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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아버지의 손을 잡고 찾아가 보았던, 당시 덕수궁 석조전에 위치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던 국전에 출품된 정물들은 한결같이 백자항아리와 사과, 모과 등을 오로지 똑같이, 이쁘게 그리고야 말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려진 그림들이 태반이었다. 그것을 그림의 전부로, 정물화의 전부로 알고 지내온 역사가 우리네 미술의 갑갑한 역사였다. 시간이 지나 정물화란 장르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되면서 정물을 보는 나의 안목(?) 역시 달라지게 되었다. 나는 모든 것은 ‘역사적 개념’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냥 혹은 자연스럽게 출현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역사적 과정 속에서 필연적인 어떤 필요와 요구에 의해 출현한다. 정물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물이라 부르는 것은 17세기 초엽에 독립된 장르로 자리잡았다. 그러니까 <최후의 만찬>, <가나안의 혼례>의 식탁을 채우는 음식물, 성모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수태를 고지하는 천사의 백합꽃 다발은 16세기를 지나면서 서서히 한 그림의 전체를 채우게 되었다. 게다가 가구의 문짝, 그리고 종교화나 초상의 뒷면을 장식하던 정물그림도 점차 그림의 앞면을 차지하게 되었다. 실제를 보는 듯한 착각을 주는 섬세함으로 그려진 꽃, 과일, 야채, 사냥고기 혹은 어류를 어울려 놓은 그림은 1650년경, 지금의 네달란드 지방에서 ‘움직이지 않는 자연’이라는 의미의 ‘still-leven’ 이라 명칭을 얻게 되었고, 영어권 지역에서는 ‘still life’란 이름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한 세기 뒤늦게 ‘죽은 자연’이라는 의미 ‘nature morte’로 정물의 명칭이 정해졌는데, 이 명칭은 17세기부터 행해진 해골, 모래시계, 시든 꽃과 과일, 깨어진 그릇 등을 통해 이 세상 존재의 ‘헛되고 헛됨’을 표상하는 정물의 한 범주를 포괄하는 것이었다.
단순하게 말한다면 정물화란 대개 “움직이지 않는 기물을 그린 그림을 의미”한다. 그래서 영어로는 ‘정지한 삶’에 해당하는 ‘still-life’, 불어로는 ‘죽은 자연’에 해당하는 ‘nature-morte’로 표시한다. 서구의 정물화는 특히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본격적으로 제작되었다. 당시 정물화는 주변에 있는 인간의 행위에 대한 상세한 묘사를 보여주었다. 정물화는 주인공 역할을 하던 인물들을 점차 배제하고, 의인화된 알레고리를 지양하고 ‘사물들에 의한 예화의 제시’ (Exemplum) 만으로 내용을 이루어내는 경우였다. 17세기 네덜란드, 이 시기에 새로이 출현한 정물화는 경제가 급성장하고 부가 쌓이는 시기의 물질에 대한 태도를 보여준다. 17세기 네덜란드적 ‘자연주의 양식’ Naturalism 은 경험과학적인 발견을 통해 세계가 이해될 수 있다는 생각이 존재한 반면, 한편으로는 인간적 이해의 한도를 넘는 정신적이고 영원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중세적인 믿음 역시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음을 반영한다. 정물화는 유비에 의해 사물을 파악하는 중세적 사고방식에 근거하며 신의 창조의지는 그 피조물들에 구현되어 있으며, 자연세계의 풍부함과 아름다움 속에서 신의 말씀을 읽을 수 있다고 여겨졌다. 그러니까 바로크 정물화는 ‘대우주에 대한 소우주의 유비’였던 것이다.
정물은 일상의 비근한 대상을 화가의 조형감각, 의도에 따라 마음대로 선택하고, 배치한다는 점에서 회화의 다른 어느 장르보다도 많은 창조적 자유를 보장하는 장르였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서구 미술의 생산과 유통을 지배한 미술아카데미는 정물에는 종교화, 역사화의 전제조건인 문학적 지식과 이야기 (narration)의 구성능력이 요구하지 않다는 점에서 오직 손의 기예의 산물로만 여겼다. 또한 훌륭한 초상화의 전제조건이라 여겨지는 모델에 대한 내면적 통찰력을 수반하지 않는 까닭에, 정물화를 고상한 장르에 요구되는 정신성이 결여된 장르로 여겼던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정물화는 풍경화가 가질 수 있는 자연에 대한 신비주의적 감정마저 동반하지 않는 까닭에 미술 아카데미가 수립한 장르의 위계질서 속에서 가장 낮은 위치를 점했다. 18세기에 샤르뎅의 내밀한 정물화를 거쳐 세잔의 단단하고 냉정한 기하학적 재현의 모색으로 등장한 정물을 거쳐 비로소 정물화는 중요한 영역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움직이지 않는 자연 이란 뜻으로 혹은 식탁그림이란 뜻으로 이해된 정물은 이전의 신화적 이야기 혹은 종교적 그림 내지 왕이나 귀족들의 초상화의 배경을 이루던 꽃이나 화병, 사물들을 그 자체로 독립시켜 화폭에 재현한 것이다. 먹고사는 것, 자신의 삶을 이루는 물질들이 종교나 신화보다 더 중요해진 삶이 되었음을 반증하는 것이 정물화다. 그러니까 정물화란 서구에서 봉건의 몰락과 근대의 태동이란 시간대에 필연적으로 등장하게 된 장르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정물이란 원래 부동의 사물, 즉 움직이지 않는 사물이나 죽은 사물을 뜻한다. 죽은 자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이 경멸적인 용어는 17세기 프랑스에서 회화를 그 주제에 따라 등급을 매기고 성격을 규정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물화가 다루는 자연은 결코 죽은 것이 아니다. 시물 역시 단순한 객체, 생명이 지워진 차가운 물건으로만 다가오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죽은 사물은 살아있는 사물보다 훨씬 더 강력한 의미를 발생한다. 그리고 더 깊이 각인된 상처를 남긴다. 정물이 여전히 매력적이라면 그것은 아마도 이렇듯 정물에 결부된 죽은 사물이라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정물화는 훨씬 복잡하고 미묘한 의미를 지닌 장르다. 그러나 오랫동안 정물화는 전적으로 화가의 테크닉을 과시하고 즐기기 위해 제작되어 온 역사를 보여준다. 꽃이나 과일, 기물 등 일상의 사소한 물건들을 소재로 하여 형태나 양감 등을 연습하기에 좋은 것이 정물화였다. 사실 전통적으로 서양미술사 담론에서 ‘정물화’라는 장르는 미술에서 가장 하위 장르로 취급되어왔다. 종교화, 역사화, 초상화의 하위범주로 인식되어 온 것이다.
