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이 2016년도에 시드니 와서 강연을 했다. 강연 도중에 역사의 방관자가 되어서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방관자 효과’를 설명할 때 많이 쓰이는 키티 제노비스 사건(Murder of Kitty Genovese)-1964년 3월 13일 뉴욕 주 퀸스에서 캐서린(키티) 제노비스라는 여성이 강도에게 강간살해 당한 사건-을 들었다. 그런데 그 사건은 애초부터 사실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선정적인 언론에 의해서 전혀
사실과 다르게 각색이 되었다는 것이 방관자로 손가락질 받던 38명에 의해서 법원판결이 밝혀진 바가 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이 본질은 '방관자 효과'가
아니라 '언론의 무책임한 선정성'을 보여주는 예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이재명은 정보가 업 데이트가 되지 않아 사실과는 정반대되는 예를 든 셈이었다. 어디에 가나 비슷한 이야기를 많이 해야 할 촉망 받는 정치인에게 본의 아닌 실수가 될 수도 있겠다 싶어서 강의가 끝난 후 명함에
메모를 해서 수행원에게 전달해 주라고 했다. 물론 그에게서 반응은 없었다.
그날 나는 자기와 만날 수 있는 기회가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젊은이들 앞에서 전혀 감동이 없는 진부한
강의를 하는 것을 보고 그의 투지는 높이 살 수 있지만 사상적인 배경은 깊지 못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기야 개천에서는 미꾸라지 밖에 날 수 없는 시대에 잡초처럼 자라서 그 정도면 대단한 것이지 그 이상을 더 바란다면 욕심일 것이다.
남녀가 사랑을 할 때는 모든 것이 좋지만 미워질 때는 모든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링 안에 갇혀 있으면 다툼도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고대 올림픽에서
권투는 운동장에서 하는 경기였다. 그러다 보니 선수가 운동장을 돌아다니면서 끝까지 쫓아가면서 싸워 죽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 그래서 링을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사각의 링’이 선수를 보호하기 위한 것처럼 결혼이란 제도는 부부관계를 보호하는 링과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결혼 외에 남녀관계는 링이 없기 때문에 쉽게 갈 곳까지 가는 것이다. 남녀가 싫어지기 시작하면 마지막은 인간성의 바닥을 들어내서 환멸과 증오를 느낄 때까지 간다. 아마 김부선과 이재명은 거기까지 다녀온 듯하다. 김부선과의 관계에서 이재명은 변호사로 시작해서
냉혹한 직업적인 변호사의 태도를 끝을 맺은 것 같아 보인다. 그들 사이에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인격이 남아
있었다면 아니 어느 한 쪽에서라도 포용이나 인내가 있었더라도 흔한 로맨스가 지금처럼 전국민의 화제거리가 되어버린 상황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거판에서 김부선은 사적인 분노를 공적인 분노로 만드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녀가 자신이 겪은 아픔을 통하여 이재명을 발가벗김으로서 이재명이 비록 당선은 되었으나 여당 내에서 반문세력의 구심 역할을 할 수
없도록 만든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이재명은 이번 선거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큰 빚을 졌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 심리적 갈등
끝에 이재명 보다는 문재인 대통령을 보고 찍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염려하는 바대로 앞으로 그가
은혜를 원수로 갚을지 보은을 할 지는 두고 볼 일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애로 배우로 출발한
김부선의 유별난 행적을 보고 내가 아는 61년생 여성들의 기억을 복기해 보았다. 70년대 첫 목회지였던 충북 진천 깡시골 동네에는 엄마가 서울로 참기름 장사를 하러 나가서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집에서 살림을 하는
61 년생 여자애들이 있었다.
두 번째 목회를 하던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에는 중학교 밖에 없었기 때문에 고등학교만 가도 집을 떠나야 해서
동네에는 중학생 밖에 없었다. 남자 아이들도 있었지만 61년 생 여자
아이들이 몇 명 있었다. 문화적인 것이라고 TV 밖에 없던 그 시절
교회는 아이들에게 모든 것이었다. 젊은 전도사로서 나는 그 아이들과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 나게 그리울 정말로
재미 있게 놀았다. 그 아이들에게 나는 부모가 해 줄 수 없는 것들을 해 주어야 하는 존재였다.
아이들 중에 모이면 항상 재잘거릴 나이에 말이 없고 명랑하지 않은 김부선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모두가 넉넉하지 못한 형편이었지만 그 애는 집안이 더 어려웠었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더 신경을 쓰려고 했지만 도무지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 아이였다. 그 아이들 가운데 대학에 간 사람은 한 명도
없고 모두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기 위해서 서울로 올라왔다. 김부선이는 서울로 갔다가 가장 먼저
결혼을 하고 젊은 나이에 병에 걸려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80년도에 서울의 맨 끝인 풍산리에서 목회를 할 때는 전라도에서 중학교만 마치고 공장으로 돈 벌러 온 여자
청년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 중에는 79년 YH 노조에서 어린 나이로 사건을 치르고 이사를 해온 61년 생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과 내 삶에서 가장 의미 있는 시간들을 보냈다.
그 후에 광명시 철거민촌에서 빈민운동을 하면서 비로소 처음으로 대학에 재학 중이거나 졸업한
61 년생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나에게 61년 생 여성들이 의미하는 바는 한국 사회의 한 부분을이해하는 기호이다. 그 중에 김부선도 추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