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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직장, 아시아자동차 공장으로
증언자 : (김정기 남 19. 회사원)
생년월일 : 1961. 10. 26(당시 나이 19세)
직 업 : 아세아자동차 근무(현재 대학생)
조사일시 : 1989. 1
개 요
아세아자동차에 근무하던 중 21일 차량이 유출될 때 시위대들과 협조하여 차량을 빼내고 그 후 투쟁의 현상에서 함께 하다가 후에 차량을 회수할 때 직접 참여하였다. 광주항쟁이 수습되면서 차량유출 경위에 대한 조사가 실시되자 두려움을 느끼다가 마침 대학입시 준비를 위해 회사를 그만 두었다.
1980년 초에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후에 아세아자동차에 입사했다. 아버지가 상이군인으로 우리집은 원호대상자였기 때문에 원호청의 취업알선으로 입사하게 되었다. 5·18 광주민중항쟁 당시는 약 한 달쯤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사회가 어지러웠지만 큰 관심을 갖지 못한 상태였다. 그해 봄 대학가의 시위에 관해서도 주위의 친구들을 통해서 듣는 정도에 불과했다.
5월 18일 오후에 동명동의 친구집에 가다가 동명동 로터리 부근에서 처음으로 공수부대를 목격하게 되었다. 바로 앞쪽에서 많은 사람들이 도망쳐 오고 있었고, 공수부대원들이 대열을 지어서 총을 어깨에 가로질러 맨 채 곤봉을 들고 로터리 쪽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나는 도망치는 대열의 맨 끝의 사람이 잡아채는 통에 엉겁결에 그 행렬에 끼어서 도망을 가다가 부근의 어느 가정집으로 몸을 피했다.
그 집에는 나보다 먼저 한 사람이 몸을 숨기고 있었고 조금 후에 또 한 사람이 뛰어 들어왔다. 이렇게 해서 세 사람이 약 한 시간 가량 그 집 식구들과 같이 당시 상황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전남대생이라는 청년이 많은 얘기를 했다. 그는 공수부대의 시위진압 방법이 이전의 경찰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잔인하다는 것이었다. 조용한 것 같아서 밖으로 나와 친구집에 가려던 것을 포기하고 바로 집으로 왔다.
다음날 회사에 출근해 보니까 전날의 상황을 목격한 동료들의 얘기가 화제거리가 되어 있었다. 나도 몇 마디 얘기를 했으나 이때만 해도 내가 목격한 특별한 사실이 없었으므로 그들의 얘기를 듣는 것에 불과했다. 퇴근 후 시내에 나가볼까 망설이다가 곧 바로 집으로 오고 말았는데, 다음날 20일에는 19일 오후에 시내에 나가 시위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의 얘기로 근무시간을 거의 보내다시피 했다. 사실 시위에 관해서 별다른 관심도 없었고 말로만 들은 공수부대의 잔혹한 행위에 겁을 먹고 있기도 해서 19일 오후에 시내에 나가지 못했는데 한 사람 한 사람 많은 얘기를 할 때마다 궁금증이 더해져 20일에는 꼭 나가리라 몇 번씩 다짐하며 근무를 마쳤다. 더군다나 다음날이 석가탄신일로 휴일이어서 마음 또한 가벼웠다. 퇴근 후 곧 바로 시내로 향했다.
17번 버스를 타고 무등경기장쯤 오는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곳에서 내려 사람들 틈에 끼었다. 가만히 보니 고가도로 부근에서 많은 사람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었다. 막 어둑어둑해질 무렵이었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서 '태워라', '죽여라' 하는 함성이 들려서 그쪽으로 가보니 거기에는 경북 번호를 붙인 트럭이, 유리창이 산산조각 난 상태로 정차해 있었다. 한 대의 운전사는 도망을 쳐버렸고, 다른 차의 운전사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의 씨를 말린다는 공수부대의 얘기에 대한 보복이었다.
