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요하, 요동의 위치
이 시기의 요동 遼東이라는 지역은 난하의 동쪽 지역을 칭한다.
당시에는 난하를 요하로 불렸다.
그럼, 당시 난하라는 강 이름은 어디에서 왔는가?
고 지리서에는 난하라는 강 이름을 찾아보기 힘들다.
후한서 後漢書에는 조선하나 난하 부근을 압록수라고 서술된 지리서도 보인다.
고서 古書에서는 난하라는 강 江 이름이나, 지명 地名이 귀하다.
고구려가 망하자, 그때까지 ‘요하’라고 부르던 강을 ‘난하’라고 바꾼 후, 요하라는 강의 명칭은 동쪽으로 밀어버린다.
그래서 생긴 것이 현재의 요하다.
난하보다 더 서쪽에 있는 영정하를 요하라고 기재된 고대 古代의 지리서들도 있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현재의 난하 부근에서 봉기한 동이족의 일파인 거란족이 세운, 요 遼나라가 지금의 요하 부근 조양 朝陽을 근거지로 삼으면서 위세를 떨치던, 당나라 시기부터 현재의 요하를 비로소 요하라고 불리게 된다.
몽골계의 한 종족으로 추정되는 거란은 모용연에 의해 격파된 선비족이 우문· 해· 거란으로 분리된 4세기 전반부터 사서에 등장한다. 이들은 필요할 때는 서로 잠정 동맹을 맺었으나 내부적으로는 끊임없이 충돌을 일으켰다.
명말 明末이나, 청초기 淸初期 까지만 해도 난하를 요하로 표기한 사서 史書나 지리서 地里書가 보인다.
그럼 명나라 이전에는 현재의 요하는 무었이라 칭하였나?
그 이전에는 현재의 요하 지역을 기록한 사서가 귀하다.
왜냐하면 중국과는 별 관계가 없는, 이름 그대로 머나먼 지역의 강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명나라 이전에는 동이족의 원류인 강성한 조선과 부여 그리고 고구려의 영역이기 때문에 감히 넘볼 수 없었던, 주변국에서는 관심이 적은 지역이기 때문이다.
사서나 지리서가 모두 일치하지는 않지만 ‘압록수 鴨綠水’로 칭한 지리서가 더러 보인다.
현재의 요하를 당시에는 ‘압록수’로 불렸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더 이전에는 난하를 압록수라고 서술된 지리서도 보인다.
압록 鴨綠이란,
강의 모양이 녹색 기러기를 닮아서 명칭을 붙였다 한다.
녹색 기러기 즉, 압록이란 청둥오리를 뜻한다.
현재의 압록강은 오리 모양과는 많이 다르다.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동북 방면에서 서남쪽으로 거의 일직선으로 흘러, 요동만으로 입수 入水된다.
그런데 난하의 상류나 요하 중류의 강의 생김새를 보면, 크게 원을 그리며, 오리의 목처럼 휘어져 흐르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의 압록강은 패수 浿水로 비정 比定하는 학자도 상당수 있다.
대륙 하화족들의 힘이 강해지고(강해진 원동력은 흉노와 선비족의 동화 同化가 크다) 동진하니까, 이에 따라 지명 地名들도 덩달아 함께 동진 東進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지도에 국경선을 그어 놓고, 주변을 침략하고 합병시켜 영토가 넓어지면 국경선이 그만큼 넓어진다.
그러면 이전에 사용하던 국경선의 지명 地名을 넓어진 국경선에 그대로 옮겨 적용시켜 버린다.
말뚝이 지명이다.
말뚝을 옮기면 지명도 덩달아 따라간다.
그걸 노린 것이다.
춘추필법 春秋筆法이 또다시 위력을 발휘한다.
왜?
이 처럼 지명을 옮기면서 혼란 混亂을 야기 惹起시키는가?
그렇게 역사를 어지럽히는 행위를 하는 걸까?
그 이유는 단순하다.
영토를 잃어버린 주변국의 후손들이 후일, 고토 故土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백제가 멸망할 때,
부여 성을 정복한 당의 장수, 소정방이 제일 먼저 취한 행동이 백제의 사서 史書들을 찾아내어 불태워 버린 것이다.
또, 고구려의 평양성이 함락될 때,
당의 대장군 80세의 노장 老將, 이적이 가장 먼저 한 일이 금은보화를 챙기고 궁녀들을 잡는 일이 아니라,
고구려의 사서들을 모두 대전 앞뜰에 모아놓고 불태워 버린 일이다.
다른 전쟁에서는 볼 수 없는 희한 稀罕한 행위들이다.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출정 出征하기 전에 이미 밀명 密命을 받고 온 것이다.
