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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569. [역경의 열매] 방선기 (1-34) 늘 새로운 것에 호기심… ‘일터 사역’ 또한 하나님 은혜
목회에 자신 없어 기업 사목하면서
일터 사역 시작, 건물과 프로그램에
의존치 않는 ‘가정교회’도 만들고
생경한 ‘일터 사역’ 한국교회에 알려
방선기 일터개발원 이사장이 최근 서울 마포구 사무실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를 하며 미소짓고 있다. 신석현 포토그래퍼
‘일터 사역의 대부’. 주변에서 나를 소개할 때 적잖게 붙여주는 수식어다. 이렇게 소개받을 때마다 ‘과연 내가 이런 평가를 들을만 한가’ 싶어 민망한 마음이 든다. 아마 1990년대 당시로선 생경했던 ‘일터 사역’을 한국교회에 알리고 그간 일터 사역자를 양성해온 걸 높이 평가하는 게 아닌가 싶다.
일터 사역에 관심을 두게 된 건 내 성향에서 비롯됐다. 잘하지 못하는 건 쉽게 포기하는 대신 남들이 하지 않는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았다. 직장 일이 맞지 않아 직장을 그만두고 미국 신학교로 유학을 떠난 일, 목회에 자신이 없어 기업 사목을 하며 일터 사역을 시작한 일, 기존 교회대로 목회할 자신이 없어 건물과 프로그램에 의존치 않는 ‘가정교회’를 세운 일…. 모두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강한 성향 덕이었다.
미국 유학을 다녀온 사람으로서 영어 실력이 기대에 못 미치는 걸 느끼고 많은 이가 하지 않는 프랑스어를 배운 것도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불어권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됐고 프랑스 개신교 공동체인 ‘미션 디모데’를 발굴해 한국교회에 소개할 수 있었다.
새로운 시도가 항상 성공으로 귀결되진 않았다. 하나님의 은총이 없었다면 견디기 힘들었던 인고의 시간도 많았다. 유학 시절엔 생계를 위해 한밤중에 건물을 청소했다. 낮엔 공부하고 밤엔 일하는 이 경험은 훗날 일터 사역 중 마주한 기독 직장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 대학 입학 직후부터 입시 과외를 하며 실제적인 가장으로 살아온 것도 돌이켜보면 지금의 노동관과 직업관, 일터사역관을 세우는 데 영향을 끼쳤다.
‘역경의 열매’ 제안을 받고 고민이 됐다. 내 주제에 맞지 않는 일 같아 망설여졌다. 괜히 자랑으로 비치지 않을까 우려스럽기도 했다. 그러다 내 경험이 일터에서 고군분투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조금이나마 격려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펜을 들었다.
여러 권의 책을 내고 교수도 했으니 달필에 말은 청산유수라고 여기는 분이 적잖은데 기실 그렇지도 않다. 교수 생활도 했던 목사이지만 여전히 무대 공포증이 남아있다. 서울대를 나와서 콜럼비아대학 박사가 된 이력 때문에 어디서든 환영받았을 거라 짐작하는 분도 적잖다. 하지만 귀국 후 얻은 직장에서 하루아침에 실직된 아픔이 있다는 걸 아는 이는 드물다. 50대엔 류머티즘으로 고통을 겪었고 심장 수술로 생명의 위기도 경험했다.
성경 속 신앙 선배들은 하나 같이 ‘내 삶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다. 나 역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
약력=1952년 출생, 서울대 화학공학과 졸업, 미국 리폼드신학교 신학 석사(MDiv, MCE), 컬럼비아대 교육학 박사(EdD), 전 이랜드그룹 사목, 일터개발원 이사장. 저서 ‘출근하는 작은 예수’ ‘크리스천 직장백서’ ‘미션디모데’ ‘쉬운 기독교 값진 은혜’ 등.
* [역경의 열매] 방선기 (1) 늘 새로운 것에 호기심… '일터 사역' 또한 하나님 은혜
* [역경의 열매] 방선기 (2) 구한말 증조부 때부터 믿음 다진 '찐 기독인' 집안
* [역경의 열매] 방선기 (3) "고등부 활동 열심히 해도 대학 갈 수 있다" 몸소 도전
* [역경의 열매] 방선기 (4) 복통으로 수학 시험 제대로 못쳤는데도 서울대 합격
* [역경의 열매] 방선기 (5) 후배들 입시도우미로 자청 "목사님, 방 하나 내주세요"
* [역경의 열매] 방선기 (6) 옥한흠 목사 주도로 대학부 창립… 제자훈련 방식 정착
* [역경의 열매] 방선기 (7) 국방과학장교 떨어졌지만 군 면제 조건 보충역으로 선발
* [역경의 열매] 방선기 (8) 이별 5년 만에 재회한 아내… 사랑 확인하고 백년가약
* [역경의 열매] 방선기 (9) 적성 찾아 신학 공부… 미국 신학교 유학길 열려
* [역경의 열매] 방선기 (10) 유학 기간 7년, 청소 등 육체노동으로 겨우 생활비 마련
* [역경의 열매] 방선기 (11) 기독교인의 사회참여 주제로 3년 반 만에 박사학위 취득
* [역경의 열매] 방선기 (12) 하용조 목사 도움으로 귀국 후 어려움 없이 서울 정착
* [역경의 열매] 방선기 (13) 한국 돌아와 성도교회서 대학부와 청년부 목회 맡아
* [역경의 열매] 방선기 (14) 데니스 레인 목사의 세미나 통역하며 강해설교에 눈 떠
* [역경의 열매] 방선기 (15) 노조 뜻 전하려다 하 목사에게 노여움 사고 실직까지…
* [역경의 열매] 방선기 (16) 해고 3개월 만에 이랜드 입사… 본격적 일터사역 시작
* [역경의 열매] 방선기 (17) '일터사역'으로 직장에서의 일과 생활을 믿음과 통합
* [역경의 열매] 방선기 (18) 성령이 주는 은사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다
* [역경의 열매] 방선기 (19) 안식년 앞당겨 캐나다 유학… '일터사역' 이론 정리
* [역경의 열매] 방선기 (20) "회사를 살리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돈을 주십시오"
* [역경의 열매] 방선기 (21) 기성 교회의 대안으로 확신, 제자들과 가정교회 개척
* [역경의 열매] 방선기 (22) 사교육 반대·출산 장려 등 일상신앙 실천운동에 나서다
* [역경의 열매] 방선기 (23) 기업마다 채플린 초빙해 새로운 일터사역 활성화 됐으면…
* [역경의 열매] 방선기 (24) 국내에선 생소한 '일터신학' '일상생활 신학' 강의
* [역경의 열매] 방선기 (25) 류머티즘 고통 중 심장혈관까지 막혀 죽음의 문턱까지
* [역경의 열매] 방선기 (26) 불어 정복은 아쉬웠지만 대신 프랑스 선교 비전 품어
* [역경의 열매] 방선기 (27) 초대교회 닮은 프랑스 현지 교회 '미션 디모데' 매력에 흠뻑
* [역경의 열매] 방선기 (28) 모든 사역 은퇴했지만 건강 허락하는 한 하나님 부름에…
* [역경의 열매] 방선기 (29) 신체 변화로 죽음 체감… 부활 소망의 믿음 있어 두렵진 않아
* [역경의 열매] 방선기 (30) 믿음의 사람이 범할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죄는?
* [역경의 열매] 방선기 (31) '부패의 덫' 같은 돈… 교회는 사명 위해 더 투명해야
* [역경의 열매] 방선기(32) 논란의 목사 이중직 문제… 돈 버는 목적으로 판단해야
* [역경의 열매] 방선기 (33) 돈 버는데도 꼭 필요한 성령의 열매인 '인내와 절제'
* [역경의 열매] 방선기 (34·끝) "일터사역 할 수 있게 허락한 하나님 은혜에 감사"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역경의 열매] 방선기 (2) 구한말 증조부 때부터 믿음 다진 ‘찐 기독인’ 집안
증조부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돼 세례 받고 온갖 박해 받아
부모님은 주일성수는 기본이고
매일 가정예배… 성경읽기·기도 생활화
방선기(뒷줄 오른쪽 첫 번째) 일터개발원 이사장이 어린 시절 방효천(앞줄 오른쪽 두 번째) 할아버지와 부모님, 사촌누이 등과 찍은 가족사진 모습.
우리 집안 신앙 내력을 소개하려면 19세기 구한말 시기까지 올라가야 한다. 신앙의 시조가 된 증조할아버지 방만준 영수(領袖)는 1898년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됐다.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돼 세례를 받은 초기 기독교인인 셈이다.
신앙 때문에 집성촌에서 온갖 박해를 당한 증조부는 고향을 떠나 불모지를 개간하며 5남 1녀를 키웠다. 얼마나 박해가 심했던지 이웃들이 증조할아버지 집에 불을 놓기도 했다. 여러 차례 방화 시도에도 번번이 집이 전소하지 않자 박해 세력도 점차 힘을 잃었다.
근면 성실한 성격대로 신앙생활도 철저히 한 증조할아버지 덕에 후손도 대대로 신앙인으로 자랐다. 이중 장남 방효원과 삼남 방효정, 사위 홍승한은 목사다. 방효원 홍승한 목사는 한국교회가 최초로 파송한 중국 선교사이기도 하다. 방효원 목사의 맏아들은 21년간 중국선교에 나선 한국 선교사(史)의 산증인이자 한국교회 거목인 방지일 목사다. 방지일 목사는 우리 아버지 방문일 집사의 사촌 형이어서 나는 그분을 큰아버지로 불렀다. 우리 할아버지께도 정기적으로 인사 편지를 보내곤 했다. 어린 시절에 그분이 보낸 엽서를 보며 큰아버지를 존경하게 됐다. 집안의 큰 어른으로서 조카인 나와 아내, 자녀와 손주까지 살뜰히 돌본 자상한 분이다. 우리 친척 중에 그분의 사랑을 받아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다.
뿌리 깊은 신앙 가문에서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나 역시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다. 부모님은 주일엔 일을 쉬고 평소 가정예배를 빠뜨리지 않았다. 그랬기에 주일성수는 물론이고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문화에 익숙했다. 어린 시절의 내 생활을 엄밀히 말하면 교회에 다녔다기보다 교회에서 살았다고 말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당시 출석하던 성도교회가 바로 집 앞에 있어서 매일 교회 마당을 찾았다. 성경 읽기나 성경 암송 등 주일학교 숙제를 학교공부 하듯 성실하게 했기에 착실한 어린이로 인정받았다. 돌이켜 보면 이런 삶이 훗날 신앙의 기초를 만든 게 아닌가 싶다.
부모님은 남대문시장에서 장사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한때 부모님과 4남매, 할아버지와 사촌 누나까지 총 9명이 방 두 칸짜리 집에서 지낸 적도 있다. 당시 우리는 서울 중구 회현동의 한 서민 아파트에 살았다. 일본식 아파트로 수십 개의 방이 밀집된 구조였다. 부모님은 부지런한 분들이라 식솔을 굶기진 않았지만 어려운 형편은 쉽사리 나아지지 않았다. 나중에 조금 나은 곳으로 이사를 하기도 했지만, 아버지가 운영하던 가게가 화재로 전소되면서 상황은 악화됐다. 이후로도 아버지가 친척에게 자금을 빌려 시작한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가계는 점차 기울었다.
집도 비좁고 이웃의 생활소음으로 집에서 공부하기 쉽지 않았지만 초등학교 재학 내내 좋은 성적을 유지했다. 다만 부모님이 장사하느라 학교에 올 수 없었다. 어머니가 자주 학교에 오는 아이들을 보며 약간의 열등감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역경의 열매] 방선기 (3) “고등부 활동 열심히 해도 대학 갈 수 있다” 몸소 도전
경기중 입학 후 중등부 회장 맡아
3학년 수련회 때 예수를 구주로 영접
입시철에도 교회활동하며 경기고 합격
고3 수험생 시절에도 변함없이 병행
방선기(왼쪽 세 번째) 일터개발원 이사장이 초등학교 졸업을 기념해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 당시 경기중학교 입학에 실패했다고 여긴 방 이사장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다.
“6개 틀렸다. 떨어졌구나.”
경기중학교 입학시험 직후 채점한 뒤 내뱉은 말이다. 그해엔 경기중학교 입시에서 4개 이상 틀리면 낙방이었다. 가족 모두 우울한 표정을 짓고 찍은 졸업식 사진을 보면 그땐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무척 힘들었던 것 같다. 기대감 없이 합격자 발표장을 찾았는데 놀랍게도 내 이름이 명단에 있었다. 갑자기 합격선이 낮아진 건지 아니면 내가 오답 계산을 잘못했는지는 모르겠다. 정확한 건 확인할 수 없지만 분명 내가 합격한 것은 하나님 은혜란 건 알았다. 온 가족은 물론 담임선생님도 기뻐했다.
부푼 마음을 안고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명문 학교에 입학했다는 자부심은 오래지 않아 스러졌다. 같은 반 친구의 집안이나 경제력은 시장 상인인 아버지를 둔 우리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내가 이들 가운데 성적이 월등한 편도 아니었다. 예전보다 자신 없는 모습으로 조용히 학교생활을 했다.
그러나 교회에서의 내 모습은 달랐다. 교회에선 ‘명문 중학교 학생이 교회 일도 열심’이라며 중등부 회장을 맡기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중등부 회장을 맡은 나는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다. 회지를 만든다면서 손에 검은 잉크를 묻혀가며 인쇄한 일은 지금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내 생애 가장 중요한 일은 중학교 3학년 때 수련회에서 일어났다. 무엇보다 ‘예수께서 네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말씀에 충격을 받았다. 모범생으로 살았기에 나를 위해 돌아가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처음으로 울며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했다.
당시는 본격적인 고등학교 입시 준비 철이었다. 그런데도 구원의 감격에 겨운 나는 교회와 교단 수양회를 내리 참석했다. 수양회에서 돌아온 직후 모의고사를 봤는데 너무 피곤해 도중에 잠든 일도 있었다. 참 무모했다 싶지만 하나님은 이런 나를 불쌍히 봐주신 것 같다. 경기중에 이어 경기고등학교에도 무난히 합격했다. 다시 한번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교회 고등부에 올라가서도 교회 생활을 열심히 했지만 중등부 때와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교회엔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주일에 고등부 활동을 열심히 하는 학생은 성적이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명문고에 다니는 교회 중직자 자녀가 몇몇 있긴 했지만 이런 경우 고등부가 아닌 어른 예배만 참석했다.
‘주일성수하고 고등부 활동을 열심히 해도 명문대에 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 나는 고3 수험생 때도 매주 주일예배를 드리고 오후까지 고등부 활동을 했다. 당시엔 주일 성수를 하면서 공부나 일을 해선 안 된다는 인식이 있었다. 공부를 못하니 걱정이 됐다. 이때 짜낸 묘안이 ‘영어 성경공부’다. 후배를 모아 영어 성경을 읽으며 말씀도 익히고 영어도 공부했다.
월요일에 친구들이 주말에 공부한 이야기를 들으면 조금 걱정이 되긴 했지만 나는 믿음으로 이런 생활을 계속했다. 돌이켜보면 그때 내 믿음도 기특했지만 이를 허용해주신 부모님의 믿음이 참 귀했다는 생각이 든다.
***[역경의 열매] 방선기 (4) 복통으로 수학 시험 제대로 못쳤는데도 서울대 합격
또 한번 하나님의 은혜 경험
컬럼비아대 교육대학원도
신학대 7곳 탈락뒤 합격의 영광
최선의 노력에 은총 더해진 결과
방선기(앞줄 가운데) 일터개발원 이사장이 1974년 2월 서울 관악구 서울대 교정에서 졸업식을 찾은 일가친척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요즘엔 개인의 적성에 따라 대학 전공을 정하곤 한다. 하지만 내 때는 달랐다. 문·이과를 선택한 다음 모의고사 성적에 맞춰 전공을 택했다. 나 역시 성적에 맞춰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지원했다.
대입 시험은 이틀간 치러졌다. 첫날은 수학 시험이었다. 그런데 시험 도중 갑자기 참을 수 없을 만큼 배가 아파왔다. 결국 나는 시험 도중 손을 들었다. 다시 교실로 돌아가려는데 시험 감독관이 입실을 막았다. 나갈 순 있어도 다시 들어올 순 없다는 것이다. 가장 자신 있는 수학 시험을 제대로 마치지 못했으니 그때 느낀 절망감은 이루 표현할 수가 없었다.
