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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산꽃지기 원문보기 글쓴이: 양산박
2019년 6월 9일 일요일 백두대간34회차 상월봉 국망봉
자유인 산악회
백두대간 34회차: 고치령 – 마당치 – 연화동 삼거리 – 늦은맥이재 – 상월봉 – 국망봉 – 어의곡리 새밭
산행거리 : 약 20 km 산행시간 : 약 8시간
백두대간 가는길
https://www.ramblr.com/web/mymap/trip/371711/1540686
상월산 거쳐 국망봉으로
https://www.ramblr.com/web/mymap/trip/371711/1540724
거리 20 km
소요 시간 8h 35m 14s
이동 시간 7h 55m 53s
휴식 시간 39m 21s
평균 속도 2.5 km/h
최고점 1,428 m
총 획득고도 735 m
난이도 보통
백두대간 (白頭大幹) 34– 국망봉 (國望峰)
양산박
나라 잃은 슬픔 그리 컸더냐
가는 길 발자국 눈물 고이고
한숨소리 부대껴 바람 이누나
뒤돌아본 조국산천 허망한 것이
어이 마의태자 너뿐이더냐
살다보면 그런 일 숱하게 있느니
그래도 살다보면 잊혀지더라
얼굴에 난 눈물자국 마르는 날엔
하얀 웃음 읏을날도 생겨나더라
다시 찾은 고치령 (古峙嶺)
3월달 마구령을 거쳐 갈곶산 산행할 때 들머리로 삼았던 고치령을 다시 찾았다. 좌석리 이장집 고치재 팬션에 도착하자 우리보다 앞서 도착한 다른 산악회 회원들이 트럭을 기다리고 있었다. 백두대간 산행을 하면서 다른 산악회와 만나는 일이 많지 않은데 오늘은 서로 겹치는 산행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정산악회 회원들이 먼저 트럭을 타고 고치재로 떠나고 우리 팀 중에서 선두팀이 떠난 다음 또 한참을 기다린 후 약 10 여분 트럭을 타고 오전 11시 마침내 고치재에 도착해 산행을 시작했다. 3월에 왔을 때는 늦눈이 내려 아직 겨울 풍경이었는데 두 달이 조금 넘는 동안 소백산은 온통 짙은 녹색 옷으로 갈아입고 한여름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6월은 늘 바쁘게 지냈던 것 같다. 봄인가 싶으면 어느 새 여름이고 장마철을 앞두고 어쩌면 계절을 잊은 채 지내왔던 것 같다. 고치령은 옛고개(古峙嶺)이라는 뜻이다. 저 옛날 고구려 군사들이 신라땅을 빼앗기 위해 넘나들던 고개요,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고도 흥망성쇠를 겪은 후 통일신라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항복한 후 그의 아들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품고 삼베옷(麻衣)을 입고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걸었던 길이다. 또한 영월땅에 유배되어 온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던 금성대군이 순흥땅에 머물면서 단종을 찾아 넘나들던 고갯길이다. 한국전쟁때는 마지막 보루였던 대구를 사수하려 수 많은 국군들이 피를 흘린 고개다. 지금은 이렇게 놀이 삼아 트럭을 타고 올라와 산행을 하지만 이 고치령은 아픈 사연을 품고 묵묵히 지내 온 우리 역사의 고갯길이다.
지금 우리와 함께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먼 조상님들 중에는 신라군으로 또는 고구려군 또는 백제군으로 적대시하며 싸웠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관군으로 누군가는 반란군으로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에 동원되었으리라. 어찌 보면 누가 누구를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 하고 또 죽어야 했던 세월을 이 고치령은 아무 말 없이 지켜보고 있었으리라.
좌석리에서 고치령으로 오르는 교통수단은 작은 트럭이다.
지금 세간에는 ‘김원봉’이라는 사람의 이름으로 시끄럽다. 역사에 대한 지식이 미천한 나에게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던 이름이다. 그의 이름을 6월 6일 현충일에 문재인 대통령이 기념사에서 불러 주었다. 일제치하 독립군 중에서도 가장 치열하게 무력투쟁을 이끌었던 장군이었다 한다. 김구 선생보다도 더 많은 현상금이 그의 목에 걸렸을 정도로 일제가 체포하려 애쓰던 인물이라고 한다. 해방 후에는 고향인 밀양에 내려가 살던 중 일제 앞잡이었다가 이승만 정부에서 악덕경찰의 대명사가 된 노덕술의 극심한 고문을 피해 월북하여 김일성 정권 하에서는 남침 전쟁을 이끌었으나 전쟁 후에는 북한에서도 토사구팽당하여 처형되었다 한다. 지금은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남과 북에서 잊혀진 인물이다. 그런 인물에게 그의 독립운동의 공로를 높이 사서 훈장을 추서하는 사안에 대해 갑론을박이 격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선 찬성하는 사람들은 김원봉의 독립운동을 인정해줘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유야 어찌됐든 월북하여 북한 공산당에 부역하고 남침을 도모한 인물에게 훈장을 준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문제는 우리나라 남북한 국민들이 앞으로 극복해야 할 수 많은 문제 중에 아주 작은 일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6월 6일 현충일에 문재인 대통령이 연설에서 이 문제를 언급한 것은 김원봉 한 사람에 관한 문제를 떠나 앞으로 우리가 고민해야 할 문제점에 화두를 던진 셈이다.
