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악독한 살수
그 중년의 화상은 혈도인마가 온몸에 피칠을 하고 수염과 머리카락
을 곤두세운 모습을 보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는 나는 듯이 달려오며 혈도인마를 가로막고 서서 두 손을 합장했
다.
[아미타불, 기 시주가 오셨구려!]
[거짓 인사는 그만 둡시다.]
기백은 대뜸 나무랐다.
[노부는 당신들 무림 정종 구대문파 장문인들이 이처럼 비열하고 뻔
뻔스러운 일을 저지를 줄은 몰랐소. 천하 무림인들은 모조리 불러 당
신들의 이 꼬락서니를 보여주고 싶군!]
중년의 화상은 바로 소림 장문인 대명선사(大明禪師)였다. 그는 그 말
을 듣고 얼굴을 붉히며 미소를 지었다.
[혈수천마 고시주가 누차에 걸쳐 독수를 쓰고 현천 도우를 암살했을
뿐만 아니라 독으로 운중자를 해치는 등 실로 사람의 치를 떨게 하는
못된 짓거리만 하기에...]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고검남이 부르짖었다.
[아버지!]
그는 두 손을 놓고 훌쩍 기백의 등에서 뛰어내려 고명원에게 달려갔
다.
혈수천마 고명원은 고검남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흠칫했다. 그 바람에
사파 장문인들의 합쳐진 내공을 당해내지 못하고 다시 한 모금의선
혈을 토해 내었다.
그는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사파 장문인들이 손을 마주 잡고 대항해
오는 것을 맞아, 천마해체대법을 펼쳐 이미 네 모금의 피를 토했던 것
이다. 지금 다섯번째의 선혈을 토해 내자 즉시 상대방이 공격해 오는
거센 파도 같은 내공을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랑하는 아들
에게 신경이 쓰여 급히 그 자리에서 빠져 나오려고 했지만 상대방이
놓아주지 않았다. 부득이 정신을 가다듬고 운기행공해서 마지막 일격
을 가하려고 했다.
천마해체대법은 체내의 잠재능력을 극도로 소모하는 것이었다. 그러
나 한 사람의 몸에 갈무리된 정력에는 한도가 있었다. 모조리 소모하
게 된다면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힐 수는 있으나 그 자신도 정혈(精血)
이 고갈되어 죽는 것이었다.
이러한 동귀어진의 수단은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지 않는 한 결코 펼
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어린 아들의 안전을 도모해야 하기 때문에
마음속은 조마조마해지고 말았다.
고검남이 갑자기 기백의 등에서 뛰어 내려 고명원에게 달려가자 몸
에 가벼운 상처를 입고 한켠에 서 있던 무당파 장문인 현청도인은 깜
짝 놀라고 말았다.
그는 고검남이 두 다리가 불구로서 걸음을 옮겨 놓을 수 없다는 사
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재빨리 달려오고 있지 않은
가? 그는 속으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릇 현문(玄門)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관상의 이치를 알고 있었다.
현청도인은 처음 고검남을 보게 되었을 때, 이미 그가 천품을 타고났
을 뿐 아니라 총명하고 비범하여 훗날의 조예는 틀림없이 고명원보다
더 뛰어나리라는 것을 알아보았기 때문에 제거하리라 마음먹고 있었
다. 다만 그 당시 고명원이 옆에 있었기 때문에 독수를 펼칠 수가 없
었다. 이 때 고검남이 두 다리의 숙질이 이미 치유된 것처럼 달려오는
광경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젯밤 그는 고명원의 혈수인이라는 기공에 상처를 입었다. 만약 곤
륜파 장문인 옥진자가 구해주지 않았다면 이미 죽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고검남이 달려오는 것을 보자 원한과 시기심이 끓어올라 즉시
악독한 생각이 치밀었다.
그는 얼굴에 흉측한 미소를 띄우고 고검남을 향해 달려들더니 벼락같
이 일장을 뻗쳐 고검남의 가슴팍을 후려쳐 갔다.
혈도인마는 고검남이 갑자기 땅바닥에 내려서리라고 예상 못했고 더
욱더 당당한 무당파의 장문인이 별안간 독수를 써서 무공을 모르는
어린애를 암습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노갈을 터뜨렸다.
[현청, 네가 감히!]
