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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2011년 2월 16일 정오, 양애경 시인을 대전컨벤션센터에서 만나 시인의 근황과 일상, 그리고 시에 대한 생각 등을 들었다. (사진 : 이정섭 시인)
【웹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 SINCE 2006】2011년 3월호(2011, March)
□ 양애경 시인
1956년 서울 출생. 충남대학교 국문학과 및 동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동국대학교 영상대학원 시나리오 전공 박사과정 수료. 1982년《중앙일보》신춘문예에 시「불이 있는 몇 개의 풍경」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불이 있는 몇 개의 풍경』(청하, 1988),『사랑의 예감』(푸른숲, 1992),『바닥이 나를 받아주네』(창비, 1997),『내가 암늑대라면』(고요아침, 2005), 저서로『한국 퇴폐적 낭만주의 시연구』(2000)출간. 대전시인상(1997)과 충청남도문화상(2003)을 수상. <시힘>과 <화요문학> 동인.《화요문학》,《시와인식》,《시를사랑하는사람들》등의 편집에 관여하고 있고, 공주영상대학 방송영상스피치과 교수로 근무 중.
■ 김명원 시인
1959년 충남 천안에서 출생. 이화여대 약학과 및 성균관대 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 문학박사. 1996년 《詩文學》으로 등단. 시집으로 『슬픔이 익어, 투명한 핏줄이 보일 때까지』와 『달빛 손가락』이 있음. 2002년 '노천명문학상'과 2007년 '성균문학상' , 2008년 제13회 '시와시학상 젊은시인상'을 수상. 현재 대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이며 웹진『시인광장』편집위원.
김명원의 시인탐방 14 매콤 달콤 쌉싸래한 맛시 요리사, 양애경 시인
시를 맛으로 분류하고 싶을 때가 있다. 식재료 본연의 맛을 살린 담백한 이미지의 시가 있는가 하면, 특별한 소스를 듬뿍 뿌려 개성 넘치는 맛을 뽐내는 시가 있고, 바삭바삭하게 익혀서 태운 시어의 질감을 드러내는 맛시가 있는가 하면, 재빨리 구워내어 고슬고슬한 비유의 질감을 살린 육질 풍부한 시가 있다. 우리나라 고유의 장맛이 우러나는 발효의 시가 있기도 하고, 이국적인 감각이 흠씬 풍기는 미각 자극용 시가 있기도 하다. 대대로 전수되어 오는 전통적 비법으로 조리된 시가 있고, 아방가드르식 모험의 레시피를 이용한 퓨전의 현대시가 있기도 하다. 다양한 시를 전시한 뷔페식 식단에서 양애경 시인의 시는 어떤 맛일까. 우선 식재료로는 봄철 갓 나온 채소나 나물을 주로 한 싱그러움에다 풍미로는 고추장 소스가 듬뿍 들어 간 매콤 쌉싸래한 맛이라고 하면 미식가가 못 된 나의 편협한 표현일까. 어느 날 밥맛이 없어 특이한 식단을 생각해내듯, 넘쳐나는 시들을 읽다가 갑자기 상큼한 시 맛이 그리워진다면, 바로 양애경 시인의 시를 펼쳐볼 일이다. 멀리 가서 구하지 않아도 되는 주변에 널린 재료들에서 어떻게 이런 맛을 조리해 낼 수 있을지 경이로울 정도이다. 시인의 손길에서 평범하기만 했던 각각의 이미지들은 서로에게 맛을 양보하고 덧입히며 새로운 메시지로 한층 맛깔스럽게 탄생하는 까닭이다. 양애경 시인에게는 시정부詩政府가 수여하는 일급 시요리사 자격증이 분명 부여되었을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그렇다면 그 비법의 시 맛을 전수 받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인들이 시인 옆에서 시인의 시를 시식하고 음미하며 질투하고 있을 것인가. 여성이라서 낼 수 있는 젖맛, 여성으로서만이 담론으로 승화 시킬 수 있는 여성성의 문제를 슬프게도 흥겹게도 다룬 신맛, 처녀라고 노래하는 마돈나를 호스티스로 초대하여 파티를 주도하는 노련한 단맛, 암늑대의 모성 본능을 날카롭게 드러낸 쓴맛은 양애경 시인만이 조리할 수 있는 맛의 영역일 것이다. 시인과 만나기로 한 날은 햇살이 풍성했다. 쌀쌀하지만 입춘 지난 뒤 한층 누그러진 바람에 묻어오는 봄소식이 경쾌한 정오, 약속 장소에는 정확히 시간을 지킨 시인이 서 있었다. 단아한 모습이 밝고 환하다. 작년에는 시단 행사로 시인과 자주 만난 편이었지만 새해 들어서는 처음이다. 봄빛 탓인지, 시인의 개나리 빛 노란 머플러 탓인지, 괜스레 나는 웃음이 난다. 그리고 말이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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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타이저Appetizer- 활기찬 봄 준비
