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과 같이
박 완 서
제과점은 아래위층이 다 만원이었고 매우 시끄러웠다.
입을 오므리고 아이스크림을 조금씩 떠먹는 여자, 찹쌀떡을 짜닥짜닥 씹는 여자, 우유에다 설탕을 듬뿍 퍼넣고 휘젓는 여자…‥ 모든 여자를 하나하나 살펴보았으나 아내는 아직 와 있지 않았다.
나는 차라리 잘됐다 싶어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꺾이느라고 생긴 한 평도 못 되는 평지에서 아내를 기다리기로 했다.
나는 모든 나이 든 남자가 다 그렇듯이 제과점이란 데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내가 오는 즉시 자리가 없다는 핑계로 딴 오붓한 장소로 옮겨갈 참이었다.
퇴근 후에 만나자고 전화 걸면서 나의 단골 다방 이름을 대니까 아내는 말했었다.
“어머머…… 우리가 뭐 연애 거나, 그딴 비싼 찻집에서 만나게. 빵집에서 만나요, 빵집 응? 괜찮지? 우리도 실속 자려야 해요, 실속.”
아내는 국민학교 선생답게 그런 말을 조금도 궁상맞지 않게 달래고 타이르는 투로 할 줄 알았다. 그럴 때 나는 꼼짝없이 말 잘 듣는 아이가 되고 만다.
반평 미만의 평지도 나의 독차지는 되지 못했다.
오르내리는 사람은 치지 않더라도 그곳엔 공중전화와 거울이 있었으니 붐빌 이유는 충분했다. 식물의 향일성보다 더 자연스럽 게 모든 여자들은 전화와 거울 지향적이구나 새삼스럽게 감탄하면서 나는 전화와 거울을 이용하는 여자들 사이에서 만원버스에 탄 것처럼 부대끼며 아내를 기다렸다.
어쩌다 잠깐씩 거울 앞이 비면서 나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얼굴보다 나의 몸 한가운데서 번쩍거리는 명문대학 버클이 먼저 보여서 무안당한 것처럼 얼른 눈길을 돌렸다.
그놈의 버클은 나의 겸손한 태도와는 상관없이 거만했고 언제고 마음 내킬 때는 그의 주인을 주리를 틀 권리라도 있는 것처럼 음흉스러워 보였다.
나는 그 번쩍거리는 것에 원한이 맺힌 나머지 경멸하는 척이라도 하고 있었지만, 그것으로부터 놓여난 자신은 상상만 해도 사북이 빠져 달아난 가위나 부채처럼 무용 무력해지는 데는 아연할밖에 없었다.
고작 화투짝만한 쇠붙이가 나의 몸뚱이와 체면과 자존심을 엉구어 남의 앞에 펼쳐 보이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나의 사북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쉴새없이 열리고 닫히는 자동문 안으로 아내가 두리번대면서 나타났다. 나는 아침에 헤어진 아내가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반가워서 계단을 곤두박질치듯 뛰어내렸다.
“그냥 나가자. 자리가 없어.”
나는 아내의 등을 밀어 내가 아는 가까운 찻집으로 갔다. 아내는 찻집 앞에서 눈가에 인정스러운 잔주름을 지으며 또 한번 가벼운 앙탈을 했다.
“바로 불고깃집으로 가자 뭐.”
나는 무직자답게 곧잘 울적해하거나 쓸쓸해하길 잘했고 그럴 때마다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퇴근길에 밖에서 만나자고 보챘었다. 그러면 아내는 아내대로 직업여성다운 자격지심은 있어서 평소 나의 조석 시중을 소홀히 한 것을 측은해하면서 불고기나 갈비 따위를 나에게 먹이지 못해했었다.
오늘도 그럴 작정하고 나온 모양이다.
찻집의 후미진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담배 먼저 피워물고 입가의 떠도는 웃음에 연막을 치려했다.
그러나 아내는 못 속인다. 아내는 국민학교 선생이고 나는 국민학생만큼이나 순진하다.
“뭐 좋은 일 있었구나? 그치?”
“또 국민학교 선생 티 내고 있네.”
“이왕이면 연상의 여인 티라고 그러렴.”
“그게 그거지 뭐.”
“다를걸.”
“어떻게?”
“연상의 여인 쪽이 훨씬 섹시하잖아.”
“섹시한 것 좋아하네.”
분위기가 이렇게 점잖지 못하게 풀리자 그 얘기를 가볍게 하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나는 그 얘기를 만날 백점만 받는 아이가 또 백점 받았다는 소리 하듯이 시들하게 하고 싶었다.
“나 취직됐어.”
그러나 결과적으로 만날 빵점만 받는 아이가 어디서부터 비롯된지 모를 실수로 백점 받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말았고, 아내 역시 그런 아이 대하듯 역 력하게 연민과 의심을 나타냈다.
아내한테 의지하고 살아온 내 오랜 습관 때문에 아내의 못미더워하는 얼굴을 보자 나도 내 취직이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정말이야. 당장 내일부터 출근하래.”
나는 뱃속으로부터 절규했다.
“취직 시험은 언제 봤는데?”
“시험이고 뭐고 없이 취직됐어. 대학 선배를 만났는데 자기하고 같이 일하자고 해서…….”
“아, 알았다. 유령회사구나. 사장, 상무, 전무…… 그런 거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꾸민 유령회사. 그럼 자기도 전무나 부장쯤은 시켜주겠다.”
아내가 신바람이 나서 나불댔다.
