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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 호서유학 변천의 자취를 찾아 (제1일)—②
— [국제퇴계학연구회] 제5회 유교문화 유적답사
2022.08.25.(목)~08.27.(토)14일간)
* [호서유학의 유적 답사] (제1일) 8월 25일(목요일) 오후
○ 대전 탄방동 도산서원(道山書院)
회덕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 일행은 대전시 서구 탄방동에 위치한 도산서원(道山書院)을 찾았다. 산에 참나무가 많고 숯을 굽는 ‘숯방’이 있어서 ‘숯뱅이’라고 불렀던 마을이 일제 강점기 때 탄방동(炭坊洞)이 되었는데, 이곳에는 남산(南山) 혹은 도산(道山)이라고 하는 나지막한 산이 하나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 이곳에서 신선이 놀다갔다고 해서 남선산(覽仙山)이라고도 하는데, 그 도산 남쪽 기슭에 도산서원(道山書院)이 있다.
대전 도산서원은 만회(晩悔) 권득기(權得己, 1570~1622)와 그의 아들 탄옹(炭翁) 권시(權諰, 1604~1672)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
도산서원은 탄옹(炭翁) 사후 1676년 지방 유림들이 뜻을 모아 탄옹이 ‘참다운 선비로서의 긍식(矜式)’임을 내세워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추배할 것을 시도하였지만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10년이 지난 1693년(숙종 19) 4월 처음 도산향현사(道山鄕賢祠)라는 이름으로 유성 탄방(炭坊)에 창건되었다. 1711년(숙종 37) 사액을 받았으며 원래 사우(祠宇) 3칸, 묘문(廟門) 3칸, 강당(講堂) 4칸, 서재(西齋) 3칸, 남재(南齋) 3칸, 전사청 3칸 등 모두 23칸 규모였다.
만회 권득기 ― 탄옹 권시
▶ 만회(晩悔) 권득기(權得己)는 41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을 지냈으나, 광해군 때 벼슬을 버리고 도학(道學)에 정진하면서 여생을 보낸 절개가 굳은 선비였다. 그 아들인 탄옹(炭翁) 권시(權諰) 또한 높은 학행(學行)으로 대군사부, 한성부좌윤 등에 천거되었으나 이를 거절하고 낙향하여 탄방동에 서당을 짓고 도학(道學)과 예학(禮學)에 더욱 정진하였다. 도산(道山)이라는 지명도 그가 이곳에 정착하여 도학을 연마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1871년(고종 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리었으나 1921년에 다시 단(壇)을 조성하고 제향을 계속하여 오다가 1968년과 1973년 2차례에 걸쳐 안동 권씨 종중에서 전체를 복원하였다.
도산서원(道山書院) 탐방
현재의 도산서원은 제향공간인 함덕사(涵德祠)와 강학공간인 명교당(明敎堂)으로 나누어져 있다. 함덕사는 만회(晩悔) 권득기(權得己)와 탄옹(炭翁) 권시(權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각각 들어가는 문도 나누어져 있다. 명교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향직문(向直門)이요, 함덕사로 들어가는 문은 철문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 삼문(유정문)을 지나야 한다.
향직문에 들어서면 정면에 명교당(明敎堂)이 반듯하게 자리하고 있고, 마당의 오른쪽에 앞면 3칸의 시습재(時習齋, 동재), 왼쪽에 지선재(至善齋, 서재)가 있다. 오늘 명교당 앞에서 종친 유사(有司)가 나와 해설을 했다. 명교당은 앞면 5칸인데, 좌우에 방 한 칸씩을 들이고 가운데 3칸이 강당이다. 강당의 좌우에는 만회선생 십자훈을 전서로 서각한 ‘每事必求是’―‘無落第貳義’(매사에 옳은 것을 구하되 제2의 의에 떨어지지 말라)이 대련으로 걸려있는데, 이는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쓴 것이다. 여기에서 핵심어인 ‘시(是)’는 지선(至善)이고 의(義)이며 당연지리(當然之理)이다. 제2의 의(義)란 공리(公理)가 아닌 ‘사사로운 의(義)’를 말하는 것이다. 이 전서 대련에는 만회 권득기의 ‘의리사상’과 ‘구시사상’이 드러나 있다.
명교당에서 우측의 언덕으로 올라가면 전사청(典祠廳)이 있고 돌과 시멘트로 견고하게 쌓은 담장을 돌아가면 내삼문으로 통하여 함덕사(涵德祠)에 들어갈 수 있다. 함덕사 담장 안에는 선홍빛 백일홍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도산서원의 명교당 바로 뒤쪽 언덕에 재실(齋室)에 있다. 그 짜임과 규모가 서원과 방불하다. 재실을 서원 위에 큰 규모로 지은 것이 특이했다. 보통 서원의 위쪽에는 사당이 있기 때문이다. — 서원을 나와 탄옹 권시의 묘소(墓所)를 찾았다. 묘소는 반듯한 계단을 통하여 바로 올라갈 수 있지만 왼쪽의 완만한 포장길을 따라 올라갔다. 길의 좌측 아래에 숭모각(崇慕閣)이 있는데, 전면 5칸, 측면 2칸 장대한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이곳에는 ‘만회집’ 책판과 ‘탄옹집’ 책판이 보관되어 있는 수장각(收藏閣)이다.
탄옹 권시의 묘소
언덕 위의 묘소로 올라갔다. 묘역은 광활(?)했다. 초록의 잔디로 말끔하게 단장된 묘역의 위쪽에 왕릉을 방불케 하는 ‘탄옹 권시의 묘’가 자리하고 있고 뒤쪽에 장대한 송림이 묘소를 감싸고 있었다. 묘소 앞 좌우에 각각 비가 세워져 있는데 하나는 오석이요 하나는 백석이다. 두 비석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비명이 ‘有明朝鮮 嘉善大夫 漢城府右尹 贈資憲大夫議政府左參贊 炭翁先生 安東權公 (諱)權諰之墓 / 貞敬夫人 咸陽朴氏祔左’으로 둘 다 거의 비슷한 내용이었다. 탄옹의 사후 1672년(현종 13년) 처음 매장된 곳은 보문산 사정동이었다. 1700년(숙종 26)에 지금의 위치로 옮기었다고 한다. 하나는 처음 무덤의 비석이고 하나는 이곳에 새로 묘소를 쓰면서 세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확인해 보지는 못했다. —
그리고 ‘炭翁權先生神道碑’(탄옹권선생신도비)는 너른 잔디밭 아래 가장자리에 장대한 높이로 서 있었다. 비문은 소론의 영수 명재(明齋) 윤증(尹拯)이 쓴 것이다.
