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금식과 관련된 내용이 많다. 예수님도 금식하셨고, 성경의 다윗, 다니엘, 에스더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도 금식 기도를 실천하였다. 특히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금식을 통해 이웃 사랑을 실천하였고, 교회의 교부들과 교모들도 금식을 실천하였다. 우리가 잘 아는 성경 내용, 즉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KJV에는 “기도와 금식”(prayer and fasting)으로 되어 있다. 성경도 금식을 중요한 영적 덕목으로 가르치고 있다.
성경에는 금식의 이유와 목적이 다양하게 언급되고 있다. 먼저 극한 슬픔을 표현하는 방편으로 금식을 하였다. 다윗은 사울의 죽음을 애도하며 금식하였다(삼상 31:11-13, 삼하 1:11-12). 다윗은 사울이 하나님이 기름 부으시고 세우신 하나님의 종이었다는 것 때문에 그가 죽었을 때 자기 원수였지만 슬퍼하며 울며 금식하였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신랑이신 예수님을 빼앗기고 난 후에 금식할 것이라고 하였다(마 9:14-15). 이처럼 금식은 극한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 행하였다.
다음으로, 개인의 죄나 민족의 죄를 회개하기 위하여 금식하였다. 니느웨 성의 왕과 백성은 요나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심판을 믿고 금식하며 회개하였다(욘 3:3-10). 안디옥 교회는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다가 세계 선교에 대한 성령님의 계시를 받게 된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행 13:2-3)라고 기록하고 있다.
금식에는 또 다른 목적도 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충실한 봉사를 하고자 할 때, 내적으로 자신을 준비시키기 위해서 금식하였다.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예수님의 광야에서의 금식도 바로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였다(출 24, 왕상 19, 마 4). 예수님은 사십일 금식 후에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였다.
한국 교회 안에도 금식을 중요하게 여기며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한국 교회 안에는 금식에 대한 신앙과 공식이 있다. 하나는 금식은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금식은 물만 먹고 해야 한다는 신앙과 공식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금식할 때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가? 아쉽게도 성경의 답은 그 반대이다. 성경의 사람들과 초기 교회 공동체의 그리스도인들은 물만 먹고 금식을 하였는가? 그렇지 않다.
한국 교회 안에는 이사야 58:6의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이라는 내용을 통해, 우리가 금식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가르치며 설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본문의 전후 문맥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금식을 기뻐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판하고 있다. 당시 금식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행하는 영적 실천의 일부였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금식하면서도 이웃을 압제하며 위선적인 일을 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금식보다는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하신다. 금식은 정의로운 삶을 위한 원동력으로 작용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진정한 경건은 금식보다 사회 정의와 인권과 관계된다는 말씀이다. 성경은 금식을 근본적으로 금하지 않는다. 금식은 영성 생활에 많은 유익을 줄 수 있다.
나아가 중요한 문제는 이사야 58:6의 히브리어 본문에는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라는 구절이 없다. 즉, 마소라 사본에는 “기뻐하다”라는 용어가 없고, “선택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바하르”(bachar)를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내가 선택한 금식은”이라고 번역해야 옳다. 대부분의 영역본은 마소라 사본에 따라 “내가 선택한 금식은”(the fast that I choose)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오로지 TNK만 “내가 바라는 금식”(the fast I desire)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심지어 중국어 성경도 “선택한 금식”이라고 번역하고 있다(손석태, 성경을 바로 알자, 213). 한글 개역 성경을 비롯하여 최근에 번역된 거의 모든 성경이 한결같이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분명 오역이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금식의 목적을 재정의하고 있다(사 58:6). 하나님이 바라는 참된 금식은 이 땅에 존재하는 불의에 대응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권고한다. 불의에 대한 가장 온당한 반응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에게 연민을 가지고 이 땅에 정의를 실현하고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평화를 이루기 위해 열정적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이사야가 말하는 금식의 목적은 정의와 연대이며, 다른 하나는 거룩이다.
이사야가 말하는 금식의 목적은 다른 사람의 유익과 세상 속에서, 더욱더 거룩한 삶을 위해 스스로 고통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금식의 첫 번째 목적은 가난한 사람에게 물질을 베풀기 위한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정의를 실현하는 방편이다. 금식하면서 먹지 않은 음식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고, 금식함으로써 절약된 돈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것은 거룩한 행위이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초기 기독교 문헌, 헤르마스의 목자(The Shepherd of Hermas)에는 “그날 먹었을 음식을 돈으로 계산해서 과부와 고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야 한다. 그대가 이런 방법으로 스스로 가난에 처하면, 그대의 겸손한 행위로 도움을 받는 사람이 마음의 감동을 받고 그대를 위해 주께 간구할지도 모른다”(25)라고 기록하고 있다. 속죄를 위해서 금식할 뿐 아니라 금식을 자선의 기회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 문헌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금식하는 목적은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기 위한 영적 실천이었다는 것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금식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것을 얻는 데 목적이 있기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그들에게 자선을 베풀기 위한 것이었다. 금식은 자신의 거룩한 삶과 스스로 가난을 경험하며 다른 사람의 가난에 반응하는 몸의 빈곤을 경험하는 실천이었다. 금식은 경건한 삶을 위한 영적 실천이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고통을 경청하며, 그 고통에 참여하기 위한 사랑의 실천이었다.
첫댓글 정의와 연대이며 거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