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 년에 걸친 그의 시작은 한결같이 남성적 어조로 일관하여 생활과 자연, 애련과 의지 등을 노래하고 있다. 그의 시세계를 ‘생명에의 의지’, ‘허무의 의지’, ‘비정의 철학’, ‘신채호적(申采浩的)인 선비기질의 시인’으로 평가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생명의 긍정에서 서정주(徐廷柱)와 함께 이른바 ‘생명파 시인’으로 출발한 그의 시는 범신론적 자연애로 통하는 열애가 그 바탕을 이룬다.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한편으로는 동양적인 허정(虛靜) · 무위(無爲)의 세계를 추구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허무를 강인한 원시적 의지로 초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시에 허무 의지의 극치인 ‘바위’와 고고함의 상징인 ‘나무’가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묘지는 부산광역시 서구 하단동에 있으며, 그의 시비는 경주 불국사, 부산 에덴공원, 통영 남망공원(南望公園) 등에 세워졌다. 2000년 2월에는 경상남도 통영시 망일1길(정량동)에 청마문학관이 개관되었다.
시집으로는 『울릉도』 · 『청령일기(蜻蛉日記)』 · 『청마시집』 · 『제9시집』 · 『유치환선집』 ·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 『미루나무와 남풍』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등이 있다. 수상록으로는 『예루살렘의 닭』과 2권의 수필집, 자작시 해설집 『구름에 그린다』 등이 있다.
*친일 행적 관련 논란
2007년 이전에도 시 《수》가 일제에 의해 효시된 독립운동가를 묘사하며 일제의 논리를 옹호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있어 논란이 불거졌었다.
1942년 2월 6일자 만선일보에 기고한, 친일성이 농후한 산문(앞선 시에 비해 글의 성격이 명확한)이 2007년 10월 19일 경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태일 교수에 의해 발견되어 친일논란이 거셌다. 당시는 반 일본 정서가 유행처럼 범람하던 때라서 시류에 편성한 지나친 친일몰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때의 문인들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친일경향의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는 동정론도 많았다. 그의 형인 유치진의 적극적인 친일 행위 때문에 함께 묻혀서 욕을 먹는 면도 있다는 것이다.
그가 적극적인 친일행각을 하였다기 보다는 나약한 인텔리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는 것이 세평이다.
광복 이전에는 비교적 어렵게 살았고, 광복 이후에는 교직(경주고, 경주여고, 대구여고, 경남여고, 부산남여자상업고등의 교장)생활을 했다.
1946년에 창립 조선 청년문학가 회장, 1957년에는 초대 한국 시인협회 회장을을 지냈다. 그의 시 ‘깃발’이 교과서에 실리면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의 반열에 올랐다. 때문에 한국문학사를 말할 때 꼭 짚고 넘어가야하는 시인이다.
유치환을 유명하게 해준 사건에는 시조시인 이영도와 스캔들도 있다.
통영여중에 재직할 때 시조시인 이영도가 가정교수로 함께 근무하였다. 이영도는 21세에 남편을 잃고 딸 하나를 데리고 있었다. 문제는, 이때 유치환은 유부남이라는 사실이다. 이 둘은 서로 마음이 통하여 수많은 연애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러나 현실적인 만남은 없었다고 하였다. 편지 중에 200편 정도를 간추려서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당장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유치환을 유명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유치환은 교직 생활을 하면서, 대구에도 머물렀다. 대구의 시단은 유친환이라는 큰 별을 만나면서 소용돌이쳤다. 때문에 대구에는 그의 행적에 관한 여러 이야기들이 남아있다. 긍정적인 것도 있고, 부정적인 것도 있다. 여기서는 다만 시인으로서의 유치환만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는 ‘권영민의 글’을 통해서 그의 시 경향이 변화를 일으킨 것을 보기로 하자.
“그가 시적 감각이나 서정성보다는 관념의 과감한 도입을 꾀했던 초기의 시와는 달리 전쟁을 겪고 난 뒤 현실의 감각을 중시하면서 서정적 세계를 확대시켜나간 것은 중요한 시적 변화이다. 이러한 새로운 경향은 ‘청마시집(1954)에서도 확인된다. 유치환의 시가 관념의 세계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시적 대상을 통해 감각적 형상화의 길로 나아간 것이 확인된다.”
후기의 시에는 관념이 억제되면서 정서의 폭이 넓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