■ 김명원: 직장이 대학이시니 방학에는 조금 여유로우신가요? 학기 중의 분주하셨던 일상에서 놓여나실 테니까요. 이번 방학은 어떻게 보내고 계세요? □ 양애경: 작년에 감기를 오래 앓았고 좀 다치기도 했어요. 쉬라고 몸이 보내는 표시였나 봐요. 그래서 긴 방학 동안 모임도 못가고 여행도 안가고 푹 쉬면서 몸과 마음을 회복하는 기간으로 보냈어요. 덕분에 효과는 있었던 것 같네요. 이제 봄을 맞아 활기찬 시간을 보낼 준비가 되었으니까요. ■ 김명원: 선생님께서 강의하시는 대학이 공주영상대학이고, 몇 해 전에는 동국대에서 영상에 관련하여 박사 과정을 수료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대학에서 어떤 과목들을 가르치고 계신지요? □ 양애경: 제가 소속되어 있는 학과는 방송영상스피치과예요. 말하기, 쓰기, 영상제작 같은 ‘표현’을 주로 하는 과인데요. 학생들의 진로는 아나운서나 리포터 같은 방송진행 쪽과 작가 외 PD같은 영상제작 쪽이지요. 어느 쪽이나 대본쓰기, 기사쓰기, 아이디어 기획이 필요하기 때문에 저는 미디어문장론과 구성대본을 가르쳐요. 동국대에선 시나리오 전공을 했고 원래 영화를 좋아했기 때문에 영화 기초과목과 시나리오도 강의하고, 만화창작과의 스토리작법도 맡았어요. 시 강의가 없는 것이 좀 아쉽지만 글쓰기를 가르치는 것은 마찬가지랍니다. 사실 저는 소설과 영화를 보는 데 대부분의 여가 시간을 써요. 그러니 취미 생활이 강의와 직접 연결되는 셈이지요. ■ 김명원: 취미와 직업이 일치한다면 축복인 삶일 터인데, 그러하시다니 그저 부러울 뿐입니다. 일전에 선생님의 대학 연구실을 방문하였을 때, 산중의 고요가 깃든 넓은 공간이 인상 깊었는데요. 대체로 그 연구실에서 집필을 하시나요? 아니면 집필에 영감을 주는 장소나 공간이 따로 있으신가요. □ 양애경: 저야 시를 쓰니까 집필공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니지요. 생각 떠오르는 곳이 곧 글 쓰는 곳이니까요. 전엔 혼자 버스를 타고 가거나 할 때 시상이 떠올라서 메모하곤 했는데 요즘은 1시간 거리의 학교에 자동차를 운전해서 오가니까 시상이 떠올랐을 때 바로 메모할 수 없어서 좀 아쉬워요. 오래 전, 교수 공채에 응모해서 면접대기실에 있다가 시가 떠올라서 정신없이 메모했던 기억이 나네요. 주변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을 했지요. 시의 영감이란 제가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시 쪽에서 제게 찾아오는 것 같아요. 찾아올 때 잘 모셔야 제 것이 되니 늘 조심스럽고요. ■ 김명원: 그렇게 찾아 온 시나 글들을 대체로 언제 써서 완성하시는 편인가요? □ 양애경: 말씀드린 것처럼 시는 영감이 제게 찾아올 때, 그리고 다른 글(산문이나 평론)은 원고청탁에 쫓겨서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때랍니다. 시는 억지로 쓸 수가 없기 때문에 펑크 내는 일이 많아요. 하지만 다른 글은 노력하면 되는 거니까 펑크 내는 일이 없지요. 그만큼 시가 제게 신성한 존재라고 느낍니다. 어떤 글이든 처음 시작이 어렵기 때문에, 집중력이 높아지는 밤이나 새벽에 시작하는 일이 많아요. 하지만 이미 진행 중인 원고라면 아무 때나 괜찮습니다.
메인 요리Main Dish- 몇 가지의 중요한 순간과 맛있는 시
■ 김명원: 선생님께서는 198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셨는데요. 등단 당시의 상황을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 양애경: 그때가 대학 졸업하고 2년쯤 되었을 땐데요. 그 때만 해도 문단에 여자 작가가 적었어요. 당선작들도 사회적인 문제를 다룬 것들이 많았고요. 여자라서 약해 보일까 봐 작품도 다소 중성적인 것을 고르고, 이름도 중성적인 필명으로 응모를 했었지요. 당선작 제목은「불이 있는 몇 개의 풍경」이었고, 필명은 ‘길상’으로 냈던 것 같아요. 발표할 때는 본명으로 나갔지만요. 처음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가 당선통보 전화를 했을 때, 의외라고 놀라더라고요. 남자일 줄 알았다면서요. 지금은 신춘문예에 여자가 남자보다 많이 당선되지요. 그만큼 많이 바뀌었어요. 또, 나중에 알고 보니 아슬아슬했던 게 제 원고가 마감 직후에 도착했다더군요. 우편발송은 기한 내였지만요. 당시 문화부장이었던 정규웅 기자님이 제 원고를 읽어보고 추가로 넣었대요. 하마터면 심사테이블에도 못 올라갈 뻔 했던 것이지요. 아무튼,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미래의 삶이 결정되는 몇 가지의 중요한 순간이 있는데, 신춘문예 당선도 그 중의 하나였던 것 같아요.
1 立冬 지난 후 해는 산 너머로 급히 진다. 서리조각의 비늘에 덮인 거리 어둠의 粒子가 추위로 빛나는 길목에서 나는 한 개비의 성냥을 긋고 오그린 손 속에 꽃잎을 급히 피워 낸다. 불의 의상을 입으며 事物은 하나하나 살아나기 시작하지만 불은 가장 완벽하게 피었다 지는 꽃 화사한 절망. 절벽으로 떨어지듯 꺼진다.
2 기침을 한다. 탄불을 갈며. 달빛 밑에 웅크리면 아궁이 옆으로 희미하게 흩어지는 그림자. 한밤중 여자들의 팔은 生活로 배추 속처럼 싱싱하게 차오르지만 좀처럼 불은 붙지 않는다. 食口들은 구들에 언 잔등을 붙인다. 어떻게 된 것일까 옛 집의 불씨는. 영원히 꽃피우는 전설의 나무와 같이 純金으로 제련된 불씨, 화로에 잘 갈무리되어 주인을 지켜주던.