현대에 와서 정물의 이 부동성은 흔히 사물의 고정된 한 순간의 포착과 일정한 공간을 점유하는 조형예술에 있어서 그
공간형식(점유형식)을 실험하는 훌륭한 모델이 되어주었다. 정물을 소재로 한 세잔의 형식실험은 모더니즘 미술의 새장을 열었다. 세잔의 사과 하나가 미술을 재현으로부터 구조로 옮겨놓은 것이다. 현대미술의 시원이라 불리는 그는 전통적 원근법이 아닌 원초적인 인간 지각으로 사물을 재현하고자 하였다. 세잔은 보들레르가 과거와 단절된 새로운 근대적인 미를 거론하면서 행했던 “근대를 생활하는 작가라면 자기 주위의 현실을 묘사하면서 동시에 그곳에 있는 영구적인 것을 암시할 수 있는 요소를 그려야 한다.”라는 언설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잔은 그의 정물화를 감각과 지성이 합치된 인식의 지평으로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이렇듯 모더니즘 미술의 구조에 대한 관심은 사물(대상, 세계)의 부동성을, 죽음을 전제로 한 것이다. 죽은 세계 위에서 예술의 자율성을 위한 온갖 형식실험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나 세잔의 사과 그림이나 피카소, 브라크의 콜라지가 20세기 미술 담론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들의 작업은 사실 정물화로서가 아니라 각각 후기 인상주의, 입체주의로서 담론 화되고 그 조형방법론의 의미 속에서 부각된 측면이 있다. 서구미술이 전통 속에서 인간의 위대한 행위를 기록한 역사화나, 자연을 찬미한 풍경화에 비해서, 일상의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소재인 정물화는 진지한 주목을 받으며 연구될만한 대상이라기보다는 형태나 양감, 색채연습용 습작쯤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인식이 와해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요구되었다.
한국근대미술과 정물화
서구의 정물화와 유사한 우리의 전통회화는 초충도나 책가도 같은 것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책가도(柵架圖)는 책거리 병풍이라고도 불리는데 19세기 민화의 하나이지만 서양화풍을 도입하는 시기(18C)에 생긴 새로운 장르이다. 이는 마음으로 책을 가까이 하는 수단으로 삼기위한 것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규장각의 차비대령 화원들을 뽑는 시험문제로 <책가도>가 자주 출제되었다고도 한다. 그만큼 수요가 컸고 의미가 있던 소재였다. 책가도에는 투시도법의 오묘한 구성과 고급 채색 안료가 사용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섬세한 필치가 돋보인다. 아울러 산 자와 죽은 이의 시선의 교차를 통해 기복과 주술적 측면들이 깃들어 있음도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다. 그런가하면 불법을 찾아 절에 가면 가장 보편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 석가모니불의 모임을 화상으로 담아낸 영산회상(靈山會上)이란 불화(송광사, 1725)인데 이 그림의 일부로 그려진 공양상은 그 자체로 정물화로 볼 수 있는 그런 그림이라고 생각된다. 석가모니 본존을 중심으로 보살중과 제자들과 신중들과 청법중이 둥글게 한 모임을 만든 이 회상은 절제된 배색과 세련된 선묘로 화면의 조화를 이루며 부처와 중생이 하나되는 세계를 묘사하고 있다. 송광사의 영산회상도에는 향과 차와 맑은 물 그리고 떡 두 접시가 놓여져 있다. 향그릇과 향로와 다기는 조선시대에 많이 쓰던 청화백자로 묘사되어 있고 정갈하고 소박하게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끈다. 청정한 법을 청하는 자리에 알맞게 마련된 간결한 공양상은 원래 맑은 물과 차와 향 그리고 촛불이 공양의 그 내용물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전통회화의 여러 장면 속에서 정물화의 한 단면들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서구의 정물화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 그림들이 그려지는 시기는 20세기와 와서 가능해졌다. 일제식민지시기를 거쳐 일본을 통해 본격적으로 수용된 서양화는 누드, 풍경, 정물을 본격적으로 그리게 한 동인이다. 서양화를 익히고 수용하며 이를 이식하기 위한 관습화된 그림의 장르로 정물이 강제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때 정물화란 유화와 수채화라는 서구의 이질적인 재료를 손쉽게 구사하고 익히기 위한 방편이자 사물의 재현과 아름다움을 극대화하기 위한 과정으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당시 몇 몇 대표적인 작가들의 정물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도상봉(1902~1977)은 한국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가로 백자나 라일락을 소재로 한 정물화가 특히 유명하다. 부드러운 아카데믹한 자연주의적 시각으로 일관하면서 화면의 무게감. 중후한 느낌의 고전적 색조, 정확한 대상의 묘사와 고전적 규범에 따라 엄격한 조형미가 그림의 중심을 이루며 정적인 소재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에서 온화하고 여성적인 미적 세계또한 엿볼 수 있다. 