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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몽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천관산의 울창했던 나무를 베어관산읍 죽청앞 바다에서 일본정벌 전함을 만들었던 내용을 정리했다.
■ 일본 하코자키궁(箱管)에 보관 되여 있는 천관산 유물
1274년 10월 20일 몽고군 3만명은
900여척 전함을 타고 하카다(博多)항에 정박하고 일본군과 작전을 벌여 하코자키궁이 병화(兵火)에 의하여 소실 되였으나 다음날 21일 아침에는
이상하게도 항구에 정박해놓은 900여척 전함 모습은 사라져 버렸다. 일본 사람들은 이것을 신풍(神風)에 의한 것이라 전해져
온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하카다항 부근에는 몽고군함의 정석(碇石)이라고 칭하는 물건이 십 수본 있어 바다에서 인양하여 역사적
기념물로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이 정석(碇石)은 하카다항 중앙 방파제 부근 바다 에서 인양된 6본 가운데 하나이고 석질은
응회암이다.
이런 종류 석재는 몽고군함을 만들었던 전남 장흥군 남방 천관산에서 구할 수 있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하코자키신궁은
한국관광객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그러나 12세기 여몽연합군이 일본정벌을 계획하였을 때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안내판에는 신궁의 정원에
안치된 길쭉한 돌닻(길이 1.5m)은 장흥 천관산에서 채취한 돌이라고 기록 되여 있다.
군마(軍馬)는 제주도에서 보내온 말을
군마등(軍馬嶝: 현재 관산동초등학교 신동분교 폐교 부지)에서 훈련시켰으며, 전함은 300척에서 600척을 제조하려고 천관산 나무를 베어냈고 전함
닻돌은 천관산에서 석재를 채취했으며 전함을 제조했던 곳은 전남 장흥군 관산읍 죽청리였다.
700여 년전에 천관산에서 건너가 하카타만 바다
속에서 잠자고 있던
닻돌(석재)이 하코자키 신궁 정원에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 천관산 나무는 왜 벌목 되였는가?
삼별초군(三別抄軍)의 대몽항쟁도 성과 없이 끝나고 고려는 몽고에
굴욕적인 항복을 한 뒤 겨우 평화를 되찾았으나 원나라는 일본정벌을 결의하고 고려에 병사, 전선, 군량을 요구해
왔다.
장흥부사(府使:종3품직) 윤해(尹諧)로 하여금 동정전선제조감독(東征戰船製造監督)하게 하여 지금의 장흥군 관산읍 죽청리 바닷가에서
당시 울창했던 천관산 나무를 벌채하여 여원연합군 정벌 전함을 만들게 했다.
당시 고려조정에서는 오랫동안 전란으로 군량과 병사를 조공으로
받치기 어렵다고 거절했으나 약한 국력이여서 원나라의 강압에 못이겨 하는 수 없이 일본정벌에 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장흥부(府)는 고려 제17대 인종 왕비 공예태후 태생지였으며 고려 제18대 의종, 19대 명종, 20대 신종 왕
외가집이여서 고려왕실과 연결 되여 있어 일본정벌을 위한 대규모 전선을 만들게 한 주동세력은 고려조정과 연계된 공예태후 장흥임씨
후손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몽고(원)의 강압에 응하기 위해 전국의 배 만드는 기술자 15,000명이 우리장흥지역에서 일본정벌 전선을 만들
때 전라도에 가뭄이 들어 주민의 생활이 궁핍하게 되자 원나라에서는 쌀 20,000섬을 보내면서 전선제조를 독촉하여 천관산의 울창한 숲은 온통
벌거숭이 산이 되어 버렸다.
기록에 의하면 1274년 10월 일본정벌 전함을 만들도록 몽고로 부터 이미 6년 전에 요구 받았기
때문에 1268년 8월부터 천관산 나무를 벌목하여 전함을 만들었다는 증거를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고려사 세가(世家) 권 제 27
원종15년 갑술조(甲戌條)에 총관 찰홀(察忽)을 보내 감독하여 전함 300척을 건조하게 했다.