3 이제 불은 때묻고 지쳤다. 누가 불을 去來하고 누가 불에게 명령하는가. 불길한 謀反의 충동에 몸을 떨며 콘크리트 보일러실에 갇혀 웅크리고 있는 불의 꿈 밤 열시 工員들은 흩어지고
4 짧은 인사의 잔손목을 흔들다 말기. 부딛치다 와아 터지기. 안개 속에 서있는 불 문을 열고 길길이 솟구치는 불 산맥 속에 잠들어 있는 원시림의 불.
5 牧丹 마른 가지에서 올라오는 불의 빛깔은 사과나무 장작에 옮겨 붙으며 만발한다. 쓰레기 더미에서 불은 꽃핀다. 들끓으면서 平等한 불의 속 熱은 순수하여 평화롭다.
6 熱은 빛나지 않고 소리내지 않는다. 그러나 따갑게 퉁겨져나와 손바닥을 쏘는 열기 우리의 입다문 眞實 바람 부는 都市의 밑둥을 떠받치는 건강한 당신 일곱 시 반에 집을 나와 아홉 시 반에 퇴근하며 휘파람을 부는 당신, 당신의 불.
7 이 속에 잠자는 불이 있다. 작은 성냥골 안에, 성냥은 불을 꿈꾸고 불은 성냥을 태운다. 순간의 불꽃은 기다림을 地上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깔로 바꾼다.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꿈을 시작한다. -「불이 있는 몇 개의 풍경」전문
■ 김명원: 선생님 시는 도시 서정을 낭만적인 이미지로 드러낸 첫 시집『불이 있는 몇 개의 풍경』으로 색다른 서정시의 주제를 펼쳐 보이시는데요. 도시 서정에 관심을 가지셨던 이유가 궁금합니다. □ 양애경: 김명원 선생님 말씀대로, 제 초기 시는 자연보다는 도시의 서정을 다뤘다는 평을 많이 들었습니다. 당시의 시인들이 대부분 전원의 서정을 썼던 시기였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대전에서 같이 활동했던 시단 선배인 김백겸 시인과 저 외에는 도시 서정을 다룬 시인이 거의 없었거든요. 우리는 시어에서는 많이 달랐지만 도시 생활과 그 속에 숨어 있는 허무에 대해서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 김명원: 첫 시집 상재 이후, 두 번 째 시집『사랑의 예감』과 세 번 째 시집『바닥이 나를 받아주네』를 통해 음습한 도시 서정과 함께 삶의 잔혹성을 고발하는 문명 비판적인 시, 그리고 몸을 위주로 한 여성적인 생의 조건 등을 다각적인 주제로 제시하셨는데요. 특히 마지막으로 출간하신 네 번 째 시집『내가 암늑대라면』에서 보여주신 독특하고 강렬한 여성성은 매콤한 맛이 일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집과 시집 제목이 된 표제시의 뒷이야기를 좀 들려주시지요. □ 양애경: 제가 이 시집을 냈을 때, 시집 제목이『내가 암늑대라면』라고 하면 웃어버리는 분들이 많았어요. 늑대가 아주 나쁜 동물로 묘사되는 일이 많은데다가, 엉큼한 남성을 늑대에 비유할 때가 많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저는 개과 동물을 아주 좋아하거든요. 개, 여우, 너구리, 늑대, 이리는 모두 개과 동물이지요. 그 중에서도 개의 충실함과 정직함, 그리고 다감한 애정은 감동적이기까지 하고요. 먼 옛날 인류의 선조는 첫 번째 가축으로 늑대를 선택해 길들이고 변형시켜 개로 만들었다고 해요. 지금도 개에 대한 인간의 선택과 변형은 계속되고 있고요. 그런데 개는 사랑스럽지만 존경할 만하지는 않지요. 하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순혈의 늑대라면, 존경할 만하다고 생각해요. 길들여지지 않고, 변형되지 않고, 사람에게 먹이와 주거를 의존하지 않는 진짜배기 야생동물인 늑대는 멋지잖아요. 거기다가 동물소설가가 쓴 늑대나 늑대개에 대한 이야기의 영향도 있었겠구요. 또 늑대인간 전설을 그린《나자리노》라는 영화도 있었는데, 낮에는 사람이지만, 달이 뜨는 밤에는 늑대로 변해버리는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의 이야기지요. 소녀다운 감수성이었겠지만 참 슬프고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였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늑대는 무리를 지어 노약자를 보호하며 살아가는 아주 의리 있고 사회성이 있는 동물이라는 동물학자의 증언도 고무적이었어요. 언젠가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늑대와 함께 살며 늑대를 연구하는 남자에 대한 다큐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처럼 살고 싶었죠. 그래서 늑대와 시가 연결된 것이랍니다. ■ 김명원: 이 시에서는 인간으로 인유된 결혼 제도나 사회 제도에 대한 비판이 여성의 시각으로 표현되고 있지요? 바로 새끼를 지키고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암늑대의 표독스러운 성정으로 말이지요. 선생님께서 한 문예지의 지면에서 밝혔듯이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는 듯도 한데요. □ 양애경: 임신하여 만삭이 된 암늑대는 먹이사냥을 하기 어렵게 될 것이에요. 새끼를 출산하고 젖 먹여 기르는 동안에는 더욱 그렇지요. 그때는, 새끼들의 아빠인 숫늑대가 먹이를 물어다가 부양해야 할 것인데, 그러고 보면, 인간의 여자가 까다롭게 남편감을 고르는 이유도 그것인 듯 해요. 임신하기 전에, 출산과 육아가 계속되는 기간 동안 자신과 아이들을 부양해 줄 능력과 책임감이 있는 남자인지를 판단해야 하니까요. 잘못하면 아이와 함께 굶어 죽을 것인지, 아이들을 버리고 혼자라도 살아남을 것인지를 선택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에요. 간혹 새끼를 낳은 동물이 자기 새끼를 죽이거나 먹는 예를 보는데, 식욕 때문은 아닐 것 같아요. 