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민간신앙이란?
민간신앙이란 민간에서 대대로 전승하는 자연적 신앙이다. 민간신앙은 오랜 경험을 통해 터득한 자연 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종교현상을 말하는데, 이는 우리 민족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민간의 신앙이다.
불교, 도교, 유교 등 외래종교가 한국의 정신적 기반 위에 발을 붙이고 성장하고자 하였을 때 포교 초창기부터 민간신앙과 결합하고 있다. 민간신앙은 한국종교문화의 에너지원이며, 민족문화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한다.
민간신앙에는 민중의 생활로 전승하는 마을신앙의 대상이 되는 마을신(洞神)을 위시하여 집안신(家神), 무속, 독경, 자연물, 영웅, 사귀(邪鬼) 등에 대한 신앙과 풍수, 점복, 예조, 금기, 주술, 풍수지리, 민간의료 등의 신앙이 있다.
우리의 민속신앙에 관한 것으로 처음은 {한서} 및 {후한서}의 <동이전>에서 언급된 제천행사 곧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 예의 무천, 삼한의 시월제 등이다. 특히 거기에는 예맥(濊貊) 사람들의 의례와 풍속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우리의 선조들은 여러 가지의 미풍양속으로 생활하고, 천제와 산신제를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제례는 신앙의 구체적인 표현으로서 거기에는 일정한 법칙이 존재한다. 우리나라의 제례는 유교식, 불교식, 무교식 법칙이 주류를 이룬다. 조상제사와 성인을 모신 사당에 대한 제사는 유교식이요, 49재와 우란분재는 불교식이며, 서낭제나 씻김굿 등은 무교식이다.
그런데 이들 제사에는 부지불식간에 다른 쪽의 형태가 끼어들어 있어서 이중구조를 보이고 있다. 이를테면 불교식 제례에는 염불의식이 기본이나 유교식의 조상 제사에는 향, 청수, 꽃 및 과일이나 음식물을 공양한다. 강릉 단오제는 먼저 시장이 유교식으로 제사를 지내고 나서 무당이 중심이 되어 본격적인 무교제의로 진행되는 이중구조가 나타난다.
무교식 제례는 행사를 지내는 사람에 따라 남성 중심 제의, 여성중심 제의로 나뉜다. 남성이 중심이 되는 제의로는 서낭제, 산신제, 거리제, 돌탑제 등 마을제가 있고 여성중심의 제의는 가정에서 드리는 안택제가 있다.
안택제는 집안의 뭇 가신들에 대한 제사인데 가족의 무사 안녕과 가운의 번창을 기원하는 제의로서 여성들 곧 주부나 무당이 빌고 축원한다. 동제는 마을의 평안과 제액을 기원하는 마을 공동체의 제사이다. 무속에서는 안택제나 동제의 제의 행위를 일러 굿이라고 하다.
굿은 신에 대한 소명적 봉사로서 신과 인간의 상봉이나 대화를 의미하며 이것으로부터 인간의 소망과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굿이라면 대개 무당의 춤과 노래가 수반되는 큰 규모의 제의를 가리키지마는 푸닥거리, 치성·비손·손비빔 등 작은 규모의 것도 해당된다.
안택을 위한 개인굿에는 살아있는 사람의 소망을 기원하는 굿과 사령이 극락천도를 위한 굿이 있다. 전자에는 기복을 위한 재수굿·성주굿, 기자를 위한 삼신굿·칠성굿·불수(佛首)맞이(제주도), 치병을 위한 병굿·환자굿이 있고, 후자에는 오구굿·지노귀굿·사자굿·씻김굿·조상굿·시왕굿(十王굿) 등이 있는데 지방에 따라 명칭을 달리하고 있다. 유교식 제사는 가정이나 가문의 조상제사 및 시향 그리고 뛰어난 위인이나 성인을 모신 사당에서 지내는 제례이다. 그것은 예법에 맞게 음식을 진설하고 헌작하며 이어서 고축한다. 그리고 음복하는 순서로 진행되는 제사양식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특기할 사항은 민간신앙은 반드시 무속적이거나 토속신앙만을 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민속은 민간인의 보편적인 생활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유교, 불교, 도교가 이미 민간의 전통적인 신앙으로서 굳어진 것이므로 그것도 민간신앙 내지는 민속신앙으로 취급하여야 한다.
한 지역에서 생활환경이 같은 마을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위협하는 재앙을 멀리하고 마을의 화합과 번창을 기원하는 공동의 믿음을 마을 신앙이라 한다.그리고 마을신앙은 무형의 정신작용이므로 형식 곧 제의를 통하여 드러나는데 즉 제의를 동, 당산제, 또는 부락제라고 한다. 시제와 묘제가 혈연 위주의 씨족적 제사인데 비하여 동제는 농어촌 사람들의 지연적 제의이다. 전북지역의 경우 당산제 등을 가장 많이 사용한다. 이곳에서는 전북지역 상황보다는 전국적으로 널리 사용하는 동제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우리나라 동제의 시초는 국가적 행사였던 제의들 곧 12월에 하늘에 제사한 부여의 영고, 10월에 제사한 고구려의 동맹, 역시 10월에 하늘에 제사한 예의 무천 등이 있다. 마한에서는 소도라는 신역이 있어 솟대를 세우고 북과 방울을 달아 천군에 제사하였다. 신라에서는 남해왕 때에 박혁거세묘를 세우고 혜공왕 때에 비로서 5묘의 제도을 정하였으며 산천에도 제사하였다. 고구려와 백제에는 동명왕묘가 있어서 거기에 제사하였다. 불교의식인 연등회와 더불어 고려의 국가적 행사인 팔관회는 신라 진흥왕 33년에 시작된 전통적인 산천제를 계승한 것으로서 양생(陽生)하는 중동(仲冬)에 가무백회로 국태민안을 위해 행사한 것이다. 이러한 큰 행사를 본받은 마을의 공동체 신앙행위가 곧 동제이다.