둘째 날 시험은 무사히 치렀다. 그렇지만 첫날의 실수를 상쇄할 정도로 잘 본 것 같진 않았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2지망이라도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이번에도 결과는 합격이었다. 엄청 기뻤지만 한편으론 얼떨떨했다. 나로서는 또 한 번 기적을 경험한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경기중·고교와 서울대 입학 과정을 이렇게 표현하니 괜한 오해를 할까 우려된다. 솔직히 젊은 시절 학벌로 인정받을 땐 나도 모르게 ‘나는 대단한 사람이구나’란 생각이 든 적도 있다. 하지만 내 실체는 내가 잘 안다. 상급학교 입학시험을 볼 때마다 매우 긴장했고 돌발상황도 있었다. 최선의 노력 너머 더해진 주님의 은총을 알기에 ‘명문 학교 입학은 하나님 은혜’라고 말할 수 있다.
훗날 미국 컬럼비아대 교육대학원에 합격한 일도 기적과 같았다. 석사 과정을 미국 리폼드신학교에서 했던 터라 신학대 위주로 박사 과정 원서를 일곱 군데에 제출했는데 모두 거절당했다. 마지막으로 지원한 시카고의 한 신학교에서도 거절 통지를 받았을 땐 정말 암담했다. 박사 과정 합격을 전제로 성도교회 장학금도 약속받고 시카고 한인교회 사역도 수락한 상황이었다. 그때 리폼드신학교 교육학 교수 한 분이 내게 컬럼비아대 교육대학원 지원을 권했다.
그에게 “지금껏 다 떨어진 제가 아이비리그 대학에 합격할 수 있을까요”라고 묻자 “이제 원서접수 하는 곳은 여기뿐”이란 답이 돌아왔다. 하릴없이 원서를 내고 결과가 나오기까지 전심으로 기도했다. 아마 내가 드린 기도 중에 가장 간절했을 것이다. 한 달 뒤 ‘입학을 승인한다’는 학교 측 전화를 받았다. 이전에 잘 알지도 못했고 알았어도 지원할 엄두도 못 냈을 학교다. 입학 후에도 도무지 내가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의 학교라고 느꼈다. 하나님 은혜 아니라면 합격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나님 은혜로 좋은 학벌을 갖췄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내 실력은 부족했음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강하게 나타났음을 알리기 위함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학벌에 대한 욕구가 만연해있다. 어떻게든 명문 학교를 가려 하고 또 보내려 한다. 기독교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각에선 좋은 학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까지 말한다. 진짜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기독교인은 이런 풍조를 거스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학벌보다 공부하고 일하는 동안 어떻게 주님과 친밀히 교제하는지에 더 관심이 있다.
***[역경의 열매] 방선기 (5) 후배들 입시도우미로 자청 “목사님, 방 하나 내주세요”
고2 때부터 시작 총 6년간 입시 과외
생활비 벌며 교회 봉사로 바빴지만
고등부 명예를 위해 입시 준비 도와
후배 4명 중 2명 연세대·서울대 합격
방선기(뒷줄 가운데) 일터개발원 이사장이 1974년 입시 준비 공동체를 꾸린 후배들과 서울 중구 성도교회에서 함께 찍은 사진. 이중 한인권(뒷줄 오른쪽)과 박성남(앞줄 오른쪽)은 교회 대학부 제자훈련의 핵심 멤버가 됐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중학생 과외를 시작했다. 고교 3학년 때는 쉬었지만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다시 과외를 시작했다. 대학 4년, 직장 시절 2년을 포함해 총 6년간 입시 과외를 했다. 과외로 번 돈은 가족 생활비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어쩌다 한 달 정도 가정교사 자리를 얻지 못했는데 그때는 마치 실업자가 된 기분이었다. 돈이 바닥나면 어쩌나 싶어 얼마나 조바심을 냈는지 모른다.
과외 아르바이트에 교회 봉사로 바빴지만 시간을 쪼개 열심히 한 게 하나 더 있다. 고등부 후배의 입시 준비를 도운 일이다. 이들의 공부를 봐주겠다고 나선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당시 교회 고등부는 입시 결과가 좋은 학생이 적어 교회 어른들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나의 서울대 합격으로 고등부의 명예는 지켰지만 아직 내가 할 일이 남았다고 느꼈다. ‘고3 후배들과 같이 지내며 공부를 봐주면 좋은 결실이 있지 않을까.’ 결심이 선 나는 목사님과 장로님을 찾아갔다. “대학입시 준비하는 고등부 학생을 위해 방 하나를 마련해주십시오.”
교회 어른들은 어린 나를 믿고 선뜻 작은 방 한 칸을 내줬다. 고3 수험생 4명에 대학생 1명이 먹고 살며 공부하는 ‘입시 준비 공동체’가 출범한 것이다. 나는 수업과 과외를 마치고 돌아오면 후배 4명의 공부를 도왔다. 이때 함께 보낸 1년은 나 자신에게도 유익한 시간이었다. 돌이켜보면 대학 신입생에게 방을 내준 교회의 용단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1년 뒤 후배 4명 중 2명인 박성남과 한인권이 연세대와 서울대 의대에 각각 합격했다. 안타깝게도 입시 공동체 생활은 1년 만에 끝났다. 교회에서 계속 진행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대학 새내기 시절 또 다른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선교단체 신앙훈련을 받은 일이다. 캠퍼스에서 한 전도자를 만났는데 이때 들은 내용이 신기했다. 복음을 짧은 시간에 아주 쉽게 전달하는 게 아닌가. 방법을 문의하자 그분은 기꺼이 나를 개인적으로 양육해줬다.
당시 우리 교회엔 대학부가 없었다. 예배 외엔 특별한 훈련을 받을 수 없었다. 영적 갈증을 느꼈던 나는 이 선교단체에서 매우 강한 신앙 훈련을 받았다. 성경 암송이나 큐티도 배웠지만 무엇보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 전도하는 훈련을 받았다. 그러다 보니 학업에 소홀해졌고 학교생활도 소극적으로 했다. 대학생으로 합당한 삶을 살지 못했다.
누군가 그때 내게 ‘왜 공부를 소홀히 하느냐’고 물었다면 아마도 ‘주님을 위해 모든 걸 배설물로 여겼다’고 답했을 것이다. 선교단체 훈련은 좋았지만 대학생으로서 정상적 삶을 살지 못한 건 여전히 아쉽다. 이는 훗날 대학생 훈련에 대해 깊이 숙고하는 계기가 됐다.
경건도 중요하지만 사역을 위한 훈련보다는 기독교인으로 책임 있는 삶을 살기 위한 훈련이 보완돼야 한다는 생각이다. 졸업하면 당장 일터 현장에 나갈 대학생에게 일과 직업에 대한 성경적 가치관은 꼭 필요하다. 그렇기에 일터에서 삶으로 믿음을 드러내는 것에 관해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
***[역경의 열매] 방선기 (6) 옥한흠 목사 주도로 대학부 창립… 제자훈련 방식 정착
허락 없이 후배들 성경 모임 이끌다가
전도사로 부임한 옥한흠 목사에 발각
보통 지도자와 달리 “우리 같이 하자”
옥한흠(앞줄 왼쪽) 목사가 성도교회 전도사 시절 서울 중구의 교회 마당에서 방선기(앞줄 가운데) 일터개발원 이사장 등 당시 대학부 청년들과 함께한 모습.
대학생 시절 유년부 전도사로 우리 교회에 부임한 분이 있었다. 대학부에 관심이 많던 그분은 어느 날 나를 불러 “함께 대학부를 시작하자”고 했다. 이 전도사가 바로 한국교회에서 제자훈련으로 유명한 고 옥한흠 목사다.
제자훈련에 대해선 숨겨진 일화가 하나 있다. 성도교회 대학부를 시작한 당시 옥 전도사는 전통적 방법대로 매주 예배를 인도했다. 그때 선교단체 훈련을 받은 나는 대학부 모임이 끝나면 몇몇 후배를 따로 모아 성경 모임을 했다. 그때는 교회 지도자가 선교단체를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기에 옥 전도사께는 따로 알리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우리 모임이 발각됐다. 보통 지도자라면 허락 없이 성경 모임을 했다고 혼냈을 것이다. 하지만 옥 전도사는 완전히 다르게 반응했다.
“왜 너희만 성경 공부하니? 우리 같이 하자.” 나중에 알고 보니 옥 전도사는 기성 교회도 못 하는 걸 선교단체가 잘하는 걸 보고 안타깝게 여겨 이렇게 반응한 것이다. 이후 대학부 성경공부는 제자훈련 방식으로 완전히 바꿨다. 선교단체 방식을 대체로 살리되 대학부 실정에 맞게 조정했다. 선교단체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고쳐 지역교회에 이식한 셈인데 무리 없이 적용됐다. 여기엔 옥 전도사의 목회 리더십이 큰 역할을 했다. 선교단체 훈련과 달리 그분은 학과 공부를 강조했다. 당시는 옥 전도사가 세속과 타협한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그분의 생각이 옳았다.
옥 전도사의 초기 제자들도 한국교회 제자훈련 정착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입시 공동체 생활을 했던 두 후배가 핵심이었다. 이와 관련해 재밌는 일화가 있다. 옥 전도사는 대학부 창립을 위해 교인 가정 중 대학생을 찾아내 이들을 창립 모임에 초대했다. 그날 나는 각종 과일을 준비해 옥 전도사가 초대한 이들을 기다렸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 명도 오지 않았다. 나도 실망했지만 그분의 심정은 더 힘들었을 것이다. 안 되겠다는 생각에 함께 살던 고3 후배들을 불러 과일을 함께 먹었다. 이때 왔던 후배들이 대학부의 주춧돌이 됐다. 입학 후 대학 친구들을 교회로 인도했기 때문이다. 한정국 선교사와 박성수 이랜드 회장 등 대학생 12명이 이렇게 성도교회로 모였다. 훗날 이들이 옥 전도사의 제자훈련 사역의 기둥이 됐다.
대학 생활 초기엔 선교단체와 교회 대학부 사역을 병행했지만 3학년이 되면서 대학부에만 전념했다. 제자훈련 1호였던 나는 후배를 양육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당시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성도교회 대학부에는 고등부에서 바로 올라온 학생도 있었지만 외부에서 온 이들이 더 많았다. 이 두 집단 간 미묘한 갈등이 있었다. 외부에서 온 이들은 대부분이 명문대 학생이었다. 반면 고등부에서 온 학생은 재수생이거나 고등학교 졸업 후 곧장 직장에 간 이들이 꽤 됐다. 당시 대학생은 재학 중인 대학교 배지를 달았는데 이게 갈등을 조장한다고 봤다. 나는 대학생 후배들에게 교회에선 배지를 떼자고 했다. 별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불평등 문제를 풀려고 애쓴 시도였다.
***[역경의 열매] 방선기 (7) 국방과학장교 떨어졌지만 군 면제 조건 보충역으로 선발
성실 근무하며 국방부서 상도 받고
열정적 전도 양육으로 동료들에 복음
6개월간 프랑스 연수 특별한 경험과
연구소 근무는 일터사역의 기초 돼
방선기(앞줄 왼쪽) 일터개발원 이사장은 1975년 국방과학연구소 재직 당시 6개월간 프랑스의 보르도 지역 공장 등에서 연수했다. 사진은 공장 직원 초청 만찬에 참여한 모습.
공부는 별로 하지 않고 교회 사역만 열정적으로 했기에 학교 성적은 형편없었다. 직장 선택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당시 군대 문제가 중요했기에 군 복무를 쉽게 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 선택지에 과학원이 있었지만 내 실력으론 어려워 대신 국방과학장교를 지원했다.
막상 지원 상황을 보니 과 동기 중에 꽤 많은 인원이 국방과학장교에 지원했다. 이를 확인한 순간 낙담이 됐다. 내 성적으로는 도저히 이들을 이길 수 없었다. 발표 날 확인해 보니 예상대로 과학장교로 동기 두 사람이 합격했고 나는 불합격했다.
그런데 합격자 이름 옆에 내 이름을 포함해 몇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이 사람들은 사무실에 들르라는 메시지도 있었다. 찾아가니 군대 면제 조건으로 일하는 보충역을 선발하는데 그 후보자로 우리가 선정됐다는 게 아닌가. 국방과학연구소에서 5년간 근무하면 군대 면제란 말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수락했다. 시험엔 불합격했지만 다른 방식으로 국방과학연구소에 합격한 것이다. 이 또한 하나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대학생 때는 공부를 배설물처럼 여겼지만 직장에서는 완전히 달라진 태도를 보였다. 엔지니어로서 능력은 별로 없었지만 성실하게 일한 덕분에 승진도 잘하고 학창 시절 한 번도 받지 못한 표창도 받았다. 국방부에서 상도 받았다.
일만 한 게 아니라 대학 시절 훈련받은 대로 전도와 양육도 열심히 했다. 실험실 동료를 전도하기도 했고 같이 사는 후배에게도 복음을 전했다. 당시는 연구소가 대덕단지에 있어 기숙사 생활을 해 가능했던 일이다. 믿음이 생긴 이들과는 성경공부도 했다.
연구소 월급이 충분한 편이라 오랜만에 경제적 안정감을 느꼈다. 연구소 사람도 학교 선후배 같아서 비교적 어려움 없이 직장생활을 했다. 6년간의 연구소 경험은 나중에 일터사역을 하는데 중요한 기초가 됐다.
이때의 특별한 경험은 6개월간 프랑스 연수를 간 것이다. 당시만 해도 군인은 해외로 나갈 수 없었다. 과학장교에 떨어진 덕분에 민간인 신분으로 연수를 다녀올 수 있었다. 1975~1976년 당시엔 출국 자체가 엄청난 특혜였다.
연수를 마친 후엔 언어는 물론 프랑스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졌다. 그러다 지난 2009년 건강이 악화해 안식년을 떠날 때 희미해진 프랑스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안식년을 기회 삼아 프랑스로 가 1년간 언어연수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선교에 대한 비전도 갖게 됐다. 수십 년 후 선교 비전도 심어준 연구소 생활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간이 아닌가 싶다.
이 기간엔 슬픈 사건도 있었다. 프랑스 체류 중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해외를 쉽게 나가던 때가 아니라 회사는 부고를 전하지 않았다. 연수를 마치고 김포공항에 도착한 나를 마중 나온 교회 성도들에게 아버지가 2개월 전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접했다. 집에서 어머니를 마주하며 지나간 슬픔을 되새길 수밖에 없었다. 부활해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확신으로 겨우 슬픔을 극복했다. 이 경험은 비슷한 아픔을 겪는 분을 위로할 때 도움이 됐다.
***[역경의 열매] 방선기 (8) 이별 5년 만에 재회한 아내… 사랑 확인하고 백년가약
연애보다 신앙훈련에만 힘쓰기 위해
대학 재학 중엔 연애 않기로 했지만
첫 눈에 반한 대학부 2년 후배와 교제
결혼하고 싶은 마음에 청혼하는데…
방선기(오른쪽) 일터개발원 이사장이 1979년 신혼여행으로 떠난 제주도에서 아내와 함께한 모습.
한때 교회는 ‘연애당’이라고 불리곤 했다. 남녀가 대체로 분리돼 있던 중·고등학교와 달리 교회에선 남녀 청소년이 스스럼없이 어울릴 수 있었다. 교회 중·고등부 활동에 적극적이던 나였지만 이성에게 호감을 표하거나 사귀는 일은 멀리했다. 가뜩이나 ‘연애당’ 소리를 듣는데 중·고등부를 이끄는 나까지 연애 대열에 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호감 가는 여학생이 있어도 속으로만 좋아하고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연애를 멀리하는 기조는 대학부에서도 이어졌다. 우리 교회는 대학 재학 중 연애하지 않는 걸 권장했다. 연애보다 신앙훈련에 힘쓰자는 취지였다. 지금 시각에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나 역시 여기에 공감해 ‘교회 연애’를 멀리했다. 그렇다고 학교에서 누군가를 사귄 것도 아니다. 미팅도 나가봤지만 처음 만나 대화하는 자리가 어색해 한 번 나가고 그만뒀다.