환경이 불안해서 무사히 새끼와 함께 살아남기 어렵다고 판단한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고 보면, 생활고를 비관해서 아이들과 동반자살하는 엄마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고요. 또 수컷은 되도록 많은 암컷에게 자신의 씨를 뿌리고 싶어하는 게 본능이라고 하지 않던가요. 수컷의 본능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왠지 울컥해진데다가 새끼가 어느 정도 자란 후 가족을 버리고 다른 모험을 찾아 떠나는 숫늑대를 연상 하니까 솔베이지처럼 평생을 남자의 귀환만 기다리는 여자가 되기는 싫었어요. 그래서 시점이 주인공인 암늑대에게 맞추어져 시가 마무리 되었는데요. 늑대 무리의 우두머리는 나이 들고 지혜로운 암늑대죠. 사실, 원시사회에서 혈통을 대표하는 것은 남자보다는 여자였다고 해요. 당시의 집단 난혼亂婚상태에서는, 아버지를 구분하기가 어렵고, 어머니는 확실하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는 이른바 모계사회였는데, 혈연의 중심에서 가족을 결집시키며 경험이 많고 지혜로워서 구성원들을 위험에서 지키고 풍부한 먹이가 있는 곳으로 인도할 수 있는 암컷이 모계사회의 족장이 아니었을까요? 제 꿈 또한 오래 살아남아 그런 현명한 암늑대가 되는 것이에요. 그리하여 젊음과 미모로만 가치를 인정받는 꽃이 아니라, 젊은이들을 보호하는 대모代母가 되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어요. 매력적인 암컷에서 현명한 지도자가 될 수 있을 때까지, 오래도록 살아남고 싶다는 희망, 이것이 저의 꿈이고 시의 주제이지요.
내가 만약 암늑대라면 밤 산벚꽃나무 밑에서 네게 안길 거다 부드러운 옆구리를 벚꽃나무 둥치에 문지르면서 피나지 않을 만큼 한 입 가득 내 볼을 물어떼면 너는
만약 네가 숫늑대라면 너는 알콜과 니코틴에 흐려지지 않은 맑은 씨앗을 내 안 깊숙이 터뜨릴 것이다 그러면 나는
해처럼 뜨거운 네 씨를 달처럼 차가운 네 씨를 날카롭게 몸 안에 껴안을 거다
우리가 흔들어놓은 벚꽃 둥치에서 서늘한 꽃잎들이 후드득 떨어져 달아오른 뺨을 식혀줄 거다
내 안에서 그 씨들이 터져 자라고 엉기고 꽃피면 (꽃들은 식물의 섹스지) 나는 언덕 위에서 햇볕을 쬐며 풀꽃들 속에 뒹굴 거다
그러다 사냥을 할 수 없을 만큼 몸이 무거워진 내 곁을 네가 떠나 버린다면 그래서 동굴 안에서 혼자 새끼를 낳게 한다면 나는 낳자마자 우리의 새끼들을 모두 삼켜버릴 거다
하지만 너는 그러지 않겠지 움직이지 못하게 된 내 곁을 지키면서 눈시울을 가느다랗게 하면서 내 뺨을 핥을 거다
후에 네가 수컷의 모험심을 만족시키려 떠난다면 나는 물끄러미 네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거다
그리고 다음 해 봄에는 다른 수컷의 뺨을 깨물 거다 평생을 같은 수컷의 씨를 품는 암늑대란 없는 거니까
가장 나이 들고 현명한 암컷이 되는 것 뜨거운 눈으로 무리를 지키면서 새끼들의 가냘픈 다리가 굵어지는 것을 바라보는 일
그리하여 나는 거기까지 가는 거다 이 밤 이 산벚꽃나무 밑둥에서 출발하여 해 지는 언덕 밑에 자기 무리를 거느린 나이 든 암컷이 되기까지 -「내가 암늑대라면」전문
■ 김명원: 참 흥미롭게 씌어 진 시로군요. 시집 제목이 되는 표제시는 사실상 그 시집의 주제가 되기도 하지요. 여성성이라든가 모성의 문제가 시집『내가 암늑대라면』에서 절정을 이룬 후, 최근의 선생님 시에는 몸을 위주로 한 여성의 삶에 관한 주제라든가 사랑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여성 화자의 목소리가 인상적인데요. 선생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사랑관이 궁금해집니다. □ 양애경: 사랑관이라…. 제가 제일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랑은 어렸을 때부터 우정처럼 시작해서 평생 서로에게 충실한 그런 사랑인데요. 아주 평범한 거예요. 제가 아직 못 가졌으니까 해결되지 못한 문제처럼 지금도 시에 종종 쓰게 되는 모양인데, 쑥스럽죠. ■ 김명원: 선생님의 시는 표현 방식에 있어서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습니다. 초기에는 시적 묘사가 많았다면 현재는 구체적인 서술 방식이 많거든요. 왜 이러한 변화가 있었는지요. 선생님께서 지향하시는 시론은 어떤 것인지 듣고 싶습니다. □ 양애경: 제가 좋아하는 시는 ‘자연스러움, 솔직함, 진정성’을 가진 시여요. 어떤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써야 한다는 틀에 가두는 것을 싫어하구요. 시를 수십 년 쓰다 보니 갈수록 복잡한 것이나 기교적인 것이 싫어지고 단순한 것이 좋아지네요. 저의 초기 시는 묘사적인 것이 많았다면 요즘 시는 점차 서술적이고 리얼해지고 있는 것을 느끼지요. 그리고 힘겨움을 유머로 풀어내는 여유도 생겼다고 할까요. 가끔 시의 형식이 늘어져서 초기시가 예술적이라고 말하시는 분도 있지만, 점점 더 꾸밈이 없는 것을 좋아하게 된 제 변화의 과정을 보는 것 같아요. 아주 쉽지만 쿡 찔리는 것 같은 시, 저는 그런 것이 진짜 고수高手의 시라고 생각해요. 그런 경지는 드물게 젊은 천재에게서 발견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평생 시를 써온 선배시인들에게서 발견되는 것이거든요. 연세가 드시면서 점점 천진하고 단순한 시를 쓰시는 선배시인들에게서 말이에요. 저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런 경지에 접근하기를 바라고요.