동제로서 대표적인 제의는 서낭신·산신·용신·당산신·장승 및 솟대 등이다. 대체로 마을 뒷산 산정에 국사당, 산 중턱에 산신당, 동구 옆에 서낭당이나 장승, 솟대가 서 있는 것이 민속신앙의 전형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서낭당이 여타의 민간신앙들을 포괄하는 주된 신앙처로 산재하고 있으나 이것도 시대적 변화와 함께 서서히 소멸해 가는 실정이다.
동제는 대개 춘추로 행사되며 정초나 대보름날 밤 자정을 기해서 제사하는 곳이 많다. 해안지방의 동제인 풍어제로서의 별신굿이나 용왕굿은 특별히 날을 잡는다. 동제를 행사하려면 두 이레(14일)나 세 이레(21일)쯤 전에 모임을 열어서 생기복덕이 있고 부정이 없는 원로로 제관을 삼고 도가를 선정한다. 제관의 집이나 도가 및 제당에는 금줄을 쳐 부정한 자의 출입을 막는다. 제사날이 되면 제수와 제물을 진설하고 헌주(獻酒)·독축(讀祝)·소지(燒紙) 등의 순으로 제사하며, 보다 규모를 크게 할 때에는 당굿을 곁들여서 행한다.
동제당의 대표적인 명칭으로는 서낭당, 성황당, 산제당(山祭堂), 산신당(경기·충청), 당산(전라·경상), 본향당(本鄕堂), 포제단(胞祭壇:제주) 등으로 부르는데, 이들을 일컬어 서낭당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다. 당의 형태는 제단과 신수(神樹)로 신당이나 신체(神體)를 삼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당집이며, 동해안 어촌에서는 단청으로 장식한 기와집도 많이 볼 수 있다. 남한의 최북단인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의 서낭당은 돌무덤식인데, 그 안에 '성황지신위(城隍之神位)'라고 쓴 위패를 모시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동제당들은 신의 서식처일 뿐 신도들의 집회소가 아니다. 제주는 평소에 설교·특정교육·금욕생활·특수복장 등을 하지 않는다. 신격(神格)은 남신 보다 여신이 두 배 정도 많은 것으로 보고 되는데, 이는 여성이 풍요와 다산의 존재로 상징되기 때문이다.
동제의 종류에는 11가지 정도를 들 수 있다. 곧 당산제, 서낭제·산신제·기우제·장승제·솟대제·찬제·단군제·용수제·보제·비제·무후사제 등이다. 이 중에서 우리나라의 대표적 동제는 서낭제이며, 다음으로 산신제, 당산제 등 이다.
1) 서낭신앙
민간신앙 중에서 천신신앙과 산신신앙에 뒤이어 그 기원이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각 군현에 성황사나 성황단을 그리고 각 마을마다 서낭당을 모시고 제사를 드릴 정도로 가장 널리 분포되어 있는 대표적 민중전승인 서낭신앙은 모든 민속신앙이 그렇듯이 공리적인 신관(神觀)에 의한 현실적인 문제, 이를테면 마을수호·기원·초복·치병 등을 성취하려는 데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서낭신앙이 오래도록 전승되고 널리 퍼져 있는 것은 신앙의 목적을 충족시키는 종교적 기능을 수행해 줄것으로 믿은 결과이며, 이로 말미암아 서낭제와 더불어 서낭굿이라는 민속제의가 형성되었다.
서낭신앙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는 당의 위치가 밖에서 들어오는 길가의 동구, 산록, 산이 없는 허(虛)한 곳임으로 보아 고대에 수렵 목축 농경장소를 천신에 의존해서 수호하려고 신의 거주처를 마련한 것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서낭신앙은 신당 형태와 신앙의 성격으로 보아 몽골의 '오보' 신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오보 신앙이 일차적으로 한반도에 들어와 산신 및 천신 신앙과 결합되어 서낭신앙이라는 보편적인 민속신앙 형태가 형성되었고, 거기에 중국의 '성황'신앙이 들어와 그 기능이나 명칭 등이 복합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서낭신앙은 천신·산신·오보와 중국에서 전래한 성황 등 4가지의 신앙 형태가 혼합된 것일지라도 근원적 본질은 신의 수직 이동체계에 따른 도식 곧 천신-산신(산왕)-서낭에서 보는 바와 같이 천신과 산신 신앙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천신에게 제사하던 천제단이나 천왕당은 국사당(국수당, 국시당) 또는 속칭 마루서낭당이라는 서낭신앙쪽으로 그 기능이 변화되었다. 마을의 뒤쪽에 있는 산정이나 사람들이 넘나드는 험한 고개마루에 제단을 만들어 놓고 천신에게 빌던 대로 국사당신이나 서낭신에게 개인적 소망이나 공동관심사를 기원하였다.
서낭의 근원은 천신과 산신이다. 그러나 서낭은 관념적인 이 두 종류의 신격 외에도 다양한 성격, 다양한 종류의 신격을 지니고 있다. 마을사람들은 마을을 이룩한 최초의 개척자, 덕망이 있던 씨족의 조상을 서낭신으로 모시며, 무엇보다도 무속신들 중 인간신의 분포도에서 다수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한 많은 영혼'들을 신앙하여 오고 있다.
한편 각 군현마다 두었던 삼단 곧 사직단·성황단·여단 중에서 여단(여壇)은 억울하게 죽은, 한 많은 영혼들을 모신 제단으로서 이것은 우리의 전통적 무속신앙 전반에 관련되어 있는 사항으로서 이에 대한 고찰은 서낭신의 성격은 물론 한국 무속신들의 성격을 규명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관건이 된다.
