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장~50장까지와 출애굽기 1장~2장의 의미분석 | |
언약자손들의 형통 | 자손의 생육과 시련 |
46장~47장 야곱 가족의 이거 48장~49장 야곱의 축복과 예언 50장 요셉의 위로와 약속 | 1장 자손의 생육과 애굽의 학대 2장 모세의 출생과 광야의 시련 |
49장은 야곱이 열 두 아들에게 족장이며 선지자로서의 축복(49:28/분량대로)의 예언을 하는 내용과 그리고 야곱의 죽음입니다. 야곱은 자기의 아들들을 모두 불러서 그 후손들이 후일에 당하게 될 일을 한 사람씩 차례로 일일이 지명하여 예언하며 축복하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시 언약의 족장들의 이러한 예언적 축복이나 안수 등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계승하셨습니다.
여기서 성경의 독자들이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 내용은, 야곱이 아들을 향한 축복을 하는 데 있어서의 자격 문제입니다. 야곱의 축복은 당시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것을 언약하시고 그 언약을 족장으로서 축복으로 예언하는 것입니다.
당시 언약 백성의 족장은 선지자 역할을 감당하였으며 함께 제사장이나 왕으로서의 역할까지 감당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장차 오실 참선지자시며 왕의 왕과 전정한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입니다. 그래서 혹 지금의 아버지나 목사나 교회 어른들이 자식이나 교인들에게 복을 빈다고 하여 그 복이 그대로 전달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는 것입니다.
1절에서 2절 말씀은 야곱이 그의 아들들에게 후일에 당하게 될 일을 미리 일러주고 축복하여 주기 전에 앞서 서언적으로 말하는 내용입니다.
1절에서 ‘후일에 당할 일’이라는 것은 여호와께서 택하신 언약 자손이 장래에 당하게 될 일을 말하는데, 그 일은 이미 여호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을 따라 이스라엘 열조에게 세우신 언약의 내용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아들들에게 축복하는 내용은 야곱 스스로의 뜻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대로 하는 것임을 말합니다.
3절과 4절은 야곱이 형제들의 장자인 르우벤에 대하여 예언하는 내용입니다.
야곱은 그에게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4절)라고 하는데, 그 말은 르우벤이 물이 끓어 오는 것 같이 욕망이 강하여 장자로서의 탁월함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아비 야곱의 첩 빌하와 침상에 올라 동침한 사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결국 르우벤이 후일에 장자의 기업을 받지 못할 것에 대하여 예언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새번역 성경은 49장 4절에 대하여 이렇게 번역합니다. ‘그러나 거친 파도와 같으므로, 또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와서 네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네가 으뜸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 예언대로 장자의 기업은 야곱이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낳은 첫 아들 요셉에게 돌아갑니다(대상5:1,2 참조).
5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은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 대하여 예언하는 내용입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과거 그들의 누이 다니가 세겜에서 강간을 당하였을 때, 그들 둘이서 칼을 가지고 가서 부지중에 세겜 성의 모든 사람들을 쳤던 사실이 있습니다(창34:25~29, 참조).
그래서 그는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6절)라고 합니다. 야곱은 그때의 일을 염두에 두고 이 예언을 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그 당시 그들이 저지른 분노와 혈기로 인하여 저주를 예언하며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7절)고 합니다. 이 말씀은, 그들이 후일에 가나안 땅의 기업을 나누게 될 때에 땅의 분깃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 예언대로 시므온 족속은 독자적인 기업이 없이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 일부 얻게 되었고(수19:1~9), 레위 자손은 여기 저기 다른 자손의 땅에서 성을 얻어 흩어져 살게 됩니다(수21장).
8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은 야곱이 유다에 대하여 예언하는 내용입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움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8~12절)
위의 예언 가운데 ‘사자’는 ‘강한 통치자’를 비유하고, ‘규’와 ‘지팡이’는 ‘왕권’을 비유한 말입니다. 그리고 ‘실로’는 ‘평정한’이라는 뜻을 가진 말인데, 메시야의 특징을 나타내는 통칭입니다.
그리고 ‘나귀’나 ‘암나귀 새끼’를 포도나무에 맨다는 말은, ‘나귀’는 전쟁에 쓰이는 말과는 달리 일상 생활에 쓰이는 짐승인데, 평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잡목에 매지 않고 ‘포도나무’에 맬 만큼 포도나무가 흔할 정도로 많다는 표현입니다.
