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茶禮)는 말 그대로 ‘차(茶)를 올리면서 드리는 예(禮)’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하지만 사찰에서든 일반 가정에서든, 언제부턴가 차례상에 차를 올리는 모습을 찾기 힘들어졌다. 지금이라도 차례상에 차를 올려 잃어버린 차의 모습을 복원하는 ‘진짜 추석 차례’를 지내보자는 거다.”
서울 은평구의 작은 시장통에 위치한 한 저자거리 절 열린선원. 역촌중앙시장 건물 2층 한쪽 구석에 자리 잡은 이곳은 지난 2005년 ‘저잣거리 포교’를 위해 설립된 포교당이다. 이 사찰의 원장 법현 스님(전 태고종 부원장)은 이맘때면 언제나 “차례의 본뜻에 걸맞게 조상을 모셔야 한다”며 20년 넘게 ‘차례상 차 쓰기’ 운동을 벌이는 주인공이다.
법현 스님이 ‘차례상에 차 쓰기 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1990년대 중반 우연히 차례와 관련된 언론보도를 접하면서부터다. 그 기사는 유교·기독교·천주교의 차례의식을 다루면서도 불교 차례의식은 빼놓았다. 스님은 “그 일이 계기가 돼 과연 우리 차례의식의 원형이 무엇인가 고민하게 됐다”고 말했다.
차례에 차쓰기 운동을 벌이는 법현스님은 해마다 열린선원 등에서 차례에 차쓰기 시연을 해마다 하고 있다.
종교를 떠나 순수한 의미에서 차례의식 연구에 나섰지만 의외로 통일된 차례 절차에 대한 문헌은 드물었다. 스님들과 불교 단체가 편찬한 의식집도 뒤지고 유교 문헌도 뒤져봤지만 차례의식은 그야말로 제각각이었다. 올리는 음식이나 음식 차리는 방법, 위패 쓰는 방법 등도 일치하는 것이 없었고 각 가정의 전통과 관습에 전적으로 따르는 듯했다. 그 과정에서 법현스님은 중요한, 그러나 씁쓸한 사실을 발견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기제사가 아닌 명절 차례상에도 한 결 같이 술을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차례의 본뜻인 ‘차를 올리는 예’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법현 스님은 “수년간 차례의식의 원형과 유래를 꼼꼼하게 따져본 결과, 차례에 차를 올리던 전통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왜곡·변질된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스님은 “적어도 ‘차례’라는 이름에 들어있는 차를 올려야 올바른 차례문화 예절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본격적인 ‘차 쓰기 운동’을 벌이게 됐다”고 말했다.
법현 스님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차가 쓰인 역사는 1300년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역사적 기록에 처음 차가 등장한 것은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로, ‘차는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부터 있었다. ‘설총은 “차와 술로써 정신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고 신문왕(재위 681~692)에게 간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또 일연스님이 쓴 ‘삼국유사’에는 신라 문무왕(661년) 때 가야의 종묘제사에 떡과 밥, 과일, 그리고 차를 올렸으며 차는 다른 어떤 제수(祭需)보다도 앞 목록에 놓인 중요한 품목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차 마시는 풍속이 늘고 차와 향을 올리는 불교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제사에 차를 올리는 풍습도 확산됐다.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가야 시조 김수로왕의 시제에 차를 올리는 ‘종묘다례’ 의식이 있었고 고려 초 성종(재위 960~997)이 최승로 등의 부의(초상집 부조)로 뇌원차(腦元茶)와 대차(大茶)라는 차를 하사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고려시대 종교행사인 팔관회 하루 전날엔 왕에게 다식(茶食)을 올리고 태자와 신하들이 모두 차를 마셨다는 기록도 있다.
각종 중요 의식과 제사 때 차가 쓰인 기록은 조선시대 초까지 이어졌다. 성종 5년(1474) 때는 ‘왕이 예조에 전하기를, 봉선전의 대소제사에 차를 써라’는 기록이 있으며, 왕과 왕후의 기제사와 묘 제사 때 주로 ‘다탕(茶湯·뜨거운 차와 과일 등)’을 올렸다는 기록도 있다. 제사뿐 아니라 왕세자와 스승·정1품 관리들이 모여 경서를 공부하는 ‘회강(會講)’ 때도 역시 다례를 행했다.