이처럼 서낭신은 지역에 따라 다양한 특성과 명칭 및 기능 등을 지니고 있는데, 이를 크게 나누어 보면 강원도를 비롯한 산간지역에서는 산신계통의 신이며, 해안지방의 어촌에서는 해신이고, 대부분의 민간에서는 마을의 수호신이다.
그런데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서낭신은 나그네를 수호하는 노신(路神)으로서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천신이나 산신도 노신의 기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서낭신을 상정한 것은 한국인들이 신을 창조하는 데에는 근본관념인 '공간성' 곧 하늘에는 천신, 산에는 산신, 집에는 가신이라는 한계를 설정하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집을 떠난 나그네길에 나서면 자신들을 인도하고 보호하여 줄 신을 필요로 하였을 것이니, 주로 마을을 수호하는 신으로서 인식되고 있는 서낭신이 길가에 좌정하여 나그네들을 수호하는 노신(路神)의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2) 산산신앙
국조 단군이 수(壽)를 마친 후 아사달의 산신이 되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우리 민족과 산신앙과의 관계를 시사하는 자료이다. 산은 한국인에게 있어서 삶의 터전이며 인생의 귀의처이다. 그리고 산은 하늘에서 내려온 신들의 거주지로서 신성의 영역이었으므로 외경의 장(場)이며 숭배의 대상이었다. 일례로 백두산을 등반하였을 때 지켜야 했던 금기사항을 살펴보면 한국인의 산에 대한 외경심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산의 성체를 더럽혀서는 안된다고 하여 대소변을 받는 변기를 들고 가도록 하는 것이라든지, 산행에서 대화를 할 때도 행여 산신령을 성나게 할까 보아 큰소리로 말하지 못하고 하고 속삭이듯 말하게 하였다. 산을 오를 때도 감히 '오른다'하지 못하고 반드시 '산에 든다'고 해야 하며, 정상에 올라섰을 때도 올랐다 하지 않고 내려섰다고 말해야 했다는 것이다. 백두산이 환웅천왕이 내려온 곳으로서 우리 민족의 원초적인 신시(神市)임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한국인의 산에 대한 각별한 신성성을 엿볼 수 있다.
산 자체를 신으로 여기거나 산에 인격적인 신이 존재하는 것으로 믿고 제사하는 의식을 산제나 산신제라 하고, 신을 모셔 당집을 제당ㆍ산제당ㆍ산신당ㆍ산신각이라 한다. 우리나라 명산의 산신제로는 두타산ㆍ태백산ㆍ치악산ㆍ오대산 산신제가 있다. 치악산과 태백산의 산신제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으나 오대산 산신제는 1984년, 설악산 산신제가 시작된 1966년부터 무사고 산행을 기원하기 위해 행사하였다.
산신에 대한 강한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은 산삼을 캐는 심메마니(山蔘採取人)들이다. 산삼채취의 여부는 산신이 좌우한다고 믿고 있는 채삼인들에게 있어서 산신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그러므로 부락별로 산신당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제당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다. 자연부락으로서 산신당제를 지내고 있는 마을은 영동과 영서를 갈라놓은 태백산맥의 산간 부락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동해안 어촌의 남서낭은 산신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산신의 화상은 연로한 신선의 모습으로 표현되며, 상징 동물은 호랑이이다. 그러므로 옛날 호랑이의 피해가 심한 산간마을에서는 산신에 대한 제의를 통해 호랑이의 피해에서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3) 장승 · 솟대신앙
(1) 장승신앙
가장 한국적인 풍물의 하나로 꼽히는 장승은 이름도 다양해서 신라ㆍ고려시대에는 장생(長生), 고려 후기부터 조선 중엽까지는 장주(長柱), 그 후에는 장승(長丞)ㆍ장승(長承)ㆍ장주(長柱)ㆍ장선(長善)ㆍ소후(小 )ㆍ대후(大 )ㆍ이후(里 )ㆍ송후(松 )ㆍ목후(木 )ㆍ우석목(偶石木)ㆍ장생표(長生標)ㆍ주첩(柱貼)이라 하였다. 한글로는 더승ㆍ쟝승ㆍ쟝성ㆍ쟝선ㆍ장신 등으로 표기하였다. 장승을 부르는 이름도 지방마다 달라서 평안도를 위시한 북부지역에서는 '더승' 혹은 '더신'이라 했으며, 경기도를 중심으로 한 중부지방에서는 장승이라 하고 천하대장군, 지하여(대)장군이라 한다. 충청도지방에서는 수살ㆍ수살막이ㆍ수구맥이 등으로 부르고 몸체에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장승 이름을 써 넣었다. 영ㆍ호남에서는 벅수ㆍ벅슈ㆍ법수ㆍ미륵 등으로 부르고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ㆍ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라는 글을 새겼으며 호남지역에서는 벅수라고 부르기도 하고 제주도에서는 돌하루방이라 부르고 글은 새기지 않았다.
장승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신라 경덕왕 18년(759) "전남 장흥의 보림사 경내 보조선사영탑비(普照禪師靈塔碑)에 장생표주를 세웠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청도 운문산 선원에 11개의 장생표탑(長生標塔)ㆍ국장생(國長生)ㆍ황장생(皇長生) 등은 돌기둥으로 훗날의 돌장승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처음에는 단순하던 입석이나 목주(木柱)가 후세에 오면서 산신이나 칠성, 불교의 사천왕 등과 연합하여 무인(武人)을 조상으로 모시게 된 것이다. 그리고 《고려사》에 보이는 '생곡'이라는 역명(驛名)이 이정표로서의 장승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라고 하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조선조 중종 때 최세진이 《훈몽자회》에서 '후'자를 '더승 후'로 풀이한 것으로 보아 그 당시에도 이미 장승이 민속화된 것으로 여겨진다.
