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별기획연재 -미국의 여성 불교 >
이번 호에 소개할 책,
“가장자리에 서 있는 서구 여성 불자들의 현대적 시각들”은 메리안 드레서(Marianne Dresser)가 삼십명의 서구 여성 불교 수행자들이 쓴 글을 모아 엮은 책이다.
이 책은 삼십명의 여성 필자들 각각의 삶의 이력을 드러내기보다는, 본래의 여성성 안에서는 불교가 어떻게 이해되고 수행되었으며, 또한, 그에 따른 문제점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불교의 가르침, 철학, 윤리, 심리, 종교성 등을 거론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의 서평도, 번역의 미흡함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이 이 책을 직접 읽는 시간이나 번거로움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는 작은 배려와 함께, 삼십 명의 필자들이 쓴 글의 핵심적인 내용을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정리하여 알리는데 초점을 맞추었고, 앞으로 3회에 걸쳐서 연재할 예정이다.
우선, 그들의 글들을 하나하나 소개하기에 앞서, 이 책의 편집자, 매리안 드레서의 개인적인 수행 경험을 포함한 그녀의 삶을 간단하게나마 들여다보는 것이 독자들이 이 책을 편집한 그녀의 의도를 짐작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로리 피어스(Lori Pierce) –
“밖에서 들어와 정착한 미국 불교”(Outside In: Buddhism in America)
필자: 로리 피어스는 1990년 하버드 신학대학에서 신학연구원 석사학위를 끝내고 마노야 하와이대학에서 미국학 연구로 박사 학위 후보생이다. 그녀의 논문은 1945년부터 현재까지의 미국불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현재 남편 마티 하이츠 그리고 딸 케일리와 함께 호놀룰루에서 살고 있다.
로리의 불교에 대한 흥미는 사춘기 때 “의미”에 관한 영적 탐구로 시작했다. 그녀는, 아마도 가톨릭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인지, 영적인 수련에 일찍이 매력을 느꼈다. 그러나 자신에게 매혹적이었던 것은 가톨릭 삶에 대한 기술이 아니고, 세속적 존재를 넘어선 [삶의] 의미에 관한 가능성 때문이었다고 한다. 수년간의 영적 탐구 끝에, 그녀는 거의 전적으로 지적인 방향으로 돌아섰고, 그녀의 현재 삶에서는 벨이 쓴 “나는 여자가 아니던가”(Bell Hooks, Ain’t I A Woman? Black Women and Feminism, South End Press, 1981)를 읽고 깨우침의 순간을 맞이한다. 아프리카 미국 여인의 투쟁에 관한 벨의 격정적인 묘사가 전에 느끼지 못했던, 그녀의 심금을 울려주며 그녀의 존재가 아프리카계 미국 여성이라는 것이 그녀의 정체성에 더 이상 우연한 것이 아니고, 그녀 자신의 깊은 구조에 포함되어야 할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였다. 로리는 자신을 불교 수행자라고 하기보다는 “불교 동조자”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녀의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면을 안에서 바깥으로 드러내는 수행적인 방법보다는 밖에서 내면을 들여다보는 지적 훈련을 통한 방법이 더욱 적합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로리는 이 글에서 불교와 인종에 관하여 두 가지 방향으로 논의한다; 하나는, “미국 문화 안에서 불교가 어떻게 차별적인 수행들을 제거할 수 있으며 또한 어떻게 제거했어야만 하는가”이고, 다른 하나는, “제도적인 구조의 불교가 어떻게 인종주의와 또 다른 차별적 수행들을 반영하고 영속시키는가”를 제기한다.
벨 훅스 [나는 여자가 아니던가]
미국불교의 간단한 역사 기록학적인 조사로는 문화적인 사건으로서의 불교 발전에 관한 비평과 분석은 거의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불교 역사에 관한 토론은 북미나 유럽 개종자의 불교이거나 아시아 이민자들의 불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두 집단은 서로 분리되어 있어서 같은 역사적인 선상에서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나마, 최근에 잰 내티어(Jan Nattier)가 발표한 논문,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 미국 불교를 대변하는 정치”(“Visible and Invisible: The Politics of Representation in Buddhist America” in Tricycle, Fall 1995)에서, 미국 불교의 발달을 이해하기 위하여 불교가 여러 다른 궤도를 따라 미국으로 전파된 세 가지 유형을 제시한다: 수입을 통한 전파, 수출에 의한 전파, 또한 수화물에 의한 전파이다.
첫째, 수입을 통한 불교는 특수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유효했던 엘리트주의자가 아닌, 엘리트(elite, not elitist)라고 표시했다. 그것은 특별히 불교를 찾으려고 갔던 것은 아니나 아시아 여행을 할 만한 여유가 있어서 불교를 만난 불교 지지자를 말한다. 빅토리아시대 불교의 특권층은 인도와 아시아 지방을 광범위하게 여행할 수 있었고, 미국과 유럽에 불교를 도입할 수 있었던 마담 블라바츠키 (Madame Blavatsky)로 대변된다. 그와 같은 엘리트 불교 신자들은 특별한 청중인 유럽계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직접 또는 간접으로 아시아 스승들을 미국으로 초대하고, 불교 수행을 도입하여 불교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해왔다.
둘째, 수출에 의한 불교 전파는 복음주의적 불교(Enevangelical Buddhism)라고 불리는데, 이것은 미국인들이 직접 찾아 나서거나 요청하지는 않았지만, 선교할 목적으로 혹은 적극적으로 개종자를 추구하는 비교적 소수의 불교도, 소카 가카이(Soka Gakkai)나 니치렌 소슈(Nichiren Shoshu)가 바로 이런 그룹을 대표한다. 이 그룹의 특징은, 주로 라틴계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 그리고 낮은 사회적 배경을 가진 유럽계 미국인들로 구성된 도시의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마지막으로, 아시아 이민자들과 같이 들어온 문화적 수화물로서 들어온 불교가 있다. 이러한 민족적 불교는 주로 일본, 중국, 그리고 점점 증가하는 티베트, 베트남, 라오스 이민자들이다. 로리는, 제삼 세계에서, 특히 불교가 대다수 국민들의 주된 종교인 나라에서, 착취와 경제적 몰락에 미국사람들이 비난 받을만한 짓을 하지 않았는지 의문을 제기하며, 승가(Sangha)는 세계적인 지역사회이기 때문에 우리는 미국식의 소비주의, 경제적 지배, 무기판매, 군사화 등이 아시아의 불교 국가를 포함한 제3세계의 빈약한 삶의 형태에 직접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잊을 수도, 또한 잊어서도 안 된다고 강조한다.
