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북간도 용정촌 약사 (1926년 ~1927년)
1926년, 북경에서❰한국독립유일당 북경촉성회❱가 창립되었다.
북경, 상해, 광주 등 지구에서 민족주의 계열의 운동가들 사이에 파벌을 극복하고 독립운동의 대 결집을 이루자는 ❰민족유일당촉성운동❱이 동북에도 몰아쳤다.
길림에서❰한인류길학우회❱가 조직되고 ❰반제선언❱이라는 조선문 간행물이 등사로 발행되었다.
1월에 여남수, 이주화 등이 조선청년동맹과 함께 용정 시천교 교회당에서 ❰동만청년총연맹❱을 결성하였다.
2월에 동흥중학교 교원 정중섭, 박재하 등 14명이 발기하여 동만청년총연맹과 함께 좌익단체❰평우동맹❱을 결성하였다. 2월 말에 동흥중학교 이신애를 비롯한 여학생들이 동만청년총동맹의 지도 아래 ❰간도여자청년회❱를 결성하였다.
화룡현의 조선인들이 대표대회를 열고 장진태, 최정학을 대표로 세워 조선인들에게 참정권을 주고 지방 정부의 무리한 수탈을 제지해줄 것을 화룡현시에 요구하였다. 또한 가렴잡세를 징수하는 지방정부와 군경들의 폭압 행위를 중지시킬 것을 요구하여 관철시켰다.
1924년~1925년 통계에 의하면 조선인 농호는 52,078세대에서 53,321호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지주와 부농은 3,990세대에서 3,951세대로 감소되었고 자작농도 19,024호에서 18815호로 감소되었다. 중농과 빈농은 11,751세대에서 14,147호로 늘어났으며 땅이 없거나 극빈농은 17,313호에서 18,159호로 늘어났다.
1926년 6월의 일제 간고 총영사관 조사에 의하면 중국 연변지방 조선족 인구는 351,227명으로 연변 총인구의 80%선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 가운데 315,000명이 농업에 종사하여 조선인의 90%가 농사를 짓고 있었지만 조선 농민의 경작지 소유비율은 47%에 불과하고 나머지 53%는 한족이나 만족의 소유였다.
조선공산당 화요파에서 조봉암을 만주에 파송하여 일면파에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조직하였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조직에 화요파의 조봉암, 최원택과 상해파의 윤자영, 김하구 그리고 이르쿠츠크파의 김철훈이 함께 하였다.
북만구역국을 건립하여 본부를 영안현에 두고 아성, 주하, 영안, 탕원, 해림, 목단강 일대에 조직을 확장하였다.
만주총국 동만구역국은 용정촌에 본부를 두었으며 용정, 평강, 화룡, 국자가, 동불사, 왕청, 라자구, 훈춘 등지에 17개 기층 조직을 건립하였다.
용정에 조선공산당 동만구역국이 설립되어 은진중학교에도 허원규, 이영근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 지부가 결성되었다. 은진학교 투쟁은 매년 10월 1일 단군절에 전 학생들이 강당에 모여 단군을 존숭하는 행사를 치루며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는 성토를 벌임으로 시작되었다. 그들의 성토는 종교와 교육 분리를 요구하였으며 예배와 성경과목 거부로 이어졌다. 은진학교는 결국 학생들의 요구를 들어주어 성경 과목을 폐지하고 성경교사를 해임시켰다. 대성유교회가 세운 대성학교는 학우회가 학교 운영을 맡았고 천도교가 세운 동흥학교는 진보적인 교사들이 교사단을 구성하여 학교를 인수하여 운영을 하였다.
5월에 ❰간도체육회❱주최로 용정에서 제2차 간도성축구운동대회가 열렸다. 동흥중학교가 우승하였다.
6월에 용정 동흥중학교 축구단이 평양에서 열리는 제 2차 전 조선 축구운동대회에 참가하였다.
항일 소년 단체❰용정소년회❱가 발족되고 히다까 헤이지로가 용정 최초의 유치원 ❰광명유치원❱을 세웠다.
