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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하동포구 팔십리 원문보기 글쓴이: 頑石
우리 서예의 정통과 전통을 찾는 작업 김정환(서예평론가)
오늘날의 서예가란 독창적인 창조자이기에 앞서 아직도 남아 떠도는 서예의 파편을 가지고 또 다른 서예를 빚어내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런 의미에서 요즈음 쓰여지고 발표되는 모든 서예는 그 옛날 존재했던 서예의 각주나 불완전한 번역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 편 한 편의 작품은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다른 작품과의 상호 연관 속에서 그 가치를 획득한다. 모든 작품은 자신 속에 다른 작품의 메아리를 품고 있으며, 그 메아리는 공시적, 통시적 구획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울려 퍼진다. 이미 여러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우리 시대 예술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어떤 강력한 이념의 제시나 영웅적 행동이라기보다는 부단한 자기 검증과 현실시각에 토대한 치밀한 성찰이라고 여겨진다. 시간이 흐를수록 서예가 담당할 수 있는 영역이 축소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점차 동의를 얻어가고 있는 요즈음 서예의 전통과 정통에 대한 깊이 있는 고뇌와 출구 모색이 담긴 서예전시회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효산(曉山) 손창락(孫昌洛)의 두 번째 개인전인 이번 전시회의 작품들을 보면 80년대를 통과해온 청년 세대가 닻을 올린 지점, 그리고 그들이 목적으로 하는 기항지의 좌표를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그가 이번 전시에 선보이고 있는 두 가지 큰 축은 전서(篆書)와 행초서(行草書)다. 금문(金文) · 동경(銅鏡) · 와당(瓦當) · 전문(전文) · 백서(帛書) · 초간(楚簡)등의 전서와 고전을 바탕으로 다양한 표정으로 확장된 행초서는 서로 호응하면서 연속적인 내재적 리듬을 유발한다. 그리고 그 리듬의 진동을 타고 잔잔한 여운을 실어낸다. 여과 없이 쏟아내는 격정과는 구별되는 순수 시각적인 여운이다. 그의 작품을 통해 살며시 안겨오는 안정된 리듬에서 질서 잡힌 감각과 상쾌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은 필자 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의 작품 속에는 고요함이 있고, 신선한 청량감은 아니더라도 안도의 휴식 같은 것이 있다. 조급함보다는 기다림이, 가벼운 재치보다는 우직함이, 야박한 경계 긋기보다는 너그러운 감싸안기가 각각 우위를 차지한다. 청태가 낀 우물 안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은 깊이감을 느낄 수 있다. 작품의 선문(選文)에서 형상까지 작품 속을 관통하는 특징은 물 흐르는 듯한 자연스러움이다. 번지르르한 외모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시대에 효산(曉山) 손창락(孫昌洛)은 그의 외모처럼 수수함과 소탈함을 강조한다. 겉모양보다 내면을 , 과시보다는 성실함을 더 소중히 여긴다. 우리가 까마득히 잊어버린 중요한 덕목을 환기해주는 듯하여 고맙다.
그는 크게 욕심을 내지 않고 자신은 내 세우지도 않는다. 욕심을 부리지 않으니 주위의 눈치를 크게 볼 것도 없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효산(曉山) 손창락(孫昌洛)은 자신의 소탈한 마음씨를 형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업은 그 사람의 성정을 닮는다고 한다. 이 말은 그에게 어울리는 표현이 아닌가 싶다. 작품에서 배어나는 담담한 청취가 꼭 그 주인과 닮았다.
현대 회화에서는 형상을 제거했을 때 질료가 아닌 물질의 힘이 드러나고, 질료를 제거했을 때 형상이 아닌 구조의 순수함이 드러난다. 이것은 서예의 경우에도 적용할 수 있다. 예컨데 행서에서 구조를 제거하면 초서가 된다. 이번 전시회에서 보여주는 효산(曉山) 초서는 한편의 음악과도 같다. 음악이야말로 순수 율동이다. 행서는 역동성을 갖출 때에만 평범함에서 벗어날 수 있고 초서는 형식미를 갖출 때에만 혼란스럽지 않을 수 있다. ‘화이부동(和而不同)’ ‘위이불범(違而不犯)’의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효산(曉山)의 작품 역시 구조와 힘, 형식미와 역동미의 조화를 보여준다.
효산(曉山)의 전서작품(篆書作品)에 접근해 들어갈 때 받게 되는 일반적인 인상은 아마도 둔중함과 완강함 그리고 집요함일 것이다. ‘천 개의 악곡을 연주해본 다음이라야 비로소 음악을 이해할 수 있고, 천 개의 검을 관찰해본 다음이라야 비로소 보검을 식별할 수 있게 된다.(凡操千曲而后曉聲, 觀千劍而后識器)는 말을 떠 올리게 된다. 그의 전서에 대한 미감 축적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부단한 노력에 의한 것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미의 관념은 하루아침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이론과 개념에 의지해서만 구성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미감의 축적에 의거해야 한다. 그의 작품은 한편으로 편안한 안주나 소요를 허락치 않는다. 오히려 보는 사람에게 지속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효산(曉山) 손창락(孫昌洛)이 보여주는 작품은 우리 시대 서예의 정통과 전통을 찾는 흔치 않은 사유의 결정물들이다. 그는 이번 전시로 매우 중요한 일보를 내딛었다. 사십대 작가이면서도 단아한 고전적 기품을 획득하고 있는 효산(曉山) 손창락(孫昌洛)에 대해 한국 서단은 앞으로 더 큰 기대의 짐을 얹어 주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사고의 여백 저편으로 새롭게 모습을 드러낼 새로운 조형언어들을 기대한다.
守 拙 25×33㎝
上善若水 50×69㎝
牧隱詩 浮碧樓 70×135㎝
李白詩 聽蜀僧濬彈琴 70×135㎝
聞道 40×23㎝
梅月堂詩 煮茶 54×20㎝
萬福興雲 40×45㎝
嘉興 · 永寧 30×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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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귀한 전시소식과 함께 감상의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축하의 맘 올립니다.
소식 감사하며 축하합니다.
감사하는마음으로 잘보았습니다 행복한 명절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