누군가가 정차해 있는 트럭의 연료통에서 연료를 빼내 트럭 주위에 뿌리고 있었고, 일부에서는 운전사에게도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 성화였는데, 이때 40대 쯤으로 보이는 아저씨 한 분이 설사 차를 불태우더라도 운전사는 똑같은 국민인데 그러는 게 아니라고 점잖게 타이르자 모두들 수그러지며 운전사를 돌려보냈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트럭에 불을 붙이자 트럭이 불타기 시작했다. 이미 어둠이 짙게 드리운 시각이라 트럭이 불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트럭이 불타는 동안 서울 쪽에서 내려오는 차량들이 길을 메우고 있었는데, 상당수의 운전사들이 왜 길을 막느냐고 화를 냈다. 이에 일부에서 지금 시내의 상황이 어떤 줄 아느냐며 설명을 하자 이들 운전사들이 울분을 터뜨리며 그러고도 여기 있느냐고, 차량으로 시내진입을 하자며 시내로 차를 몰았다. 이때 주위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운전사 옆자리, 트럭 뒤로 오르기 시작했고, 내가 탄 차는 광주역을 거쳐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을 지나 MBC 방송국 쪽으로 진입하려는데 멀리 MBC 방송국이 불타기 시작했고 인파 때문에 더 이상 차량으로 진입할 수가 없어서 차에서 내려 걸어갔다.
조금 후 페퍼포그차가 와서 시위대를 해산하려 했으나 시위대는 쉽게 해산되지 않았다. 그러는 도중 부근에서 확성기 소리가 들렸다. 대형 트럭에 마이크 장치를 하고 한 여자가 간절히 호소하고 있었다. 이때 특별한 조직력이 없이 모여 있기만 하던 시위대는 그 트럭을 필두로 해서 대열을 갖추기 시작했다. 마이크에서는 계속해서 여자의 절규, 울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광주시민 여러분! 지금 우리는 함께 뭉쳐야 합니다. 우리의 아들, 딸들이 지금 어떻게 당하고 있는 줄 아십니까. 데모는 학생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등등의 얘기가 계속되고 있었고, 서울에서 대학생들이 광주로 내려오고 있는데 장성 부근에서 저지당하고 있다는 얘기도 했던 것 같다. 후에 마이크를 잡은 사람이 전옥주 씨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마이크 장치를 한 트럭을 선두로 시위대의 행렬은 시내를 계속해서 돌았다. 금남로를 통해서 유동 삼거리, 양동시장을 지나 다시 천변로를 통해서 적십자병원, 학동 오거리, 다시 금남로를 거쳐 임동, 무등경기장으로 날이 샐 때까지 행렬은 계속되었다. 밤새워 행진이 계속되는 동안 가끔 계엄군 측에서 "시위대는 집으로 돌아가라"는 회유방송을 하기도 했지만 시위대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사람수가 줄어들면 공수부대로부터 공격을 받는다고 해서 더 강하게 힘을 합하여 행진했다. 이윽고 날이 밝았다. 이때 시위대의 주류는 광주역 광장에 있었다. 광주역 분수대에서 고여 있는 물로 손을 씻고 있는데, 누군가가 광주역 안에 시체가 있다고 고함을 질러서 그쪽으로 달려갔는데 내가 광주역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누군가가 시체를 들것에 들고 나왔다. 시체는 옷을 입은 채 피가 말라붙어 있었는데, 그것은 누가 봐도 한눈에 구타당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온몸이 피에 젖어있었고 거무튀튀한 색깔로 온통 부어 있었는데 혓바닥을 쭈욱 내민 채 죽어 있었다. 역사 안에 또 한 구의 시체가 있다고 했으나 더 이상 시체를 볼 엄두가 나지 않아 확인해 볼 수 없었다. 이어서 누군가가 "도청으로"를 외쳐댔고 시위대는 곧장 도청으로 향했다. 그러나 도청은 계엄군이 있기 때문에 가까이 가지 못 하고 가톨릭센터 부근, 당시 공사중이던 충금지하도 부근으로 흩어져 있었다. 이 때는 전날 밤 시위에 참여했던 시위대를 따로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수많은 시민들이 속속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전날 밤 잠을 못한 탓인지 밀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해 중앙로 쪽 광주은행 본점 벽에 기대어 졸고 있는데, 함성이 들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미니버스에 많은 사람이 탄 채 각목 등으로 차체를 두드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다가오는 버스의 바깥에는 빨간 페인트로 '전두환을 찢어죽이자'고 씌어 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바로 전에 보았던 차를 두드리며 지나는 차량의 수가 수십 대로 늘어 났다. 