장승은 돌로 만든 석장승과 나무로 깎아 만든 목장승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대개 목장승은 통나무에 무서운 형상의 얼굴을 조상해서 남장승에는 홍색, 여장승에는 황색을 채색하기도 하며,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ㆍ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 외에 마을간의 거리를 써 넣는다.
장승은 그 기능에 따라 세우는 곳도 다양하여 절 입구에 세운 사원장승, 마을 입구에 세운 벽사장승, 이정표 겸 노신으로 길가에 세운 노표장승, 풍수지리설에 따라 허(虛)한 곳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비보( 補)장승이 있는가 하면 제주도의 하루방처럼 성문 앞에 세워 성을 지키고자 한 수문장장승도 있었다.
현존하는 장승 중 가장 오래 된 것은 전북 부안군 서외리 성문안 돌장승으로 조선조 숙종 15년(1689)에 세운 것이다. 그리고 전남 나주군 다도면 운흥사터 돌장승은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란 명문과 함께 숙종 43년(1717)이라는 건립연대가 새겨져 있다.
중요 민속자료 7호인 경남 충무시 문화동의 석장승은 '토지대장군(土地大將軍)'이란 명문과 함께 홀로 서 있는 독(獨)벅수로서 광무 10년(1909)에 세웠다. 1725년에 세웠다는 전북 남원군 산내면 입석리 실상사 입구에 있는 돌장승(민속자료 15호)은 남장승으로 머리에 모자를 쓰고 있다. 그리고 중요 민속자료 11호인 전남 나주군 다도면 마산리 불회사 입구에 있는 돌장승은 조형미가 돋보이는 것으로 유명한데, 특히 남자장승은 선이 굵어 남성적인 인상을 준다. 왕방울같은 눈은 툭 튀어나와 있고 코는 주먹코이며 길게 자란 수염을 땋아서 가슴에까지 늘어뜨렸으며 송곳니가 아랫입술 위로 삐져나와서 전체적으로 무섭다고 하기보다는 해학적인 형상이다. 목장승에도 예술적 가치를 지닌 것이 많겠으나 쉬 썩어버리는 데다가 시대가 변해서 장승 그 자체가 이 땅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2) 솟대신앙
솟대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는 신간(神竿) 또는 조간(鳥竿)을 말하며, 그 장대 위에는 1∼3마리의 목조나 철조가 앉아 있다. 이 조간은 단독으로 서 있는 수도 있으나 대개 동구에 있는 장승과 함께 서 있는 경우가 많다. 솟대에 대한 명칭은 다양하다. 손진태는 민속상으로 현존하는 명칭을 형태와 성격별로 3분류하였다.
① 목조소도(木鳥蘇塗) - 솟대ㆍ솔대ㆍ소주ㆍ소줏대ㆍ표줏대ㆍ거릿대ㆍ갯대ㆍ수살이ㆍ수살이대ㆍ수살목ㆍ액막이대.
② 용두소도(龍頭蘇塗) - 솔대ㆍ방아솔대ㆍ화표주ㆍ화주
③ 일시신간(一時神竿) - 벳가리ㆍ화적(禾積)ㆍ화간(禾竿)ㆍ보리빽가리ㆍ풍간(風竿)
이러한 명칭 외에도 짐대, 진또배기가 있다. 또 추엽융은 글에서는 '별신대'로 부른다는 기록도 있다. 곧, 한국에서는 솟대ㆍ솔대ㆍ소줏대ㆍ화줏대ㆍ벼줏대ㆍ갯대ㆍ고릿대 등 다양하게 부르는 목간이 있으며, 장대 끝에는 한 마리 혹은 세 마리의 조형(鳥形)이나 때로는 용사(龍蛇)의 형상을 한 신간을 각지에서 볼 수 있다. 거제도에서는 솟대를 별신대라 하여 3년에 한번씩 하는 별신제 때 신간이 된다. 신대라 하여 3년에 한번씩 하는 별신제 때 신간이 된다고 하였다.
솟대의 명칭으로 나오는 솟ㆍ솔ㆍ소는 모두 같은 어원에서 나온 것이며, 조선조 초기의 무헌에는 등(騰)이나 용(湧)을 '솟'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몽고와 만주어인 soro, so, sor가 용목(聳木), 고간(高竿)을 뜻한다는 것으로 보아 우리의 고대인들이 소대ㆍ솟대라고 부르는 것을 중국인들이 한자로 음역하여 '소도(蘇塗)'로 표기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 솟대를 샛대(鳥竿)의 소리가 전이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솟대신앙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왜 새를 올려놓았으며 그 새는 어떤 새인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막연히 '오리'등으로 이해하고 있을 뿐이나 사실은 까마귀이다. 신앙은 정신적인 추상의 세계이기에 그것을 가시화하기 위해서 어떤 상징물을 등장시킨다. 그러므로 그 상징물은 고도의 합리성을 띤 사물이어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산의 영물인 호랑이를 산신으로, 나그네의 벗인 말을 노신격(路神格)인 서낭신으로 곡식을 없애는 쥐나 참새를 잡아먹는 구렁이를 업으로 여겼다. 이외에도 소를 조사의 상징, 돼지를 지신, 개를 객귀의 상징으로 여겼고, 까마귀와 까치 등의 조류를 신성시하여 훼손하거나 잡는 것을 금기로 하였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이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온 조류는 위에 든 까마귀와 까치가 있다. 이 두 조류가 신성시된 것은 어떤 신앙의 상징물로 여겼기 때문이다.
