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으로 살았던 당신이 눈에 밟히는구려!
솔향 남상선/수필가
사람은 누구든지 향기를 좋아한다. 그러기에 옷에 향수를 뿌리기도 하고 향신료를 만들어 즐기기도 한다. 향기는 꽃에만 있는 게 아니라 사람에게서도 은연 중 새어 나온다. 향기는 보통 후각으로 감지하지만 마음으로 느끼는 것도 있다. 꽃이 아름답다지만 사람은 꽃보다 더 아름답다. 꽃에선 한 가지 향만이 나오는데 사람에게선 다양한 향기가 묻어나오기 때문이다. 따뜻한 가슴, 배려, 포용, 인내, 소박함 등으로 즐거움 편안함의 이런 저란 커다란 느꺼움을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늘따라 아버지 모습이 선하다. 임종하실 때, 내 아내만 찾으시던 그 아버지 얼굴이 말이다. 자식들이 자그마치 7남매나 되었건만 임종하실 때는 큰며느리 하나만 찾으시는 거였다. 아버지께서는 단말마의 한숨을 몰아쉬시더니 머리맡에 긴장하고 있는 내 아내를 알아보셨는지‘고마웠다.’이 한 말씀만 남기시고 눈을 감으셨다. 마지막 보내드리는 자리를 지켜드렸지만 장남인 나에겐 한 말씀도 안 하시는 게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었다.
아내 먼저 보내고 후회와 자성에 빠지는 세월이 여러 해 흘렀다. 임종 직전에 큰며느리만 찾으셨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버지의 마지막 둘도 아닌 한 말씀‘고마웠다,’는 이런 이유에서 하신 말씀이었으리라. <7남매 중 가난한 장남한테 시집와서 그 숱한 고생 다하면서도 얼굴 표정 한 번 고치지 않고 가정 평화를 지켜줘서 고맙다. 낯 한 번 찡그리지 않고 시아비 방광암 환자 수발드느라 고생 많았다. 효행으로 병 고쳐주려고 내 그림자가 되다시피 한 큰며느리야 많이 고맙다. 병원 치료받게 하느라고 이 병원 저 병원 그렇게 어렵게 발품 팔았어도 불평 한 마디 없어 감사했다. 수고 많았다. 정말 감사했다.>.
후회는 일을 그르친 뒤에 하는 것이라더니 그 말이 맞는 것도 같다.
아내가 세상 떠난 뒤에 주변사람들은 아내에 대해 칭송과 아쉬움의 얘기를 심심치 않게 들려주었다. <천사 같은 여인이었는데… ! 세상에 영민 엄마, 보라 엄마 같은 분 없었는데… > 하면서 곁에 없는 허전감을 푸념처럼 늘어놓는 이도 있었다.
아내 보내고 자탄과 자성의 세월을 보내면서‘아내가 괜찮은 여인이었구나!’하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무딘 사람이 보삭을 잃고서 귀한 걸 알면 뭐하겠는가!
아내는 이런 사람이었다. 아내는 화장을 하지 않고 살았다. 인공의 미보다도 소박하게 자연의 미로 사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다. 아내는 7남매의 장남 맏며느리로서, 7남매의 형수, 올케로서 남매 애들의 애 엄마로서 또 한 남자의 아내로서 1인 4역 이상 역할을 하느라 숨쉬기 어려울 정도 한 많은 인생을 살다 갔다. 거기다 증조부모, 조부모, 우리 부모님 제사를 유교식으로 준비하고 지내느라 연중 쉴 새가 없었다.
거기다 집이 없어 현재 사는 집에 입주하기까지 31번이나 이사를 했다. 아사할 때마다 나는 고3 담임한답시고 새벽밥 일찍 먹고 출근해서 밤늦게 귀가했다. 그 바람에 많은 이삿짐을 아내가 혼자 다 쌌다. 요즈음처럼 그 흔한 이삿짐센터 차도 부를 수 없던 시절이니 일일이 박스를 구해다가 짐을 포장한 거였다. 그러면서도 바가지 한 번 긁지 않고 늘 웃는 표정으로 가족들의 마음을 푸근하게 해 주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사람의 향기가 어디서 풍겨나오겠는가!
생활이 이렇지만 아내는 꿍얼대거나 불평 한 마디 없었다. 그러기에 나는 39년 교직 생활 중 29년이나 되는 고3담임을 하면서도 마음 편케 생활했다. 현모양처라 할 수 있는 아내 덕분에 2009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TJB 교육대상까지 받게 되었다.
