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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1. 연려실기술-산천의 형승(形勝) [연려실기술 별집 제16권] -지리전고(地理典故)
1] 서울.경기 산천의 형승(形勝)
서울[漢都] 성 안에는 경치 좋은 곳이 비록 적으나 그 중에서 노닐 만한 곳은 삼청동(三淸洞)이 가장 좋고, 인왕동(仁王洞)이 그 다음이고, 쌍계동(雙溪洞)ㆍ백운동(白雲洞)ㆍ청학동(靑鶴洞)이 또 그 다음이다.
삼청동은 소격서의 동쪽에 있다. 계림제(鷄林第)로부터 북쪽에 어지럽게 서 있는 소나무 사이에는 맑은 샘물이 쏟아져 나온다. 물을 따라 올라가면 산은 높고 나무는 빽빽히 섰으며 바위로 된 골짜기가 깊숙하다.
몇 리를 못 가서 바위가 끊어져 낭떠러지를 이룬 곳이 있는데, 물이 낭떠러지의 허공에 뿌려져 흰 무지개를 드리운 것 같고 흩어지는 물방울은 구슬이 뛰는 것 같다. 그 아래에 물이 모여서 깊고 큰 못이 되었다.
그 곁은 평탄하고 넓어서 사람 수십 명이 앉을 만하다. 높은 소나무들이 그 위에 엉켜 덮여 있고 바위 사이에는 모두가 진달래와 단풍잎으로 봄과 가을에는 붉은 그림자가 비치어 빛이 난다. 지위가 높고 점잖은 사람으로 와서 노는 이가 많다. 그 위로 두어 걸음 올라가면 연굴(演窟)이다.
인왕동은 인왕산 아래의 구불구불하고 깊은 골짜기가 복세암(福世庵)을 에워두른 곳인데, 골짜기의 물은 합류하여 시내를 이루고 있다. 서울 사람들이 다투어 와서 활쏘기를 한다. 쌍계동은 성균관의 웃골[上谷]에 있다.
두 샘물이 산골의 실개천을 이루었는데 김뉴(金紐) 자(字)는 자고(子固)이다. 가 개천가에 초당을 짓고 복숭아를 심어 무릉도원을 모방하니 진산(晉山) 강희맹(姜希孟)이 여기에 대하여 글[賦]을 지었다. 김뉴의 문장과 풍류가 당시 세상에 드날렸으므로 호걸들이 그를 따라 노는 이가 많았다.
백운동은 장의문(藏義門) 안에 있는데 중추(中樞) 이염의(李念義)가 이곳에 살았다. 시인들이 그의 유거(幽居)를 제목으로 하여 시를 지은 것이 있으나 이염의는 글을 알지 못하였다. 청학동은 남학(南學)의 남쪽 골에 있는데 골이 깊고 맑은 개천이 있어서 활쏘기 장소를 차릴 만하다. 그러나 산이 민둥민둥하여 수목이 없는 것이 유감이다.
성 밖에 놀 만한 곳은 장의사(藏義寺)의 앞 개천이 가장 좋은데 시냇물이 삼각산의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나온다. 골짜기 안에는 여제단(?祭壇)이 있고 그 남쪽에는 무이정사(武夷精舍)의 옛 터가 있다. 절 앞에는 겹쳐 포개진 돌들이 수십 길이나 되어 수각(水閣)을 이루었는데 절 밑 수십 보(步) 되는 곳에 차일암(遮日岩)이 있다.
바위는 매우 험하고 높아 냇물을 베고 있으며 바위 위에 장막을 쳤던 구멍이 있고, 바윗돌은 층층으로 포개져서 계단과 같다. 급한 물줄기가 어지럽게 쏟아져서 맑은 하늘에 우레가 우는 듯 귀를 시끄럽게 하는데 물은 맑고 돌은 희어서 완연히 속세를 벗어난 뛰어난 경치이므로 벼슬아치들이 와서 노는 이가 끊어지지 않는다.
물을 따라 몇 리를 내려가면 부처바위[佛岩]가 있는데 바위에 불상을 새겨 놓았다. 시냇물은 북쪽으로 꺾어져 곧게 서쪽으로 흐른다. 그 사이에 예전에는 물방아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없다.
그 아래의 몇 리 되는 곳이 홍제원(弘濟院)이다. 홍제원의 남쪽에 작은 언덕이 있고 언덕에는 큰 소나무들이 가득한데 그 위에 예전에는 정자가 있었다. 중국 사신이 옷을 갈아 입던 곳이었는데 정자가 없어진 지 이미 오래이다.
사현(沙峴)의 남쪽에서 모화관까지의 사이에는 좌ㆍ우 양쪽에 키 큰 소나무 들과 밤나무 숲이 겹겹으로 서로 뒤섞이어 덮여 있다. 서울의 활쏘기 하는 이, 전송하는 이, 영접하는 이들이 많이 여기에 모인다. 그러나 쏟아지는 계곡의 급류도 맑게 흐르는 물도 없다.
목멱산(木?山)의 남쪽 이태원(梨泰院)의 들에는 고산사(高山寺)의 동쪽에 솟아나는 샘물이 있으며 큰 소나무가 골에 가득하여 성 안의 부녀자들이 빨래하러 많이 간다. 서쪽으로 가면 진관사(津寬寺)ㆍ중흥사(中興寺)ㆍ서산사(西山寺)가 있고, 골[洞]의 북쪽에는 청량사(淸?寺)ㆍ속개사(俗開寺) 등이 있으며, 골의 동쪽에는 풍양사(?壤寺)가 있고, 남쪽에는 안양사(安養寺) 등이 있다.
모두 높은 산과 큰 시내가 있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쉴 만한 곳이 한두 곳이 아니지만, 서울에서 가깝지 않기 때문에 놀러 오는 사람이 드물다.《용재총화》
○ 개성부 : 송악이 진산(鎭山)이다. 처음 이름은 부소(扶蘇)였고 또 곡령(鵠嶺)이라고도 일컬었다. 그 아래가 만월대(滿月臺)이다. 소위《송사(宋史)》에, “큰 산을 의지하고 궁전을 지었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만월대의 뒤가 자하동(紫霞洞)이다. 동부(洞府)는 그윽하고 막혔으며 시냇물은 맑고 잔잔하여 가장 뛰어난 절경이다. 남쪽에 있는 용수산(龍首山)ㆍ진봉산(進鳳山)이 내안산(內案山)을 이루고 있다. 진봉산에는 철쭉꽃이 많이 피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진봉산 철쭉이라고 한다.
○ 천마산(天磨山) : 송악의 북쪽에 있다. 모든 봉우리가 높고 험하여 하늘을 찌르는 듯한데 바라보면 푸른 기운이 서린다.
○ 면주동(綿紬洞) : 오관산(五冠山) 밑에 있으며, 골 안은 매우 넓다. 골짜기 입구에 해를 가리는 바위가 있는데 바윗돌은 넓고 평탄하여 앉을 만하다. 돌을 파서 구멍을 만들었는데 사람들은 옛사람들이 장막의 기둥을 세운 곳이라고 말한다. 《여지승람》에는 장단(長湍)에 들어 있다.
○ 산대암(山臺岩) : 송경(松京)의 숭인문(崇仁門) 밖에 있다. 백 길이나 되는 절벽의 형상이 색을 칠한 누각같다. 화담(花潭)은 영통동(靈通洞) 입구에 있다. 못가에는 그림 병풍을 펴 놓은 것 같은 푸른 절벽이 높게 서 있고 못 곁에 작은 바위가 있는데 4면이 깎은 듯하다. 여기에도 또한 장막을 쳤던 구멍이 있다. 이 못에서부터 위는 산이 둘러 있어 길이 꾸불꾸불하여 시냇물을 여러 번 건너야 영통동에 이르게 된다. 영통동은 오관산 밑에 있다. 《여지승람》에는 장단에 들어 있다.
○ 화담은 경치가 뛰어나게 좋으며, 서경덕(徐敬德)이 은거하던 곳이다. 못가의 바위에 서사정(逝斯亭)이 있다.
○ 박연(朴淵) : 천마산과 성거산(聖居山) 사이에 있다. 형상이 돌로 만든 장독과 같아 넘어다보면 아주 검다. 못의 중심에 솟아나온 반석(盤石)이 있는데 섬바위라고 한다. 물이 절벽으로 흘러 사나운 폭포가 되어 아래로 떨어지는데 열 길은 될 것이며, 마치 흰 무지개가 하늘에 비치고 나는 구름이 높은 돌다리를 씻는 듯, 우레가 내닫고 번개가 치는 것 같아서 소리가 천지를 진동한다. 속세에 전하기를, “예전에 박 진사(朴進士)라는 사람이 이 못 위에서 피리를 불었더니 용왕의 딸이 감동하여 박 진사를 끌어들여 남편으로 삼았다. 그래서 못 이름을 ‘박연’이라고 한다. 또는 박 진사의 어머니가 와서 울다가 못에 떨어져 죽었으므로 못 이름을 고모담(姑姆潭)이라고도 한다.” 한다. 폭포 아래에 범사정(泛?亭)이 있다.
○ 대흥동(大興洞) : 박연에서 올라가면 산은 점점 더 높아지고 물은 더욱 맑아지며 바윗돌은 매우 험준하다. 관음굴 앞에 이르면 물이 깊어 못을 이루고 있다. 물 속에서 솟아나온 돌이 있는데 이를 구담(龜潭)이라고 한다. 또 몇 리를 올라가면 깊은 웅덩이가 있는데 물이 몹시 맑다. 4면이 모두 돌인데 어떤 것은 책상이나 평상 같고, 어떤 것은 담장이나 집과 같다.
그 위는 모두가 오래된 소나무이다. 또 몇 리를 올라가면 샘물이 동쪽 벼랑에서 솟아 나오는데 여기를 보현동(普賢洞)이라고 하고 또 두어 걸음 올라가면 마담(馬潭)이라고 하는 곳이 있다. 또 몇 리를 올라가면 대흥사(大興寺)가 있다. 골짜기에 수목이 무성하여 여름에는 목련화의 향기가 코를 찌르고 가을이면 단풍과 황엽(黃葉)이 물 밑에 거꾸로 비치니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모두《여지승람》에 있다.
○ 장단의 석벽 : 강물의 원류는 안변(安邊)ㆍ영풍(永?)에서 나와 이천(伊川)ㆍ안협(安峽)을 거쳐 마전(麻田)에 이르러 대탄(大灘)과 합류하고 부동(府東)에 이르러 두기진(頭耆津)이 되는데 양쪽 언덕에 푸른 돌이 수십 리를 벽처럼 서 있어 바라보면 그림과 같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고려 태조가 거둥하여 놀던 곳이라고 한다. 그 아래가 임진 나루터이다.
○ 여주의 청심루(淸心樓) : 객관(客館)의 북쪽에 있다. 여강의 동쪽 언덕인 봉미산(鳳尾山)에 신륵사(神勒寺)가 있는데 벽돌 탑이 있어 세상에서는 벽사(?寺)라고 부른다. 절 옆 강변에 강월헌(江月軒)이 있는데 낭떠러지의 돌들이 아주 기묘하다. 강의 남쪽 언덕 아래에 말바위가 있는데 전설에는 바위 아래에 여룡(驪龍)이 있는 곳이 있다고 한다. (譯: 민족문화추진회. 원문의 내용이 길어 편의상 지방별로 나누었슴을 밝힙니다.)
2] 충청도 산천의 형승(形勝)
○ 충청도 청풍(淸風 청주)의 한벽루(寒碧樓) : 객관의 동쪽에 있는데 큰 강물을 굽어보고 있다.
○ 단양의 도담(島潭) : 군 북쪽 24리 되는 곳에 있다. 세 바위가 한복판에 솟아 있다. 못에서부터 물을 수백 보쯤 거슬러 올라가면 푸른 석벽이 만 길이나 되어 보이는데 황양목(黃楊木)과 측백나무가 바위틈에 거꾸로 나 있고, 바위에 구멍이 문같이 생겨 있어 바라보면 딴 세상 같다.