‘포도즙’에 복장을 빤다는 말 역시 그럴 만큼 포도주가 풍성하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유다에 대한 야곱의 예언 내용을 정리하면, 유다의 자손에게서 통치자가 나와서 모든 형제들로부터 찬송을 받고 그 위가 메시야가 오시기까지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며, 유다 자손이 아주 평화롭게 풍요를 누리며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야곱의 열두 아들들 가운데 유다가 범한 죄는 어쩌면 가장 심하고 악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가 자기의 자부를 범하여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고 자기의 동생 요셉을 죽이려다가 애굽으로 팔아 넘기는 데에도 동참했던 자입니다. 이러한 그에게 더할 나위없는 축복을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앞에서 이미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에게는 그들의 범죄를 인하여 저주의 예언을 하였는데 말입니다.
분명히 유다는 자기의 행위에 의하여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같은 사실은,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치게 하시고, 모든 행사가 여호와의 뜻과 주권에 있음을 알게 하려는 뜻입니다. 그 예언대로 유다 지파에서 다윗 왕이 나와서 그 왕위가 계속되다가,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기까지 보존되어 떠나지 아니합니다(마1:1).
다음 13절은 야곱의 열 번째 아들인 스불론에 대하여 예언하는 내용입니다.
야곱은 스불론에 대하여 예언하기를, 그가 거주할 땅의 위치와 경계에 대한 것입니다. 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배가 정박하는 시돈까지 이르는 해변에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모세는 각 지파에 대한 축복을 선포할 때에 스불론 지파에 대하여는, “스불론이여 너는 밖으로 나감을 기뻐하라 잇사갈이여 너는 장막에 있음을 즐거워하라 그들이 백성들을 불러 산에 이르게 하고 거기에서 의로운 제사를 드릴 것이며 바다의 풍부한 것과 모래에 감추어진 보배를 흡수하리로다”(신33:18,19)라고 합니다.
위의 두 예언된 내용의 공통점은, 스불론 지파가 여호수아의 땅 분배시 내륙에 거하면서도 지중해를 통하여 해상 무역을 하게 될 것을 예언한 것으로 보입니다(신33:18 참조).
야곱이 스불론을 향한 예언해서 특이한 점은 거주지에 대해서만 예언했다는 것입니다. ‘스불론’이라는 이름은 ‘거하다’라는 뜻을 가진 ‘자발(זבל)’에서 유래되어 ‘거주’, ‘거주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의 거주 지역은 ‘해변에 거주’하는데, 그 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고 하며 ‘그의 경계가 시돈까지’라고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원문에서 확인할 것은, ‘해변이라’(레호프 לתוף)입니다. 여기서 ‘레’는 ‘~을 향해’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해변으로 향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다음 14절과 15절은 야곱이 잇사갈에 대하여 예언하는 내용입니다.
야곱은 잇사갈에 대하여,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라고 합니다. 나귀는 농사를 위해 필요한 짐승인데, ‘건장하다’는 것은 뼈대가 굵고 강한 체격을 지닌, 특히 짐을 운반하는 데 잘 적응된 몸입니다.
그러나 잇사갈 지파는 ‘나귀’라는 말이 암시하는 것처럼 공격적이며 진취적이기 보다는, 수동적이고 우직하기만 하여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지파가 됩니다.
그래서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 앉았다’는 것은 짐을 메고 압제 아래서 그의 형제들을 섬긴다는 내용입니다. 실제로 그의 후손들은 성실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이었지만 지배 계층을 형성하지 못하고 피지배 계층으로서 섬기는 자가 됩니다.
또 한 가지는, “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에서 저들이 받은 땅의 위치를 말하는데, 이들은 이스르엘의 매력적이며 비옥한 고원을 포함한 갈릴리 저지대 평야를 기업으로 할당 받음으로 성취됩니다.
다음 16절에서 18절까지는 야곱이 단에 대하여 예언하는 내용입니다.
야곱은 단에게 ‘이스라엘의 한 지파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할 것을 예언합니다. 이 예언은 재판관이며 동시에 통치자의 역할을 하였던 사사 ‘삼손’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삼손은 ‘나실인’으로서 이십여 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고 통치하였습니다(삿16:31).
여기서 ‘단’이라는 이름은 ‘심판하다’, ‘판단하다’ 라는 뜻을 지닌 ‘띤(דין)’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재판관’이란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단’ 지파의 미래를 바로 이 ‘딴’과 동일 어근을 가진 ‘야딘’ 즉 ‘심판하리로다’란 말로써 예언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야곱은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고 예언합니다.