튼실한 구도와 색채로 구현되는 한국의 전형적인 사실주의로 알려져 있는데 특히나 조선백자에 대한 애정, 정겨운 이해바탕, 정적이고 고아한 품격. ‘한국의 미’를 추구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여기에는 여전히 문인화적인 화가관, 미의식과 다분히 보수적이고 관습적인 그림의 관행이 유지되고 있다. 그의 정물화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대중적인 미감과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 손응성( 1916~1979)은 철저한 내밀성의 표현으로 귀착한 세필화가로 치밀한 사실적 묘사에 바탕을 둔 자연주의적 양식과 묘사, 정신적 농도를 구현한 대표적인 아카데믹한 사실주의의 전형이다. 불상이나 고가구, 토기 등 동양적인 감성과 시간성이 내재된 오래된 사물에 주목해왔으며 이를 차갑고 기계적으로 묘사하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박득순(1910-1990)을 비롯하여 다수의 사실주의 경향의 구상작가들은 오늘날까지도 유사한 정물들을 오랫동안 지속해오고 있다. 그런가하면 대학입시정물화, 문화센터 미술강좌수업, 아마츄어작가들의 그림수업에 반드시 통과의례로 그려지고 있는 것도 역시 앞서 언급한 그러한 유형의 정물화다. 그러한 정물화가 특히 전성기를 누리던 1950년대 후반, 당시 우리에게 가장 절실했던 것은 경제적 안정이었고 이러한 당시 대중의 생활감정이 예술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데 그것은 이해하기 쉬운 그림을 바라고, 자신들이 상식적으로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들을 그 속에서 볼 수 있기를 바란 데서 찾아진다고 본다. 그러니까 시대를 역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고루한 국전 스타일의 구상화는 사실 ‘지난 근대화 100년간 우리 대중의 삶의 체취를 담아온 회화’인 것이며 이는 정물화에 극명하게 표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근대기에 그려진 대부분의 ‘꽃과 정물’은 ‘어설프지만 정성을 들여 가꾼 부의 부담 없는 상징이자 그나마 성공한 인생만이 보장받을 수 있던 문화적 향기와 대중이 꿈꾸던 생(生)의 안락을 상징한 것들이며 당시 대중이 지닌 꿈이 실현되었을 때 그 삶의 내용과 형식에 대한 재현이자, 1950~1960년대 정서의 단계에서 나올 수 있는 삶의 내음을 담고’있는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렇다면 그 정물화 역시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의미를 나름대로 담고 있는 셈이다. 이발소그림에서 엿보는 모든 정물 들 역시 동일한 맥락에 위치한다. 그런가하면 박수근( 1914~1965)의 정물처럼 소박한 그림도 있다. 근대화공간의 가장 빈한했던 구석들에 대한 신화화를 보여주는 그의 그림 속에는 그것이 풍경이든, 인물이든 혹은 단조로운 정물이든 간에 자신의 궁핍한 삶의 공간에 놓인 사물들, 자기가 온전히 이해하고 납득하며 자기 존재와 일체감을 이루는 것을 충실히 받아들이고 이를 숙명처럼 그리는 화가의 자의식이 녹아있다.
김환기(1913-1974), 문학진(1924-) 같은 경우는 구상적인 정물에서 벗어나 다른 방식으로 정물을 해석하고자 하였다. 김환기는 초기에
추상미술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대상을 반구상으로 단순화시키고 평면적인 화면구성을 보여주었다. 특히나 도자기로 대변되는 한국적 소재를 통하여 우리의 정서를 표출하고자 하면서 특히 푸른색을 배경으로 한 항아리들에는 푸근하고 격조 있는 시정이 넘치는 그림을 보여왔다. 문학진의 경우는 정물 등 구체적인 대상을 분석해서 주관적으로 변형하고 이를 다시 조합하는 방식의 조형 어법을 선보였다. 그 역시 신라 토기나 조선백자 소재. 마티에르와 정물의 결합을 통해 여전히 한국적인 미감과 정신을 담아내려는 의욕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작가들의 정물화는 추상이라기 보다는 스타일로 접근된 ‘의사추상’이자 여전히 구체적인 대상, 사물을 빌어 이를 단순화 시켜 가는 과정에 놓여 있다. 이러한 유형의 반구상의 정물화 역시 광범위하게 그려지고 있다. 이 두 가지 측면은 모두 정물이 소재주의로, 그림의 관습으로 굳어진 그런 역사를 보여주며 지속되고 있다. 근대의 기형적 체험을 겪게된 우리는 다만 꽃과 과일, 화병만을 그림의 소재로,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여기며 이 땅위에서 그런 정물을 그토록 오랫동안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시대 정물화의 유형
1990년대를 지나면서 젊은 작가들에 의해 기존 미술계의 획일화된 담론과 경향, 관습들이 본격적으로 와해되기 시작했다고 생각된다. 80년대 민중미술이 본질적인 역할을 했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의 파도가 밀려드는 80년대 중, 후반을 거치면서 우리 미술계는 신세대의 등장, 새로운 미적 감수성과 매체해석, 서구미술의 맥락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수용과 그로 인한 한국미술의 정체성 모색에 따른 갈등과 시도를 거치면서 이전과는 무척 달라진 것이 사실이다. 이른바 미술개념과 화가라는 존재에 대한 인식이 일정부분 변질되었다. 회화에 대한, 장르에 대한 인식 역시 큰 폭으로 굴절을 겪는다. 그에 따라 관습적으로, 창백하게 그려지던 정물 역시 다양성 속에서 신선하게 환생하고 있음을 본다. ‘정물’이 그림의 단순한 소재나 테크닉의 수련과정으로 머무는 데서 벗어나 또는 선험적으로 주어진 아름다움이라는 의미망에서 벗어나 자신의 그림을 모색하는 주된 매체로서 탈바꿈되기 시작한다. 