요리의 꽃, 와인 한잔Wine- 어머니와 이모와의 추억
■ 김명원: 선생님께서는 서울에서 태어나 자라셨지만 성장기 때 대전으로 이주하신 후 지금까지 거주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상경하는 분들은 많지만 거꾸로 하경하는 경우는 드문데요. 무슨 곡절이 있으셨던 것인가요? □ 양애경: 아버지가 공무원이셔서 서울 내무부에 근무하다가 연고지인 충남으로 내려오신 거예요. 대전에 있는 충남도청과 시청에서 오래 근무하셨죠. 엄마는 의정부가 고향이고 서울서 오래 사셨기 때문에 내려오는 걸 서운해 하셨지만, 아버지 직장을 따라오실 수밖에 없었죠. 제가 열 살 때 대전으로 이사 왔는데, 살다 보니 대전은 공기가 좋고, 서울보다는 속도가 느린 삶이 가능해서 좋아요. ■ 김명원: 대전에서 대부분의 학창 시절을 보내셨을 텐데요. 문학과는 언제 인연을 맺게 되셨나요? □ 양애경: 국민학교에 입학하여 처음 읽은 책이『알프스의 소녀』였어요. 이후 만화에 빠져 맞춤법에 통달하게 되었고요. 그 후 대전여중에 다닐 때는 쉬는 시간에 주로 도서관에서 살았는데, 거기에 바이런의 시집이 있었지요. 유럽 낭만주의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시의 언어가 아름답고 화려하다고 감탄을 했고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시 비슷한 것을 적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대전여고를 다니던 시절에는 <머들령>이라는 고교문학서클에 들어가 문학 작품에 대한 기본기를 기르게 되었어요. 그 즈음 고교생 문예현상에서 여러 차례 수상도 하였고요. 대학에서는 동인 모임인 <화요문학>을 통해 문학에 정진할 수 있었죠. 대학 졸업 후에는 유성여중 교사로 근무하며 대학원을 다녔는데, 그 즈음 신춘문예로 등단을 했던 거예요. 이 후 <시힘> 동인이 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고, 지역에서는《새여울》,《호서문학》등의 동인지에 참여했고요. ■ 김명원: <화요문학>에 대해서는 일전에 김백겸 선생님으로부터 자세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대학 시절에 결성된 모임으로 지금까지 일 년에 한 번씩《화요문학》을 출간하고 계신다고요. 긴 세월을 이어져 오는 정리情理가 부러운데요. 거의 반평생을 함께 해 오는 <화요문학>처럼 <시힘> 동인 결성 당시를 이야기해 주시겠어요? 동인분들 서로 간에 교류가 활발하셨나요? □ 양애경: 제가 데뷔했던 당시는 지금처럼 문예지가 많지 않아서 일 년에 두 번 정도 청탁이 오면 다행이던 시절였답니다. 그래서 발표 기회를 넓히고자 <시힘> 동인을 시작했던 거죠. 동인들은 서울, 대전, 광주 등에 흩어져 있었는데도 한 달에 한 번 만난 적도 있었으니까 대단히 열정적으로 만나는 편이었지요. 교통이 불편한 시절이기도 했던 데다가 지방으로 가야하는 경우도 많아서 한 번 만나면 일박 이일은 되어야 헤어졌답니다. 만나면 굉장히 신나 했던 기억이 새롭네요. ■ 김명원: 이제는 가족분들에 대해 궁금한 것을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선생님 시에서 보면, 선생님 옷을 지어주시는 어머니의 정성스러운 손길이 느껴지는데요. 어머니 이야기를 좀 들려주시겠어요? 또 제가 학생들에게 필독시로 권하는「이모에게 가는 길」의 이모 분도 시인에게 어떤 존재이셨는지 궁금합니다. □ 양애경: 「이모에게 가는 길」을 필독시로 해주신다니 감사하네요. (미소) 우선 저의 엄마부터 소개를 해야겠지요? 엄마는 숙명여대 가정과를 나와서 패션 디자이너를 꿈꾸셨어요. 하지만 대학시절 만난 아버지와 결혼하면서 가정주부가 되셨죠. 아마 꿈을 이루셨으면 우리나라 양재업계에선 선구적인 존재가 되실 수도 있었을 텐데요. 동화 신데렐라에 나오는 대모처럼 ‘제 몸에 꼭 맞는, 제 옷만 지어주는’ 엄마를 가졌다는 건 저의 행운이죠. 또, 저는 엄마에게서 ‘여자에게도 직업이 필요하다’는 교육을 받고 자랐어요. 그래서 직장과 결혼을 놓고 양자택일해야 하는 상황이 있었다면 아마 직장을 선택했을 지도 몰라요. 이모는 엄마의 바로 위 언니이신데, 어렸을 때 저를 반쯤 키워주시다시피 하셨어요. 제가 14개월 때 동생이 태어나는 바람에 엄마가 아기 둘을 한꺼번에 키우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지요. 이모는 엄마와 달리 전통적인 한국어머니상이셨어요. 무조건 받아주고 사랑해주시는 분이었죠. 그래서 어렸을 때는 엄마 입 속의 사탕을 빼앗아다가 이모 입에 넣어드린 적도 있었다고 해요. 제가 열 살 때 온가족이 대전으로 이사 오면서 이모와 헤어졌는데, 그 이후엔 아무래도 이모와 자주 만나지 못하게 되었어요. 어머니는 제가 평생 모셔오고 있지만 이모는 요양병원에 계시는데 너무 마음이 아프지요. 시「이모에게 가는 길」은 이모께서 요양병원에 가시기 전에 쓴 것인데, 그 때 이모의 모습을 뵈며 많이 슬펐어요. 아이들도 어른에게 받은 애정을 잊어버렸다가 어느 순간에 생각나는 때가 있지요. 그걸 쓴 거거든요. 아무튼 그렇게 받은 애정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유일한 힘이 되는 것은 아닌지 여겨져요. 서구적인 사고방식의 엄마와 순한국식 어머니인 이모, 저는 두 분에게서 다 영향을 받았던 셈인데, 제 시에 모성이 있다면 두 분 어머니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어머니랑 장보러 시장에 가면, 친정어머니세요, 시어머니세요? 꼭 물어보는 아주머니들 있다 친정어머니예요, 라 답하면 아, 그럴 줄 알았어요 배시시 웃으며 덤이라도 꼭 하나 더 주는 사람 있다