“아냐, 적어도 진흥기업이야.”
“뭐라고?”
아내는 나의 취직보다는 정신상태가 더 의심스럽다는 투로 째지는 소리를 냈다.
나는 아내가 내 취직을 믿어주지 않으면 내 취직이 수포로 돌아갈 것 같은 위기의식마저 느끼며 허둥지둥 취직이 된 경위를 설명했다.
경위라야 간단했다. 아내의 권유도 있고 놀고먹기도 지겨워 새 학기엔 대학원에나 비비고 들어가볼까 하고 책 몇 권 끼고 대학가에서 빌빌거리던 중 K교수를 만났고, 내 사정을 대강은 짐작하고 있는 K교수에 의해 진흥기업의 Y선배를 찾아가보라는 희소식을 들었다.
Y선배는 대뜸, 갓 졸업 할 빠릿빠릿한 녀석 하나 보내달랬더니 옛날 고렷적 60년대 학번짜리를 보내는 걸 보니 대한민국 사람 값 올라간 것 하나 알아줘야겠다고 한바탕 투덜대고 나서 이력서나 가져와보라더니 이력서 가져가자 내일부터 출근하라고 했던 것이다.
“시험도 없이 이력서 한 장으로?”
“글쎄 그렇다니까.”
“Y선배가 진흥기업 사장이라도 되나?”
“사장은 무슨…… 그래도 과장쯤은 되나봐. 출판과에선 제일 높은 자리에 있는 걸로 봐서.”
나는 출판과가 별관 같은 허술한 건물의 작고 초라한 방이었고, Y선배 외에 여직원이 두 명 있을 뿐이었단 소리는 빼먹고 말했다.
“출판과라니? 진흥기업이 언제부터 출판업에다 손을 댔어?”
아내는 꼬치꼬치 의심만 하려 들었다.
“출판업이 아니라 자사 제품을 피알하기 위한 홍보책자를 하나 내고 있었는데 사세가 확장됨에 따라 부수도 늘리고 매수도 늘리고 체제도 싹 바꾼다나봐. 제품 피알뿐 아니라 중역 이하 사원 공원까지의 대화의 광장 구실을 하도록 말야.”
나는 제법 사무적인 용어로 말했다.
“자긴 경험도 없지만 그런 게 적성에나 맞을까 몰라?”
아내가 많이 누그러지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지금 내 형편이 더운밥 식은밥 가리게 됐어?”
“내가 자기 조금이라도 불편할까봐 그렇게 신경 써줬는데도 불편했었나보지?”
“아냐, 자기 땜에 불편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 다만 나도 어디메고 매이고 싶었을 뿐이야.”
나는 약간 처량하게 말했다.
우리는 곧 로스구이집으로 옮겨갔다. 아내는 말없이 고기를 상추에 싸서 아귀아귀 먹었다. 나는 혼자서 소주를 조금씩 조금씩 마셨다.
정신은 차갑게 가라앉고 눈망울만 뜨겁 게 달아올랐다. 뜨거운 눈망울에 들어오는 아내의 얼굴은 막걸리에 반죽한 밀가루 반죽처럼 자유로워졌다. 함부로 부풀어오르기도 했고 유연하게 흘러내리기도 했다. 눈 코 입이 거기에 감쪽같이 함몰되기도 했고, 흐느적흐느적 부유하기도 했고, 제멋대로 이탈하기도 했다. 요지부동 확실한 건 표정뿐이었다. 표정이란 안색이나 이목구비와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건 아닌가보다.
친절하고 인자하고 잔소리가 하고 싶어 죽겠는 아내의 국민학교 선생다운 표정은 무질서하게 흐느적대는 이목구비와는 상관없이 더욱 정돈되고 세련되어 나에게로 육박했다.
“자기 타격받지 않도록 미리 어느 정도는 각오하고 있는 게 좋을 거야. 진홍기업이라면 그래도 알아주는 기업첸데 이력서 하나로 사람을 호락호락 채용할 리가 없잖아. 곧 산더미만한 구비서류를 해들이라고 할 거야.”
나는 아내의 방정 맞은 주둥이를 훑어놓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꺾고 경청했다.
아내의 걱정은 너무도 지당했다. 여직껏 어디 매이고 싶다는 나의 간절한 소망이 번번이 거부당한 건 순전히 구비서류라는 것 때문이었으니까.
이력서, 주민등록등본, 호적등본, 졸업증명서, 병역증명, 두 명의 재정보증서와 거기 따른 재산세 과세증명과 인감증명, 지정 병원에서의 건강진단서, 신원조회서, 직원신상카드, 서약서, 추천서, 이 정도는 기본적인 거고 회사에 따라서는 몇 가지씩의 군더더기를 더 요구하기도 한다. 마치 그것이 사람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도 되는 것처럼 크고 톤튼한 기업체일수록 더 다양한 구비서류를 원했다.
그러나 나는 나에게 빛나는 버클을 선사한 대학에 재학할 때, 젊은 혈기로 저지른 일시적인 과오 때문에 만족한 구비서류를 갖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 마음속에서 그 과오가 깨끗이 말소된 지는 이미 오래다. 그때 저항하고 어지럽힌 사회질서에 지금은 빌붙고 매이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것만으로도 그 증거는 충분했다.