○ 구담(龜潭) : 양쪽 언덕의 석벽이 하늘에 높이 솟아 해를 가리었다. 왼 쪽과 오른 쪽에 강선대(降仙臺)ㆍ채운봉(彩雲峯)ㆍ옥순봉(玉?峯)이 만 길이나 솟아 있는데 순전히 하나의 돌이다. ○ 가은암(可隱岩)ㆍ상선암(上仙巖)ㆍ중선암(中仙巖)ㆍ하선암(下仙巖)이 있다.
○ 이락루(二樂樓) : 군의 서쪽에 있다. 김일손(金馹孫)의 기문(記文)이 있다. 운암(雲巖)은 읍의 동남쪽에 있다. 서애 유성룡의 정자 터가 있다.
○ 제천의 의림지(義林池) : 못 서쪽에 후선정(候仙亭)이 있다.
○ 영춘(永春)의 성산(城山) 남쪽에 있는 석굴 : 높이가 한 길 남짓하고 넓이는 10척이 넘으며 깊게 들어가서 끝이 없다. 물이 철철 흘러나오는데 깊이는 무릎이 잠길 정도이고 얼음과 같이 맑고 싸늘하다. 고을 사람이 횃불 열 자루를 갖고 들어갔는데 굴이 아직 끝나기 전에 횃불이 다하여 돌아 나왔다 한다.
○ 소백산 결(缺)
○ 충주의 달천(達川) : 임진왜란 때 명 나라의 장수가 물맛을 보고 “중국의 여산 폭포(廬山瀑布)와 같다.”고 말하였다. 달천은 속리산에서 발원하여 금천(金遷) 앞에 이르러 청풍강(淸風江)과 합류한다. 금천은 대도시이다. 금천의 서쪽 십여리 되는 곳에 가흥창(嘉興倉) 조운창 이 있다. <팔역지(八域誌)>
○ 탄금대(彈琴臺) : 신라 때 선인(仙人) 우륵이 거문고를 타던 곳이다.
○ 보은의 속리산 : 현(縣)의 동쪽 44리 되는 곳에 있다. 아홉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는데 산 정상에 문장루대(文藏樓臺)가 있다. 천연적으로 돌이 포개져 힘차게 공중에 솟아 있는데 그 높이는 몇 길이나 되는지 알 수 없으며 그 넓이는 삼천 명은 앉을 만하다. 대(臺) 위에 가마솥 같은 구덩이가 있는데 물이 철철 넘쳐서 가뭄에도 줄지 않고 장마에도 불지 않는다. 세 갈래로 나누어져서 반공(半空)으로 흘러내려가는데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낙동강이 되고, 남쪽으로 흐르는 것은 금강이 되며, 서쪽으로 흘러 북쪽으로 꺾어진 것은 달천이 된다. 산 아래에는 여덟 개의 다리를 아홉 번 돈다는 팔교구요(八橋九遙)라는 이름이 있다. 한 줄기의 물이 빙 돌고 굽이마다 다리가 있는데, 법주사(法住寺)에 이르게 된다. 절의 서쪽 봉우리에 거북처럼 생긴 돌이 있는데, 자연히 생겨난 천연석이다. 《여지승람》
○ 영동(永同)의 용연(龍淵) : 현의 서쪽 16리에 있으며, 골짜기 입구의 양쪽 언덕은 깎아 세운 듯한 석벽이 2리쯤 들어가면 두 봉우리가 맞보고 있는데 바위로 된 봉우리는 높고 가파르다. 중간에 돌절구처럼 생긴 곳이 있어 못의 하류가 여기에 괴어 있는데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세상에서는 기연(妓淵)이라고 부르는데 물이 넘쳐서 폭포가 되어 수백 척을 날아 흐른다. 그 아래에 깊은 못이 있다. 《여지승람》
○ 공주의 금강 : 강물을 내려다 보는 곳에 사송(四松)ㆍ금벽(錦壁)ㆍ독락병(獨樂屛) 등의 정자가 있다. 올라가서 조망을 즐길 만한 경치가 있다. 쌍수산성(雙樹山城)의 공북루(拱北樓)는 매우 장엄하고 화려하다.
○ 첫째 유성(儒城), 둘째 경천(敬天), 셋째 이인(利仁), 넷째 유구(維鳩)는 세상에서 말하는 살 만한 곳이다.
○ 계룡산의 서북쪽에 있는 용연(龍淵) : 물이 넘쳐서 큰 시내를 이루니 산의 남쪽과 북쪽에 경치 좋은 곳이 많다. 동쪽에는 봉림(鳳林)이 있고 북에는 갑사(岬寺)와 동학사(東學寺)가 있다.
○ 부여의 백마강 : 조룡대(釣龍臺)ㆍ낙화암ㆍ자온대(自溫臺)ㆍ고란사(皐蘭寺) 등이 있으니 백제 때의 고적이다. 암벽이 기묘하고 아름다우며 경치가 뛰어나게 좋다.
○ 덕산(德山)의 가야산 결(缺)
○ 보령(保寧)의 영보정(永保亭) : 최고의 명승지라고 일컫는다. 박은(朴誾)의 시에,
땅은 푸드덕거리며 날아가려는 날개와 같고/地如拍拍將飛翼
누각은 흔들흔들 매지 않은 배와 같다/樓似搖搖不繫?
고 한 곳이 바로 여기이다.
○ 청라동(靑蘿洞) 결(缺)
○ 해미(海美)의 가야산 : 상왕산(象王山)과 서로 연해 있다. 동쪽 가야사(伽倻寺)가 있는 동학(洞壑)은 곧 옛날 상왕(象王)의 궁궐이 있던 터이다. 서쪽에 수렴동(水簾洞)이 있는데 산악과 폭포가 매우 기묘하다. 북쪽에 강당동(講堂洞)ㆍ무릉동이 있는데 수석이 또한 아름답다.
○ 남포(藍浦)의 성주산(聖住山) : 남ㆍ북의 두 산이 합하여 큰 골짜기가 되었다. 수구(水口)가 밝고 깨끗하다. 산 밖에서 검은 옥벼루를 생산하는데 이따금 관상(觀賞)에 쓰일 만한 돌이 난다.
○ 화계(花溪) 결(缺)
○ 홍주의 광천(廣川) 결(缺)
○ 청주의 화양동(華陽洞) : 선유산(仙游山) 칠성대(七星臺)로부터 서쪽으로 재[嶺]의 능선을 넘어가면 여기가 외선유동(外仙游洞)이다. 조금 내려가면 청주의 파곶산(?串山)인데 동천(洞天)이 깊숙이 뚫려 있다. 큰 시냇물이 암석의 골짜기와 돌벼랑으로 쏟아져 내려와 천번 돌고 만번 굴러 흐르니 경치가 기괴하고 맑고 빼어나다. 그 아래가 화양동인데 수석(水石)이 더욱 기묘하고 뛰어나다. 그 가운데 만동묘(萬東廟)가 있다.
3] 강원도 산천의 형승(形勝)
○ 강원도 회양(淮陽)의 단발령(斷髮嶺) : 천마산의 금성현(金城縣)의 경내에 있다. 속언에, “이 재에 올라 금강산을 본 자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고자 하기 때문에 이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 금강산 : 또는 개골(皆骨)ㆍ열반(涅槃)ㆍ풍악(楓岳)ㆍ지달(??)이라고도 부르며 모두 1만 2천 봉이다. 내산과 외산을 합하여 1백 8개소의 절이 있다. 단발령으로부터 장안사(長安寺)에 이르는 사이에 백천동(百川洞)ㆍ업경대(業鏡臺)ㆍ백화암(白華菴)ㆍ표훈사(表訓寺)를 지나게 된다. 정양사(正陽寺)에 오르면 천을대(天乙臺)ㆍ개심대(開心臺)ㆍ헐성루(歇星樓)가 있어서 가장 이 산의 참된 모습을 보여 주는데 바로 중향성(衆香城)과 마주 대하고 있어서 경치를 완상하기에 더욱 좋다. 명소(名炤)와 낙월(落月)ㆍ대향로(大香爐)ㆍ소향로(小香爐)ㆍ금강대ㆍ망고대(望高臺) 등의 봉우리들이 앞뒤로 둘러 벌여 섰다.
북쪽으로 들어가면 만폭동인데 바위 위에 양사언(楊士彦)이 쓴 ‘봉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岳 元化洞天)’이라는 여덟 글자가 있다. 골짜기 안의 보덕굴(普德窟)에는 관음각(觀音閣)이 있다. 절벽을 파서 판자를 걸고 밖으로 구리쇠 기둥을 세워 그 위에 작은 집 세 칸을 만들었는데 쇠사슬로 얽어서 바윗돌에 못박아 놓았다.
물줄기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여덟 개의 못이 있는데, 관음담(觀音潭)ㆍ진주담(眞珠潭)ㆍ화룡담(火龍潭)ㆍ벽하담(碧霞潭)ㆍ□ 구(龜) □이라 한다. 진주담과 벽하담이 가장 기묘하다. 수건애(手巾崖)라는 돌이 있고, 사자암이라는 봉우리가 있으며, 불지암(佛地菴)ㆍ송라암(松蘿菴)이라는 암자가 있다.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것이 마하연(摩訶衍)ㆍ묘길상(妙吉祥)이다. 송라암의 동쪽 큰 골에는 무수한 폭포들이 갈라지고 나누어져서 아득하게 퍼져 흐르는 것이 마치 흰 무지개 같다. 봉우리와 암석은 솟아 있는 것은 날이 선 칼과 같고, 날카로운 것은 송곳과 같고, 우뚝 치켜 든 것은 손과 같고, 서루 마주 닿은 것은 이빨과 같고, 굽은 것은 팔꿈치 같고, 가로 뻗은 것은 팔과 같다. 불지암(佛地庵)은 또한 매우 그윽하고 가장 아름답다.
만회암(萬灰庵)을 거쳐 백운대에 오르는데, 구경하는 사람들은 쇠줄을 붙잡고 올라가서 중향(衆香)ㆍ백옥(白玉)ㆍ석병(石屛)을 관람한다. 중향성은 만인봉(萬?峯)의 정상에 있다. 모두 흰 돌인데 층계가 있어 탁자를 펴 놓은 것 같다. 탁자 위에 한 개의 서 있는 돌을 안치하였는데 불상 같으나 얼굴의 형상이 없다. 좌ㆍ우의 돌 상탁 위에도 작은 석상들을 두 줄로 배열하였는데 또한 얼굴의 형상은 분명치 않다. 속언에 담무갈(曇無竭)이 여기에 머물어 살았다고 전한다. 금강산의 주봉은 비로봉(毗盧峯)이다.
정면으로 동해 바다를 굽어보고 있는데 여름이라도 오히려 춥다. 산기운과 안개가 얼룩지고 엉겨서 구름빛 같다. 또 원통곡(圓通谷)ㆍ수미탑(須彌塔)ㆍ백탑동(百塔洞) 등 여러 경치 좋은 곳이 있는데 어느 것이나 기이한 경치가 아닌 것이 없다. 구룡연에 내팔담(內八潭)이 있는데 큰 폭포가 높은 산봉우리로부터 날아 내려오면서 굽이굽이에 못을 이룬 것이 여덟 층인데, 위험하여 들어가기는 어렵다.
영원암(靈源庵)ㆍ마하연(摩呵衍)에서 내수참(內水站)으로 넘어가면 여기가 내금강과 외금강의 분계이며 은선대(隱仙臺)를 지나 유점사에 이른다. □ 영기연(永其淵)은 금강산의 북쪽 기슭에 있다.
○ 고성(高城)의 금강외산 : 불정암(佛頂巖)에는 구멍이 있는데 깊이가 바닥이 없다. 속언에 용녀(龍女)가 나와 불정화상(佛頂和尙)의 설법을 들었다고 전한다. 불정대(佛頂臺)에 올라 12폭포를 바라보면 푸른 언덕과 석벽들이 그림 병풍처럼 둘러섰는데 폭포가 쏟아져 내려오는 형상이 흰 무지개 같은 것이 열둘이다. 유점사의 불전은 능인전(能仁殿)이라고 하는데 역대의 왕실에서 하사한 옛 기물들이 많다.