21세기 미래 시민으로서 인종, 민족, 성, 계급에 바탕을 둔 차별적 구조가 제거되어야 하는 방법을 마련해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의무라고 생각하며, 불교야말로 이런 투쟁에 대한 강력한 도구이고 현재 잘 알려진 불교계 인사인 달라이라마나 틱낫한 같은 분들에 의해서 훌륭하게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불교는 권위적인 인물에 집중하는 종교가 아니다. 붓다 열반 시의 마지막 가르침은 처음 듣는 사람에게도 힘을 북돋게 한다. 그러한 수행의 길은 결국에는 다만 붓다와 같은 영적 성취를 얻도록 이끌 뿐만이 아니고, 스스로 실제 세계를 구원하는 붓다가 되는 길이다. 로리는 결론적으로, 명상이나 진언, 또는 그 외 다른 종교의식을 통하여 모든 불자가 무명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얻어지는 강한 통찰력을 다른 사람들을 돕는 데 써야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출트림 앨리온(Tsultrim Allione) -
티베트 불교에서의 여성성 원리(The Feminine Principle in Tibetan Buddhism)
출트림 앨리온
필자: 출트림 앨리온은 남부 콜로라도주 명상 센터, 타라 만다라 수련원(Tara Mandala)의 창립자이자 영적 책임자이고, “지혜의 여성”(Women of Wisdom)의 저자이다. 1960대 말에는 인도와 네팔에서 공부하고, 1970년 성하 카르마파(His Holiness the Karmapa)로부터 미국 여성으로서 처음 비구니계를 받았다. 그 후 몇 년간 많은 티베트 스승들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1980년 이래로 위대한 깨침을 얻은 스승(Dzog chen Master) 남카이 노르부 린포체(Namkhai Norbu Rinpoche)의 제자가 되고 그의 지도로 가르친다. 출트림은 여러 나라에서 두루 가르치고 여름 동안은 타라 만다라에서 명상을 지도한다. 이 글은 “지혜의 여성”(Women of Wisdom, Routledge & Kegan Paul, 1984)에 나온 서문과 마치그 래프드론 (Machig Lapdron)의 전기에서 발췌한 글이다.
타라 만다라 수련원
출트림 앨리온은 타라 만다라 수련원에서, “지혜의 여성”이 출판된 후 십 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회상하면서 이 글을 썼다. 티베트 불교의 독특한 유산은 탄트릭 불교이다. 탄트라는 강력한 여성 스승들과 모계 우주론(Matrifocal cosmologies)의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는, 그리고 그 중심에 “위대한 어머니, 염 첸모”(Great Mother or Yum Chenmo)가 있는, 문화와 시대로부터 유래한다. 그러나 티베트 사회 제도는 매우 가부장적이고 계급적이다. 여성 형상화의 강한 힘이 티베트의 문화적 제도와 혼합된 이러한 전통은 여성 수행 인에게는 비정상적이고 혼란스러움을 일으킨다. 절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 수행의 길은 여성에게 활짝 열려 있고, 마음도 이원론적이 아니지만, 이들에게 장애는 있다. 여성이라는 사실도 그중의 하나다. 그러나 상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귀한 여성 스승은 드물고 계급 계층은 거의 독점적으로 남성이었다. 1994년 인도 부다가야에서 티베트인들의 기도 축제가 있을 때 보리수를 중심으로 오천명의 승려와 라마들이 모였다. 여성들은 어디에 있는가? 출트림은 바깥 주변 도로에서 몇 명의 여승을 보았다. 그들은 등잔에 독성 연료를 채워 넣고 있었고,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으며, 아무런 보호막이 안 되는 얄팍한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보리수 근처에는 여성이란 없었다. 보위에도 의자에도 어떤 여성도 없었다. 동시에, 출트림은 남카이 노르부 린포체, 두구 쵸기알(Dugu Choegyal) 린포체 등 전적으로 반성차별주의자이고 평등주의자인 린포체들을 알게 되었는데, 이들은 조그 첸 그룹(Dzog Chen Community)을 조직할 때, “우리는 같은 수의 남성과 여성이 있어야한다”고 주장하며, 깊은 지혜의 힘으로부터 여성들이 동등하게 대접받는 것이 가능하도록 하게 한 스승들이었다. [주: 조그 첸은 티베트불교에서 무의식이나 일상의 의식 상태를 떠난 명상 상태를 의미한다]
출트림은 세 아이를 다 키운 다음 남부 콜로라도에 타라 만다라(Tara Mandala)라는 명상 센터를 건립한다. 중심과 주변의 전체를 의미하는 만달라는 자비의 여신인 타라의 에너지와 따뜻함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처럼 명상 센터, 달마 센터는 여성 수행자들의 피난처이고 활기를 되찾게 해주는 곳으로 자리 잡는다. 그녀는 여성의 명상에 대한 자연 친화력을 기회로 활용하여 조그 첸(Dzog Chen) 전통에 나타난 것 같은 수행과 융합할 것을 주장한다. 여성들은 자신들의 생리학적인 면을 고려하는 영적 수행을 제시한다. 어머니로서의 삶은 특히 어린 아이가 어릴 때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항상 중단되기 마련이다.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예로 들어 중간 휴식(time-out)을 취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이것은 개인적 수련을 위한 몇 주, 주말, 심지어 한 시간이라도 더 깊은 시간을 마련하여 안정된 상태의 끈을 잡고 명상으로 돌입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는 또한 “지혜의 여성” (Women of Wisdom)이 마치그 랩드론(Machig Lapdron)의 전기에서 몇 번 언급된 대로, 탄트릭 불교의 핵심인 “위대한 어머니”(Great Mother) 원리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위대한 어머니, 염 첸모(Yum Chenmo)는 “붓다의 어머니”(The Mother of the Buddhas), “여래의 자궁”(Womb of the Tathagatas), 그리고 “반야 바라밀” (Prajnaparamita)이다. 이것은 생명을 잉태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여성적으로 기술되고, 기본적 바탕이 되는 원형의 여성상이다.