이랬던 내가 생각을 바꾼 건 아내를 만나고부터다. 아내는 대학 4학년 때 같은 교회를 다닌 박성수 현 이랜드그룹 회장과 연세대를 찾았다가 처음 만났다. 한 무리의 여학생 속에 있었는데 아내만 홀로 빛났다. 알고 보니 교회 대학부 2년 후배였다. 이런 강렬한 첫 만남 이후 나는 아내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고 곧 교제하는 사이가 됐다.
첫눈에 반한 여성과 교제를 하다 보니 결혼 생각이 절로 들었다. 사귄 지 얼마 안 돼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대학 2학년생에게 결혼은 너무 무겁게 다가왔을 것이다. 부담을 느낀 아내는 얼마 뒤 이별을 고했다. 실연의 고통은 상상 이상이었다. 사랑 때문에 자살하는 이들의 마음이 이해됐다. 하나님 뜻을 알 순 없지만 기도로 아픔을 이겨내고자 노력했다.
얼마 뒤 국방과학연구원에 취업해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 실연의 아픔도 점차 아물어 갔다. 여성에게 데이트 신청도 몇 번 받았지만 ‘대화가 통하는 사람’을 찾다 보니 인연을 찾기 힘들었다. 그러던 중 아내와 재회했다. 헤어진 지 5년 만이었다. 다행히 미혼이어서 다시 만남을 이어갈 수 있었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우리는 곧 약혼하고 1979년 3월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나는 27세, 아내는 25세였다. 이후 우리는 45년째 부부의 연을 이어가고 있다.
헤어진 지 5년 뒤에 아내와 백년가약을 맺으며 배운 게 있다. 결혼에 있어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땐 상대가 누구인지만 고려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주님의 뜻을 찾으며 결혼 과정을 준비해야 하고 시기도 그분께 맡겨야 한다. 내 경우는 하나님께서 5년의 시간을 두고 결혼 훈련을 시킨 게 아닐까 싶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만나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하는 건 정말 엄청난 일이다. 결혼 생활은 한쪽만 잘해준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두 사람이 겸손한 태도로 마음을 모아야만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다.
겸손히 상대를 배려하는 자세는 결혼 후에도 중요하다. 자녀의 삶에 부부관계가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자녀 인생의 행복과 불행은 부모의 부부관계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경의 열매] 방선기 (9) 적성 찾아 신학 공부… 미국 신학교 유학길 열려
직장 흥미 잃고 적성 안 맞아 고민 중 대학 시절 성경 공부 가르친 일 떠올라
신학교 찾던 중 우연히 사촌 형이 보낸 미국 신학교 책자 본 후 유학에 관심
미국 미시시피주 잭슨에 있는 리폼드신학교 교정에서 포즈를 취한 방선기 일터개발원 이사장. 방 이사장은 1980년부터 4년간 리폼드신학교에서 유학했다.
국방과학연구소에서의 직장생활은 만족스러웠지만 마음 한편엔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을까’란 불안감이 있었다. 일할수록 엔지니어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확신이 굳어졌다. 주변의 칭찬과는 별개로 재미없는 일을 하자니 능률도 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내 실력이 동료나 선후배보다 뒤처진다는 게 느껴졌다. 탁월한 이들은 현장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연락을 받는 즉시 문제의 핵심을 파악해 대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나는 문제 자체도 파악하기 버거운 경우가 많았다. 뛰어난 이들 가운데서 무능력한 모습을 보이자니 점점 자괴감이 들었다.
흥미도 능력도 없는 분야에 계속 있는 건 인생의 낭비란 생각에 내가 하고 싶고, 잘하는 일을 찾아보기로 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대학 시절 성경을 공부하고 가르친 일이 떠올랐다. 신학교에서 기독교 교육을 배운다면 성경을 잘 가르칠 수 있으리란 판단이 들었다. 가족 부양을 위해 직장을 다녀야 했으므로 퇴근 후 다닐 야간 신학교를 찾았지만 쉽사리 길이 열리지 않았다.
처음 신학을 공부하려 했을 땐 유학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나고 보니 하나님은 이전엔 알지도 못했던 미국 남부의 신학교로 나를 이끄셨다. 미국 신학교에 다닌 외사촌 형이 보내온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책자를 집에서 우연히 본 게 계기였다. 미국 신학교에 그저 궁금했던 몇 가지를 적어 편지를 썼는데 아주 친절한 답장이 돌아왔다. 이때만 해도 한국은 세계 수많은 개발도상국 중 하나였다. 가난한 청년의 질문을 외면치 않는 미국 신학교에 관심이 갔다. 이후 미국 신학교 10곳에 ‘기독교 교육을 배우고자 한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커버넌트신학교에서 ‘교육학에 관심 있으면 리폼드신학교를 추천한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용기가 생긴 나는 리폼드신학교에도 편지를 보냈다. 몇몇 신학교에서 긍정적인 답변이 왔는데 이중 휘튼신학교와 리폼드신학교가 마음에 들었다. 신학교지만 교육학이 개설된 대학이어서다. 나는 넉넉한 장학금을 제시한 리폼드신학교로 진학하기로 했다. ‘짧더라도 국내 신학교를 경험해보라’는 교회 배려로 총신대에서 한 학기 공부하며 전도사로 활동할 기회도 얻었다.
미국 유학을 앞두자 어머니는 가장 아쉬움을 표했다. 오랜 시간 가장 역할을 한 아들을 평소 의지해 온 터였다. 그렇지만 동생들도 대학생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가정 경제에 일조하고 있어 다소 가벼운 마음으로 1980년 직장을 그만두고 아내와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퇴직금 절반은 어머니께 드렸기에 우리 부부는 빈털터리나 다름없었다. 일을 병행하며 고되게 학교를 다녔음에도 공부가 재미있어 기독교 교육이 적성에 잘 맞는 분야임을 깨달았다.
당시도 그랬지만 지금도 나는 엔지니어보다 목회자가 더 영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내가 공학보다 기독교 교육 분야를 더 좋아하고 잘했을 뿐이다. 기독교인이라면 분야에 상관없이 자신이 일하는 현장에서 영성을 키워가고 하나님과 교류할 수 있다.
***[역경의 열매] 방선기 (10) 유학 기간 7년, 청소 등 육체노동으로 겨우 생활비 마련
일하느라 지쳐 예배시간엔 늘 숙면의 장
이민국 조사로 일식집 일하던 아내 사직
생계 캄캄했지만 둘째 딸 임신 경사 생겨
방선기 일터개발원 이사장이 미국 리폼드신학교 유학 기간 일했던 세탁소 모습. 여기서 일하며 받은 주급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미국 리폼드신학교에선 장학금만 지급했기에 생활비는 일해서 충당해야 했다. 박사 과정을 포함해 유학 기간 7년 반 내내 넉넉하게 살아본 기억이 없다. 월세와 식비를 겨우 마련해 지내는 나날이 이어졌다. 옷이나 장난감은 모두 중고로 해결했다. 병원이나 약국에 가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유학 초창기엔 이른 아침 고깃집에 출근해 고기를 굽는 일을 했다. 토요일에 일했는데 잠깐 눈을 붙이고 교회로 가면 예배시간에 자주 졸곤 했다. 육체노동자에게 예배 시간은 경청이 아닌 숙면의 장이 될 수 있음을 이때 알았다. 열심히 일하다 온 이들이 예배시간에 졸더라도 목회자는 그 형편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내가 일본 식당에서 일하며 내게도 공부할 시간이 조금 생겼다. 아내 대신 나는 첫째 육아를 도맡았다. 2년여간 생계 전선에 나선 아내는 이민국이 조사를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일을 그만뒀다. 급작스러운 아내의 사직으로 눈앞이 캄캄했지만 곧 경사가 생겼다. 아내가 쉬는 동안 둘째 딸을 임신한 것이다. 만일 이민국이 조사를 나오지 않았다면 딸을 못 봤을지도 모른다.
다시 세탁소와 건물 청소 등의 육체노동을 하며 주급을 받아 생활비를 마련했다. 이때 한 일 중 가장 힘들었던 건 사무실과 화장실 청소였다. 모두 퇴근한 오후 8시부터 자정까지 2개 층을 돌며 곳곳을 청소했다. 체력 소모뿐 아니라 스트레스도 심한 일이었다. 쓰레기통을 비울 때 캔에서 다 마시지 않은 음료가 줄줄 샐 때면 분노가 일었다. 바닥 청소를 다시 해야 했기 때문이다. 사무실 바닥의 스테이플러 조각을 일일이 주울 때면 절로 한숨이 나왔다.
“주님, 공부하러 미국 왔는데 이곳 화이트칼라 뒤치다꺼리하느라 공부할 시간도, 체력도 없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말씀이 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 이 깨달음을 얻은 뒤론 청소하거나 빨래를 갤 때도 예배하듯 최선을 다했다. 같이 일하는 미국인과도 가깝게 지내며 삶과 신앙 가운데 노동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됐다. 책상에서 배울 수 없는 깨달음을 몸으로 얻은 경험이었다.
유학 기간 일하지 않았다면 지금 일터사역의 바탕이 된 노동관과 직업관을 세우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신학생이 책상에서 공부만 하는 걸 반대해왔다. 20여년 전부터 나름 ‘목회자 이중직’을 주장한 셈이다. 목회자도 일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평신도의 삶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만 이 생각을 밖으로 전하진 못했다. 당시 한국교회엔 ‘목회자는 신학 공부에만 매진해야지 일해선 안 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이 주제로 대화하다 나와 생각이 다른 후배 목회자와 갈등이 생긴 일도 있다. 지금도 나는 경제적 필요가 있다면 목회자가 일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일터 영성이 깊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역경의 열매] 방선기 (11) 기독교인의 사회참여 주제로 3년 반 만에 박사학위 취득
모교회 성도교회서 장학금 지원받고
컬럼비아대 교육대학원 박사과정 합격
영어와 교육학적 기초가 부족했지만
매일 전공 책과 씨름하며 논문 완성
방선기 일터개발원 이사장이 1986년 박사 과정 중이던 미국 컬럼비아대 교육대학원 건물 입구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리폼드신학교에서 4년간 교육학과 신학을 수학한 뒤 타 학교 교육학 박사 과정에 도전했다. 성적도 나쁘지 않았고 미국 대학원 입학능력시험(GRE) 점수도 높아 지원한 몇몇 신학교에 무리 없이 진학할 것으로 봤다.
박사 과정 지원서를 낸 뒤엔 모교회인 성도교회에 장학금 지원을 부탁했다. 경제적 부담이 커서 한 부탁이었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뜻밖에도 당회는 장학금 지원을 결정했다. 이제 대학원 입학 소식만 전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지원한 학교에선 불합격 소식만 들려왔다. 시카고 트리니티신학교에서 입학이 거절됐을 땐 크게 낙심했다. 합격을 예상하고 시카고 한인교회 전도사 사역도 약속해 놓은 상태였다. 리폼드신학교 담당교수가 마지막 기회라며 제시한 컬럼비아대 교육대학원에 지원은 했지만 붙을 자신이 없었다.
장학금은 있지만 정작 갈 대학이 없는 상황에 다다르자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렸다.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계속 기도하면서도 여러 염려에 시달렸다. 한 달 뒤 전화로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땐 정말 날아갈 듯 기뻤다.
입학의 기쁨도 잠시였다. 박사 과정에 들어가자 박식한 동료들과의 실력 차에 이내 주눅이 들었다. 학부에서 공학을, 석사 과정에서 신학과 교육학을 전공한 나는 타 학생보다 교육학적 기초가 부족했다. 여기에다 영어도 능숙치 않으니 매 수업을 따라가는 것 자체가 힘겨웠다. 교육학 전공 책을 읽어오는 것 자체도 버거웠는데 동료들은 이를 완벽히 이해한 채 수업에 들어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주변에선 명문대 다닌다고 부러워했지만 수준에 넘치는 학교에 들어간 탓에 나는 매일 전공 책과 씨름하며 애면글면 공부했다.
내가 준비한 박사 논문 주제는 ‘교회 교육과 커리큘럼’이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성인을 길러내는 교육에 대한 수업을 들으며 ‘한국 복음주의 기독교인의 사회참여 현실과 대안’으로 주제를 바꿨다. 한국교회 주류인 복음주의 기독교는 사회를 책임지는 기독교인을 육성하는 데 다소 부족함이 있었다는 판단에서다.
논문은 민주화운동 대신 성경공부에 투신한 내 대학 시절의 반성문이기도 하다. 1970년대 초반은 대학생의 사회참여가 절실히 요구됐된 시대였다. 이에 응하는 학생도 많았지만 나는 그저 ‘이건 아니다, 아니다’만 하다가 성경공부에 나섰다. 이게 내 수준이었고, 한국 복음주의 기독교의 수준이었다. 마음 한편에 상존한 이 부채감을 조금이라도 갚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논문을 준비했고 3년 반 만에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기독교인의 사회참여를 다룬 이 논문은 훗날 일터사역의 이론적 틀로 활용됐다. 여기서 말하는 기독교인의 사회참여란 주어진 일터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것을 뜻한다. 이는 곧 로잔언약의 사회참여로도 연결된다. 어렵게 쓴 교육학 박사 논문이 일터사역에도 활용될 줄이야. 하나님의 계획안에선 쓸모없는 일이 하나도 없다.
***[역경의 열매] 방선기 (12) 하용조 목사 도움으로 귀국 후 어려움 없이 서울 정착
방선기 일터개발원 이사장이 1986년 미국 컬럼비아대 교육대학원 유학 중 사역했던 뉴욕중부교회의 유년부 학생들과 함께한 모습.
미국 컬럼비아대 박사 과정을 공부하며 뉴욕 한인교회 전도사로 섬겼다. 교육학을 전공하지만 교회 사역도 계속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나는 1986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뉴욕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뉴욕에서는 교회 2곳에서 사역했다. 한 교회에선 유년부를, 다른 교회에선 중고등부를 맡았다.
유년부에선 주로 교사 훈련에 힘을 쏟았다. 어린이 예배에 익숙지 못해 설교 준비를 할 땐 교사의 도움도 받았다. 중고등부 지도는 유년부보다 더 힘들었다. 청소년 지도법을 잘 모르는 것도 문제인 데다 영어도 서툴러 교포 자녀와의 의사소통이 힘들었다. 명색이 교육학 전공자였지만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두 교회에서 내가 성도를 지도했다기보단 하나님이 이들을 통해 나를 훈련했다고 생각한다.
한인교회 부교역자를 하며 즐겁고 행복한 기억도 많았으나 갈등을 겪은 일도 있다. 뉴욕의 한 교회에서 사역 도중 불합리한 점을 목도한 나는 주변에 이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이를 접한 담임목사가 나를 불러 책망했고 나는 바로 사의를 표했다.
사표를 낸 뒤 이 교회를 당장 떠나는 게 맞는지를 놓고 기도했다. 기도 중 얻은 결론은 “목사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후 떠나자”는 것이었다. 담임목사에게 용서를 구한 나는 한 달 뒤쯤 사임 뜻을 전했다. 그 결과 성도에게 인사도 전하고 담임목사에게 식사도 초대받으며 아름답게 사역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뉴욕 유학 시절 잊을 수 없는 추억이 하나 더 있다. 고(故) 하용조 목사와의 인연이다. 유학 시절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했던 나는 종종 하 목사가 세운 두란노서원 미국 동부지사를 찾아 일을 도왔다. 주로 책을 주문받고 배송해주는 일이었다. 두란노서원이 발간하는 잡지 ‘빛과 소금’에도 가끔 기고했다.
박사 학위를 마치고 귀국을 앞둘 때였다. 하 목사가 한국에 오면 두란노서원에서 같이 일해보자는 제안을 했다. 목회도,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도 모두 자신 없어 고민하던 내게 단비 같은 제안이었다. 하 목사는 귀국 한 달 전부터 내가 혼자 쓸 사무실과 책상을 마련했다고 한다. 당시 두란노서원 직원들은 ‘방선기 목사가 누구이기에 하 목사님이 저렇게 기다리느냐’며 나를 무척 궁금해 했다고 한다.