그러나 나를 따라다니는 구비서류는 오직 나의 과오만을 증명했다. 몇 번 서류전형에 낙방해보고 나서는, 필기시험에 붙고 나서도 구비서류만 해들이라면 미리 겁을 먹고 슬그머니 입사자격을 포기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엔 나에 대해 알 만큼 알고 있는 K교수가 소개한 거고 나는 밝은 전망을 갖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나를 증명하기 위한 산더미만한 서류뭉치에 가위눌려 신음하다가 아내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눈을 떴다. 새벽이었다.
“나 때문에 아침잠 설쳤구나.”
“아냐, 벌써 깨 있었어.”
“왜? 잠꾸러기가.”
“자기가 첫 출근한다고 생각하니 잠이 안 와. 어려서 소풍 가던 날 아침보다 더 좋아. 이 가슴 두근대는 것 좀 봐줘.”
아내가 나의 손을 끌어다가 그의 부드럽고 풍부한 가슴에 얹었다. 나는 아내를 안았다. 내 품속에서 연상의 여인의 몸은 갓난아기처럼 작게 오므라들었고, 마침내 사탕처럼 달콤하게 녹으면서 내 몸 속으로 잦아들었다.
아침상을 봐오고 넥타이를 골라주고 하면서 내내 아내의 얼굴은 달덩이처럼 환했고 저녁엔 나보다 먼저 퇴근해서 저녁을 지어놓고 한복까지 차려입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지나가는 말처럼 아무 일 없었어, 하고 물어볼 때, 아내의 미간엔 눈치꾸러기 같은 그늘이 빠르게 지나갔다.
나는 아내를 안심시키기 위해 나의 일이 얼마나 쉽고 즐거운 일인가, 그리고 보람 있는 일인가를 설명했고, 출판과 분위기는 가족적이고, Y선배는 관대하단 얘기를 했다.
“사장님한테 인사했어요?”
쾌청한 날 하늘을 나는 비행기의 그늘이 작은 뜰을 지나듯 그렇게 순식간에 어떤 그늘이 또 한번 미간을 스치며 아내는 엉뚱한 질문을 했다. 나는 반사작용처럼 날쌔게 거짓말을 했다.
“사장님은 현재 외유중이야. 국내에는 일 년이면 한두 달도 없다나봐.”
그것은 어쩌면 거짓말이 아닐지도 몰랐다. 사장의 얼굴은커녕 거대한 진흥기업 본관 건물 어디에 사장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했고, 국내에 있는지 국외에 있는지도 알지 못했고, 내가 사장과 관계를 맺고 있는 건지 아닌 건지 그것조차 아직 애매했다. 나의 소속감은 아직도 불안했던 것이다.
“그러면 중역들하고라도 인사를 했을 거 아냐?”
“그럼, 그건 했고말고. 악수까지 한걸.”
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실상 Y선배가 인사시켜준 건 홍보 담당 이사 한 사람뿐이었고 작달막하고 배가 불쑥 튀어나온 그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고 다른 한 손으로 내 등을 두드리며 잘해보게나, 했던 것이다.
잠깐 동안이 었지만 그의 튀어나온 아랫배가 내 불두덩에 닿았을 때의 느낌은 과히 기분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진홍기업에 대해 품을 수 있는 유일한 친화감의 촉감이기도 했다.
낙천적인 아내는 곧 마음을 놓고 반찬이 유난스러운 저녁상을 들여왔다.
“나 오늘 촌지 받았걸랑, 그래서 낭비 좀 했다 뭐.”
어쩌고 하면서 좋은 반찬에 대한 변명까지 했다.
나는 앞으로 내가 만들게 될 『진흥』이란 책자에 대한 포부를 이것저것 두서없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책자가 여직껏은 얼마나 보잘것 없었단 소리도 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글쎄 부피가 신입사원들이 해들여가는 그 끔찍한 구비서류의 부피보다 훨씬 얇더라니까. 그까짓 것도 책이랍시고 몇 사람씩 붙어서 만들고 월급을 받아먹 었으니.”
나는 내가 회사의 대주주라도 되는 듯이 한탄하는 김에 무심히 구비서류라는 소리를 입에 올리고 말았다. 그 소리를 하기가 잘못이었다. 나는 곧 우울해지고 말았다.
구비서류에 대한 두려움은 결코 없어진 게 아니었다. 의식의 밑바닥에 가까스로 가라앉아 있다가 툭 건드리기가 무섭게 둥실 떠오른 데 지나지 않았다.
피곤하다는 핑계로 일찍 자리에 들었다. 아내는 나의 피곤조차 대견한지 탓하지 않고 밤늦게까지 콧노래를 흥얼대며 이것저것 집 안을 챙겼다.
겨우겨우 잠들었으나 다시 구비서류에 가위눌리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구비서류는 자꾸자꾸 불어서 팔만대장경만큼이나 엄청나게 불어나 나는 그 사이에서 압사하기 직전에 깨어났다.
제풀에 깨어났는지 아내는 곤히 잠들어 있었고, 아직 오밤중이었다.
나는 담배를 빨면서 빨간 담뱃불이 밝혀주는 시야 속에서 아내의 눈가의 주름살을 헤었다.
회사일은 바쁘지도 재미나지도 않았다. 나는 나를 채용함으로써 늘어난 일만 하면 되었다. 그것은 사원이나 공원들로부터 들어오는 원고를 읽고 쓸 만한 것을 골라내는 일이었고, 몇몇 중역과 간부로부터 원고를 받아내는 일도 있었다. 중역한테 하는 원고청탁은 Y선배가 미리 해놓았으니 염려 말라더니, 공원들 원고의 재교가 나올 때까지도 들어오지 않았다.
