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zeppa 외 4편
김 안
나는 듣는다.
토끼가 겨울나무를 파먹는 소리,
얼어버린 눈동자가 물결처럼 갈라지는 소리.
나는 듣는다, 술로
연명하다 굶어 죽은 시인의 창밖으로 계절처럼
전진하던 기차 소리,
그 소리에 밤하늘의 불꽃이 흔들리고.
낭만과 폭력을 구분하지 못하던 시절과,
죽은 이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벌레의 날갯소리,
듣는다.
음독이 묵독이 되는 소리,
기억을 잃은 이들이 거울 앞에 서는 소리,
나는 실패하고,
나는 전진하기에,
이것은 나의 몫이므로.
들판에는 머리만 남겨진 비둘기
창문에는 멍든 구멍들
오만과 부끄러움
죄의식과 편견
무능과 순수
게으름과 욕망
잘못 살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겁니다. 우리는 누구나……
새로 추가된 약의 이름을 생각한다.
약의 개수만큼 손가락을 접는다.
남겨진 손가락을 접는다.
남겨진 손가락을 귀에 넣고 전진시킨다,
전진,
희망과 삶의 전진.
나는 듣는다,
마지막 우편물에 적힌 주소지에서는
내가 모르는 누군가 하얀 국수를 삶고 계란을 풀고,
누군가 냉장고 문을 열고,
누군가 둥근 식탁에 앉아 누군가와 마주하고,
천사가 떨어뜨리고 간 횃불처럼 환해지는 뱃속,
나는 나의 귀로 듣는다, 모든 마음이 내 것인 양,
바닥으로 떨어지는 그릇,
끊긴 기타 줄처럼 뒤엉킨 국수,
깨진 거울,
선생님, 무엇 하나 지탱할 수 없는 검고 가느다란 언어의 팔을 휘두르는 게 한때 제 직업이었습니다만……
듣는다,
변명을 시작하기 위한 음소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깊고 어두운 약물의 이름을.
* 리스트(F. Liszt)의 초절 기교 연습곡 4번 '마제파(Mazeppa)'
- 『Mazeppa』, 문학과지성사, 2024.
숭고
다리를 끌어본다 세워본다 다시
주저앉아 11월의 가득한 틈새들 사이로 쏟아지는
강철 햇살이 사람들의 발목을 자르는 풍경을 본다
나는 내게 멀리 있어서
아파트 한구석 자전거 보관소에서 나는 눅눅한 쇠 냄새 같은
녹거나 기화하는 썩는 계절이구나
몸은 이미 구석구석 시신이구나
낯선 시신을 눕히는 방식으로 나는 나를 멀찌감치 쓴다
당신은 너무 멀리 오셨습니다
나는 돌아갈 수 없게 되었군요
잠과 낮을 잃어버린 채
눈을 감는다 이렇게 어두울 수가 있다니
눈을 뜬다 이렇게 어두워야만 하다니
이 믿음이
이 증오가
마음의 선한 쓸모가 몸속 돌이 아닌 돌이 되어
제 아무리 씻겨도 문질러도 둥근 백골은 아니라서
어머니, 뜯어진 옷을 고치는 마음으로
끊겨진 발목을 끼우시는
들판의 돌을 깨부수는
그 뒷모습 너머로
뒷모습을 버티는 가는 발목 사이로
기문비나무가 시커멓고 뾰족한 잎사귀를 움켜쥐고
둥글고 짙은 그늘을 만들고 있다
그늘 구석구석 눈부신 발자국들 찍혀 있다
- 『Mazeppa』, 문학과지성사, 2024.
방생되는 저녁
마음에 생활이 넘쳐흐를 때면, 딸은
더 많은 말을 배운다.
말이 넘쳐 말이 넘쳐
나란히 베란다에 앉아 있으면 해가 지고
내 문장은 점점 눈 어두워져
헤매고 전위 따위야 혁명 따위야
말만큼 생활이 넘쳐도
생활이 내 아랫입술 밑에서 짜고 차갑게 찰랑거려도
이 물로는 내 죄가 씻기지 않는구나
마음의 올가미를 던져
억지로 끌어모은 이 상앗빛 면발로
저녁이 달그락달그락 흐르고
귀가 남아 있으니 듣고 마음이 남아 있으니 손잡은 채
딸의 말들로 짠 그림자로
이 조잘거리는 저녁 속으로 가정이 안온히 가라앉을 때 나는 여전히 그곳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눈먼 내 문장들은 제 집도 없이 천지사방
헤매고 속죄 따위야, 치욕 따위야
그저 내 말들을 방생할 뿐
- 『아무는 밤』, 민음사, 2021.
하얗게 기쁘게
하얗게 기쁘게 눈이 내리네 눈을 맞은 사람들은 붉은 화상을 입은 채 하얗게 기쁘게 내리는 눈을 피해 지하계단으로 뛰어드네 눈은 하얀 연기를 내며 녹아내리고 지하계단 속 몇 개의 눈빛이 어둠에 삼켜지네 나뭇가지는 연신 파랗고 싱싱한 잎새를 피워내네 나무 속에 묵어 있던 아가가 시퍼런 손등에 내미네 시퍼런 손등 위에 하얗게 기쁘게 내리는 눈이 소복이 쌓이네 은밀한 웃음이 터져나오네 윤곽을 잃어버린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뛰네 서둘러 서둘러 지하계단으로 들어가지만 윤곽 없는 얼굴에 눈빛 하나 얻은 채 쫓겨나네 하얗게 기쁘게 눈이 내리네 눈빛만 남은 여자가 나무에 다가가 아가의 손등 위에 소복이 쌓인 눈을 핥아먹으며 시퍼런 손등 위에 입맞춤하네 하얗게 기쁘게 내리는 눈 속에 나무가 몸을 벌려 여자를 삼키네 윤곽 없는 잎새가 은밀하게 흔들리고 하얗게 기쁘게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네
- 『오빠생각』, 문학동네. 2011.
서정적인 삶
당신은 나를 향해 몸을 벌려요 나는 그것이 사랑이 아닌 것을 알고 있지만 어느새 내 얼굴은 녹색이 되어요 당신이 몸을 벌리면 파르르 서리 낀 창이 흔들려요 방 전체가 하얀 서리들로 가득 차요 밤이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고, 당신의 벌어진 몸에선 노래가 흘러나와요 나는 이 노래를 알고 있지만 아무리 불러도 첫 소절로만 돌아갈 뿐이에요 나는 이 노래의 끄트머리에 뱀과 쥐들, 개와 파리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나는 당신의 노래를 움키고 당신의 푸른 질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요 온갖 은유를 만져요 제발 나를 안아 주세요 베어 먹지 않을게요 제발 나를 안아 주세요 베어 먹지 않을게요 당신은 사려 깊은 장님처럼 내 손을 빼내어 당신의 입 안으로 넣어요 아직 나의 고백은 끝나지 않았는데 당신의 입 안에서 내 손이 사라져요
- 『오빠생각』, 문학동네. 2011.
김안
-2004년 『현대시』 등단.
-시집 『오빠생각』, 『미제레레』, 『아무는 밤』, 『Mazeppa』 등.
-김구용 시문학상, 현대시 작품상, 딩아돌하 작품상, 신동문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