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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 위임식
출 29: 1-9
교회에서 담임목사님을 새로 모신 후 어느 정도 공감대가 이루어지고 나면 위임식을 하게 됩니다. 위임식이란 "이제부터 은퇴하실 때까지 평생을 우리가 모시겠습니다"라는 교회의 약속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식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종종 우리는 평생 모시겠다는 교회의 다짐이 오래가지 못해 또 새로운 목사님을 모시고 또 위임식을 하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일들을 우리들에게 위임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말씀에도 나와있듯이 우리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일이 있는데 그것은 제사장을 선택하는 일이었습니다. 이것만큼은 사람들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선택하셨습니다. 1절에 "너는 그들에게 나를 섬길 제사장 직분을 위임하여"라고 모세에게 말씀하고 있는 '그들이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출애굽 후 1년이 지나 우리 하나님께서 레위 지파 중에서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세우시고, 그의 자손들이 대대로 그 일을 감당하도록 명령하셨고, 그 일을 위해 위임식을 모든 백성들 앞에서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7일동안 계속되는 이 위임식에는 제일 먼저 제사장이 물로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단순히 어떤 몸의 더러움을 씻기 위한 위생적인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모든 죄성을 씻는 의미에서의 씻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죄를 지으면 성밖으로 내쫓김을 당합니다. 문둥병이 걸려도 그렇고, 전염병이 걸려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치료가 되었다고 생각되면 제사장에게 보이고 완전히 치료가 되었다는 선언을 받으면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습니다. 성밖에 쫓겼던 자들이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물로 몸을 씻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주님의 제단에 나올 때 보혈의 피로 죄씻음을 받고, 이제는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사는 성도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씻음을 받았습니다.
제사장 위임식은 제사장에게 화려하고 거룩한 옷, 곧 에봇을 입힙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먼저 속옷을 입히고, 에봇 받침 겉옷과 에봇을 입히고, 흉패를 달고, 공교히 짠 띠를 띠우고, 그 머리에 관을 씌우고, 그 위에 성패를 더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흔히 우리 목사들이 안수를 받고 취임식을 할 때 성도들이 속옷부터 양복까지 필요한 모든 복장들을 다 구비해 주시는 것이 우리 한국 교회의 전통처럼 되었습니다. 제가 목사 안수를 받고 취임예배를 드릴 때도 성도들이 그렇게 해주셨습니다. 아마도 그런 전통이 여기 출애굽기 29장의 제사장 위임식 전통을 따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에봇을 입는다고 하는 의미는 단순히 어떤 특별한 옷을 입는다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옷이라고 했습니다. 결혼식에 임하는 분들은 1년에 한번 입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한번 예복을 차려입고 그날에 주인공처럼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제사장의 예복은 일주일 동안 위임식을 하는 내내 입어야 했고, 뿐만 아니라 제사를 집행할 때는 언제나 에봇을 입어야 했습니다.
성경은 법궤를 옮길 때, 전쟁을 할 때, 민족의 중요한 이동이 있을 때, 제사장들 중에서 구별된 사람들이 법궤를 어깨에 메고 앞장을 서면 그 뒤에 반드시 노래하는 자들을 선택해서 예복을 입고 따르도록 했습니다.