마치그 래프론의 전기에서는 “창조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일체 법의 텅빈 상태”로 서술되어 있다. 불교 철학에서 모든 경험이 만들어지는 요인으로서의 일체법은, 스스로 존재하는 본질이 없어서 근본적인 허공이 존재의 원형적인 기질이고, 따라서, “창조의 어머니”라고 부른다. 이와같은 위대한 어머니 원리는 현상계에 삶을 부여하고 이 과정은 지속적인 과정으로서 항상 존재한다. 깊은 인식의 완성인 반야 바라밀(Prajnaparamita)도 역시 여성 원리의 한 부분이므로 “붓다의 자궁,” 또는 “붓다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 반야 바라밀은 아상을 놓아버릴 때 나오는 날카로운 인식의 성격을 가지고 있고, 명상은 마음의 혼란스러운 집착을 놓게 하므로 자연적으로 빛나는 마음의 명료함 즉 반야를 불러일으킨다. 티베트 탄트릭 예술에 나오는 남성-여성의 성적 포옹상은 깊은 인식에서 나오는 여성적인 반야(Prajna 지혜)와 남성적인 우파야(Upaya 방편)의 조합이어서 여성적인 염(yum)과 남성적인 얍(yab)의 합이라고 부른다. 출트림은 위대한 어머니 타라를 통하여 나오는 고결한 전통 혈맥의 의미는 여성에게 영적 유산과 영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강조한다.
멜로디 어마차일드 차비스(Melody Ermachild Chavis)
– 몇 걸음 더 나아가서 (Walking a Few Steps Farther)
멜로디 어마차일드 차비스
필자: 멜로디는 사설탐정 조사관이고, 어머니이며 할머니이다. 버클리 젠센터에서 멜 와이츠만 선사(Sojun Mel Weitsman)와 같이 공부하고 있다.
멜로디는 버클리 젠센터 현판에 걸려 있는 역대 전등 조동종 계보, 532년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보리 달마로부터 시작하여 버클리 젠센터 창립자인 순류 스즈키 선사(Shunryu Suzuki Roshi)로 끝나는, 부계를 보면서 모든 조사들이 어머니가 있었다는 것을 상기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붓다가 되기 위하여 영적 삶을 찾아 떠난 젊은이보다, 아이와 함께 남겨진 아내의 삶과 동일시하기가 쉽다고 말한다.
여성 선수행자들이 설법할 때 흔히 석가모니 부처님 생모가 돌아가신 후 키워준 양모이자, 수백 명의 여성을 이끌고 먼길을 걸어 붓다에게 가서 가르침을 구하고 비구니가 될 것을 요청했었던 파자파티(Pajapati)를 거론한다. 그 후 이러한 전통은 사라지고 수백 년이 지난 후에야 다시 이 전통이 살아났다. 하와이에 있는 금강 승가(Diamond Sangha) 역대 전등 계보에 작고한 미국 여성, 모린 스튜어트 선사(Maurine Stuart Roshi)가 이름을 올렸다고 전한다. 멜로디는 파자파티와 같이 걸었던 여성들을 상상하여 본다. 어린아이들이 없었을까? 자녀들은 다 자랐을까? 남겨두고 떠났을까? 서로 도와주면서 걸어가고 있었을까?....
버클리 젠센터에서 가르치고 있는 여성 스승 중의 하나인 메일리 스코트(Maylie Scott)는 수련생들이 보살의 사홍서원을 일신할 때, 만월 보살 제(Full Moon Bodhisattva Ceremony)의 의미를 설명한다. 그 첫 번째는 “시작조차 하지않은 탐진치로부터 유래한, 예로부터 뒤틀려 얽힌 모든 나의 업장을 엄숙히 고백합니다”이다. 메일리는 불교의 중심 가르침의 하나인 업의 고백(avowal of karma)을 자기 삶의 수행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방법으로 설명한다. 그녀는 고백한다는 것은 “버린다”(discard)는 뜻으로 늘 이해했으나, 실제로는 “인정한다”는 의미로 생각한다고 한다. 멜로디도 역시, 실제 과거의 모든 업을 버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인정한다는 것이 더 가능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수행은 예부터 뒤틀린 업을 인정하고 버리는 것으로, 부끄럼 없고, 죄의식 없고, 후회 없이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멜로디는 글의 뒷부분에서, 그녀 자신이 사형수들의 항소를 조사하는 사설 조사관으로서, 살인죄로 복역 중인 죄수들을 면접하는 경험담을 소개한다. 그녀는 아주 작은 고백이라도, 그것을 통하여 다른 사람이나 다른 죄수들, 또는 형무관들을 돕게 하고, 심지어 피해자의 가족에 배상까지도 하게 하는 귀한 깨달음의 통로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녀는 말한다, “아무도 그 따뜻함이 얼마나 멀리 퍼져나가는지, 그리고 한 삶이 언제 이루어지는지 모른다고…” 서원(avowal)은 곧 해방이고, 그래서 보살 서원을 이해하고 실행하는 것이 그녀 자신의 삶의 중심이 되었다고 말한다. 멜로디는, 수행할 기회를 얻으려고 파자파티(Pajapati)와 함께 걸었던 여성들을 상상하는 서원과 함께, 그와 같은 서원의 가르침을 보존하고 수백 년 동안 전해 내려온 계보에 깊은 감사를 느낀다. 끝으로, 멜로디는 그와 같은 전법의 부계를 인지하고 서원을 유지하며 수행하여 젠센터 현판에 있는 전법 계보에 여성들의 이름들이 추가되기를 서원하며 이 글을 맺는다.