만경동(萬景洞)에는 선담(船潭)이 있다. 상원(上院)ㆍ중원(中院)ㆍ내원(內院)ㆍ만경대를 이리저리 다니면 동해의 뛰어난 경치를 시원스럽게 볼 수 있다. 성불암(成佛菴)에서 해뜨는 것을 보고 발연사(鉢淵寺)에서 중의 무리가 폭포로 달려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발연으로부터 비스듬히 신계사(新溪寺)로 돌아 옥류동(玉流洞)에 이르러 구룡연을 항하면 곧 내팔담(內八潭) 외에, 아홉번째로 꺾이는 곳인데 폭포가 기이하고 웅장하다. 신물(神物)이 물의 소용돌이 속에 숨어 있어서 사람의 소리가 조금만 높으면 문득 우레가 울고 비가 오는 이상한 일이 있다고 한다.
○ 만물초(萬物草) : 금강산 동북쪽의 동천(洞天)에 있다.
○ 삼일포(三日浦) : 겹쳐진 봉우리와 포개진 멧부리로 둘러쌓였는데 그 가운데에 36봉이 있다. 계곡은 맑고 그윽하며 몽천사(夢泉寺)라는 절이 있다. 호수의 중심에 작은 섬이 있는데 푸른 돌이 편편하지 않다. 거기에 사선정(四仙亭)이 있는데 옛날 영랑(永郞)ㆍ술랑(述郞)ㆍ남랑(南郞)ㆍ안상(安詳) 등 네 신선이 놀던 곳이라고 한다.
호수의 남쪽 작은 봉우리에 돌로 된 감실(龕室)이 있다. 봉우리의 북쪽 낭떠러지의 돌에는, ‘영랑도남석행(永郞徒南石行)’이라고 붉게 쓴 여섯 글자가 있다. 암자 뒤 문암(門巖)에서 해뜨는 것을 볼 수 있다. 호수의 가운데에 또 매향비(埋香碑)ㆍ사자암 등 여러 좋은 경치가 있다.
○ 해산정(海山亭) : 고을의 관아 서쪽에 있다. 서쪽으로는 금강산을 쳐다보고 동쪽으로는 바다를 바라보며, 남쪽으로는 긴 시내를 굽어보고 있다.
○ 남강(南江)의 대호정(帶湖亭) 결(缺)
○ 해금강(海金剛) : 《여지승람》에는 포구라고 하였다. 산에 바위가 우뚝 솟아 층층으로 포개져서 계단과 같고 위에는 백여 명이 앉을 만하다. 바다 가운데 암석이 바둑처럼 놓여 있는데 돌은 모두 흰빛이다. 해안에는 석봉이 그림처럼 벌여 서 있다. 동쪽을 바라보면 5리나 되는 사이에 석봉이 병풍처럼 벌여 있고, 봉우리 아래에는 돌들이 있어서 용이 움켜잡고 호랑이가 끌어당기는 것과 같다. 물을 따라 내려가기도 하고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면서 구경하면 그 경치는 이루 말할 수 없으며 배에서 뱃사람이 전복 따는 것도 보인다.
○ 통천의 총석정(叢石亭) : 군의 북쪽 20리에 있다. 가로 뻗은 봉우리가 갑자기 바다로 뻗어 섬과 같다. 바닷가 언덕 낭떠러지에 줄지은 돌들이 빗살과 같이 정연하게 늘어섰고, 수십 개의 돌기둥이 언덕 곁에 모여 섰는데 언덕에서 10여 보(步) 떨어진 곳에는 또 네 개의 돌기둥이 따로 떨어져 물 가운데 섰다. 돌은 모두 6면으로 되어 있다. 줄지어 선 돌 수백 개가 한 돌기둥을 이루었는데 기둥도 또한 6면(六面)이다. 돌기둥 위에는 다복솔[矮松]이 있는데 수명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알 수 없다.
여기를 사선봉(四仙峯)이라고 일컫는다. 봉우리에서 조금 북쪽 해안에는 돌의 모양이 또 틀리니, 어떤 것은 길고 어떤 것은 짧으며, 어떤 것은 쌓여 있고 어떤 것은 흩어져 있으며, 어떤 것은 기대어 있고 어떤 것은 가로질러 있다. 이 돌은 모두 4면인데 혹 5면도 있으며 기괴하고 이상하게 생겼다. 총석정은 가로지른 봉우리 위에서 돌기둥을 마주 굽어보고 있다.
○ 금란굴(金?窟) : 나무 없는 민둥 봉우리가 가운데는 높고 주위는 조금씩 낮아져서 바다를 굽어 본다. 봉우리의 낭떠러지에 굴이 있는데 넓기는 7, 8척이나 되고 깊이는 10여 보(步)쯤 된다. 물의 깊이는 헤아릴 수 없다. 굴의 네 모퉁이의 석벽은 높이가 3척이며, 돌의 무늬는 노란색인데 아롱져서 금색으로 무늬가 있는 가사(袈裟)와 같다.
○ 옹천(甕遷) : 또는 왜륜천(倭淪遷)이라고도 한다. 군의 남쪽 65리에 있다.
○ 흡곡(?谷)의 시중대(侍中臺) : 현의 북쪽 7리에 있다. 긴 능선이 구불구불하게 동쪽에 도사리고 있다. 3면이 모두 큰 호수인데 물가는 모래섬을 굽어 둘러 있고 밖은 큰 바다가 둘러 있다. 바다 가운데 일곱 개의 섬이 호수와 바다 사이에 죽 늘어섰으며 푸른 솔이 길을 끼고 있다. 시중대의 옛이름은 칠보(七寶)였는데 감사 한명회(韓明澮)가 올라와 유람할 때 그를 정승에 임명한다는 명령이 왔기 때문에 마침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 간성(杆城)의 청간정(淸澗亭) : 군의 남쪽 40리에 있다. 석봉이 우뚝 솟았는데 층층마다 대(臺)와 같고 높이가 수십 길이나 된다. 위에는 용트림을 한 소나무 몇 그루가 있다. 대의 동쪽에 만경루가 있으며, 대의 아래에는 돌들이 어지럽게 울쑥불쑥 바다에 꽂혀 있다. 놀란 파도가 함부로 돌을 때리니 물방울이 눈처럼 날아 사방에 흩어진다.
○ 선유담(仙游潭) : 군의 남쪽 10리 되는 산골에 있다. 작은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는데 반은 호수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있다.
○ 영랑호(永郞湖) : 군의 남쪽 55리에 있는데 둘레가 30여 리이다. 암석이 기묘하고 괴이하며, 호수의 동쪽에 작은 봉우리가 있는데 반은 호수의 가운데로 들어가 있다.
○ 화담(花潭) 결(缺)
○ 양양의 낙산사(洛山寺) : 부의 동북 쪽 15리의 오봉산(五峯山)에 있다. 일명 낙산사라고 한다. 이화정(梨花亭)ㆍ빈일료(寶日寮)가 있고 절의 동쪽 두어 마장 되는 곳에 관음굴이 있다.
○ 설악 외산(雪嶽外山) : 신흥사(神興寺)ㆍ내원암(內院庵)을 지나 방향을 바꿔 계조굴(繼祖窟)을 향하면 굴은 천후산(天吼山) 아래에 있다. 두루 식당폭포(食堂瀑布)를 구경할 수 있다.
○ 쌍성호(雙城湖) : 부(府)의 북쪽 40리 되는 간성군과의 경계에 있다. 호수의 주위가 수십 리나 되며, 뛰어난 경치가 영랑호보다 더 좋다.
○ 강릉의 경포대 : 부의 동북쪽 15리 거리에 있다. 일명 경호(鏡湖)라고도 한다. 주위는 20리인데 물은 깊지도 않고 얕지도 않으며 사면과 중앙의 깊이가 같다. 서쪽의 언덕에 산봉우리가 있고, 봉우리 위에 대(臺)가 있으며, 옆에 약(藥)을 만들던 돌절구가 있다. 갯벌의 동쪽에 판자다리가 있는데 강문교(江門橋)라고 한다. 다리 밖은 죽도(竹島)이고 죽도의 북쪽은 흰 모래가 5리나 된다. 모래밭 저편에는 끝없는 바다가 있는데 해뜨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절묘한 경치이다. 호수에서는 적곡합(積穀蛤)이 난다. 보충 : 예전에는 경포대에 온방(溫房)과 양실(?室)이 있었는데 감사 박명준(朴命俊)이 철거했다. 이는 사객(使客)들을 오래 묵지 못하게 하려고 한 것이다.《희암집(希庵集)》
○ 한송정(寒松亭) : 경포대의 남쪽 두어 마장되는 곳에 있다. 차[茶] 끓이던 샘과 돌 부엌과 돌절구가 있는데 네 신선이 놀던 곳이다.
○ 대관령 : 아흔 아홉 굽이이다. 서쪽에는 서울로 통하는 큰 길이 있다. 재의 허리에 원읍현(員泣峴)이라는 고개가 있고, 재 아래에는 구산동(丘山洞)이라는 골짜기가 있어 경치가 뛰어나게 아름답다.
○ 오대산 : 강릉부의 서쪽 1백 40리의 거리에 있다. 동쪽에는 만월봉(滿月峯), 남쪽에는 기린봉(麒麟峯), 서쪽에는 장령봉(長嶺峯), 북쪽에는 상왕봉(象王峯), 중앙에는 지로봉(智?峯) 등 다섯 봉우리가 둘러섰는데 각 봉의 대(臺)마다 각각 한 암자가 있다. 산 아래에 월정사(月精寺)가 있고 절 곁에는 사고(史庫)가 있다. 또 금강연이라는 못이 있는데 사면이 모두 반석이며, 폭포가 10척(尺)을 흘러 굽이쳐 돌아서 못이 되었다. 서대(西臺) 밑에 통을 댄 수함(水檻)이 있는데 곧게 솟아오르는 샘물은 그 빛과 맛이 보통 물과 다르다. 이것이 서쪽으로 흘러서 한강의 원류가 된다.
○ 삼척의 죽서루(竹西樓) : 절벽이 천 길이나 되는데 기이한 바위가 무더기로 늘어섰다. 그 위에 높다란 누각을 가설하여, 아래로 오십천(五十川)을 굽어본다. 냇물이 굽이쳐 돌아서 못이 되었다.
○ 태백산의 황지(黃池) : 산 위에 들이 벌여 있는데, 위에는 작약봉(芍藥峯)이 있고, 아래에는 우리나라 시조가 살던 옛터가 있다고 하나 그 곳을 알 수가 없다. 황지의 물이 남쪽으로 30여 리를 흘러가서 작은 산을 뚫고 남쪽으로 나가는데 이를 천천(穿川)이라고 한다. 이것이 낙동강의 원류가 된다.
○ 울진의 망양정(望洋亭) :《여지승람》에는 평해에 들어 있다.
○ 평해(平海)의 월송정(越松亭) : 군의 동쪽 7리에 있다. 푸른 솔이 만 그루나 있고 흰 모래는 눈과 같다. 이상의 아홉 고을을 영동 9군(嶺東九郡)이라고 한다.
○ 인제 설악의 한계폭포(寒溪瀑布) : 산 위에 성이 있고, 냇물이 성 안에서 흘러나와 폭포를 이루었다. 매달린 것 같은 물줄기가 수백 척(尺)이나 내려 쏟아지니 바라보면 하늘에서 흰 무지개 드리운 것 같다. 임진왜란 때 중국 장수가 중국의 여산폭포보다 좋다고 말하였다 한다. 원통역에서부터 동쪽은 겹친 멧부리와 높은 나무의 숲에 싸여 계곡은 깊숙하고 그윽하며, 시냇물은 가로 세로 흘러서 건너는 곳이 서른 여섯 곳이나 된다. 또 남쪽 봉우리는 절벽이 천 길이나 되는데 기묘하고 괴이하여 형용할 수가 없다. 그 아래에 맑은 샘물이 바위에 부딪쳐 못을 이루었는데, 또 그 동쪽 몇 리 되는 곳에는 벼랑을 따라 작은 길이 있고 암벽의 빈 구멍은 입을 벌리고 있으며 봉우리 바위는 높게 뻗어나 용이 움켜잡고 범이 끌어당기는 것과 같고 층층대와 같이 여러 층의 돌이 무수하니 지형이 뛰어난 경치가 영서에서 제일이다.
