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부가 말했다.
지금 마차는 사십 오세 역을 지나고 있습니다.
나는 마부에게 항의했다.
왜 이렇게 빨리 지나는 거요, 이건 내가 원하는 속도가 아니오.
마부는 말했다.
이봐요, 손님. 속도는 당신 주민등록증에 써 있소. 쯩을 까보시오.
나는 쯩을 쥔 손을 부르르 떨며 마부에게 떼를 썼다.
억울해요, 좀 천천히 가거나 마차를 멈춰주시오.
마부는 근엄하게 말했다.
이 마차는 속도를 늦추는 법이 없소. 내리면 다시 탈수도 없구요.
나는 더욱 놀라서 마부에게 졸랐다.
그렇다면 시간을 파는 가계를 찾아주시오. 돈은 얼마든지 있어요. 몸과 영혼과 시간을 다 바쳐서 번 돈 말이오. 시간을 살 수만 있다면 모든 걸 당신에게 주겠어요.
마부는 심각하게 말했다.
글쎄요, 이 마부조차 시간을 파는 가게가 있다는 얘기를 아직까지 들어본 적이 없소. 그러나 당신의 용기가 가상하니 찾아보죠.
마부는 채찍을 마구 휘둘러대고, 마차는 더욱 빠른 속도로 시간을 파는 가게를 찾아서 달리고 달렸다. 마차의 속도는 갈수록 더 빨라졌고, 시간을 파는 가게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중에는 너무 빠른 나머지 나는 겁이 나서 마부에게 소리쳤다.
여기서라도 당장 내려주시오, 어서! 제발……
마부는 냉정하게 말했다.
그러죠, 늙은이. 이 마차에서 내리는 순간 당신은 꽥이요.
―{작가와 사회}(2004. 가을호)
시인은 여기서 인생이라는 시간과 관련하여 한 편의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이 때의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사십 대 중반의 한 사내가 겪는 시간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사십 오세 역을 지나”는 마차를 타고 있는 이 사내가 인식하는 시간은 너무도 빠르다는 데 초점이 있다. 시간이 빠르다고 인식하는 것은 대강 30대부터인 듯싶다. 한국의 자본주의 현실에서는 30대의 10년도 나머지의 인생을 준비하는 데 바쳐지기 십상이다. 이렇게 준비를 하다가 40대를 맞게 되면 시간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지나가 누구라도 당황을 하게 된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느긋하게 인생을 즐기고도 싶지만 도무지 그럴 수 있는 여유를 갖기 어려운 것이 오늘의 인간에게 주어지는 시간이다. 너무 빨리 달려 중간에서 내릴 수 있거나 물건처럼 가게에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시간은 고통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50대 10년으로 구체적인 노동을 마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인 만큼 40대 중반의 시인이 시간의 이런 면과 관련하여 당혹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 짐짓 실감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