이때 나도 차에 오르게 되었는데, 내가 탄 차는 유동 삼거리를 지나 송정리 쪽으로 빠지더니 광천동 공단입구에 이르렀다. "아시아자동차로 가자"는 누군가의 요구로 방향을 선회해서 곧바로 아시아자동차로 향했다. 이때 나는 아시아 자동차에 근무하는 사람으로서 약간 겁이 나기도 했다. 아시아자동차 공장 안에 있는 차량을 가져오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탄 차가 아시아자동차 정문에 이르자 20여 명 되는 경비원이 가로막고 있었다. 이때까지도 내가 탄 차 안에서 내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지하는 경비원들에게 차량이 다가가니 경비원들은 물러났고 아시아자동차 공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어 몇 사람이 내리기 시작했고, 누군가 "운전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전부 내리라"고 소리쳤다. 이때 나는 내리지 않고 있었는데, 혹시나 경비원들 중에 내 얼굴을 아는 사람이 있거나 나중에라도 기억한다면 곤란해질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내려갔던 몇 사람이 되돌아오더니 차가 없다고 했고, 나와 같이 차에 있던 사람들은 차를 남겨두었을 것 같냐고 하면서 곧바로 송정리로 가서 주민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 훨씬 나을 거라고 투덜대기도 했다. 차량을 가지러 갔던 사람들의 차가 없다는 말을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공장의 어느 곳을 가보았느냐 물었다. 그 사람이 손으로 가리킨 지점을 확인하고서야 수긍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이 가리킨 곳은 사내에서 말하는 1공장이었는데 1공장은 대부분이 차체작업 라인이나 부품조립 라인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차량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되돌아온 몇 사람을 이끌고 3공장 쪽으로 뛰어갔다. 조금 전까지도 경비원들에게 몸을 숨겼던 내가 갑자기 되돌아오는 사람들을 이끌고 3공장 쪽으로 가게 된 이유는 지금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바로 그때 마음의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3공장 앞에 이르자 함께 갔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나는 지금 이 회사에 근무하는 사람이다. 차들은 이곳 3공장 안에 있다"고 하자 몇 사람이 문을 열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장갑차 같은 것도 있느냐고 묻길래 장갑차는 저쪽 주행 시험장에 있고 그 안에는 여러 가지 많은 차가 있는데 페퍼포그차가 두 대 있다고 했다. 그러자 일부는 주행시험장으로 가고, 일부는 3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3공장 안에 페퍼포그차 두 대가 있는 것을 안 것은 바로 전날 근무 중 3공장에 갈 일이 있어서 갔을 때 보았기 때문이다. 평상시 나의 근무장소는 1공장이다. 그리고 장갑차가 주행시험장에 있는 것을 안 것은 신입사원 교육시 그쪽에 갈 기회가 있어 거기서 보았고 바로 얼마 전에 그쪽을 지나던 길에 장갑차를 타 볼 기회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 차량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나는 가급적이면 회사내에서 경비원들에게 얼굴을 알리고 싶지 않아 멀리 돌아서 정문으로 왔다. 정문에 도착해 보니 내가 타고 들어온 차가 아직 나가지 않고 있었다. 그 차에 다시 올라타고 얼마 후 다른 차량 시위대가 아세아자동차 공장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4, 5대의 차량으로 기억된다. 내가 타고 있는 차는 물론이려니와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가지고 나온 차량에 대해서도 들어갈 때와는 달리 제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1일 이후 시위군중과 함께
다시 시내로 들어왔는데, 이미 도청 앞에서부터 금남로 일대 동방생명 사옥(현) 부근까지 사람들로 빽빽이 차 있었고, 유동 삼거리 쪽에서는 계속해서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때는 오전 10시가 넘은 무렵이었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한일은행쯤 갔을 때 비좁은 틈을 뚫고 차량 한 대가 다가왔다.