여름에 덥다고 예복을 안입는 교회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미국에 다녀와서 "미국에 가보니까 그런 교회도 있더라"고 외치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닙니다. 분별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예복은 무엇입니까? 저는 퍽 예배자의 복장을 강조하는 목회자 중에 하나입니다 만 그것은 사실 저의 스타일이 아니라 성경에서 그렇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혼식에서 신랑 신부가 예복을 입듯이 우리의 예배에는 예복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나름대로 한복이든 혹은 양장이든 예배를 드릴 때 입는 '마음으로 구별한 옷'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캐주얼한 복장이 우리에게 인기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일상생활의 모습이지 예복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우리가 타협할 수 없는 너무나 중요한 부분입니다. 에봇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을 가져 보세요. "내가 이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설 것이다"
대통령을 만나러 가신다면 어떤 복장을 하시겠습니까? 모르긴 해도 백화점에 가서 대부분은 옷을 다시 장만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하나님 앞에서의 예배는 대통령을 만나는 것과는 비교가 안되는 자리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예배의 격을 높이지 않으면 누가 예배를 존귀히 여기겠습니까? 제사장은 그래서 언제나 제사 때에 에봇을 입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이나 가운을 잘 입으시지요" 그렇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오늘날 이 구약에서의 제사장의 직분이 주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모든 성도들에게 제사장의 사명이 주어졌다고 하는 사실을 이미 여러분들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사장처럼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고, 예배의 한 몫을 담당해 사회나 기도나 찬양, 그리고 설교까지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주의 은혜로 이제 우리 모두는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이제 제사장의 머리에 기름을 부울 차례입니다. 머리에 기름을 붓는 직책은 3가지입니다. 하나는 왕이 되었을 때 머리에 기름을 부어 하나님께서 선택한 왕이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 앞에 선포합니다. 예언자로 선택받았을 때 머리에 기름을 붓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으로 부름받을 때 머리에 기름을 붓습니다. 머리에 기름을 붓는 일은 곧 구별시킨다는 의미입니다.
1970년대만 해도 목회자가 세상에서 직업으로서 얼마나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가를 조사했을 때 이발사 다음이었습니다. 신학대학이란 신학대학은 언제나 미달이었습니다. 40명 정원을 채우기가 어려웠어요. 그러나 그때는 성도들의 의식이 똑바로 되어 있었습니다. "목사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나 신학대학에 보내는 것이 아니다. 신학교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소명 받은 자들만이 가는 곳이다" 구별된 의식이 성도들에게도, 그리고 그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에게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목회자의 길이 가시밭 길이고 고난의 길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직업적 인기로 따지자면 가장 인기 없는 직업보다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의 직업 인기도를 보면 목사는 당당 3위에 올라 있습니다. 엄청난 일이지요. 좋아할 일입니까?
왜 목사란 직책이 세상 사람들에게 그렇게 인기있는 직책이 되었을까?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의 의식이 잘못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 서고, 대접받는 일이 많아 괜찮아 보여서인지 너도나도 신학교를 지원하여 요즘은 신학생들을 120명씩 뽑아도 3:1 이상의 높은 경쟁률이 보통입니다. 각 신학대학의 수준이 천차만별이지만 지난해 제일 성적이 높았던 감신대나 장신대는 수능 성적이 300점 이상이 되어야 입학이 허락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성도의 유익을 위해서 목사를 세우신 줄로 믿습니다. 모든 직업이 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을 쌓는 일을 했지만 그를 영적인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직업과 직장은 거룩한 일이고 영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특히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부름받은 직분인 이 목사직은 분명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일을 위해서 나를 부르셨는가?" 사명감에 대한 확신입니다. 이 부르심이 확실하지 않으면 나서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신학교를 가겠다고 추천서를 써달라는 이들에게 "왜 가려고 그럽니까?"하고 물으면 "그냥 성경이나 체계적으로 배우려고 갑니다"라고 대답하는데, 성경공부나 하겠다고 들어간 사람이 3학년쯤 되면 이제 어디 전도사로 나갈 데 없나? 두리번 거립니다. 그 길을 가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출발이 잘못되었다는 것이지요. 성경공부나 하겠다고 간 사람이 왜 그 길을 갑니까? 아예 출발부터 "하나님께서 나를 이 길로 부르셨으니 내가 그 일에 인생을 걸고 괴로우나 즐거우나 가겠습니다" 이렇게 시작을 해도 그 길은 만만치 않은 길입니다.