후발팀이 고치령에서 인증사진을 남긴다.
언젠가 남북한이 통일되고 더 나아가 중국의 조선족 자치지역까지 지리적인 통일을 이룬다면 우리는 또 어느 땅에 태어났느냐에 따라서 다른 지역에 태어나 자란 사람에게 알 수 없는 적대감을 표시할 수도 있으며 과거의 역사를 들추며 빨갱이니 미국앞잡이니 하는 비판을 일삼게 될지도 모른다. 천 오백 여 년 전에는 이 소백산을 경계로 아래쪽에 태어났느냐 윗쪽에 태어났느냐에 따라 그들이 속한 나라가 달랐으며 각 나라 왕들의 패권싸움에 회생되었던 평범한 백성들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쓸데 없는 애국심이 가슴 속에서 자라나 겨우 산 하나 너머에 살고 있는 다른 왕국의 백성을 미워하도록 세뇌되었다. 가슴속에 자라난 애국심은 다른 나라 백성에 대한 적개심으로 자라나고 마침내 전쟁에 동원되어 서로 죽고 죽이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이긴 자도 진 자도 모두 헐벗고 지쳐 있을 때 그들을 지배하는 왕들만이 더 넓어진 영토에 흐믓해 하며 좀 더 큰 전쟁을 도모하게 되는 것이었다.
마당치(馬堂峙)는 옛날 마구간이 있던 자리인가
이런 저런 생각 속에서도 발걸음은 가파른 산길을 한참 치고 오른다. 나무가 울창하여 주변 조망은 보이지 않고 여름 빛이 짙은 녹음이 이어진다. 우리는 숲 속에 묻힌 채 산길이 뚜렷한 백두개간을 걷는다. 길 가에는 이미 꽃이 지고 열매를 맺은 <둥굴레>와 아직 꽃이 피어 있는 것도 많이 보인다. 꽃이 져버린 <노린재나무>에 열매가 없다. 이 나무도 꽃을 제대로 피우지 못해 올 해는 열매를 맺지 못한 채 일 년을 허송세월해야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얀 <민백미>꽃은 이제 지고 있어 조금 남아 있는 것이 어설퍼 보인다. 자주색 큰 꽃이 군락을 이루며 피는 것은 꿀풀과 <자란초>다. 2주 전에 온 산을 수 놓았던 <물참대> 대신 이번에는 <말발도리>가 만발했다. 꽃이나 나무나 잎모양까지 물참대와 구분이 잘 안되는 나무다. 물참대에 비해 꽃이 더 조밀하게 피어 있고 꽃의 안쪽이 노란색을 띤 것이 말발도리라고 설명하지만 막상 물참대와 말발도리를 앞에 놓고 구분을 하려면 상당히 혼란스럽다. 꽃잎이 네 장인 <고광나무>도 아직 조금 남아 있다.
말발도리 - 꽃이 지고 난 열매의 모양이 말굽모양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자란초
조망이 없는 대신 나무 숲 속에 자라나는 야생화를 살피면서 걷고 있는 내 눈은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있다. 속리산이 북방한계선인 <노각나무>를 볼 수 있을까 하는 희망에 자꾸만 주변 나무들을 샅샅이 훑어보지만 눈에 보이는 건 대부분 신갈나무 뿐이다. 희방사 계곡에 큰 노각나무가 자라고 있다는데 이 곳은 희방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한 겨울에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는 곳이니 노각나무가 자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난 숲 속을 두리번 거린다.