Y선배가 걱정하는 눈치가 없길래 나도 걱정하지 않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Y선배가 나한테 그걸 대필하라고 했다.
중역은 쪽지에다 대강의 요지만 써주면서 알아서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중역들이란 바쁘니까. 그리고 무식하니까 어쩌겠나. 참, 원고료도 지불하기로 돼 있는데 그 양반들이야 도장만 찍겠지 양심상 그걸 타먹으려 들겠나. 액수나 크다면 또 몰라. 쥐꼬리만도 못한 거. 그렇지만 우리의 부수입으로야 약소한 대로 마달 것까진 없지.”
대필은 Y선배하고 나하고 두 꼭지씩 나누어 하기로 했다.
쪽지에 씌어 있는 대강의 요지는 공원들의 오락시설 후생시설에 대한 애매한 약속, 처우개선에 대한 매우 낙관적이고도 불투명한 전망, 회사가 이만큼 사원들 생각을 하고 있으니 사윈들도 회사를 위해 분골쇄신해주기 바란다는 명령조의 당부 등으로 돼 있었다.
“선배님 이런 건 공갈체로 써야 합니까, 아부체로 써야 합니까?”
“공갈이 정작이고, 아부체로 당의(糖衣)를 입히면 되는 거야. 알겠나?”
나는 뭐를 알았는지도 모르면서 알겠다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두 꼭지 합해서 삼십 장 정도 원고라 우습게 봤더니 그게 아니었다.
온종일 끙끙대며 파지만 내고 있는 내 꼴이 딱했던지 Y선배는 본관 지하에 있는 도서실을 가르쳐주면서 거기 가서 쓰라고 했다.
도서실은 썰렁하니 넓기만 했지 장서는 빈약하고 이용하는 사람도 없어서 나의 독차지였다. 나는 거기서 온종일 국내에서 발간되는 모든 종류의 주간지를 통독했다. 일거리는 집에까지 가져 갔다.
나는 아내에게 시시한 일거리를 집까지 끌어들여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실은 은근히 내가 바쁜 사람이라는 걸 과시하고 싶었다. 밤새도록 북북 원고지를 찢어내기에 바쁜 나에게 아내는 진한 커피를 자주 끓여 대령했다. 그런 아내의 얼굴은 대문호를 남편으로 모시기라도 한 것처럼 행복하고 자랑스러워 보였다.
밤을 거의 새우다시피 했어도 한 꼭지밖에 못 썼다. 그러나 그 한 꼭지가 실마리가 되어 나머지 한 꼭지는 수월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오전중에 그 일을 끝마쳐 인쇄소에 넘길 작정으로 일찍 출근해 곧바로 도서실로 갔다.
바로 사원들의 출근시간이었다. 본관 현관에는 직원들의 출근 시간을 단 일 분도 틀리지 않게 정확하게 기록하는 기계가 설치돼 있었다.
나는 물끄러미 직원들이 허둥지둥 자기의 출근카드를 그 기계 속에 밀어넣었다가 꺼내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직원들은 하나같이 굴욕적인 얼굴을 하고 그 짓을 하고 있었다.
그 기계가 거기 설치된 지는 오래지 않다고 하지만 이미 악명은 높았다. 식당이나 다방 같은 데서 직원들이 그 기계를 욕하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단 일 분만 늦어도 지각으로 기록돼 봉급에 영향을 주니 더러워서 살겠르냐는 거였다.
인간이 기계의 기계다움, 즉 그 비인간성을 저주한다는 건 창피한 일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한결 더 불쌍해 보였다.
우리 출판과는 왠지 그 기계하곤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그 기계가 작동하는 것을 필요 이상 오래 지켜본 것은 기계가 신기해서도 기계에 매인 인간들의 모습이 불쌍해서도 아니었다.
나는 부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무직이었던 동안 출근하는 사람만 보면 느끼던 것과 똑같은 속살이 아린 선망을 그 기계에 매인 인간들에게 느끼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느끼고 있다고 깨닫자 깜짝 놀랄 만큼 그것은 자신에게 있어서도 뜻밖의 감정이었다.
나는 한결 김빠진 기분으로 도서실에서 나머지 한 꼭지의 원고를 끝마쳤다. 도서실은 낯설고 썰렁했다. 쓸개줍처럼 고약한 고독감이 울컥 치밀었다. 구비서류를 해들이라면 어쩌나 하는 나날의 두려움은 실은 두려움이 아니라 기다림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날 나는 일찍 퇴근했다. 그 괴상한 기계가 망보고 있는 본관 건물에서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울적하고 쓸쓸했기 때문에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퇴근길에 밖에서 만나자고 그럴 참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직자 시절의 버릇이었다고 깨닫자 그러기가 갑자기 싫었다. 제기랄, 울적하고 쓸쓸할 자유마지 없구나, 하면서 길에다 가래침이라도 뱉으려는데 저만치서 아는 얼굴이 오고 있었다. 실은 얼굴 먼저 온 게 아니라 그의 몸 한가운데서 번쩍이는 나의 것과 같은 버클 먼저 알아보고 얼굴로 더듬어 올라갔더니 동기였다.
나는 쭈뻣대다 말고 이내 무직자가 아닌 것에 생각이 미치면서 당당해졌다.
“야아, 오래간만이다.”
그와 나는 동시에 말하고 손을 아프게 쥐고 흔들었다. 애써 기회를 만들어 만날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소식은 가끔 듣고 있었다. 그도 아마 내 소식을 가끔은 듣고 지냈으리라.