알타 브라운(Alta Brown) –
자비 수행의 무자비함(The Ruthlessness of the Practice of Compassion)
필자: 알타 브라운은 캘리포니아, 버클리에 있는 버클리 연합신학대학원( The Institute of Buddhist Studies/The Graduate Theological Union)의 불교학 연구소와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페미니스트 영성 운동대학원(The Immaculate Heart College Center’s M.A. Program in Feminist Spiritualist) 과정을 담당하는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5년 동안 금강승 불교(Vajrayana Buddhism)를 수련해 왔고 켄포(Khenpo, 석학)가 되기 위한 수행을 하고 있다. 알타는 특히 현대 미국 사회에서의 자비 수행에 관한 불교 윤리학을 전공했고, 여섯 자녀를 둔 어머니로서, 콜로라도주, 보울더(Boulder, Colorado)에 살고 있다.
이 글은 1995년 4월, 버클리 연합신학대학원, 불교학 연구소의 여성과 종교 센터 회보에 여성 유대교 지도자(rabbi)와 카톨릭 수녀의 글들을 포함하여, 자비에 관한 종교 간 토론을 실은 글 일부이다. 알타는 자기 스승인 초감 트룽파 린포체(Chogyam Trungpa Rinpoche)가 초심자 제자들에게 장난으로 보살 서원을 하게 했다고 재미있게 이야기한 것을 기억하며 자비 수행에 관한 글을 시작한다. 알타는 우리가 대승불교 전통이 생겨난 때와 전혀 다른 문화적 구조에서 자비행을 실천하는 것을 배워야 할 필요성에 직면하고 있으므로, 서로 다른 면에서 자비 수행을 하는 여러 다른 종교 전통들과 실천 지향성의 다양한 대화의 장을 열어, 자비 수행이 서로를 풍요롭게 하고 미국적 문화 환경의 특징이 되어가고 있는 고통의 경감에 기여하는 방식으로서 같이 일하는 것을 배워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대승불교의 중심적인 윤리는 자비 수행이고, 장차 대각을 성취하려는 보살들은 모든 중생을 위하여 자비 수행할 것을 서원한다. 그러한 보살 서원은 사실 육도 윤회 하는 모든 세계가 텅 비워질 때까지 자아의 한계를 넘어서, 인습에 젖은 모든 행동을 넘어서까지 확장된다. 만약 어떤 특별한 사정에서 불교의 강력한 윤리강령을 위배해야만 할,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는 보살은 그 환경이 요구하는 대로 해야 할 것이다. 심지어 가장 금지된 살인까지도, 어떤 경우에는, 허용된다. 인정하건대 틀림없이 그러한 자유재량은 잠재적으로 위험을 수반할 수 있고 남용될 우려가 있다. 그러나 대승 수행의 도(道)는 보살이 윤리적으로 부여받은 위임사항을 할 때 항상 명상하며, 그리고 명상 후의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러한 수행은 잠재적인 남용, 오용의 근원인 자아보존 기능을 결정적으로 약화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연민-자비 수행은 그러한 수련법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가차 없이 정확하다. 웹스터 사전에는 “가차 없다”(ruthless)라는 말은 “무자비”(lack of mercy)하다는 말로 정의되어 있다. 이러한 이유로 자비 수행을 가차 없다는 말로 특징짓는 것은 자기 모순적은 아닐지라도 독특한 표현이다. 만약 어떠한 요소가 자비와 관련이 있다면 그 성질은 자비로운 것이다. 알타는 묻는다, 연민-자비의 가차 없는 특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또 다른 질문을 만들어낸다: 이 자비심은 누구한테 가차 없이 무자비한 것인가? 대승불교 전통 안에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의 이익을 소중히 하는 태도가 모든 형태의 윤리적 극악무도의 중심점이 된다. 이러한 이유에서,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는 가차 없이 제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앤 클라인(Anne Klein)은 그녀의 저서 “위대한 축복의 여왕을 만나다” (Meeting the Great Bliss Queen ;Buddhists, Feminists, and the Art of The Self)에서, 무아적 태도를 권고할 때 부정되는 자아는 현대 심리학적인 자아나 보통 서구적으로 이해하는 독특한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이야기로서가 아닌 구조적인 용어로 기술되는 자아라고 설명한다. 달라이 라마는 가장 보통의 의미로서의 자아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나라는 한 개인이 우리 마음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타난다. 자신이 영속적이고 일원화된 그리고 자신의 힘을 가진 형태로 나타날 때, 그 자신은, 사용하고 즐기는 주체로서의 몸과 마음, 그리고 사용되고 즐거워진 객체(대상)로서의 몸과 마음이 나와 분리된 별개의 존재인 것처럼 나타난다.” 불교 스승들은 자아는 하나의 관념이고 더 실제적인 독립체가 아닌, 후기 구조주의나 현상학(poststructuralism or phenomenology)같은 철학적인 개념을 넘어선, 관념적 구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불교적 전통에 따르면 이러한 인식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불교 교리나 수행의 맥락으로 볼 때 자아는 마음에 의하여 만들어져 개념적으로 구성(conceptual construct)된 것으로써 이해되며, 그것은 바로, 분노에 대한 거부, 적당한 열정, 그리고 자기 폐쇄적인 부정(denial)과 같은 조건반사적인 전략으로 방어되는 자아의식이라는 것이다. 비록 이러한 구성은 본질에서 느낌이나 지각 같은 일련의 구조적인 동력의 개념적 약칭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의 체험적인 상태는 능히 생존을 위한 위기로써 경험되므로 방어적인 전략이 생기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의 경계가 강화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실재적이고 독립적인 자아의식이 모여 같이 작동하는, 개념상의 구조는 자신의 고통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생명체가 경험하는 고통의 근본이 된다는 것이다. 모든 형태의 자아 보존을 깨끗이 잘라버리는 가차 없는 명확함은 전통적으로 “공(空)을 보는 지혜”라고 부른다.