몇몇 별동대원들과 야생화 탐방을 하는 동안 선두팀은 멀찍이 달아나 버렸다. 조망이 없는 흙산이니 발빠른 대원들은 거칠 것 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고치령에서 약 한 시간 가량 숲길을 따라가니 이정표가 나타난다. 고치령에서 2.9 KM 왔으며 앞으로 갈 국망봉까지 8.2 KM 남았다. ‘마당치’라는 이름은 이곳이 마당처럼 넓은 고갯마루여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자로 표기된 것은 내가 알고 있는 마당과 완전히 다르다. 다름아닌 말마(馬)자에 집당(堂)자를 쓴 것이다. 그렇다면 이 곳에 마구간이 있었다는 말인가? 옛날 삼국시대 신라군을 막으려 고구려에서 이 곳에 쌓은 성터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고구려 군사들은 이 마당치에 마구간을 짓고 군사를 주둔시켜 소백산의 경계를 지켰다는 말일게다. 그러니 이 ‘마당치’라는 것은 도봉산에 있는 마당바위의 마당과는 성격이 다른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마당치(馬堂峙)는 마굿간이 있던 고개인가
고치령에서 이어지는 백두대간길은 나무그늘로 덮인 오솔길이다.
시계를 보지 않아도 시간을 알 수 있는 것은 배가 시장기를 느끼기 때문이다. 특별히 볼 것도 없는 숲길을달려 멀리 달아난 선두팀을 따라 부지런히 걸으면서 점심 먹을 때가 되어간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길을 조금 가다 보니 앞서간 회원님들 녹음이 짙은 숲속에 주황색 알록 달록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12시 40분 넘어 점심을 먹었다. 맑은 날씨에 주변이 선선한데다 간간이 바람까지 시원하게 불어준다. 지난 번 점심때 날벌레 때문에 점심이 유쾌하지 않았으나 오늘은 적당히 배도 고픈데다 주변환경이 좋으니 밥맛이 그야말로 꿀맛이다.
점심식사를 하고 선두팀이 앞서 출발하고 별동대도 뒤 따라 나섰지만 다시 3명만 뒤에 남았다. 간간이 나타나는 <큰앵초>꽃에 반해 연신 사진을 찍어댄다. 벌써 한 달도 훨씬 이전에 보았던 <은대난초>도 꽃이 한 창이다. 목련꽃을 닮아 산목련이라 불리는 <함박꽃나무>꽃이 활짝 피었다. 어느 것은 이미 갈색으로 져버렸고 또 어떤 것은 앙증맞은 꽃봉오리로 나무에 꼿꼿하게 맺혀 있다. 향이 좋아 꽃봉오리를 따서 말린 것으로 차를 끓여 마신다고 한다. 소백산은 온통 함박꽃나무 천지다.
소풍날 점심시간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처음으로 조망이 트인다.
쇠물푸레나무 열매
좀처럼 조망이 터지지 않을 듯 하던 산길이 나무 계단으로 이어지면서 나뭇가지 사이로 잠시 눈길이 트인다. 미세먼지 노이로제로 시달리던 지난 봄날의 트라우마가 아직 남아 있는지 맑기만 한 공기마저 조금 뿌옇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만하면 더 이상 뭘 바라겠는가. 맑다. 시야가 탁 트인다. 저 멀리 이름을 알 수 없는 산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수풀속을 걷다가 이렇게 잠시 나타나는 조망처는 아주 귀한 보물취급을 받는다.
지난 번 황장산 산행을 할 때 온 산을 뒤덮었던 <쇠물푸레나무>꽃이 벌써 아름다운 열매를 달고 있다. 마치 잎이 단풍들듯이 물푸레나무 씨방이 끝에서부터 붉게 물들어간다.
연화동 삼거리
중간 중간 규칙적으로 국립공원측에서 설치한 이정표에 ‘연화동 삼거리’표시가 나타나는데 그 곳까지의 거리가 점점 줄어들더니 마침내 삼거리에 이른다. 주변엔 달리 특이한 것은 없다. 다만 이곳에서 연화동으로 내려갈 수 있는 길이 갈라진다는 표시로 ‘연화동 3.0 km ‘라는 방향표시가 되어 있다.
연화동 삼거리
누룩치
연화동(蓮花洞)은 풍수지리설에서 마치 마을의 모습이 물에 떠 있는 연꽃 모양 (蓮花浮水形)처럼 생겼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정감록에 나와 있는 우리나라 10승지 중 하나로 이 곳에서는 큰 전쟁을 능히 피할 수 있다 하여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으며 큰 인물이 날 수 있는 지형이라고 알려져 있다.
우리가 트럭을 타고 온 좌석리 팬션에서 고치령으로 가다 보면 왼쪽으로 갈라지는 길이 나오는데 연화동은 이 갈림길에서 1 km 안쪽에 위치해 있다. 산이 크고 골이 깊은데다 그 골 안쪽에 물이 풍부하고 농사짓기에 충분한 땅이 있다면 굳이 정감록이 아니더라도 전쟁을 피해서 살 수 있는 조건은 충분히 갖추고 있는 것 같다.