“그래, 어디 있니? 넌.”
그가 손을 쥔 채 말했다.
“진홍기업에.”
나는 시들하게 말했지만 속으론 이래서 취직은 대기업에 하고 볼 거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떳떳했던 것이다.
“그래, 거 참 잘됐다. 축하한다. 그러잖아도 너만 안정이 안 됐다고 걱정들 했는데…….”
“고맙다. 근데 넌 미국을 갔다 온 거냐? 이제부터 갈 거냐?”
나는 본의 아니게 비꼬는 투로 말했다. 그는 대학 시절에 누구보다도 뚜렷한 목표를 설정해놓고 공부만 하던 친구였다. 그 목표란 졸업하자마자 미국 가서 서른 살 안짝에 박사학위 따오는 거였다. 졸업하자마자 미국 대신 군대 먼저 간 것은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제대하고도 벌써 몇 년짼데 곧 떠난다는 소문만 심심찮게 퍼뜨리고 있었다.
“야 인마, 이 땅 떠나기가 그렇게 쉬운 줄 알아? 지겹다 지겨워. 수속하는 데 들어간 서류만 해도 한 줄로 늘어놓으면 아마 지금쯤 미국땅에 닿고도 남았겠다. 그렇지만 드디어 내일모레면 뜬다, 떠. 비행기표까지 끊어놨으니까 틀림 있을라구. 하긴 나도 그 동안 하도 애를 먹어놔서 비행기 올라타고 나서도 이 땅이 안 보일 만큼 날아간 후에나 기쁨을 만끽할란다만…….”
일찌거니 좋은 데 취직해서 돈독 오른 친구보다는 훨씬 단순해 뵈면서도 훨씬 더 낡아 뵈는 그의 얼굴이 소년처럼 의기양양해지는 걸 지켜보면서 나는 불쑥 말했다.
“만일 그 수속절차가 그렇게 어렵고 복잠하지 않았어도 비행기 타고 이 땅 떠나는 일이 너에게 그토록 대단한 기쁨이 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고별과 축하를 겸한 말로 적절치 못했을뿐더러 아니꼽기까지 했던가보다.
빨리 헤어지고 싶은 눈치를 드러내 보이면서 그가 내 어깨를 토닥거렸다.
“야아, 뭔 소리를 그렇게 알아듣기 힘들게 하냐? 여전하구나 여전해. 사물을 바로 보지 않고 비틀고 꽈다 보는 버릇. 하여튼 네가 안정된 것 같으니 기쁘다. 맥주라도 같이 하고 혜어져야 하는 건데 급히 떠나려니 워낙 바빠서……그럼…….”
그날 밤 나는 느닷없이 아내에게 결혼신고를 하자고 졸랐다. 우린 간소하게 식은 올렸지만 더 간단한 신고는 미룬 채 살고 있었다. 오늘날까지 그걸 미룬 장본인은 물론 나였다.
아내는 보통 여자면 다 그렇듯이 그걸 하길 바랐고 그럴 때마다 나는 그걸 하기 싫은 핑계를 잘도 둘러댔다. 같이 사는 것 이상의 결혼의 진실이 어디 있겠느냐는 둥, 나는 너를 사랑함으로 해서 너에게 나 같은 무직자로부터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자유를 주고 싶다는 둥.
아내는 나의 이런 엉성한 핑계를 들을 때마다 매우 섭섭해하더니, 이제는 아내 스스로가 알아서 섭섭해할 기회를 안 만들고 있었다.
“별안간 결혼신고는 왜?”
아내는 가계부를 쓰느라 들고 있던 볼펜을 다 떨어뜨릴 만큼 놀랐다. 이미 입은 히쭉히쭉 벌어지고 있었다.
“수속이 복잡한걸.”
“처녀 총각이 결혼하는데 수속 복잡하게 할 게 뭐 있어?”
“아무리 수속이 복잡하고 서류가 까다로워도 생각난 김에 어떻게든 해치우자구. 결혼은 인륜대산데 갖출 건 갖추고 살아야지.”
나는 너무 간절하게 말했나보다. 아내가 도리어 수상쩍은 얼굴을 했다.
“자기 참 이상하다. 법적인 처녀 충각이 결혼신고하는데 복잡할 게 뭐 있다고 그래. 자기 혹시 나 의심하는 거 아냐? 과거 있는 여자로. 그래서 떠보려고 별안간 결혼신고하자는 거 아냐? 그런 음흉한 남자하곤 내 쪽에서 안 해줄란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비싸게 굴기까지 했다.
“아냐, 매이고 싶어서 그래. 당신한테 확실하게 매이고 싶단 말야. 당신 날 꼭꼭 옭아매서 절대 놓아주면 안 된다.”
나는 이런 소리를 웃지도 않고 했다.
“자기 취직하더니 사람 됐다. 정말이야. 나 감격했어. 참, 자기 사령장이나 뭐 그런 거 받지 않았어?”
사령장이란 소리에 나는 뜨끔했다. 그러나 짐짓 시침을 떼고 반문했다.
“사령장이 뭔데?”
“왜 있잖아. 학교에서 아이들한테 주는 반장이나 회장 임명장 같은 거. 회사에서도 새로 들어온 사원이나, 승진이나 전근한 사원에게 그런 거 주지 않나 몰라?”