저는 우리 평안의교회에서 많은 주의 종들이 배출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바른 길을 가고 목사가 목회를 똑바로 한다면 그 교회에서 많은 주의 종들이, 선교사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출발이 분명해야 합니다.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지요. "서울대학교를 갈 수 있는 실력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기에 내가 그 길을 갑니다"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은사는 객관적인 검증이 필요합니다. 나는 사명을 받은 것 같은데, 교회가 볼 때는 아닐 수 있기 때문이예요.
바울 사도를 한번 볼까요. 바울 사도는 다메섹에서 주님의 강권적인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강한 빛을 보았던지 그는 눈이 멀었습니다. 나중에 주의 형제 아나니아 사도에게 안수를 받고 시력을 다시 회복했지만 그는 평생동안 안질로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지금까지의 생활, 하나님에 대해서 열심이었지만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을 깨달으면서 아라비아 사막에 가서 3년 동안이나 퇴수하면서 자기의 삶을 정리하고 재충전 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도 주의 길로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연단되고 재충전을 위해 시간을 보내고 있던 사울을 바나바가 찾아가 안디옥 교회에서 함께 섬길 것을 요청받은 뒤 비로소 사울은 그 교회의 일원으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주의 종이 아니었습니다.
그후 하나님께로부터 안디옥교회의 두 사람을 안수하여 선교사로 파송할 것을 명령받은 후에야 바나바와 사울은 안수를 받고 이방인을 위한 선교사로 보냄을 받게 됩니다. 자신을 이방인을 위한 사역을 위해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불렀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울이었지만 함부로 나설 수 없었습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객관적으로 검증해 줄 때까지 사울은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무려 3년 이상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주의 종들을 부르시고 그 부르심에 합당한 위임식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 앞에서 내가 이를 세웠다고 하는 것을 선포하게 하십니다. 목욕을 하게 함으로 그가 죄를 씻고 에봇을 입어 그의 수치와 연약함을 가리워주시기도 했습니다. 옷이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회적인 도구입니다. 더구나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머리에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구별을 시킵니다. 이제는 네가 개인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주님 앞에 부름받고 쓰임을 받으면 이제는 공적인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주십니다. 오늘날 교회가 인정하는 안수는 첫째로 병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그 병이 치유되기 위해서, 둘째로 은사를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은사가 충만히 임하기 위해서, 세째로 하나님의 거룩한 종으로 세울 때 안수를 합니다. 예를 들면 목사나 장로 안수식이 그와 같은 것입니다. 안수를 한번 받고 나면 그것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취소 받으려면 그 전에 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 교회 신천 장로중 한 분이 장로 과정 진급중에 다른 교단으로 떠났기 때문에 지난 지방회에서 장로의 직이 취소 되었습니다. 안수를 받기 전의 일이기에 한편 다행스런 일인지도 모릅니다. 주의 종들이 안수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전 생애를 주님만을 위해서, 주님 뜻대로만 살겠다는 대단히 심각한 순종과 결단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하는 일이 좋아 보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면에서 목사가 하는 일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유다 왕 중에 웃시야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유다 왕 중 몇 안되는 존경받는 믿음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 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도 기름 부음을 받았는데 제사를 왜 못할까?" 국가의 중요한 일을 행할 때마다 먼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려야 했는데 그때마다 제사장이 제사를 인도하는것에 대하여 마음 속에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기름 부음을 받았는데..." 훌륭한 왕이었고 존경받는 왕이었지만 웃시야의 마음 속에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나도 제사를 인도 할 수 있다"라는 생각에 분향도 하고 제사를 집행했습니다. 해보니까 아무 것도 아니었어요. 어렵지도 않았고 힘들지도 않았어요. "별거 아닌 것을 가지고 지금까지 내가 괜히 제사장에게만 의지했구나"라고 생각을 했을 때 하나님께서 웃시야를 치셨습니다.