그는 몸을 날려 나는 듯이 덮쳐갔다.
대명선사는 등뒤에서 현청이 그와 같은 짓거리를 할 줄은 상상도 못
하고, 혈도인마가 몸을 날리는 것을 보자 이미 상처를 입고 있는 현청
에게 불리할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는 커다란 소맷자락을 휘두르며 역시 몸을 솟구쳐 허공에서 혈도
인마를 가로막았다.
기백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 지금처럼 진노한 적이 없었다. 그는
노호를 터뜨리며 어느 덧 월륜참을 펼쳐 냈다.
그 찰나, 그는 이미 오십 년간 고되게 쌓아 온 공력을 모조리 쏟아
대명선사를 공격했다.
대명선사는 나이가 겨우 마흔에 지나지 않았으나 소림사의 수백 명
이나 되는 승려들 가운데에서 월등한 실력으로 장문인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었다. 그는 바로 윗대의 장문인 공무대사(空無大師)의 허락하에
장경루로 들어가 문을 닫아 걸고 삼 년 동안이나 수련을 쌓았다.
그는 폐관에서 나올 때 그 자신의 지혜로 소림의 일흔 두 가지 절예
가운데 서른 세 가지에 통달할 수 있었다.
그는 공무대사가 열반(涅槃)하자 장문인의 자리에 오른 것이었다.
소림과 무당의 두 파는 무림에서 태산북두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대명선사는 현천도장과 교분이 드터웠다.
그는 줄곧 현천도장에 대해서 존경해 왔었다. 그런데 이번에 현청이
검령을 돌려 현천도장이 혈수천마에게 살해당했으니 빨리 곤륜산으로
가서 혈수천마를 잡아야 한다는 전갈을 받고, 즉시 이십여 명이나 되
는 승려들을 데리고 곤륜산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고명원이 현청이 저지른 일과 현천도장을 해친 일을 이야기했지만
각파의 장문인들은 믿지 않았다. 더군다나 공동파 장문인 오도장과 아
미파 장문인 나엽도사가 짜고 불리한 증언을 했기 때문에 고명원은
변명할 길이 없었다.
대명선사는 사대문파 장문인이 손을 합쳐서 혈수천마를 공격하는 것
을 보고 마땅치 않게 생각했지만 막을 수는 없었다.
이 때 그는 혈도인마가 현청에게 달려가는 것을 보고 몸을 솟구쳐
상대방을 가로막았는데, 발끝이 막 땅바닥을 차고 솟아오르는 순간 웅
혼하고 비수처럼 예리한 장력이 산이라도 무너지는 듯한 기세로 압박
해 오는 것을 느꼈다.
삽시간에 그의 넓은 가사는 뒤쪽을 향해 펄럭이게 되었고 숨을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얍!]
그는 우렁차게 사자후(獅子吼)를 토하며 두 손을 함께 모아 장력을
쏟아 내었다. 허공에서 마치 천둥소리처럼 요란하게 꽝! 하는 소리가
터졌다. 그 진동에 잔잔하던 호숫물이 한차례 파문을 일으켰다.
혈도인마는 대명선사와 여덟 자도 되지 않는 곳에 있었는데 그 우렁
찬 사자후 소리에 고막이 터질 것 같은 충격을 받고 흠칫했으며 쪼개
낸 장인(掌刃)이 순간적으로 멈칫하게 되었다.
바로 이 때 대명선사가 두 손을 합장하여 부처님을 참배하는 자세를
취했다가 왼손을 비교적 빨리 쪼개 내면서 오른손을 살짝 늦추었다가
손바닥에서 살짝 손가락을 뻗쳐 내자, 다섯 손가락에서 부드럽기 이를
데 없는 기운이 비스듬히 뿜어져 나갔다.
그의 이 일초의 격출은 왼손이 태산처럼 무겁고 강맹한 반면에 오른
손의 다섯 손가락은 버들가지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날렵하고 표일한
특성을 최대한 살리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비파를 타며 두 눈으로 기
러기를 환송하듯 그자세는 우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쌍방의 신형은 지극히 빨랐고 초식 또한 번개같았다.
퍽!
하는 소리가 나면서 사람의 그림자가 나뉘어져 허공에서 아래로 떨어
졌다.