아내는 독서를 좋아했다. 1주일에 3∼ 4권의 책을 독파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게다가 한학에 눈이 틔어 훈장님을 찾아 천자문, 명심보감, 통감, 소학을 배우고 사서삼경까지 마쳤다. 한학을 공부하며 중국어 회화까지 배우게 되었다. 건강관리가 신경 씌었는지 도솔산 산행을 나가 열심히 걸었다, 1달에 1번씩은 원거리 산행까지 쫓아다녔다. 몸의 유연성도 절감했던지 요가 학원도 빼놓지 않고 나갔다. 요가반 반장이 됐다며 매일 다른 사람보다 30분 정도는 일찍 나가 요가반 교실 청소를 혼자 다 해 놓았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칭송이 자자했다. 그 바쁜 와중에도 한식요리 학원에 나가 요리 공부도 했다. 그 바람에 한식요리사 자격증까지 받았다. 그리하여 가족들 생일이나 귀한 손님이 내방하면 손수 만든 구절판 궁중 요리로 대접을 했다.
그 때에 우리 집엔 고3 아들(영민)이 있었다. 아들은 대성고등학교에 다녔다. 그 떼 그 학교에서는 공부 잘 하는 학생 1반을 편성하여 특별지도를 하고 밤 12시가 지나도록 자율학습을 시켰다. 귀가 시각은 밤 1시 30분 정도였다. 아내는 그 시각까지 독서하면서 아들 오기를 기다렸다. 나는 학교에서 야간 자습으로 늦게 돌아와 피곤하다며 잠자리에 들곤 했다. 아내는 하루도 빠짐없이 늦게 귀가하는 아들에게 모성애로 아들의 힘이 돼 주었다. 그 덕분에 아들이 서울 대를 졸업하고 교직 생활을 하게 된 것 같다. 같은 부모지만 나는 아버지로서 역할을 잘 못하여 아내에게 많이 미안하고 부끄럽다. 지금은 하늘에 있는 아내이지만 느꺼운 감사를 드린다.
회상에 잠기노라면 이런저런 일들이 주마등 같이 스쳐간다. 지난 어떤 날은 아내 친구들이 대전에 온다기에,‘점심은 당신이 사야겠네!’했더니, 아내는 친구들한테 점심을 사면서,‘이 점심은 남선생이 사는 밥이니 더 맛있을 거야. 맛 있게들 먹어!’했다는 말을 아내가 소천한 후에 아내 친구가 들려주었다.
자신이 점심을 사면서도 남편 생색까지 내 주었던 슬기로운 아내가 눈에 밟힌다.
내 유성고등학교서 근무할 때 도솔산을 가로질러 걸어서 출퇴근을 했다. 여름날이면 내가 지고 가야 할 책가방을 빼앗아 아내가 자기 등에 지면서 하는 말이,
“땀나면 수업하기 힘들어요, 이 가방 내가 지고 갈게요!”
하면서 도솔산 분기점까지 지고 가서 건네주며, 자신은 도솔산 상봉으로 향하고, 나는 학교로 발길을 재촉하던 그 시절 추억이 가슴을 미어지게 하고 있다.
‘향으로 살았던 당신이 눈에 밟히는구려!’
도솔산 갈랫길 분기점을 산책할 때마다 눈에 밟히는 당신,
인고의 세월 속에서도 희생으로 살고 배려하고 봉사하며
쪼들린 가난에도 모나리자 미소를 달고 살았던 내 반쪽,
넉넉한 마음에, 사랑으로 효심으로 살다간 애들 엄마
보기만 해도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던 그 사람,
소풍길 왔다가 과일 향만 풍기다 간 그 여인 ,
이만하면 향수를 뿌리지 않아도 향내 나는 여인이 아니겠는가!
당신의 인내와 땀방울은 사랑이요 진정한 향내음이었어라!
첫댓글 사모님께서는 정말 천사같은 분이셨던 것 같습니다. 작가님의 사모님을 향한 큰 사랑에 심금이 울립니다. 저도 제 아내에게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사모님의 선했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사모님은 향기였습니다.
사모님은 사랑이었습니다.
조용한 내조자.
그윽한 미소로 할일을 다하시고 총총히 떠나신 사모님.
선생님께 그리움의 향기만남긴채
사랑하는 가족들을 두고
가시는길이 얼마나 힘드셨을까 ?
하지만 꿋꿋히 이겨내시는 선생님을 보면
역시 "우리 남편이야" 하고 더욱 안심을 하실 것입니다.
한송이 아름다운 꽃으로
떠나신 사모님.
선생님께서 자꾸 우시면
좋은길 가시기가 더 힘드는것이라고 하니
선생님. 이제 쪼금만
우시 옵소서.
바다만큼 그리운 마음이야
어찌 비길데가
있으리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