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 살고 싶다] <6> 부산대앞-우리시대의 자화상
옛것·새것 퓨전화 … 두얼굴의 거리
/김명건, 건축사사무소 다·움 대표/
2002/10/22 006면
대학로는 변화와 생성이 거듭되는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 마치
생 방송처럼 거리라는 스크린에
바로 투영되는 곳이다.
70년대엔 '유신철폐!',80년대엔
'독재타도!',그리고 2002년 6월엔
'대~한민국!, 오~필승 코리아!'의
함성으로 뒤덮였던 곳.
모든 가능성에 대한 욕구가
분출되는 곳이
다름아닌 대학로이다.
대학로에는 시대정신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대학의 특성에,새로움과 변화에 열려 있는 N세대의 욕구가 더해져 특정한 커뮤니케이션 채널을 지닌 그들 나름대로의 공동체가 만들어져 있다.
옛 것과 새 것이 끊임없이 충돌하고 어우러지며,밤이 깨어 있고 낮이 살아 있는 등 복합성과 이질성이 교차하며 끊임없이 전이의 과정을 겪는다.
# 시각 미각 청각이 교란되는 곳
부산에도 몇몇 대학 앞에 자생적으로 형성된 대학로들이 있다. 그 중 해운대 태종대와 더불어 자조(?)섞인 의미로 '부산의 3대'라고 불리는 부산대 앞 장전동 거리를 걸어 보자. 대학로는 길을 따라 움직이는 행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장소이다.
지하철 1호선 부산대학앞 역에서 내려 부산대까지 걷다 보면 많은 길들과 부딪히게 되는데 이 일대의 길 모두가 대학로이다.
형형색색의 온갖 기호로 범람하는 간판들,쇼윈도우 속의 패션 상품과 오브제들,굳이 한식 양식 일식을 나누기 힘들 정도로 퓨전화된 음식점과 술집들,리어카 좌판의 '길표' 해적 음반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들,장전동 대학로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이 시대를 말해주는 트렌드라 할 만하다.
키치문화로 대변되는 포스트모던의 진열장과도 같은 이 곳에선 시쳇말로 '뜨는' 모든 것들을 접할 수 있다.
시각 미각 청각을 교란시키는 수많은 소비 물질들 틈새를 헤집다 보면 이 길이 그 길 같고,저 길이 이 길 같기도 한데 사실 비슷해 보이는 길들은 다르다.
이 다름을 알아채는 이는 대학로라는 괄호 속에 있는 사람이고 여전히 헷갈리는 이는 대학로에선 이방인이다.
그렇다고 대학로는 거리를 기웃거리며 서성이는 이방인에게 폐쇄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외부로부터 열려 있는 것 같으나 좀 더 들여다보면 닫혀 있고,닫혀 있는 것 같으나 열려 있는 이중성이 대학로의 한 단면이기 때문이다.
장전동 대학로의 '주인공'들은 나름대로의 사연에 따라 거리 이름을 지어 부러 왔다.
잔잔하던 대학 앞거리에 자본의 물결이 유입돼 오던 80년대 무렵,부산은행 사거리 뒤편 주택가 골목에는 당시로서는 호사스러운 몇몇의 레스토랑과 패션숍 등이 등장했는데 이를 '부르조아 골목'이라고 불렀다.
이후 지하철 역 앞 거리에는 도시계획에 의해 새로운 길이 생기고 한층 더 소비 지향적인 모습을 띠게 되는데 이를 '신(新)부르조아 골목'이라 부르게 된다.
이 무렵의 '부르조아'란 명칭은 다분히 안과 밖,혹은 계급의 경계를 가르려는 듯한 냉소적인 것으로 자본과 소비가 거리를 조작하는 것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느끼게도 한다.
90년대 들어서는 수십 채의 횟집이 들어서서 '메기탕 골목'이라 불렸던 곳이,동대문상가 등에서 유입된 자본에 의해 리모델링되면서 패션 거리로 변모한다. 사람들은 이를 '로데오 거리'라고 부른다.