김익두 목사가 3월에 용정에 와서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철근을 휘두르는 공산주의자들의 공격을 받아 예배를 중단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1926년에 세워진 학교는 연길 소영향의 ❰오류학교❱, 연길 장백향의❰협신학교❱, 도문 최문환목사의❰광진학교❱, 훈춘의❰포태소학교❱, 연길현❰현립30교❱등 5곳이다. 연길현 현립30소학교는 당시는 연길현에 속하였으나 지금은 안도현에 속하였다.
1926년에 세워진 교회는 자료 부족으로 찾지 못하고 있다. 민족출판사에서 나온 ⌜종교사⌟ 152쪽에 보면 조직교회 33개, 미조직 교회 76개, 기도처 26개로 교회 총수가 135개로 교세가 예년보다 약해졌다.
1927년, 용정에 "성세무대"라는 극장이 들어섰고 제창병원, 연길관병원, 자혜병원, 신익병원 등 7개의 병원이 섰고 공화당, 동흥당 같은 약방들이 자리를 잡았다.
4월 상해에서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 창립총회가 열렸다. 임정옹호파, 임정개조파, 창조파, 중도파, 화요파, 상해파 등이 참석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유일독립당 상해 촉성회, 광동촉성회, 남경촉성회가 차례로 창립되었다.
3월 13일 은진중학교 졸업식에서 학교 당국이 졸업생 최성희의 졸업자격을 취소하였다. 그러자 대부분의 졸업생들이 이의서를 제출하고 졸업식장에서 퇴장하였다. 2,3학년 학생들이 최성희에게 졸업장을 수여할 것과 성경과목을 취소할 것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학감 이태준을 비롯한 학교당국은 학생들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4월 25일 박기주를 비롯한 150명의 재학생들이 자퇴서를 내고 대성중학교와 동흥중학교로 단체 전학을 갔다. 은진중학교는 학생이 몇 십 명 남지 않았고 폐교 직전에 이르렀으나 5월 초에 기독학생들을 추가로 모집하여 개학을 할 수 있었다.
4월 길림성에서 전만독립운동단체 통일회의 제1회 대표자회의가 열렸다. 4일간 회의를 하였지만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고❰시사연구회❱를 조직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길림시에서 조선 학생들이 맑스-레닌주의 연구소조를 만들었다.
용정과 두도구의 조선 군중들과 학생들이 5월 1일 국제 노동절 기념행사에 대대적인 시위행진을 하였다.
5월 1일, 동만구역국이 용정 및 그 인근의 수백 명 청년학생들을 발동하여 항일시위를 하였다. 같은 해 10월 2일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서울에서 진행 중이던 조선공산당 공판에 대한 공개를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준비하였으나 큰 비가 내려 시위를 다음 날로 미루었다. 그날 밤, 총국과 구역국 간부들이 시위방안을 토의할 대 비밀이 누설되어 만주총국과 동만구역국 29명의 간부가 체포되었다. 이에 연루된 동북기타 지구의 100여 명에 가까운 단체 간부들과 민중들이 체포구금 되었다. 이것이❰제1차간도공산당사건❱이다. 이후 연합의 공산당 조직이 붕괴되고 화요파, 서울파, 상해파, ML파 등이 각기 분립하여 각각의 만주총국과 지방 조직을 조직하였다.
왕청현의 조선인들은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하여 ❰전현향부 및 유지자협의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간민동향회❱를 설립하여 조선인과 한족 거주민 간의 갈등과 충돌을 조절하며 서로 단결과 우의를 강화하였다. 이외에도 각지에서 각종 집회를 통하여 조직적으로 조선인에 대한 중국당국의 차별정책에 대처하였다.
6월, 일본 다나까내각이 동경에서❰동방회의❱소집하고 만몽을 침략할 계획을 천황에게 올렸다.
8월, 일본이❰대련회의❱를 소집하고 중국정부에 ❰만몽각서❱를 제기하여❰만몽현안❱을 속히 결정하도록 장작림을 협박하였다.
10월, 중공 만주성임시성위가 결성되었다.
이해 가을부터 다음 해 봄까지 조선인에 대한 동북군벌의 박해가 고조를 이루어 각급 정부에서 내린 조선인의 거주, 경작을 제한하며 조선족을 구축하는데 대한 훈령과 밀령이 40여 건에 달하였다.