친정에 자기 어머니 두고 와서 가끔은 남의 어머니 보고도 밤고구마 물 없이 먹듯 가슴이 메는 착한 딸들 -「밤고구마」일부
미금 농협 앞에서 버스를 내려 작은 육교를 건너면 직업병으로 시달리다가 공원도 공장주도 던져 버린 흉물 공장 창마다 검게 구멍이 뚫린 원진 레이온 건물이 나올 것이다 그 앞에서 마을 버스를 타고 젊은 버스 기사와 야한 차림의 10대 아가씨의 푹 익은 대화를 들으며 종점까지 시골길 골목을 가야 한다 거기서 내려 세 집을 건너가면 옛날엔 대갓집이었다는 낡은 한옥이 나오고 문간에서 팔순이 된 이모가 반겨줄 것이다 전에는 청량리역까지 마중을 나왔고 몇 달 전에는 종점까지 마중을 나왔지만 이제 이모는 다리가 아파 문간까지밖에 못 나오실 것이다 아이고 내 새끼 라고 이모는 말하고 싶겠지만 이제 푹 삭은 나이가 된 조카가 싫어할까봐 아이고 교수님 바쁜데 왠일일까 라고 하실 것이다 사실 언제나 바쁠 것 하나 없는데다가 방학인데도 이모는 바쁘다는 자손들에게 미리 기가 죽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실 것이다
이모는 오후 세 시이지만 텅 빈 집에서 혼자 밥을 먹기 싫었기 때문에 아직 식사를 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무언가 먹이려 하실 것이다 하지만 눈 어둡고 귀 어둡고 가게도 멀은 지금동 마을에서 이모가 차린 밥상은 구미에 맞지 않을 것이다 씻은 그릇에 밥풀 알도 간혹 묻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 가지고 온 과자나 과일이나 약 따위를 늘어 놓으며 먹은지 얼마 안 되어 먹고 싶지 않다고 할 것이다 이모는 아직 하얗고 아담한 다리를 펴 보이며 다리가 이렇게 감각이 없어져서 걱정이라고 하실 것이다 그래서 텃밭에 갔다가 넘어져서 몇 달 고생도 했다고 하실 것이다
트럼펫처럼 잘 울리는 웃음 소리를 가진 아이 둘을 한꺼번에 끌어안고 젖을 먹일 만큼 좋은 젖가슴을 가졌던 이모 아이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게 하던 이모 이모의 젖을 먹지 않고 큰 아이는 이 집안에 없었다 이제 이모는 귀가 잘 안 들리기 때문에 젊은 아이들에게 지청구를 먹을까 봐 이야기를 걸어도 머뭇거리신다 그냥 아이구 그래 대견도 하지 라고 하실 뿐이다
지어온 한약을 내놓고 한 시간이 지나면 나는 여섯시 이십분 기차니까 지금 가야 해요 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 이모는 아이구 그래 차 시간 넉넉히 가야지 라고 하실 것이다 텃밭에 심었던 정구지를 한 묶음 하고 내가 사 간 복숭아를 몇 알 도로 싸주실 것이다 그리고도 뭘 또 줄 게 없을까 해서 명절 날 들어온 미원이니 참치 통조림이니 비누 따위를 주섬주섬 찾으실 것이다 꼬꼬엄마 그럼 잘 있어요 라고 하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이모의 뺨에 내 뺨을 부빌 것이다 그러면 이모는 감동해서 역시 내 새끼였지 라고 좋아하실 것이다 마당에 이만큼 나선 나에게 마을 버스 시간에 맞추어야지 서둘러라 라고 하면서도 어디 한 번 더 안아보자 하실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처럼 두 팔로 푸짐한 이모의 가슴을 껴안고 이모의 뺨에 내 뺨을 꼬옥 대 볼 것이다 이모는 속으로 이 새끼를 이제 못 볼 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나는 속 없이 마을버스를 놓칠까 봐 뛰어 나오고 세 집을 건너 뛰어가면 마을버스가 모퉁이를 돌아 설 것이다
버스를 타고 가며 나는 자꾸만 눈 언저리를 닦을 것이다 노인네 혼자 빈 집에 남겨져 젊은 애들한테 방해나 되게 너무 오래 사는 것 아닌가 하면서 잘 펴지지 않는 다리를 조심스레 움직여 보면서 혼자 오래 걸려 방으로 돌아가실 것을 생각하면서 우는 나를 마을버스 기사가 의아하게 거울 속으로 바라볼 것이다 사실 여기까지 오면서 번잡한 길에서 느꼈던 짜증이 부끄럽고 사람이 늙는다는 게 슬프고 무서워서 다시는 살아 있는 이모를 만나지 못할까 무서워서 나는 더 운다 원진 레이온 앞에 올 때까지 십 분이 못 되는 시간을
그리고 눈물에 깨끗이 씻겨서 이모가 길러 주었던 일곱 살짜리 갈래머리 계집애가 되어 청량리 역 가는 버스를 탈 것이다 세상에 꿈도 많고 고집도 세었던 제일 귀염 받던 곱슬머리 계집애가 되어서. -「이모에게 가는 길」전문