권득기―권시 가계의 화려한 혼인관계
만회·탄옹 부장의 혼인관계를 살펴보면 화려하다. 서인·노론·소론·남인 등 당시 17세기 명문으로 알려진 가문과 중첩된 혼인관계를 가지고 있다. 조선에서의 혼인은 단순히 개인대 개인의 결합이 아니고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었다.
▶ 안동 권씨의 시조 권행(權幸)의 23세인 만회 권득기(權得己, 1570~1622)는 1610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예조좌랑을 지냈다. 이 시기에 광해군의 계축화옥과 인목대비의 서궁유폐의 패륜을 보고서 벼슬을 포기하고 충남 태안의 바닷가에 은둔하여 생애를 마감했다.
▶ 만회의 다섯째 아들 탄옹(炭翁) 권시(權諰, 1604~1672)는 대전 입향조이다. 어려서 안자(顔子)에 비유될 정도로 촉망을 받았고 유일(遺逸)로 대군사부·시강원지의 등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서연이나 경연에만 간혹 참석하였던 산림학자였다. 탄옹은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가학을 기본으로, 부친의 도의지교(道義之交)이며 처삼촌인 잠야 박지계(朴知誡) 문하에서 수학하여 예학(禮學)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그후 권시는 벼슬에 나아가 승지·찬선 등을 거쳐 1660년(현종 원년) 한성부 우윤(右尹)을 지내면서 김장생·김집 문하의 당대 거유들이었던 송시열·송준길·윤선거·유계·이유태 등 17세기 정계와 사상계를 주름잡던 서인계 학자들과 교류하는 한편, 허목과 윤휴 등 남인 학자들과도 친교를 하였다.
만회·탄옹 가문의 연혼관계에서 첫째로 주목을 끄는 것은 노론의 영수이며 17세기 정치사상계를 주름잡던 송시열가와 중첩된 혼인이다.
탄옹 권시의 차남 유(惟)가 송시열 딸과 혼인하여 양가는 사돈이 되었다. 그리고 탄옹의 장형인 권적은 송시열의 네 명의 형제 가운데 막내인 송시걸(宋時杰)을 사위로 삼았다. 이로서 송시걸은 탄옹의 조카사위가 된다. 이러한 연혼관계는 기해예송 때 권시가 송시열과 견해를 달리함으로써 손자 이진(以鎭)이 과거에 급제 후 관직생활을 하는 동안 정치적으로 변동을 겪을 때마다 처신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특히 권이진에게 노론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은 외조부이고 소론의 영수 윤증(尹拯)은 고모부인 동시에 스승이었다.
두 번째로 주목되는 것은 만회 권득기와 박지계 가문관 중첩된 혼인관계이다. 박지계는 서인으로 예학의 대가이고 만회와는 막역한 도의지교였을 뿐만 아니라 ‘격물치지’ 논쟁을 전개한 인물이다.
만회 권득기의 장남 권적은 박지계의 형인 박지양(朴知讓)의 딸을 처로 맞이하였다. 그리고 만회의 다섯째 아들 탄옹 권시는 박지계의 중형 박지경(朴知警)의 딸을 처로 맞이하였다. 바로 묘비에 적힌 ‘정경부인 함양 박씨’이다. 또한 박지계의 아들 박유근은 권득기의 문인이고, 박지계의 손녀이자 박유근의 딸은 권득기의 손자며느리가 되었다. … 양가는 혼인으로만 연결된 게 아니고 학문적으로 사승(師承) 관계에 있었다. 권득기의 아들 권시는 박지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박지계의 아들 박유근은 권득기의 문인이었다. 이를 통해 양 가문이 17세기에 혼인이나 학문적으로 얼마나 긴밀한 관계인가를 알 수 있다.
세 번째로 파평 윤씨 가문과의 혼인이다. 탄옹 권시는 윤선거의 아들 윤증(尹拯)을 사위로 맞았고 송시열(宋時烈)의 딸을 며느리로 삼았다. 그리고 윤선거의 동생인 윤문거의 아들 윤박은 송시열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와 같이 연혼관계를 맺은 권득기·권시·윤선거·윤문거·송시열 등은 호서의 대덕, 연산, 노성 등 인근지역에 거주하면서 서로 각별한 우의를 갖고 있었던 사이였다. … 그리고 우계 성혼의 사위가 윤선거의 아버지 윤황이었으므로 창녕 성씨 가문과 인연을 갖고 있다.
네 번째로 권시의 장남 권기(權愭)는 신승구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신승구의 장인 수암(修巖) 유진(柳袗)은 동인의 영수인 서애 유성룡(柳成龍)의 셋째 아들이고, 남인의 영수 우복 정경세(鄭經世)와는 동서지간이다. 이로 보면 권시는 동인의 가문과도 인연을 맺고 있었다.
다섯째로 탄옹 권시의 차녀는 남인 윤휴(尹鑴)의 아들 윤의제(尹義濟)에게 시집을 갔고, 삼녀는 송도현(宋道顯)에게 시집을 갔다. — 《도산서원지》(도산학술연구원, 2018.10.19.) pp. 119~122
권득기·권시 부자의 혼인관계는 노론, 소론, 남인 그리고 간접적으로 동인까지 포함하여 당색과 관계없이 17세기 명가들과의 중첩된 혼인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아직 당쟁이 극한으로 대립하기 이전이어서 가능한 것이었지만 조선의 사족사회에서 혼인이 갖는 중요성이 어떠하였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 이 화려한 혼인맥이 안동 권씨의 가문을 번영하게 하고 권득기·권시가 명철보신한 기반이 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곳 탄방동에 방대한 땅을 소유하고 호서의 사족으로 번성하게 되어 가문의 서원, 묘소 등을 아름답게 조성하여 그 유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 논산 명재고택 (論山 明齋古宅)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에는 대문도 담장도 없이, 마을을 향해 활짝 열린 명재고택(明齋古宅)이 있다. 이 고택은 파평 윤씨(坡平尹氏)들의 세거지인 옛 이산현에 있는 이산(尼山)을 배산(背山)하여 인접한 노성향교(魯城鄕校)와 나란히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뒤로는 산줄기를 병풍으로 두르고, 앞에는 장방형의 커다란 인공 연못을 두었다. 연못 안에는 자그마한 원형 섬이 있고, 그 안에 고택과 함께 300년의 세월을 보낸 배롱나무가 멋스러운 곡선을 그리며 운치를 더한다. 연못을 지나 앞마당의 섬돌을 오르면, 기단 위의 기품 있는 고택의 사랑채가 반듯하게 자리 잡고 있다.