연화동 삼거리에는 <누룩치>가 두어 포기 자라고 있다. 강원도에서는 아주 귀한 나물로 대접받는다는데 산형과 식물은 꽃을 보고도 구분하기 어려운데 나물로 먹으려면 꽃이 피기잔에 채취해야 하는 바, 혹시라도 잘 못되면 안되는지라 이런 산형과는 쉽게 꺽이지 않는다.
연화동 삼거리에서 늦은맥이재까지 가는 길은 급하지 않은 오르막이다. 아니, 고치령에서 시작한 길은 상월봉을 거쳐 국망봉까지 그리고 소백산 최고봉인 비로봉까지 계속 오르막길이라고 보면 된다. 중간에 약간의 내리막 오르막이 반복되더라도 전체적인 모양은 완만한 오르막길이다.
나무숲속으로 이어지는 산길에서 좀처럼 시야가 열리지 않다 보니 눈길은 자연 숲속의 나무와 풀꽃으로 향한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꽃이 더욱 신선하고 빛깔이 선명해진다. <말발도리> 무성한 꽃나무에 잠시 시선을 빼앗더니 <함박꽃나무>가 또 한 번 가랑이를 잡고 늘어진다. <큰앵초>는 점점 더 탐스럽고 빛깔 고운 것이 나타나 산객의 마음을 빼앗는다. 이렇게 지나고 나면 또 한 해가 지나야 만날 수 있는 귀한 꽃들이다.
산행 구간 내내 만났던 함박꽃나무 - 산목련이라고도 부르며 북한에서는 국화로 지정했다 한다.
말발도리 - 물참대에 비해 꽃의 가운데 색이 노란것이 특징이다.
큰앵초 - 고도가 높아질 수록 꽃이 더욱 싱싱하다
고도(高度)차가 나면서 자연이 기온에 차이가 생기고 이는 식물의 성장속도를 조절한다. 아주 자연적인 이치를 우리는 소백산에 와서 새삼 깨닫게 된다. 고치령에서 시작할 때는 벌써 노린재나무꽃이 다 지고 없었는데 연화동 삼거리를 지나면서 하얀꽃이 만발해 있고 또 더 높아 질수록 꽃이 더욱 신선해지고 아직 벌어지지 않은 봉오리도 많이 보인다. 낮은 곳에는 벌써 한 달 전에 져버린 <은대난초>도 이 산길에서는 이미 진 꽃부터 활짝 핀 꽃 그리고 꽃이 피려고 봉오리가 맺힌 것까지 그 상태가 다양하게 나타난다. 정말 자연의 이치는 사람의 머리로는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민백미꽃>도 저 아래에서는 주목을 끌 수 없을 만큼 시들었었는데 얼만큼 높은 곳에서는 흐드러지게 군락을 지어 피어 있다. 나무그늘에 <엉겅퀴>도 이제 막 피기 시작한다.
은대난초
엉겅퀴꽃
민백미꽃 군락
시간에 쫒기듯이 앞서 간 회원들을 부지런히 따라 가려 하지만 좀처럼 나타나지 않더니 마침내 간식을 먹고 있는 별동대를 만났다. 큰 형님께서 참외를 꽁꽁 얼려온 것이 아직도 얼음이 사각거린다. 시원한 나무그늘길을 걸어왔음에도 긴 산행에 지친 몸은 입이 시릴만치 차가운 참외를 순식간에 먹어치운다. 별동대는 평소 느린 황소걸음으로 대열의 맨 뒤에서 여유를 부리며 걸었는데 오늘은 급한 경사도 없는데다 시원한 날씨에 특별한 볼거리도 없으니 말처럼 뛰어간다.
늦은맥이재 ( 1272 미터)
오후 3시 30분 고치령을 떠난지 4시간 30분만에 늦은맥이재에 도착했다. 9 km 거리를 4시간 반만에 왔으니 그리 느린편은 아니지만 큰 대열에서 뒤떨어졌으니 남은 구간 좀 부지런히 걸어야 한다. 한문희 총대장님과 함께 을전(乙田)으로 탈출할 회원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가 함께 인증사진을 찍는다.
늦은맥이재에서 별동대 후미팀 인증사진
한대장님은 어의곡리로 하산
‘늦은맥이재’는 지난 번 걸었던 선달산-갈곶산 사이에 있는 ‘늦은목이’와 같은 의미로 고개가 완만하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우측으로 이어진 어의곡으로 내려가면 산행 날머리인 새밭(乙田)에 닿는다. 2016년 소백산 철쭉 축제때 친구들과 함께 소백산을 거쳐 이곳으로 하산한 적이 있다.