사울왕은 전쟁에 나가는데 시간이 없다고 제사장 사무엘을 기다리다 못해 자신이 제사를 집행했습니다. 여러분, 전쟁에 나가는 사울이 급할 것이 뭐가 있어요? 전쟁은 누구에게 달린 것입니까? 다윗의 고백을 빌리면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했는데 자기가 급할 것이 뭐가 있어요? 그런데 자기가 급한 것입니다. 주의 일을 하면서 주님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하지 않고 급하다며 자기가 다 해놓고 나서, 내가 주를 위해서 했는데 왜 말들이 많으냐고 그렇게 말한다면 사울 같은 존재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울 왕에 대하여 사무엘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를 버렸노라"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해야 할 일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어느 전도사님이 시무하는 교회에 장로를 세웠는데 장로님이 먼저 지방회에서 안수를 받았습니다. 전도사는 축도를 할 수 없어 예배를 마칠 때마다 "다같이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로 예배를 마치겠습니다" 그러니까 어느날 장로님이 전도사님에게 "전도사님, 예배 끝나고 축도를 안하니까 싱거워서 안되겠습니다. 다행히 제가 먼저 안수를 받았으니 앞으로 축도는 제가 할테니까 그리 아십시오"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장로님이 나와서 축도하면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마치 기름 부음은 받았지만 왕이 할 일이 따로 있고 제사장의 할 일이 따로 있는 것과 같은 거예요.
웃시야 왕은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주의 종이 하는 일을 우리가 가볍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능력이 아닙니다. 얼마나 숙달되게 잘하느냐 하는 것도 아닙니다.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입니다. 주님께서 내게 부르신 그 부르심에 합당한 모습을 가지고 언제나 겸손한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제사장 위임식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 앞에 대대로 이 제사를 감당하도록 선포하고 계십니다. 우리 교회에도 부족한 종을 세우셨고 많은 동역자들과 많은 장로님을 세우셨습니다. 그들을 지명하여 부르셨고 그들에게 안수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몸을 물로 씻고 거룩한 예복을 입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각각 구별하여 감당하면서 오늘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내일도 모레도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그 사명을 겸손한 마음으로 감당하면서 언제나 그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나가는 평안의 공동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주님, 오늘 제사장의 위임식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귀한 은혜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때로는 내 마음에 합한 말씀도 있고, 걸리는 말씀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이기에 중요합니다. 이제는 내가 아니라 중심이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아론의 위임식
출 29: 1-9
세계 역사를 들추어보면 기적적인 사건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 중에 하나가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사건이다. 어떻게 이스라엘 60만 장정과 그들에게 딸린 가족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버티었을까?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살았느냐 하는 것은 둘째 문제이다. 어떻게 그 많은 백성들이 사방으로 흩어지지 아니하고 하나도 뭉쳤을까? 지금 만약 한국 사람 만 명을 네바다 같은 황무지로 끌고 나간다면 일 주일이 안 되어 다 흩어지고 말 것이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로 뭉치게 하였을까? 약속의 땅에 들어가겠다는 희망과 소망 때문이었을까? 희망과 소망은 이상론에 불과하다. 이상론은 생활의 활력소는 되지만 백성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원동력은 될 수가 없다. 그들이 율법을 가졌기 때문이었을까? 율법으로 다스린 모세는 원망의 대상이 되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무엇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였을까? 그것은 행정력도 아니고 율법의 구속도 아니었다. 그것은 종교적 일치와 신앙적 순종에 있었다. 이 종교적 신앙적 리더가 제사장이요 대제사장이었다.
제사장과 대제사장은 정치적 권력자가 아니다. 제사장은 아무런 행정권이 없었다. 다만 백성의 한 사람 한 사람의 종교적 신앙적 요구에 따라 제사를 드리는 일만을 감당했다. 그러나 이 제사장의 임무와 역할이 모든 백성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제사장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다. 하나님이 그의 기쁘신 뜻대로 택한 사람을 불러 세우는 것이 제사장이다. 제사장 되기를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가 된다. 제사장 아닌 사람이 제사장이 되려고 하면 죽임을 당한다. 사울은 왕으로서 제사를 지냈다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했다. 웃시야왕은 문둥병에 걸렸다.
