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열왕기상 17장 1-7절
설교제목 : 가뭄의 시대
AI 시대의 과제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습하고 더운 한주간 건강하셨습니까? 무더위만큼이나 다시 타오르는 전쟁의 불씨가 세계 정세의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어서 평화가 도래하기를 빕니다.
2026년 1월에 그리스 아테네 국립 카포디스트리아 대학교 의과대학교 소아정신과에서 발간된 게오르기오스 지안나코폴로스Georgios Giannakopoulos 학술지에서 “인공 지능은 어떤 종류의 타자인가? 인공 지능(AI) 시대의 상징화, 욕구, 그리고 청소년 발달”이란 주제로 발표되었습니다. 그 학술지에는 1) 새로운 ‘타자’로서 AI의 역할에 대하여 AI가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챗봇, 학습 도구로 청소년의 심리적 삶에서 새로운 관계로 등장하고 있다고 진술합니다. 2) 청소년 발달과 AI의 상호작용에 대하여 논하면서, AI가 일관된 반응과 감정적 중립성을 제공해 불안정한 애착을 가진 청소년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지만, 이는 진정한 상호작용이나 변형이 아닌 방어적 대체일 수 있기 때문에, AI와의 관계는 좌절, 오해, 결핍 등 인간 관계에서 경험하는 중요한 심리적 과정을 우회하거나 약화시킬 위험이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3) 상징화와 AI의 관계를 논하면서 AI가 언어적 유창함과 즉각적 반응을 제공하지만, 진정한 상징화(내면적 저항과 감정의 변환)가 아닌 표면적 모방에 그칠 수 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4) 놀이, 창의성, 환상에 대하여 AI는 항상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이야기를 완성하거나 감정을 해석해 줌으로써 이러한 상징적 공간의 모호함과 창조적 위험을 줄일 수 있다고 진술합니다. 하지만 이는 청소년이 혼자만의 상상, 모호함, 지루함을 경험할 기회를 줄이고, 자기만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했습니다. 5) 임상적, 실천적 제언에서 AI가 청소년의 자기표현, 감정 명명, 사회적 연습에 보조적 도구로 활용될 수 있으나, 인간 관계(부모, 또래, 치료자)로의 복귀와 결합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AI가 인간 관계를 대체하지 않도록, 상징적 공간(침묵, 모호함, 좌절 등)을 보존하는 윤리적 설계와 사용이 필요하고 합니다. 부모, 교사, 임상가는 AI 사용 경험을 함께 성찰하고, AI가 제공하지 못하는 인간적 결핍과 오해, 수용의 경험을 강조했습니다.
AI가 청소년기 발달의 보조적인 수단이 될 수 있지만 상징적 공간 속에서 모호함과 지루함, 상상하는 힘을 통하여 건강한 정신 발달을 침해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AI에게 종속되거나 의존한다면 AI를 하나의 신처럼 신봉될 수 밖에 없음을 주지해야 합니다. 수많은 정보의 홍수와 모든 답을 제시하는 전능한 AI 시대에 독립성과 주도성을 잃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가뭄의 의미
이스라엘 왕국은 솔로몬 왕 이후에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로 분열합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아버지 시대에서 살았던 경험 많고 지혜로운 원로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에게 아첨하고 자신의 치켜세웠던 친구들의 의견에 동조하면서 과중한 노역과 조세부담을 경감해달라는 백성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결국 다윗과 솔로몬이 이룬 통일왕국으로 분열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분열왕국의 역사에서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 유다에서는 치열한 왕권다툼의 소용돌이를 겪어야 했습니다. 열왕기상 15장에 보면, 북왕국 왕들은 정적자들을 살해하고 살해당하였고, 정권다툼으로 피로 얼룩졌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왕정 시대에 등장한 것이 예언자들, 다른 말로 선지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예언자를 히브리어로 “나비nabi”라고 부릅니다. 이런 예언자는 미래의 일을 점을 치거나 내다보는 자라기보다 “백성들 앞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 “앞서서 말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런 예언자들은 왕정 시대의 부정과 부패함에 대하여 심판을 예언했습니다.
이런 예언자들 중에 가장 유명한 예언자는 엘리야였습니다. 예언자 엘리야와 동시대를 살았던 왕은 아합이었습니다. 이런 아합왕의 시대에 엘리야는 예언합니다. “내가 다시 입을 열기까지 앞으로 몇 해 동안은 비는커녕 이슬 한 방울도 내리지 않을 것입니다(17:1)” 아합왕의 시대에 왜 가뭄의 심판이 내린 것일까요?