별동대 중에서도 제일 끝에 세 명이 남았다. 국망봉까지 2.1 km 남았고 비로봉까지는 5.2 km 남았다. 비로봉 삼거리에서 어의곡으로 갈라지는 것이니 아직 갈 길이 멀다. 마음속으로는 서둘러 가자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여유를 부려보자 한다.
해발 1,272 미터인 늦은맥이재에서 상월봉(1,394)까지 이어지는 능선길은 야생화 천국이다. 여름꽃과 봄꽃이 함께 자라고 피어난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화려하게 피어 있는 <물참대>다. 이제까지 지나온 길에는 같은 범의귀과 말발도리속에 속하는 <말발도리>가 활짝 피어 있었는데 고도가 100여 미터 높은 이곳에는 아직 물참대가 지배한다니 생명의 세계는 참 신비롭기만 하다.
작년 곰배령에서 처음 보았던 <연령초>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꽃은 이미 다 시들어 곧 열매를 맺을 준비가 되어 있으나 연꽃잎만큼이나 무성한 잎이 보기에 참 좋다. <터리풀>도 꽃망울을 달고 성대한 여름을 준비중이고, 다른 데는 이미 다 져버린 <벌깨덩굴>도 이곳에는 아직 자취를 남기고 있다. <박새>꽃도 곧 피어날 것 같고 <졸방제비꽃>도 간간이 보인다. <은방울꽃>도 나무 그늘에서 귀여운 방울을 울리고 있다.
터리풀 - 곧 꽃망울이 터지면 마치 고운 털이개처럼 보풀보풀한 꽃이 화려하게 피어난다.
졸방제비꽃
은방울꽃
벌깨덩굴
물참대 - 말발도리와 구분이 어렵다.
연령초 군락
박새 - 일주일쯤 후면 꽃이 필 것 같다
그리고 혹시 있을까 하고 두리번 거리던 내 눈에 딱 걸렸다. 키가 15 cm 쯤 되는 꽃대에 사방으로 꽃 가지를 펼치고 위로 올라가면서 가지런하게 밝은 갈색 꽃을 피운 <감자난초>다. 2016년 5월말 늦은맥이재에서 을전으로 내려가는 길에 바위 아래에 앉아 있는 감자난초를 처음 보았다. 오늘 산길에서 혹시 만날까 하는 기대를 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니 더욱 반갑다. 꽃은 해마다 같은 시기에 피지만 꼭 그 시기에 꽃 피는 곳을 찾아가야 볼 수 있다. 그러니 실제로 흔한 꽃이 아니라면 해마다 만나는건 쉬운 일이 아니다. 뿌리 구근이 감자처럼 생겼다 하여 감자난초라 불리는 난초과 여러해살이 풀이다. 꽃말인 ‘숲 속의 요정’처럼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기품도 있어 보이고 귀여워 보이기도 한다.
숲속의 요정 감자난초
상월봉 ( 1396.4 )
선명한 색상의 <큰앵초>꽃에 빠져 연신 사진을 찍으면서 상월봉에 오르는데 위에서 낯선 외국인이 혼자서 내려온다. 갈색 수염에 키가 훤칠하게 크고 작은 배낭을 매고 있다. 백두대간을 외국인들이 찾는다는 사실에 그가 어떻게 해서 대간길을 찾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10여분 같이 얘기하면서 궁금한 점을 물어봤다. 덴마크에서 5월 20일 서울을 거쳐 지리산으로 내려가 백두대간을 시작했으며 약 2개월 일정으로 백두대간을 완주하고 7월 20일경 다시 덴마크로 돌아갈 예정이라 한다. 결혼을 하지 않아 가족이 없어 홀가분하게 혼자서 외국 트레킹을 할 수 있다는 그는 평소 약 4~5일 일정으로 외국의 산을 찾기도 하지만 이렇게 긴 기간동안 산줄기 탐방을 하는 것은 처음이라 한다. 뉴질랜드 산악인 로버트 쉐퍼드에 대해 잘 알고 또 그가 쓴 책을 읽었다는 그는 이번 대간을 완주하고 나중에 통일이 되면 북한쪽 대간길은 가을 단풍이 물들었을 때 해보고 싶다고 한다. 민박과 대피소 또는 비박까지 하면서 대간을 이어가는 그는 산행길에서 만나는 한국사람들의 따뜻한 인정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가 무사히 대간산행을 완주하고 좋은 추억을 담고 돌아가길 기원한다.