동시대 정물화는 워낙 다채로운 의미와 의도에 걸쳐져있기에 이를 몇 가지 유형으로 단순화시키거나 기계적으로 분류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다만 회화를 재질문하고 모색해보려는 차원, 일상에 대한 천착과 관심, 개념적인 차원 등으로 거칠게 나눠볼 수 있지 않을 까 생각한다. 여전히 그림 그리기 대한 매력, 범람하는 물질로 이루어진 동시대의 삶, 자기애적이고 나르시시즘적인 미술관, 페티시즘, 도착증과 성애적인 사물관 등도 그 저간에 흐른다. 아울러 이전에 정물화란 장르도 이해되었던 것이 지금은 무척 많이 변질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오늘날 무엇을 정물, 정물화라고 규정짓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어쩌면 지금은 정물화를 매번 새롭게 정의하거나 기존의 관례와 정의를 부단히 넘어서려는 무수한 시도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분명한 사실은 이제 정물화가 사과, 모과, 화병, 꽃을 공들여 장식적으로 그려왔던 협소한 틀에서 빠져 나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1. 메타회화적인 정물
오늘날 모든 회화는 회화의 위기에 대한 대응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서양미술사 속에서의 회화의 위기는 대개 “캔버스에 묘사될 수 있는 종류의 회화적 공간”의 소멸문제와 연관되어 담론화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말하자면, 캔버스 틀을 넘어서면 그림 안쪽으로 펼쳐진다고 믿었던 가상의 3차원적 환영의 공간이 점차 캔버스 표면에 가까이 잡아당겨지면서 마침내 회화적 공간과 캔버스의 표면이 일치되어버렸다는 것 말이다. 소위 ‘회화의 위기’란 사실은 회화의 위기라기보다는 아날로그 사진과 추상화 일반을 모두 포함해 실제적이고 촉각적인 지표적 기호에 대한, 가상적이고 시각적인 도상적(영상)기호의 도전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늘날의 회화란 ‘회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이 아닌, 회화와 관련된 어떤 생각의 재현’일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개념회화, 메타회화적인 측면을 지닌다. 사실 모든 미술은 개념의 현실화이다. 그렇다면 동시대 개념회화는 지나치게 형식과 양식에만 초점을 맞춘 형식주의적인 현대미술, 혹은 구입과 소장이 가능한 예술 오브제의 전통적인 개념을 문제시하면서 그 차별성을 유지하고 있어 보인다. 아울러 미술관과 화랑 및 저널리즘 등 기성 미술계의 제도에 대해 문제 역시 제기한다. 그러니까 개념회화에 연루된 작가들은 실상 보다 폭넓은 의미에서의 ‘적극적인 소통’의 모색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동시대 개념회화는 ‘개념미술이 간과했던 감각적 아우라를 회복하고, 형식주의적 회화가 담보하지 못했던 사유의 힘을 총체적으로 증명’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여기서 회화는 감각을 자극하는 생의 에너지와 리듬을 포착하여 보는 이의 감각에 그 힘을 돌려주는 것의 역할에 주목하고 있다고 본다. 사유(논리)와 감각(표현), 그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는 시도도 읽힌다. 정물은 바로 그러한 메타회화를 시도하는데 무척 용이하게 다루어진다. 동일한 차원에 걸쳐져있지는 않지만 대략적으로 그런 유형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작가는 아래와 같다.
김지원은 우리 주변에 흔히 널려있는 소소한 일상을 주제로 평면성과 환영이라는 회화근본의 문제에 대한 접근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그의 ‘정물’ 역시 일종의 ‘패로디적 수사학’인 셈이다. 그에게 정물화라는 것은 회화적 작업의 쾌락과 그것으로부터의 거리 두기에 놓여있다.사실 그 정물화는 일상의 하찮은 물건들을 그린 것으로 대체로 화면을 꽉 채우는 크기로 확대해서 그려져있다. 그러나 이 사물, 정물들은 자신의 일상적 삶, 나아가 사회와 현실에 대한 은유적 성질을 포함한다. 거의 드로잉에 가깝게 그린 유화와 볼펜과 수채로 그린 드로잉들은 작가 자신의 일상과 기억, 생각과 시선의 파편화를 드러내는 장치이다. 무척이나 가볍고 자유로운 흔적인데 동시에 내밀하며 심리적 환기력 역시 만만찮케 흐른다. 작가에게 정물화라는 장르 자체는 주제적 의미보다는 ‘그리기의 관심과 회화적 쾌락’에 더 관계된다는 지적이다. “작고 평범하고 볼품없는 사물을, 그 표면과 물질성을 짐짓 무심한 듯이 아주 평등하고 꼼꼼하게 그리는 방식에서 거의 초현실적인 현대성”(성완경)을 보여주는 한편 이 비속한 사물들은 가볍고 무심하고도 지독하게 충실한 그리기에 의해 완성된다. 이 같은 그의 노동과 움직임은 회화의 무거움과 가벼움 양쪽에 걸쳐있다. 이 양자간을 왕복하면서 이 왕복운동 속에 자기 자신의(화가로서의) 실존의 형식과 회화에 대한 질문과 회의, 그리고 그것의 재의미화의 궤적을 독특하게 중충적으로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정보연은 일상을 둘러싼 공간과 그것을 구성하는 정물들, 즉 유리잔, 천, 모과, 책, 의자, 이젤과 캔버스, 창과 거울 등을 소재로 그린다. 그녀가 보여주는 일상의 공간은 시간이 멈출 듯 고요하고 왠지 모를 긴장감과 빛이 떠도는 모호한 공간이다. 견고한 원근법을 사용한 화면에 계획적으로 연출된 듯 놓여있는 정물들은 알 수 없는 알레고리로 뒤얽혀 무한한 상상력을 발동시킨다.
