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시 울주군 두서면 활천리 산 57번지 양지바른 야트만한 야간기슭에
고려 때 동도(東都- 경주)의 명기(名技)로 이름났던 전화앵(900 ~ 1100, 추정)의 무덤이 있다.
동도는 경주요(고려인들은 경주를 동도라 불렀다. 서도는 평양이다.), 명기는 이름난 기생이니
경주의 전화앵은 그 명성이 당시 고려 전국에 알려져 있었다.
전화앵에 관한 기록은 [동국여지승람]의 경주부 고적조 [열박령]편에 소개되어 있으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悅朴嶺在府南三十里 東都名技口轉花鶯所埋之地
(열박령은 경주부의 남쪽 30리에 있는데 동도명기 전화앵이 묻힌 곳이다)
金克己時(이를 옮은 김극기의 시가 있으니)
玉貌催魂隔世 - 아름다운 용모의 혼을 재촉해 저 세상으로 가다니...
空端只見層(山頂) - 헛되이 하늘가의 바위벽만 바라볼 뿐이다
神女雨收巫崍 - 신녀가 비를 모아 무협에 뿌리는데
麗人風斷洛川 - 아름다운 이여, 그 바람은 낙천에서 끊겼도다
雲學舞衫曳地 - 운학무를 추던 소매는 땅에 끌리었고
月偸歌扇當天 - 월투가를 부르며 흔들었던 부채는 하늘에 닿았고나
行客幾傷芳性 - 지나는 길손이 그 아름다운 마음을 상하여
滿布紅淚泫然 - 손수건 가득 붉은 눈물에 젖도다
신라말기에 기녀 전화앵은 국가의 비운을 맛본 여성이었다.
신라말기의 경주는 전성기의 화려한 꿈이 많이 사라진 곳으로서,
전화앵도 천 년의 종사가 간 곳 없이 사라지고,
화려한 문물이 저 멀리 북쪽 송악으로 갈 때
홀로 옛 도읍지에 남아 화려했던 과거를 회상하고 있었다.
그녀는 경주에서 남쪽으로 30리 떨어진 열박령(悅朴嶺)을 좋아하였다.
그래서, 일찍이 화류춘풍(花柳春風)이 한들거릴 때면 이 고개에 올라 화려했던 시절을 회고해 보곤 했다.
일찍이 그녀는 경주의 명기로 알려져 시인과 유아량(儒雅良- 풍류를 아는 한량)들이 많이 따랐다.
"전화앵아, 너의 고운 모습은 화려한 꾀꼬리가 나뭇가지에서 우아는 것 같구나"
한 유아랑이 탄식조로 그녀에게 말한다.
"이미 꽃 같은 꾀꼬리도 세월과 함께 흘러갔소이다."
"아니다, 아직도 너의 목소리는 꾀꼬리 같구나"
이러한 말을 들으면 그녀는 환상에 젖어 한 곡조 부르기도 하였다.
과거에 그녀의 뒤를 따르던 유아랑들은 전화앵이 비관적인 말을 하면 지난 일을 더욱 간절히 회상하였다.
신라의 국운이 위태로울 때, 서남쪽에서 후백제의 견훤이 처 들어와 화려한 꿈은 하루아침에 깨지고 말았다.
그런가 하면 북방의 왕건이 임해전까지 들어와 유흥에 잠겨 있을 때는 어전에서 노래를 불렀다.
긴소매로 땅을 휩쓸며 곡선미 곱게 넘어가는 그녀의 모습은 북방 사나이의 간장을 녹였다.
"너도 송도로 같이 가자."
북쪽 무사들은 그녀를 보고 졸라댔다.
"싫소이다. 천한 몸이 어디를 간들 마음이 후련하겠소."
"아니다. 망국의 땅보다는 한창 흉하는 나라의 조정이 놀기 좋단다."
"안되오, 내 고향을 지키리다."
신라 멸망의 조짐이 20여 리의 길에 널려 있을 때도 그녀는 단장의 눈물만 흘렸다.
"망국의 대부들아, 어서 남의 나라로 가거라. 너희들이야말로 창녀보다도 더욱 절조가 없는 것 같구나."
라고 한탄하며 보냈다.
이제 경주는 동도로 변하고, 화려했던 도시는 보리만이 바람에 흔들릴 뿐이었다.
그런 중에도 여기 저기 빈터에는 전날의 탑이 우뚝 솟아 있다.
