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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1] | |||||||||||
소백산 기슭의 유기물이 풍부한 토양에서 자라난 풍기인삼을 세계제일의 영약으로 널리 알리고자 매년 가을 열리는 풍기인삼축제는 관광객 유치증대 및 지역 경제활성화에 대한 성과를 인정받아 문화관광부 30대 축제로 선정되어 국비를 지원 받는 행사이다. 행사기간 중 운영되는 먹거리 장터는 인삼을 재료로 한 인삼갈비탕, 인삼막걸리, 인삼갈비, 삼계탕 등 별미음식과 영주지역 토속음식들로 또 다른 별미에 흠뻑 젖을 수 있게 할 것이며 행사장에 설치된 특산물 판매장은 인삼뿐만이 아니라 꿀맛 같은 영주사과, 전국최고의 육질을 자랑하는 영주한우고기 등 한번쯤은 마음을 충동시킬 영주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특산물이다. 아울러 행사기간 중 마련된 관광객 장기자랑, 떡메 치기, 한방 무료진료 등 관광객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축제로 열기를 더해 줄 것이며 인삼 관련 전시장이나 인삼요리 전시·시연은 우리가 미쳐 느끼지 못했던 인삼의 새로운 묘미를 느끼게 할 것이다. 특히 인삼케기 현장체험은 외지 관광객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으며, 자녀를 동반한 가족체험의 장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축제기간동안 축제장터에 있는 상설 인삼시장에 가면 원하는 대로 싼 가격에 풍기인삼을 구입 할 수 있으며, 세계 제일의 명약으로 효능이 입증된 풍기인삼은 국내는 물론 특히 일본과 더불어 미국 내에서도 극찬하고 있는 명품 중에 명품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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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2] | |||||||||||
[ ]에 의하면 서기 734년, 신라 성덕왕 33년에 당나라 현제에게 하정사를 보내어 산삼 200근을 선물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신라시대 때 벌써 소백산을 중심으로 한 풍기지역에서 산삼이 많이 자생한 것을 알 수 있으며, 조선 중종 조에 신재 주세붕 선생이 산삼에만 의존하던 것을 인위적으로 재배, 생산케 하였다. 그 수요를 충족하고자 전국에 인삼이 자생하는 토양과 기후가 비슷한 곳을 찾던 중 1541년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풍기의 토양, 기후를 조사한 결과 소백산을 중심으로 한 풍기 지역이 산삼이 많이 자생할 뿐 아니라, 인삼재배로서 가장 적합한 곳임을 발견하고 풍기에서 제일 처음 산삼종자를 채취하여 인삼재배를 시작하였으며 조정에서는 풍기인삼만 이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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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3] | |||||||||||
[ 1 ]년 제 18호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소백산국립공원은 한반도의 등뼈와도 같은 태백산맥의 줄기가 서남쪽으로 뻗어내려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와 경상도를 갈라 큰 산계를 이루는 소백산맥의 어깨 격인 영주분지를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다. 비로봉(1,439m), 국망봉(1,421m), 제1연화봉(1,394m), 제2연화봉(1,357m), 도솔봉(1,314m), 신선봉(1,389m), 형제봉(1,177m), 묘적봉(1,148m)등의 많은 영봉들이 어울려 웅장하면서도 부드러운 산세로 수려한 경관을 보여 주고 있다.
-소백산은 소백이라는 이름 때문에 작은 산이라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소백산은 큰 명산이며, 주봉인 비로봉은 수많은 야생화의 보고로 희귀식물인 외솜다리(에델바이스)가 자생하고있는 지역으로 봄이면 철쭉이 만개하여 그 은은한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며, 천연기념물 제244호인 주목군락과 함께 잘 어우러져 있어 그 고고한 자태와 함께 능선의 부드러운 멋, 우아한 곡선미와 함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준봉사이에는 고려 [ 2 ]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알려진 죽계별곡의 배경인 죽계구곡과 연화 봉에서 이어진 희방계곡이 뛰어난 경관을 이루고 있으며 북으로 흐르는 계곡들은 단양팔경의 절경이 되며 이 계곡의 암벽사이는 높이 30m의 웅장한 희방폭포가 주위의 경치와 조화를 이루어 장관을 자랑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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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4] | |||||||||||
서원은 풍기군수였던 신재(愼齋)주세붕(周世鵬) 선생이 고려 말 유현(儒賢)인 회헌 안향(安珦) 선생의 연고지에다가 조선 중종 37년(1542) 사묘(祀廟)를 세우고 안향 선생을 주향(主享) 하였으며, 다음해에는 안향 선생의 영정을 봉안하고 학사(學舍)를 이건(移建)하여 주자(朱子)의 백록동 서원을 본받아 [ ]을 창건한 데서 비롯되었다. 중종 39년(1544)에는 안축(安軸)선생과 안보(安輔)선생을 배향하였으며, 명종 원년(1545) 안향 선생의 후손 안현이 경상감사가 되어 서원의 사당을 참배하고 각종 경비를 지원하였다. 명종 4년(1549) 퇴계 이황 선생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경상감사 심통원(沈通源)에게 서원의 편액과 토지?노비를 하사해 주도록 계청(啓請)하자, 감사 심통원이 조정에 계청함으로써 이듬해 명종5년(1550) 5월 왕명으로 대제학 신광한(申光漢)이 서원의 이름을 『소수(紹修)』 라 지었으니,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다시 닦게 하였음 『기폐지학 소이수지(旣廢之學 紹而修之)』이란 뜻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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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5] | |||||||||||
부석사 무량수전은 1962년 12월 20일 [ 1 ]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3칸, 단층 팔작지붕 주심포계 건물이다. 부석사(浮石寺)의 본전(本殿)으로서 676년(신라 문무왕 16) [ 2 ]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하였다. 그 후 몇 번의 중창(重創)이 있었고, 조선 광해군(光海君:1608~1623) 때 단청(丹靑)을 하였다. 이곳에는 국보 제45호인 소조여래좌상을 모시고 있는데, 무량수전의 건물이 남향(南向)인데 비해 이 불상만 동향(東向)인 점이 특이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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