“재현에 대한 욕구에 의해 공간이, 공간 속의 공간이 창조되지만 그것은 실제 캔버스라는 현실의 죽음이며, 여기에 형이상학적인 회화의 매력이 있다”(작가노트)
작가는 하나의 대상이 원근법적인 시각의 망에 사로잡히고 그것이 화가의 욕망에 의해 납작한 캔버스 위에 재현되기 시작하는 순간을 현실의 영역을 떠나 회화의 세계로 들어가는 순간으로 본다. 따라서 캔버스를 ‘현실의 죽음’ 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현실의 죽음은 작가 자신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또 다른 공간 속에서 내면의 풍경으로 ‘재현’ 된다. 이렇게 일상의 풍경이 작가 내면의 풍경으로 치환되면서 관객은 전시의 부제처럼 화면 안의 빛light 이 흐르는flow 것을 숨죽이고 바라보며gaze 자연스럽게 작가의 내면세계와 소통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녀는 가장 고전적인 수법, 정통적인 회화에 충실하면서 그 안에 기이한 간극과 알레고리화 된 틈새의 막들을 두른다. 그녀의 정물은 바로 그러한 수단으로 다루어진다. 그것은 가장 일상적인 사물이면서 가장 낯선 존재로 다가온다.
박이소는 그의 그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불협화음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나와 ‘그 이외의 것’간의 관계를 지탱하기 위한 아이러니의 태도”(작가노트)
그의 역사(1990), 전통(1989)이란 작품은 제도화, 게토화 된 전통의 문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찾아가는 작업에 해당한다. ‘사물과 재료의 상식적 속성들이 그것에 대한 연상, 해석 혹은 의견과 만나는 지점, 그 지점에서 서로의 실오라기가 얽혀드는 관계의 단면도’가 그의 작품이다. 현대의 한국화가로서 박이소가 느끼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위기의식은 통시적인 방향과 공시적인 방향 둘 다로부터 양면적으로 기인한다. 통시적으로는 전통과의 관계가 문제이고, 공시적으로는 예술적 커뮤니케이션의 가능성의 문제이다. 여전히 그는 이 두 가지 주제를 화두로 삼고 있다. 그래서 작가는 ‘전통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비전통적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으로 돌려서 묻는다. 사실 박이소에게 전통이란 암담하고 추상적인 무게로만 억누를 뿐이다. 그리고 사실 지금의 자신은 철저히 ‘비전통적’일 수밖에 없다. 그가 자신을 연결 지을 수 있는 전통의 실체는 관념으로 증발되고 남아있는 것은 껍데기뿐이라는 얘기다. 그에게 한국적, 동양적이라고 남겨진 것들은 박제화되고 실체가 사라져버리고 남겨진 허물 같은 것들이다 산수화나 사군자는 ‘그냥 풀’로 보이고 단청이나 문양 등은 외국인들에게는 어떤 추상적인 무늬로 밖에 보이지 않는 그런 전통이다. 이들은 모두 어디론가 증발되어버린 우리의 예술적 전통에 대한 여러 겹의 패로디 Parody에 해당한다. 전통의 껍데기는 키치적 민화, 전통, 그리고 역사의 교훈은 책 속에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글씨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들끼리 모여서 역사, 역사, 역사 혹은 전통, 전통, 전통…이라고 지껄일 뿐이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알량하게 남은 제도화된 전통에 대한 패로디이자 그 내용가치를 잃어버리고 껍데기로, 즉 형식만으로 교환되는 오늘날의 예술적 소통관계에 대한 손가락질’(정헌이)이다.
황동하는 평면의 조건, 이미 우리에게 프레임frame이라는 선험적 통제의 구조를 띄고 있는 사각의 평면, 화면에서 출발한다. 그는 네 면의 다른 영역, 공간의 위상을 보여주고 이를 통해 그림을 바라보는 시선의 여러 결락점을 충돌시킨다. 사과 하나가 그려진 화면은 서로 다른 네 개의 사과로 일그러져 보인다.
김혜련은 뿌옇게 처리된 화면과 여러 겹의 색채 위로 긁어서 드러난 가는 윤곽선. 마치 필터를 통해 바라본 영화 속 장면 같은 인상의 그림을 보여준다. 외롭고 쓸쓸한, 아련하고 고답적인, 내면을 자극하는 감성을 전달한다. 이 감성의 매개는 관객들의 기억이다. 관객은 단편적 장소를 통해 부분적인 이야기를 완성하며 향수에 젖는다. 단편적이지만 은유와 함축, 상상력이 살아있는 그림이다. 그녀의 그림은 올바른 시점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 작품소재를 회화적 요구에 순종시키는 것, 그리고 순수회화의 본질적인 평면성의 강조를 통해 효과적인 회화언어를 섬세히 구사하며 우리에게 이미지라는 것이 어떠한 것이고, 어떤 것이며, 어떤 것일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의 시각적 체험을 야기하고,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정신적 함축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있다.