독사(살모사)는 작은 존재이지만 큰 소나 말도 죽일 수 있는 맹독성의 독을 가지고 있음을 생각하면 단이 비록 작은 족속이라 해도 큰 족속을 이기게 된다는 뜻인데, 이는 곧 단 지파가 독하고 악랄하게 라이스를 칠 것에 대해 예언하는 내용입니다(삿18:27). 그리고 야곱은 단에 대한 예언 말미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라고 말입니다.
먼저 이 기도문은 단을 향한 예언과는 상관이 없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왜 야곱은 아들들을 향한 예언 중에 이와 같은 기도를 여호와께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밝혀주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 학자들은 몇 가지 추론을 가지고 설명을 합니다.
첫째는 야곱이 갑자기 기력이 떨어지자 자신의 죽음이 임박할 것으로 알고 이 축복을 마칠 때까지 기력 유지를 위해 간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학자는, 이미 예언한 단 지파의 타락으로부터 자신의 자손을 지켜 주실 것을 간구한 것으로 본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어느 학자는, 야곱의 기도가 메시야의 소망을 함축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야곱은 자기 아들들에게 영광된 메시야 왕국과 관련된 축복을 전하는 동안 그의 생각은 보다 더 큰 구원을 바라게 되었던 것이다고 하는 것입니다.
19절은 야곱이 갓에 대하여 예언하는 내용입니다.
이 본문에 대하여 바른 성경은 “갓은 군대의 공격을 받겠으나 그는 그들의 발꿈치를 공격할 것이다” 그리고 새번역성경은 “갓은 적군의 공격을 받을 것이다. 마침내 적군의 뒤통수를 칠 것이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를 종합하여 정리해 보면, 갓 지파가 매우 용맹이 있어서 군대의 추격을 받아도 도망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 군대를 추격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갓은 가나안 진군 때 갓지파가 선봉이 되었고 모압과 암몬을 쳐서 이기게 됩니다(대상5:18~22).
20절은 야곱이 아셀에 대하여 예언하는 내용입니다.
아셀에게는 그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복 받은, 행복한)처럼 번영과 풍요를 약속하는 내용이 선포되어 집니다. 아셀 지파가 분배받을 가나안 땅이 매우 비옥하여서, 기름진 곡식이 소출이 되어 왕의 진수를 공궤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후일에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분배받은 땅이 가나안 북서쪽 해안 갈멜의 평원 지대인데(수19:24), 그곳에서 생산된 곡식으로 솔로몬 왕이 두로 왕 히람의 양식을 공급하여 주었습니다.
21절은 야곱이 납달리에 대하여 예언하는 내용입니다.
야곱이 납달리를 ‘놓인 암사슴’으로 비유하고 그들이 ‘아름다운 소리’를 발한다고 예언합니다. 여기서 ‘놓인 암사슴’은 민첩하게 빠른 것을 비유하고, ‘아름다운 소리’는 즐거운 노래 소리를 말합니다.
그런데 후일에 그들이 드보라 사사의 부름을 듣고 바락과 함께 가나안 왕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 군대를 추격하여 무찌르며 야빈까지 진멸하였을 때에 승리한 노래를 부른 사건이 있습니다(삿4:~5:). 그리고 예수님께서 광야의 시험을 마치시고 납달리에서부터 복음을 전파하십니다(마4:15,16).
22~26절은 야곱이 요셉에 대하여 예언하는 내용입니다.
야곱은 요셉을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라고 비유하며 예언합니다. 이는 요셉 자손이 왕성하게 번창할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리고 24절을 바른성경에서는,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목자, 곧 이스라엘의 반석이 나올 것이다”라고 번역하였고 새번역성경은 “~야곱이 섬기는 전능하신 분의 능력이 그와 함께 하시고 목자이신 이스라엘의 반석께서 그와 함께 하시고”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래서 23~24절은, 요셉 자손이 대적의 공격을 받아도 그의 활과 팔이 강한 것은, 돌보시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25절은, 야곱에게 언약을 세우신 전능자께서 요셉에게 하늘의 복과 땅 아래의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을 주신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26절은, 야곱이 요셉에게 준 축복은 이삭과 아브라함의 축복보다 승하여, 반드시 요셉과 그 형제 중에 뛰어난 자에게 돌아오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후일에 요셉 자손이 큰 민족이 되었고(수16:~17:) 그 족속이 벧엘을 쳐서 멸하였습니다(삿1:22~26).
그리고 27절은 야곱이 베냐민에 대하여 예언하는 내용입니다.