10월 한족노동당 중앙집행위원회, 11월에 상해에서 한국독립당 관내 촉성연합회 모임이 결성되어 유일당운동을 촉진시키기 위한 결의를 다졌다. 시사연구회는 유일당 촉성회의를 개최하기로 하고 만주에 있는 32개 단체에 대표자 파견을 요청하는 통지문을 발송하였다.
10월 2일과 3일에 걸쳐 일제가 용정과 두도구에서 군중들과 학생들을 난폭하게 체포하는 것에 반대하여 항일시위를 벌였다.
연길현 옹성나자에서 강백규, 마진 등이 국민회 재건을 추진하였다. 이는❰한족생계회❱를 통하여 용정의 구 국민회 인사들인 김영학, 정재면, 김약연, 구춘선 등이 연결되어 있으므로 가능하였다. 그러나 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강백규와 마진이 기독교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국민회를 재건하려고 했다는 것을 신뢰하기 어렵다. 당시 민족주의자들의 입지가 없어진 시점에서 연대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고. 회고록의 나오는 몇 마디 말로 역사로 정립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검증이 필요한 대목이다.
11월, 길림지구의 조선인들이 주민대회를 열고❰길림조선교민구축문제에 대한 대책연구회❱를 조직하고 12월에 귀화 조선인을 보호하며 차별하지 말고 꼭 같이 대우해줄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성(城)당국에 제출하였다. 12월, 봉천, 안동, 대련 등지의 조선인들도 대책회의를 열고❰군벌정부의 압박, 구축 정책에 저항할 것을 맹세❱ 하는 등의 결의를 하였다.
화룡현 옥석구에서 조선인이 한족지주에게 살해당하였다. 사건은 조선인들의 반차별시정운동에 박차를 가하게 만들었다. 용정과 국자가 조선유지인사들은 조선인사단협의회를 조직하고 3명의 조사원을 현장에 파견하여 조사를 진행하였다. 그 후 9월 12일에 용정에서 시민연합대회를 열고 사건의 진상을 폭로하고 중국당국과 지주의 폭행을 질책하였다.
명동학교는 여전히 종교와 교육을 분리하고자 하는 공산주의 계열의 운동가들에 의해 흔들리고 있었다.
관준언과 방지함의 제안으로 연변 4개현의 교육계, 공상(工商)계 인사들이 연합하여 ❰민성보❱를 창간하였다.
광명중학 음악교사 윤극영이 ❰예우회❱를 조직하고 각 학교 음악교사들이 창작과 평론을 할 수 있도록 ❰예우❱잡지를 창간하였으며 두루 애창되는 동요도 잡지에 실었다.
12월에 전간도의 종교계, 교육계, 문예계와 상업계 등 각계각층이 단합하는 ❰전간도조선인단체연합회❱를 창립하였다.
용정 대성중학교 청년총연맹과 대성중학교 소년 총회가 만들어 졌다.
장춘 거류민회에서 사평가에 ❰배야학교❱를 설립했다. 해림현에서도 사두가에 ❰신장학교❱를 설립했다.
1927년에 세워진 학교는 연길 ❰대암소학교❱,화룡❰명신학교❱, 화룡❰현립11소학교❱, 왕청❰중경리학교❱ 등 4곳이다.
제창병원의 마틴(민산해) 의사가 서울의 세브란스로 발령을 받아 떠나고 블랙(D.M. Blak) 원장의 자리를 이어 받아 1939년 은퇴를 할 때까지 용정에서 시무하였다.
1927년에 세워진 교회는 자료 부족으로 찾지 못하고 있다. 연변 민족출판사에서 나온 ⌜종교사⌟ 152쪽에 보면 조직교회 38개, 미조직 교회 83개, 기도처 61개로 교회 총수가 182개로 21년 북간도 동만노회 역사에서 교세가 최고조로 달하였다. 현규환의 ⌜한국유이민사 상권⌟ 530~ 534쪽에 의하면❰중남구교회❱❰도문가중앙교회❱가 설립되었다.
2026년 3월 23일 월요일 축시
우담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