바로 숙종 때 소론(少論)의 지도자였던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11))의 고택이다. 이 고택은 국도에서 마을길로 접어들어 조금 올라가면 나온다. 집 앞으로 직접 보이는 시선을 막기 위한 등선과 커다란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서 있다. 그 옆으로 윤증의 어머니 ‘공주 이씨 정려각(公州李氏 旌閭閣)’이 있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는 강화로 가서 권순장(權順長)·김익겸(金益謙) 등과 함께 성문을 지켰다. 이듬해 강화가 함락되자 권순장·김익겸이 자결할 때, 윤선거의 아내 이씨(李氏)는 자결했다. 공주 이씨 정려문에는 윤증의 생애도 요약되어 있다.
‘정려의 주인공 공주 이씨(公州李氏)는 문경공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의 부인이며, 명재 윤증의 어머니다. 윤선거는 김집(金集)의 문인으로, 1636년 청국의 사신이 왔을 때 유생들을 거느리고 청나라 사신 용골대를 죽이고 명나라에 대한 의(義)를 지키고자 상소를 올렸다. 그해 겨울, 청 태종이 병자호란을 일으키자 윤선거는 강화도로 피난을 떠났다. 강화도마저 함락되자 공주 이씨는 청군에게 죽느니 순절을 택하였다. 이를 계기로 윤증은 조정의 관직에 임명되어도 조정에 나가 벼슬을 한다는 것은 어머니의 순절에 대한 보답이 아니라며 사양하였다. 윤증의 덕행에 많은 선비들은 그를 ‘백의정승’이라 대우했다.’
명재고택(明齋古宅)
윤증은 임금이 무려 18번이나 벼슬을 내렸으나 일체 사양했을 만큼, 성품이 대쪽 같았다고 한다. 게다가 검소와 나눔의 미덕을 몸소 실천하고 후대에 가르쳤는데, 덕분에 은혜를 입은 사람들에 의해 동학혁명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고택(古宅)이 소실될 뻔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윤증 선생의 성품을 반영하듯 고택은 다른 사대부 집안의 가옥에 비해 겉모습이 소박한 편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기품이 느껴질 뿐 아니라, 곳곳에 숨겨진 과학적 설계가 깃들어 있다.
명재고택은 윤증(1629~1714)이 살아계신 1709년에 맏아들 윤행교와 손자 윤동원에 의해 지어졌는데, 정작 윤증은 ‘유봉초가’에서 살았다.
명재고택은 부드러운 곡선의 노성산의 산줄기가 세 갈래로 흘러내린 가운데 능선 끝에 자리하고 있다. 동쪽으로 흘러내린 언덕 위로 보이는 지붕의 곡선들이 안정감이 있다. 정면에서 보면 기와의 지붕 용마루 곡선이 산의 곡선과 같은 반경으로 맞아 떨어져 부드러우면서도 자연스럽게 산과 하나가 되는 느낌을 준다.
높은 기단 위에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의 사랑채가 있고, 사랑채는 큰사랑방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대청이 있고, 좌측에는 누마루가 있다. 또 그 뒤로 작은사랑방과 안사랑방, 대문간이 이어진다.
전면이 개방된 사랑채 왼쪽 1칸 뒤로 '一' 자형의 중문간채가 자리잡고 있다. 중문간채는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도록 1칸 돌아 들어가게 중문을 내었다. 중문을 들어서면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대칭을 이루는 'ㄷ'자 모양의 안채가 있어서, 중문간채와 함께 튼 'ㅁ'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 안타깝게도 고택의 안채는 공사 중이어서 들어가 볼 수가 없었다.
사랑채 누마루에는 ‘離隱時舍’(이은시사), ‘桃原人家’(도원인가), 오른쪽 대청마루 안쪽에는 ‘虛閑高臥’(허한고와) 등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는 평생은 은둔하여 산림처사로 지낸 윤증의 삶과 성향을 그대로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에서 안채로 넘어오는 길에는 벽이 있는데, 이곳에 과학적인 원리가 숨어 있다. 문간에 벽을 설치하여 방문객이 안채의 내부를 볼 수 없도록 차단한 것이다. 단 벽 아래에는 공간이 나 있어, 안채의 마루에서는 그 공간으로 신발을 보고 방문객을 미리 짐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여자들의 공간인 안채를 남자들이 함부로 들여다볼 수 없게 한 지혜인 것이다. 또한, 안채 옆으로 곳간채가 있는데, 두 건물을 나란히 두지 않고, 북쪽으로 갈수록 좁아지도록 두었다.
집 앞에는 넓은 바깥마당이 있고 그 앞에 인공 연못을 파고 가운데에 원형의 섬을 만들어 정원을 꾸몄다. 또한 안채 뒤쪽에는 완만한 경사지를 이용하여 독특한 뒤뜰을 가꾸어, 우리나라 살림집의 아름다운 공간구조를 보이고 있다. 모든 건축부재의 마감이 치밀하면서 구조가 간결하고 보존상태도 양호한 조선의 양반주택으로 중요하다.
이 가옥은 사랑채 정면과 동쪽 편에 언덕을 이루고 그 위에 소나무를 심어 마을길에서 직접 보이지 않도록 꾸며져 있다. 그리고 동쪽 언덕으로는 이 집의 역사를 내려다보는 듯한 세 그루의 커다란 느티나무 노거수가 있어 여름이면 녹음이 마당 가득히 짙어진다. 또한 이 가옥의 뒷산 자락에는 곡선미가 아름다운 노송 숲이 집을 향하여 기울어져 있는 풍경이 장관이다.
명재(明齋) 윤증(尹拯)
• 윤증(尹拯, 1629(인조7)~1714년(숙종 40))은 1629년 한성부 정선방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무렵 그의 본가는 충청남도 노성(魯城, 논산)에 있었으므로, 노성 출신으로도 본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자는 자인(子仁)이며,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峰)이다. 할아버지는 대사간 윤황(尹煌)인데, 우계(牛溪) 성혼(成渾)에게 배우고 스승 성혼의 사위가 되었다. 그러므로 윤증은 성혼의 진외증손이다. 아버지는 윤선거(尹宣擧)이며, 어머니는 공주 이씨(公州李氏)로 이장백(李長白)의 딸이다. ‘明齋’(명재)라는 호는 중부(仲父) 윤순거(尹舜擧)가 지어준 것이다. 윤증(尹拯)은 숙종 때 대사헌·이조판서·우의정 등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으며, 왕과의 배면(拜面)도 없이 상신(相臣)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처음엔 송준길·송시열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나, 서인이 노론·소론으로 분당하자 송시열의 노론에 대항하여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 1642년(인조 20) 아버지 윤선거(尹宣擧)와 유계(兪棨)가 금산(錦山)에 우거하면서 도의(道義)를 강론할 때, 윤증도 함께 공부하며 성혼의 학맥을 계승하였으며 성리학에 전심하기로 마음먹었다. 1647년 탄옹 권시(權諰)의 딸과 혼인하고,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후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주자(朱子)에 관해 배웠고, 1657년(효종 8) 김집의 권유로 당시 회천(懷川)에 살고 있던 송시열(宋時烈)에게서 《주자대전》을 배웠다. 이후 학문 연구에 뜻을 품고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 피난해 있던 서인의 사대부와 부녀자들은 모두 자결을 택했고, 그의 어머니 공주 이씨 역시 자결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윤선거는 혼자 피신해 있다가 살아서 나왔고, 이는 아들인 윤증에게도 멍에가 되어 비방의 대상이 되었다.