***[역경의 열매] 방선기 (13) 한국 돌아와 성도교회서 대학부와 청년부 목회 맡아
미국서 새롭게 깨닫고 관심 두게 된
‘기독청년의 사회 참여’를 가르치려다
복음주의 신앙이 아닌 세속 운동권의
영향 받은 학생들을 보며 계획 접어
방선기(앞줄 왼쪽 다섯 번째) 일터개발원 이사장이 1990년대 초반 성도교회 청년부 수련회가 열린 충남 공주시 학봉교회에서 성도들과 함께한 모습.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자 모교회인 성도교회에서 대학부와 청년부를 맡아 달라고 제안했다. 대학부로 활동할 땐 전도와 제자훈련밖에 몰랐던 나였지만 박사과정 공부를 하면서 복음주의 교회의 사회 참여에도 관심을 두게 됐다. 이에 관해 박사 논문도 썼으니 한국에 돌아가면 이전과는 다르게 기독 청년의 사회 참여에 대해 가르치리라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막상 돌아와보니 교회 대학부는 내가 있을 때와는 달리 큰 변화를 겪은 듯했다. 교회 내에도 운동권 활동이 활발해져 꽤 많은 대학부 학생이 사회 참여에 적극 나서고 있었다. 다만 이들의 사회 참여 열정이 기독교 복음주의 신앙에서 나왔다기보단 세속 운동권의 영향을 받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교회로선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측면이 있었다. 이 세대는 최근 우리 사회에 막강한 영향을 미친 ‘386세대’다.
이들에게 미국에서 새롭게 깨달은 ‘복음주의 교회의 사회 참여’를 가르치려 했던 내 계획은 수포가 됐다. 결국 대학부 목회는 이들에게 이전에 내가 받은 기본적인 경건 훈련을 가르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도 참 아쉬운 경험이다. 개인적으로는 기독 시민운동단체인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공명선거운동 등 이전엔 생각지 못했던 교회의 사회 참여에 동참했다. 하지만 기독 청년에게 새로운 정신을 함양하는 일에는 실패했다고 본다.
더구나 대학부 사역 초기엔 두란노서원에서 문서 사역도 병행했기에 대학부에만 온전히 집중하지도 못했다. 그래도 감사하게 생각하는 건 대학부 사역 당시 함께했던 제자들이 나중에 동역자로 성장한 것이다. 이들은 이후 내가 이끈 가정교회의 중심 멤버가 됐고 일터 사역에도 지금껏 동행하고 있다.
이런 경험 때문인지 교회 대학부 사역이나 대학 캠퍼스 사역에 항상 빚진 느낌이 든다. 나는 선교단체의 캠퍼스 사역과 교회 대학부 사역의 수혜자다. 이들의 교육을 받고 영적으로 자라나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다. 그렇기에 현재 일선 교회 대학부나 캠퍼스 사역이 예전 같지 않은 걸 보면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러던 중 지난 2020년 대학교회를 섬기는 몇 분 목회자와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이들과 대화하며 ‘대학교회가 캠퍼스 사역의 대안이 될 것’이란 판단이 들었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은 물론이고 성도교회 대학부를 지도하던 때만 해도 캠퍼스 사역단체와 교회 대학부의 활동이 정말 왕성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시대가 변했다는 걸 실감한다. 변화하는 시대에 걸맞은 사역이 필요한 만큼 이를 위해 대학 안에 자리를 잡은 교회가 긴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대학교회연합회’란 법인을 결성하고 출범하는 데 참여한 이유다.
한국교회를 찾는 다음세대의 발길이 점차 뜸해지고 있다. 한국교회 내 ‘가장 중요한 선교지는 다음세대’란 목소리가 나온 지도 오래다. 이제라도 캠퍼스 사역의 부흥을 위해 한국교회가 대학 캠퍼스 내에 대학교회를 세우는 일에 헌신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역경의 열매] 방선기 (14) 데니스 레인 목사의 세미나 통역하며 강해설교에 눈 떠
레인 목사 강해설교 세미나 주관하면서
섭외한 통역사가 매끄럽게 전달 못하자
대타 통역 맡으며 설교에도 관심 생겨
방선기(왼쪽 세 번째) 일터개발원 이사장이 1990년 서울 용산구 온누리교회에서 두란노서원이 개최한 성경공부 세미나를 이끄는 모습.
두란노서원에 몸담은 기간은 3년 남짓이지만 이때의 사역은 내 생애에 있어 큰 비중을 차지한다. 나는 두란노서원에서 ‘큐티 세미나’와 제자훈련을 프로그램화한 ‘일대일 양육 세미나’ 등을 기획했다. 일대일 양육 세미나 교재는 내가 받은 제자훈련 방식에 기독교 세계관을 반영해 만들었다. 이는 세미나에 참석한 목회자의 제자훈련 교재로 활용됐다. 벌써 30년 전 일이다. 지금도 이 교재가 제자훈련 용도로 쓰인다니 그저 감사할 뿐이다.
두란노서원에서 기획한 사역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강해설교 세미나’다. 신학교에 진학했음에도 목회할 생각은 따로 없었다. 무엇보다 설교가 부담스러웠다. 더욱이 졸업 후엔 교육이나 문서 사역을 하리라 예상했기에 설교학엔 관심도 두지 않았다.
이랬던 내가 강해설교의 대가인 데니스 레인 목사의 강해설교 세미나를 주관하게 됐다. 세미나를 위해 유명 통역사를 섭외했는데 현장에서 들어보니 전달이 매끄럽지 못했다. 대타를 급하게 찾던 중 내가 통역자로 나서라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미국에서 유학하긴 했지만 자유자재로 영어를 구사하는 수준은 아니었기에 통역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럼에도 급박한 상황 탓에 어쩔 수 없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이후로 레인 목사의 세미나 통역을 계속 맡게 됐다. 세미나 통역을 한 것 자체도 신기했지만, 더 놀라운 건 통역을 하며 레인 목사의 강해설교를 배운 것이다. 레인 목사의 강해설교 세미나로 가장 큰 도움을 얻은 사람은 바로 나일 것이다. 통역하며 강해설교를 배웠고 설교에도 관심이 생겼다.
레인 목사의 설교법은 신학교에서 배운 것과 달리 아주 단순했고 배우기도 쉬웠다. 나중엔 이 방법을 내게 맞게 수정해 설교 세미나도 열었다. 여전히 내게 설교는 어려운 과제이고 대중을 대상으로 설교하는 건 쉽지 않았지만, 설교자에게 설교 준비를 하는 법은 알려줄 순 있었다. 이때 익힌 설교법은 신학교 강의에도 활용했고 나중엔 정리해 책으로도 발간했다. 이 책이 1999년 두란노서원에서 펴낸 ‘설교하기는 어려워도 설교 준비는 즐겁다’이다.
목회자에게만 이 설교법을 가르친 건 아니다. 내가 사목으로 있던 이랜드에서 직원과 성경공부를 할 때도 이를 가르쳤다. 가정교회 성도에게도 가르쳤다. 이 설교법을 익힌 이들이 제법 설교를 잘하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다. 신학 지식이나 원어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더라도 하나님 말씀에 충실하게만 준비한다면 누구나 어렵지 않게 설교할 수 있다.
이외에도 두란노서원서 했던 ‘직장선교 세미나’가 기억에 남는다. 평소 기독 직장인을 돕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여겼지만 지역 교회는 물론 신학교에서도 관련 교육은 찾을 수 없었다. 그랬기에 두란노서원에서 새롭게 시도하고 싶었다.
두란노서원에서 마지막 사역이 된 직장선교 세미나엔 꽤 많은 이들이 참여했다. 직장선교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이 열정만으로 시작한 세미나여서 참석자의 갈증을 채우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럼에도 관심을 표하는 이들이 적잖은 걸 보며 그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방선기 (15) 노조 뜻 전하려다 하 목사에게 노여움 사고 실직까지…
두란노서원 직원이 노동조합 결성하자
개인적으론 반대지만 원만한 해결위해
선의로 한 행동이 배은망덕하게 비쳐져
방선기(왼쪽 세 번째) 일터개발원 이사장이 1990년 두란노서원 야유회에서 직원들과 함께한 모습.
두란노서원에서의 생활은 정말 행복했다. 일단 하는 일이 재미있었다. 배우려는 열의를 가지고 온 이들을 가르치는 일도 그랬고, 잡지를 편집하고 글을 쓰는 것도 즐거웠다. 일도 재밌는데 안팎에서 인정도 받으니 그야말로 신이 났다. 먼저는 나를 추천한 하용조 목사가 그랬고 세미나에 참가한 여러 목사와 성도 역시 나와 내 사역을 인정하고 지지해줬다.
당시 어느 모임에 가든지 소개를 하면 내 이름을 아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어쩌다 나를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언짢아졌다. 인정에 취하다 보니 교만해졌다. 난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변한 것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나를 손보셨다. 1990년 두란노서원 직원이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일이 생겼다. 이 소식을 듣고 정말 당황했다. 하용조 목사는 이에 대로(大怒)했다. 나는 세속 사회에서 회사 직원이 노조를 결성하는 걸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교회나 기독교 기관에서 노조를 결성하는 건 찬성할 수 없었다. 신앙 공동체에서 일어난 갈등을 법정에 호소하는 셈이어서다. 나는 노조를 결성한 이들에게 하 목사에게 뜻을 잘 전할 테니 결정을 내려놓을 것을 종용했다.
내 생각이 와전됐던 것일까. 하 목사는 노조의 입장을 전하는 나를 이들의 대변자라 여겼다. 선의로 한 행동이 그분께 배은망덕한 행위로 비친 것이다. 이 사건을 전하러 간 그때가 두란노서원에서의 마지막이었다. 교만해진 내게 하나님이 내린 징계였을 것이다.
이 사건으로 나는 인생에서 가장 큰 고통을 겪었다. 심적인 고통이 컸다. 지금껏 일이나 학업에서 승승장구해온 나로선 처음 겪는 실패였다. 무엇보다 누군가가 나를 버렸다는 걸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실직으로 인한 경제적인 고통도 무시할 수 없다. 가족을 위해 새 일을 찾아야 하는데 당장 대책이 없었다. 장래가 어둡게 느껴졌다.
이전에 2~3일 정도 금식기도를 한 일이 있다. 실직한 이때는 너무나 심각한 상황인지라 10일 금식기도를 결행했다. 내 생애 가장 긴 금식기도였다. 이때 금식기도에 관해 많은 걸 배웠다. 금식하며 기도하면 기도가 술술 잘 나올 줄 알았다. 정작 금식을 하니 힘이 빠지고 정신이 혼미해져 제대로 기도할 수 없었다. 10일간 금식기도를 마치고 돌아왔지만 문제가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 고난의 기간은 내게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교만했던 내가 겸손하게 하나님께 매달리는 기도를 하게 됐다. 시간이 지난 후에야 하나님이 다른 사역을 맡기고자 나를 두란노서원에서 내보냈다는 걸 알게 됐다. 다른 사역은 바로 일터 사역이다.
두란노서원을 나와 갈 곳 없는 내게 대학부에서 같이 활동한 박성수 이랜드그룹 회장이 자기 회사에서의 사역을 제안했다. 직원을 대상으로 설교한 적은 있었지만 거기서 사역하는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의류회사에서 목사가 할 일이 뭐가 있을까. 여러 의문이 떠올랐지만 대안이 없어 제안을 수락하고 이랜드에 들어갔다. 새로운 사역의 문이 열린 것이다.
***[역경의 열매] 방선기 (16) 해고 3개월 만에 이랜드 입사… 본격적 일터사역 시작
사내 인간관계와 성과 압박, 승진 등
신앙과 현실 사이에서 힘들어 하는
기독 직장인 위한 사역 절실함 체감
이들 돕기 위해 ‘직장사역연구소’ 열어
방선기 일터개발원 이사장이 1994년 이랜드 외식사업부 브랜드인 피자몰 론칭 당시 피자 상자로 만든 강대상에서 설교하고 있다.
이랜드에 입사하면서 해고 3개월 만에 다시 직장인이 됐다. 사목(社牧)을 맡은 나는 직원을 대상으로 설교를 전하고 성경공부도 이끌었다. 당시 직원 절반가량은 기독교인이었다. 사내 교육에선 기독 직장인의 삶에 대해 강의하기도 했다.
이랜드에서 기독 직장인을 여러 차례 만나면서 이들을 위한 사역이 절실함을 체감했다. 사내 인간관계와 성과 압박, 승진과 인사고과, 적성과 진로 고민…. 수많은 이들이 신앙과 현실 사이에서 좌절하며 무력감을 느꼈다. 직장에서 인생의 적잖은 시간을 보냄에도 이를 신앙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이들이 거의 없다는 것도 알았다. 기독 직장인이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신앙을 녹여내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치는 목회자도 드문 게 현실이었다.
매일 회사에서 마주하는 이들을 돕자는 일념으로 1992년 ‘직장사역연구소’를 시작했다. 일터사역을 내 사명으로 본격 받아들인 것이다. 평생을 일터사역에 힘을 쏟고 이를 한국교회에 보급하리라는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그저 이들의 애환에 공감하며 직장에서 신앙인으로 사는 구체적 방법을 알려줄 필요가 있어 시작했을 따름이다.
연구소 개소 뒤엔 기독 직장인을 격려하고 이들의 신앙 성장을 돕는 잡지 ‘일하는 제자들’과 단행본을 발간했다. 이런 연구소 사역이 점차 알려지면서 여타 기독 기업에서도 사내 강의를 요청해왔다. 다양한 분야에 몸담은 기독 직장인을 섬길 길이 열린 것이다.
추후 이랜드 사업 영역이 확장되면서 함께 일터사역을 할 사목 양성의 필요성도 대두됐다. 사목은 이랜드의 각 브랜드와 사업에 소속된 구성원을 위해 목회하며 이들의 직장 생활과 신앙 성장을 돕는 역할을 했다. 나는 동역하는 젊은 사목을 가르치는 동시에 글을 쓰고 강연하며 일터사역의 중요성을 알렸다. 99년엔 안양대 신학대학원에 ‘직장사역’ 강의가 개설되기도 했다.
일터사역에 이토록 몰입할 수 있던 건 목회 전 나 역시 기독 직장인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첫 직장인 국방과학연구원에서 6년간 근무하며 진로 고민뿐 아니라 업무 중 상사와의 갈등, 술자리의 어려움 등을 겪었다. 미국 유학 기간 청소업체와 식당, 세탁소 등에서 고된 육체노동을 한 경험도 귀중한 자원이 됐다. 이 시간을 견디지 못했다면 나는 각 분야에서 고생하는 기독교인 앞에서 노동의 ‘노’자도 꺼낼 수 없었을 것이다. 가난한 이민자로 겪어야 했던 모멸감이나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해고된 아픔 등도 직장인의 애환을 깊이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일터사역을 하며 나는 ‘교회 사역은 거룩하고 회삿일은 속되다’는 이원론을 경계해왔다. 온 세상을 주관하는 하나님에게 성속(聖俗)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직업에 귀천을 나누고 차별하는 건 그분의 시각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무직이든 현장직이든 자신의 소명을 받들며 삶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야말로 진정한 주님의 제자다.
***[역경의 열매] 방선기 (17) ‘일터사역’으로 직장에서의 일과 생활을 믿음과 통합
‘일하는 제자들’이란 잡지 창간과 함께 출판사 만들어 직장사역 관련 책 펴내
기독 직장인 위한 세미나와 강의 열고 지역 교회 신도 대상 일터사역 교육도
방선기 일터개발원 이사장이 한국교회에 일터 사역을 소개하기 위해 제작한 잡지 ‘일하는 제자들’과 ‘프리즘’.
직장사역을 하며 제일 먼저 한 일은 직장사역연구소를 연 것이다. 직장선교는 알아도 ‘직장사역’은 생소했던 시기다. 직장선교를 직장사역으로 바꾼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직장선교는 신우회가 모여 함께 예배하거나 기독 기업에서 정기적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뜻한다. 더 나아가 사우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의미했다. 분명 귀중한 사역이다. 하지만 나는 주어진 일에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와 기독교인이 직장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또 기독 실업인은 어떻게 기업을 경영해야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봤다. 이미 미국 교회에선 ‘마켓플레이스 미니스트리’(marketplace ministry)나 ‘워크플레이스 미니스트리’(workplace ministry)가 존재했다.
