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과자
우리 일가족은 김포공항을 나오자마자 어떤 절차도 거치지 않고 직접 자본주의 사회에 투입됐다. 모든 것이 무지 상태였다. 특히 현행법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법을 모르니 피해자인데도 가해자가
되는 억울함을 당하기도 했다.
1999년9윌23일 날이었다.
이날은 추석 전 날이었다. 너와 엄마가 장도 볼겸 중앙시장에 나갔다. 너는 신발공판장에서
일주일 간 아르바이트로 일 한적이 있어서 가게 사장을 찾아 갔다.
근데 가게 사장은 이런저런 구실을 대며 임금지불을 거절 했다.
그래서 실랑이가 오고 갔다. 사장은 업무방해라며 너를 가게 밖에 있는 길 중앙으로 끌고 나왔다. 그리고 너는 끌려 나오면서 매맛고 꼬집히고 옷도 찟기는 수모를 꼼짝 못하고 당했다.
성인 남자의 힘을 네가 어떻게 당할 수 있겠니.
그날 저녁 무렵이었다. 나는 너를 데리고 순천향대학병원을 찾았다.
우리는 병원 밖 벤치에 잠시 앉았다. 네가 나더러 등이 아프다며 좀 봐 달라고
했다. 내가 보니까 등은 문신을 한 듯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그걸 보는 내 마음이 얼마나 아팠던지 모른다. 나는 너와 함께 진찰실에 너와 들어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는 기어이 반대 했다.
나는 너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나는 너더러 의사 선생에게 사실대로 얘기하라며
너를 진찰실로 보냈다.
바로 이 순간의 실수로 나는 너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죄를 진 것이다.
그때 너는 아직 미성년자라 한창 예민한 나이였다. 너는 의사 선생에게 민 살을 보이는 것을 극도로 수치스럽게 생각 했던 것이다.
그래서 너는 등의 멍든 부위는 아예 의사 선생에게 보이지도 않았다. 네가 진찰을 받은 부위는 팔과 팔목
뿐이었다.
그것도 남에게 맞아서 그랬다면 수치스러우니까
넘어져서 다쳤다고 거짓말을 했다
진단 결과는 전치2주의 좌상으로 나왔다.
네가 모든 상처부위를
의사 선생께 보이고
진실대로 고백 했다면 진단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너도 전과자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너무나 순진하고 바보스러웠다
아래는 니엄마의 당시 진술을 내가 적어 놓았던 것이다.
< 너 엄마의 진술 1>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딸이 오지앉았다.나는 신발공판장 쪽으로 갔다.
신발공판장 앞 길에는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에워싸고 구경을
하고 있었다. 나도 호기심에 사람들 틈으로 비집고 들어 갔다. 순간 나는 정신이 아찔 했다. 신발공판장
사장(양씨)이 딸을 길 중앙으로 끌고 나와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딸의 어깨를 거머쥐고 윽박지르며 망신을 주고 있었다.
그 장면을 구경하는 열성팬들은 많았으나 말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나는 미쳐버렸다. 나는 딸을 구출하기 위해 괴성을 지르며 돌진했다. 그때
내가 흉기라도 있었다면 나는 미친
김에 무슨 일을 저질렀을지 모른다.
딸은 그 처절한 시간에 나를 보자 구세주를 만난 듯 용기가 생겼다. 딸은사장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바로 그 시간에 신고를 받은 경찰 두명이
현장에 나타났다. 경찰은 딸이 양씨에게 끌려 나오게 된 과정은 묻지도 않고 단지 그 장면만 보고
딸을 가해자로 취급하려 했다.
이 일로 나와 딸애 그리고 신발공판장
양씨 세명이 파출소에 불려 갔다. 양씨는 경찰들과 아주 친숙한 사이였다. 양씨는 나이가 든 경찰을 형님이라 호칭했다. 그는 귀엣말로
수근거리다가 슬쩍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잠시후 그 나이 든 경찰이 사무실로 들어 왔다.
그리고 나에게 빈정대며 말했다.
- 아줌마 주민등록증 있어?
-당신은 저 사람의 말을 듣고
저를 불법체류자로 취급하는데
저는 불법체류자가가 아닙니다.
내가 주민등록증을 내놓자
그 나이든 경찰은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말도 안되는 변명을 했다.
-이줌마, 오해하지 마세요.우리가
양씨에게서 들은 것이 아니고 시장
사람들로부터 들은 거라구요.
-거짓말 마세요.저는 시장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다고요.
나는 경찰의 거짓말과 편파적인 행동에 많이 흥분 된 상태였다.
-우리 딸이 왜 이렇게 당해야 합니까.
사람을 부려먹고 품삯을 안 주는것도 모자라 사람을 이렇게 처침하게 만듭니까.
한 경찰이 비아냥조로 말 했다.
-돈 얘기 할거면 노동부에 가는거지 왜 파출소에 왔어요?
한 경찰이 비아낭조로 말했다.
-뭐라구요.파출소에서 부르지 않으면 우리가 왜 여기와요
-아줌마, 말이 많네요.
-아줌마는 꼭 사건으로 처리되기를 원하세요?
-사건처리가 뭔지 저는 몰라요..양씨가 우리 딸애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놨는데 어떤 엄마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요.
9월23일은 이것으로 끝났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조선족들에 대한 편견이 훨씬 심했다.
<너 엄마의 진술 2>
9월25일 날, 나는 딸과 함께 약속한 시간대에 파출소를 찾았다.양씨는
우리보다 나중 왔다.
경찰은 23일 날처럼 사건 처리를
원하는가며 물어 왔다.