“누가 국민학교 선생 아니랄까봐, 유치하게스리 임명장 상장 표창장, 장자 돌림 좋아하기는…….”
“내가 뭐 그런 게 좋아서 그러나. 구비서류도 안 받고 시켜준 취직이라 붙박이가 아닐까봐 가끔가끔 허전한 생각이 나서 그러지 뭐.”
아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는 또다시 아내의 미간을 스치는 눈치꾸러기 같은 그늘을 보면서 아내도 그 동안 태평하지만은 않았다는 걸, 내가 나의 소속감을 믿을 수 없어 남몰래 겪었던 그 고약한 조바심을 아내 역시 같이 겪으면서 지내왔다는 걸 알아차린다. 순간 약점을 들킨 것처럼 무안했다. 무안한 김에 나는 나도 모르게 아내의 따귀를 때렸다. 처음 해본 손찌검에 놀란 건 아내보다 내 쪽이었다.
나는 따귀 맞은 아내를 와락 끌어안고 볼을 비볐다. 아내에 대한 연민으로 흐느낄 것 같았다.
“미안해, 미안해. 내가 어쩌자고 당신을. 내가 사령장보다 더 확실한 취직한 증거를 갖다 보여줄 테니 날 용서해줘. 곧 나 월급 탈 거야. 일하고 보수 받아오는 것보다 더 확실한 취직의 증거가 어디 있겠어?”
나는 이렇게 아내를 위로하며 실은 내가 위로받고 싶었다. 월급만 타면야 아무리 구비서류 없이 한 취직이기로서니 설마 실감이 안 날라고 하는.
“첫 월급 타면 자기 나한테 뭐 사줄 거야?”
뜻밖에 생경한 목소리로 아내가 따졌다. 나는 따귀 때린 손이 부끄러워 쩔쩔 매면서 말했다.
“첫 월급인데 봉투째 당신한테 고스란히 갖다바쳐야 하는 거 아냐?”
“자기 정말 그래주는 거지?”
아내가 당장 콧물이라도 떨어뜨릴 듯이 축축한 얼굴로 감지덕지했다. 그리고 언제 따귀 맞았더냐 싶게 밝고 싱싱한 표정으로 월급 타면 사고 싶은 것을 차례차례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녀의 실크 원피스와 나의 춘추복, 그녀의 핸드백과 나의 구두, 전기 프라이 팬과 소파, 냉장고와 세탁기, 전화와 텔레비전, 홈세트와 법랑냄비·… ·아내가 사고 싶은 것들은 밤새도록 주워섬겨도 그 밑천이 딸릴 것 같지 않았다.
나는 그 소리에 귀 기울이며 우리가 얼마나 안 가진 게 많나, 아내는 그 동안 수없이 작은 욕망들을 얼마나 감쪽같이 챙기고 살았나를 신기하게 생각했다.
결국 수많은 욕망을 거쳐 내 월급이 안착한 곳은 적금통장이었다. 아내는 내 월급을 한푼도 안 건드리고 고스란히 적금을 부어 몇 년 후 나의 문패가 달린 집을 갖고 말겠다는 비장한 결의를 나타냈다. 나는 물론 찬성했다.
그러나 아내가 내 월급으로 철응성을 쌓을수록 나는 점점 첫월급을 탈 자신조차 잃어가고 있었다. 타임 레코든가 뭔가 하는 괴물스러운 기계까지 들여놓고 직원들의 일 분 일 초를 악착같이 따지고 감시하는 지독한 회사에서 나같이 족보에도 없는 뜨내기에게 월급을 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정해진 월급날 출근일수까지 정확하게 계산된 월급을 받을 수가 있었다. 출근한 지 한 달은 채 못 됐지만 대필한 원고료까지 받고 보니 그럭저럭 한 달치는 됐다.
그날, 나는 취직하고 처음으로 아내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오늘 월급날이지? 자기 일찍 들어와야 해. 어디로 새지 말고.”
동료 여교사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자랑스럽게 남편의 직장에 전화를 거는 아내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여직껏은 결혼한 딴 여교사들이 그렇게 하는 걸 부럽게 지켜보기만 하다가 오늘 당장 여봐란듯이 그 흉내를 내고 있으리라.
그러나 어디로 새지 말라는 소리는 도리어 어디로 새라는 암시가 된다. 나는 월급봉투를 안주머니에 넣고 혼자서 쏘다니며 이렇게 저렇게 낭비를 했다. 까만 돌이 박힌 반지도 사고, 세트로 된 화장품도 사고, 꽃무늬가 화사한 홈웨어도 사고, 케이크도 한 상자 샀다.
나는 내 월급으로 아내가 적금을 붓기를 원치 않았다. 내 문패가 달린 집이 싫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해약할 때의 아내의 슬픈 마음을 헤아려서였다. 나는 아직도 내가 진홍기업에 매인 몸인 것을 믿을 수 없었고, 그것을 믿을 수 없는 한 앞으로의 월급을 보장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 속셈을 알 리 없는 아내는 첫 월급으로 적금을 넣을 수 없게 된 것을 섭섭해하느라, 첫 월급으로 사온 푸짐한 선물에 감동하느라 민망하도록 어찔 줄을 몰랐다.
낭비하고 남은 돈은 얼마 안 됐지만 아내에게 맡기고 매일매일 타쓰기로 했다.
어느 날, 아내가 하도 바빠하길래 내가 손수 아내의 지갑에서 내 용돈을 꺼내다가 무심히 주민등록증 외에 또하나의 신분증을 발견 했다. 그것은 공무원증이었다.