박병춘은 다양한 재료를 활용해 동양으로의 화법을 새롭게 모색한다. 수묵, 목탄, 파스텔 등이 자유롭게 쓰이고 회화와 드로잉, 문자와 이미지가 공존한다. 지필묵의 일반적 전통이나 속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갈망하고 있다. 그의 일련의 실험은 고식적인 매재 개념을 일탈하려는 의도와 더불어 그림을 보는 방식, 나아가 사물을 보는 시지각의 방식에 새로운 제안을 내놓으려는 의욕을 보인다. 그의 시도는 황창배가 8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시도했던 모든 실험의 또 다른 계승과 번안으로 보이는 한편 동시대 서양화와 타 장르의 여러 흥미로운 작업의 동양화적 겹쳐쓰기의 자취를 보여준다.
설원기의 회화는 수묵과 드로잉, 동양화와 서양화의 중간지점에서 탄생하는 기이한 흑백그림을 보여준다. 동시에 그의 그림에는 서정성, 문학성의 그늘이 세련되게 아롱진다. 유제비는 사실주의의 또 다른 변형체를 보이는데 커다란 물병에 담긴 꽃, 그림자와 빛, 붓꽃, 물감의 마티에르 등을 실험하면서 그의 회화는 물성, 추상, 평면성, 이미지 등을 한 자리에 매달고 나간다. 그것은 일반적인 구상도 극사실도 아닌, 회화의 새로운 접근이다. 그런가하면 권여현 역시 몇 가지 도상과 화면내의 다채로운 질감과 방법론을 통해 회화적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그의 회화, 화면은 모든 효과, 모든 기법과 모든 감각이 총연출되어 벌어지는 파노라마 공간이다. 가장 전통적인 그리기에 충실해 보이는 강요배는 제주도의 전통적인 항아리를 특유의 질감과 중후한 색조, 정신적인 풍랑이 섞인 격으로 떠내고 있다. 김지은은 먹다 버린, 남긴 과일의 일부가 담긴 병, 컵을 커다랗게 확대해서 그림으로써 일상적 존재를 비현실감나게 묘사하면서 색다른 회화의 표현방법을 보인다. 여기서 식물이란 대상은 의인화되고 다른 존재로 탈바꿈되는 듯하다. 그런가하면 박재웅은 식물들의 시간성을 차분하게 추적한다. 자기들의 본체에서 떨어져 나와 길고 긴 여정을 통해 결국은 타생물체에 의해 수동적으로 변형되고 섭취되는 소재들을 정물대 위에서 새 생명을 부여하고 의인화시켜 다시 재탄생에서 소멸까지의 과정이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과정은 인간의 생로병사를 연상시켜 준다. 그것을 지켜보고 기록하는 작가자신도 함께 시들고 소멸해 간다. 기록되어진 식물들은 동일한 크기의 캔버스에 인위성을 배제한 병렬식 구도로 배치되어 그려지고 연속적으로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 이런 형태의 반복은 우선 시각적인 면에서는 화면에 리듬감 또는 연속성을 부여하여 정지된 화면에 시간적 요소를 개입시킨다. 동시에 화면이 외부의 공간으로 무한히 지속될 것 같은 확장효과를 가져온다. 반복적 형태의 화면의 표면을 따라 시각을 이동하게 하여 그림의 평면성을 주지시킨다. 동시에 명상 또는 무아의 경지에 접근시키고 있는 것이다.
2. 후기 팝적인 정물
동시대 젊은 작가들은 일종의 여피세대의 취향을 대변한다. 금기에 도전하지만, 충격을 주기보다는 도발 속에 숨은 아름다움을 이끌어내는 한편 키치와 현대성, 감각의 세련된 결합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들은 대부분 현대 소비사회가 만들어낸 기호라는 새로운 형태로 이미지들을 만들어 표현한다. 논리ㆍ의미ㆍ분석에 의해 분류되고 기호에 의해 움직이며 존재하는 현대소비사회를 단순한 형태와 화려한 색채를 사용해 경쾌하고 밝은 작업으로 선보이는 것이다. 그들은 정기간행물, 예술서적, 패션잡지 등의 대중문화의 복제품 및 온갖 사물들, 디자인들에서 따온 것들을 선택하고 배열한다. 거대한 콜라주, 몽타주 전략이다. 이를 통해 문화적 세속성과 감정, 아름다움 사이의 균형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아울러 이는 대도시의 특정한 문화소비 집단에 기반한 문화패턴이자 그 예술현상의 하나이다. 이렇듯 극도화한 사적 취향, 컬트주의, 혼성취향, 부조리의 미학 등도 함께 따라 붙는다.
홍경택은 빈틈없이 화면을 가득 메운 연필과 책, 그리고 이것과 관계없는 물건들이 낯설게 어우러진 강렬한 원색의 그림을 보여준다. 지극히 팝적인 소재를 매개로 캔버스 위에 자신만의 세계를 표현, 자신이 그려낸 화면 위의 세계를 통해 일종의 판타지를 추구한다.
그것은 ‘그로테스크한 freak의 세계’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급)미술을 향유. 소비할 수 있는 중산층 이상의 계층과 동성애자나 마약중독자같이 아웃사이더로 존재하는 계급사이의 간극을 메우고 두 문화를 이어주는 매개물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최근에는 문자이미지를 도입하는데 대부분 대중음악에서 따온 내용들이다. 작가의 의도를 직접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조형방식이다. 즉 종교ㆍ철학적인 의미의 내용을 가벼운 대중음악의 어법을 빌려서 이것을 다시 함축적이며 동시에 직설적이기도 한 시각적 표현방식으로 새롭게 환원시킨 것이다. 그는 언더와 오버문화를 가로지르며 고전적 의미의 숭고한 아름다움을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최진기는 플라스틱제품의 변형체들을 만들어 보인다. 용도가 정확히 결정된 상태에서 만들어져 나온 생산품은 갑자기 작가의 사유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렸고 예술품재료로서도 그 규정이 모호해져 버렸다. 가벼운 공상을 통해 난무하는 정체성에 관한 판단에 대한 담론을 유보하고 가벼움과 유머를 선보인다. 달팽이로 변신한 스카치 테이프, 송충이로 돌변한 플라스틱 자 등이다. 그는 사물을 통해 꿈꾼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일상의 물건들과 생애를 같이 한다. 자신이 문구가 되고 문구가 또 다른 자아인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작가가 사물을 보면서 소외되고 덜 주목받는 것을 비틀어 그것 자체를 주목시킨다는 점이다. 화분받침대를 왕관으로 만드는 식이다. 쓰임새에 따라 부차적이고 덜 소중해 보이지만 사실 그것이 없어서는 안되는 것들을 재생시키는 시선의 따스함이 감촉된다.