비둘기는 주몽신화에서 볼 수 있듯이 유화가 아들 주몽에게 보내는 씨앗을 전달하는 신모의 사자였다. 닭은 신라의 계림과 《동국세시기》의 기록 곧 "항간에는 벽 위에 닭과 호랑이의 그림을 붙여 액이 물러가기를 빈다"와 관련된 조류이며, 매는 역시 《동국세시기》의 기록 곧 "남녀의 나이가 삼재를 만난 자는 세 마리의 매를 그려 문설주에 붙인다"에서 볼 수 있듯이 액막이의 역할을 하는 새로 등장한다. 까치는 길조로서 사람들에게 친밀한 새로 오작교의 탈해 전승과 관련을 맺고 있으며, 까마귀는 불길한 새 또는 재수 없는 새로 꺼림을 받고 있다. 그러나 까마귀는 태양 상징의 새이다. 고구려 고분인 동수묘를 비롯한 초기 고분과 사신도분에 이르기까지 천체의 상징으로 일월이 벽화에 그려져 있는데, 태양 곧 일상(日像)은 보통 원안에 세발 가진 까마귀로 표시하였다.
고대인들은 암흑이라는 공포의 대상을 막을 수 있는 태양 상징물로서 까마귀를 차용한 것 같다. 그것은 까마귀가 불길한 것, 곧 재앙을 예시해 주는 신성한 영조로서 태양 이미지를 대신할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단지 까마귀의 색이 까맣다는 것에서 암흑을 관련시킬 수 있겠으나 숯처럼 까맣다는 것은 태양 곧 불에 탄 것을 연상하게 되므로 태양상징물로서 채택되어 신앙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솟대의 새는 까마귀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 까마귀가 시대를 내려오면서 풍요원리의 3대 상징물(달ㆍ여자ㆍ물)에 해당하는 '물'과 관련 있는 물새인 오리ㆍ따오기ㆍ외가리 등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또 입신양명과 관련 있는 학ㆍ용ㆍ봉황 등으로까지 변이된 것으로 보인다
4) 돌탑신앙
예로부터 "산의 뼈요 흙의 정(精)이며 기(氣)의 핵"이라는 돌은 인간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일상생활의 도구로 이용되고, 고인돌처럼 무덤에 쓰이어 사후의 안주처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문학작품 속에서 돌은 항존성, 불변성의 이미지를 나타내기도 한다. 특히 돌은 민간신앙의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신성체(神聖體)로 존재하여 왔다. 우리의 선조들은 돌이 생명을 탄생시키기도 하고,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존재로 믿고 기자치성(祈子致誠)을 드리고, 마을의 평안을 빌어 왔다. 그것은 곧 돌이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여 주는 주술적(呪術的) 영험물로서 인식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사람들은 이러한 바위와 돌을 조형하여 탑을 만들어 왔다. 그리고 그 탑을 신앙하고 공경하였다. 대체로 탑에는 조각한 돌을 층층이 쌓아서 만든 사찰의 석탑, 또는 제단으로서의 누석단(累石壇), 몽골의 오보(obo)와 유사한 길가나 고개마루의 사낭당, 마을의 번창과 삼재(三災)를 막아주는 조산(造山) 등을 들 수 있겠고, 냇가나 주변에 널려있는 큰 막돌을 주어서 원뿔형으로 차곡차곡 쌓아올린 돌탑도 있다.
돌탑은 마을 입구에 쌓되 장승처럼 보통 2개를 쌓고 할아버지탑, 할머니탑으로 부른다. 탑의 형체는 기본적으로 기단부, 탑본체, 탑윗돌로 이루어지며 내장물의 4요소로 구성되기도 한다. 기단부에는 탑을 보다 견고하게 맞히기 위해서 땅을 단단하게 다지거나, 막돌을 한두 층 땅위에 고르게 깔아서 그 위에 탑을 축조한다. 일부 마을에서는 마을 입구 양쪽에 마을이 전체적으로 잘 보일 수 있는 조그만 언덕이나 산기슭을 기단부로 해서 탑을 쌓기도 한다.
돌탑의 내부에는 감실을 만들어서 내장물을 넣는데 오곡단지ㆍ금두꺼비ㆍ쇠스랑ㆍ부적ㆍ숯 등을 넣는다. 오곡단지는 풍농을 기원하는 뜻에서 넣는 곡식단지며, 금두꺼비는 지세가 제비혈인 마을의 앞에 놓인 다리(橋)가 지네모습을 하고 있어서 마을이 피폐하는 것으로 믿어 지네를 잡아먹으라고 은으로 두꺼비를 만들어서 탑 속에 봉안한 것이다. 쇠스랑은 긁어 들이는 성질을 지녔으므로 마을이 부자가 되도록 재물을 긁어 들이는 성질을 지녔으므로 마을이 안녕을 기원하는 축원문이며, 숯과 소금을 넣은 것은 도깨비의 불장난으로 마을에 화재가 잦으니 불을 제어하라는 뜻이다. 또 간수(소금)를 넣은 경우는 부인들이 살림을 짭짤(알뜰)하게 하라는 뜻이거나(동해시 삼화동 척빈탑) 재앙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뜻도 있다.
탑을 다 쌓으면 맨꼭대기에다 두상ㆍ꼭지돌ㆍ탑선돌ㆍ머리돌ㆍ상두석ㆍ포석ㆍ괴석 등으로 명명되는 '탑윗돌'을 얹는다. 할아버지 탑위에는 가늘고 길며 끝이 뾰족한 돌을 얹고, 할머니탑에는 그리 길지 않고 다소 펑퍼짐하며 끝이 둥그스런 돌을 얹는다. 감실에다 두꺼비를 넣는 마을에서는 두꺼비형의 윗돌을 얹었다. 전북 진안군 진안면 물곡리에서는 화재를 막아주는 화재막이 탑의 윗돌로 정교하게 조각한 돌거북을 올려놓고 있다. 거북이는 불과 상대되는 물 곧 음성적인 물동물이기 때문에 쓰인 것이다.