• 1680년 상신(相臣) 김수항(金壽恒)·민정중(閔鼎重)이 숙종에게 상주하여 윤증을 경연(經筵)에 부르도록 청했으며, 나중에는 별유(別諭)를 내려 부르기도 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이 때 박세채(朴世采)가 윤증을 초빙하여 같이 국사를 논할 것을 청하고, 부제학 조지겸(趙持謙) 역시 성의를 다해 올라오도록 권하였다. 이로부터 여러 번 초빙되고, 박세채가 몸소 내려와 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윤증은 “개인적 사정 이외에 나가서는 안 되는 명분이 있다. 오늘날 조정에 나가지 않는다면 모르되 나간다면 무언가 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우옹(尤翁 : 송시열)의 세도가 변하지 않으면 안 되고, 서인과 남인의 원한이 해소되지 않으면 안 되고, 삼척(三戚 : 김석주(金錫胄)·김만기(金萬基)·민정중(閔鼎重)의 집안)의 문호(門戶)는 닫히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의 역량으로 그것을 할 수 있는가. 내 마음에 할 수 없을 것 같으므로 조정에 나갈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박세채는 이 말을 듣고 더 이상 권하지 못했다.
• 윤증의 묘소는 공주시 계룡면에 있다. 묘비엔 ‘有明朝鮮徵士波平尹公諱拯之墓’(유명조선징사파평윤공휘증지묘)라고 적혀 있다. 징사(徵士)는 나라의 부름을 받은 선비라는 뜻이다. 윤증은 대사헌·우의정 등에 제수됐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백의정승’이라 불렀다.
* [논산의 파평 윤씨 노정파] ☞
파평 윤씨(波平尹氏)는 고려 개국의 삼한공신 태사 윤신달(尹莘達)을 시조(始祖)로 한다. 동북 9성을 개척한 윤관 장군이 그 5세이다. 파평 윤씨들은 조선시대에도 번영을 구가했다. 학문적 능력을 비롯한 이 가문의 역량이 가문 번영의 밑거름이었다. 그에 더해, 왕실과의 결혼도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다. 조선왕조에서 왕후를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이 바로 이 가문이다. 세조(수양대군)의 부인인 정희왕후, 성종의 부인인 정현왕후, 중종의 부인인 장경왕후와 문정왕후가 파평 윤씨이다.
파평 윤씨 논산(論山) 입향조는 효정공 윤돈(尹暾, 1519~1577)이다. 윤돈은 20세 윤선지(尹先智)의 아들 3형제 중 둘째아들이다. 형과 아우는 경기도 파주(파평)에서 살았지만, 21세 윤돈은 임진왜란 이전에 처가가 있는 니산현(尼山縣, 논산) 득윤면 당후촌으로 내려와 살게 되었다. 윤돈(尹暾)은 노성에 정착하면서 장인인 유연(柳淵)으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아 경제적 기반을 닦았다. 윤돈이 정착한 지 100여 년 만에 ‘노성의 파평 윤씨’는 ‘연산의 광산 김씨’, ‘회덕의 은진 송씨’와 더불어 ‘호서삼대족’으로 꼽히게 됐다. 충청도 일원에서 3대 명문가가 된 것이다. ‘연산의 광산 김씨’는 사계 김장생―신독재 김집의 집안이고, ‘회덕의 은진 송씨’는 우암 송시열과 동춘당 송준길의 집안이다.
윤돈의 아들 22세 흥백(興伯) 윤창세(尹昌世, 1543~1593)도, 김안국의 문인으로 1533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두루 요직을 거친 명종조의 중신 경혼(慶渾, 1498~1568)의 딸(청주 경씨)과 혼인하여 처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기반으로 집안을 크게 일으켰다. 윤창세는 임진왜란 의병장으로 활약했고, 윤창세의 3남인 제23세 윤전(尹烇)은 이괄의 난 때 인조 임금을 호위하고 정묘·병자호란 때 활약했다. 윤전은 강화도에서 순국했다.
윤창세는 아들 5형제를 두었는데, 첫째가 윤수(尹燧)로 설봉공파, 둘째는 윤황(尹煌)으로 문정공파, 셋째는 윤전(尹烇)으로 충헌공파, 넷째는 윤흡으로 서윤공파, 다섯째는 윤희(尹熺)로 전부공파를 이루었다. 5형제 가운데 윤수와 윤황, 윤전은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여 윤창세 아들 5형제 계파를 ‘오방파’라고 부른다.
이 중 윤황(尹煌)이 바로 윤증(尹拯)의 할아버지이다. 2007년 《유학연구》(제15집)에 실린 최근묵 충남대 명예교수의 논문 〈명재 윤증의 학문 연원과 그 학맥〉에 의하면, 성혼(成渾)이 아버지 성수침의 학문을 가학(家學)으로 전수받은 뒤, 윤황(尹煌)·윤전(尹烇) 두 형제가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공부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윤황이 성혼의 사위가 되어 학문의 정통성을 계승함에 따라 성혼의 가학이 논산의 파평 윤씨에게 넘어갔다고 설명한다. 조부 팔송(八松) 윤황(尹煌, 1571~1639)은 병자호란 때 척화신(斥和臣)이었다. 아들 일곱을 두었는데, 윤훈거(尹勛擧), 윤순거(尹舜擧), 윤상거(尹商擧), 윤문거(尹文擧), 윤선거(尹宣擧), 윤경거(尹耕擧), 윤시거(尹時擧)이다. 이 중 윤선거가 윤증의 아버지이다.
☞ 전 전북대 교수 정학섭 박사의 조사에 의하면 현 윤석열 대통령은 윤선거의 형 윤문거(尹文擧)의 후손이라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에서 태어났지만, 부친인 윤기중 전 연세대 교수(한국경제학회장)는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죽림리 출신이다.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의 분당
윤증의 송시열과의 절교 선언은 ‘스승에 대한 배신’ 문제로 확산되어 의리·명분의 껍데기를 쓰고 노론·소론 간의 격렬한 논란거리가 되었다. 송시열은 주자도통주의(朱子道統主義)에 입각한 철저한 유교적 도덕정치를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송시열은, 역적모의를 조작한 김장생의 훈척인 김익훈(金益勳), 김석주 등을 옹호함으로써 명분을 잃게 되었고, 같은 서인이면서도 윤증은 김석주, 김익훈을 처벌할 것을 주장하여 논란이 되었다.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측은 현실과의 일정한 타협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는 데 최우선의 의미를 두었던 것이고, 윤증을 내세운 소론측은 현실과의 타협을 거부하며 사실과 명분을 고수하려 하였다.