다른 차량과는 달리 비교적 깨끗한 모양이었다. 그때는 대부분의 차량들이 시위대가 각목 등으로 두드리고 다녔기 때문에 유리창 등이 깨지거나 뜯어져서 겉모습이 엉망이었다. 무슨 특별한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가까이 갔더니 그 차에는 삶은 계란과 김밥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사실 그때 나는 무척 배가 고픈 상태여서 김밥과 삶은 계란을 보자 걸신들린 사람처럼 입 안으로 처넣었다. 음식을 먹으면서 음식을 싣고 왔던 차량 쪽으로 눈을 돌리자 한쪽에 종이로 조그만 글씨로 양동주민 일동이라고 씌어져 있었다.
이후로 다른 동네에서도 음식을 가져오기도 했다. 김밥과 계란 등으로 허기를 달랜 나는 도청 쪽으로 나아갔다. 이때 공수부대는 YMCA 바로 앞에 도로를 꽉 메우고 있었다. 내가 거기에 갔을 때는 12시가 조금 지난 뒤였는데, 시간을 비교적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시위대 중에서 어떤 아저씨 한 분이 가끔씩 공수부대에 갔다 오곤 했는데, 공수부대 쪽에서 12시 30분이 되면 시민들의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하니 그때까지 기다려 보자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 그 때의 상황을 더듬어보면 그 시각에 공수부대측에 무슨 음모가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때 계엄군에게 다가간 아저씨는 공수부대의 지휘관을 만나고 온 것이 아니라 맨 앞줄에 서 있던 무장군인과 얘기를 나누고 오곤 했기 때문이다.
나는 시위대 제일 앞줄쯤에 있었는데, 거리상 60여 미터 전방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비교적 자세히 볼 수 있는 데다가 이후로 군대에 다녀온 경험으로 보면 군인이 작전시 지휘관이 맨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12시 30분이 지나도 공수들은 시민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시민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대로 있을 게 아니라 시민들이 합세해서 힘으로 공수 부대를 몰아붙이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시위차를 몰고 공수부대를 밀어붙이면 공수부대들이 물러가게 될테니까 그 방법을 쓰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뛰어들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그러자 시민들 거의가 그 방법에 동의했다. 곧이어 차량이 동원되고 어디서 구했는지 트럭의 뒤에는 폐타이어가 실려 있었고 휘발유까지도 준비되어 있었다.
한 사람은 운전을 하고 한 사람은 라이터 등을 준비하고 있다가 공수부대 바로 앞에 다가갔을 때 불을 붙이고 뛰어내리는 방법이었는데, 계속되는 동안 나도 한 번 라이터를 들고 트럭의 조수석 난간에 붙어 시도를 해보았다. 그렇게 몇 차례 더 하자 공수부대들이 다소 물러가긴 했으나 큰 효과를 내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폐타이어를 싣고 불을 붙인 트럭은 공수부대를 향해 끝까지 가지 못하고 도중에서 멈추기가 십상이었다. 결국 시위대는 그 방법을 포기하고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대개 젊은 층에서 주장하는 방법이었는데 직접 몸으로 부딪치자는 것이었다.
이때는 공수부대들이 당초 YMCA 앞에서 도청 앞 분수대 쪽으로 물러나 있었다. 젊은 층에서 요구하는 방법은 곧 시행되었다. 차량은 선두로 차량 위에 각목 등을 소지한 젊은이들이 올라타고 차량 양쪽으로 당시 모여 있던 인파가 전부 앞으로 돌진하는 것이었다. 이때 나는 차량 바로 옆에 있었는데 '와' 하는 함성소리와 함께 도청을 향해 일제히 나아갔다. 조금씩 조금씩 차량이 선봉대 역할을 하면서 나아가는데, 시민들이 YMCA 앞을 지나갈 때까지 공수부대는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이때 뛰쳐나온 공수부대들은 앞쪽에 대열을 지어 있었던 군인으로서 그들이 뛰어나오자 뒤쪽 대열에 있던 군인들이 분수대를 주위로 거총자세를 취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 사격자세는 앉아 쏴의 거총 자세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시민들이 공수부대를 향해 뛰어가고 일부 공수부대들도 시민들을 향해 달려들고 이 양측이 막 부딪칠 즈음 총성이 울렸다. '탕탕탕' 산발적이지만 몇 발의 총성이 울려퍼졌다.