제사에 차를 올리는 문화는 일반 가정집에도 깊숙이 스며들었다. 집안에 며느리가 들어오면 가장 먼저 조상을 모시는 사당에 제사를 지내게 했는데 이때 반드시 며느리가 직접 달인 차를 올리게 했다. 이를 고묘(告廟) 또는 묘견례(廟見禮)라고 했다. 며느리가 솜씨있게 달인 차로 제사를 지내고 이를 조상이 맛있다고 판단하면 ‘제대로 들어온 며느리’라고 본 것이다. 제사 후엔 가족들이 둘러앉아 며느리가 달인 차를 함께 마시는 ‘회음(會飮)’ 행사를 가졌다. 이것은 뒷날 제사에 사용한 술을 나눠 마시는 음복(飮福) 문화로 변했다.
법현스님은 “조선 중기부터 성리학이 주된 정치이념으로 등장하면서 차의 위상도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절의 재정사정이 급격히 나빠지면서 스님들이 절 주변 차밭에서 차를 생산하기 어려워졌고, 일반 백성과 스님들의 교류가 적어지면서 차를 마시는 인구도 현격히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차 생산에 붙는 세금, 즉 다세(茶稅)도 감당하기 버거운 수준으로 치솟았다. 차 10포를 생산하면 세금으로 차 11포를 요구하는 어처구니없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다인(茶人)으로 꼽히는 이목(李穆·1471~1498) 선생도 그의 저서 ‘다부(茶賦)’에서 ‘차는 세금을 내야 해 사람들의 걱정거리가 되고 있다’고 적고 있다. 차 가격이 급등하자 차를 구하기 힘든 지역에선 밤(栗)을 가루처럼 빻아 다례를 치르기도 했고 그마저도 없으면 물이나 술로 다식(茶食)을 차렸다.
차가 사라지면서 대신 차례상에 오른 것은 술이었다. 술은 음복주 또는 차례주라는 이름으로 차례상이나 제사상에 올랐다. 왜 술이었을까. 법현스님은 이에 대해 “술은 예로부터 신(神)과 가장 가까운 음료로 여겨져 왔다”며 “적당히 마시면 기분을 상승시키는 등 현실세계와 동떨어진 느낌을 주기 때문에 술을 사용한 것으로 해석된다”고 했다. 소주와 비슷한 증류주의 일종인 음복주는 현재 몇몇 주조업체에서 브랜드 이름을 걸고 적극 마케팅에 나서고 있기도 하다.
법현 스님은 지난 20여 년 간 꾸준히 ‘차례상에 차 쓰기’ 운동을 벌여왔지만 성과는 아직 크지 않다고 털어놓는다. “차례는 제사보다 낮은 단계의 의식이라는 뜻에서 ‘버금 차(次)’를 쓰는 것 아니냐”는 주장까지 들은 뒤엔 “이거 정말 심각한 문제구나”란 자괴감마저 들었다고 했다.
법현 스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차례 전통을 알리기 위해 앞으로 더 많은 연구와 특강을 계획하고 있다. 매년 추석과 설을 앞두고 열린선원 큰법당, 불교방송국, 일산 킨텍스 등에서 ‘명절차례 시연법회’를 열어 제대로 된 차례상 차리기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차례나 제사는 흔히 ‘가가례(家家禮)’, 즉 집집마다 의식이 다르다고 한다. 위패를 쓰는 방법이나 상 차리는 방법 등은 개별 가정의 종교와 개성에 맞게 자유롭게 하되 적어도 ‘차례’의 ‘차 올리는 전통’만은 복원하자는 거다. 차와 술을 함께 올리든, 차만 홀로 올리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차를 올리는 우리 고유의 전통을 회복하는 것만으로도 잘못된 관습을 바로잡고 먼 조상에 대한 예를 다할 수 있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