그것은 본질에서 실체가 없는 자아를 확인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데, 이것을 이해하면 보통의 지각이 형성되는 관념의 화면 뒤에서부터 나와서 모든 것을 직접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티베트 전통에서, “공을 보는 지혜”는 상징적으로 매우 날카로운 양날의 검(two-edged sword)으로 비유되는데, 지혜의 칼은 실체적인 정체성의 개념과, 어떠한 연결 관계도 불분명하게 하는 자기보호 기전의 장막을 잘라낸다고 말한다. 보살이 올바르고 온전하게 문제의 사태파악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이러한 “잘라내는 지혜”가 없는 자비 수행은 어설픈 침해로 변질될 것이다. 트룽파 림포체는 이러한 변질된 자비 수행은 일종의 파괴주의라고 말한다.(Chogyam Trungpa, The Myth of Freedom, 1976): 즉, 다른 사람들을 돕는다는 발상은 일반적으로 자신을 성가시게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고 주위환경을 지배하고자 하며, 지배하려고 하는 욕망이 개인적인 파괴주의를 만들어 낸다는 의미이다. 가차 없는 지혜의 명료함은, 지배욕과 같은 숨겨진 욕망을 위장하는 자신을 돌보는, 자아 보존을 잘라내는 것이다. 이처럼 “공을 보는 지혜”는 숨겨진 다른 목적이 없는 것을 존중하기 때문에 가차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사회적, 정치적, 영적으로 아무리 많은 특권을 얻을지라도, 모든 개념적인 구조를 단호하게 잘라내어 가장 복잡한 사건의 합류지점의 정곡을 찌른다. 공을 보는 지혜는 대승불교 전통에서 깨우침의 “두 날개”로 자비심과 한 쌍을 이룬다; 즉, 지혜없는 자비는 눈이 먼 자비이다. 알타는 이러한 이유로 자비 수행은 반드시 본질적인 자아 정체 확립을 지지하는 모든 기전을 지속해서 가차 없이 관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대승불교 교리와 수행의 관점에서 공(空)을 보는 지혜는 모성(母性)과도 관련하여 설명한다. 어린아이가 어머니 없이 태어날 수 없는 것처럼 붓다도 지혜의 완성이 없이 태어날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여성적인 에너지는 원초적이고 비 개념적인 지혜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자비하고 잘라내는 지각을 가르치는 대승불교 전통은 부드럽고 온화한 자비를 결코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성의 따뜻함이 지혜의 명료함으로 유지되고 드러난다. 이처럼, 대승 수행의 논리는 같은 수행의 두 가지 연결된 모습으로 자비와 지혜 모두를 필요로 한다.
“붓다의 어머니는 지혜의 보검을 휘두르고 자비를 행하는데 가차 없다!”
리타 그로스(Rita M. Gross) –
공동체, 일, 인간관계, 그리고 가족: 미국불교 수행에서 포기와 균형
(Community, Work, Relationship, and Family: Renunciation and
Balance in American Buddhist Practice)
리타 그로스
필자: 위스콘신 대학교 비교종교학 교수이고 쵸감 트룽파 린포체의 오랜 제자이다. “가부장제 이후의 불교: 여권신장 역사, 분석, 그리고 불교의 복원과 여성주의와 종교: 개론” (Buddhism after Patriarchy: A Feminist History, Analysis, and Reconstruction of Buddhism and Feminism and Religion: An Introduction) 의 저자이다.
리타에게 계속 반복되는 불교도들의 질문 중의 하나는 어떤 형태의 생활방식이 깨달음을 촉진하는가에 관심이 있다.
실제로 어떤 형태의 생활방식이 온전한 정신의 질을 증장시킬 수 있을까? 라고 묻는다. 흔히 서양인들이 불교의 근본적 형태로 간주하는 초기불교에서의 답은 명확하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직업과 자손 번식을 포함한 세속적인 삶의 형태를 포기하고, 탈속의 자세로 이끄는 출가 수도 생활을 선호하는 것이야말로 깨달음을 유도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답한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출가자와 재가자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다. 포기하는(renunciate) 또는 금욕적인 마음가짐이 어느 특정 생활 방식보다 더 중요하고 또한 그것은 어느 구체적인 생활 방식과 반드시 관계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정토종과 일부 일본 종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대승불교는 재가 생활보다 출가 생활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반면에, 티베트 불교는 집중적인 불교 수행을 장려하지만 비 수도원적인 생활방식을 존중한다. 이것은 출가-재가 구분이 진지한 불교 수행을 초기불교처럼 출가 수도 생활방식과 반드시 동일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편, 대부분의 서구 불교도는 독신주의 그리고 가정과 직업을 포기하는 서약을 하지 않은 재가 불자이다. 그들은 가족과 어느정도 관계를 맺고, 생계도 어느 정도 책임지는 재가 불자로서 불교 수행에서는 완벽하게 참여하려고 하는 재가 수행자
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아시아 불교 형태 안에서는 터무니없는 이상적인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깨달음”과 “지역사회, 일, 인간관계 그리고 가족” 사이의 연결 문제는 많은 재가 불교도의 경우처럼 어디에도 명백하지 않다.
리타는 구도의 길에서, 자신의 길을 밝히고 명상을 인도하기 위하여 전통적 불교로부터 두 가지 횃불을 들고자 한다. 하나는 자신의 전통인 티베트 금강 불교의 카르마 카규파(Karma Kagyu sect)의 가계 탄원(家系 歎願, lineage supplication)에서 온 것으로, “포기 선언은 명상의 디딤 발판 (renunciation is the foot of meditation)”이라고 하는 한 줄 독경이다. 이 한 줄은 “포기 선언이란 무엇인가?”라는 명백한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한편으로는, 리타는 붓다의 전통적인 가족과 생계를 포기하는 것과 그것을 대체한 반문화적 공동체의 설립 사이에서 명상 수행자에게 어떠한 내용을 전달할지를 질문하면서 균형을 잡고자 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한편, 불교에 더욱더 관여할수록 포기 선언은 불교의 세계관과 수행에 진실로 기본이 되고 그러한 분위기에 끌린다고 한다. 리타는 “공동체(community)” 그리고 “관계(relationship)"라는 의미는 재가 수행자의 생활 방식에서 “깨달음의 기반”이며, 적어도, 전통적으로도 강조되는 온전한 정신과 온화함을 배양하는데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정의를 기초로 리타는 현재 미국에서는, 불교를 포함하여 일반 사람들이 온전한 생활 형태를 만들기에는 일과 가정에 너무나 많은 시간과 힘을 쓰는 반면, 인간관계와 지역사회에는 너무 적게 쓴다고 지적한다.