상월봉 아래 무리지어 피어 있는 큰앵초꽃
상월봉 아래 두루미풀 군락지
상월봉에서 바라본 지나온 길
그리고 앞으로 갈 방향 -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어렵다.
상월봉에 오르니 주변 산들이 모두 내려다 보이는데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지면서 안개가 몰려온다. 바람은 눈으로 볼 수 없으나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바람이 부는 것을 알 수 있고 하늘에 구름이 흘러가는 것을 보고 바람을 볼 수 있다. 상월암에서 내려다 보이는 산안개는 바람에 이끌려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 국망봉과 불과 1 km 남짓 떨어져 있으니 넓게 펼쳐진 소백산 등줄기도 시원스레 보일만 한데 그 모든 풍광을 하얀 안개가 모두 가려버렸다. 자연을 탓할 수 없으니 내 운수 탓을 할 수 밖에 없다.
녹음이 우거진 산을 안개가 집어 삼키고 내가 서 있는 바위 봉우리마저 차지하려 바람을 타고 몰려오는 풍경이 장관이다. 일기예보대로 정말 비라도 내리려는 것인가. 언뜻 팔뚝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느낌이 든다. 앞서 간 대원들은 어디까지 갔는지 안개에 묻혀 모습도 보이지 않고 바람소리에 부딪혀 아무 기척도 들리지 않는다. 어쩌면 소리도 시야도 미치지 못할 만큼 멀리 갔을지도 모르겠다.
상월봉 정상 풍경 - 구인사를 창건한 상월 큰스님의 법명을 따서 지었다는 설이 있다.
상월봉은 전에 그 봉우리의 높이인 1396.4 봉으로 불렸는데 누군가 상월봉으로 이름을 부른 이후 이제는 그대로 굳어진 모양이다. 이름의 유래는 이 산 아래 있는 구인사(救仁寺)를 창건한 상월 큰스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라 한다. 상월봉에 이르기 전 늦은맥이재에서 분기하는 온달기맥을 타고 가다 보면 구인사가 있어 소백종주 코스로 죽령에서 구인사까지 ‘죽구종주’가 이어진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무명봉이 상월봉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국망봉(國望峰 1420.8 )
상월봉에서 국망봉까지 이어지는 평탄한 길은 철쭉과 야생화가 가득한 천상의 화원이다. 이미 철 지난 철쭉은 잎이 무성하고 철없는 꽃 몇 그루가 남아서 늦게 찾은 산객에게 위안을 준다. 이 소백산의 철쭉은 인공적으로 식재한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자라는 꽃이라 근래 들어 여러 지방의 지자체에서 조성하는 꽃축제와는 또 다른 느낌을 주는 곳이다.
철쭉나무 그늘에는 <풀솜대>가 끝없이 넓게 자리하고 있다. 날씨가 흐린탓에 꽃봉오리를 바짝 오무리고 있는 것은 <흰꽃이질풀>인가. 세잎종덩굴과 비슷하지만 잎과 꽃에도 잔털이 나 있는 것은 꽃 색깔에 따라 <누른종덩굴>이라고 부른다. 노란 <미나리아재비>꽃도 보이고 <범꼬리>는 이제 피기 시작이다. 온갖 꽃들이 흐린 날씨에 제 본래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해 아우성이다.
야생화 풀밭 - 한국전쟁 때 치열한 접전이 있었던 곳인가 ? 지뢰지대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흰꽃이질풀
국망봉으로 향하는 길 - 철쭉터널이다.
철쭉나무 아래 풀솜대 군락이 펼쳐져 있다.
미나리아재비
누른종덩굴 - 세잎종덩굴과 동일한 것으로 본다.
범꼬리 - 호랑이꼬리라는 말인데 아직 활짝 피지 않았다.
오후 4시 40분 마침내 오늘 산행의 대표산인 국망봉(國望峰 1420.8m)에 도착했다. 시간이 넉넉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지난 번 비로봉 산행 때보다 더 빡빡하다. 어의곡 삼거리에서 새밭까지 하산길도 만만치 않으니 마음이 급해진다. 주변은 짙은 안개로 인해 벌써 해가 진 것처럼 어둑어둑해진다. 마의태자가 신라땅을 떠나 개골산으로 가면서 소백산 봉우리에 올라 자신이 살던 경주쪽을 바라보면서 나라 잃은 슬픔을 한탄했다 하여 국망봉이라 불렀다 한다. 신라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항복한 후 태자 김일(金鎰)은 아버지 경순왕의 뜻에 반대하였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 없음을 깨닫고 삼베옷을 입고 속세를 떠난 인물이다.