○ 원주의 치악산 : 산 안에는 계곡이 많고 경치가 그윽하며 기이하다. 산에는 신령한 감응이 많아서 사냥꾼도 감히 짐승을 잡지 못한다.
○ 사자산(獅子山) : 치악산의 동북쪽에 있다. 30리에 걸쳐 물과 바위가 있는데 주천강(酒泉江)의 근원이다. 남쪽에는 도화동(桃花洞)ㆍ두릉동(杜陵洞)이 있는데 모두 시내와 샘물의 경치가 뛰어나게 좋다.
○ 춘천의 우두촌(牛頭村) : 소양강 위에 두 갈래 물이 합류한 삼각주(三角洲) 안에 있으며 물 부근에 돌이 있다.
○ 정선의 풍혈(風穴) : 대음산(大陰山)의 바윗돌 사이에 있다. 그 아래에 얼음을 두면 여름이 지나도록 녹지 않는다. 또 물구멍이 있는데, 남강(南江)의 물이 여기에 이르러 나뉘어져 땅 속으로 들어갔다가 모마어촌(毛麻於村)에 이르러 땅 위로 솟아 나온다.
○ 대음강(大陰江)의 하류에 용암연(龍岩淵)이 있다.
○ 철원의 북관정(北寬亭) : 결(缺)
○ 보개산(寶蓋山) : 결(缺)
○ 고석정(孤石亭) : 큰 바위가 3백 척 높이로 우뚝 솟았다. 바위를 따라 올라가면 구멍이 하나 있는데 배를 땅에 대고 들어가면 열 사람 정도가 앉을 만하다. 큰 냇물이 바위 아래에 이르러 못이 되고 서쪽으로 꺾어져 남쪽으로 흐른다. 앞뒤에 바위 멧부리가 벽처럼 서 있다.
○ 순담(筍潭) : 결(缺)
○ 평강(平康)의 정자연(亭子淵) : 큰 시냇물이 세 방면의 분수령으로부터 마을 앞에 흘러 와서 깊이가 두 배를 수용할 만하다. 석벽이 병풍같이 둘러 있고, 언덕 위에는 정자와 누대가 있다. 여기는 황씨(黃氏)가 대를 물려가며 사는 곳이다.
○ 이천(伊川)의 광복산촌(廣福山村) : 현의 북쪽 60리에 있다. 안변(安邊)ㆍ영풍(永?)의 물이 여기에 이르러 깊어지고 고리처럼 둘렀다. 북쪽에는 고미탄(古美灘)의 깊은 물과 검산(劍山)의 막힌 데가 있다.
4] 경상도 산천의 형승(形勝)
○ 경상도 안동의 학가산(鶴駕山) : 두 갈래의 물 사이에 있다. 산세는 오관산(五冠山)과 삼각산과 흡사하나 다만 돌로 된 봉우리가 적다. 아래에 풍산(?山)의 들이 있다.
○ 영호루(映湖樓) : 낙동강의 원류가 태백산의 황지(黃池)에서 나와 남쪽 예안에 이르러 동쪽으로 꺾어져 서쪽으로 흐르다가 여기에 와서 비로소 커지면서 굽이쳐 돌아 호수가 된다. 무협(巫崍)이 그 왼쪽에 벌여 있고, 성산(城山)이 오른쪽에 버티고 있다. 누각의 편액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이다. 누각의 북쪽에 신라 때의 옛 절이 있는데 절의 정전이 들 가운데 높다랗게 서 있다. 서쪽에는 관왕묘(關王廟)의 석상이 있다.
○ 귀래정(歸來亭)과 임청각(臨淸閣) : 이씨(李氏)가 대대로 전해오며 사는 곳인데 영호루와 함께 읍 중의 이름난 경치이다.
○ 하회(河回) : 서애 유성룡의 옛집이 있는 곳이다. 깊이 괴인 물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으며 산은 학가산(鶴駕山)에서 나누어진 것이다. 석벽이 강 위를 빙 둘러 있어 그 경치가 조용하고 빼어나게 아름답다. 위에는 옥연정(玉淵亭)과 작은 승암(僧菴)이 바위 사이에 띄엄띄엄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니 진실로 뛰어난 경치이다. 하회 마을의 위와 아래에는 또 삼구정(三龜亭)ㆍ수동(繡洞)ㆍ구담(九潭)ㆍ가일(佳逸) 등 강가에 이름난 마을들이 있다.
○ 임하(臨河)의 몽선각(夢仙閣), 학봉 김성일의 옛집, 내성(奈城)의 청암정(靑岩亭) 찬성 권벌(權撥)의 옛집, 춘양(春陽)의 한수정(寒水亭) 정언 권두경(權斗經)의 세거지 은 모두 태백산 남쪽 물가에 자리잡은 이름난 마을들이다.
○ 청량산(淸?山) : 산맥이 태백산에서 내려와 예안강(禮安江) 위에서 우뚝 솟았다. 밖에서 바라보면 다만 흙 봉우리가 두어 줄기뿐이다. 강물을 건너 골 안에 들어가면 사면의 석벽이 만 길이나 되는 높이로 빙 둘러 있어서 말로 형용할 수가 없다. 안에 난가대(爛柯臺)가 있는데 최고운(崔孤雲 최치원)이 바둑 두던 곳이라고 한다. 그 곁에 한 노파의 석상이 석굴 속에 안치되어 있다. 산에는 연대사(蓮臺寺)가 있다.
○ 문경의 새재[鳥嶺] : 결(缺)
○ 계립령(鷄立嶺) : 결(缺)
○ 병천(甁川) : 속리산의 남쪽에 환적대(幻寂臺)가 있다. 온갖 바위와 골짜기로 오솔길도 알 수가 없다. 냇물이 청화산(靑華山)을 따라 동쪽으로 흘러 용추(龍湫)에 흘러가는데 이것이 병천이다. 냇물의 남쪽에 있는 도장산(道藏山)과 청화산과 마주 보고 있다. 두 산 사이의 용추에서부터 그 위를 통틀어 용유동(龍游洞)이라고 한다. 골 안의 평지는 모두 반석이다. 큰 냇물이 돌 위에 질펀하게 퍼져 흐르면서 조그마한 폭포가 되기도 하고, 작은 못이 되기도 하며 물발[水簾)이 되기도 하면서 물통[水槽] 같기도 하고 절구 같기도 하며, 짐승 같기도 하여 천태만상의 경치는 기기괴괴하다. 그 가운데 송씨(宋氏)의 정자가 있다.
○ 선유산(仙遊山) : 청화산의 동북쪽에 있다. 산정은 평탄하고 계곡이 매우 길다. 위에 칠성대(七星臺)ㆍ호소굴(虎巢窟) 진인(眞人) 최도(崔)와 도사 남궁두(南宮斗)가 도를 수련하던 곳이다. 이 있다. 시냇물이 흘러내려가 낭풍원(?風苑)이 되고, 동쪽으로 흘러 대탄(大灘)으로 들어간다.
○ 풍기(?基)의 욱금동(郁錦洞) : 소백산 아래에 있다. 물과 바위가 수십 리에 걸쳐 있다. 위에 비로전(毗盧殿)이 있고, 욱금동 입구에 퇴계의 서원이 있다.
○ 죽령 : 결(缺)
○ 예안의 도산 : 황지(黃池)에서 나오는 물이 여기서 큰 시내를 이룬다. 시내 위의 양쪽 산이 합하여 긴 골짜기가 되고 산기슭에는 모두 석벽이 있다. 퇴계가 거처하던 암서헌(岩棲軒)이 지금도 있다. 도산의 하류에 있는 분강(汾江)은 유수 이현보(李賢輔)의 고향이고, 그 남쪽은 좨주 우탁(禹倬)의 고향으로서 모두 경치가 좋은 곳이다.
○ 순흥(順興)의 죽계(竹溪) : 소백산에서 흘러나온다. 물과 바위가 청명하다. 위에 백운동 서원이 있다.
○ 청하(淸河)의 내연산(內延山) : 바위와 폭포의 좋은 경치가 있다. 산에 대ㆍ중ㆍ소 세 개의 돌솥이 바위 위에 벌여 있다. 사람들이 움직이는 세 개의 돌[三動石]이라고 일컫는다. 손가락으로 건드리면 약간 움직이는데 두 손으로 흔들면 움직이지 않는다.
○ 합천의 가야산 : 해인사가 있고 거기에 장경각(藏經閣)이 있다. 입구에는 홍류동(紅流洞)의 무릉교(武陵橋)가 있다. 나는 듯 쏟아지는 냇물과 반석으로 된 계곡이 수십리나 된다. 동북쪽에 만수동(萬水洞)이 있다.
○ 청송(靑松)의 주왕산(周王山) : 돌로 동부(洞府)를 만들었다. 샘과 폭포가 뛰어나게 기묘하다.
○ 대구의 팔공산(八公山) : 석봉이 가로 뻗쳐 있고 시내와 산이 자못 아름답다.
○ 비슬산(琵瑟山) : 산 속에 솟아 오르는 샘물과 천석(泉石)이 있다.
○ 청도(淸道)의 운문산(雲門山) : 이어져 있는 봉우리와 첩첩이 겹친 멧부리가 둘러 있고, 계곡은 깊숙하고 그윽하다.
○ 오산(鰲山) : 군의 남쪽 2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동쪽에 한 골짜기가 있는데 이름을 고사동(高沙洞)이라고 한다. 날씨가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려고 하면 먼저 골짜기가 울고 구름 기운을 뿜어낸다. 구름이 고사동 안으로 들어가면 비가 오고, 고사동 밖으로 나가면 바람이 분다.
○ 의흥(義興)의 바람구멍 : 현(縣)의 동쪽 30리에 있는 화산(華山)의 기슭에 있다. 넓이는 3자 2치이고, 길이는 2자 8치이다. 바람이 구멍에서 나오는데 매우 차다. 초여름에도 반드시 얼음이 언다.
○ 의성의 얼음구멍 : 빙산(氷山)의 큰 바위 아래에 있다. 높이는 3자이고, 넓이는 4자 8치이며, 가로 들어간 것이 5자 1치인데 이것을 바람구멍이라고 한다. 또 바위 바닥에 바로 내려 뚫어진 구멍이 있는데 넓이는 1자나 되나 깊고 얕은 것은 알 수 없다. 입하(立夏) 뒤에 살얼음이 얼고, 매우 더워지면 얼음이 굳어지고, 토우(?雨 안개가 끼고 내리는 이슬비)가 끼면 얼음이 녹는다. 봄과 가을에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으며, 겨울이 되면 따뜻한 기운이 봄과 같다. 이것을 얼음구멍이라고 한다.
○ 진주의 지리산 :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한다. 산을 둘러싸고 아홉 고을이 있으며, 산의 높이와 넓이는 몇백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가장 높은 봉우리는 동쪽은 천왕봉(天王峯)이라 하고, 서쪽은 반야봉(般若峯)이라 한다.
서로 연결된 계곡은 깊고 커서 백 리나 되는 긴 골짜기가 많다. 산의 맨 꼭대기에 향적사(香積寺)ㆍ가섭대(迦葉臺)가 있고 내를 따라 서쪽에는 화암사(華岩寺)ㆍ연곡사(燕谷寺)가 있으며, 남쪽에는 신흥사(神興寺)ㆍ쌍계사가 있다. 이 절에는 최고운(崔孤雲 최치원)의 화상이 있다. 냇가의 석벽에는 큰 글자로 ‘고운(孤雲)’이라고 새긴 것이 많다. 큰 냇물이 신흥사 앞에서 섬진강으로 흘러들어간다. 또 한 줄기 물이 향적사(香積寺) 앞에서 내려와 살천(薩川)에 이르러 진주를 돌아서 동쪽으로 흐르는데 이것을 청천강(菁川江)이라고 한다.
천왕봉에서 동쪽으로 내려가면 천불암(千佛菴)이 있고, 암자에서 조금 북쪽으로 올라가면 작은 굴이 있다. 동쪽으로 바다를 굽어보며 서쪽으로 천왕봉을 등지고 있어 맑은 경치가 절묘(絶妙)하다. 이 굴을 ‘암법주굴(巖法主窟)’이라고 부른다. 또 만수동ㆍ청학동이 있는데 만수동은 지금의 구품대(九品臺)이고, 청학동을 지금은 해계(海溪)라고 한다.