대학 앞의 거리가 이렇게 변하는 사이,사회과학 전문서점 '나라사랑''다락방',인문학 전문서점 '대영사' 등이 사라지고,시장통 옆 선술집과 함께 젓가락 장단에 성할 날이 없었던 호마이카 밥상도 자취를 감추었다.
낭만이란 이름으로 유행에 적잖이 간격을 유지해왔던 거리 풍경이 시장과 소비의 욕구가 그대로 반영된 모습으로 바뀌었다. 어쩌면 이런 욕구들이 엮어 내는 이야기 자체가 이미 현대 도시의 일상을 보여주는 맥락일지도 모른다.
# 익명성 속에 숨어 버린 일상
장전동의 대학로는 지하철역에서 부산은행 사거리를 잇는 보행자 거리,장전 시장통 거리와 부산대 정문 앞 등 상업공간이 밀집된 지역과 여기에서 가지가지 골목을 통해 갈라져 나오는 주거지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원래 부산 금정구 장전동은 부산대와 주거지역으로 구성된 꽤 정적인 동네였지만 지하철의 등장과 함께 마치 도미노처럼 하나둘씩 주택들은 사라지고 상업공간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상업지역과 주거지역의 경계엔 단독주택의 구조에 상업시설이 덧씌워진 리모델링 건축물들이 있어 현재진행형의 변화 양상을 단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다.
대학로에 세워진 건축물들은 공공성보다는 개별화된 사적 공간들로 만들어져 다양한 개체의 삶들을 익명성 뒤에 숨겨 버린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멀어지다 보니 대학로에는 온통 '방(房)문화'가 난무한다. 노래방 비디오방 만화방 PC방 등 극단적으로 섞임이 없는 문화가 존재할 뿐이다.
노는 모습도 폐쇄화된 공간에서 은밀히 이루어지고 마이크와 모니터,키보드 등의 매체를 통해야만 속마음을 줄 수 있다.
인간들은 다들 그저 그렇게 비슷해지고 획일화되어 감각적인 생생함을 잃어버린 채 삶으로부터 주변화되고 타자화되어버렸다.
지난 3,4년 전부터 부산대 주변의 단독주택지에 급격히 들어선 신축원룸형 임대주택 역시도 이런 상황을 여실히 보여 주는 '나홀로' 주거문화의 단면이다. 15세대 전후로 구성된 원룸주택은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어디든 언제든 이동 가능한 현대 유목민의 생활 패턴을 보여준다.
원룸 등의 주거공간과 노래방 PC방 비디오방 등 사회적 공간마저도 개별화 폐쇄화되어 일상적인 삶의 장소에서 커뮤니티,'모여서 소통되는 공간'은 사라졌다.
# 싹트는 생성의 새 기운들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거리 문화를 통해 소통을 꿈꾸는 몇몇의 작은 움직임은 장전동 대학로의 소란스러움을 잠시 정지시키며 새로운 반전을 암시한다.
불안정한 도시 속의 인간들은 마치 줄타기하는 사람들처럼 무중력 상태를 즐기며 정착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앞으로 미끄러져 간다.
범람하는 기호 틈새로 유목하는 도시 속의 삶이란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데 원래 생성의 기운은 불안정 속에 싹트는 것이 아닐까?
나눔의 문화가 없는 대학로,장전동 거리에 젊은 인디 그룹들은 기성문화와 언더 혹은 인디문화의 접점을 모색하며 게릴라처럼 일종의 대안적인 문화행위를 시도한다.
지하철역 밑의 온천천변 야외 둔치에서 때때로 벌어지는 음악·무용 퍼포먼스,온천천변의 벽면에 욕구 분출의 도구이자 새로운 문화의 기미를 느끼게 하는 스프레이낙서,로데오 거리의 패션숍 진열창을 전시 공간화한 대안미술운동….
지하철 옆 복개천의 버려진 장소에서 소비만을 위한 대학로 공간이 탈바꿈되는 장면을 보면 이곳이 단지 소비 욕구의 분출구 뿐만 아니라,젊은 대안문화가 수용되는 열린 장소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기대를 던져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