나는사건처리가
뭔지조차 모르던 때였다. 나는 딸의
팔소매를 걷어 올려서 멍든 상처를
경찰들에게 보였다.그러나 경찰들은
아예 묵살해 버리고 눈길도 주지않았다.
이 번에는 양씨가 나는 안 다친 줄
아는가며 팔에 생긴 작은 상처를
경찰에게 보였다. 내 딸이 입은 상처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던 경찰은 양씨의 작은 상체에는 관심이 컸다.
-아저씨, 그러면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떼오세요.
양씨가 말했다.
-진단서는 무슨 진단서요.거저 그렇다는 얘기지.
양씨는 조사를 마치고
가게로 갔다.이 번에는 딸이 조사를 받았다.
40대로 보이는 경찰이 딸에게 물었다.
-아가씨, 그 신발가게에서 앞치마
두르고 일하던 아가씨 맞죠.
딸이 그렇다고 했다.
그 경찰은 즉각 신발 공판장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여기 남부파출소인데요,
이 아가씨가 그 가게에서 열심히 일하는 걸 나도 봤는데 임금을 주지 않는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이 아가씨의 임금을 당장 파출소로 갖고 오세요.
파출소가 무섭긴 무서웠다.
양씨는 종업원을 시켜 품삯을 가져
왔다.그런데 좀 모잘라게 보낸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한 번 가져 오는 수치를 당하기도 했다.
돈 문제는 노동부에서 해결하라는 그 경찰의 말은 틀린 것이었다.
사소한 임금쟁의는 파출소에서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었다.
참 고마운 경찰이었다. 그런데 다른
경찰들은 못마땅해 하는 것이었다.
조시가 끝나고 나는 착잡한
마음으로 집에 왔다.
그런데 그해 11월 중순께 대전지방
검찰청 천안지청에서 난데없이 벌괴금 고지서가 날라왔다.
딸이 상해죄를 지었으니 11월29일 까지 30만원을 납부하라는 내용이었다.
너무나 억울하고 어이가 없었다. 이 사건은 결국 법정으로 가게되었다.
이 사건을 정리하면서 나는 의미
있는 단서를 하나 포착했다.
이 사건은 1999년9월23일에 일어
났다. 9월23일 날, 양씨와 경찰의 대화에서 보면 양씨는 병원에 갈 생각조차 없었다.
이렇게 보면 양씨는 9월23일 후에 진단을 받은 것이된다.
그렇다면 양씨의 진단서는 증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면 사건발생 당일이 아니면 여러 가지 원인으로 다칠 수 있는 확률이 높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너뿐 아니라
나와 너의 엄마도 깊은 상처를 입었다. 나는 시장에 자주 다니는데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집 가게를 지나면 별 생각이 다 난다. 심지어 가게에 불을 확 지르고 죽고 싶은 끔찍한 생각까지 한다. 억울함을 당한 사람들의 보복행동이 이해가 가고도 남았다.
너는 이 사건으로 전과자가 된 것이다. 전과자의
딱지가 붙으면 죽을 때까지 달고
간다는 것, 그리고 취직활동에도
제한을 받는다는 것은 먼 훗날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정말 돈으로 해결 된다면 집을
팔아서라도 한 번 해 보겠다. 그러나 전과자 딱지란 돈으로 뗄 수 없는 엄연한 실정법이란다. 그리하여 아는 사람들은 법정 재판만을 막기 위해 양측 합의로 끝낸다더라.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각자가 알아서 살아간다는
인럭은행 여직원의 말을
항상 기억하고 살았지만 아직 이런 것 까지는 스스로 알아서 할 수 준은 이니었다.
그리하여 나의 무지가 평생의 회한이 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너는 한동안 많이 방황 했다.
심지어 나를 왜 한국에 데리고
왔는가며 아빠를 원망하기까지 했다.
이 때가 나에게는 제일 힘든 시기였다
그러나 니가 더 이상 빗나가지 않고
정상적으로 자본주의에 적응해
나가니 나는 안도 했다
내가 너에게 진리가 아닌 진리를 한가지 말해 주마. 어느 나라를 물론하고 담당관의
비위를 건드리면 담당관은 감정적으로 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다.
미국, 영국,독일, 일본과 같은 선진국들도 마찬가지다.
그날 너도 그렇지민
너 엄마가 너무 흥분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경찰을 자극하고
경찰의 자존심을 건드린 거다. 그리하여
경찰로 하여금 일방적으로 양씨의
편을 들게 한거다. 그리고 경찰은 가장 손쉬운 방법인 진단서를 양씨에게 은근히 종용한 것이다.
경찰이 전과자라는 것은 한 인간의
평생을 좌우하는 중차대한 문제라는
것을 조금만 고민 했다면 네가 전과자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겠니.
다 지나간 일이다.
지나 간 것은 지나간대로
그런 의미가 있겠죠
란 전인권의 노래를 나는 무척 좋아 한다.
비록 억울한 일이지만 나름대로 의미도 있는 일이었다.
이사건은 우리가 자본주의를 살아 가는데 눈을 크게 뜨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 많은 나라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 가기에 가장
적합한 나라는 대한민국 뿐이다.
늘 조국에 감사하며 꼭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바란다.
그리고 내가 한국 어린이 재단에 보험에 든 것이 하나 있다. 보험료는 적지만 매월 자동납부하고 있다.
내가 이 세상에 없으면 네가 계속
납부해 줬으면 한다. 바라기는 액수도 좀 늘렸으면 한다. 절대로 후원이라고는 생각하지 말고
너를 지켜 주는 보험으로 생각하기 바란다.
딸아, 사랑해!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