○ 함양의 지리산 : 북쪽에 영원동(靈源洞)ㆍ군자사(君子寺)ㆍ유점촌(鍮店村)ㆍ벽소운동(碧?雲洞)ㆍ추성동(楸城洞)이 있는데 모두 경치 좋은 곳이다. 산골물이 합쳐서 임천(?川)이 되고, 흘러 내려 가서 용유담(龍游潭)이 된다. 용유담의 양쪽에는 바윗돌이 평평하게 깔리고 겹쳐 쌓였는데 다 갈아 놓은 것 같다. 가로 놓이기도 하고 옆으로 펴지기도 하였다. 어떤 것은 큰 장독을 닮았는데 그 깊이는 바닥이 없고, 어떤 것은 술단지 같기도 하여 천 가지 만 가지로 기기괴괴하다. 물 속에는 가사어(袈裟魚)라는 물고기가 있다. 물은 군(郡)의 남쪽 25리 지점에 이르러 엄천(嚴川)이 된다. 시내를 따라 올라가고 내려가면 개천과 돌의 경치가 매우 기이하다.
○ 산청의 환아정(換?亭)
○ 웅천(熊川)의 수락암(水落巖) : 율천현(栗川峴)의 남쪽 시냇물이 산허리의 바윗돌 사이로 흘러 들어가 수십 길의 폭포를 이루는데, 세 갈래로 나누어 아래로 쏟아진다. 그 지방 사람들이 다음해의 장마와 가뭄을 점치게 되는데 전라도가 가물려면 서쪽 갈래가 마르고, 경상도가 가물려면 동쪽 갈래가 마르며, 충청도가 가물려면 가운데 갈래가 흐르지 않는다고 한다.
○ 동래의 해운대(海雲臺) : 현(縣)의 동쪽 18리에 있다. 산기슭이 바다에 들어가서 누에고치의 머리와 같다. 그 위는 모두 동백(冬柏)과 두충(杜沖)으로 덮여 있다.
○ 순흥(順興)의 부석사(浮石寺) : 떠 있는 바위와 식사(息沙)가 있고 선비화(仙飛花) 나무가 있으며 취원루(聚遠樓)가 있다.
○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5] 전라도 산천의 형승(形勝)
○ 전라도 전주의 만경대(萬景臺) : 부(府)의 동남쪽 10리 거리인 고덕산(高德山)의 북쪽 기슭에 있다. 석봉이 기이하게 빼어나고 형상이 층층으로 겹쳐진 구름과 같다. 그 위에는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다. 사면에 숲이 울창하고, 석벽은 그림과 같다. 서쪽으로 여러 산도(山島)를 바라볼 수 있고, 북쪽으로는 기준성(箕準城)과 통하며, 동남쪽은 태산(太山)을 등지고 있어서 경치가 천태만상이다.
○ 광주의 무등산 : 서석산(瑞石山)이라고도 한다. 한가운데는 높고 주위는 차차 낮으며, 높고 크게 50여 리를 웅장하게 서려 있다. 위에는 돌 수십 개가 가지런히 서 있는데, 높이는 백 척이나 될 것 같다. 주봉사(主峯寺)가 있고, 그 곁에 세 개의 돌이 있는데 높이가 수백 척이나 된다. 이름을 삼존석(三尊石)이라고 한다. 또 십대(十臺)가 있으니 그 중의 하나가 풍혈대(風穴臺)이다. 석벽 아래에 바람구멍이 있다.
○ 영암의 월출산 : 가장 높은 봉우리를 구정봉(九井峯)이라고 한다. 바위가 우뚝 솟은 것이 있으니 높이가 두 길이 된다. 그 곁에 구멍 하나가 있는데 겨우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하다. 그 구멍을 따라 산 정상에 올라가면 20명이 앉을 수 있다. 그 평평한 곳에 오목하게 파여서 물동이처럼 물을 담고 있는 것이 아홉 개가 있는데 비록 가물더라도 마르지 않는다. 봉우리 아래에 돌 두 개가 층층으로 된 바위 위에 우뚝 따로 서 있으니 높이는 한 길이 넘고 둘레는 열 아름이나 되는데 서쪽은 산 정상에 붙었고 동쪽은 절벽을 굽어보고 있다. 그 무게는 비록 몇천, 몇백 명을 동원하더라도 움직일 것 같지 않은데도 한 사람이 흔들면 떨어질 듯하면서 떨어지지 않으니 움직이는 돌이라고 부른다. 영석산(靈石山)이라고도 한다. 북쪽에 도갑사(道岬寺)가 있고, 서쪽 기슭에는 조암(槽巖)의 물과 바위가 있다.
○ 강진의 백운동(白雲洞) : 월출산의 남쪽에 있다.
○ 장흥의 천관산(天冠山) : 돌로 생긴 산세가 기묘한 경치이다. 항상 자줏빛 구름과 흰구름이 그 위에 덮여 있다.
○ 금산(錦山)의 덕유산(德裕山).
○ 제원천(濟源川) : 냇물과 산의 경치가 뛰어나게 좋다.
○ 무주(茂朱)의 적상산(赤裳山) : 산의 사면이 벽처럼 섰는데 층층으로 끊겨져서 치마와 같다. 여기에 사고(史庫)가 있다.
○ 주계(朱溪) : 냇물과 산의 경치가 뛰어나게 좋다.
○ 용담(龍潭) : 주취산(珠?山)에서 냇물이 흘러가 수성천(壽城川)이 되어 달계(達溪)로 들어간다.
○ 구례 : 서쪽에는 봉동(鳳洞)의 물과 바위가 있고 동쪽에는 화엄사(華嚴寺)ㆍ연곡사(燕谷寺)의 아름다운 경치가 있으며, 남쪽에는 구만(九灣)이 있다. 지리산의 서쪽 가지가 여기서 끝난다. 잔수진(潺水津)이 둘러 안고 있다.
○ 장수의 장계(長溪) 결(缺)
○ 동복(同福)의 적벽(赤壁) : 내를 따라 올라가면 물염정(勿染亭)이 있다.
○ 남원의 광한루 결(缺)
○ 부안의 변산 : 산기슭이 서해(西海) 속으로 뾰족하게 들어갔다. 산봉우리가 백여 리를 빙 둘러 여러 겹으로 겹쳤으며 깊숙하고 그윽하다.
○ 순천 조계산(曹溪山)의 송광사(松廣寺) : 물과 바위가 깨끗하고 봉만(峯巒)이 밝고 곱다.
○ 순창의 복흥(福興) : 양쪽에 산을 끼고 큰 들이 열렸다. 냇물이 동쪽으로 흐르고 있다.
6] 황해.함경도 산천의 형승(形勝)
○ 황해도 문화(文化)의 구월산 결(缺)
○ 해주의 부용당(芙蓉堂) 결(缺)
○ 수양산(首陽山) : 폭포가 있고 산정(山頂)에 대(臺)가 있다. 그 가운데에 석담(石潭)의 물과 바위가 있다.
○ 연안의 와룡지(臥龍池) : 세상에서 부르는 이름은 남대지(南大池)이다. (아래 주 참조)
○ 장연(長淵)의 백사정(白沙汀) : 남쪽에는 연지(蓮池)가 있고 북쪽에는 승선봉(勝仙峯)이 있다. 삼면이 바닷가인데, 흰 모래가 평평하게 펴져 있는데,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무더기로 쌓여서 모래 언덕을 이루었다. 잔솔과 해당화가 붉은빛과 푸른빛을 서로 비친다. 또 입죽암(立竹巖)ㆍ비로봉(毗盧峯)이 있다.
○ 평산(平山)의 총수산(?秀山) : 깎아 세운 듯한 절벽과 가파른 벼랑이 흐르는 물을 아래로 굽어보고 있다. <동월기(董越記)>
○ 멸악산(滅惡山) : 면악(綿岳)이라고도 한다. 동쪽 기슭의 화천동(花川洞)에 높은 재와 큰 무덤이 있다. 속언에 전하기를, 청(淸) 나라 사람들의 조상이 살던 땅이라고 한다. 《팔역지》
○ 황주(黃州) 결(缺)
○ 함경도 무산(茂山)의 백두산 : 바로 장백산(長白山)이다. 산이 모두 세 층으로 되어 있다. 높이는 2백 리나 되고 가로 뻗친 것이 천 리나 된다. 그 정상에 못이 있는데 주위가 80리이다. 남쪽으로 흐르는 것은 압록강이 되고, 북쪽으로 흐르는 것은 송화강과 혼동강(混同江)이 된다. 동북쪽으로 흐른 것은 소하강(蘇下江)과 속평강(速平江)이 된다. 동쪽으로 흐른 것은 두만강(豆滿江)이 된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아야고하(阿也苦河)가 된다.”고 하였는데, 아마 속평강(速平江)을 가리킨 듯하다. 《여지승람》에는 회령부에 들어 있다.
○ 회령의 쌍개암(雙介巖) : 부(府)의 남쪽 1백 43리에 있다. 바위의 높이는 열 길이 넘는다. 가운데에 두 개의 구멍이 있는데, 물이 항상 솟아 나온다. 그 동쪽 1리 거리에 또 바위가 있는데 바다를 위압하는 기세로 대치하고 있다. 양쪽 벼랑은 천 척(尺)이다. 위에 깊은 못이 있는데, 비가 오기를 빌면 잘 감응한다.
○ 경흥의 적지(赤池)
○ 부령(富寧)의 형제암(兄弟巖) : 부(府)의 남쪽 20리에 있다. 산기슭에 두 바위가 마주 보고 섰는데,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다. 작은 시내가 그 사이를 흘러내린다.
○ 허통곡(虛通谷) : 물과 돌이 맑고 경치가 기묘하나, 찾아가는 사람이 드물다.
○ 경성(鏡城)의 명간천(明澗川)
○ 명천(明川)의 칠보산 동부(七寶山洞府) : 돌로 된 지세가 깎아지른 듯이 험하고 굴은 조각한 것 같다.
○ 귀문관(鬼門關)
○ 길주의 성진(城津)
○ 장백산
○ 마천령(磨天嶺)
○ 단천(端川)의 마운령(磨雲嶺)
○ 이성(利城)의 시중대(侍中臺)
○ 함흥의 함관령(咸關嶺)
○ 낙민루(樂民樓) : 남쪽으로 군자하(君子河)를 굽어보고 있다. 물 위에 만세교(萬歲橋)가 있는데, 다리의 길이는 5리나 된다.
○ 영흥의 용흥강(龍興江)
○ 안변(安邊) 설봉산(雪峯山)의 석왕사(釋王寺) : 산 위에 세 개의 석봉이 높이 서 있기 때문에 검봉산(劍峯山)이라고도 한다.
○ 황룡산(黃龍山) : 산 위에 용추(龍湫)가 있다. 또 골 안에 구연(九淵)이 있는데, 물과 돌이 뛰어나게 좋으며 오압산(烏鴨山)이라고도 한다. 학포(鶴浦)의 큰 호수는 주위가 30여 리이고, 사면이 모두 흰 모래이다. 언덕의 모래 가운데에 해당화가 환하게 핀다. 약한 바람이 잠깐만 불어도 가는 모래가 날려 작게는 무더기를 이루고 크게는 봉우리를 이룬다. 경치는 영동 육호(嶺東六湖)에 비길 곳이 아니다.