■ 김명원: 돌이켜 볼 때, 선생님 생에서 가장 축복으로 여겨지는 때는요? □ 양애경: 생에는 종종 축복으로 여겨지는 순간들이 있어요. 어느 때만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젊었던 부모님과 형제들과 지냈던 시절에도 행복한 순간이 있었고, 박사학위 논문을 쓰던 더운 여름날의 열중도 그랬고, 햇빛과 바람 같은 자연이 주는 쾌감도 있죠. 하지만 굳이 어느 시절을 축복으로 여긴다면, 저는 앞으로 은퇴 후 조용하게 살아갈 세월에 대한 기대감이 있어요. 몸이 아프지 않고 너무 외롭지만 않다면, 가장 좋은 시절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기다리고 있는데, 어떨지요. ■ 김명원: 선생님을 뵈면, 정말 상처라고는 전혀 없이 살아오셨을 것만 같은 고결함이 연상되는데요. 선생님께도 시련기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 양애경: 어느 시절이라고 정해 말할 수도 없을 만큼 이런저런 어려운 날들을 건너온 것은 저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겉보기로는 수십 년 동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왔으니 상대적으로 큰 상처나 큰 시련은 없었다고도 할 수 있겠죠. 그래도 누구의 고통과 시련이 누구의 고통과 시련보다 크다 작다고 비교해서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재작년인가, 제가「생존자들」이란 시를 썼어요. 이 나이까지 살아남은 또래의 친구들에게 우리의 생존을 의미 있게 여기자는 내용이었어요. 요즘도 하루하루가 살아남기 위한 노력으로 이루어진답니다. 질문에 잘 맞지 않는 답변인 것 같아 좀 죄송해요. (웃음)
디저트Dssert- 부드럽고 편안한 일상
■ 김명원: 요즈음 행복하시다고 느껴지실 때는 언제인가요? □ 양애경: 제 가족인 엄마와 강아지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에요. 맛있는 음식도 함께 해먹고 신문을 읽으며 사회비평도 하고, 나머지 시간은 각자 자기 방에서 영화도 보고 TV도 보며 뒹굴뒹굴 지내죠. 최고로 행복하고 소중한 시간입니다. ■ 김명원: 가장 소중하게 여기시는 보물 1호는요? □ 양애경: 저희 엄마랍니다. 연세가 80이 넘으셨지만 아주 정신력이 강하시고 유머도 있으세요. ■ 김명원: 지금도 친밀하게 교류하시는 문우분들을 소개 부탁드립니다. □ 양애경: 대학 때부터 함께 문학 서클을 해왔던 김백겸 시인과 동인 <화요문학>의 사람들, 우진용, 권덕하, 정용기, 심상우, 김상배, 송은숙, 고증식, 황진성 등이 있고요. 80년대부터 지금까지 함께 해 온 <시힘> 동인들로는 고운기, 안도현, 정일근, 최영철, 김경미, 박철, 나희덕, 김수영, 김선우, 이병률, 그리고 막내로 김성규, 김윤이 등이 있습니다. 충남의 선배시인인 나태주, 이명수, 유안진 선생님과 소설가로는 이진우, 연용흠 선생님, 새여울 동인분들, 그리고 자주 즐거운 시간을 함께하는 이은봉, 정순진, 전주호, 송계헌, 강신용, 김순선, 김명원, 이강산, 박소영, 하명환 시인 등도 있습니다. 원구식, 이지엽 같은 분들과, 그밖에도 작은 지면에 다 쓸 수 없을 만큼 제 주변에 좋은 분들이 많네요. 제가 꽤 복이 있나 봐요. 시를 쓰면서 알게 된 분들과의 좋은 인연에 감사하게 됩니다. ■ 김명원: 다시 이십대로 돌아가신다면, 어떤 삶을 꿈꾸실 듯 하세요? □ 양애경: 지금과 같아요. 꽤 꿈대로 해왔다고 생각해요. 단지 아쉬운 것은, 남자와 자연스럽고 편하게 사귀어 보지 못한 거예요. 부딪힐 용기도 별로 없었고, 나 좋다고 대들면 두려워서 숨어버리곤 했고요. 당시의 저는 아주 차갑고 새침해 보여서 접근하기 어려웠다고 해요. 사실 저는 냉정했다기보다는 수줍었던 거예요. 지금은 제가 철이 났다고들 하는데요. 사랑뿐 아니라 많이 서툴렀던 인간관계에서도 편안하게 느끼고 감정 표현도 전보다 잘 하니까요. 지금처럼만 사람들을 편하게 대할 수 있었으면 연애도 결혼도 잘 할 수 있었을 텐데, 그 점은 아쉽네요. (웃음) ■ 김명원: 10년 후의 선생님 모습을 예상하신다면요? □ 양애경: 좀 더 부드러운 표정을 하고 있지 않을까요? 10년 전보다 지금의 제 표정이 편해졌듯이요. 좀 더 편하게 늙어 있을 것 같고, 지금 만나는 문우들과 여전히 만나고 있을 것 같아요. 그 점이 제일 든든해요. 물론 글은 쓰고 있어야죠. 은퇴해서 시간이 많을 테니까 동화, 소설, 시나리오 같은 장르도 하고 싶어요. 요리도 조금 늘지 않았을까요? 할 줄 아는 음식이 많지 않은데, 기회가 오면 요리도 배우고 싶어요. 초보자에게는 인터넷 레시피도 꽤 도움이 되더라구요. ■ 김명원: 선생님께서 요리 말씀을 하시니 선생님의 시「맛을 보다」가 제 미감을 자극하는데요. 선생님의 시들을 읽으면 왠지 그 시들이 저에게는 ‘맛’으로 음미되거든요. 어쩌면 몸으로 전해지는 오감 중 맛이야말로 가장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감각이 아닐까요. 그 맛에 의해 수 천 년 동안 사랑의 비법이 전수 되었을지도 모르겠고요.