월악산 자락에 자신의 누이 덕주공주를 남겨두고 홀홀 단신 산길을 걷는 마의태자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그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마다 하나의 이야기가 생겨난 걸 보아 그의 슬픔과 분노는 무척이나 컸을 것이다. 그런 분노와 슬픔은 결국 좌절로 이어지고 그를 맞이했던 각 고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이야기가 전해지고 그 이야기는 고스란히 전설이 되어 버렸다. 이런 저런 수 많은 전설과 역사를 간직한 소백산은 짙은 안개에 싸이고 귓전을 울리는 바람소리에 날이 저물어간다.
4시 40분 국망봉에 도착했다.
비로봉 방향으로 2.7 km 더 가야 어의곡 삼거리에 도착한다.
국망봉을 지나면 금방 어의곡 삼거리가 나올 것 같았는데 생각과 달리 산길이 한동안 이어진다. 국망봉에서어의곡 삼거리까지 2.7 km 나 된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도 한 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다. 바쁜 마음과 달리 발걸음은 느려진다. 그 중간에 있는 초암사 갈림길을 지나고 길가에 노란 꽃이 피어 있는 나무가 눈에 띈다. 지난 번 천동계곡으로 갈라지는 데서 보았던 ‘털괴불나무’라고 인지했던 것과 똑 같은 나무에 꽃이 피어 있다. 그 때는 꽃봉오리만 달려 있었는데 2 주일 사이에 만개한 것이다. <구슬댕댕이>라고 불리는 인동과 인동속 낙엽 활엽 관목이다. 풀 나무의 이름을 짓는 것도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구슬댕댕이라는 이름은 열매가 구슬처럼 동그랗게 생겼다는 것을 의미하고 댕댕이라는 것은 그런 열매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어서 그런건가? 나무와 잎 그리고 꽃에도 짧은 털이 보송보송 나 있어 정말 털괴불나무로 착각할만 하다. 둘 다 인동과에 속한다.
구슬댕댕이 - 내 생애 처음 보는 꽃이다.
새밭은 乙田인가 新田인가
오후 6시 더욱 짙은 안개에 음산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어의곡 삼거리에 도착했다. 날이 길어졌다고 해도 요즘 오후 7시 30분쯤이면 해가 지는데 주차장까지 4.7 km 남았으니 빠른 걸음으로 걷더라도 한 시간 반 정도는 잡아야 할 것 같다. 앞서 가던 큰 형님이 걱정이 되시는지 전화해서 길을 독촉하신다. 나름대로 빠른 걸음으로 걷지만 안개속에서 심리적인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가보다.
어의곡 삼거리
이제 4.7 km 내리막 길만 남았다.
여러 번 걸었던 길이라 풍경이 낯에 익었어도 물리적인 거리를 좁힐 수는 없는 법이다. 평탄한 길은 조금 더 빠르게 걷다가 경사가 급한 곳은 속도를 줄인다. 나무 아래에는 <눈개승마>꽃이 하얗게 피어 있다. 지난 회차에 계곡을 흰색으로 가득 메웠던 물참대와 고광나무는 꽃이 다 져버리고 말발도리 꽃나무 몇그루가 피어 있다. 마음먹기에 따라 축지법도 가능한건가. 거리목에 표시된 숫자가 점점 줄어들더니 마침내 주차장까지 1.2 km 남았다. 산 중턱 아래로는 안개가 걷혀 남은 햇살이 비추니 마음에 여유도 생겨난다.
눈개승마
오후 7시 30분 마침내 새밭(乙田)에 도착했다. 사방이 조용하다. 아직 해는 쥐꼬리만큼 남아 있는데 골짜기가 넓으니 산속보다도 오히려 밝다. 미리 내려와 뒤풀이 중인 대원들 틈에 앉아 허겁 지겁 차려진 음식을 삼키고 화장실에 가서 간단히 씻고 옷을 갈아 입고 빈 물통에 약수까지 담아 승차하니 시간이 꼭 맞는다.
어의곡리 새밭 주차장이 보인다.
간단한 하산 뒤풀이 후에 새밭을 출발했다.