○ 국도(國島) : 부(府)의 동쪽 60리 바다 가운데에 있다. 흰 모래가 명주와 같다. 그 위를 산이 반원의 구슬처럼 둘러 있다. 벼랑의 돌들은 모두 모나고 바르며 벽처럼 가지런하게 늘어섰다. 언덕의 돌들은 평평하고 둥근 것이 배열되어 있는데 한 면에 한 사람씩 앉을 만하나 가지런하지는 않다. 수백 보를 가면 낭떠러지의 높이가 수백 척이 되는데, 그 돌들은 흰 빛이고 모나고 바르며, 길고 짧은 것이 일치한다. 한 줄기마다 그 꼭대기에 모두 작은 돌 한 개씩을 이고 있어서 화표주(華表柱)의 머리와 같다. 작은 굴이 있는데, 배를 타고 들어가면 점점 좁아져서 배가 들어갈 수가 없어, 굴의 깊이를 헤아릴 수도 없다. 굴의 좌ㆍ우쪽에 묶어 세운 듯한 돌들은 바깥면의 것과 같으나 더욱 정연하고 가지런하다. 굴의 윗면에서 아래로 드리워진 석각(石脚)들은 모두 평평하고 반듯하여 장기판이나 바둑판을 엎어 놓은 것 같으며 마치 그 하나하나를 톱으로 끊어 놓은 것과 같다. 굴 북쪽에 둥근 돌이 배열된 곳이 있는데, 천 명은 앉을 수 있다. 벼랑의 곁을 동남쪽으로 수백 보 더 가면 낭떠러지의 돌모양이 조금 달라진다. 물에 닳아 조그만 원으로 길이 5, 60척 되는 돌이 네모난 철망을 만들어 담아 놓은 것 같은데, 전면이 한 가닥이 다른 한 가닥과 같아서 사람들이 철망석이라고 한다. 이곡(李穀)의 기문 사면으로 둘러선 돌기둥 가운데는 모래 흙으로 화살대를 만들었다는 말이 전해 온다.
○ 영풍(永?)
○ 평안도 평양 : 금수산의 모란봉이 진산(鎭山)이다. 대동강이 성(城) 밖을 둘러서 남쪽으로 흐른다. 대동문(大同門)의 문루는 강을 굽어보고 동쪽을 향하고 있다.
○ 연광정(練光亭) : 덕암(德巖)의 절벽 위에 있다. 강의 남쪽에는 십 리나 되는 긴 느릅나무 숲이 있다. 연광정을 돌아 북쪽으로 가면 청류벽(淸流壁)이 있다. 벽(壁)이 끝난 곳에 부벽루가 있는데 영명사(永明寺)의 동쪽이다. 절 뒤의 금수산(錦繡山) 산 정상을 을밀대(乙密臺)라고 부른다. 누대 아래의 강가에 기린굴(麒麟窟)과 조천석(朝天石)이 있고, 강의 상류에는 백은탄(白銀灘)과 능라도(綾羅島)가 있다.
○ 성천(成川)의 강선루(降仙樓) : 비류강(沸流江)을 굽어보고 있다. 삼백 칸이나 되어 건축이 웅장하고 화려하여 8도의 누각 중에서 첫째이다. 서쪽으로 흘골산(紇骨山)을 마주보고 있는데, 12개의 기이한 봉우리가 병풍처럼 깎아 세운 듯하다.
○ 안주(安州)의 백상루(百祥樓) : 누대의 곁 성 밖에는 칠불사(七佛寺)와 칠승석상(七僧石像)이 있다.
○ 영변의 약산동대(藥山東臺)
○ 묘향산 : 태백산이라고도 한다. 밖은 흙산이나 봉우리의 허리 위는 모두 기암수석이다. 동부(洞府)는 겹겹으로 둘러져서 성곽과 같고, 큰 냇물이 그 사이에 넓게 퍼져 있다. 위에 단군이 화생(化生)하였다는 석굴이 있다.
○ 의주의 통군정(統軍亭) : 압록강 위에 있다.
7] 지리전고-총지리(摠地理)① ▣연려실기술 별집 제16권
우리나라 땅의 경계는 해좌(亥坐) 사향(巳向)인데 정동은 경상도의 영해부(寧海府)이니, 서울에서 7백 45리 떨어져 있으며, 정서는 황해도의 풍천부(?川府)이니, 서울에서 5백 35리 떨어져 있으며, 정남은 전라도의 해남현이니, 서울에서 8백 96리 떨어져 있으며, 정북은 함경도의 온성부(穩城府)이니, 서울에서 2천 1백 2리 떨어져 있다. 동과 서를 합치면 도합 1천 2백 80리요, 남과 북을 합치면 2천 9백 98리가 된다.
○ 고려 때에는 은병(銀甁)을 돈으로 썼는데 이것을 ‘활구(闊口)’라고 했으며, 우리나라의 지형을 본뜬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활구의 제도를 보지 못하나, 대개 우리나라 땅 모양이 좁고 길어서 서울에서 남쪽으로는 장흥에 이르기까지 9백 75리요, 북쪽으로는 강계에 이르기까지 1천 3백 30리가 되며, 동북쪽으로는 경흥에 이르기까지 2천 3백 59리요, 서남쪽으로는 진도에 이르기까지 9백 리가 되며, 서북쪽으로는 의주에 이르기까지 1천 1백 40리요, 동남쪽으로는 울산에 이르기까지 9백 20리이며, 동쪽으로는 영해(寧海)에 이르기까지 5백 40리요, 서쪽으로는 고양(高陽)에 이르기까지 30리이니, 이것을 보면 활구가 둥글고 길쭉한 모양임을 알 수 있다. 《소문쇄록》
○ 전라도의 김제군 벽골제호(碧骨堤湖)를 경계로 해서 전라도를 호남이라 부르고, 충청도를 호서라고도 부른다. 또는 제천에 의림지호(義林池湖)가 있기 때문에 충청도를 호서라고 한다.
○ 경상도의 고을들은 조령과 죽령 두 고개 남쪽에 있기 때문에 영남이라 부른다.
○ 강원도는 바닷가에 있는 9군(郡)이 단대령(單大嶺) 동쪽에 있기 때문에 영동이라 한다. 단대령은 대관령이라고도 하기 때문에 강원도를 또 관동이라고도 한다.
○ 황해도는 경기해(京畿海)의 서쪽에 있으므로 해서라고 부른다.
○ 함경도는 철령관(鐵嶺關)의 북쪽에 있으므로 관북이라 부르며, 평안도는 철령관 서쪽에 있으므로 관서라고 부른다. 《역대아람(歷代兒覽)》
○ 우리나라의 도읍을 정했던 곳은 한두 곳이 아니다. 김해는 금관국(金官國)의 도읍이었고, 상주는 사벌국(沙伐國)의 도읍이었고, 남원은 대방국(帶方國)의 도읍이었고, 강릉은 임영국(臨瀛國)의 도읍이었고, 춘천은 예맥국(濊貊國)의 도읍이었으니, 이들은 모두 조그마한 지경을 점거한 것으로 지금의 소읍 같은 것은 이루 셀 수 없이 많다. 경주는 동경(東京)으로 신라 1천년의 도읍터인데 산천이 서로 둘러 있고 땅이 기름진데, 그 중에 문천(蚊川) 한 구비가 노닐 만하고 나머지는 별로 기이한 명승지가 없다. 평양은 기자(箕子)가 도읍했던 곳으로 팔조(八條)의 정치와 정전의 제도가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 있으니, 지금의 외성(外城)이 그것이다. 그 후에 연 나라 위만(衛滿)에게 점거되었다가 또 고구려가 도읍한 곳인데, 그 국경은 남으로 한강에 이르고 북으로 요하에 이르렀으며 군사 수십만을 거느린 가장 강한 나라이었다. 고려에서는 서경(西京)을 설치하여 봄과 가을에 왕래하며 순유(巡遊)하는 곳으로 삼았으니, 지금도 사람과 물자가 풍부한 것은 모두 그 남아 있는 교화 때문이다. 영명사(永明寺)는 바로 동명왕(東明王)의 구제궁(九梯宮)이니 기린굴(麒麟窟)과 조천석(朝天石)이 있으며 영숭전(永崇殿)은 고려 장락궁(長樂宮)의 터이다. 도읍의 진산(鎭山)은 금수산(錦繡山)이요, 그 윗봉우리는 모란봉인데, 모두 작은 산으로서 송도와 한성의 주산(主山)처럼 웅장하거나 높지는 않다. 북쪽에는 내[川]가 없으므로 몽고 군사가 휘몰아 쳐들어왔고, 남쪽은 강이 둘렀으므로 묘청(妙淸)이 점거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니 한스러운 일이다. 성문은 넓고 크며 누각은 높으며, 동쪽에는 대동문(大同門)ㆍ장경문(長慶門)의 두 문이, 남쪽에는 함구문(含毬門)ㆍ정양문(正陽門)의 두 문이, 서쪽에는 보통문(普通門)이, 북쪽에는 칠성문(七星門)이 있다. 8도에서 오직 이 도읍터만이 서울과 서로 겨룰 만하다. 동쪽 10리 밖 구룡산(九龍山) 밑에 안하궁(安下宮)의 옛터가 있는데 어느 시대에 지은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아마 별궁인 것 같다.
성천(成川)은 송양국(松壤國)의 도읍이었고 옛 강동(江東)은 양양국(陽壤國)의 도읍이었는데, 비록 지형은 좁으나 산과 물이 좋아 경치가 좋고 그 중에도 용강산성(龍岡山城)은 가장 웅장하여, 지금까지도 높이 솟아 허물어지지 않았다. 전해 오는 말로는 용관국(龍官國)이라고 하는데 어디에 근거한 말인지 알 수가 없다. 부여는 백제의 도읍터로 탄현(炭峴) 안에 반월성(半月城)터가 아직도 뚜렷하다. 비록 백마강으로 참호를 삼았으나 좁고 얕아 왕자가 거처할 곳은 되지 못하니 그렇기 때문에 소정방(蘇定方)에게 멸망되고 말았다. 전주는 견훤이 점거했던 곳이나 오래 못 가서 고려에 항복했는데, 지금도 고도의 유풍이 있다. 철원은 궁예가 점거했던 곳으로서 태봉국(泰封國)이라 불렀는데, 지금도 겹성[重城]의 옛 터전과 궁궐의 층계가 남아 있으며 봄이면 꽃이 어지러이 핀다. 땅의 형세가 험하고 막혔으므로 강을 따라 물건을 운반하기가 어렵다.