5) 기우재
민간신앙 중에서 제의 형식이 가장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것이 기우제이다. 기우제는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제의이기 때문에 절실하고 현실적이며, 다양한 장소(종묘ㆍ사직ㆍ신사ㆍ궁정ㆍ명산ㆍ대천ㆍ절), 주재자(主宰者)(왕ㆍ문무백관ㆍ무당ㆍ승ㆍ서민ㆍ부녀자), 대상신(천신ㆍ용신ㆍ산천신ㆍ풍운뢰우ㆍ조상신ㆍ산신) 등의 구성요건들이 서로 조합을 이루어서 행사되고 기대되는 유효성(有效性) 곧 신에게 호소화해하거나 대항하여 비를 얻거나, 혹은 유사법칙과 음양오행을 통하여 비를 유도함으로써 강우하고자 하는 등 수단과 방법이 매우 복합적이다.
(1) 주술적 기우제
<단군신화>에 보면 환웅이 풍백ㆍ우사ㆍ운사를 거느리고 곡식ㆍ인명ㆍ질병 등 360여 가지의 인간사를 다스렸다고 하였으니, 고대의 신권군주는 백성의 생존을 위해 풍년이 되기를 빌고 비가 오기를 비는 등 종교적 행사와 백성을 다스리는 일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에 의하면, "신라 진평왕 50년 여름에 큰 가뭄이 들어 장(市)을 옮기고 용을 그려서 비를 빌었으며(眞平王 五十年 夏大旱移市 龍祈雨)", 《고려사, 권 14, 오행지》에는 "현종 12년 4월에 가뭄이 들어 토룡을 만들고 무당을 모아 비를 빌었다."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무당ㆍ소경(판수)ㆍ내시를 시켜서 우단ㆍ개성대정ㆍ백악산당ㆍ한강 등에서 기우한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
성현의 《용재총화》에는 비를 비는 의식을 기술하였는데, 도성 안의 1만호의 집에서 병에 물을 채우고 거기다 버드나무가지를 꽂는다고 하였다. (이능화는 《조선무속고》에서 이러한 습속은 불교에서 유래한 것이라 하였다. 곧 불가에서는 관세음보살이 대자대비하여 괴로움과 어려움을 구하고 버드나무가지로써 감로수를 뿌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관에 명하여 '오룡제'를 지내게 하였다. 이 제의는 동교(東郊)에 청룡, 남교에 적룡, 서교에는 백룡, 북교에는 흑룡, 중앙의 종루가에는 황룡을 그려 붙이고 3일 동안 빈다. 도교의 술사를 시켜 '용와경'을 읽게 하고, 박연과 양진 등에다 범의 머리를 던져 넣었다. 창덕궁 후원이나 경회루, 모화관 등 세곳의 연못가에서는 항아리 속에 도마뱀을 넣고 띄운 뒤, 청의를 입은 동자 수십명이 징을 올리면서 버드나무가지로 항아리를 치며 "도마뱀아, 도마뱀아 구름을 일으키게 안개를 토하여라, 주룩주룩 비를 쏟아지게 하여라. 그러면 너를 놓아주마"하며 크게 소리쳤다. 그리고 시장을 남문으로 옮기고 북문을 열었으며, 방방곡곡에다 누각을 설립하고 아이들이 무리지어 비를 부르며 소리쳤다고 하였다.
위에서 보았듯이 대개 가뭄이 들면 집집마다 호로병에다 물을 가득 담고 소나무잎으로 병목을 틀어막은 채 집 문앞에 거꾸로 걸어두기도 하는데, 솔잎 사이로 물방울이 떨어지게 함으로써 비를 부르려는 유감주술이다. 이때는 집집마다 부녀자의 수만큼 병을 걸었으며, 남자들은 이 병 앞을 지날 때 부채로 몸을 가리고 가거나 등을 대고 가거나 하여 가급적 피해 가야 하는 금기가 있었다.
방뇨기우라 하여 일단의 부녀자들이 산상에 올라가 열지어 앉아서 일제히 '쉬이'소리를 내며 방뇨하는 것으로써 비를 빌기도 하였다. 그것은 부녀자들이 강변에 가서 강물을 키에 떠 담고 백사장을 달림으로써 키 틈으로 새는 물줄기를 비에 비유하고자 하는 유감주술에 기원한 것이다.
기우제에 동원되는 제주는 딸만 낳은 부인이어야 되는데, 쌍둥이 딸을 낳은 부녀자는 효험이 크다 하여 비싼 품삯을 받고 이웃 마을에 원정도 갔다. 일부 지방에서는 무당들을 모아서 속바지를 벗게 한 후 집단 난무를 추게 하였다. 이는 가뭄이 양기가 성하여 발생하는 것이므로 여성의 강한 음기로써 가뭄의 원인인 양기를 중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민속문화의 음양이원론적 발상에서 비롯한 것이다.
(2) 도덕적 기우제
관청에서는 가뭄을 포함한 천재지변은 천의(天意)를 대신하는 목민자들의 부덕한 소치 때문이라 해서 근신ㆍ반성ㆍ시혜(施慧)를 행하였다. 따라서 가뭄이 들면 금기를 행하고 원기(寃氣)를 위로함과 동시에 선행을 베풀었다.