전쟁을 치룬, 승전 勝戰의 결말은 대부분, 적국 敵國의 궁궐을 정복하게 되면 왕을 죽이거나 사로잡은 후,
주전파 主戰派나 차후에 반란을 일으킬 만한 대신들을 가려 처리하고 난 후에,
귀중품을 챙기고 젊은 미인들을 잡아가는데 신경을 쓰지,
패전국의 사서 史書, 따위에 신경을 쓰는 일은 극히 드문 사례 事例다.
그런데,
유독 한반도의 백제와 고구려에 대해서는 왜, 이러한 이상스러운 만행 蠻行을 저지른 것일까?
그것은,
자신들의 치욕 恥辱이 백제와 고구려의 역사서에 기술 記述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선사시대 先史時代부터 대륙과 중원의 지배자로서 서술 敍述된 기록.
백제의 대륙경영, 고구려의 빈번한 중원 침공 侵攻
또, 저들의 고구려 침략 侵略이 대부분 처참한 패배로 기록된 역사,
저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치욕적인 흑역사 黑歷史다.
우선하여, 그 수치스러운 역사 기록들을 불태워 버린 것이다.
우리 선조들의 찬란했던 고대의 귀중한 역사 기록들이 이때 대부분 사라졌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사는 대부분이 중국 사서 史書에 의존하고 있다.
사대주의의 효시 嚆矢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모화사상 慕華思想이 태동 胎動한다.
하화족이 원하는 바, 그대로 되었다.
그 당시,
적국 敵國이었던 상대국 相對國에서 기록한 사서 史書를 그대로 인용 引用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여건상, 어쩔수 없이 그렇다고 인정 認定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마저도 모자라 우리 쪽에서 먼저, 스스로 자해 自害하는 사대주의자들과 식민사관에 심취해 있는 강단의 역사학자들.
자해 自害하면, 그 고통은 누가 감내 堪耐해야 하냐?
전적 全的으로 그 고통 苦痛은 우리 국민이 감당하여야 하고,
후손들에게 굴레를 씌우는 짓이다.
그럼, 자해자 自害者의 직계 후손들은?
그 후손들이 이 땅에서 살아간다면
그들 역시, 그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과거의 흘러간 역사뿐만 아니라,
현재, 다각도 多角度로 펼쳐지는 민감한 국제정세 속에 자리한 우리 국가와,
미래의 후손까지 입도선매 立稻先賣로 팔아먹는 매국노 賣國奴의 행태 行態다.
스스로 자승자박하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너무나 안타깝다.
작금 昨今의 동북공정 東北工程을 보면 그 실상이 더 심각해진다.
각설 却說하고,
황하를 지나 또, 한 시진 가령 북쪽으로 올라가니 큰 강이 또 나타난다.
호타하 好滹河다.
장영의 해박 該博한 설명은 계속된다.
“호타하는 일백여 리를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 큰 물줄기가 두 개로 나뉘는데 북쪽에서 내려오는 강을 부여하 扶餘河라 하는데, 예하 濊河라고도 부른다. 바로 한 漢과 부여의 경계 지역이다. 예로부터 동이의 예족 濊族들이 웅거 雄據하여 지낸 하천이라 그렇게 부른다.”
선박으로 운항하니 묘하게도 한 시진마다 큰 강들이 나타난다.
이번 강은 영정하다.
“발해만에서 가장 깊은 서쪽에서 유입되는 영정하다. 서쪽 상류에서 이백여 리를 더 올라가면 너른 구릉지대가 나타나는데 그곳이 탁록 涿鹿이다.
탁록은
동이족과 화하족 간에 처음으로 전투가 벌어진 역사적인 장소다.
바로 탁록 대전이다.
동이족이 배출한 불세출 不世出의 영웅, 치우천황과 하화족의 시조 始祖 황제 헌원이 10여 년 동안 72회를 싸워 전승 全勝을 기록하여, 전쟁의 신으로 추앙받는 치우천황의 영웅담이 신화 神話처럼 살아있는 곳이다.”
“아저씨는 어떻게 그 많은 역사를 다 알고 계세요?”
“하하, 내가 어릴 때 우리 동네에 역사나 지리에 통달한 아주 박학하신 어른이 한 분 계셨는데, 그분에게 틈틈이 배운 것이야.”
“그 분 성함은 어떻게 되시죠?”
“본명은 나도 모르겠고 아호 雅號를 십칠선생 十七先生님이라고 불렸다”
탁록 바로 아래, 남쪽이 팽성이 있는 백등산이고, 남쪽으로 조금 더 내려가면 마읍이 나온다.