다시덧을 조무소외도기 갓사각형의 PVC 비닐을 겹쳐서 음각화 된 이미지, 일상의 사물들을 은닉된 상태로 보여주는 이지은도 동일한 맥락에 위치해 보인다. 여기에는 흥미로운 시선의 굴절과 엿보기 등도 개입된다.
3. 일상으로서의 정물
조절 불가능한 정보과잉과 획일화된 가치기준이 공존하는 현대사회의 모순 속에서 많은 작가들은 각자의 일상에서 발견되는 때로는 평범하기도 하고 때로는 특수하기도 한 주제들과 사회현상에 관계되는 ‘사건들’에 주목한다. 이들이 다루는 ‘사건들’은 일상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모습을 한 파편들이며, 대부분 단편적 개입을 통하여 전개된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 ‘현실’, ‘일상’이 관찰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무궁무진한 재료를 탐구할 수 있는 흥미진진한 ‘영역’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컨텍스트에서 이들은 예술과 형식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새로운 예감을 한다. 그리고 형태를 제안하고 바로 이 현실과의 관계를 통하여 이들의 존재방식을 재정의하며 재창조하는 것이다. 확실히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물에 주목하고 사물을 통한 인식과 미감이 변질되어 보인다.
김수강은 작은 사물들을 각별한 애정의 시선으로 응시한다. 여기에는 물신의 그림자와 무심함, 권태로움도 자리한다. 이는 페티시즘이다. 좋아하는 대상에 대하여 과도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일, 만지고 좋아하는 것, 접촉함으로써 정신적인 이미지를 활기차게 하는 것이 다름아닌 페티시즘이다. 작가는 자신의 주변에 존재하는 작은 사물을 빌어 그 개별성의 세계를 존중하는 시선을 보여준다. 이는 장자의 ‘제물론’에 해당한다. 장자는 존재의 자연스러운 ‘있음’을 존중한다. 사물은 궁극적으로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황주리는 다양한 이야기와 씁쓸한 감정이 교차하는 회화를 보여준다. 깨알같은 삶의 편린과 자질구레한 일상의 사물이 중심과 주변의 체계적이고 순차적인 질서를 일탈하고 있다. 그녀의 모노톤 그림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마음의 풍경’이다.
전영근은 지극히 자존적 공간, 사적세계를 그린다. 꽁초, 소주병, 휴지, 칫솔, 재떨이 등이 전부다. 여기서 물감과 화면 자체의 물성이 환기시키는 순수한 시각적, 감각적 매력이 공존한다. 모노톤으로 부르기에는 너무나 감미롭고 색조를 따지기에는 극도로 억제된 팔레트를 갖는 작품이다. 회색바닥과 석회색 벽면으로 이루어진 전시장 어느 사이로 사라질 듯 아련함이 있다. 현실감을 배제하려는 듯한 빛 바랜 색조를 사용, 이미 흐릿한 기억의 일부로 편집된 한 장면 상기시킨다. 화면에 감도는 회색조의 그늘과
투박한 경계선 그리고 불투명한 공기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박용남은 자신의 삶에서 함께 한 것들을 돌로 재현, 현실을 새롭게 환기시키는 재창조 방식을 선보인다. 우리 삶에서 나름대로 중요한 구실을 하지만 지나치기 쉬운 일상 사물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갖고 이를 미술 문맥 속에서 그것의 존재를 환기시키는 방식이자 전략이다. 각종 재질과 색채를 지닌 대리석으로 사물을 재현했는데 이는 의미없는 사물들을 힘들여 재현해놓는 무모성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발랄한 꿈, 초현실적인 심리적 악몽으로 변형된 사물의 초상이다. 일상에서 수난적으로 남겨진 것들, 남겨진 것들은 언제나 상처와 같다. 사물에 대해 지니고 있는 우리들의 고정된 감각을 느닷없이 뒤집어 놓는 이 장난스러움은 심리적 공포를 자극하는 동시에 너무도 익숙하고 잘 알고 있다고 여기는 세계와 사물을 무척 낯설게 보게 한다. 아울러 오늘날 한국조각의 권위와 고정관념에 대해 무언의 항거로 비친다. 김 범은 테라코타로 위 형상을 만들고 이를 좌상, 와상으로 패로디한다. 평범한 물체를 기이하게 반전, 별달리 무섭지 않은 형상에서 괴기스러움을 만나게 하는 묘한 유머가 공존한다. 프로이트는 괴기스러운 것은 단지 그것이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에 괴기스러운 것이라고 한바 있다.
김지혜는 원색으로 책거리를 그렸다. 책거리가 여성적 공간으로 번안되었다. 한국적인 전통적 주제의 재해석을 시도하고 있는데 이 책거리 그림을 현대의 일상적 정물과 조합하여 에나멜의 화려한 색채로 표현했다. 설치 환경에 따라 작은 캔버스들을 배치하여 공간의 확장을 동시에 실험하고 있다. 작가의 정체성을 일상이라는 주제를 통해 미술사에서의 수많은 사조로 조합하고 해체하며 재해석하고 있다.