오직 송도만은 왕씨(王氏)가 왕업을 일으킨 땅으로, 5백 년 기업을 튼튼히 한 곳이다. 곡봉(鵠峯)을 주산으로 하고 줄기가 뻗어 산세가 둘러 있으니, 비록 작은 산이라도 모두 구역이 정해져 있다. 물이 맑고 깨끗하여 방방곡곡에 놀 만한 곳이 많다. 고종 이후로 강화에 도읍을 옮겼는데, 이곳은 바다 속에 있는 조그마한 섬으로서 도읍이라고 일컬을 수가 없다. 우리 태조가 개국하면서 도읍을 옮길 뜻이 있어 먼저 계룡산 남쪽에 가서 지세를 살펴보고 서울의 규모를 생각하다가 얼마 안 되어 이를 중지하고 한양에 도읍을 정하였다. 술자가 말하기를, “옛날에 공암(孔巖)이 앞에 있다는 참언이 있고 삼각산이 서쪽으로 서역평(曙驛坪)에 연해 있어 참으로 아름다운 땅이라 했더니 뒤에 다시 보니, 모든 산이 밖을 향해 달아나는 형세이므로 백악 남쪽과 목멱산 북쪽이 제왕 만대의 땅으로서 하늘과 함께 무궁할 것이다.”고 하였다. 세속에 전하기를, “송경(松京)은 산과 골짜기가 사면을 쌓고 있어 서로 감싸고 감추어 주는 형세이기 때문에 시대마다 세력을 부리는 권신들이 많고, 한도(漢都)는 서북쪽이 높고 동남쪽은 낮기 때문에, 큰 아들이 가볍게 되고 작은 아들이 무겁게 될 형세이므로 오늘날까지 왕위의 계승과 명공(名公)ㆍ높은 대신에는 대개 작은 아들이 많다.” 하였다. 《용재총화》
○ 비류(沸流)와 온조(溫祚)가 부아악(負兒岳)에 올라가서 살 만한 땅을 골랐는데, 비류는 미추홀(彌趨忽)에 도읍하고 온조는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했다. 뒤에 온조(溫祚)는 도읍을 남한산성 곧 지금의 광주(廣州)로 옮겼다가, 또 북한산성으로 옮겼는데 바로 이곳이 지금의 한양인데, 그가 정한 명당(明堂)은 어디인지 알 수 없다. 한양이 이씨(李氏)의 도읍터라는 것이 도선(道詵)의 도참(圖讖)에 써 있었기 때문에 고려가 남경(南京)을 한양에 세워 오얏나무를 심고 이씨(李氏)의 성을 가진 사람을 골라서 이씨를 부윤(府尹)으로 삼았다. 임금도 또한 해마다 한번씩 순행하고 용봉장(龍鳳帳)을 묻어서 지세를 눌렀다. 내가[서거정(徐居正)] 일찍이 《고려사》를 상고해 보건대, 한양의 명당은 다만 임좌(壬坐) 병향(丙向)의 자리라고만 쓰여 있고 어디라고는 명백히 말하지 않았는데, 지금 경복ㆍ창덕 두 궁(宮)의 정전(正殿)이 모두 임좌 병향인 것을 보면, 고려 때 말한 곳이 아마 이 두 궁(宮)터에서 벗어나지 않은 듯하다. 근래에 술사 최양선(崔揚善)은 승문원 옛 터가 바로 명당이라 했고 어느 사람은 또 종묘의 낙천정(樂天亭)이 명당자리라고 하나 모두 얕은 소견이며 믿을 수 없는 말들이다. 《필원잡기》
○ 세조가 인지의(印地儀)를 만들어 노래[歌]로 찬송했는데 그 법제는 동(銅)을 부어 24위(位)의 그릇을 만들고 그 가운데를 비워 구리 기둥을 세우고 옆으로 구멍을 뚫어 그 위에 구리 저울을 놓고 낮추고 올리면서 보게 하였으니 이것을 규형(窺衡)이라 불렀다. 땅을 측량할 적에 영구(靈龜 지남철)로 사방을 바로잡았으니, 오시(午時) 초일각(初一刻)이 어느 표(標)에 멀고 가까운가를 알려고 하면 먼저 묘시(卯時) 초일각이나 혹은 유시(酉時) 초일각에 표를 해서 엿보게 하고, 다시 묘시와 유시에 표한 곳을 먼저 법에 의해서 사방을 바로잡아 정오(正午) 초일각에 표한 곳을 어느 방위 몇 각(刻)으로 정한다. 이렇게 한 뒤에 명당으로부터 끈으로 앞의 묘시(卯時) 초일각까지 재어서 1천 1백 척에 표하면 세 곳의 오정(午正) 일각(一刻)의 표가 3천 3백이 될 것이니, 이것으로 24위를 바로잡고, 가로 세로와 구부러지고 바른 것을 모두 이것으로써 바로잡았다. 임금이 일찍이 이륙(李陸)ㆍ김유(金紐)ㆍ강희맹(姜希孟) 등을 불러서, 이 법을 강론하고 후원에서 시험하게 하였더니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이에 곧 영릉(英陵) 사산(四山)을 측량하였으며, 그 뒤에 또 경성의 지형을 측량하도록 명하고 모두 이 법을 쓰게 하였다. 그러나 경성은 민가가 즐비하여 측량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이륙 등의 어리석은 의견을 썼으니 한 성 안에 무릇 표를 세운 곳은 모두 이 법을 써서 바로잡고 원근ㆍ고저ㆍ대소ㆍ평험(平險)에 이르기까지 역시 종이에 베끼고 그 속에 24위를 정하고, 지상에서 가장 가까운 곳 하나를 측량하고 이를 줄여서 작은 자로 하면, 다시 땅을 재지 않아도 이 자로 땅 위에 그은 곳을 재어 보면, 번거롭게 걸으면서 재지 않아도 산하와 천지와 성곽과 집들이 모두 제곳을 떠나지 않으면서 원근과 고저가 자연히 추호도 차이가 없게 될
○ 곤륜산(崑崙山) 한 줄기는 큰 사막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동쪽으로 의무려산(醫巫閭山)이 되고 이곳으로부터 크게 끊어져서 요동 들판이 된다. 들판을 건너가서 불쑥 일어난 것이 백두산이 되어 여진과 조선의 경계에 있으니 이것이 곧 《산해경(山海經)》에 이른바 불함산(不咸山)이다. 북쪽으로 뻗친 한 줄기가 두 강을 끼고 영고탑(寧古塔)이 되고, 남쪽으로 뻗어나간 한 줄기가 조선 산맥의 맨 첫째가 된다. 산꼭대기에 있는 큰 못[池]으로부터 분수령이 되어 남쪽으로 내려간 것은 연지소봉(燕脂小峯)ㆍ백산(白山)이 되고 허항령(虛項嶺)ㆍ보다회산(寶多會山)ㆍ완항령(緩項嶺)ㆍ설령(雪嶺)이 된다. 이곳으로부터 동쪽으로 뻗쳐서 장백산이 되고, 한 줄기는 북쪽으로 달려 경성ㆍ부령(富寧)을 지나 두만강을 끼고 동쪽으로 뻗어 경흥에서 그친다. 설령으로부터 남쪽으로 달려서 두리산(豆里山)ㆍ참두령(斬頭嶺)이 되며, 서쪽으로 꺾어져 남쪽으로 가서 황토령(黃土嶺)ㆍ천수령(天守嶺)ㆍ조가령(趙可嶺)ㆍ후치령(厚致嶺)이 되고, 북쪽으로 꺾어져서 태백산이 되며, 그 중간에 뻗친 한 줄기는 서남쪽으로 내려와서 함흥부가 된다.
○ 태백산으로부터 서쪽으로 내려가서 백계산(白階山)이 되고, 남쪽으로 부전령(赴戰嶺)이 되며, 서남쪽은 초황령(草黃嶺)ㆍ설한령(雪寒嶺)이 되며 서쪽으로 뻗친 한 산맥은 평안도가 된다. 원 산맥 줄기는 남쪽으로 내려가서 상검산(上劍山)ㆍ하검산(下劍山)ㆍ오봉산(五峯山)ㆍ마유령(馬踰嶺)ㆍ두미령(頭尾嶺)이 되며, 또 동으로 꺾어졌다가 남쪽으로 내려가서 거모령(巨毛嶺)ㆍ쌍가령(雙加嶺)ㆍ거차리령(巨次里嶺)이 되고, 모흘(?屹)ㆍ마유령(馬踰嶺)ㆍ노인치(老人峙) 3령은 모두 안변(安邊)ㆍ영풍(永?)에 있다. 가 되고 박달치(朴達峙)가 되며, 동쪽으로 꺾어져 세 지방의 분수령이 되는데 동쪽에서 일어나 철령이 되고, 동북쪽으로는 황룡산(黃龍山)이 되고, 남쪽으로 뻗쳐서 축곶령(杻串嶺)ㆍ추지령(楸池嶺)ㆍ금강산ㆍ회전령(檜田嶺)ㆍ진부령ㆍ흘리령(屹里嶺)ㆍ석파령(石波嶺)ㆍ설악(雪岳)ㆍ한계산(寒溪山)이 되고, 오색령(五色嶺)ㆍ 연수파(連水波)ㆍ오대산ㆍ대관령ㆍ두타산ㆍ백복령(百復嶺)이 되었으며, 서쪽으로 꺾어져 태백산이 되고, 서남쪽으로는 우치(牛峙)ㆍ마아령(馬兒嶺)ㆍ소백산ㆍ죽령이 되고, 또 불쑥 솟아서 월악(月岳)ㆍ주흘산(主屹山)ㆍ조령ㆍ의양산(義陽山)ㆍ청화산(淸華山)ㆍ속리산ㆍ화령(火嶺)ㆍ추풍령이 되고, 황악(黃嶽)ㆍ무풍령(舞?嶺)ㆍ대덕산ㆍ덕유산ㆍ육십치(六十峙)ㆍ본월치(本月峙)ㆍ팔량치(八良峙)ㆍ지리산이 된다.
○ 세 지방의 분수령으로부터 산세가 불쑥 일어나서 철령이 되고, 한 가지는 동남쪽으로 뻗쳐 내려가다가 금성(金城)ㆍ 금화(金化) 사이를 지나 꾸불꾸불 내려가서 영평(永平) 백운산이 되고, 적목치(赤木峙)가 되었으며, 북쪽으로 되돌아서 주엽산(注葉山)이 되고, 축석현(祝石峴)이 되었으며, 서북쪽으로는 불곡산(佛谷山)이 되고, 남쪽으로 내려가서 도봉산ㆍ삼각산ㆍ백악ㆍ인왕산이 되고, 한양 경성이 되었다.
○ 검산령(劍山嶺)으로부터 남쪽으로 거차리령(巨次里嶺)에 이르러, 서쪽으로 뻗은 한 줄기는 남쪽으로 내려가서 청량산, 고달산(高達山)이 되고 곡산(谷山)ㆍ학령(鶴嶺)이 된다. 이곳으로부터 두 산맥으로 나뉘어져 한 산맥은 서쪽으로 내려가서 황해도가 되고, 한 산맥은 남쪽으로 뻗쳐 이천(伊川)ㆍ토산(?山)ㆍ금천(金川) 경계를 지나서 화장산(華藏山)ㆍ성거산(聖居山)ㆍ천마산ㆍ오관산(五冠山)이 되고 송악 송경(松京)이 된다.
○ 황해도 산맥은 학령(鶴嶺)으로부터 서쪽으로 뻗쳐 덕업산(德業山)이 되었으며, 북쪽으로 내려가서 재고개(梓古介)ㆍ석달령(石達嶺)ㆍ증격산(甑擊山) 곡산의 진산 이 되고, 서쪽으로 꺾어져 수안(遂安)의 언진산(彦眞山)ㆍ망진산(望眞山)이 되며 서쪽으로 뻗은 한 줄기는 황주(黃州)의 구현(駒峴)이 되며, 정맥은 남쪽으로 내려가서 고음초산(古音初山)이 된다. 또 두 산맥으로 나뉘어져 서쪽으로 뻗친 한 줄기는 태산준령(泰山峻嶺)이 되고, 가로 뻗쳐서 서흥(瑞興)ㆍ봉산(鳳山)이 되고, 끊기지 않고 북쪽으로 뻗쳐서 대현산(大峴山)ㆍ자비령(慈悲嶺)ㆍ파령(?嶺)ㆍ동선령(洞仙嶺)이 된다. 남쪽으로 뻗은 한 줄기는 동쪽으로 꺾였다가 다시 서쪽으로 돌아 차유령(車踰嶺)이 되고, 정족산(鼎足山)이 되며, 남쪽으로는 평산(平山)ㆍ면악(綿岳) 혹은 멸악산(滅惡山)이라고도 한다. 이 된다. 남쪽으로 뻗은 또 한 가지는 배천(白川)의 치악산과 연안의 비봉산(飛鳳山)이 된다. 정맥은 서남쪽으로 가다가 해주의 창금(唱金)ㆍ수양(首陽)ㆍ북고(北高)의 여러 산이 되고, 또 들로 내려가서 평강(平崗)이 되며, 서북쪽으로 내려가 신천(信川)의 치산(雉山)ㆍ달마산(達摩山)이 되며, 북쪽으로 돌아서 문화(文化)의 구월산이 된다.
○ 덕유산은 경상ㆍ전라ㆍ충청 세 도(道)의 어귀를 차지하고 서쪽으로 뻗은 한 가지는 다시 북쪽으로 돌아 고달산(高達山)과 전주 동쪽에 있는 진안(鎭安)의 마이산이 되는데 두 돌봉우리가 치솟아 하늘에 닿았으며, 서북쪽으로는 웅치(熊峙)가 되고, 서쪽으로 뻗친 한 산맥은 전주부(全州府), 동쪽은 위봉산성(威鳳山城), 북쪽에는 기린봉(麒麟峯)이 되었으며, 한 산맥은 전주의 서북쪽에 이르러 건지산(乾止山)이 된다.