김방경(金方慶)을 동남도 도독사로 삼고
좌복야 홍녹주(洪祿?)를 천관산의 나무를 베어 일본정벌전선을 제조하는 지휘사로 파견하였으며 …(중략) …
2월에 별장 이인(李仁)을
원나라에 보내 중서성의 지시를 받아 전함 300척을 건조하는데 필요한 인부가 3만 5천명이여서 3개월간 식량은 34,312두 소요 되었다
…(하략)…
그러나, 그 당시 조선소는 현재 장흥군 관산읍 죽청리(竹靑里)였으며 지금도 조선소(造船所)터가 남아있는데 「정남진 해안도로
개설 공사」때문에 그 원형이 훼손 되였음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 일본정벌 발진기지에 진수연(進水宴) 의미 석장승을 세워야한다.
일본정벌에 실패한 후 원나라 조정은
고려에 정치적 간섭과 경제적 수탈은 말 할 것 없고 수많은 처녀와 과부까지 끌려갔다.
그중에는 원나라 순제(順帝)의 황후(皇后)가 된
기황후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호인(胡人)들의 비첩(婢妾)이 되거나 비복(婢僕)이 되어 한 많은 일생을 보냈으니 이때부터 조혼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한편 체두변발(剃頭?髮)이라는 몽고식 두발이 상류층일부에서는 유행하기도 하였다.
관산읍 소재지 쪽에서 방촌유물전시관으로
넘어가는 국도23호선 도로양쪽에 고려 말엽에 석장승 2기를 세웠다.
왜적의 침입이 극성을 부리자 회주고성의 서쪽이 약하다고 하여 동문밖에
장승을 세워 회주고성의 보허진압(補虛鎭壓)과 수호를 위해 비보(裨補)하고자 회주고성의 북문동(北門洞)에 세워진 것이다.
오른쪽 장승은
‘남장생’ 또는 ‘벅수’라고 불리우며 새겨진 글씨에 따라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이라 부르며 전체크기에 비해 몸통 둘레가 작고 각(角)을 이루
장방형으로 홀쭉한 모양을 하고 있다.
진서대장군 장승과 마주하는 장승은 몸체에 각이 없는 원통형으로 머리에 비해 몸통이 풍만하여 마치
임산부를 연상하게 하고 있어 ‘미륵’또는 ‘미륵석불’, ‘돌부처’, ‘여장승’ 등 다양하게 불리우고 있으나 글씨는 새겨져 있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고려 때 일본정벌을 위한 여원연합군이 발진하면서 발진지를 수호하고 무훈장구(武勳長久)를 빌기 위해 석장승을 세웠다는
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1274년 10월에 당시 천연적인 항구였던 관산읍 고마도 방파제에서 우리 장흥지역 등 인근연안에서 징발된
고려수군을 편성하여 일본으로 떠나보내는 진수연(進水宴) 의미를 더 부각시키기 위해 여몽연합군의 전함을 제조하였던 전남 장흥군 관산읍 죽청마을
수문(水門)근처에 고려수군 발진지 수호를 위해 석장승이나 기념비를 세워야 할 것이다.
■ <‘장흥위씨, 방촌마을
정착시기’ 일부 내용을 바로 잡습니다.>
칼럼 13 장흥 평화촌의 「백산재(柏山齋)」를 「栢山齋」으로
칼럼 14 ▼ 셋째 위덕관
1593년에 부산면 기동마을로
이거하는데「방촌으로 분가했다가」를「처가쪽」으로, 「추모제(追慕齊)」를 「저존각(著存閣)」으로
▼ 넷째 위덕화
「당동 본가를 차지하게
된다. 진사공 위곤은 위덕화가 살고 있는 당동 본가와 큰 아들이 살고 있는 회주고성 곁 별당 수각(水閣) 또는 장춘대(長春臺)를 오고가면서
살았을 것이다.」를 삭제한다.
위정철은「귀향하여」를 1623년」으로 , 집터를 풍수가 잡게 한 후에 「건축하고」를 삽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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