혈도인마는 발꿈치가 땅에 닿자 즉시 신형을 한쪽으로 기울이며 반
걸음 물러서서야 가까스로 자세를 바로 잡을 수 있었다.
그는 얼굴에 경악의 빛을 떠올리며 대명선사를 바라보았다. 자기가
상대한 그 중년 화상의 공력이 그토록 고강하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
운 듯했다.
대명선사 역시 얼굴에 공포의 빛을 띄웠다. 그의 오른손 소맷자락은
마치 예리한 비수에 베어진 듯 손목에 걸쳐져 있었는데 그 희디흰 팔
뚝에 한 줄기 붉은 자국이 나 있었다. 그것은 마치 불에 달군 인두로
지져 놓은 것 같았다...
그는 조금 전에 잇달아 불문에 삼대기공(三大奇功)을 펼쳤으며 상대
방을 충분히 격퇴시킬 수 있으리라고 내다보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상
대방의 그 야릇하고 헤아리기 어려운 장법에 패배를 당했으니... 그는
조금 전에 불문의 삼대신공을 펼쳤으며 그 삼대신공 가운데 어느 하
나라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마주친
사람은 천하 칠대 고수 가운데 한 사람인 혈도인마였다.
혈도인마는 무림에 명성을 떨친 지 이미 이십 년이 지났으며 공력이
심오하여 거의 적수가 없을 정도였다.
대명선사가 잇달아 사자후(獅子吼)와 나한복마장(羅漢伏魔掌), 그리고
가람지(伽藍指)라는 삼대신공을 펼쳐 내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그의
칠대절초(七大絶招) 아래 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껄끄러움을 느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강적과 대적해 본 습관에서 혈도인마는 삽시간에 어떻게 적
을 꺾고 적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상념은 뇌리에서 번쩍했을 뿐이고 즉시 고검남을 떠올렸다.
그는 눈을 번뜩이며 고검남 쪽을 바라보았다. 바로 이 때 고검남은
크게 비명소리를 내지르며 현청도인의 일장에 얻어맞고 붕하니 떠올
라 여섯자 밖으로 나가떨어지고 있었으니...
그 순간 한 가닥 핏줄기가 그의 입에서 쭉 뿜어져 나와 허공에 한
가닥의 호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낚시에 걸린 고기처럼 혈도인마와 혈
수천마의 심장까지도 끄집혀진 것 같았다.
[으아아아...!]
별안간 처절하기 이를 데 없는 호통 소리가 고명원의 입에서 터져 나
왔다. 그 순간 그는 잇달아 두 모금의 선혈을 토해 내고 두 팔을 한
번 떨치자 네 명의 장문인은 일제히 뒤로 나뒹굴고 말았다.
곤륜파 장문인 옥진자는 가장 앞에 서 있었다. 고명원의 여섯배나 증
강된 내공에 얻어맞아 경맥이 모조리 끊어져 입으로 선혈을 토하며
기절하고 말았다.
그의 등뒤에 있던 아미파 장문인 나엽대사와 청성파 장문인 여산은
(余山隱), 공동파 장문인 오도인은 위치의 선후에 따라 상처를 입기는
했어도 무겁고 가벼운 차이가 났다.
고명원은 벼락같이 몸을 돌렸다. 두 눈에서 살기를 뚝뚝 흘리며 현청
도인을 노려보더니 이빨을 으드득, 깨물며 입을 열었다.
[현청, 이 개새끼, 정말 악독하구나.]
현청도인은 전신을 와들와들 떨며 감히 상대방의 눈을 쳐다보지 못
했다. 그의 얼굴에 근육은 한차례 경련을 부들부들 일으켰다. 떨리는
음성이 그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대명 도우...]
대명선사 역시 이 갑작스런 광경에 놀라고 말았다. 그는 거의 혈수천
마가 잇달아 삼십여 명이나 되는 각파 제자들의 포위 공격을 받고도
여유 있게 포위망을 뚫었을 뿐만 아니라, 곤륜산의 꼭대기로 오른 후
에 재차 사대문파 장문인들과 내공을 겨루었는데 절대적인 열세에서
지탱해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초인적인 공력에 대명 선사는 놀라 섬뜩한 심정이었는데,
이제 다시 혈수천마가 밤새워 격전을 치른 후에도 지친 몸으로 사대
문파의 장문인들을 쳐서 쓰러뜨린 것을 목격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상상을 초월하는 무공은 소림사 장문인으로 하여금 놀라
멍청해지게 만들었다. 만약 그가 친히 목격하지 않았다면 믿을 수 없
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눈앞에 보이는 사실이었다. 이제 그는 혈수천마와 겨
루어야 했다. 왜냐하면 이곳에 있는 육대문파 장문인들 가운데 그 혼
자만이 유일하게 상처를 입지 않았기 때문이엇다.
