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법화경 수기품 중에서 "가섭은 광명(光明)여래가 되리라" 라고 하는
산문형식으로 된 내용을 어제는 말씀드렸고
오늘은 게송으로 거듭 설하는 부분부터 말씀드릴 차례입니다.
어제는 가섭존자가 등장했기 때문에
가섭존자와 관련되는 이야기를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섭존자는 선종의 초조로서
부처님의 법을 제일 맏이로서 이어받는 것으로 되어있고,
아란존자도 역시 부처님의 제자이지만
선종에서는 가섭존자의 법을 이어받는 것으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선종에서 일찍이 자랑하고 있는 삼처전심,
부처님이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였다고 하는, 영산회상 거렴화, 다자탑전 분반좌,
사라쌍수 곽씨쌍부, 이 이야기를 말씀 드렸습니다.
두타제일로서 가난한 집만 다니면서 걸식을 했다는 내용들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게송으로 그 분의 수기 받는 내용을 거듭 설하게 됩니다.
그 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비구들에게 말하노라.
내가 부처님의 눈[佛眼]을 가지고 가섭의 장래를 살피니
미래세상 무수한 겁을 지나서 마땅히 성불하리라.
그가 오는 세상에서 삼백만 억 부처님 세존을 공경하고 받들어 섬기면서
부처님의 지혜를 얻기 위하여 범행(梵行)을 깨끗이 닦으리라.
범행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청정한 행이란 뜻입니다.
선행과 또 자기 몸을 잘 단속하는 그런 청정한 행을 범행이라고 하죠.
그래서
복과 지혜가 구족(具足)하신 가장 높은 세존께 공양하고
공양, 선을 닦는 일, 보시를 하는 일, 이런 것들이 모두 범행으로 들어가죠.
그래서
갖가지 최상의 지혜를 부지런히 닦아 익혀서 최후의 몸을 받고서 성불하리라.
여기 내용인 즉은 가섭존자가 미래에 이러 이러한 과정을 거치고 난 뒤에
성불한다는 이야기는 그렇게 되어있지만,
이것이 사실은 이미 그대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부처님이다, 라고 하는
그런 보증이 내용에는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당시 수기이야기를 처음으로 하면서부터
그렇게 표현을 할 수는 없는 거죠.
그래서 많은 세월을 지난 뒤에 그것도 아주 보살행을 많이 닦은 뒤에
비로소 성불할 것이다, 라고 하는 설화 같은 조심성 있는 그런 표현을 합니다.
그러나 이 법화경 상불경 보살품에 가서
바로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다 부처님이라고 하는 그런 수기를 내리는 일이라든지
500명을 또는 2천명을 한꺼번에 똑같은 이름으로 수기를 주는 일이라든지
그 내용을 가만히 살펴보면 본래 성불이라고 하는 그런 취지에서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을 아주 명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 하는 형식은 그야말로 하나의 형식을 빌어서
부처라고 하는 사실을 보증하는 것이다. 꼭 이렇게 아셔야 됩니다.
여기서 잘못 이해하면 꼭 이러이러한 조건이 따라야만
비로소 부처가 된다 라고 이렇게 알고 있게 되면
그것은 크게 수기의 의미를 잘못 아는 것이라고 그렇게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 국토는 청정하여 유리로써 땅이 되고
여러 가지 보배나무가 가로수로 열을 지었고
황금 줄을 길가에 늘이어 보는 이 마다 기뻐하리라.
항상 좋은 향기를 뿜으며 훌륭한 꽃을 흩기도 하여
여러 가지 아름다운 것으로 나라를 장엄할 것이니라.
그 나라의 땅은 반듯하여 둔덕이나 구렁이 없으리라.
여러 보살 대중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으니라.
그들의 마음은 부드럽고 화평하고 크나큰 신통을 얻었으며
여러 부처님들의 대승경전(大乘經典)을 받아 지니리라.
그 나라는 아름답고 유리로 땅이 되고 이렇게 아름답게 꾸밀 수 있는
그런 조건들을 다 동원해서 이야기 하고 있지만
땅은 흙으로 되어야 옳지 유리로 땅이 되면 좀 곤란 하지요.
그러나 깨달음의 안목으로 세상을 보았을 때
그렇게 아름답게 비쳐 졌다는 그런 뜻으로도 해석 할 수가 있습니다.
또 유의해야 할 것은
여기에 계시는 대중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그들은 모두 부처님의 대승경전을 받아 지닌다. 이 뜻이예요.
이게 우리 마음에 새겨야 될 대목 중에 하나입니다.
부처님의 많은 경전 중에서 그 짧은 인생에 아주 훌륭한 대승경전을 익히고
그것을 나의 사상으로 받아들이고 그래야지
무슨 소승경전 같은 것은 골치만 아프지 별 소득이 없는 그런 경전을 가지고
세월을 보낼 여가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화경에서
부디 대승경전을 받아 지니도록 하라.
언젠가도 말씀드렸지만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아침에 잠에서 깨면서부터 선택의 연속 입니다.
무엇을 할까? 이걸 할까 저걸 할까.
이 일부터 할까 저 일부터 할까.
오늘은 같은 시간에 만나야 할 사람들이 몇 사람 있는데 어느 사람을 만날 것인가?
또 같은 시간에 가야 할 곳이 여러 곳이 있고 해야 할 일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법회를 갈 것인가? 친구들 하고 놀러 갈 것인가?