어릴 적 아버지만 드시던 꿀단지 하얀 자기磁器 뚜껑은 끈적끈적 아버지가 찻숟갈로 꿀을 떠먹고 혀를 휘~ 돌려 숟갈을 빨고는 다시 한 숟갈 뜨는 걸 보면 ‘더러워라’하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나중에 혼자 다락에 올라 훔쳐 먹는 꿀맛은 달콤하긴 했지
하긴 꿀은 벌들이 빨아먹는 꽃꿀과 꽃가루를 토해낸 거잖아 침투성이이잖아 아니, 침 그 자체이겠네
키스는, 상대의 침을 맛보는 일 맛을 보고서 ‘아, 괜찮네’ 싶으면 몸을 섞기도 하고 몸을 섞는 게 괜찮다 싶으면 아이를 만들기도 하잖아
몸과 몸끼리 서로를 맛보는 일 어차피 침투성이 더러울 것 하나 없겠네 -「맛을 보다」전문
■ 김명원: 오랜 시간 동안 선생님과 함께여서 행복했습니다. 눈부신 봄 맞으시기를 기원 드려요. □ 양애경: 김명원 선생님은 늘 사람을 대할 때 성심성의껏 대하고, 문학에 대한 열정도 누구보다 많은 분이어서 신망이 높지요. 같은 대전에 살고《시와인식》편집일도 같이 해서 요즘 자주 뵙는 행운을 누리는데, 올해는 좋은 일로 더 자주 뵙자구요. 감사합니다.
나는 양애경 시인을 잘 안다. 시인을 만나기 시작한 것이 십년이니, 그리고 같은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으니, 빈번히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았고, 울산이며 진주 등으로 여행을 하고 숙소에서 밤늦게까지 어둠을 켜두고서 대화를 나눈 추억이 꽤 있다. 시인은 늘 조용히 상대의 야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었고, 항상 그의 입장에서 시원하게 응수해 주었고, 그러면 나는 마음 속에 비겁하게 품고 전전긍긍하였던 분노와 불만이 한 번에 해결되는 느낌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사춘기를 거쳐 모든 성장기를 찬찬히 지켜보아 준 친언니처럼 시인은 항상 관대했고, 조언했고, 무엇보다도 내 편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양애경 시인을 잘 모른다. 가슴 벅차게 만나고 돌아서 오면 바로 코앞에서 피를 나눈 것 같은 자매애를 나만 과시하고 있었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시인은 내게 전화 통화를 할 때도, 나를 만나서도, 고등학교 후배인 내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쓰고 있으니, 이 거리감을 어떻게 좁힐 수 있으랴. 봄이 들어서는 저 꽃향기 때문에 만나주세요, 라고 칭얼댈 수 없는 이 고적감을 어찌 메우랴. 넘치도록 기대기만 하는 내게 비해 시인은 반듯하고 정갈한 각을 지니고 있어 매번 가까이 가다가도 나는 주춤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런 격조가 시인과 나를, 시인과 독자를 오래도록 신선하게 유지시키는 비결이었을 지도 모를 일. 여성과 여성의 몸을 감각적으로 시로서 드러내고, 그리고 드러낸 만큼 이성으로 자신의 현실을 단속하고 있는 시인이 양애경 시인일 것이다. 시에서는 거침없이 담대하고 솔직하지만, 실제는 항상 옷의 첫 단추까지 잠그고 여미는 시인. 그만큼 독자로부터 과감히 숨어버리는 시인이 양애경 시인일 것이다. 보랏빛 신기루처럼 시인은 그녀의 시에 넘치도록 있고, 단호히 없다. 시인은 자유롭게 자신의 시 맛을 조리하고 나서 정작 자신은 증발해 버리는 마법을 보여 왔던 연유이리라. 나는 시인을 통해 여성 시인이 성취해야 하는 시적 결과물로서의 아름다움을 향유하였고,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인간관계의 눈부신 거리를 감지하였다. 나는 그러한 시인에게 스스로 충성을 맹서하였고, 사랑을 서약하였다. 시인이 내는 감칠맛 나는 시 맛에 길들여진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고백일 터이다. 오늘의 대담은 맛깔스러운 한 끼의 성찬이었다. 입맛을 돋우는 전채 요리에서부터 메인 요리와 은은한 와인 한잔, 깔끔한 후식까지 완벽하게 구사한 맛있는 이 요리를 나는 당분간 식사 때마다 음미해야 하리라.
【웹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 SINCE 2006】 2011년 3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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