제사장은 하나님을 대면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전달하고 사람의 소원을 하나님께 대언하는 사람이다. 백성이 범죄했을 때 밤잠을 자지 못한다. 백성이 죄의 용서를 받았을 때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므로 제사장은 성결해야 한다. 제사장이 성결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대면할 수가 없다.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대신 구할 수가 없다. 제사장의 손이 더러우면 죄인의 손을 잡아줄 수가 없다. 그래서 제사장은 제사를 지낼 때마다 자신을 위한 속죄의 제사를 먼저 드렸다.
제사장의 직분은 이처럼 요긴하다. 제사장이 살아야 백성이 살고 제사장이 깨끗해야 백성이 속죄함을 받을 수가 있다. 제사장의 직분이 이처럼 요긴하기 때문에 제사장을 세우는 임직식도 엄숙하게 거행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았다. 백성들을 선두에 서서 진두지휘했다. 성막 성전을 건축했다.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세우는 위임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모세 자신을 위한 위임식이나 취임식을 행한 일은 없다. 직능으로 보면 모세의 직능이 우월하다 할는지 몰라도 직분으로 보면 아론의 제사장직보다 우월한 직분은 없다.
오늘 데이비스 한인교회는 이진수 목사님의 취임식을 거행하고 있다. 취임식과 위임식은 다르다. 취임식은 직무를 맡게 되는 예식이고 위임식은 상회에서 직무를 맡기는 예식이다. 취임식과 위임식의 의미는 달라도 기능은 같다. 취임식이나 위임식은 하나님의 교회를 다스리고 먹이는 직무를 맡는 예식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제사와 제사장의 제도는 없어졌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성도들에게 전달하고 성도들의 죄사함을 위한 대언자의 직무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 직무를 맡은 자가 목사이다. 그러므로 목사의 위임식이나 취임식은 제사장과 대제사장의 위임식이나 다를 것이 없다. 오늘 우리는 중요한 예식에 참예하고 있다.
아론의 위임식은 네 가지 절차를 밟았다.
(1) 몸을 물로 씻은 것. (2) 제복을 갈아입은 것.
(3) 관유를 부은 것. (4) 제물로 제사를 드린 것.
성막 성전의 성소와 번제단 사이에는 성전 뜰이 있고 그 뜰에는 물두멍이 있었다.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은 거기서 옷을 벗었다. 신도 벗었다. 그리고 물두멍의 물로 몸을 씻었다. 때를 씻는 목욕이 아니었다. 마음의 죄를 씻은 회개였다. 물로 몸을 닦으면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정결케 되기를 기도했다.
몸을 씻은 후 새 옷을 갈아입었다. 그 옷은 제사장의 제복이었다. 아론은 속옷을 입고 띠를 띠고 겉옷을 입고 에봇을 입었다. 에봇에는 흉패가 있어 흉패에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이름을 보석 위에 새겼다. 그리고 머리에는 관을 쓰고 관전면에는 금으로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글을 새겨부쳤다.
대제사장이 입은 옷의 특이한 것은 에봇과 흉패이다. 에봇은 모든 것을 가리운다. 에봇을 입지 않으면 모든 것이 드러난다. 인간의 모습, 인간의 솜씨, 인간의 계획이 드러난다. 그러나 에봇을 입으면 인간의 성격, 인간의 경험, 인간의 자랑이 다 가리워진다.
인간의 모든 것이 가리워졌을 때 하나님의 뜻을 물을 수가 있다.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 우림과 둠밈이다. 우림과 둠밈은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우림과 둠밈은 에봇에 붙인 흉패의 주머니 안에 있어 사람의 감각이나 지각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다.
아론은 우림과 둠밈으로 전쟁을 할까 하지 말까를 결정했다. 누구를 대제사장으로 세울가를 결정했다. 성막 성전을 언제 세울가를 결정했다. 가부를 알 수 없는 것은 다 우림과 둠밈으로 결정했다. 아론이 우림과 둠밈으로 결정된 사실을 알리면 백성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결정인 줄 알고 그대로 따랐다.