또한 송시열이 강화도에서 혼자 피신한 윤선거를 평소 경멸하다가 비문에서 그를 비방하는 내용에 윤증의 감정이 상함으로써 송시열-윤증간의 관계도 함께 악화되었다. 윤증은 학문에 있어서 상당한 명망을 얻었지만 1669년 윤선거의 죽음이 그의 위치를 바꿔놓게 된다. 윤선거는 같은 서인인 송시열과 달리 남인에게 상당히 관대하였고 윤증 역시 남인의 대표인 윤휴 등의 조문(弔問)을 받았으며 이를 송시열이 불쾌해했다.
그리고 결국 1673년(현종 14년) 이른바 ‘회니시비(懷尼是非)’가 벌어지게 되었다. 윤증은 윤선거의 묘갈명을 윤선거의 생전 친구였던 송시열에게 부탁했는데 송시열은 윤선거가 생전에 남인 영수인 윤휴를 두둔했던 앙금이 남아 있었다. 따라서 조문(弔文)에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자결한 처를 두고 윤선거가 도망쳐 나온 일을 가지고 야유하는 뜻을 적었다. 이에 윤증이 송시열에게 시정이나 삭제를 요구했으나 송시열은 들어주지 않았고 이 일에 감정이 상한 윤증은 결국 송시열을 비판하고 사제의 관계가 끊어지고 말았다. 윤증은 송시열의 인격 자체를 의심하고, 송시열을 두고 “대인의 의(義)와 소인의 이익(利益)을 함께 행하고, 왕도와 패도를 같이 쓴다.”(義利雙行 王覇竝用)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말년에는 제자인 유상기와 불화가 있었다. 유상기의 조부 유계는 《가례(家禮)》의 연원과 그 발달을 비교, 고찰하여 가례의 본질과 그 전개 과정을 이해하는데 참고가 되는 《가례원류》라는 책을 썼다. 문제는 이 책의 아이디어는 유계가 냈지만 자료를 찾아보는 것은 윤선거-윤증 부자가 한 일이었다. 따라서 《가례원류》는 유계만의 단독 작품이 아니라 공동 저서인 셈이었다. 문제는 유상기가 《가례원류》의 원고를 달라 하였는데 윤증은 ‘그게 네 조부만의 책이더냐?’라며 거절했지만 유상기가 노론인 이이명에게 부탁해 《가례원류》의 간행을 도우라는 어명에 어쩔 수 없이 주었다.
나중에 유계가 단독 저자라 기록하고 부친인 윤선거와 자신이 기여한 사실을 모두 빼버린 것을 안 윤증이 분노하여 편지로 질책하자 유상기도 질세라 반격하는 등 공방이 이어졌고 그러는 사이 윤증이 죽자 《가례원류》의 발문을 송시열의 제자 정호(鄭澔)와 권상하(權尙夏)에게 각각 부탁하고 이에 응한 두 사람은 윤증은 ‘스승을 배신한 패륜아’라고 비난했다. 자기 옛 스승과 사소한 일로 인하여 사제 간의 갈등과 분열이 말년에 재현된 것이었다.
이렇듯 당시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과 대립각을 세웠으나 다행히 벼슬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예송논쟁’과 각종 환국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으며, 특히 경신환국(庚申換局) 이후 남인의 처리를 두고 남인을 강하게 처벌하자는 서인 강경파(이후 노론)에 대응하여 박세채, 남구만, 박세당 등과 함께 서인 온건파를 이끌게 되어 소론(少論)의 영수(領袖)로 추앙받는다. 그러나 윤증은 송시열과 대립하였기 때문에 훗날 노론에게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리게 된다.
윤증은 1682년(숙종 8) 호조참의, 1684년 대사헌, 1695년 우참찬, 1701년 좌찬성, 1709년 우의정, 1711년 판돈녕부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나가지 않았다. 1669년 아버지가 죽자 거상(居喪)을 주자의 《가례》에 의거하여 극진히 하였다. 그리고 윤증은 학질을 앓다가 1714년 정월 세상을 떠났다. 향년 86세였다. 1716년 소론이 실각하는 병신처분이 일어날 때 관직을 모두 추탈 당했으나 1722년 소론이 재집권하자 복관되었다.
윤증의 후손인 파평 윤씨 노종파 종가에서 올리는 차례상이 상상을 초월하게 검소하여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윤증이 후손들에게 '제상에 손이 많이 가는 화려한 유과나 기름이 들어가는 전(煎)을 올리지 마라', '훗날 못 사는 후손이 나오면 제사도 경제적으로 부담이 될 테니 간단히 하라'는 당부를 남겨서 이를 지키는 것이라고 한다. 심지어는 마을 사람들에게 폐가 된다고 양잠도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종학당(宗學堂) 정수루(淨水樓), 숙사(宿舍)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 95-1[종학길 39-6]에 있다. 종학당은 조선 중기 파평 윤씨 문중에서 운영해 오던 서당이다. ☞ (종학당은, 예정은 되어 있었으나 시간 관계상 탐방하지 못했다.)
종학당의 전신은 현 위치에서 서북쪽으로 약 50m 거리에 있는 정수루이다. 호암산을 배산(背山)으로 두고 앞쪽에 종학당을, 뒤쪽에 정수루와 숙사를 두고 있다. 정수루는 누각과 서재가 있어 선비들이 학문을 토론하며 시문을 짓던 장소였다. 정수루 정면 중앙에는 정수루(淨水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좌우로 향원익청(香遠益淸), 오가백록(吾家白鹿)이란 현판이 각각 걸려 있다.
종학당은 파평 윤씨 문중에서 수백 년간 운영해 오던 서당으로, 종중의 자제와 문중의 내외척, 처가의 자제들까지 합숙, 교육시키기 위해 1643년(인조 21) 윤순거(尹舜擧)가 건립한 교육 도장이다. 건립 당시 윤순거는 파평 윤씨 문중 자제의 교육 기틀을 마련하기 위하여 백형 윤훈거, 아우 윤선거와 함께 종약 및 가훈을 제정하고, 파평 윤씨 종학당을 건립했다. 또한 책, 기물, 재산 등을 마련하고 윤순거(尹舜擧) 자신이 초대 당장이 되어 초창기 학사 운영의 기반을 닦았다. 1910년 한일 합병 전까지 교육이 이루어졌으나 신교육의 도입으로 폐쇄되고 말았다.