세종때 예조판서인 신상(申商)이 고인(古人)들이 한발을 당하면 행하던 '기우행칠사(祈雨行七事)'를 계(啓)한 것에서도 그러한 자취를 여실히 볼 수 있다.
①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는 자나 생업이 없는 자를 구제한다.
② 사궁(四窮)인 홀아비 홀어미 과부 고아들을 보살핀다.
③ 부역을 줄이거나 경감한다.
④ 어진 선비를 천거한다.
⑤ 탐욕과 삿됨을 제거한다.
⑥ 과년한 남녀에게 짝을 지어 주고, 원망을 산 묘터를 처리한다.
⑦ 기름진 음식을 폐하고 풍악을 금한다.
1) 안택
가정신앙이란 공간적으로 가내에 위치하는 신적 존재인 가신(家神)들에게 가정의 평안무사를 비는 안택(安宅) 신앙이다. 안택신앙은 가정단위의 신앙이며 담당자는 대부분 주부이므로 정적이며 소박하다.
가신(家神)에는 조상ㆍ성주ㆍ조왕ㆍ터주ㆍ삼신ㆍ제석ㆍ업ㆍ철륭ㆍ칠성ㆍ수비ㆍ칙신(뒷간신)ㆍ액사령(厄死靈)ㆍ풍신ㆍ마마(손님)ㆍ문신ㆍ가업수호신(군웅) 등이 있는데, 이들은 일정한 자리를 점유하고 상호간에 사이좋게 공존하고 있다.
요즘에는 가신을 모시는 집이 거의 없지만, 상달이면 고사떡(시루떡)을 하여 성주나 터주를 위하는 집은 있다. 이처럼 가신들을 위하는 제사를 '안택제(安宅祭)'라고 한다. 예전의 안택제는 대개 떡을 해서 마루의 성주신에게 한 시루 놓고, 나머지 한 시루를 나누어서 우물ㆍ부엌ㆍ다락ㆍ마굿간ㆍ장독대 등에 놓고 축원하였다. 그리고 집안이 무사하기를 빌거나 또 기자치성을 할 때는 3되 3흡의 쌀로 떡을 해서 장독대에다 놓고 칠성님께 빌었다.
2) 가신
(1) 성주신
성주신(成造神)은 가내의 평안과 부귀를 관장하는 최고의 가택신이다. 성주를 모시는 형태는 성주단지와 종이성주가 있다. 성주단지는 안방에 놓고, 종이성주는 상량대 밑의 동자기둥에 매다는 것이 보통이다. 마루 상기둥 중간에 작은 선반을 매고 성주단지를 모시는 경우도 있다.
성주단지 안에 담는 쌀은 햅쌀을 쓰고 동전을 넣는 수도 있다. 곡식을 넣는 이유는 농사가 잘 되고 무병을 기원하는 뜻이라고 한다. 이사를 가는 경우에는 쌀은 먹고 단지는 산에 묻으며, 종이성주는 나무에 매달고 간다. 그리고 이사간 새집에는 성주단지와 종이 성주를 다시 만들어 놓는다.
(2) 조 왕
조왕신은 삼신과 함께 육아의 기능을 갖고 있으며,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하늘의 옥황상제께 고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 신으로, 부엌신ㆍ아궁이신 또는 부뚜막신이라고도 한다.
조왕신은 텃제사(안택제)를 지낼 때 성주단지와 함께 모시는데 부뚜막 위에다가 창호지와 마른 명태를 걸어 놓거나 조그마한 항아리에다가 쌀을 담아 놓기도 한다.
(3) 삼 신
삼신은 산신(産神)으로서 아기를 태워주고(잉태시키고) 또 길러주는 신이다. 삼신의 신체(神體)는 보통 안방의 시렁에 모신 곡식단지이다. 안방의 시렁 귀퉁이에 대를 걸고, 길이 1m, 폭 20cm정도를 자루 양쪽에 쌀을 넣고 그 중간을 햇대에 걸어 놓기도 하였다. 그 속에 넣는 쌀은 햅쌀이나 햇밀이다.
출산이 있으면, '삼신상'을 차린다. 상에다 물ㆍ밥ㆍ미역국 한 그릇씩을 산모 방의 장롱 앞에다가 놓고 절을 하고 부정을 가린다. 부정은 정화수를 3번 갈고 축원을 한다. 축원의 사설은 일정하지 않고 점지해 준 아기가 잘 자라도록 보살펴 달라는 내용이다. 아기가 아플 때는 미역국과 밥을 올리고 4∼7배를 한다. 삼신에게 빌 때는 물그릇 속에다 숯을 띄워 마시고, 주위에다 뿌려서 부정을 씻은 후에 비손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삼신은 원래 집안에서 살고 있는 신인데, 가정이 평안치 못하거나 삼신을 잘 받들지 않으면 집을 나가버린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아이를 낳지 못하거나 아이가 아프다는 것이다. 집을 나간 삼신할머니는 은행나무에 붙어서 사는데, 다시 모셔 들이려면 대나무를 은행나무에 대고 정성을 들여 빌면 대나무에 접신한다는 것이다. 이 대나무를 이불 같은 것으로 꼭 싸서 산모가 있는 방이나 병이 난 아이의 방에 모셔 놓으면 순산을 하고 아이의 병도 낫는다고 한다.
(4) 풍 신
'영등(靈登)' 혹은 '영동'으로도 부르는 풍신(風神)은 바람의 여신이다. 농촌에서는 풍재를 막아 달라는 뜻에서, 어촌에서는 출어 때에 풍랑을 모면하게 해 달라는 뜻에서 풍신을 모신다. 영동은 2월 1일에 내려 왔다가 2월 15일에 올라간다고 해서 이 기간을 영동기간이라 한다. 2월 1일에 비가 오면 '물영동'이라 하고 바람이 심히 불면 '바람영동'이라 한다.