현청이 부르는 소리를 듣자 그는 흠칫했으나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혈수천마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신형이 막 움직이자마자 혈도인마가 그림자처럼 쫓아왔다. 그는
큰 소리로 꾸짖었다.
[대명 땡초, 염치 없는 놈아! 노부가 너를 상대해 주마!]
이 절세의 마두는 가장 큰 분노에 치를 떨고 있었고 가슴속에서 끓
어오르는 노화(怒火)는 그의 오장육부를 태워버릴 것 같았다. 지금 그
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고 다만 있는 것은 죽인다는 생각뿐이었다.
(죽이자. 죽이자. 이 전혀 양심도 없는 후레자식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
자.)
대명선사는 달려 나가는 순간 등뒤에서 세찬 광풍이 소용돌이치는
것을 느꼈다. 그 짙은 살기가 등뒤에 와 닿는 순간, 그는 그만 전신이
싸늘해지고 얼음 구덩이 속으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는 이미 현청에 대해서 어떤 도움의 손길도 줄 수 없었다. 몸을 허
공에서 억지로 비틀어 돌리며그 여세를 빌어 손을 휙 뒤집어 수평으
로 일장을 뻗쳐 냈다.
허공에서 천둥치는 음향이 꽝! 하고 울려퍼지고 사람 그림자가 둘로
갈라졌다. 두 사람은 후딱 다시 땅바닥에서 위로 솟구치면서 상대방을
향해 격돌했다.
꽝!
꽝!
꽝!
고막을 찢는 음향이 허공에서 연속적으로 터져나왔다.
그 순간 혈수천마는 한 걸음 한 걸음 현청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그가 매번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땅바닥에는 깊이가 세 치나 되는
발자국이 움푹움푹 패이게 되었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데
따라 그의 창백하면서 전혀 핏기라고는 없는 뺨이 점점 수척해졌다.
그러나 그의 예리하고 차가우며 원한에 가득찬 핏발선 두 눈동자는
더욱 짙은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현청은 상대방의 눈길이 마치 두 자루의 예리한 검처럼 그의 심장을
찔러 들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절망, 공포, 후회... 등의 복잡한 정감이 가슴속에서 얽혔으며 그의 몸
은 이미 못 박힌 듯 다시는 한 걸음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 때 그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그저 상대방의 손에 몸을 맡기는 수
밖에 없었다.
땅바닥에 남겨진 일곱 개의 발자국은 가면 갈수록 얕아지게되었고
혈수천마가 여덟 번째의 발자국을 옮겨 놓게 되었을 때, 갑자기 고명
원은 미약한 신음 소리를 들었다.
그 짧고 미약한 신음 소리는 모기가 윙윙거리는 소리보다 작앗으나
고명원의 귀에는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그의 절망에 휩싸인 심정에 한 가닥의 희망의 등불이 불을 밝혔다.
그는 어린 아들이 일장을 얻어맞고 땅바닥에 나뒹굴 때, 속으로 절망
하고 있었다. 전혀 무공의 기틀이라고는 없는 아이가 무당파 장문인의
일격에 어찌 죽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검남은 죽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해서 아들이 죽지 않앗는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
다. 지금 그에게는 오직 한가지의 염원밖에 없었다.
(나는 아들을 살려 놓아야 한다. 내가 마지막 숨을 다 내쉬기 전에 반
드시 그를 살려내야 한다...)
이 때 그는 자기의 감정을 도저히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는 고검남
이 쓰러져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고검남은 호숫가에서 다섯 자도 되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있었고 앞가
슴에는 한 무더기의 선혈이 묻어 있었고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그의 칼날같은 두 눈썹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으며 얼굴엔 고통스러
운 빛이 가득했으나 그는 아직 기절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는 고명원이 달려와 안아 일으키자 즉시 감응을 보였으며 고명원
이 이름을 부르자 천천히 두 눈을 떴다.