종학당은 창건 후 약 340여 년간 많은 인재를 배출한 학문의 요람으로 노성 파평윤씨 가문의 문과 급제자 46인의 대다수가 이곳 출신이었다고 전해진다. 한 장소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과거에 40여 명 이상 배출된 것은 조선 600년 역사에서 없던 일이다. 1997년 12월 23일에 충청남도에서 유형문화재 제152호로 지정하였다.
○ 강경 황산리 죽림서원(竹林書院)
강경의 죽림서원(竹林書院)에 도착했다. 죽림서원은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 101[금백로 20-3] 금강에 연해 있다. 거기에는 우리를 안내하기 위해 목원대 역사학과 류용환 교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정학섭 박사에 의하면, 류 교수은 대전시립미술관 관장을 10년 동안 역임한 사학자라고 했다. 류 교수의 안내와 설명은 아주 진지하고 열정적이었다.
강경의 금강을 앞에 두고 있는 죽림서원은 작은 마당을 두고 동재와 서재가 마주보고 있으며, 마당을 지나 안으로 진입하면 정면에 낮게 한 단을 조성하여 신문(神門)을 두었고, 사우인 죽림사(竹林祠)가 위치해 있다. 죽림사(竹林祠)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앞면 열은 퇴칸이고, 뒷면 열은 내부 공간으로 꾸몄다. 이곳에 율곡 이이, 우계 성혼, 사계 김장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1고주 5량가 구조에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측면에는 풍판을 달아 두었다. 죽림서원에는 다른 일반 서원과는 달리 강당이 없다.
죽림서원(竹林書院)은 1626년(인조 4)에 세워졌다. 1663년(현종 4)에 중건하였으며 그로부터 2년 뒤인 1665년 사액되었다. 본래 창건 때에는 지명을 따서 ‘황산서원(黃山書院)’이라 했다. 또한 서원에 제향된 조광조(趙光祖), 이황(李滉), 이이(李珥), 성혼(成渾), 김장생(金長生), 송시열(宋時烈)의 6인이 모두 문묘(文廟)에 배향된 유현(儒賢)이라 하여 ‘육현서원(六賢書院)’이라 부르기도 했다. — 그런데, 호서지역 노론판(?) 한 가운데 퇴계 선생이 배향되고 있다니, 퇴계 선생의 학덕이 얼마나 고절한 것인가.
죽림서원의 창건에 최초 발의하고 건의한 인물들은 김장생의 문인인 최명룡, 송흥주 등이었다. 이들이 이이(李珥), 성혼(成渾), 김장생(金長生)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황산사(黃山祠)’가 죽림서원의 기원이다. 황산사는 후에 황산서원이라 불리다가 1665년 사액이 되면서 조광조, 이황을 추가 배향하고 죽림서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송시열(1607~1689)은 사후에 배향되었다. 1871년(고종 8) 서원 훼철령이 내려졌을 때 철폐되었는데, 해방 후 1946년 지방 유림들에 의해 단소(壇所)가 설치되고 1965년 사우를 복원하였다.
충청남도 남부 공주목에 속하였던 논산은 거의 서인계, 또는 노론계의 일색이었는데 죽림서원의 경우 영남학파인 조광조와 이황, 기호학파의 거유인 노·소론의 이이와 성혼, 노론의 조종(祖宗)인 김장생과 송시열이 함께 제향되어 있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황산 임리정(臨履亭)
죽산서원의 담장 밖 우측의 대숲을 끼고 완만한 돌계단을 올라가면 임리정(臨履亭)이 있다. 16126년(인조 4년)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이 건립한 건물로 후학들을 가르쳤던 서당(별당)이다. 원래는 ‘황산정(黃山亭)’이라 하였으나 〈임리정기비(臨履亭記碑)〉에 의하면 《시경(詩經)》의 “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매사 두려워하기를 깊은 연못에 임하는 것과 같이 하며 얇은 얼음을 밟는 것처럼 하라)이라는 구절에서 ‘臨履亭’(임리정)이라 하였다 한다. 즉 항상 자기의 처신과 행동에 신중(愼重)하게하라는 증자(曾子)가 《논어(論語)》(태백편)에서 인용한 말이기도 하다.
〈임리정〉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인데 왼쪽 2칸은 대청이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인데 그 전면에는 반 칸을 안으로 들여, 위는 누마루로 아래는 아궁이를 만들었다. 앞마당에 있는 〈임리정기비(臨履亭記碑)〉는 1875년(고종 12년)에 김상현(金尙鉉)이 글을 짓고 김영목(金永穆)이 글씨를 썼다. 그리고 〈임리정기비〉 옆에는 300년이 넘은 팽나무 노거수가 하늘 높이 솟아서 조용히 임리정을 지키고 있었다.
황산 팔괘정(八卦亭)
팔괘정은 산 아래에 있는 죽림서원을 중심으로 임리정 건너편 봉우리에 있다. 죽림서원(竹林書院)의 좌측 뒷산에 위치한 누정이다. — (필자는 수년 전, 논산을 방문하여 이곳이 고향인 친구(강경상고 출신)의 안내로 죽림서원 일대를 탐방한 적이 있다.)
처음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이 1626년(인조 4)에 금강이 연해 있는 이곳에 황산서원(黃山書院)과 임리정(臨履亭)을 세워 선현(先賢)을 추존하며 후진을 교육하였다. 그후, 1663년(현종 4)에 스승과 가까운 곳에서 있고 싶어 하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팔괘정(八卦亭)을 건립하여, 금강(錦江)의 수려한 경관을 즐겼다고 한다. 임이정과 팔괘정은 직선으로 약 150m 거리에 있다.
송시열(宋時烈)은 이 정자를 지으면서 창살무늬를 팔괘(八卦)로 꾸몄고, 그로 인하여 정자 이름을 팔괘정(八卦亭)이라 불렀다고 한다. 팔괘정 아래 위치한 황산서원은 지금의 죽림서원이다.
팔괘정의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2칸이며 금강 변에 남향하고 있다. 앞면에서 왼쪽 2칸은 넓은 대청마루로 하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만들었다. 지붕은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다. 이 누정 안에는 시를 쓴 현판이 걸려 있고, 누정 뒤의 바위에 송시열이 새긴 각자(刻字) ‘夢掛壁’(몽괘벽)과 ‘靑草岸’(청초안)이 있다.
송시열은 스승인 김장생의 문하에서 예학(禮學)을 전수받고, 뒤에 성리학(性理學)을 배웠으며, 서인(西人)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畿湖學派)를 이루어놓은 인물이다. 이로 인하여 강경유림(江景儒林)에서는 ‘임리정’과 함께 이 ‘팔괘정’을 유림의 소유로 삼아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1978년 3월 31일 충청남도의 유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되었다.
