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1607-1689년 8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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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생의 제자로 1633(인조11)년에 사마시 합격 훗날 효종(孝宗}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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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이 되어 송시열이 크게 출세할 인연은 이때 맺어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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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 임금 때 1658년 이조판서로 취임 대왕대비의 복상(服喪)을 1년이 옳으니
3년이 옳으니 하여 결국 송시열의 주장대로 일년상을 낙찰된 후 두고두고
말썽이 되었다.
효종 다음의 현종(顯宗)도 그를 신임하여 승록대부로 특진시키고 이조판서에 판의금
부사를 겸임했다.
1668년 우의정(右議政) 으로 취임 좌의정 허적(許積)과 뜻이 맞지 않아 한때 사임
하였다가 다시 우의정으로 복직 좌의정 許積이 물러나자 좌의정으로 승진하고 그의
후임으로 김수항(金壽恒)이 우의정 이 되었다.
그러나 효종이 죽을 때 대왕대비의 복상 문제와 장지 문제는 항상 말썽이 되어 벼슬길도
순탄치 않았다.
현종이 죽고 숙종 때 이르러 덕원, 용천 ,장기 ,거제, 청풍, 등지로 귀양살이 를 하다가
풀려나왔다. 이어 영중추부사로 다시 등용되었다.
1689년 왕세자 책봉 문제로 임금께 글을 올렸는데 그 글 중에 숙종의 비위에 그슬리는
대목이 있어 숙종은 크게 노하여 그의 모든 관직을 박탈 하엿다.
마침내 제주로 귀양 보냈다가 다시불러 심문하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우세하니 숙종은
이를 허락하였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정읍에서 사약(賜藥)이 내려지자 제자 권상하(權尙夏)
김만준(金萬埈)의 손을 잡고 뒷일을 부탁한 후 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나니 수원에서
장사를 지냈다.
그 후 5년 만에 조정에서 관작을 복구하고 시호를 내렸다.
도봉서원(道峰書院)과 화양서원 문정서원(文正書院)에 그를 모셨는데 그는 주자학의
대가였다.
귀양살이의 어려움에도 저술에 힘쓰고 학문에 열중하여 제자를 가르치며 많은 시도
남겼다.
우암 탄시암(尤庵 嘆時岩)시
팔십삼세옹(八十三世翁) 83세 늙은 이몸이
창파만리중(蒼波萬里中) 거칠고 먼 바닷길을 가노라,
일언호대죄(一言胡大罪) 한마디 말이 어찌 큰 죄가 되어
삼출역운궁(三黜亦云窮) 3번이나 쫏겨가니 신세가 궁하구나,
북극공첨일(北極空瞻日) 북?하늘 해를 바라보며
남명단신풍(南溟但信風) 남쪽바다 믿고 가느니 바람 뿐이네,
초구구은재(貂?舊恩在) 초구(임금이 하사한 옷)에는 옛은혜 서려있어
감격업고충(感激泣孤衷) 감격한 외로운 속마음 눈물 지우네.
화양서원 ;충북 괴산군청천면 화양리에 있으며 노론의 주도로 설립 송시열선생이
학문을 닦고 제자를 가르친 곳으로 우암 송시열의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신도비
"빰대린 무관에게 벼슬을 준 좌의정"
우암 송시열은 문무를 겸비한 문신으로 알려졌다.
3 살 때 글을 깨우치고 7살 때 선비들이 공부하는 것을 엿듣고 받아 적을 정도로 머리가
뛰어났다.
오죽하면 그가 과거 시험에 장원급제할 때 많은 학자들이 큰 인물 나왓음을 기뻐했고
임금은 그를 곧장 이조판서로 임명(任名}할 정도였다.
그가 좌의정으로 있을 때 경기도 어느 고을에 볼일이 있어 가다가 장대 같은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할 수 없이 주막집에 하루 묵게 되었는데 방이 없어 한방에서 무관 2명과 함께
숙박 하였는데 서로 얼굴만 쳐다보다가 갑갑해진 무관이 송시열한테 먼저말을 걸었다.
