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훈화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연중 제14주간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는 1997년 수원가톨릭대학교에 입학하여 2004년 로마 우르바노 대학에서 성서학 석사학위를 받고, 2004년 사제서품을 받았다. 수지성당, 율전동성당 보좌신부를 거쳐 2011년 로마 우르바노 대학에서 교의신학 석.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오산성당 주임신부, 2014년 수원교구 복음화 부국장을 거쳐 현재 수원교구 영성관 관장으로 재임 중이다.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6월16-22일)
성모 마리아, 행복의 모델
사람이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무엇일까요? 바로 ‘나의 행복’입니다. 내가 행복해야 주위 사람들도 행복해집니다. 성모 마리아는 그런 면에서 행복의 모델이셨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사촌 엘리사벳에게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이란 인사를 듣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행복은 바로 ‘믿음’에서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가브리엘 천사에게 마치 즈카르야처럼 의심이 담긴 대답을 했다면 행복을 간직할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성모 마리아에게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라고 인사합니다. 기쁨은 행복입니다. 그런데 이 기쁨은 ‘은총’의 결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은총이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게 만든 것입니다. 은총은 곧 성령이신데,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갈라 5,22 참조). 결국 성모 마리아는 성령의 은혜를 잘 지켜낼 줄 알아 행복하신 분이셨던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1테살 5,19)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성령의 불도 우리가 꺼뜨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맺어주시는 기쁨과 평화도 죄로 인하여 사라질 수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죄를 짓지 않으심으로써 행복한 감정을 유지할 줄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죄를 지으면 성령의 불이 꺼지고 행복의 감정이 사라집니다. 행복은 그리스도의 수난으로 오시는 성령 덕분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불을 잘 간직하는 사람이 성모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성혈대축일(6월 23-29일)
성모 마리아, 회개의 모델
성모 마리아는 행복하신 분이셨습니다. 그 이유는 죄로 성령의 불을 끄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죄를 짓는 이유는 죄를 행복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항상 자신이 행복이라고 믿는 것을 행합니다. 죄를 짓는 것도 행복하다 믿어서 짓는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죄를 짓지 않는 것이 행복임을 아셨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이 행복임을 알게 되는 순간을 우리는 ‘회개’라고 합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에서 둘째 아들은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루카 15,18-19)라고 청합니다.
아버지의 종이 된다는 말은 아버지께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아버지께 순종한다는 것은 죄를 짓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 순종하여 죄를 짓지 않는 것이 행복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 순종하며 산다고 믿었던 첫째 아들은 죄는 안 짓지만 그것이 행복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에 아버지는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32)고 말해주십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이 기쁘지 않으면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겸손하게 섬기는 종’에 대한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종은 밭에 나가 하루 종일 일을 하고 돌아와서는 주인의 음식을 차려주고 또 주인이 먹는 동안 시중을 듭니다. 그래도 종은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라고 말합니다. 성모 마리아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루카 1,38)라고 고백합니다. 주님의 종임에 감사하여 죄를 짓지 않으면서도 주님을 찬송하고 기뻐할 줄 알아야 성모님을 닮은 것입니다.
연중 제13주간(6월30일-7월6일)
성모 마리아, 믿음의 모델
행복은 외적인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입니다. 복권에 당첨이 되어도 3달 후면 그 이전의 행복수준으로 돌아갑니다. 대학이나 취업시험에 합격을 해도, 결혼을 해도, 집을 장만해도 기쁨은 3달 이상 지속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해 지금의 행복을 희생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행복까지 누릴 수 있는지에 대한 믿음에 따라 우리 행복을 이미 결정짓고 살아갑니다. 관상어 ‘코이’는 어항 속에서 5~8cm 자랍니다. 그런데 수족관에 넣으면 15~20cm자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강물에 풀어놓으면 무려 90~120cm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내가 부자라고 믿으면 겉보기엔 가난해도 부자의 행복을 누립니다. 지금 내가 임금이라고 생각하면 임금의 행복을 누립니다. 그러니 내가 하느님이라 믿으면 하느님의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행복하실 수 있으셨던 이유는 당신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음을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당신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어 사람이 되신 하느님도 당신께 순종하게 될 것임을 믿으셨습니다. 죄는 우리 안에서 ‘나는 그렇게 높아질 자격이 없어!’라며 우리를 작은 행복에 가두어놓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인간이 하느님이 될 수 있음을 믿으셨습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해주셨습니다. 아버지가 하느님이면 자녀도 하느님입니다. 내 자신을 하느님이라 고백하지 못하면 인간의 행복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인간이 어느 수준의 행복할 수 있는지 보여주신 분이십니다.
연중 제14주간(7월 7-13일)
성모 마리아, 선교의 모델
성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실 때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찼고 태중의 아기도 기뻐 뛰놀았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전하는 것이 선교인데, 선교는 결국 내가 누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웃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 안에 성령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것이기에 아직은 하느님의 나라를 전할 준비가 되어있지 못한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것은 엄청나게 큰 모험이었습니다. 다시 나자렛으로 돌아갔을 때 자신의 잉태한 모습이 만천하에 들어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성모 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루카 1,46-47)라며 찬미의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당신 행복을 엘리사벳과 그 가족에게 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이 없으면 성령의 불도 꺼집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도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고(마태 6,7; 루카 10,1 참조), 당신 이름으로 둘 이상 모이면 당신도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18,20 참조). 예수님은 우리가 서로 모이는 것을 좋아하시고 장려하십니다.
성모 마리아는 당신 행복이 엘리사벳과 그 가족들에게 전해지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자신이 먼저 행복하고 그 행복을 전하고 싶어 이웃을 만나려고 해야 성모님을 닮은 복음전파자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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