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찔레/ 정임표
이 글은 필자가 문학성이 뭔지를 궁구하던 2006년 봄(초여름), 당시 대구수필가협회 초대회장님이시던 정혜옥 선생님 손에 이끌려서 이제는 고인이 된 부군이시던 강교수님과 세명이 함께 붉은 찔레를 보러 간 날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신입회원이던 필자는 행여 문우들이 선생님께서 나를 편애 하신다 할까봐 혼자서 찾아 간 양, 선생님을 빼고 거짓으로 쓰다보니 매우 어색한 글이 되었습니다. 제 개인 수필 집에서는 사실대로 썼습니다. 수필은 거짓을 쓰면 어색해진다는 것을 깨우쳐 준 글이기도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하여 제가 문학성이 뭔지를 확실하게 이해하게 됩니다. 붉은 찔레에 수도 없이 찔리면서 퇴고에 퇴고를 거듭하다 문리를 터득한 사건이기도 합니다. (당시 저는 문학성이 뭔지 깨우치지 못하면 글을 쓰지 않겠다는 결기가 있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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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 뒤편에 가면 붉은 찔레가 핀다하였다. 포천계곡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한 삼백 살쯤 되어 보이는 노송이 길을 지키고 있고, 거기서 좀 더 가면 가야산의 뒷모습이 보이는 쯤에서 해가 질 무렵에 붉은 찔레를 볼 수 있다 하였다.
시골에서 태어나 시골에서 자랐지만 붉은 찔레를 본 적이 없는지라 꼭 확인하고 싶었다. 초여름이 시작 되는 어느 토요일, 한가한 틈을 타서 붉은 찔레를 찾아 나섰다. 발견하면 한 포기 캐 올 요령으로 트렁크에 괭이를 실었다. 산골에서 행여 밥 때를 놓치면 시장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식사대용으로 빵도 몇 개 샀다. 운동화를 신고 목장갑을 끼고 나름대로 준비를 단단히 하였다.
성주읍을 지나 포천계곡이라 쓰인 이정표를 따라 차를 몰았다. 한 참을 가다보니 물이 시원스럽게 흐르는 계곡이 나왔다.
‘과연 붉은 찔레가 있을까.’ 운전을 하면서도 산비탈을 연신 흘끔 거렸다. 지난봄에 진달래꽃들이 붉게 피었음직한 산자락에는 하얀 찔레꽃들만이 피어서는 낯선 손님을 반기고 있었다.
찔레꽃은 내 고향 산기슭에도 지천으로 피었다. 소 치러 다니던 아이들은 찔레의 순을 꺾어서 먹었다. 곧고 길게 뻗은 보드라운 새순을 꺾어서 껍질을 벗기고 입에 넣어 씹으면 알싸한 냄새와 시원한 맛이 있었다.
찔레나무는 다른 어떤 풀꽃들 보다 생명력이 강하다. 비탈진 청석돌산 같은 곳에서도 잘 자란다. 줄기는 억세고 잎은 자그마하다. 가시에 손가락이 찔리면 침보다 더 따가웠다. 찔레 뿌리가 산소에 기어들면 산소를 망치고 만다. 딱딱한 땅속을 뚫고 들어가 깊게 뿌리를 내리는 질긴 생명력 때문이다. 어른들은 산소로 기어든 찔레꽃을 보면 캐어내어 멀리 버리라고 하였다. 그렇게 파내어서 버리고 버려도 다음 해에 가면 살아남은 작은 뿌리들이 번식하여 산소 주변의 땅이나 돌을 꽉 움켜잡고 자라고 있었다. 참으로 모진 생명이었다.
찔레는 볼품없는 줄기에 비해 꽃은 그 어느 꽃들보다 순수하고 향기롭다. 백합보다도 순수하고 장미보다도 향기롭다. 백합꽃이 유럽의 어느 높다란 성 안에서 고이 자란 귀족 처녀의 순수라면, 찔레꽃은 무명저고리 속에 가슴을 감춘 우리 산골 처녀의 순수라 할 수 있다. 아득한 날, 하늘이 처음 열린 날부터 지켜져 온 태곳적의 순수라 할 수 있다. 찔레꽃은 작은 바람에도 꽃잎이 우수수 잘 부서진다. 꽃받침이 약한 탓이라기보다 너무 순수한 때문일 것이다.
찔레꽃에 꽃말주1)이 있다면 ‘부서진 순수’ 일 지도 모르겠다. 담장 밑에 찔레 꽃 한 송이가 피면 맑고 은은한 향기가 온 집안을 감돌았다.