○ 아산 SM벡셀—도고콘도
정병수 대표이사의 환대(歡待)
2022-국제퇴계학연구회 호서유학 답사단은 충남 강경의 ‘죽산서원’ 탐방을 끝으로 첫날의 일정을 마치고, 충남 아산시 도고면 신언리[도고면로 48-15] 도고농공단지에 있는 ‘SM벡셀’을 찾았다. 금반 2박 3일의 제5회 호선유학 답사 일정 중, 오늘 첫날 밤[第一夜]은 SM벡셀 정병수 대표이사가 우리 답사단을 초청했기 때문이다. 정병수 사장은 2015년 이광호 박사가 주도하는 ‘국퇴고강’ 초창기에 참여한 분으로 지금은 SM벡셀 대표이사로 활약하는 전문경영인이다. 오늘 24명의 답사단을 초청하여 도고온천 콘도에 유숙시키고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 식사까지 제공하는 환대를 베푼 것이다. 정병수 사장은 시인(詩人)이다. 그리고 ‘국퇴고강’에서 공부할 만큼 동양철학과 인문학에 남다른 조예를 가진 분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사회적으로 유수한 기업의 전문경영인으로 국가산업 발전을 위해 활약하고 있다.
SM벡셀
이곳 아산 도고농공단지에 있는 SM벡셀은 자동차 부품 전문기업으로 1975년부터 국내·외 유명 자동차 회사에 워터펌프, 오일펌프, 실린더해드 등 주요 엔진부품을 생산 공급하며 1994년 코스피에 상장되었다. 그리고 수십 년 간 축적된 연구 실적과 경험을 통해 그 기술력과 품질을 인정받아 고객사와 신뢰 관계를 깊게 형성하면서, 2021년 대기업인 SM그룹의 일원이 되었다. 2022년 계열사인 국내 최고의 배터리 생산업체인 벡셀을 흡수 합명하여 자본과 기술이 집약된 명실공히 국내 최고의 제조회사로 발돋움했다. 주요 고객사는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현대글로비스, 현대위아, 현대트랜시스, 현대모비스 등이다. 아산에는 자동차사업부 공장이 있고 구미에는 ‘BEXEL 건전지’를 생산하는 밧데리사업부 공장이 있다.
SM백셀은 ‘도전과 열정& 창의와 혁신’과 ‘파워트레인 부문의 50년 기술력’을 바탕으로 ‘전기차의 친환경 기술’을 주도하고 ‘고객을 위한 신기술 창조’에 앞장서 나가는 글로벌업체로 성장하고 있다. SM벡셀 정병수 대표이사는 “모든 것이 변하는 축의 전환시대를 맞아 당사는 모빌리티 시대에 걸맞는 기술개발과 혁신 그리고 집중과 선택을 통해 창의적인 회사로 도약해 나아갈 것”이라고 천명했다. 회사의 명칭에도 그것이 반영되어 있다. 백셀(BEXEL)은 'Beyond Exellence'의 합성어이다.
SM백셀 구내식당의 저녁 식사
우리 ‘호서유학 유적 답사단’은 저녁 6시 30분이 넘어서야 도고의 회사(SM백셀)에 도착했다. 예정보다 한 시간이나 넘긴 것이다. 충청남도 최남단의 강경[죽림서원]에서 충남의 북쪽에 위치해 있는 아산(牙山)까지의 거리가 멀고 퇴근 무렵 교통사정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회사에 도착하자 현관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정병수 사장이 우리 답사단을 반갑게 맞이했다. 저녁식사를 위하여 바로 식당으로 가는 길 — 정 사장의 안내로, 이 공장에서 제조한 완제품 전시장을 거쳐 공장 내부를 살펴볼 수 있었다. 방대한 넓이의 공장 내부는 모든 기계가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었다.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 공장, 완전히 자동화 시스템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회사의 구내식당은 공장에서 바로 통하는 곳에 있었다. 식단이 간단하지만 음식이 정갈하고 맛깔스러웠다. 영양사와 전문 요리사를 갖춘 식당이었다. 맛 있게 식사를 하고 차를 마셨다. 식당의 하얀 벽면에 ‘處事以精 造物以神 / 甲戌元旦 海山’이라고 쓴 한문(漢文) 액자가 걸려 있다. ‘매사 일을 처리할 때는 정성(精誠)을 다하고 물건을 만들 때에는 혼(魂)이 들어가야 한다’는 내용이다. 제조업 공장에 아주 적절한 표어이다. 경영자의 철학이 엿보인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우리의 전세버스로 온천장이 있는 ‘드 위트 도고콘도’로 이동하여 여장을 풀었다.
도고콘도의 연찬-야담회
배정된 방에 소지품을 내려놓고 6층의 회의실에 모였다. 오늘의 ‘연찬회(硏鑽會)’를 가지는 시간이다. 먼저 답사단의 좌장이신 이광호 회장의 인사말, 특히 오늘 이 자리를 만들어준 정병수 사장에 대해 감사의 말씀과 함께 소개를 했다. 이에 SM백셀 정병수 사장이 따뜻한 환영의 말씀으로 화답했다.
제1부 연찬 토론회
그리고 본격적으로 연찬회 제1부 가 이어졌다. 오늘 우리가 답사한 우암 송시열의 ‘남간정사’, 송준길의 ‘동춘당’, 탄옹 권시의 ‘도산서원’, 명재 윤증의 논산 ‘명재고택’, 퇴계 선생을 비롯한 6현을 모신 강경의 ‘죽림서원’에 대해, 답사 자료집 집필자 한 분 한 분의 설명을 하고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깊이 있는 논설이 오고가면서 분위기가 아주 진지했다.
특히 이광호 회장이 SM벡셀의 사훈을 소개했다. 회사의 사훈(社訓)이 아주 신선하고 독특했다.
내 손이 자주 가니 저리도 고울 줄이야.
나 피고 너 피니 온 산이 붉다
사훈(社訓)이라기보다는 아예 한 편의 시(詩)가 아닌가. ‘시인 경영인’다운 아름답고 의미심장한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내 손이 자주 간다’는 것은 ‘회사원 하나하나가 모두 주인이 되어 자기의 역량과 정성을 다한다’는 뜻이고 그리하면 ‘저리도 고운 제품’이 나오고 ‘저리도 살맛나는 회사’가 되는 것이다. ‘너 피고 나 피니 온 산이 붉다’는 것은 구성원 하나하나가 모두 뜨거운 열정을 발휘하고 그것이 함께 어우러지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진다는 메시지가 아닌가. 세상에! 이런 아름다운 사훈은 처음 봤다! 이광호 회장의 건배사는 ‘SM벡셀 사훈’의 앞부분을 선창하고 옆자리에 앉은 필자가 일어나 모든 분들과 함께 뒷부분을 후창했다.