두 번째로, 일과 가족에 대한 적당한 한계를 두는 것은 미국 재가 불교가 자립적으로 실행할 수 있게 하는 필수적인 면이라고 강조하며, 그러한 제한 없이는 재가 불교는 단지 관습적으로 세속화되어 감을 자각하지 못하는 삶으로 점차 빠져 들게 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적절한 제한은, 재가 수행자의 생활 형태에서, 포기선언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포기선언이 영적 생활에 기본이라는 것을 주장하기는 쉽지도 않고, 매력적인 선언도 아닐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종교적 금욕주의의 반 육체적(anti-body), 반 성적(anti-sexual), 그 외 다른 세속적인 태도들에 관한 것들과 연결되어, 성 차별주의를 촉진하게 된다는 비판을 특히 여성주의자들로부터 흔히 듣게 된다. 이러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리타는 불교에 더욱 매진할수록 불교 수행은 근본적으로 포기선언을 하는 것에 관한 것임을 경험한다고 말한다; 포기하는 것 없이는 불교 수행이 없다고 선언하는 가계 독송은 낡은 것이 아니고, 또한, 포기선언은 붓다의 생애와 초기 승가 형성에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심각한 질문은 명상 수행의 디딤돌이 되는 포기선언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리타는 그것을 포기선언의 마음가짐인 사고방식(mindset)이라고 본다. 가장 기본적으로 포기되어야 하는 것은, 관습적인 생활 형태를 계속 몰아가게 하는 생각, 편안함, 그리고 안전보장에 대한 희망과 꿈이다. 이런 종류의 포기는 매 순간 지속해서 작동하는 포기로서, 우리의 습관적인 경향을 포기하는 첫 순간부터이다.
그다음에는 무엇이 일어나는가? 리타는 최근의 명상수행에서 사소한 문제, 피상적인 천박함, 말솜씨, 주의 산만함, 그리고 강한 자부심을 포기해야 하는 명확한 요구에 압도되었다. 피상적인 천박함을 포기한다는 것은 불교에서 항상 중심 사상인 사물 그대로 깊게 들여다보는 것이다. 고전적인 불교용어로 표현하면 적절한 포기로서 더는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혼동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것은 사소한 목적과 문제들이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여 초연함과 평온함을 상실할 때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출가거나, 재가거나 어떠한 생활형태도 이러한 포기를 보장하는 것은 없다고 한다.
바로 그래서 미국의 재가 불교도로서 우리는 포기선언의 열망을 버리지 않으며, 덜 수도원적인 형태의 불교에 참가하고 있다.
우리의 수행은 공덕을 쌓는 것뿐만 아니라 지혜를 축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므로 포기선언은 불교 수행에 필수적이다. [필자 주: 재가와 출가수행자 사이의 전통적 노동의 분할은 재가수행자에게 수도원을 후원하는 공덕의 축적수행을 권고한다. 어떤 미래의 환생에서 이러한 공덕의 축적은 지혜의 축적으로 수도원 생활로 직접 이끌어 갈 수 있는 생애로 이를 것이라고 권고한다. 전통적인 불교는 두 가지 축적의 수행을 권고 한다: 공덕의 축적과 지혜의 축적. 지혜의 축적 없이 깨달음이 불가능하고 공덕의 축적은 좋은 업과 좋은 환생을 가져온다.] 재가 불교 수행자는 붓다처럼 가족과 일을 포기하지는 않지만, 일과 가정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것은 초탈과 포기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 그러한 초연함과 포기하는 마음은 불교의 예지력을 일으키고, 일반적인 통념에 대한 불만족을 해결하려고 하는 불교의 개선책이다. 이 문제에서 리타는 절묘한 함축적인 차이점을 제시한다: 대승불교의 관점으로는 진정한 포기선언을 하기 위하여 가정을 지키는 생활 습관을 반드시 버릴 필요는 없지만, 확실히 가정 성(domesticity)을 포기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편안함으로 자리 잡은 완벽함과 보금자리와 영속적인 자신에 의해 예측 가능함 등은 포기선언과 양립할 수 없다. 오히려 불교적 예지력은 인습적인 것과 안락 추구를 대체한다. 그리하여 수행 인은 일과 가정을 완전한 불교 수행으로 끌어드리려고 시도할 때 확실히 “면도칼 끝에” 서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든다. 그와 같은 불교 수행의 방법은 일과 가정을 적절하게 제한하는 형태로서의 제대로 된 포기 선언이 필요하다. 리타는 자신의 저서, "가부장제 이후의 불교"(Buddhism After Patriarchy)에서 자신의 생계를 적절하게 제한하는 것 그리고 일 중독을 피하는 것이 팔정도의 하나인 "정근"(正勤, Right Livelihood)의 현대적 해석이라고 제안한다.