고명원은 격동되어 아들을 힘껏 안고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얘야, 너... 괜찮으냐?]
고검남은 처연하게 웃었다.
[아버지, 정말 아프네요...]
고명원은 두 줄기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얘야, 너는 오지 말았어야 했다. 내가 너로 하여금 고통을 당하게 하
였구나.]
고검남은 띄엄띄엄 대답했다.
[아버지... 아버지... 울지 마세요...]
그렇게말하고 있었으나 그 자신도 참을 수 없다는 듯 눈물을 주르
르 흘렸다...
고명원은 중얼거렸다.
[얘야, 정신 차려라. 우리 산을 내려가자. 그리고 다시는 강호에 나오
지 말자...]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등뒤에서 흉측한 웃음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장검이 그의 뒷등을 쑥, 찔렀다...
한차례의 격렬한 통증이 온몸으로 퍼져 나감에 따라 그는 온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면서 앞으로 휘청거리며 몇 걸음 옮겨 놓았다. 그리고
두 손을 떨면서 맥없이 놓았다. 고검남은 그의 팔에서 떨어져 천지의
물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고명원은 갑자기 머리 속이 환하게 맑아졌다. 그는 잇달아 두 모금의
선혈을 토해 내고는 맹렬히 몸을 돌리며 전신의 힘을 다해 일장을 쪼
개 냈다. 이 일장을 그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쏟아 낸 것이고 십여
년 간 고생해서 연마했던 분심마인(焚心魔刃)이라는 서방의 마공을 한
순간에 모조리 격발시킨 것이었다. 그의 분심마인은 뒤에서 암습했던
오도장을 후려쳐 그 몸을 붕하니 떠오르게 만들었다.
고명원은 일장을 후려칠 때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았다. 오도장이 땅
바닥에 떨어지게 되었을 때는 이미 온몸이 불에탄 듯 새까만 숯덩이
로 변해 있었다.
고명원은 그 모양을 보고 얼굴에 한 가닥 참담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
거렸다.
[얘야, 나를 기다려 다오.]
그의 등에는 여전히 그 한 자루의 장검이 꽂혀 있었고 선혈은 끊임
없이 칼날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때에 태양은 중천에 떠 있었고 햇살에 그의 그림자는 땅바닥에 짧
게 드리워져 있었다. 마치 그의 생명이 그토록 짧은 한 토막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그의 발걸음은 그토록 무거웠다. 그런데도 그는 한 걸음 한걸음 천
지 쪽으로 걸어갔으며 입으로는 여전히 중얼중얼 그 한마디를 되뇌고
있었다.
[얘야, 나를 기다려 다오.]
사실 이미 그의 몸은 죽어 있었다. 아직 죽지 않은 것은 그의 의지,
바로 자기의 아들과 함께 묻히겠다는 마음이었다.
눈앞이 희뿌옇게 보였다. 햇살이 호수 위로 쏟아져 호수 위에서 번쩍
번쩍 물결이 빛나고 있었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
았다.
그의 눈앞이 새까맣게 보일 때 그의 발걸음 역시 호수 속으로 한 걸
음을 내딛고 있었고 그 순간 그의 목숨은 이미 마무리를 짓고있었다.
텀벙!
물이 갈라지고 일세를 풍미햇던 희대의 마두는 호수 속에 잠기고 말
았으니...
강호에서는 다시 혈수천마를 볼 수 없으리라. 그러나 그의 이름은 영
원히 무림에 남게 되리라...
그는 이미 죽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은? 그 불쌍한 고검남은? 그 역
시 고달프고 외로운 인생을 마감한 것일까?
***
천지의 물은 여전히 넘실거리고 천지에 비친 달은 번쩍 번쩍 빛나고
있었다.
정오의 그 참혹하던 싸움터는 청량하고 맑은 바람에 씻기우고 있었
다.
비스듬히 비치는 달빛이 한 사람의 얼굴을 비춰 주어, 그의 애절한
표정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는 정오 무렵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곳에서 그 파란 호수를 바
라보고 있었다. 그는 몸밖의 사물에 대해서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잔디밭 위의 시체들과 상처받은 사람들이 어느결에 옮겨졌는지 그
는 느끼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은 고명원 부자가 호수 속으로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의
미없는 일로 변하고만 것만 같았다.