제2부 여흥 간담회
그리고 이광호 회장의 제의로 분위기를 바꾸어 복분자와 음료수를 들면서 제2부 건배의 순서로 들어갔다. 자유로운 토론과 화기애애한 발언의 시간이다. 개인마다 개성 있고 재치 있는 건배사를 통하여 금반 답사여행에 대한 보람과 감사를 표했다.
정병수 시인의 시 낭송
좌중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는 가운데 많은 덕담이 오고갔다. ― 그리고 특히 정병수 사장의 ‘시 낭송’은 참으로 압권이었다.
안도현의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서울로 가는 전봉준〉을 아주 자연스럽고 곡진한 목소리로 낭송했다, 한 마디 흐트러짐 없이 유창하게 읊어 내려갔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 / 안도현
눈 내리는 만경(萬頃) 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琫準)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주지 못하였네
못다 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가 알기나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나라 풀뿌리들이
입춘 경칩 지나 수군거리며 봄바람 찾아오면
수천 개의 푸른 기상나팔을 불어제낄 것을
지금은 손발 묶인 저 얼음장 강줄기가
옥빛 대님을 홀연 풀어헤치고
서해로 출렁거리며 쳐들어갈 것을
우리 성상(聖上) 계옵신 곳 가까이 가서
녹두알 같은 눈물 흘리며 한 목숨 타오르겠네
봉준이 이 사람아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
들꽃들아
그날이 오면 닭 울 때
흰 무명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 유장한 강물이 부드럽게 흐르다가 바위를 만나 부딪치며 격정하기도 하는데, 그 내용인즉 수탈당한 민초의 아픔이 죽음의 길로 가는 전봉준을 통하여 당대의 부조리한 세상을 질타하고 민초들의 처절한 아픔을 토로하는 것이었다. 정병수 사장의 시 낭송은 정갈한 목소리에 호소력이 있었다. 감동적이었다.
▶ 만장의 박수로 재청을 받았다. 정 사장은 사양하지 않고 또 한 수의 긴 시를 낭송하였다. 정일근의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였다. ― 시상의 무대는 아직도 캄캄한 겨울 새벽, 유배지 강진의 사의재이다.
제1신(第一信)
아직은 미명이다. 강진의 하늘 강진의 벌판 새벽이 당도하길 기다리며 죽로차(竹露茶)를 달이는 치운 계절, 학연아 남해 바다를 건너 우두봉(牛頭峰)을 넘어오다 우우 소울음으로 몰아치는 하늬바람에 문풍지에 숨겨둔 내 귀 하나 부질없이 부질없이 서울의 기별이 그립고, 흑산도로 끌려가신 *약전 형님의 안부가 그립다. 저희들끼리 풀리며 쓸리어 가는 얼음장 밑 찬 물소리에도 열 손톱들이 젖어 흐느끼고 깊은 어둠의 끝을 헤치다 손톱마저 다 닳아 스러지는 적소(適所)의 밤이여, 강진의 밤은 너무 깊고 어둡구나. 목포, 해남, 광주 더 멀리 나간 마음들이 지친 봉두난발을 끌고 와 이 악문 찬 물소리와 함께 흘러가고 아득하여라, 정말 아득하여라. 처음도 끝도 찾을 수 없는 미명의 저편은 나의 눈물인가 무덤인가 등잔불 밝혀도 등뼈 자옥이 깎고 가는 바람소리 머리 풀어 온 강진 벌판이 우는 것 같구나.
제2신(第二信)
이 깊고 긴 겨울밤들을 예감했을까 봄날 텃밭에다 무를 심었다. 여름 한철 노오란 무꽃이 피어 가끔 벌, 나비들이 찾아와 동무해주더니 이제 그중 큰놈 몇 개를 뽑아 너와지붕 추녀 끝으로 고드름이 열리는 새벽까지 밤을 재워 무채를 썰면, 절망을 썰면, 보은산 컹컹 울부짖는 승냥이 울음소리가 두렵지 않고 유배보다 더 독한 어둠이 두렵지 않구나. 어쩌다 폭설이 지는 밤이면 등잔불을 어루어 시경강의보(詩經講義補)를 엮는다. *학연아 나이가 들수록 그리움이며 한이라는 것도 속절이 없어 첫해에는 산이라도 날려 보낼 것 같은 그리움이, 강물이라도 싹둑싹둑 베어버릴 것 같은 한이 폭설에 갇혀 서울로 가는 길이란 길은 모두 하얗게 지워지는 밤, *사의재(四宣齋)에 앉아 시 몇 줄을 읽으며 세상의 법도 왕가의 법도 흘러가는 법, 힘줄 고운 한들이 삭아서 흘러가고 그리움도 남해 바다로 흘러가 섬을 만드누나.
* 약전은 같은 시절 흑산도로 유배 가 있는 다산의 형이다 / * 학연은 다산의 아들이다. / * 사의제(四宣齋)는 1801년 다산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 와서 처음 기거했던 곳이다. 생각, 용모, 언어, 행동 네 가지를 올바르게 하며 기거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 정병수 시인의 목소리에 두 편으로 구성된 장문의 산문시가 유창(流暢)한 강물처럼 흘러내렸다. 참으로 놀랍다. 이렇게 긴 시(詩) 전편을 한 자 흐트러짐 없이 완벽하게 암송할 뿐만 아니라 그 시어 하나하나를 또렷하게 발음하면서 구비마다 곡절마다 감정과 억양이 크고 작은 물결을 이루며 곡진하고 흐르고 있는 것이었다. 거기에다 남도의 오지(奧地) 강진에서 시대의 아픔을 안고 18년간 유배생활을 하는 정약용의 절절한 회한이 감겨드는 내용이다. 듣는 이의 가슴을 마구 휘저어 놓는다. 다산이 정병수의 목소리를 빌려 뜨거운 회한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었다. 정일근의 시(詩)의 내용도 도저(到底)하지만 정병수의 낭송은 실로 감동이었다. 내공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가 읊조리는 서정시는 처절하게 넘실거리는 도도한 물결이었다. 자리에 앉아있는 모든 분들이 모두 숙연하게 경청하며 가슴 속에 일렁이는 파동을 묵묵히 다스리고 있었다. 그 여운이 깊고도 길었다.
도학(道學)의 길을 가는 도반들이 한 자리에 모여 마음을 나누고 시(詩)을 음미하는 도고의 밤! 모든 분들의 얼굴마다 낭창한 복분자의 발그스름한 기운이 꽃처럼 피어나고 … 끊임없이 정담과 덕담이 오고가는 밤이었다. 그 넉넉하고 화기애애한 야담(夜談)에 밤이 깊어가는 줄을 몰랐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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