서서히 달리는 차량에 탑승했던 젊은이들이 막 뛰어내리며 함성과 동시에 공수부대에게 달려갈 때 공수부대측에서도 변화가 일었다. 시민들의 기세에 눌려 잠시 위축되는 듯싶더니 공수부대측에서도 대열을 갖춘 채 함성과 동시에 시민들을 향해 뛰어오기 시작했다. 이때는 직접 시민을 향해 쏘는 것 같지 않았지만 총성을 들은 시민들은 우왕좌왕하면서 흩어졌다. 밀려 흩어지는 사람들 중에는 넘어져서 사람들의 발길에 밟 히고 하면서 온통 난리였다. 거의 맨 선두에 있었던 나는 뒤로 도망을 치기 위하여 방향을 바꾸어 뛰었다. 공수부대들은 처음 진격시 제일 앞장섰던 몇 사람과 차량으로 돌진하다가 뛰어내렸던 사람들을 잡으려고 달려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무리지어 있는 시민들에게는 달려들지 않았다. 그 경황중에 얼핏 뒤를 돌아보았는데 상상도 할 수 없는 공수부대들의 만행이 자행되고 있었다. 당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내 또래쯤 되는 그는 나보다 훨신 뒤쪽에서 도망쳐 나오고 있었는데 그의 뒤를 7, 8명의 군인이 쫓고 있었다. 그가 진내과 충장로 입구, 수협 인도쯤 도망칠 무렵 뒤따라온 공수부대들이 뒤통수를 향해 무엇인가 휘두르자 그 자리에 퍽 쓰러졌다. 아마 총이나 진압봉으로 기억된다. 그러자 뒤이어 달려온 공수부대들이 그를 향해 무차별 구타를 하기 시작했다. 군화발로 머리를 내려차고 총으로 내려치며 머리뿐만 아니라 몽뚱아리 어디 한 군데도 가만 두지 않았다. 이윽고 그는 머리 부분에서 피를 흘리며 축 늘어졌는데 확인해 보지는 못했지만 그는 분명 죽었으리라 여겨진다. 공수대원 한 명이 죽은 것으로 생각되는 그 젊은이의 한쪽 다리를 끌고 도청 쪽으로 뛰어갔다. 머리는 땅바닥에 질질 끌린 채. 그 참혹한 광경이 이루어진 시각은 불과 3, 4분 안팎의 일이었다. 거기에 넋을 잃고 있다 보니 나는 도망치는 시민들의 대열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나는 YMCA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2층으로 올라가서 유리창을 통해 YMCA 체육관 지붕으로 뛰어 내렸다. YMCA 사무실 건물과 체육관 지붕과의 사이에는 체육관의 지붕이 둥그런 관계로 한쪽의 낮은 부분으로 몸을 숨길 수가 있었다. 거기에서는 이미 몇 사람이 몸을 숨기고 있었다. 여자가 한 명, 나머지는 나를 포함해서 다섯 명이었다.
조금 지나니까 계엄군이 YMCA 안으로 들어왔다. 건물 안을 뛰어다니는 둔탁한 발 자국 소리, 그것은 분명 군화발 소리였다. "조금 전에 이쪽으로 들어가는 놈들을 봤는데 한 새끼도 없다 나가자"고 하는 그들의 대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그러고도 발소리가 끊이질 않아 얼마나 숨을 죽였는지 모른다. 조금 후에 몇 발의 총성이 울렸는데 삼양백화점 위 삼양맨션의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분명히 총탄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었는데, 이때 함께 조용히 있던 여자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들리는 울음소리에 옆에 있던 남자가 그 여자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는데, 계엄군이 YMCA를 빠져나갔는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거기서 밖으로 나올 때까지는 계엄군에 발각되지 않았다. 우리는 그곳에서 한 시간쯤을 보내고서야 나왔다. YMCA 체육관 지붕 위에서 보니까 도청 앞에 공수부대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충장로서 쪽에서 시민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충장로에 많은 사람은 없었지만 충장로에 마주치는 젊은이들의 얼굴은 어떤 해방감에 휩싸인 듯했다.