아내는 어엿한 교육공무원이니 이상할 건 하나도 없었다. 이상한 건 나였다. 나는 그것을 보자 또다시 불안한 소속감이 들먹이는 걸 느꼈다. 진홍기업 사원들은 지희끼리만 사윈증을 가지고 있고 나만 제외된 것같이 생각된 것이다.
웬만한 잡지 한 권 부피는 되는 구비서류를 업고 들어온 사원하고, 이력서 한 장으로 들어온 뜨내기하고 그만한 차별대우는 해서 마땅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조바심이 났다. 조바심은 날로 심하게 내 심장을 옥죄었다.
어느 날 점심시간, 나는 속이 덜 좋다는 핑계로 사무실에 혼자 남았다. 단층의 별관이라 앞으로 테니스 코트가 보였고 뒤론 잔디가 있는 뜰이 있어, 그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잘 보였다. 밖에서 안이 잘 들여다보이건 안 보이건 간에 창피한 짓을 하려는 마당에 밖의 사람들에게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눈알을 불안하게 사방으로 굴리며 사무실 속을 서성 대기를 한동안, 양쪽 창 밖으로 아무도 안 보이면서 동시에 미스 김의 까만 핸드백이 눈앞으보 육박했다.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찬스라는 예감이 전류처럼 찌릿하게 지나갔다.
나는 생전 처음 아내 외의 여자의 핸드백을 열었다. 위기를 포함한 모든 기회는 일순이란 생각이 손끝을 떨게 했다. 그러나 곧 침착해졌다. 아내의 핸드백 속과 같은 혼잡성과 똑같은 냄새가 나를 마음놓이게 했다.
신분증과 돈과 함께 넣을 수 있는 네모난 비닐지갑까지 아내 것하고 닮아 있었다. 나는 그것을 열었다. 그러나 내용물을 확인하기도 전에 한 장의 사진이 나풀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하필 이때 딴 사람도 아닌 미스 김이 나타났다. 나는 얼떨결에 사진을 구둣발로 밟으면서 핸드백 속에다 지갑을 도로 처넣고 닫았다.
내가 생각해도 신기할 만큼 침착했다.
“무슨 짓이에요?”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미스 김은 처음부터 보고 있었던 것처럼 자신 있게 내
가슴을 밀쳤다. 나는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땅바닥에서 미스 김의 얼굴이 흙 묻은 채 웃고 있었다. 미스 김은 그것을 집어들고 흙을 털면서 나를 노려봤다.
“치한! 유부남인 주제에 감히…… 일러줄 테야요, 과장님한테.”
그제서야 나는 나의 행동이 미스 김에 의해 어떻게 이해되고 있나를 짐작했다. 풍선에서 김이 빠지듯이 헤식은 웃음이 치미는 것을 삼키고 사뭇 비극적 인 얼굴을 할 수가 있었다.
“용서하십시오 미스 김. 그렇지만 너무 좋아했습니다. 너무 사모했습니다.”
미스 김의 표정이 단박 황홀하게 풀리는 걸 지켜보면서 나는 될 대로 되라고 자포자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이후 미스 김의 의미심장한 시선은 나에게 또하나의 고통이 되었다. 그래도 나는 붙박이와 뜨내기의 차이를 확인하고 싶은 조바심을 버릴 수는 없었다.
처음에 하필 여자를 대상으로 삼은 걸 후회하긴 했어도 그 행동 자체를 뉘우치진 않았다.
날씨가 더워짐에 따라 Y선배는 출근하자 상의는 벗어서 의자에 걸어놨다가 퇴근할 때나 입었다. 나는 그것을 노리고 처음과 마찬가지로 속이 덜 좋다는 핑계로 점심시간에 사무실에 혼자 남았다.
처음보다는 배짱이 생겨서 담배를 의젓하게 꼬나물고, 아예 바깥엔 신경도 안 쓰고 침착하게 Y선배의 상의를 뒤지기 시작했다. 안주머니에서 제법 고급의 가죽지갑이 나왔다. 막 그것을 펼치려는데 Y선배가 황급히 돌쳐들어 왔다. 나는 그것을 다시 안주머니에 쑤셔 박을 수밖에 없었다.
“자네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Y선배가 심히 불쾌한 듯 아래위를 험악하게 훑으며 따졌다.
“아닙니다. 저어, 속이 덜 좋더니 별안간 담배 생각이 나서요. 한 개비 실 례하려고요, 헤헤…….”
궁하면 통한다더니 임기응변치곤 썩 잘된 변명이다 싶어 회심의 미소를 띤 것도 잠깐, 불행히도 나는 담배를 피워물고 있었고, 와이셔츠 주머니에선 아침에 산 담뱃갑이 두둑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자네 혹시 도벽이라도 있는 거 아닌가?”
Y선배가 진지하게 물었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 저는 세상에 나서 여직껏 남의 검부락지 하나…….”
“아, 알겠네. 지금 나 바쁘네. 더이상 듣고 싶지 않기도 하고.”
Y선배는 이마를 곱지 않게 찡그리고 상의의 주머니를 하나하나 점검하더니 걸치고 다시 나갔다.
이번 호부터 외부 필자를 몇 명 모신다더니 어떤 명사하고 점심 약속을 해놓고 상의를 안 입고 나갔다 돌쳐온 모양이다.
