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립자 : 장신 설립년도:1667년 서원승격 : 1780년, 배향:장여화, 장신 소재지 : 영주시 평은면 금광2리
연혁
현종 8년(1667) 평은면 금광리 운곡(雲谷, 영주댐 인근)에 운곡서당(雲谷書堂)을 세워 강학.
경종 3년(1723) 사림에서 서사(書社)를 만들어 장신의 위패를 봉안 정조 4년(1780) 운곡서원(雲谷書院)으로 승격 묘호를 경의사(敬義祠)라 하고 순조 23년(1823) 장신의 조부 장여화의 위패를 봉안 하였다. 지금은 서원의 흔적은 없고 금강마을 입구에 운곡서원유허비(雲谷書院遺墟碑)만 남아있다.
배향인물
장여화(張汝華) 1566년(명종 21)-1621년(광해군 13) 1566년(명종 21) 영주에서 출생한 장여화는 어려서부터 강대(剛大)한 기품과 엄숙한 몸가짐으로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인물이었다. 게다가 부모에게는 지극한 효성을 다하고 형제 사이에는 화평한 관계를 한시도 잃지 않았으며, 독서를 할 때에는 의리의 탐구에 정밀하였고 일을 처리할 때에는 핵심을 꿰뚫어 시비를 판별하였다.
다른 사람과 다름을 염려하지 않으며 오직 올바른 몸가짐을 지키기에 전념하였으니, 1609년(광해군 1)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지만, 광해군의 패정(悖政)을 보고서 고향으로 내려와 두문불출하며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데에 힘쓴 것은 그의 성품으로 보아 당연한 일이었다.
고향인 영천으로 낙향한 장여화는 전계초당(箭溪草堂)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며, 시를 통해 세도(世道)를 염려하는 은자(隱者)의 뜻을 담아내었다. 그 후 광해군의 정치가 더욱 혼란해지던 1621년(광해군 13)에는 곽진·김시추 등 동료들과 더불어 이이첨의 머리를 벨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러 서울에 갔다가 병을 얻어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친구 곽진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 가운데 “지금의 영천이 영천일 수 있는 것은 오직 그의 덕택 때문이다”라고 칭송할 정도로, 광해군 연간 영주 지역 선비의 기개가 뿌리내리도록 한 그의 공로는 사후에도 널리 추앙받았다.
장신(張신)1629(인조7)-1711(숙종3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중온(仲溫), 호는 금강(錦江). 적개공신(敵愾功臣) 말손(末孫)의 후손이다. 1679년(숙종 5)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참봉이 되었고, 1691년 학행(學行)으로 6품직에 초수(超授)되어 개령현감이 되었다.
이때 청렴하게 혜정(惠政)을 베풀어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2년 뒤 감찰로 소환되었으나 사직하고 향리인 영천으로 돌아갔다. 이후 학문연구에만 전념하여 사서삼경에 관통하였고, 특히 ‘대학’에 정진하였다고 한다.또, 부모를 섬기기에 정성과 효를 다하여 당시에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죽은 뒤 영천의 운곡서원(雲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이원식 실버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