셋째로 모세는 관유를 취하여 성전 안에 있는 모든 기구에 발랐다. 향단과 떡상과 등대에 발랐다. 물두멍에도 발랐다. 번제단에 일곱 번 뿌렸다. 그리고 아론의 머리에 부었다. 아론의 머리에 부은 관유는 아론의 수염을 타고 흘러서 옷깃에 배었다.
관유는 몰약과 육계와 창포와 계피와 감람유를 섞어서 만든 거룩한 기름을 가리킨다. 이 관유를 바른 기구에는 향기가 풍겼다. 아론의 옷과 몸에도 향기가 풍겼다. 기름은 성령을 의미한다. 관유는 여러 가지 향유를 섞어 만든다. 그것은 성령의 각양 다른 은사가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다.
성령의 은사는 대제사장의 머리에서 시작된다.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이 불러 세운 모든 종들의 손과 발과 입을 통하여 향기를 풍긴다. 성령의 기름이 메마른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성령의 향기가 풍기지 않는 성도는 성도가 아니다.
넷째로 제사를 드렸다. 제사는 속죄제와 번제와 위임식 제사의 세 가지 제사를 드렸다. 아론은 먼저 자신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속죄제를 드렸다. 수송아지 한 마리를 끌어왔다.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이 그 수송아지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안수 기도를 드렸다.
자신들의 죄와 악을 다 그 수송아지에게 짊어지웠다. 그리고 그 수송아지를 그들이 보는 앞에서 죽였다. 그 수송아지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번제단 네 귀에 발랐다. 그 남은 피를 번제단 밑에 쏟았다.
내장과 기름과 콩팥을 번제단 위에서 불태웠다. 가죽과 고기와 똥은 진 밖으로 가지고 나가 재를 버리는 곳에서 불태웠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 죽임을 당한 것과 같았다.
아론은 또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는 헌신의 제사인 번제를 드렸다. 수양 한 마리를 끌어와 수양의 머리에 안수하고 그 수양을 잡았다. 그 수양의 피를 번제단에 뿌렸다. 그 수양의 각을 떠서 그 고기와 기름과 가죽 전부를 물로 씻은 후 번제단 위에서 불살랐다.
마지막으로 위임식 제사를 드렸다. 역시 같은 방법으로 수양 한 마리를 잡았다. 그 수양의 피를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의 오른쪽 귓부리와 오른손 엄지손가락과 오른발 엄지발가락에 발랐다.
그리고 수양의 가슴(갈비)은 요제로 드린 후 삶아서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이 회막문에서 먹었다. 위임식을 거행하는 7일 동안 성전 밖으로 나가지 않고 성전에서 먹고 자게 했다.
위임식을 마치고 난 아론과 성막 성전은 기름과 피로 얼룩이 졌다. 성전 뜰에는 짐승 잡는 소리가 진동했다. 번제단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의 옷은 피로 얼룩이 졌다. 손과 발과 얼굴에도 기름과 핏자욱이 남아있었다. 아론의 위임식을 기쁘다기 보다는 엄숙했다.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의 은사로 충만된 생애가 목회자의 생애이다. 성령의 기름이 마르면 목회자의 옷은 찢어진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빛이 바렌 옷은 볼 품이 없다. 찢어진 옷과 빛 바란 옷을 입고 목회하는 것보다 불행한 일은 다시없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빛이 선명할수록 그 목회는 생동력이 있다. 성령의 기름이 남아돌수록 그 목회는 부드럽다. 이진수 목사님의 목회는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의 기름으로 충만된 목회가 되기 바란다.
이진수 목사님을 담임목사로 맞이하는 교우들에게 몇 가지 부탁의 말씀을 드리고자 한다. 첫째 담임목사의 우림과 둠밈의 판결에 순종하기 바란다. 우림과 둠밈의 판결은 담임목사가 마음대로 조작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시로 판단하는 것이다.