이래저래 사무실에서의 나의 입장은 더욱 난처한 것이 되고 말았다. Y선배는 눈에 띄게 나를 구박했고, 일을 안 시키든지 시켜도 안 될 일만 시켰다.
이 달의 나의 유일한 일은 인기작가 Q씨의 콩트를 받아내는 일이었는데 전화를 걸 때마다 여행중이었다. 시시한 홍보책자에 그 유명한 Q씨의 원고를 꼭 싣겠다는 고집은 그 목적이 순전히 나를 들볶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만날 전화통만 붙들고 있는 나에게 Y선배는 불친절하게 말했다.
“자네, 발은 뒀다 뭐 하려나?”
Q씨의 집은 강남의 신흥주택가에 있었고, 매일 찾아가도 매일 여행중이었다. 깔끔한 식모애도, 아름다운 부인도, 사진에서 본 Q씨를 꼭 닮은 아이들도 다 만나봤지만 Q씨는 여행중이라는 외마디 소리밖에 할 줄 몰랐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거의 매일 출근과 근무까지를 Q씨 집 주변에서 하던 끝에 드디어 Q씨를 만날 수가 있었다. 그는 맨발에 슬리퍼를 끌고 양손에 하나씩 아이들의 손목을 잡고 산책길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Q선생님이시죠? 안녕하세요.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저는 진홍기업의…….”
“Q 씨는 여행중입니다.”
Q씨의 친절한 목소리가 내 말의 중턱을 잘랐다.
“네?”
“Q씨는 여행 중입니다.”
Q씨는 지옥의 문지기라도 감동시킬 것처럼 순진하고 정직한 눈을 껌벅이며 같은 소리를 되풀이하더니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철컥 하고 쇳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어떤 일을 끝장낼 결심을 자연스럽게 할 수가 있었다.
목이 타서 동네 어귀 식료품점에 들러 맥주를 한 병 사서 마개를 땄다. 신흥주택가의 아담한 식료품점은 매우 붐볐다. 남편은 열심히 물건을 팔고 젊은 아내가 금전등록기의 버튼을 날렵하게 눌러 잽싸게 영수증을 떼어주는 모습이 생기 있어 보였다.
손님이 뜸하고 주인이 한가해진 사이 나는 말을 시켰다.
“장사가 번창하시는군요. 길목이 좋아서 그런가요?”
그는 나를 세금쟁이나 새로운 장사꾼으로 오해하고 있는지 대뜸 엄살부터 부리기 시작했다.
“번창이 다 뭡니까. 장사해서 돈 벌기 다 틀린 세상이에요. 어수룩한 구석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말이죠. 저것 보세요. 사탕 한 봉지 팔고도 표준계산서 떼는 것. 어디 팔 때뿐입니까. 물건 해 올 때도 떼어야죠. 부가가치세다 종합소득세다 어찌나 철저하게 얽어놨는지 옴치고 꼼칠 톰은 바늘구멍 만큼도 없다니까요.”
“그래도 월급쟁이보다는 날 게 아네요?”
“아, 요새 월급쟁이가 어때서요. 월급쟁이보다 나아서 이 노릇을 하는 게 아니라 월급쟁이 할 자격이 모자라 한담니다. 하라는 공부 안 한 거 후회해 뭐 합니까. 자식새끼들이나 잘 가르쳐야죠.”
다시 가게가 바빠졌기 때문에 나는 맥주값을 치르고 영수증을 받아들고 나왔다. 나는 유쾌했다. 취직 안 하고도 자기를 이 사회에 얽어맬 방도를 알았다는 것으로.
그날 밤 아내와 나란히 누운 자리에서 나는 아내에게 회사를 그만둘 뜻을 밝혔다.
“왜? 그렇게 좋은 자리를…….”
“좋긴 뭐가 좋아, 그까짓 데가.”
“그래도 자기 같은 천성의 자유인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자리였잖아?”
아내는 국민학교 선생답게 늘 지당한 말만 해왔다. 그러나 나더러 자유인이라니 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내가 대단치도 않은 한 기업에 매이고 싶어 그 동안 얼마나 죽도록 안달복달을 했는지 아내는 아마 모르리라. 그러나 나는 아내의 엉뚱한 오해를 애써 바로잡아주려 들진 않았다.
“하긴 요새 세상에 드물게 어수룩한 고장이었어. 그렇지만 좋은 꿈에서 스스로 깨어나고 싶은 것처럼 그 자리를 스스로 물러나고 싶은 걸 어떻게 해?”
“자긴 참 이상하다. 흉몽이나 빨리 깨어나고 싶지, 어째서 좋은 꿈에서 깨어나고 싶다는 거지?”
“좋은 꿈일수록 큰 배반을 마련하고 있거든. 깨어났을 때의 배반감 말야. 배반 안 당하려니 먼저 배반할 수밖에 더 있냐 말야. 선수를 치는 거지.”
“자기 참 어렵다. 그나저나 자기 또 무직자라는 거 나 싫은데.”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머리맡 벽에 벗어 걸은 나의 바지로부터 늘어진 혁대 끝의 버클이 똑바로 쳐다보았다. 때가 낀 명문 대학 교표의 음각(陰刻)이 꼭 해골바가지가 웃는 거처럼 보였다.
나는 그것을 처음으로 남처럼 바라보면서 그것으로부터 가까스로 놓여난 것처럼 느꼈다. 그리고 놓여나기가 매이기나 마찬가지로 어렵기만 한 내가 싫어서, 내쫓아버리고 싶게 싫어서 난폭하게 아내를 안았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