꼬불꼬불한 길을 한 참 달리다 길을 지키고 있는 늙은 소나무를 만났다. 거기까지 가서도 붉은 찔레는 보이질 않았다. “찔레 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 이란 노랫말이 잘못 지어진 게 아니라면 이 땅 어딘가에 틀림없이 붉은 찔레가 있으리라 생각하며 계속하여 올라갔다.
한참을 갔더니 가야산의 뒷모습이 나타났다. 가파른 산꼭대기에는 거대한 바위가 자리를 하고 있었다. 앞모습 보다 뒷모습이 더욱 더 웅장하였다. 거기서도 붉은 찔레는 보이질 않았다. 길옆에는 하얀 찔레꽃이 만발하게 피어서는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저만치서 지게를 지고 오는 농부가 보였다. 근처에서 혹시 붉은 찔레를 본적이 있는지 물었다. 의아한 눈으로 내 차림새를 살펴보더니
“ 내가 평생 이 산골에서 살았지만 붉은 찔레는 본적이 없는데……”
라며 말 꼬리를 흐렸다.
‘아니다. 분명히 해가 질 녘이면 보인다.’고 하셨다. 하늘을 보았다. 해는 스멀스멀 가야산 꼭대기를 넘어가려하고 있었다.
잠시 후, 산을 넘어간 해가 반대편에서 산꼭대기의 바위를 비추고 있었다. 가야산의 뒷모습이 뚜렷한 음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거대한 바위가 넓은 산 그림자를 타고 굴러 내려올 듯하였다. 한 참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다시 찔레꽃을 보았다. 찔레꽃은 여전히 하얗게 피어 있었다. 정상의 바위를 다시 쳐다보았다. 바위는 침묵하고 있었다. 그 무거움에 눌려 한 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J 선생님께서 나를 여기로 보내신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가야산의 뒷모습”, “붉은 찔레”, “거대한 바위” 그것은 내가 풀어야 할 화두 같은 것이었다. 내려오는 길에도 붉은 찔레꽃은 없었다. 그 꽃은 가슴 속에서만 피는 꽃이었다.
주1) 찔레꽃의 꽃말은 ‘너무나 외로워서 지나가는 모든 것을 성성한 가시로 움켜잡는다.’고 “외로움, 고독”이라 한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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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고 전의 마지막 부분 )
잠시 후, 산을 넘어간 해가 반대편에서 산꼭대기의 바위를 비추고 있었다. 가야산의 뒷모습이 뚜렷한 음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햇빛에 비친 가야산의 뒷모습은 이제 장엄하기까지 하였다. “큰 바위 얼굴” 이야기가 떠올랐다.
남자가 중년이 되면 ‘뒷모습이 저렇게 듬직한 사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한 참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찔레꽃을 보았다. 찔레꽃은 여전히 하얗게 피어 있었다. 눈을 비비고 봐도 역시 하얀 꽃이었다.
정상의 바위를 다시 쳐다보았다. 바위는 침묵하고 있었다. 그 침묵은 단순한 ‘말없음’이 아니라 세상을 이겨 낸 자만이 지닐 수 있는 침묵 같았다. 그 침묵에 눌려 나도 침묵하였다. 붉은 찔레꽃은 없었다. 그 꽃은 가슴 속에서만 피는 꽃이었다.
앞모습 보다는 뒷모습이 듬직한 사내, 억세게 살았더라도 순수를 잃지 말고 ‘붉은 찔레꽃’을 찾으러 다닐 줄도 아는 열정을 지닌 남자가 되라고 J 선생님께서 나를 여기로 보내신 것이었다.
푸름이 짙어가는 5월, 내려오는 길에도 하얀 찔레꽃들이 만발하게 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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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지막 부분이 얼마나 인위적인 글인지 글을 쓸때는 몰랐습니다. 독자들을 무시한 작가의 무례란 생각이 들어 다시 위와 같이 고쳤습니다. 글은 묵혔다가 고치고 지웠다가는 다시쓰고 한 백번은 고쳐야 어느 정도 읽을 만한 글이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원문을 그대로 둠은 수필을 공부하시는 문우님들게 혹시 도움이 될까 해서 입니다.
수필은 이래서 쉬워보이면서도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다시 절감 합니다.
첫댓글 회장님의 글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얼마 전, 모 신문에서 범어천과 매원마을의 붉은 찔레꽃 얘기가 생각납니다.
신송우 선생님의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6월 16일 수목원 하계 단합대회 행사에 꼭 참석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