나는 고등학교 동창인 친구를 만났는데, 승주에 사는 그 친구는 광주상황이 궁금해서 올라왔다고 했다. 나는 그 친구를 만나자마자 악수 대신 가슴으로 부둥켜 안았다. 친구와 나는 충장로에서 시간을 조금 보내다가 시내에서 가까운 북동 친구집으로 갔다. 친구집에 가니 친구는 없고 친구 어머님만 계셨다. 어머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네가 연락이 없어 너희 집에서 전화가 오고 난리가 났다"면서 "빨리 집으로 가라"고 성화였다. 그래서 나는 집으로 가겠다고 함께 간 친구와 친구집을 나섰다. 광남로터리 쪽으로 나오니까 사람들이 상당히 모여 있었다. 나는 전날 밤 잠을 못 잔 탓인지 땅바닥에서도 잠이 들 정도로 잠이 쏟아졌다.
나는 사람들 틈에 끼어 있다가 서석병원 담벼락에 기대어 졸고 있었다. 그때 헬리콥터 한 대가 양동 쪽에서 계림동 쪽으로 날아가고 있었고, 분명치는 않지만 총성 같은 소리가 들렸다. 정신을 차리고 몸을 움츠리고 있는데 유동 삼거리 쪽에서 함성과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총을 든 시민군이 탄 차량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차량은 군용 지프차였는데, 운전석 옆의 사람은 일어선 채로 총을 든 한 손을 치켜들며 젊은 사람들은 도청과 공원으로 모이라고 고함을 지르면서 지나갔다. 공원으로 가면 무기를 지급받을 수 있다는 얘기도 함께 했다. 같이 있던 친구에게 공원으로 가자고 했더니 오늘 광주에 올라온 길이라 친척집부터 들러봐야 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친구와 헤어져 혼자 공원으로 갔다. 공원에 도착해 보니 아까 시민군 한 사람이 말했던 것처럼 총을 든 사람들은 있었으나 총기 지급은 끝난 상태였다. 총을 들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군대를 갔다 온 정도로 보이는 사람이 이것저것 진지 구축을 위한 지시를 하고 총기 다루는 요령도 설명하곤 했다.
처음에 나에게는 총이 주어지지 않아서 잔일도 조금 하면서 간혹 동네 단위로 가져다준 김밥, 계란, 빵, 우유 등을 먹고 있는데 누군가 총이 한 자루 남는다며 조금 전부터 여러 가지 지시를 하던 나이든 사람에게 갖다 주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나를 불러 "자네 총 쏴봤는가"하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때 나는 처음으로 총을 만져보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나에게 간단한 총기취급 요령을 가르쳐 주었지만 내게는 건성으로 들렸다.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총을 내가 갖는다는 두려움과, 한편으로는 공수부대와 맞부딪칠 수 있다는 일종의 마음 든든함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총이 나에게 주어진 지 불과 10분쯤 지났는데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만큼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바로 전에 음식을 먹어서 그런지 졸음이 더했다. 해거름 무렵이었다. 옆에 있던 사람으로부터 밤을 새우게 될지도 모르는데 벌써부터 조느냐는 지적을 받고 전날 밤에 한숨도 못잤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도저히 졸음을 참지 못하겠다고 했더니 그럼 오늘은 집에 가서 쉬고 다음날 다시 오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수고하라는 얘기와 함께 총을 내려놓고 집으로 갔다. 집에 도착하니 당시 중학교 2학년이던 여동생이 "오빠!" 하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안방에서 아버지께서 나오셨는데 아버지께서는 말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한참을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사실 평소에 나는 아버지 말씀을 잘 듣지 않아 아버지로부터 꾸중을 자주 들었다. 나는 아버지께 아무 얘기도 못드리고 내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쓰러졌다.
다음날 22일 정오쯤 되어서야 일어났다. 나는 궁금해서 시내에 나가려고 안달이었지만 아버지께서 막무가내로 막으셔서 시내에 나갈 수가 없었다. 오후에는 장성에 사는 동창생이 찾아왔다. 광주상황이 너무 궁금해서 자전거를 타고 왔다는 것이었다. 친구와 전날 겪었던 얘기를 나누다가 오후 늦게 친구는 장성으로 돌아가고 나는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여동생과 함께 동네 슈퍼에 라면이나 국수 같은 것을 사러 갔으나 벌써 동이 나 살 수가 없었다. 그때 동생한테 들은 얘기인데, 우리 동네에서도 21일 오후에 시민군을 돕기 위해 돈이나 삶은 계란 등을 모았다고 했다.
