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훔 2,1.3; 3,1-3.6-7; 마태 16,24-28
+ 오소서, 성령님
오늘은 연중 제18주간 금요일입니다. 또한 십자가의 성녀 데레사 베네딕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이기도 합니다. ‘에디트 슈타인’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계신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타’ 성녀는 가르멜 수도자로서, 수도명 안에서 십자가의 성 요한과 데레사 성녀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마음이 드러나 있습니다.
성녀 에디트 슈타인은 1891년 당시에는 독일, 지금은 폴란드 영토인 브로츠와프의 유대인 가정에서 11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어려서 돌아가셨고, 어머니에게서 유대교 신앙을 교육받았지만, 유대교의 형식적인 의식과 기도에 실망하여 십 대 초반부터 하느님을 더 이상 믿지 않고 냉담을 하였습니다.
독일어와 역사를 전공했지만, 스물두 살부터 현상학으로 유명한 철학자 후설의 제자가 되어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야전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계속 공부를 이어가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후설의 추천서에도 불구하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교수가 되지 못했습니다.
서른 살에, 친구 헤트비히 부부의 농장을 방문했다가 서재에 있던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 자서전을 읽게 되었습니다. 밤새 책을 읽은 후 자기 자신에게 ‘이게 진실이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듬해에 세례를 받고 가톨릭신자가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은 후 고향에 가서 어머니께 가톨릭신자가 되었다고 말씀드렸고, 모녀는 서로 끌어안고 울었다고 하며, 이를 본 친구이자 대모 헤트비히는 “이들은 거짓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다.”(요한 1,27 참조)라고 말했다 합니다.
세례를 받은 에디트 슈타인은 곧바로 가르멜 수녀회에 입회하려 했지만 지도 신부의 조언에 따라 입회를 연기하고 학교에서 독일어와 역사를 가르쳤습니다. 1933년, 마흔두 살에 독일 쾰른에 있는 가르멜 수녀회에 입회하였고, 3년 뒤 첫서원을 하였는데 그해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성녀는 어머니의 유대교 신앙을 끝까지 존중해 드렸습니다.
1938년 종신서원을 하였는데, 종신서원 상본에는 십자가의 성요한의 말씀 “이제 나의 유일한 소명은 사랑하는 것입니다.”라는 말씀을 새겼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연도가 넘어가는 것이 무척 숨 가쁘게 느껴지는데요, 왜냐하면 나치의 만행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독일에서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수도원은 에디트 성녀를 독일 쾰른에서 네델란드 에히트 수녀원으로 비밀리에 피신시켰고, 성녀는 언니 로자 아델라이데 슈타인과 함께 이곳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러나 1942년 7월, 네델란드 주교들이 나치의 반유다주의를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자, 히틀러는 가톨릭이나 개신교로 개종한 모든 유다인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에디트 성녀는 언니와 함께 체포되면서 “언니, 자 이제 우리 민족에게 가는 거야.”라고 말했다 합니다.
1942년 8월 7일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987명이 살해되었고, 로자와 에디트 자매는 이틀 뒤인 8월 9일 살해되신 것으로 보입니다.
십자가의 데레사 베데딕타 성녀는 동족과 하느님 백성을 위해 그 연대 안에서 죽음을 맞으셨고, ‘아우슈비츠의 순교자’라 불립니다. 1998년 시성식에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성녀께서 “유다인과 그리스도인의 상호 이해를 위한 더 굳건한 다리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다인이기에 돌아가셨는데 가톨릭 성녀로 시성되시는게 맞는가라는 질문도 있었는데, 교회의 도덕적 가르침 즉 네델란드 주교들이 발표한 성명이 성녀의 죽음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 순교자로 인정되셨습니다. 네델란드 주교님들이 성명서를 발표하지 말았어야 했을까요? 여러 가지 생각이 듭니다. 만일 주교님들이 나치의 만행에 침묵했다면, 이 역시 십자가를 노골적으로 거부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나훔 예언서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나훔 예언자는 기원전 7세기에 유다 왕국을 괴롭히던 아시리아의 멸망을 예고하면서, 아시리아의 수도인 니네베가 받을 징벌을 예언합니다.
오늘 독서 말씀이 잔인하게 들리는 것이 사실이지만, 유다 사람들에게 아시리아는, 후손인 유다인들에게는 나치와 같은 존재였고, 우리 민족에게는 일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그들의 만행에 대하여 되갚으실 것이라고 나훔 예언자는 노래합니다. ‘나훔’은 ‘위로받은 이’라는 뜻인데요, 하느님께서 억압하는 자들을 벌하심으로써 억압받는 자들을 위로하신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어제 복음에서 당신을 그리스도라 고백한 베드로 사도를 칭찬하시면서, 당신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심을 제자들 앞에서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제자들이 메시아에 대해 갖고 있는 오해를 바로 잡아 주시는데요, 그것은 당신께서 현세에서 권력으로 승리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박해받고 죽임당하시는, 그러나 부활하실 메시아시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호통을 치시며, 제자들이 빠질 수 있는 유혹 즉 하느님의 길과 세상의 길을 구분하지 못하는 유혹을 경계하도록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당신 제자들인 우리들 또한 십자가의 길을 각오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십자가라는 단어에 너무 메일 수 있는데, 그 앞의 말씀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이라는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져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마도 우리를 가스실로 보내서 죽게 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성녀 데레사 베네딕타의 종신서원 상본의 말씀, “이제 나의 유일한 소명은 사랑하는 것입니다.”라는 말씀을 되뇌어 봅니다.
어쩌면 우리가 져야 하는 십자가는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 사랑의 행위 단 한 가지만, 나를 거슬러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일이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녀 데레사 베네딕타 (에디트 슈타인, 1891-1942)
출처: Edith Stein, uma alma em busca da verdade - Edith Ste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