교회의 종교 활동을 직장으로 확대하는 것도 의미 있으나 더 중요한 건 직장에서의 일과 생활을 믿음과 통합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일하는 제자들’이란 잡지를 발간했다. 아마 한국교회에서 최초로 시도한 일터사역 전문 잡지일 것이다. 잡지 창간과 함께 출판사를 만들어 직장사역 관련 서적도 펴냈다. 기독 직장인을 위한 세미나도 열었다. 또 경영학 교수와 협업해 기독 실업인을 위한 기업 경영 강의를 개설하며 이들을 연결해주는 자리도 마련했다.
이때 높은뜻연합선교회 대표인 김동호 목사에게 연락을 받았던 일을 잊을 수 없다. 김 목사는 교회 성도를 훈련해 일터에 파송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 그러면서 자신은 일터사역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없으니 교회에 와 성도를 훈련해 달라고 했다.
이날 받은 한 통의 전화가 일터사역의 방향을 바꿨다. 나는 이랜드에서 동역하던 목사들과 교회를 찾아 평신도를 대상으로 일터사역을 교육했다. 지역교회에서 일터사역을 가르친 최초의 사례다. 교육 과정을 마치면 파송 예배를 드렸다. 일터가 선교지이며 사역 현장이니 일터에서 사역자로 살도록 권면하는 자리였다. 안타깝게도 이는 지속되지 못했다. 이 훈련이 지속돼 더 많은 교회로 확장됐다면 한국의 일터와 교회에 큰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대중문화를 기독교적 관점으로 조명하는 ‘프리즘’이란 잡지도 냈다. 대중문화의 영향력이 지대한데 당시 교회 입장은 이와 거리를 두는 쪽으로만 치우쳤다. 성경적 관점으로 대중문화를 평가하는 작업이 절실했다. 대중문화 가운데 문제가 있는 건 지적하고 수용할 것은 선교의 방편으로 사용하는 게 바람직하다. 당시로선 참신한 접근이어서 여러 사람의 공감을 받았는데 아쉽게도 외환위기를 맞아 폐간하고 말았다. 10년간 이끌던 잡지사와 출판사도 결국 2002년 모두 정리했다.
선교 전략 중 하나로 비즈니스선교(BAM)가 언급되곤 한다. 나의 회사 경영 경험에 비춰보건대 나는 이에 다소 회의적인 입장이다. 기업 경영에도 은사가 있어야 한다. 은사가 없는 사람이 선교를 위해 사명감으로 사업에 뛰어드는 걸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을까. 사업 목표는 명확하다. 경제적 성공이다. 이를 위해선 그만한 능력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역경의 열매] 방선기 (18) 성령이 주는 은사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다
‘영적 훈련과 성장’ 읽고 영성에 관심
여러 수도원 방문 ‘신비의 영성’ 확인
방선기 일터개발원 이사장은 신비의 영성을 체험키 위해 경기도 포천 은성수도원 등 전국의 수도원을 찾았다. 사진은 은성수도원 내 기도 처소. 국민일보DB
영성신학자 리처드 포스터의 ‘영적 훈련과 성장’이란 책을 우연히 접하면서 영성에 관심을 두게 됐다. 이전까지 내게 영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이를 기초로 그분께 기도하는 것이 전부였다. 관심을 갖고 살펴보니 영성의 세계가 엄청 넓다는 걸 알게 됐다.
가장 먼저 새롭게 발견한 건 ‘신비의 영성’이다. ‘침묵기도’로 대표되는 신비의 영성은 그간 내게 익숙했던 영성과는 다른 면모가 있었다. 이를 확인해보고자 가톨릭의 경기도 파주 트라피스트 수도원과 엄두섭 목사님의 경기도 포천 은성수도원을 찾았다. 프랑스 부르고뉴의 테제 공동체도 방문했다. 이들을 방문하며 영성은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임을 알게 됐다. 또 내겐 익숙지 않은 특별한 기도로도 이를 체험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새로이 발견한 두 번째 영성은 ‘능력의 영성’이다. 흔히 ‘기도원 영성’이라고 일컫는 것으로 성령이 주는 은사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영성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체험하기 위해 파주 오산리 기도원 등 여러 기도원을 찾아가 기도했다. 그간 이를 부정적으로 생각해온 게 사실이지만 정말 하나님의 능력이라면 이를 사모하는 게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청년부 기도 모임도 하나님의 능력을 사모하는 방식으로 이끌었다. 한번은 수련회에서 몸이 아픈 이들을 위해 치유의 역사가 나타나길 간구한 적이 있다. 이때 결혼한 지 4년이 지나도 아기를 얻지 못해 고민하던 한 형제가 아기를 위해 기도해줄 수 있느냐고 물어왔다. 당시 공동체 모두가 이를 놓고 간절히 기도했는데 얼마 뒤 임신 소식이 들려왔다.
이후 주변의 불임 문제를 놓고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했다. 당시 이랜드 직원 가운데도 불임으로 고민하는 이들이 많았다. 고민을 품고 온 이들과 함께 기도했다. 회사 수련회에선 불임 부부를 위해 따로 기도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이때 함께 기도한 부부로부터 차례대로 임신 소식을 접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실감했다.
이런 영적 체험을 통해 영성의 바다가 넓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내겐 말씀의 영성이 가장 맞는다는 생각이다. 말씀을 묵상하고 이를 삶에 적용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 내 영이 가장 행복한 걸 느낀다.
그러던 중 호주 신학자 로버트 뱅크스의 글을 읽다가 ‘일상 신학’과 ‘일상 영성’이란 표현을 접했다. 일상 영성이란 종교적 분위기나 상황이 아닌, 그야말로 일상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영성을 말한다. 평소 일터사역을 하면서 ‘이 사역이 전통적인 직장선교와 무엇이 다른가’를 고민해왔는데 바로 그 차이가 ‘일상 영성’에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일터 영성은 일터에서 예배하고 기도하며 성경공부하는 것으로도 체험할 수 있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맡겨진 일을 주께 하듯 한다면 그 자체로 영성을 체험할 수 있다. 일터에서 하는 말과 행동, 대인관계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것 또한 일터 영성을 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역경의 열매] 방선기 (19) 안식년 앞당겨 캐나다 유학… ‘일터사역’ 이론 정리
일터사역 관련 지식 부족해 아쉽던 차
캐나다 출장길에 스티븐스 교수 만나
대화 나누는 중 교환교수로 초청받아
방선기(왼쪽) 일터개발원 이사장이 1997년 캐나다 밴쿠버의 리젠트신학교 교정에서 어머니(왼쪽 세 번째)를 비롯한 가족과 함께한 모습.
세미나도 진행하고 잡지도 냈지만 일터사역에 대해 전문적으로 배운 바가 없었다. 일터사역을 다룬 책을 읽기는 했으나 당시엔 관련 서적도 그리 많지 않았다. 일터사역 지식이 부족해 아쉽던 차에 캐나다 밴쿠버 리젠트신학교의 폴 스티븐스 교수가 이를 가르친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식년을 보내면서 스티븐스 교수에게 일터사역을 배울 수 없을까 궁리했다. 마침 1996년 가을에 캐나다 출장 갈 일이 생겨 그분께 연락해 약속을 잡았다. 그렇게 생전 처음 만난 이와 1시간 정도 대화를 나누는데 스티븐스 교수가 나를 리젠트신학교 교환교수로 초청하겠다고 했다. 자녀들의 학업 문제도 있어서 2년 후에나 안식년을 가질 생각이었는데 스티븐스 교수는 당장 내년에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기쁘면서도 한편 당황스러웠다. 내 생애에서 또 한 번 ‘여호와 이레’를 실감하던 순간이다. 주님이 나보다 앞서 준비를 마친 것이다.
그때 가지 못했다면 아마도 일터사역을 연구할 기회를 영영 얻지 못했을 수도 있다. 밴쿠버에 도착해 몇 달이 지나지 않아 IMF 외환위기가 닥쳤다. 캐나다로 갈 때 필요한 돈을 다 가지고 가지 않았다면 현지 체류를 포기하고 귀국해야 했을 것이다. 또 그때 나가지 않았다면 외환위기로 다시 캐나다에 갈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모든 게 하나님의 인도라는 것을 실감한다.
리젠트신학교에서 1년 동안 스티븐스 교수와 지내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일터사역뿐 아니라 그 배경이 되는 일상 신학과 영성에 대해 새롭게 익힐 수 있어 유익했다. 학생 신분이 아니기에 원하는 강의를 아무런 부담 없이 마음껏 들을 수 있던 것도 장점이었다. 그때 들었던 수업 중 ‘일터사역’과 ‘일상의 신학과 영성’이란 두 과목이 기억에 남는다. 내가 신학교에 다닐 땐 들어보지 못한 개념이었다. 몇 년간 해온 일터사역을 이론적으로 정리하는 기회가 됐다. 이때 배운 내용은 일전의 내 논문에서 다룬 ‘복음주의의 사회참여’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안식년 기간에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귀국 후 신학교에서 일터사역을 강의했다. 이전까지는 직장인 성도에게 실무 위주로 강의했다면 스티븐스 교수 덕에 이 주제를 이론적으로 신학생에게 강의할 수 있었다. 이때 내 수업은 당시 국내 신학교에선 한 번도 가르치지 않았던 내용으로 알고 있다.
나는 지금도 ‘일터사역’과 ‘일상의 신학과 영성’ 이 두 가지 과목은 신학교에서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터에서 생활하는 모든 성도에게 실제로 도움이 되는 신학이라서다. 성도들이 바른 교리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음주나 금전 등 현실적인 문제에 신학적 답을 갖는 것이 더 긴요하지 않은가 싶다.
이후에도 미국이나 호주에서 열리는 일터사역 콘퍼런스나 세미나에 참석해 여러 가지를 배웠다. 해외 모임에 참석할 때마다 일터사역 관련 연구뿐 아니라 사역 경험도 많고 다양한 걸 보고 놀라곤 했다. 한국교회도 이런 날이 속히 오길 기대하는 마음이다.
***[역경의 열매] 방선기 (20) “회사를 살리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돈을 주십시오”
IMF로 창업 이래 가장 큰 위기 발생
거액의 자금난으로 부도 위기 처하자
회장 이하 임직원, 기도원 찾아 기도
방선기 일터개발원 이사장은 일터사역을 해온 회사와 교회 곳곳에서 IMF 외환위기로 고통받는 현장을 자주 목도했다. 사진은 1998년 외환위기의 여파로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무료급식소를 찾은 이들의 줄이 길게 늘어선 모습. 국민일보DB
IMF 외환위기는 한국 사회가 경험한 가장 심각한 위기 중 하나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고통의 신음이 들렸다. 나는 이 소리를 교회뿐 아니라 내가 섬기는 사역 현장에서도 들었다. 가는 곳마다 위로의 메시지가 필요했던 시절이다. 주로 예레미야애가 말씀으로 위로와 격려를 전했던 기억이 난다. 외환위기는 내가 이끌던 문서 사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때 ‘프리즘’이 폐간됐고 뒤이어 10여년간 펴낸 ‘일하는 제자들’도 간행을 중단했다. 정말 아쉽지만 이것이 하나님 뜻이라고 받아들였다.
위기가 가장 실감 났던 건 이랜드 현장이었다. 위기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하나는 본의 아니게 직원을 정리해고하는 상황이었다. 어떤 직원은 회사를 살리기 위해 자진 사퇴하기도 했다. 직원과 가족처럼 지내던 회사의 근간이 흔들린 사건이다. 창업 이래 가장 큰 위기였지만 공동체 의식으로 위기를 어렵지 않게 극복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회사가 자금을 구할 수 없었던 상황이다. 당시 대부분 기업이 자금난으로 고통받았는데 이랜드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해진 기일까지 자금을 구하지 못하면 부도날 위기에 처했다. 특별한 뒷배경이 없는 기업이 이때 인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이랜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회장 이하 임직원은 기도원을 찾아 기도했다. 기도제목은 아주 단순했다. “회사를 살리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돈을 주십시오”였다.
기도에 힘쓰다 쉬는 시간에 회장에게 물었다. “도대체 돈이 얼마나 필요한 것이냐”고. 이때 회장의 대답을 듣고 나서 기도할 의욕이 사라졌다. 당시 400억이 부족하다고 했다. 이런 거액을 어떻게 마련한단 말인가. 간절히 기도하면서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훗날 이랜드 몇몇 기업에 투자 의향을 보인 미국 투자회사들의 투자로 자금경색은 풀렸다. 이때 투자금이 400억이었다고 한다. 거짓말 같은 기적의 이야기다.
분명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는 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능력을 베풀면 일어날 수 있는 기적이다. 기업 현장에서 기도의 힘을 느낀 사건이다. 위기의 순간 모세가 기도하자 하나님이 바다를 갈라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것과 비슷한 기적이다. 이 경험으로 일터 문제를 놓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기적적인 방법으로도 응답해준다는 걸 확신하게 됐다.
때때로 일터에서 기도를 잘못 사용하는 때도 있다. 개인이 세운 목표나 기업의 매출 목표를 달성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이는 자칫 기도가 성공을 위한 도구로 전락할 수 있기에 매우 조심해야 한다. ‘무엇이든 구하면 하나님이 들어준다’고 했지만 이런 경우는 기도가 인간적인 욕심을 채우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이런 경험으로 삶의 다양한 현장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 기도는 인력으로 불가능한 일에 대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원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역경의 열매] 방선기 (21) 기성 교회의 대안으로 확신, 제자들과 가정교회 개척
건물·조직·프로그램 없는 가정교회에 대해
공부하면서 초대교회의 원형임을 알게 돼
방선기(뒷줄 왼쪽 네 번째) 일터개발원 이사장이 2001년 여름 수련회를 연 강원도 속초 영락교회 설악산수양관에서 가정교회 성도 가정과 함께한 모습.
나는 신학교에 진학할 때부터 목회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기존 교회 목회에 자신이 없어서였다. 목사라면 응당 목회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들었지만 흘려버렸다. 그러다 윤종하 성서유니온 총무의 강의를 듣고 생각을 바꿨다. 윤 총무는 한국교회가 갱신되려면 교회에 일을 없애야 한다고 했다.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이야기라 강의 후 그를 찾아갔다. 교회에 일이 많은데 이를 어떻게 없애느냐고 반문하니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성도를 돌아보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할 일이 너무 많아 진짜 해야 할 일을 못 하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원래 모습에서 변질했기에 작금의 교회 현실이 이렇다는 내용이었다.
이즈음 ‘가정교회’를 다룬 책을 접했다. 건물·조직·프로그램이 없는 가정교회에 대해 공부하면서 초대교회의 원형이 이렇다는 걸 알았다. 이후 미국의 가정교회 세미나를 참석하고 호주 가정교회도 탐방하면서 가정교회가 기성 교회의 대안이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2000년 당시 한국 교계엔 가정교회는 이단이 하는 것이란 오해가 있었다. 요즘도 가정교회를 기존 교회에의 셀 교회와 혼동하기도 한다. 하지만 가정교회야말로 초대교회의 원형이자 현대 교회가 대안으로 여길 예배공동체라고 생각한다.
2000년 대학부 지도할 때 만난 몇몇 제자들과 집에서 직접 가정교회를 개척했다. 아파트에서 예배를 드리는 게 처음에는 어색했으나 금방 익숙해졌다. 예배는 기존 교회 예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목회자가 인도하는 방식이 아닌 서로 대화하며 말씀을 나누는 식이란 것만 달랐다. 성도 간 교제도 기존 교회보다 훨씬 더 친밀하게 나눌 수 있었다.
모이는 숫자가 조금씩 늘어나 한 집에서 예배하기가 어려워지면서 성도를 3그룹을 나눠 따로 예배를 드렸다. 이전에 함께 예배하면서 성경공부와 설교 준비 훈련을 했기에 나와 따로 모일 땐 리더들이 설교를 맡았다.
가정교회의 장점은 재정 부담이 적다는 것이다. 가정집에서 예배하니 건물 빌리는 데 돈이 안 든다. 이중직 목회자가 교회를 이끈다면 예산을 많이 아낄 수 있다. 내 경우는 이랜드에서 사역했기에 따로 사례비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 이 때문에 기존 교회를 협동목사로 섬기는 이들에겐 가정교회 개척이 적합하겠다는 생각도 했다.