다른 한편, 공동체나 인간관계는 “깨달음의 기반”이 된다. 포기 선언은 붓다의 생애와 초기 불교공동체에서 중요한 주제였지만 붓다는 포기 선언을 한 수행자들을 위한 공동체를 형성했다. 리타는 승가가 삼귀의 세 번째라는 것을 강조하며, 불교에서 그것의 중요성이 부처와 법에 이어서 세번째 우선순위로 낙착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런데도, 상가라는 공동체를 삼보의 세 번째로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점이라고 한다. 삼귀의 처의 하나인 상가의 목적은 수행의 여정에서 서로 간의 반영이나 평가와 도반 관계(feedback and companionship)를 제공함으로써 깨달음의 산파 역할을 하는 것이지 집단의 자존심이나 안전한 사회적 환경을 제공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상가란 공동의 목표인 깨달음을 추구하는 일단의 그룹이 영적인 수행 여정의 일부로서 도반의 우정이 필요하고, 또한 심리적인 안정과 정서적인 양육의 필요성에 집중하는 것을 의미하고, 그렇게 하여 건강하지 못한 상호의존에 빠지지 않고 서로를 보살피는 관계를 의미한다고 덧붙여 설명한다. 이러한 공동체와 인간관계 문제는 불교적인 전통에서 강조하는 기본적인 불교 가르침과 명상 수행만큼이나 본질적이라고 강조한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붓다는 제자들이 공동체를 구성
하도록 하였고 그 공동체를 삼귀의 세 번째라고 선언하였다. 리타는 또한 포기해야 할 실제적인 지침 중에 중요한 것은 생식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많은 이유가 있지만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우리의 시간과 정력이 제한되어 있고 결사적으로 중요한 다른 일들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승 불교도로서 주요한 계명은 성경에 나타난 말씀처럼 "비옥하게 생산적으로 증가하기"(be fruitful and multiply)가 아니고 "모든 중생을 구하는 것"(save all sentient beings)이다. 불교도의 입장에서 잘 양육할 수 있는 아이들만을 잉태하여야 하는 것은 명확하다. 이 세상에 이미 육체적, 정신적으로 수많은 고통스러운 빈곤이 있음에도 적절하게 양육할 수 없는 아이를 낳아서 보태서는 안 될 것이다. 꼭 자기 자신의 생물학적 자손을 낳아야 할 불교적으로 특별히 합리적 이유는 없다. 전통적인 요구 때문에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압력은 느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특수한 천재성이 있거나 부모로서 적합한 것이 아니라면 그와 같은 경험은 포기하는 것이 더욱 적절하고 자비심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불교도는 유념 없이 혹은 자아의 동기 부여를 목적으로 하게 된 생식을 조심하여야 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자신의 연장이나 하나의 양상으로서의 생식은 재가 불교 수행자에게는 지극히 적절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자신을 복사해내고 집안 혈통을 계승하는 것은 아이를 갖는 아주 전통적인 이유지만 이와 같은 동기를 가진 또 다른 형태는 자신들의 삶의 허전함을 메우거나 삶과 관계있는 무엇인가를 찾기 위하여 부모가 된다. 이처럼 생식이 자신의 한 면 또는 연장으로서 이루어질 때 부모의 강박적으로 사로잡힌 집착이나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임신하게 된다. 이것은 어린아이들에게도 고달픈 일이 된다. 다시 말해서, 부모의 자아가 지나치게 아이들을 감싸게 되어 아이들에게 엄청난 압력을 지울 뿐 아니라 많은 경우 드물지 않게 아이들의 삶을 대신하여 살게 되거나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리타는 그러한 심리적인 근친상간(psychological incest)은 거의 육체적인 근친상간만큼 파괴적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것은 부모가 가족에 대한 투자를 적절히 제한하고 공동체, 일, 영적 수련에 균형을 취하지 않으면 피할 수가 없게 된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감정적 근친상간(emotional incest), 지나친 가족 매몰성은 전통적 윤회 논리로서, 특히 아시아 가족들에게서 나타났고, 지금도 불가피하고 적절하다고 여겨지고 있다. 불교도들이 건전한 가족 형태에 기여할 수 있는 여러 분야 중 하나는, 독립적인 부모 양육을 통한 사고력과 그리고 집착을 벗어난 초연의 공덕과 더불어 양육과 가족에서의 포기의 공덕을 생각하는 불교적인 이해를 하는 것이라고 한다. 명백하게도 이러한 추가적인 중요한 불교이해는 출가자보다는 재가 불교도에서 나와야 함은 너무도 명백하다.
리타는 결론적으로, 불교의 삼보(Three Jewels) 중에서 세 번째인 승가 공동체에 우선순위를 부과하는 것이 깨달음의 중심적 모체가 되므로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승가 내에서 진정한 교우 관계, 심리적 안정감 그리고 감정적 배려에 관한 문제는 현재 미국 불교가 당면한 절박하고 필수적인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이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공동체와 인간관계에 헌신하는 에너지와 가족과 일에 헌신하는 에너지의 적절한 균형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실레스트 웨스트(Celeste West)
ㅡ 나의 탄트릭 뒤집기 (My Tantric Flip-Flop)
실레스트 웨스트
필자: 실레스트 웨스트는 샌프란시스코 젠센터 도서관과 서점의 관장이고, 1989년 Hartford Strret 젠센터의 주지이며 웃는 붓다 이싼 도르시(Laughing Buddha Issan Dorsey)로부터 계를 받았다. "여성 동성애자들의 집단혼"(Lesbian Polyfidelity)등 여섯 권의 저서가 있다.
실레스트 웨스트는 1988년 "여성과 불교" 학회를 축하하는 참여불교 연수회에서 경험했던 재미난 일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연수회의 심각한 분위기에서, 실레스트는 평화 운동가, 조아나 메이시(Joanna Macy)가 고안한 “탄트릭 뒤집기”라고 불리는 잘 맞는 개념을 소개했다. 그것은 부정적인 에너지에 저항하기보다는 그것을 통하여 유도 동작 같이 움직이는 놀이이다. 탄트릭 수행에서는, 불순물을 금으로 혹은 흐릿한 상태를 확연한 의식으로 변형시키는 촉매로서, “좋은 것”뿐만 아니라 “나쁜 것”도 사용한다. 탄트릭 뒤집기는 주먹으로 엉덩이를 쳐서 뒤집어져 구르는 것인데, 그것은 [괴로운] 문제를 뒤집어서 삶의 춤으로 돌리는 놀이였다. 실레스트는 조아나 메이시의 탄트릭 뒤집기는 온 세상을 향하여 있는 그대로 “Yes”라고 말할 수 있는 경이로운 방법이라고 외친다. 더불어, 그녀는 자신의 스승인 이산 (Issan)의 가르침을 떠올린다, "단지 앉아라"(Just Sit); 이별, 외로움, 공포, 그리고 절망과 함께, 또한 그럴 힘과 함께 앉아라. "선(禪)의 목적은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고 부처처럼 행동하는 것이다"라는 이싼의 가르침에서 실레스트는 씩씩했던 그녀의 할머니가 했던 말도 생각났다; "조용한 척하고 있으면 정말 조용하게 된다"고. [주: 지관타좌(只管打坐): 일본 조동종 승려 도겐이 말한 ‘오직 앉아 있음’의 조동종 전통 선 수행법; 공안을 사용하지 않고, 한순간 조용히 모든 생각을 끊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한 시간 동안 생각하지 않으면 한 시간 동안 부처가 된다. 한 시간 동안 우주처럼, 거울처럼 맑게 된다는 것이다.]