다음날 23일에는 시내상황이 조용해졌다고 하자 아버지께서는 전날처럼 강하게 만류를 안 하셔서 시내로 나갈 수 있었다. 그때 우리 집에 자전거가 하나 있었는데 대중교통 수단이 없는 당시로서는 아주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이날 이후 비교적 자주 돌아다녔으나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꼬박꼬박 돌아왔다. 하루는 상무관에를 갔는데 항쟁의 참상을 알리는 시체와 그 가족들의 통곡으로 아비 규환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죽은 시신들 앞을 살아서 돌아다닌다는 것이 양심상 허락되지 않았으며, 시민군 대열에 끼고도 싶었지만 이때는 조직의 체계가 잘 갖추어진 시민군의 대열에 총기사용에 아무 경험도 없는 내가 무턱대고 같이 행동하고 싶다고 나설 만한 용기가 없었다.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계엄군이 다시 도청을 장악한 27일을 전후해서 직장인 아시아자동차로 출근을 했다. 21일 이후부터 출근하기 이전 기간에는 거의 전사원이 출근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출근 직후 회사는 밖으로 빠져나간 차량회수에 눈코뜰 새가 없었다. 그때 회사에서 발표한 차량수는 5백여 대로 기억되는데 정확히는 잘 모르겠다. 이때 회사에서는 상당수의 인원을 차출하여 팀 별로 인원을 나누어 시내를 돌아다녔는데, 출근 직후와 퇴근 직전에는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빠져나간 것으로 보이는 차량이 있으면 근무시간을 떠나서라도 그 위치와 상태를 보고하라는 교육이 계속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당시에 차량이 대량으로 빠져나가게 된 데에는 회사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협조했을 것 같다는 얘기가 회사에 나돌았을 때는 굉장히 마음을 졸이기도 했다. 이후 차량이 상당수 수거되었으나 외관상 양호한 차량은 거의 없었다. 그 이후 두어달쯤 지나 내가 회사를 그만두게 될 때까지 항쟁 직후 다소 어수선했던 사내 분위기는 거의 평정되었고,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회사를 그만둘 수가 있었다.
5·18 이후 생활
광주항쟁 당시 나는 대학생이 선망의 대상이었고, 데모는 대학생만 하는 것으로 알았고, 민중운동에 관해 아는 바도, 들은 바도 없어서 조금의 관심도 갖지 못했었다. 그리고 1979년만 해도 박정희가 우리나라 최고의 인물로 알았고, 10·26 사건 발생 당시에도 대통령의 죽음을 누구 못지 않게 애도했으며, 1980년 광주항쟁 이후 전두환 씨가 민족적 지도자라는 매스컴의 내용을 그대로 믿는 편에 속했다.
항쟁 이후 소위 말하는 민주화 의식이 조금은 바뀌였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때까지만 해도 항쟁 당시에 겪었던 얘기나 나누고 내가 살고 있는 광주에서 온시민이 하나 되어 떨쳐 일어났다는 사실에 막연한 자부심을 느끼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 내가 광주 사람으로서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군대에 입대한 이후였다. 군대에서 광주에 관한 얘기를 동료들과 할 때면 한결같이 "그럴 수가 있느냐,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냐"고 반문하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말을 잇지 못했다. 더군다나 12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부대내에서 부재자투표를 했는데 짜여진 각본에 의해서 투표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처음으로 투표권을 갖는 연령이어서 기대도 많았는데 신성한 권리를 박탈당한다고 생각하자 가슴 깊은 데서 분노가 솟아 올랐다. 나는 그런 투표를 거부한 일로 군생활 동안 엄청난 곤란을 겪었다.
광주민중항쟁 당시 많은 국민들이 바라던 대로 민주화를 위한 일련의 행사들이 진척되었더라면 광주의 처절한 피흘림은 없었을 것이다. 광주는 살기 위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최근 광주문제에 관하여 정치권 일각에서 논란이 많지만 광주시민들은 특정정당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피흘림의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정치권에서는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떠나 진실을 진실되게 알리고 그 의의를 살려나가야 할 것이다. (조사정리 박형호)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