그 팽성이 초한지의 승리자로 황제가 된 한 고조 유방이, 흉노의 묵특선우에게 엄동설한 嚴冬雪寒 추운 겨울에 식량과 보급품이 끊긴 체 7일간을 포위당하여, 얼어 죽을 위기에서 진평의 계명구도 鷄鳴狗盜로 목숨을 구걸했다는 팽성지치 (彭城之恥 : 팽성의 수치)로 유명한 백등산이 있는 곳이다.
동이족과 하화족의 접경 接境 지역이다 보니, 많은 역사적인 사건들이 발생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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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헐!
완전 비추천.
역사 글을 본인 추측에 의거하여 대충 쓰고 있군요.
``고지리서에는 난하라는 강(이름)이 없다`` ?
``후한서에는 조선하나 난하 부근을 압록수라고 기록된 지리서가 보인다`` ?
<한서/지리지> <후한서/군국지>의 유주 기록이나 <수경주/난수> 기록은 읽어나 봤어요?
공부 한참 더 한 후에 글 쓰세요.
충고 한마디 하자면,
춘추부터 시황진시기까지의 요수는 유방이 세운 한 시기부터는 난수濡水로 개칭됩니다.
즉 <관자><설원> 등에 기록된 물길.요수遼水가 <한서/지리지> 요서군 비여현에 주석된 난수이고 <요사>부터 <청사고>까지의 지리지에 기록된 란하滦河입니다.
따라서 춘추부터 진까지의 요동은 당시의 요수인 난수의 최하류 동쪽이고 전한부터는 요서군으로 편제된 곳입니다.
이러한 지리는 청국이 멸망한 1911 년까지 변동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1873 년 쯤 일본명치왕이 그 란하를 변조하여 조작지도를 작성하여 대대적으로 선전.배포하였습니다.
즉 란하의 중.하류를 란하 동쪽 300 리 쯤 떨어져 란하와 나란히 흘러내리는 당시의 황하와 요하 곧 전한 시기의 대요수와 염난수와 연결하고는 란하로 명명합니다.
란하에 이름을 빼앗긴 황하와 요하는 당연히 동북쪽으로 적절한 물길을 찾아 이동되었고 그것이 지금의 서요하와 요하입니다.
결국 중국 역사학계는 일본명치왕이 뻥튀기 조작한 지금의 요하를 <한서/지리지> 요동군 망평현에 주석된 1250 리 길이 대요수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고,
일본명치왕에게 자의반타의반 맹종한 한국의 역사학계나 재야랍시고 떠드는 윤내현,
리지린 등등 그 등신들 조차도 지금의 요하가 전한 시기의 대요수라고 합니다.
그렇게 가볍고 우습게 인식한 결과,
요하문명은 중국종족 시조라는 황제가 일군 것이 되었고 이후 그 땅은 동호.오환.선비.거란족의 땅이라고 주장되고 있습니다.
즉 한국사학계는 물론이고 재야사학조차도 환웅천왕과 왕검조선 및 단군부여에서 일군 요하문명은 물론이고,
그 선조들의 터전과 후예인 고구려.백제.신라.진국.고려 등의 중심지와 마한.진한 및 이조선의 북쪽 강역까지도,
동호.오환.선비.거란종족의 땅이라고 스스로 용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단한 무지무식질이고 명백한 민족반역질입니다.
나는 보다 보다 이렇게 댓글 쓰는 분 처음 보네요.
신석재라는 이름이 본명이신지는 몰라도 저의 생각으로는 반론을 제시할 때는 기본적인 인격을 갖추어야 한다 생각합니다. 일단 기본을 갖추고 반박하는 게 옳다고 생각 합니다만?
먼 일입니까?
이게 역사서도 아니고
역사 소설인데. . . . .
마음 상하지 마시옵소서
작가분은 지금까지 '동이'를 지속 언급하는 걸로 보아,
동이족의 대통합을 위한 큰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보여지는데,
위의 무례한 댓글을 다는 신 모씨는 편협된 사고와 알량한 지식으로 동이족을
이부족 저종족으로 가르는 식민사관이 엿보이네요.
자기자신은 저런 무식한 행위가 식민사관인지 모르겠지요.
아니면, 더 나쁜 다른 계획이 있을지도...
신석재란 사람 이제보니 이곳저곳 온갖 카페에 들락거리며 분탕질치는 걸 취미로하는 사람이네요.
누가 추천을 해달라고 요청을 했나?
혼자 떠들고 있네.
이렇게 떠들다,
가는 곳마다 욕을 먹고 제명 당하고 쫒겨다니는 노숙자네요.
아예 상대를 하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