천 년의 고국은 이미 변했어도 봄이 되어 꽃이 피고, 꾀꼬리가 나는 날에는 그래도 전날을 생각케 한다.
많은 성곽이 촌가로 변해가도 오릉의 가을 풀은 저녁노을에 여전히 빛나고,
옥적소리 구슬프게 들려오면 봄을 생각하는 마음 더욱 안타까울 뿐이었다.
이러한 정경을 생각하면서 전화앵은 오랫동안 동도에서 살았다.
그런데 송도에서 때때로 내려오는 고려의 관리들은 그녀를 탐내곤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망국의 한을 머금고 다시 화류자리에 나오지 않았다.
"전날의 전화앵을 대령하여라"
새로 부임한 고려의 관리는 승리자처럼 소리쳤다.
"전화앵은 이미 갔소이다."
"어디로 갔다는 말이냐?"
"예, 열박령의 산신이 되어 갔습니다."
"기녀가 무슨 산신이 된단 말이냐?"
"즉시 대령하여라"
"몸만 아니라 넋마저 갔나이다."
완전히 고인이 되었다 하여도 믿지 않고 대령하라기만 한다.
딱한 노릇이다.
전화앵은 절개있는 있는 여성이었다.
승리자 고려 왕조에 대하여 더 이상 시달림을 받고 싶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경주 사람들은 그녀를 그리워하며 경주부 남쪽 30리나 되는 열박령에 묻어 주었다.
완전히 피어 보지도 못한 망국의 한 기녀는 열박령에서 다시 나라가 되어 가는 것을 보고 있으리라.
전화앵은 안타깝게 죽어갔으므로 후세 사람들이 그녀의 묘소나마 구경하며
화혼(花魂)이 묻혀 있는 활천리 묘소에 무언의 국상을 올리었다.
첫댓글悅朴嶺 在府 南三十里 東都名技 口轉 花鶯所埋之地 이렇게 잘라야 함은 어떠 하올런지여? 그렇다면 해석이 달라 지겠지요@@ 풀어 쓰면 "열박령은 경주부의 남쪽 30리에 있는데 동도명기 (전화앵이 아니라 -> "화앵"의 뭍은 곳이 입으로 전한다 (口轉) ". 이러하면 위의 해석에 빠진 "口"도 해석이 되고, 명기의 "姓"이 "轉"씨가 아니라 "입으로 전해오는 뜻" 으로 수정해 보면 해석이 원만할듯 한데 ?
울산의 경주 이씨 관련 어느 카페에서 펌한 글인데 이것을 역문한 분도 '口'자를 모르는 글자로 알고 '轉'자를 花鶯앞에 성씨로 보고 그냥 기생 '화앵'을 '전화앵'으로 역문한 것 같긴합니다만 원작자의 글을 함부로 바꿀수 없어 그대로 둡니다. 수우 종친님의 역문이 틀림없을 것 같습니다.지적해주어서 고맙습니다. 울산의 전화앵에 대한 역사가 모조리 전화앵으로 되어 있고 '口轉'에서의 구전도 '입으로 전한다'는 뜻은 '口傳'이기에 그대로 확인이 될때까지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두겠습니다.
첫댓글 悅朴嶺 在府 南三十里 東都名技 口轉 花鶯所埋之地 이렇게 잘라야 함은 어떠 하올런지여? 그렇다면 해석이 달라 지겠지요@@ 풀어 쓰면 "열박령은 경주부의 남쪽 30리에 있는데 동도명기 (전화앵이 아니라 -> "화앵"의 뭍은 곳이 입으로 전한다 (口轉) ". 이러하면 위의 해석에 빠진 "口"도 해석이 되고, 명기의 "姓"이 "轉"씨가 아니라 "입으로 전해오는 뜻" 으로 수정해 보면 해석이 원만할듯 한데 ?
울산의 경주 이씨 관련 어느 카페에서 펌한 글인데 이것을 역문한 분도 '口'자를 모르는 글자로 알고 '轉'자를 花鶯앞에 성씨로 보고 그냥 기생 '화앵'을 '전화앵'으로 역문한 것 같긴합니다만 원작자의 글을 함부로 바꿀수 없어 그대로 둡니다. 수우 종친님의 역문이 틀림없을 것 같습니다.지적해주어서 고맙습니다. 울산의 전화앵에 대한 역사가 모조리 전화앵으로 되어 있고 '口轉'에서의 구전도 '입으로 전한다'는 뜻은 '口傳'이기에 그대로 확인이 될때까지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두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