뭐 등등 우리는 하루 가운데 선택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죠. 선택을 잘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이런 말씀은
우리가 많은 책을 접하는데 있어서 정말 진리의 말씀,
바람직한 가르침을 접하도록 하라 하는 그런 뜻이 담겨져 있어요.
여러 부처님들의 대승경전(大乘經典)을 받아 지니리라는 표현하는데
속뜻이 깊습니다.
저의 스승님이신 탄허스님께서 신문을 잘 읽지 않으세요.
신문을 잘 안 읽고 무슨 사회 변동이 크게 날 때 저희들보고
무슨 사건이 터졌다면 그 사건에 대해서 좀 읽어봐라 라고 하시고
본인은 읽지 않습니다.
그것도 한 달에 불과 한두 번이나 많아야 두세 번 있을 정도 밖에 안 됩니다.
"스님, 왜 신문을 안 읽으십니까? 세상에 신문 안 읽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우리가 따졌어요.
그랬더니 "신문에는 진리의 말씀이 없잖아. 성인의 말씀이 없잖아."
이러시더라구요.
평생 성인의 말씀을 가까이 해오면서
거기에서 오는 어떤 희열, 법희선열을 맛보면서 평생 사셨으니까
뭐 유교가 되었든 도교가 되었든 불교가 되었든 간에
정말 그 뛰어난 머리로 평생 공력을 기울여서 스스로 깨달음을 성취하고
어떤 높은 경지에 이르러 간 그분들의 그 뛰어난 솜씨로 정리해서 표현해 놓은
그런 진리의 말씀 성인의 위대한 말씀에 이런데 맛을 들여 놓으니까
도대체 신문이라고 하는 것이 읽을 가치가 없다는 거예요.
재미가 없단 거죠.
차라리 논어 맹자를 읽을 망정
그 신문 그것 읽고 그렇게 시간을 낭비를 할 수 있느냐. 이런 뜻이 예요.
그런 말씀을 직접 하셨어요.
그 논어 맹자 노자 공자를 스님께서는 항상 외우는 일인데
“그것은 왜 보십니까?” 그러면은
"성인의 말씀은 천 번 만 번을 볼 때 마다 즐겁고 희열이 있다.
그래서 보는 것이다.
거기에 맛을 못 들이면 이해를 아마 못할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기도 합니다.
참 그 어떻게 보면,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 같기도 하지만
아마 그것은 제자들에게 어떤 하나의 삶의 지표를 보여주는
하나의 방편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모든 성문대중으로서 새어 흐름이 없는 최후의 몸을 얻은
법왕(法王)의 아들도 또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느니라.
그러니까 '새어 흐림이 없다'는 것은 번뇌가 없다고 하는 거죠.
그리고 바로 다음 생애는 성불한다는 뜻에서 법왕의 아들, 법왕자라고 그래요.
그런 지위에 있는 사람들, 그런 수준에 오른 사람도 상당히 많다는 것입니다.
천안(天眼)을 가지고도 다 셀 수 없으리라.
그 부처님의 수명은 십이 소겁이 될 것이요,
정법이 세상에 머무르는 것도 이십 소겁이며,
상법도 이십 소겁 동안 세상에 머물 것이니라.
광명 세존의 그 일이 이와 같으리라."
어제 정법 상법 이야기가 나왔을 때 들려드린 말씀 기억나시지요?
금강경에서는 제 오 오백년을 이야기한다.
첫째는 해탈견고시대요 둘째는 선정견고요 다문견고요 탑사견고요 투쟁견고다.
이것은 연차적으로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누구든지 오늘날 이 시대에 살면서도 그 불자가 무엇에 관심이 있느냐에 따라서
각각의 오백년이 그 사람의 삶이 되는 것이다.
절에 와서 남 잘잘못만 눈 여겨 보고 그것만 시시비비 한다면
그 사람은 계속 투쟁견고 시대 사람이고,
이렇게 경전공부나 강의나 이런 것을 좋아 하는 사람들은
늘 다문견고 시대에 사는 사람이다.
그 다음에 불교를 이해하는데 무슨 불상이나 세우고 절이나 세우고
법당이나 세우고 또 신도들도 가시적인 그런 불사에서만 어떤 환희를 느끼고
또 큰 스님의 어떤 수준도 그 스님이 얼마만한 절을 세웠느냐
또는 절을 몇 개나 가졌느냐, 신도들은 몇 명이나 따르느냐
이런 양적인 것을 가지고 평가를 하는거죠.
그런 이들은 늘 절 크기, 신도들이 모이는 숫자,
이런 것 가지고 불교의 관심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은
탑사견고 시대에 사는 사람이다.
정말 한 생각이 오롯하게 화두일념으로 선정에 들어가는 정도의
수준에 있는 사람은 언제나 선정견고 시대 사람이다.
한 생각 툭 터져서 해탈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늘 해탈견고 시대의 사람이다.
그러니까 이건 연차적으로 부처님 열반하신지 제일 오백년, 천년, 천오백년,
이천년, 이천 오백년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틀린 말이라는 거죠.
대개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하는데
그렇게 해석하면 곤란한 점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어제 말씀 드렸지만 중요한 이야기기에
또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그 불교적 신행생활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그런 하나의 거울 역할도 하기에 중언부언 이렇게 자세히 말씀드리게 되었습니다.
“광명 세존의 그 일이 이와 같으리라.”
이래서 가섭존자의 수기내용은 끝나고,
목건련 수보리 마하가전련 이 세 사람이 수기를 청하는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