최은경은 일상의 사물을 그렸다. 책, 수챗구멍, 거울(축 발전) 기이한 색조, 비릿한 일상이다. 미술의 의미만큼 그 기능 역할이 제대로 수행되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까?’ 라는 고민을 구체적인 생활형태에서 풀어내고자 하는데 이는 미술의 기원인 주술적인 측면과 생활 속에서의 기복적인 측면에서 모색하고 있다. 그녀의 그림은 유화로 그려진 모든 그림들과 결별한다. 색감과 붓질, 구도와 대상의 재현 모두에서 그렇다. 그녀만이 떠낸 일상의 공기, 색조의 층, 그 속에서 희미하게 떠오르는 누추하고 비릿한 사물들, 가난한 살림살이, 소박하고 눈물겨운 생의 의지들이 파리하게 식어버린 방바닥, 벽지 등이 그녀가 연출한 삶의 무대다.
그러한 삶의 무대를 단촐하고 정겹게 보여주는 김덕기의 풍경은 가정이란 공간이다. 녹차 잔, 문방사우, 세한도에 등장하는 나무, 부부의 구두 등 애잔한 삶의 소망이 깃든 사물, 생활이 투영된 정물이 침묵 속에서 고독하게, 그러나 따스한 온기를 머금고 자리한다. 수묵으로 그려진 생의 정물화다. 한슬은 립스틱, 컵, 하이힐, 커터 칼 등 자신의 일상적 사물들을 크게 확대해 그렸다. 사물(私物), 자신의 주변 사물들은 모두가 대량 생산된 것이다. 공장에서 찍어낸 그것들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가지는 그녀는 도처에 쌓여있는 사물들을 보고 있지만 자신의 그림 안에서 이것들은 새롭게 시각적 인식의 대상으로 재생산되었다. 선택되어진 소재들의 특징은 소비의 충족을 위해서 생기는 대량 생산품이다. 그러니까 사소한 것들이고 인공적인 것이다. 이 사물들을 부정적으로 보거나 문제점을 제시하기보다 물건 개개의 색과 형태를 표현하고 있다. 그 사소한 물건의 재발견을 통해 넘쳐나는 인공적 생산물에 파묻혀 무의식적으로 반복되어지는 우리의 일상을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 공간이 되어버린, 젊은이들이 가장 즐겨찾는 곳이 되어버린 스타벅스, 커피 빈, 시애틀 등 다양한 커피체인점의 커피, 소도구들를 그린 노정연, 약방에 가득 쌓인, 진열대에 가지런히 놓여진 약상자. 박스 등을 흉내내 종이로 만들고 이를 사진으로 찍은 문형민 등도 그러한 예에 속할 것이다.
김현숙은 도구를 가지고 놀던 추억, 자신이 좋아하는 도구들을 가지고 자기 방식대로 놀이하던 체험을 보여준다. 그녀의 이 프라모델(plastic model)은 여자의 입장에서 프라모델을 만들고 조립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모색하고자 한다. 평면적인 형태는 그림자처럼 보인다. 양감이 표현된 자세한 형상보다 실루엣(라인)으로만 표현되고 있고 모든 것이 마이너스(-)로 파악되어서 일종의 동양적인 사고를 보여준다. 그것은 빈곤과 채워진 곳의 관계(산수화의 여백)이다. 육중한 무게감, 오브제로서의 물질이 아닌 여성적인 물질관. 정해진 형태이며 완성을 지운 자리에 스스로 존재하는 프라모델이다. 이는 어떤 전체성을 위해 종속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개별성을 중시하고 있으며 부피와 볼륨을 지우고 납작하게 떠내진 도구들은 음각의 공간에서 벗어나 양각으로 몸을 내밀지만 음화 된 공간을 강렬하게 환기시킨다.
김은진은 우리네 일상에서 흔하게 접하는 약용식물이자 전통문화, 몸과 관련된 은유로 가득찬 인삼이란 소재를 흥미롭게 변신시켰다. 그것은 일종의 의사인간이다. 인삼이 유사인간형이 되어 두루마리 형식의 프레임 안에 가득차 있는 것이다. 온몸에 문신을 새기고 광배를 두르고 보살의 몸에 걸쳐진 영락 같은 붉은 구슬로 이루어진 목걸이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인삼人蔘이다. 그 인삼은 또한 차도르나 잠옷 같은 것을 뒤집어쓰고 있거나 베개를 베고 잠을 자는 포즈. 두개의 인삼이 남녀가 엉켜있듯이 서로 얽혀있다. 사람의 몸과 살을 닮은 인삼의 육체에는 꽃 그림, 복福, 수壽, 구름 문양 등이 민화 마냥 그려져 있다. 간혹 어떤 것들은 머리에서 피가 조금씩 흘러내리거나 응고된 체 매달려 있다. 이른바 성혈聖血을 닮았다. 이 그림에는 죽음과 희생, 죄사함이라는 종교적 주제가 번진다. 그런가하면 불교나 무속 등에서 만나는 자기 구원과 기복 신앙적인 절실한 마음의 한 자락이 공들여 표상되고 있음도 본다. 자기 구원이나 마음의 상처를 보듬고 치유해주는 과정으로서의 그리기다. 영혼과 교감하는 활동,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세계, 그러나 인간의 내면에 깃들여 있는 잠재된 세계, 동시에 한 개인의 내면 속에 있지만 우주 전체가 함께 호흡하는 세계를 드러내고 그 세계를 교감하게 하는 예술에 충실하고 있다. 채색화의 주술성이 인삼과 만나 새로운 의미로 환생한 그림이다.
- 출처 / 정물예찬 2004. 1. 30 - 3. 14 일민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