통해 석유 생산량 감축에 나섰다. UAE는 이에 “감산은 경제적으로도 이익이 없고, 미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다”며 반기를 들었다. 알 나하얀 UAE 대통령이 친동생을 비밀 특사로 사우디에 파견해 빈 살만 왕세자를 설득했으나 그는 감산 계획을 그대로 밀어붙였고, 이는 실제로 미국과 관계 악화로 이어졌다.
빈 살만 왕세자가 “사우디 수도 리야드를 중동의 경제 중심지로 만들겠다”며 ‘신(新)경제 프로젝트’에 뛰어든 것도 UAE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중동의 경제 허브 역할은 두바이를 내세운 UAE의 몫이었다. UAE는 사우디보다 석유 매장량이나 경제 규모 면에서 크게 뒤처지나, 물류와 금융, 관광 등 중심지 기능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중동 전문 매체 알모니터는 “사우디와 UAE 두 국가의 갈등은 지역 주도권 경쟁이라는 측면에서 피하기 힘든 상황”이라며 “그렇잖아도 복잡한 중동 정세에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