가정교회 사역에서 아쉬운 부분도 꽤 있다. 가장 아쉬움이 남는 건 다음세대 신앙교육이다. 교회학교가 따로 없어서 그런 건 아니다. 초대교회는 물론 종교개혁 당시 교회에도 교회학교는 없었다. 가정교회는 공동체의 삶을 바탕으로 신앙교육이 이뤄진다. 가정교회의 자녀교육은 각 성도가 가정과 교회 공동체에서 보여주는 삶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뤄져야 하는데 이를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가정교회는 정식 교회로 인정받지 못했다. ‘팻말이 있어야 성경적 교회’라는 핀잔을 교단에서 받기도 했다. 지금은 다양한 비제도권 교회가 나타난 만큼 가정교회도 새로운 교회의 형태로 인정을 받을 수 있으라 기대한다.
***[역경의 열매] 방선기 (22) 사교육 반대·출산 장려 등 일상신앙 실천운동에 나서다
입시·사교육, 출산율, 혼·상례 비용 등
일상 모든 영역에 믿음 필요함을 절감
방선기 일터개발원 이사장은 좋은교사운동과 기독교학교교육연구소와 ‘입시·사교육 바로 세우기 기독교 운동’(입사기)을 펼쳤다. 사진은 방 이사장(왼쪽 두 번째)이 이들 단체와 2014년 입사기 기자회견에 나선 모습. 국민일보DB
이랜드 직원을 상담하면서 기혼 직원의 가장 큰 고민이 ‘자녀 사교육비’임을 알게 됐다. 이는 이랜드 직원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 대부분 가정의 고민이다. 개인적으로 과외 한번 받아보지 않았고 자녀들 역시 사교육을 시키지 않은 지라 이 문제가 그렇게 심각한지 몰랐다.
사교육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나서는 우리 사회에 보편화된 사교육과 싸움을 선포했다. 교육 전문가와 함께 ‘입시·사교육 바로 세우기 기독교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나는 학부모에게 ‘사교육 무용론’과 대학 입시에 매몰된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런데 소용이 없었다. 목회자를 모아서 이 운동의 중요성을 알리면서 교회 성도에게 이 부분을 강조하도록 부탁도 했다. 그러나 이조차 무용지물이 됐다. 목회자부터 사교육에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했다.
2000년대 초 ‘출산율이 북핵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포항 선린병원장에게 산부인과가 축소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다. 이때부터 주변에 출산을 장려해왔다. 불임으로 고민하는 부부를 위한 기도에 힘쓰는 동시에 직원에게 출산 장려 설교도 전했다. 이때가 2005년으로 이미 합계출산율이 1.08명으로 떨어졌을 때다. 출산 장려가 신앙과 거리가 있어 보였는지, 당시 한국교회에선 논쟁거리조차 못 됐다.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상 모든 영역에 믿음이 필요하다는 걸 절감하고 시도한 일이 또 있다. 혼·상례 비용 문제다. 정부가 ‘건전가정의례준칙’을 만들 정도로 우리 사회의 혼·상례 비용 문제는 오랜 논란거리다. 기독교인이 본이 되면 어떨까 싶어 계몽운동을 펼쳤다. 주변 사람에게 작은 결혼식을 강조하며 자녀들의 결혼도 간소하게 치렀다. 이런 솔선이 사람들 보기엔 별 의미 없는 노력으로 비쳤던 것 같다. 지금도 비슷한 주장을 하지만 한국교회에 이에 대한 반응은 그다지 없는 편이다.
연이어 신앙 실천 운동에 실패하면서 일상 신앙의 가치를 새삼 느꼈다. 기독교인은 흔히 세상과 구별돼야 한다고 말한다. 대부분은 종교적으로 구별된 모습을 떠올린다. 제일 먼저 꼽는 게 주일성수와 십일조 생활이다. 성경 읽고 기도하는 경건생활 역시 기독교인으로 구별되는 지점이다. 일상에서 구별되는 점은 술·담배를 멀리하는 것 정도다.
기독교인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선 이런 부분보다 우리 사회가 문제로 느끼는 부분에서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 사교육이나 입시 문제, 결혼과 출산을 대하는 자세가 비신자들과 다를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않을까. 결혼을 미루고 부부가 출산하지 않는 추세가 요즘 큰 문제라고 한다. 기독교인이 경제적 여건이 아닌 믿음으로 결혼과 출산을 결심하는 것 또한 구별된 모습을 보이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교회는 성도의 믿음이 일상에서 드러나도록 가르치고 격려해야 한다. 앞으로 일상에서 믿음을 지키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기독교인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역경의 열매] 방선기 (23) 기업마다 채플린 초빙해 새로운 일터사역 활성화 됐으면…
콘퍼런스서 접한 ‘마켓플레이스 채플린스’
미국 전역의 기업에 채플린을 파송 사역
직원들과 교제하며 ‘영적 케어’를 제공
방선기 일터개발원 이사장은 미국과 호주의 콘퍼런스에서 각국 일터사역 관련 단체를 두루 접했다. 사진은 마켓플레이스 채플린스 소속 목회자가 기독 직장인에게 기도해주는 모습.
캐나다 리젠트신학교에서 일터사역을 배운 뒤에도 미국과 호주에서 열리는 일터사역 콘퍼런스에 자주 참가했다. 리젠트신학교에서 일터사역 신학을 배웠다면 콘퍼런스에서는 여러 종류의 구체적 사역 사례를 접할 수 있었다. 콘퍼런스에서 접한 일터사역 가운데 인상적이었던 건 채플린(Chaplain)으로 일터사역을 하는 ‘마켓플레이스 채플린스’(Marketplace Chaplains)란 단체였다. 채플린은 지역교회가 아닌 곳에서 사역하는 목회자를 지칭한다. 나 역시 이랜드 사목으로 섬기고 있었기에 더 관심을 갖게 됐다.
이 단체는 미국 전역의 기업에 채플린을 파송하는 방식으로 사역한다. 현재 이 단체가 파송하는 채플린은 1700명에 달한다. 채플린은 파송된 기업에서 설교나 전도, 성경공부 지도를 하지 않는다. 미국의 일반 기업에서 종교 활동을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을 뿐 아니라 법적으로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들의 역할은 정기적으로 기업을 방문해 직원들과 교제하며 이들의 고민을 상담해주거나 함께 기도하는 등의 ‘영적 케어’를 제공하는 것이다. 물론 직원 가운데 원하는 이가 있다면 성경을 가르칠 수 있고 비신자가 복음에 관심을 보이면 얼마든지 전도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채플린 사역의 열매이지 본질은 아니다. 채플린 사역의 본질은 종교를 초월해 모든 직원을 영적으로 돌보며 경영자를 돕는 것이다.
이랜드에서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땐 설교와 전도, 성경공부가 사목(채플린)의 사역이라고 생각했다. 비교적 규모가 작았던 이랜드 초기에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이랜드가 성장하고 다른 기업과 합병하면서 이런 사역을 지속하는 게 점점 어려워졌다. 사회에서도 학교나 기업에서의 종교 활동을 부정적으로 보는 인식이 늘어나면서 나 역시 기존 사역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그러던 중 이 단체를 통해 다원화 사회 속에서의 채플린 사역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이랜드에서 그간 해왔던 사역을 앞으로 기독 기업에서 지속하긴 어려울 것이다. 대신 이 단체처럼 새로운 채플린 사역을 개척한다면 국내 기업에서도 일터사역을 요청하는 곳이 생길 것이다. 이런 기회가 늘어나면 한국교회가 골머리를 앓는 문제 하나를 해결할 수도 있다.
지금껏 목회자는 오직 교회 목회에만 전념해야 한다고 배워왔다. 그랬기에 목회자가 목회 외에 다른 일을 하는 것은 절대 금지했다. 하지만 꽤 많은 목회자가 경험하는 현실은 이와 거리가 멀다. 생계를 위해선 다른 일도 해야만 한다. ‘이중직 목회’ ‘겸직 목회’란 단어가 생긴 이유다.
목회와 생계를 모두 책임져야 하는 목회자에게 기업의 채플린 사역이 주어진다면 서로 윈윈(win-win)하는 성과를 낼 수 있다. 기독 기업은 직원을 영적으로 돌볼 수 있어 좋고 목회자는 자신들의 역량으로 목회 외의 사역을 할 수 있어 이득이다.
앞으로 여러 기독 실업인이 기업에 채플린을 초빙해 한국교회에 새로운 일터사역을 활성화한다면 전통적 목회로는 생각지 못한 일들이 많이 생길 것이다. 한국교회가 이 채플린 사역에 새로이 눈 뜨길 바라는 마음이다.
***[역경의 열매] 방선기 (24) 국내에선 생소한 ‘일터신학’ ‘일상생활 신학’ 강의
합동신학대학원대에서 겸임교수 맡아
전공인 교육학 아닌 일터사역 가르쳐
처음엔 신학생들 관심 없어 폐강 위기
점차 늘면서 주요 과목으로 자리매김
방선기(앞줄 왼쪽 두 번째) 일터개발원 이사장이 2013년 합동신학대학원대 교수 재직 당시 경기도 수원의 캠퍼스에서 동료 교수들과 졸업 앨범에 실릴 단체 사진을 찍는 모습.
리젠트신학교에서 돌아온 뒤로는 국내 여러 신학교에서 일터신학을 강의했다. 엄밀히 말하면 신학교에서 일터사역 강의를 부탁한 것이 아니라 내가 시간강사 자리를 맡긴 학교마다 해당 강의를 제공한 것이다. 이 시기 국내 유수의 신학교를 여럿 찾아 일터신학과 일터사역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어느 신학교에서도 진지한 관심을 보이지 않아 내가 떠나면 해당 과목도 사라졌다.
그러다 합동신학대학원대에서 겸임교수를 하게 됐다. 이때 하나님의 인도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애초부터 학문적인 소양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신학교 교수가 될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대체로 해외에서 학위를 받은 이들은 대학교수가 되길 원하지만 나는 애초에 그럴 마음이 없었다. 자신이 없었다고 말하는 게 솔직한 고백일 것이다.
그런데 마침 이랜드에서 내가 맡은 업무에 변화가 생기면서 여유가 생겼다. 당시 업무 변화는 내가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교수직을 수행할 시간이 생겼다. 하나님은 내게 새로운 일을 맡길 때 꼭 이런 식으로 역사하는 것 같다.
나는 전공인 교육학보다 일터사역을 가르치고 싶었다. 학교에서도 이를 허락해 초창기엔 리젠트신학교에서 배운 ‘일터신학’과 ‘일상생활의 신학’을 가르쳤다. 나중엔 ‘일터목회’란 과목을 개설해 일터에서의 채플린 사역에 관해 가르쳤다. 이들 과목은 리젠트신학교에선 주요 과목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지만, 국내 신학교에선 아직 생소한 과목이었다. 게다가 선택 과목이기에 처음엔 신학생들도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일터목회’ 과목을 처음엔 ‘채플린 사역’으로 명명했다가 폐강 위기도 겪었다. 생경한 명칭 탓에 학생들이 수강신청을 하지 않아서다. 다행히 관심을 갖는 학생이 조금씩 늘면서 일터신학도 학교의 주요 과목으로 점차 자리를 잡았다.
나는 일터사역 수강생에겐 노동 현장에서 일을 해보고 느낀 점을 제출하도록 했다. 일상신학 강의를 접한 여러 학생은 신선한 충격을 받곤 했다. 개중엔 ‘신학교에서 이런 과목을 가르치느냐’며 비판하는 학생도 있었다. 반면 ‘일터 목회학’ 수강생 중엔 일터사역에 관심이 생겨 채플린 사역에 뛰어든 학생도 있다.
일터신학 과목이 신학교 교과과정에 있으면 유익하겠지만 그다지 효과적인 것 같지는 않다는 게 내 솔직한 평가다. 차라리 신학교에서 이들 과목을 교회 목회자나 일터 속 성도, 특히 기독 실업인에게 개방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다. 이중직 목회가 보편화할 때를 대비해 신학교에 이중직 목회를 위한 일터 관련 과목을 더 많이 개설할 필요도 있다.
현장의 필요를 수용하는 이런 과목이 신학교 교과과정에 들어오려면 학문적 바탕을 튼튼히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다행히 일터사역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 늘면서 관련 논문도 늘고 있다. 일터사역이나 일상 신학 관련 과목을 개설해 가르치는 신학교도 하나둘 늘고 있다고 들었다. 한국교회 미래를 놓고 본다면 정말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역경의 열매] 방선기 (25) 류머티즘 고통 중 심장혈관까지 막혀 죽음의 문턱까지
병원·한방에 대체의학까지 동원했지만
고통 가시지 않아 치유 집회에도 참여
건강 검진서 심장 이상 발견하고 수술
방선기 일터개발원 이사장이 2010년 서울 마포구에 자리했던 이랜드의 구 사옥 앞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이 당시 방 이사장은 질병으로 고생 중이었다. 국민일보DB
보통 인생의 황금기로 50대를 꼽곤 한다. 그렇지만 내겐 50대가 가장 비참한 시기였다. 이전까지 거의 병치레를 하지 않았던 나는 건강에 대해선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손목과 손가락 관절에 통증이 생겨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류머티즘이 발병했다고 했다.
이후 온몸의 모든 관절에 통증이 찾아왔다. 정말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나는 이를 고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다. 병원을 다녀온 뒤에도 고통이 가시지 않아 한방의 문도 두드렸다. 보약도 먹고 독특한 한방 약재를 달인 것도 먹었다. 대체의학의 도움도 받았다. 치료 목적으로 온몸을 때리는 곳도 가보고 마사지를 하는 곳도 찾았다. 치유 집회도 참여했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에도 증상은 아무 차도가 없었다. 엄청나게 낙심이 됐다. 한참 고생하던 중 당시 ‘행복 전도사’로 유명한 한 여성 분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엄청난 고통이 따르는 ‘루푸스’란 병으로 고생했다는 걸 알았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심경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던 중 2006년 건강 검진을 받았는데 의사가 심장에 정밀검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심장에 아무런 증상이 없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정밀검사를 받았다. 그런데 병세가 심각하다는 진단이 나왔다. 혈관의 많은 부분이 막혀 혈관 이식 수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수술을 받으면서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경험을 했다.
질병의 고통을 겪을 땐 정말 하나님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내게 많은 걸 가르쳐 주셨다. 그간 나는 크게 아파본 적이 없어 몸이 아픈 이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부족했다. 그런데 막상 내가 아파보니 몸이 힘든 사람의 심정을 깊이 이해하게 됐다. 건강에 대해 자만했던 나를 돌아보게 됨도 물론이다. 내 건강이 다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생각이 들면서 절로 겸손한 마음이 생겼다.
질병을 앓으며 얻은 것이 또 있다. 아무 일도 할 수 없던 상황이라 안식년을 갖기로 마음먹었는데 이때 떠오른 게 ‘프랑스 현지 언어 연수’다. 아프지 않았다면 하던 사역을 계속했을 테고 새로운 일도 경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질병으로 고생했지만 하나님은 이를 통해 새로운 사역을 보여주셨다.
건강 문제를 놓고 나뿐 아니라 주변에서 정말 많이 기도했다. 그 결과 좋은 의사를 만나고 류머티즘을 통제하는 주사도 맞으면서 그 고통에서 헤어나오게 됐다. 심장 수술도 다행히 결과가 좋아 조심하면서 지내고 있다. 지금도 관절 여러 부분에 통증이 남긴 했는데 이것이 ‘내 육체의 가시’인지 모르겠다.
질병 치료를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질병을 고치기 위해선 하나님이 허용한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병원과 한방치료 대체의학 카이로프락틱 치유기도 등 어느 하나만으론 완벽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이중 어느 것을 통해서든 고칠 수 있다. 치료하는 분도 하나님이고 어떤 방법으로 치료할지를 결정하는 분도 하나님임을 기억해야 한다.
***[역경의 열매] 방선기 (26) 불어 정복은 아쉬웠지만 대신 프랑스 선교 비전 품어
공부 재미 붙여 1년간 공부에만 몰두
성적과 불어실력은 만족하지 못했지만
프랑스 현지 생활하면서 음식 잘 맞고
언어 두려움 없어 선교지로 마음먹어
방선기 일터개발원 이사장은 프랑스 언어 연수 중 알게 된 현지 교회 미션 디모데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사진은 프랑스 남부 앙뒤즈의 미션 디모데를 찾은 이들이 예배하는 모습. 미션 디모데 홈페이지 캡처
50대 후반 나는 프랑스 언어 연수에 도전했다. 이 나이대에 부부가 언어 연수를 위해 다른 나라에 간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다행히 엑상프로방스의 개혁신학교에서 교환교수 기회를 줘 비자를 얻었다.