점차 어둠속에 잠기는 을전을 뒤로 하고 피곤한 몸을 버스 의자에 누이고 눈을 감는다. 이렇게 몸을 맡기고 두어시간 앉아 있으면 서울에 도착한다. 마을 이름을 새밭이라고도 하고 한자로 乙田이라고도 한다. 난 두 개의 지명이 다 다른 것인줄 알았었다. 내가 어렸을 때 아부지는 앞산 잔솔밭을 개간하여 큰 밭을 일구었다. 땅 한 평만 파도 돌이 두어 바지개 나올 만치 험한 땅이었다. 사람을 사기도 하고 농사일이 바쁠 때는 쉬기도 하면서 여러 해 동안 공사를 했나보다. 마침내 계단식으로 구획이 나눠지긴 했지만 네모 반듯한 밭이 완성되었을 때 내 어린 눈에는 엄청난 일처럼 여겨졌다. 그 밭을 우리는 새밭이라 불렀다. 새로 일군 밭이라는 뜻이다. 마을 사람들도 그렇게 불렀다. 달리 부를 이름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새로 일군 밭이니 당연히 새밭인 것이다.
새밭을 굳이 한자로 쓴다면 신전(新田)이라고 써야 할 것이다. 을전(乙田)이라고 쓰지는 않는다. 만일 실제로 이 곳에 새(鳥)가 많아서 새가 많은 동네라는 의미로 새밭이라 불렀다면 화악산에 있는 조무락골처럼 좀 더 운치 있는 이름도 있었을 터이다. 내 짧은 식견으로는 을전이라는 지명은 우리말을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그 뜻이 잘못 전해진 대표적인 사례라고 생각된다. 이는 지난 번 백학산을 걸을 때 지났던 “개고개”의 명칭 변경과 비슷하다. 개고개는 원래 ‘옛고개’였다. 이를 한자화하는 과정에서 ‘옛’구(舊)자를 써서 누군가 ‘구(舊)고개’라 불렀는데 발음이 똑 같은 개구(拘)로 오기하게 되었고 이를 다시 우리말로 적을 때 마침내 개고개가 된 것이다. 이러한 지명의 오류는 일제가 침탈의 수단으로 실시한 토지정리에서 한글로 된 우리말 지명을 모두 한자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우리말의 뜻을 제대로된 한자로 표기한다고 했지만 수 많은 지명을 바꾸면서 또한 엄청난 오류가 발생한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에 젖은 채 잠시 잠이 들었나 보다. 깨어보니 창 밖에 장대비가 내리다가 그친다. 버스에 설치된 티비에서는 또 김원봉의 서훈 문제가 자막으로 나타난다. 남과 북이 서로 대치한 채 영원히 싸워대면 유리한 사람도 있다. 갈등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입지를 넓히고 공고히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바라본다면 우리 민족의 안위를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외적에 맞서 싸운 공로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앞으로 이와 유사한 일이 생겼을 때 과연 정의를 위해 자신의 희생을 감수할 것이냐 아니면 뒷전에 서서 개인적인 이익이나 챙길것이냐 하는 교훈을 내포하고 있는 문제라 할 수 있다.
여주 휴게소에서 잠시 쉬고 밤 10시 30분 서울에 도착했다. 평소 당일 산행 때에 비해 좀 늦긴 했지만 모두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집으로 갈 수 있는 시간이다. 비가 그치고 기온은 서늘한 서울이다.
첫댓글 ㅎ무심히 지나친 대간길을 해박하게 풀어주셨네요
형님을 처음 만났던 날이 새삼 그리워집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박형 덕분에 대간산행하는 영광을갖게 되었지요. 늘 안전산행하시고 오래오래 산과 친하게 지냅시다.
그저 꽃이라고만 생각했던 이름 몰랐던
꽃이름 하나하나 넘 감사합니다
알아가는 기쁨을 주셔서 항상 감사합니다
함께 알아가고 즐기는 산행 대간 완주하는 날까지 힘내세요. 종착역이 보일듯 말듯 합니다.
갖가지 야생화와 역사공부~~~
글따라 다시 한번 행복한 산행을 했읍니다.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 함께 읽어쥐서 감사합니다. 우리의 작은 발자국도 지나고 나면 아름다운 추억이 되고 또 작은 역사가 되겠지요.
후미에서 대원들 챙기면서 구석구석 야생화 탐색해 사진찍어 올리고.상세한 산행기까지
별동대 작가님 너무너무 수고 많으셨습니다.감사 합니다.
형님이 우릴 챙기셨지 우리가 한게 뭐가 있남요. ㅎ 힘든 여정이지만 조그마한 의미라도 찾아보고자 시작한 일입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 힘내서 완주해야지요. 감사합니다.
대간길 다시 걸어온것 갇네요
잘보고 갑니다
별동대장님 덕분에 별 탈없이 뚜벅 뚜벅 걸어갑니다. 대간길 다 걷고 지나간 길 되돌아 보면 잊혀진 길이 다시 보이겠지요. 안개에 휩싸인 소백산도 훤히 보일라나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