구약성서는 오므리의 아들이었던 아합왕을 북왕국의 왕들 중에 가장 악한 왕으로 평가합니다. 그는 그 이전에 있던 왕들보다 더 심하게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였는데, 여로보암의 죄를 더 앞질렀다고 평가합니다.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바알과 아세라 섬기는 제단을 만들고 하나님을 진노케하였습니다(왕상 16:30-33). 그런데 놀랍게도 아합왕 시대는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군사적 강성함을 갖춘 시기였습니다. 군사적으로 북왕국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북쪽 아람 나라보다 우위에 있었고, 앗수르와 싸우기 위해 뭉친 지중해 12개 연합군에 가장 많은 2000대 병거와 1만명의 보병을 파견할 정도였습니다. 모압을 봉신국가로 삼을 정도로 강했습니다(열왕기하 3장). 경제적으로 이세벨과의 정략결혼으로 시돈(두로)과의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였고, 교역을 활발하게 전개시켜 어느 때보다 물질적 번영을 누렸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마리아에 새 수도를 건설할 만큼 막강한 부를 자랑했습니다. 아합은 외교적으로 유다와 혼인정책을 통해서 남북의 평화시대를 이끌었고, 그 자신은 두로의 공주와 결혼함으로써 국제적 안정과 무역의 활성화를 도모했습니다. 국내적으로는 이스라엘 주민과 비이스라엘계 주민의 갈등을 해소함으로써 외양적으로나마 국민 화해의 시대를 이룩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번영과 부강함과 달리 성서의 평가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아무리 외형적으로 많은 것을 누리고 번성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평가는 상반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자아가 보는 눈과 자기Self가 보는 눈이 다름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런 아합의 시대는 물질적 풍요와 권력 유지를 위해 하나님과의 신의는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잘 나가던 시기에 가뭄의 심판이 임한 것입니다.
가뭄은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신성한 물이 보류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소외된 관계, 자아와 자기의 단절,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 단절로 인하여 더 이상 신성한 물, 생명력이 흐르지 않은 상태가 되어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와 우리의 모습이 아합의 시대와 닮아 있는 듯합니다. 물질과 권력이 최고의 신이기에 그것을 추종하며 그것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겉은 화려하고, 아름다워졌지만, 점점 내면에서는 메말라가고 부실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AI와 많은 시간을 소통해도 근본적인 목마름을 해갈되지 않습니다. 많은 것을 편리하게 누리고 있지만 결핍과 불만족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내 자신이 살아있다는 느낌보다는 척박하고 메마른 느낌을 받습니다. 신성한 생명력은 고갈되어 마치 기계처럼 기계의 굉음이 들리곤 합니다. 삶의 만족과 기쁨보다 알 수 없는 불안이 스멀스멀 온몸을 기어다니는 듯합니다. 이런 삶은 죽음이 영혼에 죽치고 앉아 있는 형국입니다. 살아있지만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와 같습니다. 우리 안에 메마른 듯한 가뭄을 느낀다면 다시금 외부 세계로 향하던 정신 에너지의 일부를 우리의 내면으로, 나의 중심이 되시는 주님께로 향하여 하늘의 비로 우리가 다시 생기를 얻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까마귀의 도움
엘리야는 아합 왕 앞에서 가뭄을 선포한 뒤에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그릿 시냇가에서 숨어지내라고 지시하십니다. 왜일까요? 답은 명확하지 않지만, 권력의 위협을 피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자라 할지라도 두려움은 어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엘리야 안에 있는 두려움을 아셨거나, 아합의 칼날로부터 자신의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방책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엘리야에게 “그 시냇물을 마셔라. 내가 까마귀에게 명하여서, 네게 먹을 날라다 주게 하겠다(17:4).”
하나님은 놀랍게도 까마귀를 통하여 엘리야를 먹이십니다. 까마귀는 아침과 저녁으로 빵과 고기를 날라다 주었습니다. 이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셨던 것과 유사합니다.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고 유지하고 있던 엘리야에게는 이 가뭄의 기간이 하나님의 현현을 경험하는 특별한 기회였습니다. 민담이나 동화에서는 도움을 주는 동물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 있고, 주인공에게 그 일을 알려줍니다. 또한 주인공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나타나 그를 도와주곤 합니다. 엘리야 이야기에서의 까마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연결하는 신의 사자, 메신저로서 기능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면서 도움을 주는 동물, 일종의 가시적 천사의 역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에게 까마귀는 바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수행하는 가시적 본능적 특성으로 나타냅니다. 이것은 초월적 기능의 출현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실제 우리 삶에서도 하나님이 보내신 까마귀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힘겨울 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엘리야를 도왔던 까마귀가 나타나곤 합니다. 우리 인생의 힘이 바닥나고, 지쳐있을 때 하나님이 보내신 까마귀는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과 힘을 공급해줍니다. 그때 기적적인 음식이 제공되는 것입니다. 인생은 내 능력과 내 지혜로만 살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제한성과 한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생은 하늘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것이고, 인생은 빚지며 사는 것이며, 내 존재 자체는 누군가의 도움을 통하여 지탱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 배후에 까마귀를 보내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에 있다면, 하늘의 자원은 우리에게 열려있고, 하나님이 보내신 까마귀를 통하여 살 수 있고 살아낼 수 있음을 마음에 붙들고 우리의 길을 당당히 걸어갈 수 있는 복된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