목사는 자기 마음에 없는 결정을 내릴 때가 있다. 교인들이 원하지 않는 결정을 내릴 때가 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다. 교인들은 담임목사의 결정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믿고 따라야 한다. 그 결정은 상식에 어긋난다. 비합리적이다. 내게 부당하다고 해서 비판하면 안 된다.
우림과 둠밈의 결정은 사람으로서 알 수 없는 일을 결정한다.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을 결정한다. 교육을 먼저 할까 선교를 먼저 할까, 담임목사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
성전을 먼저 수리할까 벤을 먼저 구입할까, 담임목사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 목사가 그러한 결정을 내린다고 독재자로 보면 안 된다. 목사는 하나님의 뜻의 대변자이다. 하나님의 명령의 실행자이다.
둘째 제사는 제사장에게 맡기기 바란다. 제사장의 일은 목사의 일이다. 제사장은 제사의 전문가이다. 목사는 목회의 전문가이다. 목사는 비지네스에 대하여 관여하지 않는다. 대출을 어떻게 받으라, 고객을 어떻게 유치하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교인들은 목회 전문가에게 심방을 이렇게 하라, 설교를 이렇게 하라는 말을 하는 것은 월권 행위이다.
제사에는 제물이 있어야 한다. 누가 제물이 되어야 할까? 목사를 제물로 삼는 일이 많다. 교인이 제물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을 제물로 바친 유대인들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교인들이 제물이 되면 목사가 그 제물을 어떻게 받을까? 다윗이 산성에서 베들레헴 우물물을 먹고 싶다고 했다. 그 때 두 용사가 적진에 뛰어들어가 화살과 창에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렇게 해서 베들레헴 우물물을 길어와 다윗에게 주었다. 다윗을 그 물을 받아 들고 이것은 물이 아니고 피다고 했다. 내가 어찌 용사의 피를 마시랴? 다윗은 그 물을 제단에 부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목사와 교인들이 자신을 제물로 삼아 피 있는 제사를 드리는 교회는 하나님이 그 제단에 불이 일년 365일 꺼지지 않게 하실 것이다.
셋째 교인들이 담임목사의 까운을 벗기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제사장의 제복은 하나님이 입히시고 하나님이 벗기신다. 아론은 하나님이 입혀준 대제사장의 제복을 입고 40년 동안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지 40년이 되는 5월 1일 하나님은 아론으로 하여금 요단강이 내려다보이는 호르산에 올라오라고 했다. 호르산에서 하나님은 아론에게 제복을 벗으라고 했다. 하나님은 그 제복을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혔다.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이 계신다. 그 목사님은 전임 목사님으로부터 목사의 까운을 물러받은 것을 자랑하는 말을 들었다. 그 목사님의 전임 목사님은 그 교회를 설립한 목사님이었다. 그 목사님은 은퇴를 하면서 자기가 한 평생 입고 섬긴 목사의 까운을 벗어 후임 목사에게 입혀주면서 목회를 맡겼다는 말을 했다.
데이비스 한인교회는 세 번째 담임목사님을 모시고 있다. 첫 번째 시무하시던 목사님이 두 번째 취임하시는 목사님에게 목회의 바톤을 잘 넘겨주었다. 두 번째 시무하신 목사님도 세 번째 취임하시는 목사님에게 목회의 바톤을 잘 넘겨주었다. 네 번째, 다섯 번째 바톤도 잘 넘겨주는 교회가 되기 바란다.
이진수 목사님은 하나님이 세운 제사장이다. 목사님은 자신을 성결케 하고 목사의 까운을 입고 목회에 전념하시기 바란다.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자신을 제물로 바치기 바란다.
하나님의 제단에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의 기름이 충만하기 바란다. 주님 오실 때까지 제단에 불이 계속 타오르기를 바란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