신학교 초청으로 프랑스에 갔지만 불어 습득이 목적이었기에 엑상프로방스의 마르세유대학교에 등록해 언어 연수를 받았다. 각국에서 온 수많은 대학생과 공부하는 일은 여러모로 새로운 경험이었다. 40여년 전 기술 연수차 프랑스에 왔을 때보다 여건이 좋아진지라 공부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태어나 이때처럼 공부해 본 적이 없다고 할 정도다.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기억이 있다. 한 교수가 휴강을 공지해 수강생 모두가 기뻐하는데 나 혼자만 서운해한 일이다. 공부가 어지간히 재미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1년 후 결과를 보니 부끄러웠다. 성적도 별로였고 불어로 의사소통하는 것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늦은 나이에 1년만 공부해 외국어를 정복하기란 쉽지 않았다. 아쉬웠지만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기대하지 않았던 걸 얻었다. 프랑스를 향한 선교 비전이 생긴 것이다. 나는 원래 선교에 뜻이 없었다. 해외 선교를 나가려면 언어도 능숙하고 현지 음식도 좋아해야 한다. 한데 선교여행을 다녀보면 이 두 가지로 항상 고생하곤 했다. 그런데 프랑스는 달랐다. 언어와 음식이 낯설지 않았다. 이곳을 선교지로 마음먹은 이유다.
기실 프랑스를 선교지라 하면 사람들은 금방 받아들이지 못한다. 대부분 아프리카 불어권 국가의 선교를 생각한다. 하지만 현지에서 보니 정작 선교가 필요한 곳은 프랑스 본토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는 유구한 역사의 가톨릭 국가이지만 현지에선 가톨릭이 사라져가는 문화처럼 느껴졌다. 전국 곳곳의 성당은 대부분 관광지처럼 변했다. 개신교는 명맥만 유지할 정도로 세력이 미미하다. 프랑스 복음주의 기독교인 수가 사우디아라비아 기독교인보다 더 적다는 통계도 있다.
그렇지만 프랑스 선교를 직접 하기엔 언어 실력도, 경험도 부족했다. 이미 프랑스 선교에 헌신한 현지인과 한국인 선교사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러다 어학연수 중 알게 된 박성형 목사가 자신이 사역하는 ‘미션 디모데’란 프랑스 개신교회를 소개해줬다. 이 교회를 알게 된 건 하나님이 내게 허락한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서울 시내 곳곳에서 프랑스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내가 젊었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10여년 전 프랑스로 언어 연수를 갔을 때만 해도 상상하지 못한 장면이다. 길거리나 지하철역에서 마주친 프랑스 유학생이나 관광객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서툴지만 불어로 말을 건다. 타국에서 고국 언어를 들어 매우 반가워하곤 한다.
이때 이들과 긴 대화는 못 하지만 프랑스에 대한 내 사랑을 전한다. 이들과 식사하는 기회가 생길 경우엔 긴 대화도 나눈다. 프랑스 유학생과 식사할 땐 조심스럽게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국내에서 소소하게나마 프랑스 선교를 시도한 것이다. 선교라고 하기엔 턱없이 부족하지만 이렇게라도 사랑을 전하면 언젠가 작은 열매라도 맺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역경의 열매] 방선기 (27) 초대교회 닮은 프랑스 현지 교회 ‘미션 디모데’ 매력에 흠뻑
성장하는 교회를 모델 삼았던 한국교회
건물규모·결과물의 양적 성장이 대부분
방선기 일터개발원 이사장은 프랑스의 ‘미션 디모데’를 한국교회가 참고할 만한 모델로 봤다. 사진은 2012년 겨울 프랑스 앙뒤즈 미션 디모데 내 식당에서 구성원들이 공동체 식사를 하는 모습.
한국교회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 교회의 선교 열매이기에 이들 교회에 많은 걸 배웠다. 한국교회 성장기엔 미국 대형교회가 한국교회 모델이 됐다. 이들 교회에 국내 목회자가 방문하고 교회 프로그램을 전수받기도 했다.
나는 이런 현실을 그렇게 좋게 보지 않는 편이다. 물론 한국교회가 본받을 만한 미국 교회도 있다. 두란노서원 재직 시 방문한 미국 워싱턴DC의 ‘세이비어교회’다. 규모도 크지 않고 프로그램이 화려한 교회도 아니었지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며 ‘교회다운 교회’라고 느껴졌다.
이후 30년이 지난 시점에 프랑스에서 다시 한국교회가 참고할 만한 교회를 발견했다. ‘미션 디모데’란 프랑스 현지 교회다. 2012년 겨울에 처음 방문했는데 이때 매우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가장 충격을 받은 건 20대 청년들이 3년간 공동체 생활을 하며 지도자 훈련을 받는 것이었다. 다음세대가 흔들리는 한국교회를 보며 한창 걱정하던 터라 충격은 더 컸다. 이들은 이 교회의 다음세대를 이끌 지도자가 되기 위해 훈련을 받고 있었다. 이름인 ‘미션 디모데’가 말해주듯 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다음세대를 ‘디모데 같은 지도자’로 세우는 것이다.
이후로도 계속 이 교회를 방문해 전교인 수련회에 참석했다. 지역교회도 같이 방문해 현지 지도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참여하면서 ‘초대교회가 현존한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란 생각을 했다. 정신적 어려움을 겪는 소외 계층을 돌아보는 교회 사역도 독특했고, 공동체 생활을 하며 지내는 모습도 아름다웠다. 여러 사역을 하지만 돈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공급에 의지하는 신앙의 태도도 인상 깊었다.
그간 한국교회가 모델로 삼은 교회는 기본적으로 성장하는 교회였다. 건물 규모가 크고 교회 프로그램 성과가 한눈에 보이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이들 교회는 주로 성과를 내는 프로그램을 운용해 사역의 결과물을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사업체처럼 변해버린 교회도 적잖았다.
50여년 전 시작한 미션 디모데는 현재 프랑스 전역에 30여개의 지교회를 두고 있다. 어느 정도 성장을 이룬 셈이다. 그런데 교회는 양적 성장에 관심이 없다. 교회 재정도 풍족하지 않다. 숫자에 연연치 않고 그저 하나님만 의지하며 나아가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소위 잘 나간다고 불리는 교회와 사뭇 대조되는 모습이다.
이 교회엔 비전이나 사역 목표가 없다. 성도에게 말씀을 잘 가르치고 이웃의 필요를 채워주는 게 이 교회의 목회 철학이자 선교 전략의 전부다. 교회의 성장은 이들의 목표가 아니다. 교회다운 교회가 될 때 자연스레 나타나는 결과일 뿐이다. 초대교회와 종교 개혁기 교회를 보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이런 점에 매료돼 이 교회를 자주 방문하다 결국 책까지 냈다. 두란노서원에서 펴낸 ‘미션 디모데’다.
한국교회가 미션 디모데를 그대로 흉내 낼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이 교회처럼 ‘순전한 신앙’을 추구하는 태도가 한국교회에 전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역경의 열매] 방선기 (28) 모든 사역 은퇴했지만 건강 허락하는 한 하나님 부름에…
시행착오 겪으며 목회해온 가정교회와 뜻밖의 기회로 학생들 가르친 신학교
전례 없는 기업 목회 시작한 이랜드 등 그간의 사역 경험들 후배들에 전할 터
방선기 일터개발원 이사장은 이랜드그룹 사목으로 30여년간 활약하다 은퇴했다. 방 이사장(원 안)이 2017년 12월 서울 여의도 켄싱턴호텔에서 열린 은퇴예배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국민일보DB
2017년은 내 생애에서 참 중요한 해다. 그간 해온 모든 사역에서 은퇴한 해라서다. 먼저 16년간 목회해온 가정교회에서 은퇴했다. 여러 시행착오를 겪고 가정교회를 섬기면서 한국교회가 추구할 방향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도 하게 됐다. ‘교회에 대해 성경이 말씀하는 걸 제대로 이루기만 한다면 설령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교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신학 교수직에서도 은퇴했다. 교수가 될 생각은 없었는데 뜻밖에 기회가 주어져 12년간 학생을 가르칠 수 있었다. 신학생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었지만 이 기간에 이들에게 배운 게 훨씬 더 많다.
25년간 사역해온 이랜드에서도 은퇴했다. 기업 목회는 한국교회에선 전례 없는 일이었다. 이곳에서 목사로 일한 건 개인적으로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오래 사역한 곳이었고 일반 목회자가 경험치 못한 사역 현장이기에 은퇴할 때 하나님께 감사했다. 비즈니스 세계에 목회가 필요한 것을 알게 됐고 동시에 이 세계에서의 목회는 교회와 달라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이 경험은 한국교회 미래에 아주 중요한 자원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60대에 들어서면서 은퇴 공부를 시작했다. 은퇴를 앞둔 직장인을 돕기 위해 시작한 공부였는데 정작 내게 큰 도움이 됐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은퇴가 인생의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이다. 은퇴는 일이나 사역에서 떠나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단지 직책이나 지위로부터의 은퇴다.
지위나 직책에서 은퇴한 뒤에도 일이나 사역은 건강이 허락하는 한 얼마든 지속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고 본다. 물론 이런 기회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건 아니다. 개개인의 경제적 문제도 걸림돌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부를 때까지 일과 사역에서 은퇴할 필요는 없다. 몇 년 전에는 가정사역원에 ‘손주 사역’(grand parenting)을 제안했다. 요즘 우리나라 상황에선 은퇴한 이들에게 주요 사역이 되리라 본다.
여러 일터 사역 동역자의 노력으로 ‘일터개발원’이 생겼다. 이곳에서 그간 해왔던 일터 사역을 지속한다. 일하는 기독교인을 오래 도왔으니 그간 경험을 후배에게 전하려 한다. 기독 실업인을 영적으로 지원하는 일도 계속하려고 한다.
은퇴 후 생각지 않은 사역을 또 하나 맡았다. 온누리교회 불어예배 사역이다. 교회가 불어예배를 시작할 때 설교자를 찾아 미션 디모데 목회자를 소개하긴 했지만, 그곳에서 사역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다 코로나 팬데믹이 닥치면서 본의 아니게 사역을 맡았다. 불어는 능숙하지 않지만 설교는 프랑스인 목회자가 맡으니 제안을 수락했다.
나는 예배에 나올 수 없는 성도의 집을 방문해 예배를 인도한다. 심방 예배와는 조금 다른 개념이라 나는 이를 ‘왕진 예배’라고 부른다. 두세 사람과 집에서 드리는 예배인데 이를 인도하며 보람을 느꼈다. 이들에겐 이 예배가 하나님 말씀을 들을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왕진 예배를 인도하면서 이런 예배가 은퇴한 목회자에게 좋은 사역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경의 열매] 방선기 (29) 신체 변화로 죽음 체감… 부활 소망의 믿음 있어 두렵진 않아
40대 후반 대변 색이 갑자기 변해
검사하면서 죽음을 심각하게 생각
이 과정에서 주님의 섭리 체감하고
믿음 허락한 하나님께 감사 드려
방선기(왼쪽) 일터개발원 이사장이 육촌인 고(故) 방지일 목사 맏딸(가운데)의 미국 캘리포니아 자택을 찾아 함께한 모습.
예전부터 동안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두란노서원에서 일할 땐 사람들이 나를 어리다고 생각해 얕잡아 보는 경우도 있어 빨리 나이 들길 바라기도 했다. 나이가 들어서도 젊어 보인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어느 날 한 청년이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게 아닌가. 30대 정도로 보이는 여성이 나를 ‘할아버지’라 부르며 자리를 양보한 일도 있다. 어린이가 할아버지라고 부를 땐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지만 다 큰 성인이 그렇게 부르니 충격이 컸다.
이젠 지하철 경로석에 앉는 게 자연스러운 나이가 됐지만 아직도 실감은 나지 않는다. 아마 내 또래 모두가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늙는 걸 환영하진 않지만 수용하기로 했다. 다만 노추(老醜)나 노욕(老慾)은 보이지 않으려고 한다.
40대 후반에 죽음을 맞닥뜨린 적이 있다. 대변 색이 갑자기 변해 의사인 친구에게 문의하니 위내시경과 대장내시경을 해보자고 했다. 이땐 정말 죽음을 심각하게 생각했다.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은 아니었다. 부활 소망의 믿음이 있어서였다. 다만 죽는다고 생각하니 당시 초등학교에 막 입학한 막내가 마음에 걸렸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며 머릿속으로 여러 번 생사를 오갔다. 다행히 이상이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검사 며칠 뒤 모든 게 평소처럼 돌아왔다.
갑작스러운 신체 변화를 겪었다 회복한 이 경험은 아직도 잘 이해가 안 된다. 죽음을 체감하도록 하나님이 특별히 섭리한 게 아닌가 싶다. 지금껏 내게 위로가 되는 체험이기도 하다. 10년 정도 지나면 죽음이 찾아올 가능성도 커질 것이다. 좀 더 산다고 해도 20년 정도다. 지금 죽음이 찾아온다 해도 그때처럼 담담히 맞을 수 있을 것 같다. 자식들은 성인이 돼 걱정이 없지만 아내와 헤어지는 게 안타깝다. 이런 믿음을 허락한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다만 죽음에 이르는 과정 중 겪을 고통에 대해선 조금 두렵다. 육체적 아픔도 그렇지만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게 더 두렵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존엄사와 안락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늘어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죽음의 시간을 내가 정해선 안 된다.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한다. “때가 되면 데려가 주세요. 죽음의 모든 과정이 사람들에게 덕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해주세요.”
기독교에서 ‘부활 신앙’을 가르치긴 하지만 적잖은 기독교인이 부활 후 신령한 육체로 영원히 산다는 건 잘 알지 못한다. 부활 신앙은 우리가 육체로 부활해 생생한 삶을 살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이 땅에서 수고롭게 일한 게 하늘나라에서도 헛되지 않다고 한다.(고전 15:58) 그곳에서도 땅에서처럼 일할 것을 암시한다. 물론 지금처럼 먹고살기 위해 일하는 건 아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즐겁게 일했듯 그렇게 신나게 일하며 주님 곁에서 왕 노릇 할 것이다.
나이 탓에 예전처럼 일터 사역도 힘있게 하기 힘든 요즘이다. 훗날 하늘나라에서 신나게 일할 날을 소망해본다. 죽음은 우리에게 쉼을, 부활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할 새로운 일을 줄 것이다. 일하는 건 슬픔이 아닌 축복이다.
***[역경의 열매] 방선기 (30) 믿음의 사람이 범할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죄는?
돈을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는 것
돈으로 믿음을 드러내는 영역을
십일조 등 헌금에 국한하지 말고
삶의 영역으로 확대·적용해야
방선기 일터개발원 이사장은 돈을 벌거나 쓸 때도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진은 지난달 서울 마포구의 일터개발원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방 이사장. 두란노 제공
일터 사역을 하면서 한 기독교인 변호사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가 검사 시절 횡령 사건을 수사하는데 돈을 추적하다 보니 일부가 교회에 있었다고 한다. 알고 보니 회삿돈을 횡령한 직원이 10분의 1을 교회에 바친 것이다. 다소 극단적인 사례긴 하지만 이 이야기를 들으며 이원론적 믿음이 떠올랐다. 십일조로 거액을 낼 믿음은 있어도 돈 때문에 지은 엄청난 죄는 막지 못했다. ‘믿음 따로, 돈 따로’의 삶을 산 탓이다.
그간 교회에서는 돈과 관련해 믿음을 강조할 때 대부분 십일조를 비롯한 헌금을 언급했다. 믿음의 눈으로 돈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돈을 벌며 믿음으로 돈을 사용하도록 가르치진 못했다. ‘믿음 따로, 일 따로 신앙’이 안타까웠던 나는 믿음과 일의 통합을 주장해왔다.
신앙인이 일터에서 우선적으로 행해야 할 일은 예배나 전도가 아니다. 맡겨진 일을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다. 일이 예배가 되면 그 일로 전도의 열매가 맺어진다. 사실상 믿음과 일을 통합하는 게 일터 사역의 핵심이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게 ‘믿음과 돈’의 통합이다. 믿음으로 일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돈을 믿음으로 벌고 쓰는 것도 굉장히 긴요하다.