실레스트는 고요한 척하며, 그곳에 온 여성들의 여러 가지 괴로움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괴로움은 이 세상을 값지게 만드는 보살행의 괴로움이었고, 작지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직접적인 행동들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너덜너덜한 느낌들을 품고 그냥 앉아 있다(“Just Sit”).
마침내, 주마등 같은 감정들을 담은 학회 연수회가 이렇게 끝났다.
메일리 스카트(Maylie Scott) –
기차 선로에서: 불교도들의 짧은 역사 이야기
(A Short History of Buddhists at The Tracks)
메일리 스카트
필자: 메일리 스카트는 버클리 젠센터에서 25년간 수행하는 비구니이다. 북부 캘리포니아 아르카타 젠 그룹 (Arcata Zen Group)에서 격월간으로 선 지도를 하고 또 평화단체에서 일하고, 불교도 사회 참여 단체 (Buddhist Alliance for Social Engagement)의 지도 교사로 있다.
메일리 스카트는 1987년 9월, 샌프란시스코 동쪽 30마일 지점에 있는 콩코드 해군 무기 저장소 (Concord Naval Weapons Station, CNWS)에서 불교 평화 단체를 결성하여 3년 이상 비폭력 시위를 주도하면서 겪은 역사를 간단히 기술한다. 1987년 9월 1일, 비폭력 주의자 브라이언 윌슨과 그의 친구 두 명은 기차 궤도 위에 앉아서 무기 운반 기차를 막을 것을 결심한다. 해군기지에 그들의 의도를 알리고 해군 병사들이 나와서 기차가 지나갈 수 있도록 고속도로 교통을 통제했다. 시속 5마일로 달려야 할 기차는 교차로에서 15마일로 달렸다. 선로 위에 반가부좌로 앉아 있던 브라이언 윌슨은 기차에 치이고 기차 밑으로 끌려 들어갔다. 머리를 심하게 다치고 다리가 잘려나갔으나 기적적으로 목숨은 살아났다. 1987년 브라이언 윌슨은 CNWS에서 주장하기를, "매번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엘살바도르와 니카라과에서 사람들이 죽는다. 그들의 생명은 우리보다 덜 가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생명이 더 가치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서해안 지역에 있는 가장 큰 핵과 재래식 무기의 해상 운송 저장소인 CNWS에서 매주 몇 차례씩 아시아와 남미로 판매하는 군수품으로 인하여, 그동안 750만 명의 인명이 살상 되었다고 추정되었다. 메일리 스카트는, 브라이언이 불구가 된 이틀 후, 항의하고자 모인 15000명의 시위를 주도했다. 일부는 "뉴렘버그 항의"(Nuremberg Action)라고 칭하며 야영을 시작하여 1991년 걸프 전쟁까지 계속하였고, 집단 야영지는 샌프란시스코와 미국 내 다른 지역으로부터, 특히 여름 동안은 전 세계로부터, 평화 행동단체의 이정표가 되었다. 그들은 무엇에 대하여는 말할 수 없었으나 무엇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명백히 말할 수가 있었다. 그들의 장소는 소비를 조장하는 사회의 폭력, 제도화된 무지, 그리고 무기의 폭력에 대하여 “No”라고 말하는 근거가 되었다.
메일리 스카트는 매일 낮과 밤 버클리에 있는 집에서 운전하여 CNWS로 가서 시위하고, 때로는 감옥에도 가고, 집으로 돌아오는 이중생활처럼 보이는 삶을 계속하면서, 마침내, 1988년 1월 버클리 젠센터에서 “집을 떠나는” 맹세와 함께 비구니계를 받는다. 그녀는 기지 앞에 있는 고속도로에서 중앙아메리카, 팔레스타인, 이락 등지에서 무기로 인한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긴 흰 십자가를 들고서 많은 시간 걸으며 명상을 했고, 더 많은 시간은 마티네즈 카운티 교도소의 노랑색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시끄러운 TV 연속극 소리와 함께, 수식관을 하면서 그녀의 조급함을 달랬다. 그렇게하면서 메일리는 문제의 핵심에 뛰어들어 열린 마음의 의도를 가지고 중도의 삶을 사는 법을 배웠다. 브라이언 윌슨은 CNWS에 소송을 제기하여 결국 승소했고, 많은 대화와 방법을 통하여, 해군 당국은 그 과정에 더욱 조심하게 되었다.
1990년 2월, 메일리 그룹은 토요일 밤 좌선 회를 결성하였고, 그 지역 불교 평화 단체는 일 년 이상 매달 한번씩 토요일에 "마음 챙김 명상의 아침"(Morning of Mindfulness)을 지원하여, 모두 둥글게 돌려 앉아서 비가 오건 맑은 날이건 명상을 했다. 차들이 지나면서 찬성하는 경적을 울리기도 하고 야유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십자가를 들고 자애 경(metta sutta)을 끝으로 독송했다. 그들의 농성 기도는 1991년 2월 걸프 전쟁이 시작하면서 끝나게 되었으나, 브라이언의 불구 기념일은 아직도 지키고 있다. 사오십 명이 샌프란시스코 만(bay) 근처에 모이고 브라이언도 온다. 그러나, 참석하는 사람 숫자도 점점 줄고, 더는 선로 근처에 테이블도, 그림도, 기도를 위한 깃발도 없다. 무기 실은 트럭이나 기차는, 93세의 아브라함(Abraham)과 67세의 도로시(Dorothy)가 시위하고 있는 매 월요일만 제외하고는, 예전처럼 아무런 장애 없이 길을 통과하고 있다.
메일리 스카트의 3년 5개월에 걸친, 기도와 함께 진행한 비폭력 불교 평화 단체의 시위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메일리 스카트는 독백한다… “나는 맹세코 헤아릴 수 없는 생명들을 지킬 것을 서원한다.”
서평자: 주 현 (뉴져지 드루대학에서 불교심리학 전공, 현재 스토니부룩 대학에서 불교학 강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