풍신할머니에게 드리는 제사는 2월 1일에 지내는 사람도 있으나 대개 2월 14일 밤에 지낸다. 그 해 첫 출어 때에 잡은 고기를 부엌 구석에 걸어 두었다가 이날 제수로 쓴다. 영동이 드는 기간에는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음식물이 들어오면 먼저 풍신을 바친 후에 먹는다. 제사 때는 팥밥이나 오곡밥을 지어서 나물과 물 그리고 식구 수대로 숟가락을 놓고 제사를 지낸다. 비손을 할 때는 "풍신할머니 아무개네 터전에 오셨으니 금년 농사가 잘 되게 해 주시고 고기도 잘 잡히게 해 주시며 멀리 나간 자식이 무사하고 집안도 편안하게 돌봐 주십시요" 등으로 한다. 기도가 끝나면 제물을 조금씩 덜어서 사발에 담아 부엌시렁에 놓아두는데, 이것은 수부(또는 수배) 할머니(풍신을 모시는 시종)께 드리는 음식이다.
어떤 마을에서는 정월 그믐날에 떡을 쪄서 풍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떡을 돌린다. 그리고, 다음날인 2월 초하루에는 메를 지어 제사를 지냈다. 풍신대를 세우는 집도 있었는데 예전에는 원주군 부론면 문막 등 남한강 주변과 춘천을 비롯한 북한강 주변에서도 풍신을 더러 섬겼다.
풍신에 고나한 구전 설화가 있다. 물영동 때에는 풍신이 며느리를 데리고 내려오는 것이고, 바람영동 때에는 딸을 데리고 내려온다. 풍신이 내려올 때는 며느리나 딸 중 어느 하나를 천상에 남겨놓아야 하고 남아있는 사람은 15일 동안 베를 짜야할 의무라 있는데, 딸이 남아 있을 때는 베짜기 쉬우라고 비를 내리게 하고 며느리가 남아 있을 때는 고생하라고 바람이 불도록 한다는 것이다. 비가 오면 올이 눅어서 짜기가 쉽기 때문이다.
(5) 쇠구영신
농촌에서 가장 중요한 재산인 소를 수호하는 신이 쇠구영신이다. 마부신ㆍ군웅신ㆍ마구간신 등으로도 부르는 신에 대한 제사는 안택제를 지낼 때 함께 지낸다. 그때는 마구간에다 백설기떡이나 쇠고기 한 묶음을 매달아 놓는다. 새 옷감이 들어오거나, 베를 짜면 말코 옆을 조금 끊어서 역시 마구간 평에 매단다. 소가 새끼를 잘 낳고 무병을 위해서 구멍이 뚫린 돌을 주어다가 마구간에 걸어 놓는다.
쇠구영신에 대한 유사한 기록이 《동경잡기》에 있다. "10월 오일(午日)을 속칭 말날이라 하고 팥시루떡을 쪄서 마구간에 놓고 말의 건강을 빈다. 그러나 병오일(丙午日)에는 아니하는데, 병(丙)과 병(病)이 서로 같은 소리이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6) 대감신ㆍ장군신
두 신은 다같이 벼슬을 한 문관과 무관의 신으로서 무당굿에는 반드시 참례시키는 신격이다. 알려진 신격으로는 홍천, 횡성 등지의 서낭제 주신인 '권대감신'이 있다. 또 평강의 전씨 문중에서 신앙하던 전대감신(全大監神)이 있다.
장군신을 굴뚝신이라고도 하는데, 굴뚝으로 드나드는 재앙을 막아주는 신으로 여겨진다. 이들에 대한 제사는 굴뚝 앞에 음식을 차려 놓고 집안의 평안과 무병을 기원하였다. 제사는 지신제 때나 음력 3월 3일 혹은 칠월 칠석에 지냈다.
평강의 전씨 문중의 가신인 전대감신은 한을 품고 죽은 무속적인 신이다. 전씨들은 대감복을 만들어 상자 속에 넣고 모시었는데, 집안에 재앙이 있거나 어린아이가 아플때면 떡을 차려놓고 기도하였다. 그래서 평강의 전씨 문중 처녀들은 다른 지방으로 출가하더라도 반드시 대감복을 만들어 지니고 갔다. 그것은 '전자주'라는 조상이 영험을 나타내기 때문이라고 한다.
(7) 칙신(뒷간신)
칙신은 변소신인데, 변소각시ㆍ정낭각시ㆍ변소장군ㆍ뒷간신 등으로 부른다. 대체로 젊은 여성신이라는 관념이 많고, 악신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 여신은 머리카락이 길어 그것을 세는 것이 일인데, 사람이 변소에 올 때 갑자기 자기를 놀라게 하면 머리카락으로 뒤집어 씌워 죽게 한다고 한다. 이러한 관념은 어두운 밤 멀리 떨어져 있는 변소가 공포의 대상이 된 것에서 생겼을 것이다. 그런데 칙신이 놀라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은 한국의 재래식 화장실을 갈 때 지켜야 하는 인기척을 유도하려는 방편에서 생긴 것으로 보여 진다.
민가에서는 화장실을 지은 뒤에 길일을 택해서 밤에 변소에 불을 켜놓고 제사를 지냈다. 아이들이 신발을 빠뜨리거나, 사람이 빠졌을 때 떡과 메를 장만하여 빈다. 그렇지 않으면 칙신이 노해서 탈이 생긴다고 한다. 그것은 정신의 산만함이 변소에서까지 이른다면 평시에 사고의 위험이 있으므로 경계심을 주어 예방하고자 하는 의도로 보인다.
퍼왔음 퍼온곳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