상투를 한걸보니 작은 벼슬이라도 한것같아 보이군요,
보리쌀깨나 팔았던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지 않소,?
무관은 송시열을 우습게 보고 비꼬듯 말하는데 뭐 그리 대단한 벼슬 아닙니다, 하니
이말에 더욱더 기세가 등등해져 아랫사람 다루듯 다시 자네 이름이 뭔가,?
송시열은 난감해하다가 이름을 내놓을 만한 사람이 아니오니 그저 그런줄 아셨으면
합니다 하니,무관이 이 사람아 이름석자 밝히는데 뭐 그래 힘든 일이라고 하면서
화를 내었다.
송시열은 하는 수 없이 저의 성은 송 이요 이름은 시열 이라 합니다,
그러자 무관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이찌 할 바를 몰라했다 송시열은 좌의정 이기도
하지만 당대 이름난 문장가 인대다 효종의 총애를 받는 문신이니 이름없는 고을 무신
입장에선 난감해졌다 당장 백배사죄 해야 할 처지지만 그러나 어쩐 일인지 무관은 얼굴
색을 바꾸면서 송시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갑자기 송시열의 따귀를 소리나게 갈기었다.
네 '이런 나쁜 놈, 감히 네가 송시열 같은 대감을 사칭하여 사람을 놀리다니 어찌 그런
못 돼 먹은짖을 한단 말이오,
네놈이 송시열 대감이 어떤 분이 신지 알기나 하느냐, 천하에 몹쓸 고약한 놈,,
최고의 문장가 인품을 갖춘 그 이름을 내가 평소 존경(尊敬)하는 분 이거늘 감히 보잘 것
없는 늙은이가 하면서 무관(武官)은 거짓말 하는 자와 같이 있을 수 없다고 그만 떠나는
그를 보고 송시열은 오히려 그를 칭찬(稱?)했다.
무관 이라면 그정도는 돼야지,
대장부다운 사람이군 이튿날 송시열은 서울로 돌아와 뺨 맞은 자국도 가기 전에 그
무관을 불렀다 , 송시열 앞에 나타난 무관은 자신이 엄청난 잘못을 깨닳고 모두 끝났다고
생각했으나 송시열은 달랐다, 무관을 혼내 주기는커녕 그를 평안도 병마 절도사, 라는
더 큰 벼슬을 주었다.
비록 실수를 하긴 했지만 젊은 무관다운 호탕한 기질이 마음에 들었고 그 정도라면
큰일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걸 믿었기 때문 송시열은 도리(道理}에 어긋나는 일 없이
나라를 지킬 줄 아는 사람 이었고 정의를 지킬줄 아는 인물(人物)로기억되고 있다.
송시열에 대한 일화(一話)는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죽을때 한 사발로 죽지 않아
항문을 막고 약(藥)이 새어 나오지 못하도록 한채 약을 먹여 죽게 했다고 한다.
송시열은 서인의 거두로 남인과 논쟁(論爭) 다가 후에 노론의 거두로 활약하다가
숙종 15년 세자 책봉의 일로 왕의 노여움을 사서 사사되었다.
일생을 주자학에 몰두한 거유(巨儒) 이이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다.
영조 임금은 조선시대(朝鮮時代)의 가장 많은 업적을 남긴 임금 50년 동안
제위에 올라 80세 까지 살았다.
영조는 학문{學文)과 예술을 사랑하며 청빈과 검소를 강조하고 탐관오리를 쫓아 내는
일에 앞장섰다
이런 업적(業積)에도 불구하고 아들인 사도세자 를 무참하게 뒤주에 가두어 죽인
일은 커다란 오점으로 남아 있다.
2013년 11월 24일 조헌섭
이덕일 ‘윤후와 침묵의 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