혈도인마.
우내이마 가운데 하나로 인정받고 있는 대마두의 속마음을 강호의
사람들 가운데 구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그 역시 여느 사람과 다름없
는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그 감정을 가슴속 깊이 감추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마치 앞에 펼쳐져 있는 천지와 같았다. 호수 위의
물결은 거울처럼 잔잔하지만 호수의 밑바닥은 어떨까?
호수 밑바닥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
호수 밑바닥에는 소용돌이나 암류(暗流)가 없을까? 괴이한 바위나 커
다란 고기가 없을까? 그리고 기다란 풀과 나무들이 없을까?
어쩌면 호수 밑바닥에는 세상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물건이 있을
지도 모르지 않는가?
언덕 위에서 호수 쪽을 향해 애도하듯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혈도
인마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시선이 아무리 예리하다고 해
도 어떻게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천지의 호수 물을 꿰뚫어 볼 수
있겠는가. 호수 밑바닥에 가라앉은 고검남은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이 순간, 고검남은 유리처럼 투명하고 비취빛이 나는 호숫물을
올려다보고 있었으나 호숫가에 그 어떤 사람이 있어 그의 죽음을 애
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죽지 않았다. 그는 어째서 그가 죽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모르
고 있었다.
그는 다만자기가 부친의 품에서 호수 속으로 떨어진 것을 알고 있
었다. 그 순간 한기가 엄습해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무수한 손과
손들이 그의 몸을 후려치는 것처럼 느꼈다.
그가 어찌 그 잔잔한 호수 밑바닥에 이와 같은 소용돌이와 격류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겠는가? 그는 혼미한 상태에서 물속으로 빠져
들었으나 물속에 빠져드는 순간 즉시 정신이 맑아졌다. 다음 순간, 그
는 자기가 도대체 어디에 와 있는지 똑똑히 알아차릴 여유도 없이 다
시 그 소용돌이에 충격을 받고 혼절하고 말았다. 그가 다시 정신을 차
렸을 때 그는 자기가 어느 동굴 속에 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동굴
밖은 바로 파란 호수 물이었다. 그러나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호숫
물이 동굴 안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동굴 밖의 파란 호숫물과 물속에서 노니고 있는 고기와 새우, 그리고
띠처럼 기다란 수초들을 바라보았다. 한참 후에야 자기가 지금 천지의
밑바닥에 와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자기가 어떻게 호숫물이 침입할 수 없는 동굴 안에 와 있는 것일까?
그의 지혜로서도 그 원인을 알아낼 수 없었다. 그는 그런 생각들을
떨쳐버렸다. 그러자 그의 생각은 즉시 호숫가의 잔디밭에서 일어난 참
혹하던 싸움으로 되돌아갔다.
그의 기억에는 아버지 한 사람을 염치도 없는 사대문파의 장문인들
이 손을 합해 공격하는 광경이 새겨져 있었다. 아니, 그토록 강렬하게
되풀이해서 그의 뇌리에 떠올랐다.
그는 그의 부친이 두 손으로 그를 안게 되었을 적에 어떤 상황이 벌
어졌는지 기억해 낼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때 그는 반혼미상태에 놓
여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지금 그 격전장의 결과가 어떻게 됐는
지 알고 싶어졌다.
그는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나는 방법을 강구해서 위로 올라가야 한다. 이곳에 멍청하게 있을 수
는 없다.]
그는 부친의 안위가 염려되었다. 그리고 자기가 현청도인의 일장을
얻어맞고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생각 못하고 벌떡 몸을 일으켜 앉았
다.
벌떡 일어나 앉자 그는 갈비뼈가 저리고 아픈 것을 느꼈다. 그러나
곧 그 통증은 사라졌다. 그는 한 가닥 엷고 맑은 향기가 콧속으로 스
며들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는 두어번 숨을 들이마시고 그 향긋한 냄새가 흘러오는 쪽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 보니 동굴 뒷벽에 네 알의 거위알 크기의 명주(明珠)가
있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잘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10장이 빠졌네요
즐감
감사합니다............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