신앙 여부를 떠나 돈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다. 기독교인이라고 돈을 무시하거나 무책임해선 안 된다. 믿음의 사람이라면 자신과 가족을 위해 경제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돈을 사랑해선 안 된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딤전 6:10)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겨도 안 된다.(마 6:24) 이렇게 하는 순간 돈은 즉시 현대판 우상이 된다.
믿음의 사람이라면 돈을 벌 때도 바르게 벌어야 한다. ‘어떻게 벌든 나중에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겠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의한 돈은 가증한 것이니 하나님 전에 가져오지 말라고 하신다.(신 23:18) 십일조를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번 돈이 하나님 보기에 가증한 돈인지 아닌지를 돌아봐야 한다.
돈을 쓸 때도 믿음이 필요하다. 믿음의 사람은 ‘내가 번 돈이니 마음대로 쓸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벌었어도 그 돈을 하나님이 허락한 걸 알기에 그분의 뜻에 맞게 사용하려고 한다. 신앙인이 돈을 쓸 때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대원칙으로 삼아야 한다.(롬 12:2)
신앙인에게 주어진 최고의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하나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헌금을 드리고 이웃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구제를 하는 것이다. 믿음이 돈을 통해 역사하는 셈이다.
이제 교회는 돈으로 믿음을 드러내는 영역을 십일조 등 헌금에 국한하지 말고 삶의 영역으로 확대·적용토록 가르쳐야 한다. 이때 유의할 점은 돈을 우상화하지 않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이 범할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죄는 돈을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는 것이다. 돈을 신뢰하다 보면 비윤리적인 행동이나 불법적 행위에 빠지기 쉽다. 돈 문제로 이웃을 힘들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면 어떤 일이든 주님은 기뻐하지 않으신다.
***[역경의 열매] 방선기 (31) ‘부패의 덫’ 같은 돈… 교회는 사명 위해 더 투명해야
‘돈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란 말처럼
교회의 역사 곳곳도 돈 문제로 얼룩
교회가 진정한 회개 통해 새로워져야
방선기 일터개발원 이사장은 교회가 하나님이 아닌 돈을 의지할 때 타락한다고 말한다. 사진은 미국 달러에 인쇄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In God We Trust)는 문구. 픽사베이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에서 돈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걸 깨닫고 돈에 대한 묵상과 연구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발견한 건 교회가 부패하는 데 돈이 결정적 역할을 했고 지금도 그렇다는 것이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교회의 타락 이면에 항상 돈 문제가 있었다. 죄악으로 멸망한 이스라엘 타락의 주요 원인은 지도자의 돈 문제였다. “이 도성의 지도자들은 뇌물을 받고서야 다스리며 제사장들은 삯을 받고서야 율법을 가르치며…바로 너희 때문에 시온이 밭 갈듯 뒤엎어질 것이며 예루살렘이 폐허 더미가 되고 성전이 서 있는 이 산은 수풀만이 무성한 언덕이 되고 말 것이다.”(미 3:11~12)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도 돈을 좋아했다.(눅 16:14) 제사를 지낼 성전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오죽하면 온유와 겸손을 강조하던 주님이 분노해서 성전을 그렇게 뒤집어 놓았을까. 보통 초대교회를 ‘순전한 교회’라고 생각하지만 이 가운데서도 실패한 사람은 있다. 실패 원인은 역시 돈 때문이다. 땅을 팔아 헌금을 하려다 그중 일부를 빼내고 하나님께는 모두 바쳤다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그랬다. 사마리아에서 사도의 능력을 돈 주고 사려고 했던 마술사 시몬도 마찬가지다.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교회의 면죄부 판매도 결국은 돈 문제다. 중세교회는 이전부터 모든 문제를 돈으로 해결하는 데 익숙했다. 그러니 구원을 돈으로 사는 일도 그리 어색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이런 풍속은 현대 교회에도 그대로 내려오고 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문제의 원인에서 돈이 차지하는 비중을 살펴보라. 세상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돈 자체가 악이라거나 교회는 돈을 가져선 안 된다는 말은 아니다. 교회의 돈은 기본적으로 성도들이 헌금한 것이다. 이 돈이 있어 성직자가 성직을 감당할 수 있다. 가난한 이웃을 섬김은 물론이다. 교회에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돈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교회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서 돈을 의지하면 그것 자체가 문제다. 이러면 헌금을 이야기해도 ‘교회가 돈 이야기만 한다’고 오해를 사기 쉽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란 말은 개인의 삶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교회 전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종종 교회의 재정 비리 소식을 접할 때마다 너무 안타깝다. 교회가 돈을 사랑해 범한 악은 개인이 범한 것보다 그 악영향이 훨씬 크다. 하나님 이름을 더럽히는 데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교회가 돈 문제로 세상에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다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다.
여러 종교개혁자가 수차례 주장한 말이 있다.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대로 교회 개혁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돈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이 필요하다. 돈 문제에 대해 잘못된 관행을 회개하고 이를 바꾸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진정한 회개를 위해선 지갑이 회개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런 회개는 성도 개인에게만 국한해선 안 된다. 한국교회 전체에게 필요한 일이다.
***[역경의 열매] 방선기(32) 논란의 목사 이중직 문제… 돈 버는 목적으로 판단해야
목회자의 다른 직업을 갖는 동기가
경제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인지
돈에 대한 욕심 때문인지 살펴보고
전자일 경우 오히려 격려해야 마땅
방선기 일터개발원 이사장은 목회자 이중직 문제를 바라볼 때 돈을 버는 목적을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 사진은 목회사회학연구소와 굿미션네트워크가 2021년 서울 종로구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연 ‘제3차 사회적 목회 콘퍼런스’에서 목회자들이 상담받는 모습. 국민일보DB
한국교회는 전통적으로 목회자가 다른 직업을 갖는 걸 금했다. 최근엔 생계를 위해 목회자가 다른 일을 하는 걸 허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 문제가 계속 논란이 돼 온 건 지금껏 이중직을 ‘목회에 전념해야 하느냐’나 ‘다른 직업을 가져도 되느냐’의 관점에서 보기 때문이다.
논란의 이중직 문제를 쉽게 풀기 위해선 돈을 버는 목적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목회자가 다른 직업을 갖는 동기가 경제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돈을 사랑하기 때문인가. 이를 분명히 파악해야 문제 해결이 쉬워진다. 전자라면 문제 될 것이 없다. 가족의 생계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불신자보다 더 악하다.(딤전 5:8)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다른 직업을 갖고 일한다면 이는 잘못이다. 돈을 사랑함은 악의 뿌리다.(딤전 6:10)
이중직 목회자뿐 아니라 목회에 전념하는 목회자도 돈을 버는 목적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 목회자가 목회의 대가로 경제적 보상을 받는 건 당연하다.(고전 9:13~14) 만일 목회자가 경제적 보상을 거절해 가족을 힘들게 한다면 이는 거룩한 게 아니라 무책임한 것이다. 반대로 목회자가 돈을 사랑해 목회의 보상을 과도하게 요구한다면 이 또한 옳지 않다. 선지자 미가는 제사장이 삯을 받고서야 율법을 가르치며 예언자가 돈을 받고서 계시를 밝히는 걸 책망했다.(미 3:11) 목회에 전념했어도 돈을 사랑하면 책망받을 수 있다.
목회자라면 목회에 전념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하지만 경제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다른 직업을 갖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니다. 목회 이외의 일을 하면서까지 교회를 섬기려는 이들을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오히려 격려해야 마땅하다. 물질의 욕심 때문에 다른 일을 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이는 문제가 된다. 이런 사람에겐 욕심을 버리라고 권면해야 한다. 물론 이 둘을 명확하게 구별하긴 어렵다. 당사자의 신앙 양심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현재 한국교회에서 빚어지는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다. 목회에 전념하는 목회자 중 일부가 돈을 사랑해 신앙 인격을 저버리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가족 부양을 위해 사역 대가를 받는 건 타당하다. 그러나 교회의 경제적 보상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당회와 갈등을 빚거나 물의를 일으키는 건 문제다. 이러면 그간 목회자가 해온 헌신은 빛이 바래고 만다. 평생 목회한 목회자가 은퇴할 때 교회에 과도한 돈을 요구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런 목회자는 평생 목회만 했더라도 주님께 칭찬받지 못할 것이다. 돈으로 이미 보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목회자가 목회에 전념했느냐’나 ‘목회와 병행해 다른 일을 했느냐’가 아니다. 어떤 동기로 목회와 목회 외 다른 일을 했느냐가 중요하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는 말씀은 두 경우에 다 적용된다. 주님은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목회를 포기치 않는 목회자를 칭찬하리라 생각한다. 오히려 전임으로 사역해도 사례가 부족하다며 교회와 갈등을 일으키는 목회자를 볼 때 주님께서 안타까워하시리라.
***[역경의 열매] 방선기 (33) 돈 버는데도 꼭 필요한 성령의 열매인 ‘인내와 절제’
돈을 모으고 쓰는 데는 인내와 절제 필요
성령 충만한 삶 사는 이는 인내와 절제를
비롯한 성령의 열매 자연히 맺을 수 있어
방선기 일터개발원 이사장은 돈을 다룰 때 성령의 열매인 인내와 절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진은 성경 앞 동전 무더기 위에 십자가가 올려진 모습. 게티이미지뱅크
요즘 서점가에 돈을 다룬 책이 가득하다. 이들 책 대부분은 돈을 어떻게 많이 벌며 번 돈을 유지하는 법은 무엇인지 대해 초점을 맞춘다. 이들 책 가운데 눈에 띄는 내용이 하나 있었다. ‘돈을 벌고 이를 유지·관리하기 위해선 인내와 절제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성경 속 ‘성령의 열매’에서 언급한 두 가지 성품을 재정 전문가가 강조한 것이 놀라웠다. 나는 청년들에게 성령의 열매를 가르칠 때마다 ‘자신에게 어떤 성령의 열매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느냐’고 질문하곤 했다. 이때마다 꽤 많은 이들이 인내와 절제를 답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인내는 노동자는 물론 투자자에게도 가장 필요한 덕목이다. 돈과 관련해 사람들이 가장 많이 범하는 실수는 ‘빨리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이다. 대박을 노리다 낭패를 보는 이들이 적잖다. 성경은 ‘속히 부자가 되려는 사람은 벌을 면치 못한다’고 경고한다.(잠 28:20)
교도소 출소자의 갱생을 위해 이들을 자기 회사에 취업시킨 한 실업인의 말이다. 그는 이들이 직장생활 적응에 실패하는 건 ‘한탕주의’에 젖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매일 일해 돈을 벌지만 모으진 못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내심이 부족하다는 이야기였다.
인내심의 진가는 주식 투자에서 더 선명히 드러난다. 주식 투자가 투기로 바뀌는 데는 인내심에 달렸다. 투자한 뒤 인내해야 하는데 사고팔고를 반복하면 결국 실패한다고 한다. 모든 과정을 길게 보고 인내해야 돈을 제대로 벌고 유지할 수 있다.
돈을 버는 데는 인내뿐 아니라 절제도 필요하다. 돈을 벌다 보면 더 많이 벌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데 그러다 무리수를 두기 마련이다. 자신이 이 일을 무한정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어느 정도 벌 것인지를 정해야 한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지점에서 중단할 수 있어야 한다.
돈을 쓰는 데 절제가 필요한 건 두말할 것도 없다. 절제를 모르면 부자라도 자신의 부를 유지할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절제는 금욕과 다르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이 허락한 것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다만 그 정도가 지나치면 안 된다. 돈 역시 절제해야 바르게 벌고 번 돈도 유지할 수 있다.
성령의 열매인 인내와 절제가 돈 모으는 데 필요한 가치로 꼽힌다니 참 흥미롭다.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사람은 인내와 절제를 비롯한 성령의 열매를 자연히 맺을 수 있다. 결국 돈을 벌고 관리하는 데도 성령 충만이 필요한 셈이다.
성경은 경제적 책임이 있는 사람이 자기 손으로 돈을 벌라고 말한다.(살전 4:11~12)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투자도 하라고 한다.(전 11:1~2) 그러나 남보다 빨리 벌고자 하는 세상 풍조와는 달리 인내를 갖고 돈을 벌라고 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모든 것이 선하고 거룩하다고 말한다.(딤전 4:4~5)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것으로 삶을 누리라고 한다.(전 9:7~10) 다만 무한정 누리길 원하는 세상과는 달리 절제하라고 한다. 이렇게 살기 위해 우리는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할 것이다.
***[역경의 열매] 방선기 (34·끝) “일터사역 할 수 있게 허락한 하나님 은혜에 감사”
하나님 계획아래 맡겨진 ‘일터사역’
내 의지대로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여러 일상 일터에서 사역 지속하며
이를 허락한건 주님 뜻이라고 확신
‘역경의 열매’란 이름으로 나의 간증을 공개하는 건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내성적인 성격으로 추진력 있게 밀고 나가는 체질이 아닌 데다 자칫 잘못하면 자랑으로 비칠까 우려됐다. 그럼에도 용기를 낸 건 그동안 지면을 빌어 한국교회에 하고 싶었던 말을 전하고 싶어서다.
무엇보다 그간 한국교회에 선보인 ‘일터 사역’의 중요성을 알리고자 했다. 신학교에서 강의했던 ‘일상 영성’ 역시 코로나 이후 그 필요성이 더 커졌다. 교회 건축 염려 없이 사목 등의 일을 하며 가정교회를 이끌 수 있다는 사실도 꼭 알리고 싶었다. ‘목회자 이중직’ 논란이 사그라지지 않는 기독교계에 일종의 대안이 되리라 본다. 결국 한국교회에 부탁하고 싶은 메시지를 내 인생을 빌어 전한 셈이다.
사교육과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독 시민운동에 열심히 나섰지만 아직 미완의 숙제로 남은 게 마음 아프다. 우리 사회가 이 두 문제를 비중 있게 다루곤 있지만 해결책 마련에는 다소 늦은 감이 있다. 이제는 저출산 여파로 불거진 ‘이민자 문제’에 대비해야 할 때다. 급격한 인구 감소 때문에 한국 사회는 이민자 문제를 필연적으로 마주할 것이다. 기간제 근로자를 넘어 한국에 정착하려는 이들을 한국 사회가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한 진중한 고민이 필요하다.
일터 사역을 하며 만난 여러 기독 실업인이 최근 입을 모아 한 말이 있다. ‘사업이 망한다면 이유는 하나다. 일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수도권이 아닌 지역은 문제가 더 심각하다. 앞으로 한국교회는 점차 밀려올 이민자를 어떻게 대할지 깊이 고민해야 할 것이다. 나중엔 ‘보내는 선교사’가 아닌 ‘이민자 대상 선교사’ 파송을 논의해야 할지 모른다. 대학 선교단체 역시 비슷한 고민이 필요하다. 대학교 강의실에 자국민보다 해외 유학생이 더 많이 앉아있는 모습이 곧 현실이 될 수 있다. 선교단체도 이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 방식 마련을 고심해야 할 것이다.
현재 나는 일터개발원에서 강의와 콘퍼런스, 관련 서적 출판 등 일터 사역을 지속하고 있다. 온누리교회 프랑스어 예배 설교자로도 섬기고 있다. 이들 일이 내 의지대로 시작된 건 아니지만 이를 허락한 하나님의 뜻이 분명 있다고 확신한다. 추후 생각지 않았던 일이 내게 또 맡겨진다면 이 또한 하나님의 계획이리라.
내가 참 좋아하는 말씀이 있다. ‘모든 것이 합력해 선을 이룬다’는 로마서 8장 28절 말씀이다. ‘고난도 선으로 바꾼 하나님’이 담긴 창세기 50장 20절도 좋아한다. 그간의 인생을 돌아보면 이들 말씀대로 주님이 내 삶을 이끄셨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지금껏 일터 사역을 할 수 있게 허락하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드린다. 기업 현장과 해외 대학에서 일터 사역을 연구하고 실행토록 배려한 이랜드그룹과 일터개발원(구 직장사역연구소) 후원자에게도 감사를 전한다.
혹 그간의 일을 표현하는 데 있어 본의 아니게 자랑으로 비친 부분이 있다면 너른 양해를 구한다. 부족한 글이 독자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다면 그것만으로도 참 보람찬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