야곱은 베냐민을 ‘물어뜯는 이리라’고 비유하며 예언을 합니다. 이는 베냐민 자손이 전쟁을 좋아한다는 비유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쟁의 탈취물로 생활하여 갈 것을 예언합니다. 그래서 그 예언대로 그들은 후일에 많은 전쟁을 하기도 하고 전쟁과 관련된 삶을 살아 갑니다(삿3:15, 대상12:).
28절은, 야곱이 열두 아들 열두 지파에게, 그들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을 하였다는 결론적인 내용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여기서 ‘분량대로 축복’했다는 것은 차등을 두었다거나 행위를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축복’입니다. 축복은 하나님이 주신 은총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선물은 차등이나 격차가 없이 하나님의 정하신 뜻대로 주십니다. 열두 지파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열두 지파는 곧 이스라엘을 뜻하기 때문에 한 지파라도 제외될 수 없는 하나의 몸입니다.
29절부터 33절까지의 말씀은 야곱이 열조의 묘실에 장사하라고 부탁하고 운명하는 내용입니다.
야곱은 아들들에게 그들 분량대로 축복을 하고 자기는 열조에게로 돌아간다면서, 가나안 땅에 있는 막벨라 굴 곧 조상들의 매장지에 장사하라 명하고 숨을 거두니 열조에게로 돌아갑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는, ‘왜’ ‘무엇 때문에’ 야곱은 그 넓은 야곱의 매장지를 놔두고서 굳이 저 멀리 가나안 땅 막벨라 굴 열조의 묘실에 장사하라고 명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되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29절)고 합니다. 이 구절에서 눈여겨 보실 첫 부분은 ‘명하여’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죽으면서 자녀들에게 명령을 하면서까지 이 땅에 자신을 묻지 말고 조상들이 묻힌 곳에 같이 장사해 달라고 합니다. 묻히고서는 뼈만 남게 되고 흙으로 변해가는 인간의 몸을 말입니다.
그리고 다음은 ‘내가 내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라는 말입니다. 이는 단순히 야곱 자신의 몸뚱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죽은 후에 자기 영혼이 가는 곳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를 뜻합니다. 그리고 또 한 부분은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는 말입니다.
이는 자신의 시신이 매장될 곳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야곱은 아들들에게 자기 영혼이 열조에게로 돌아가면 자기 시신을 가나안 땅에 있는 조상들의 매장지에 함께 장사하여 달라고 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결국은 하나님 나라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창46:4)라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신앙에서 나온 유언입니다. 이러한 그의 믿음은 그가 한평생 살아오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언약대로 이루시는 여호와이심을 직접 경험하며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생 후반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요셉의 살아 있는 소식을 들었고 그리고 기근으로 가족이 괴로워할 때에 요셉으로 인해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다시 올라올 곳’은 곧 우리의 본향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반드시 가는 우리의 집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나 비록 지금은 애굽같은 험한 세상에 살고 있지만, 우리 영혼이 가는 곳은 분명 하나님 나라이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육체가 다하는 날 가게 되는 약속의 나라, 혹은 꼭 육체의 옷을 벗는 날 뿐만이 아니라 이 땅에 살아가는 가운데서도 주와 함께하면 그 어디서나 하나님 나라를 갖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야곱은 믿음의 선조 아브라함과 이삭이 묻힌 지정된 장소를 가리키며 그곳에 함께 장사해 달라고 명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30절)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헷 사람에게서 댓가를 치른 이들의 땅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가장 먼저 성취한 가나안 땅 안입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지정된 땅입니다.
49장을 마무리하고 50장으로 넘어가면서 꼭 하나 짚어야 하는 것 하나는, 성경은 왜 굳이 무덤의 위치와 묻힌 명단까지 기록하며 밝히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정리하면, 막벨라의 무덤은 하나님 언약 백성의 조상들이 묻힌 곳이며 그리고 예루살렘의 다윗성은 다윗 이후 후손들이 묻힌 곳입니다. 이는, 언약의 땅에 묻힌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신령한 나라의 땅에 대한 모형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아 가게 되는 곳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의 무덤은 하나님의 언약과 연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언약을 세우셨고(창12장1~3절), 그들의 무덤을 통해서 언약의 계승과 역사성을 확인하게 하셨습니다. 다윗 이후로는 다윗의 왕위를 영원히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후손들이 다윗성에 장사됩니다. 역대기에서는 다윗의 왕조를 계승한 왕들이 다윗의 성에 장사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덤을 통한 다윗 왕조의 계승은 그리스도 출생의 뿌리가 되며 유다에게서 진정한 통치자를 보내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이(49장10절) 성취됨입니다. 무덤은 죽음의 의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성취 사역의 사실적 증거이며 부활의 생명에 대한 새 지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