○ 마이산의 한 산맥은 서남쪽으로 가다가 북으로 뻗어 금구(金溝)의 모악(母岳)이 되며, 서남쪽으로 뻗어 순창의 부흥산(復興山)과, 정읍의 내장산과, 장성의 입암산(笠巖山)ㆍ노령(蘆嶺)이 되고, 또 남쪽으로는 나주부 금성산(錦城山)이 되었다. 입암산으로부터 동쪽으로 뻗어 추월산(秋月山)ㆍ광덕산(廣德山)이 되고, 동남쪽으로 무등산이 되며, 남쪽으로 장흥의 천관산(天冠山)에 이르고, 서북쪽으로 돌아 영암의 월출산이 되며, 남쪽으로 만덕미(萬德尾) 황등산(黃等山)에서 그치고, 동북쪽으로 돈 것은 송광(松廣) 계족산(鷄足山)이 된다.
○ 마이산의 또 한 줄기는 웅치(熊峙)로부터 북으로 뻗쳐 한 줄기는 석산(石山)이 되며 거꾸로 내려가다가 구봉산(九峯山)ㆍ주취산(珠?山)ㆍ운제산(雲梯山)ㆍ탄현(炭峴)ㆍ이치(梨峙)가 되며, 대둔산(大芚山)이 되어 충청도 지경에 들어가서 금수(錦水)를 등지고 돌아 계룡산이 된다. 계룡산 한 줄기가 서쪽으로 내려가다가 크게 끊어져서 판치(板峙)가 되고, 불쑥 솟아서 북치(北峙)가 되며, 공주부 월성산(月城山)이 된다.
○ 월성산 한 줄기는 서남쪽으로 뻗어 백제의 옛 수도인 부여의 부소산(扶蘇山)이 된다.
○ 속리산 한 줄기는 서쪽으로 뻗다가 북으로 달려 거질화령(巨叱火嶺)이 되고, 달천(達川)을 끼고 동쪽으로 꺾어져 서북쪽으로 가다가 삼생산(三生山)ㆍ두타산이 되며 죽산 경계에 이르러 칠장산(七長山)이 된다. 칠장산으로부터 한강을 따라 서북쪽으로 오다가 흩어져서 한남(漢南)의 여러 산이 되고, 양지(陽智)를 따라 남ㆍ동ㆍ북쪽으로 가다가 여주의 영릉(英陵)이 되고, 용인으로부터 곧장 북으로 뻗은 것은 남한산성이 된다. 광교산(光敎山)으로부터 남쪽으로 뻗어서 화성이 되고 북으로 뻗어 청계산(淸溪山)ㆍ관악산이 되며, 서쪽으로 뻗어 수리산(修理山)ㆍ소래산(蘇來山)이 되고 통진의 문수산(文殊山)에 이르러 바다를 건너서 강화부가 된다.
○ 칠장산으로부터 서남쪽으로 뻗은 것이 한 영맥(嶺脈)이 되어 대문령(大門嶺)과 마일령(磨日嶺)이 되며, 전의(全義)에서 크게 끊어졌다가 서쪽에서 일어나 차령(車嶺)이 되며, 또 서쪽으로 무성(武城)ㆍ오서(烏棲)ㆍ가야(伽倻) 등 여러 산이 되며, 흩어져서 내포(內浦)의 여러 산이 된다.
○ 태백산 동쪽 줄기는 동남쪽으로 가다가 금장산(金莊山)ㆍ백암산(白巖山)ㆍ평해(平海) 경계가 되고 주령(珠嶺)ㆍ삼승령(三乘嶺)이 되며, 서쪽으로 꺾여져 영해(寧海) 북쪽에 이르러 월명산이 되며, 바다를 따라 남쪽에 이르러서는 신라의 고도인 경주의 금오산이 된다. 고개 동쪽 11읍(邑) 영해ㆍ영덕(盈德)ㆍ청하(淸河)ㆍ흥해(興海)ㆍ영일ㆍ경주ㆍ장기ㆍ울산ㆍ언양(彦陽)ㆍ기장(機張)ㆍ동래 의 물은 모두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며 경주에서 서쪽으로 뻗어 북쪽으로 돌아서 대구부가 된다.
○ 지리산 서쪽 줄기는 화개(花開) 남쪽에 이르러 하동의 경양산(慶陽山)이 되며, 청천강(菁川江)을 끼고 동쪽으로 뻗어 곤양(昆陽)ㆍ사천ㆍ진해의 북쪽을 지나서 창원의 청룡산이 되고, 가락국의 고도인 김해에 이르러 구지봉(龜旨峯)이 된다.
○ 주취산(珠?山) 북쪽 한 줄기는 서쪽으로 내려가서 탄현(炭峴)이 되고 운제산(雲梯山)ㆍ정토산(淨土山)이 되며 용화산(龍華山)이 되었으며, 기준(箕準 기자(箕子)의 후손으로 위만에게 쫓겨 남쪽으로 피난감)의 옛 성터가 그곳에 있다.
○ 평안도 산맥은 설한령(雪寒嶺)으로부터 서쪽으로 뻗은 두 줄기 중의 한 줄기가 희천(熙川)의 적유령(狄踰嶺)을 따라 서남쪽으로 뻗어 또 두 갈래로 나뉘어져 북으로 내려간 것은 위원(渭原)ㆍ초산(楚山) 두 읍의 여러 산이 되고, 서남쪽으로 뻗은 것은 흩어져서 청천강 이북과 압록강 이남 여러 고을의 산이 된다.
○ 설한령의 한 줄기는 서남쪽으로 뻗어 영원(寧遠)을 따라 서북쪽으로 가서 묘향산에 이르러 두 강 사이를 끼고 꾸불꾸불 내려가다가 알일령(?日嶺)과 유현(柳峴)이 된다. 안주 구봉산(九峯山)에 이르러 다시 남쪽으로 뻗어 자모산(慈母山)과 서경 평양부의 금수산(錦繡山)이 된다.
○ 양덕(陽德) 남곡산(南谷山) 북령(北嶺) 산맥의 한 줄기는 서쪽으로 내려가서 함박산(含朴山)이 되고, 거꾸로 북으로 내려가서 성천(成川)의 검학산(劍鶴山)이 된다.
○ 자모산의 한 줄기는 영유강(永柔江) 서쪽을 따라 서남쪽으로 뻗어 용강(龍崗)의 황룡산(黃龍山)이 된다.
○ 총전령(?田嶺)의 한 줄기는 거꾸로 북쪽으로 내려가서 강계부(江界府)와 폐 4군의 여러 산이 된다.
○ 강원도 오대산의 서북쪽 한 줄기는 홍천 동쪽에 이르러 세 줄기로 나뉘어 하나는 서북쪽으로 내려가서, 춘천의 봉의산(鳳儀山)이 되는데 옛 맥국(貊國)의 땅이다. 한 줄기는 서남쪽으로 내려가서 원주부 치악산이 되며, 한 줄기는 서쪽으로 뻗어 검의산(劍倚山)ㆍ팔봉산(八峯山)이 되고 용문산(龍門山)에서 그친다.
○ 두만강은 바로 토문강(土門江)이며 백두산 큰 못이 근원이다. 동쪽 흐름 수십 리는 물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데 돌 틈을 따라 백리를 숨어 흐르다가 비로소 큰 물이 솟아나서 동량(東良)ㆍ북사(北斜)ㆍ지하(地河)ㆍ목하(木河)ㆍ수주(愁州)ㆍ동건(童巾)ㆍ다온(多溫)ㆍ속장(束障) 등을 거쳐 경원 회질가(會叱家)에 이르고, 남쪽으로 흘러 경흥ㆍ사차마도(沙次磨島)에 이르러 나뉘어서 5리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여지승람》
○ 훈춘강(訓春江)은 근원이 여진 땅에서 나와 동림성(東林城)에 이르러 두만강으로 들어간다. 《여지승람》에는 경원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 수빈강(愁濱江)은 근원이 백두산으로부터 나와서 북쪽으로 흘러 소하강(蘇下江)이 되는데, 혹은 속평강(速平江)이라고도 한다. 공험진(公?鎭) 선춘령(先春嶺)을 지나서 거양(巨陽)에 이르고 다시 동으로 1백 20리를 흘러 아민(阿敏)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여지승람》에는 경흥으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 함흥의 성천강(成川江) 혹은 군자하(君子河)라고도 한다. 은 그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갑산(甲山) 경계 화기령(樺岐嶺) 태백산 남쪽 에서 나오고, 하나는 희천(熙川) 경계 황초령(黃草嶺) 동남쪽 에서 나와 합류하여 함흥부 서북쪽 탑란동(塔蘭洞)을 지나서, 성 남쪽 만세교(萬歲橋)에 이르고 함흥부 남쪽 35리 도련포(都連浦)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 초원(草原)의 금강진(金江津)은 근원이 검산령(劍山嶺) 동쪽에서 나와 초원의 남쪽을 지나서 바다로 들어간다.
○ 영흥(永興)의 용흥강(龍興江)은 그 근원이 넷이 있으니, 하나는 함흥부 서쪽 50리 떨어진 정변사(靜邊社)에서 나오는데 이름을 비류수(沸流水)라고 한다. 그 물 근원인 구멍의 둘레가 5척 3촌이요, 깊기는 끝이 없으며 물이 솟아 내가 된다. 또 하나는 함흥부 서북쪽 2백 10리 거리의 마유령(馬踰嶺) 희천(熙川)의 경계 요해지에서 나왔고, 하나는 함흥부 서쪽 1백 80리 거리의 애전현(艾田峴) 맹산(孟山) 경계에서 나오고, 다른 하나는 양덕현(陽德縣) 거차령(居次嶺)에서 나와서 고암(庫巖)에서 송어탄(松魚灘)과 합했는데, 이름을 횡천(橫川)이라 한다. 용신당(龍神堂)을 지나서 진정사(鎭靜寺) 서쪽 절벽 밑에 이르러 창경연(??淵)이 되었다. 그 밑에 광탄(廣灘)이 있고 광탄 가운데 백마같이 생긴 흰 돌이 있는데, 그 돌이 물 속에 잠기고 물 위에 나타나는 것을 보고 물의 수위를 짐작한다. 읍성 동북쪽을 지나서 이 강물이 남쪽으로 흐르다가 고원(高原)의 덕지탄(德之灘)ㆍ문천(文川)의 전탄(箭灘)과 합해서 바다로 들어간다.
○ 의주의 압록강은 혹 마자하(馬?河)라 하고 청하(靑河)ㆍ용만이라고도 하는데, 서쪽의 요동 도사(都司)까지 1백 60리가 된다. 근원은 백두산인데 남쪽으로 흘러 갑산(甲山)ㆍ혜산진(惠山鎭)을 거쳐 혜산강(惠山江)이 되고 허천강(虛川江)과 합한다.
○ 허천강은 근원이 북청ㆍ북제령(北諸嶺)ㆍ벌성포천(伐成浦川)인데, 산 북쪽 파천(波川)ㆍ독산천(禿山川)ㆍ황수천(黃水川) 등 여러 물과 합해서 북쪽으로 흘러 갑산(甲山)ㆍ청주기(靑州岐)에 이르고 허천역(虛川驛) 옆을 지나 허천강이 된다. 장백산 서쪽 여러 냇물과 합했고, 또 운총천(雲寵川)과 합류하여 혜산강으로 들어간다.
○ 두 강이 합해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삼수(三水)의 경계로 들어가서 압록강이 되고, 가을파지(加乙波知)에 이르러 장진강(長津江)과 합하니, 장진강은 곧 부전령(赴戰嶺)과 황초령(黃草嶺) 이북에 있는 물이다. 또 서쪽으로는 후주강(厚州江)과 합해서 서북쪽으로 흘러 무창(茂昌)ㆍ여연(閭延)을 지나 남으로 꺾여 흘러서, 옛 우예(虞芮)에 이르러 자성강(慈城江)과 합하고, 서남쪽으로는 위원(渭源) 경계에 이르러 독로강(禿魯江)과 합한다.
○ 초산(楚山) 산양회(山羊會)에 이르러 건주위(建州衛) 만주강(滿洲江)과 합하며, 만주강은 혹은 파저강(婆猪江)이라고도 하고 또는 퉁가강(?家江)이라고도 하는데, 아이보(阿耳堡)에 이르러 동건강(童巾江)과 합한다.
○ 벽동(碧潼)ㆍ창성(昌城)ㆍ삭주를 거쳐 의주 북쪽에서 옥강(玉江)과 합한다.
○ 적도(赤島) 동쪽에 이르러 세 갈래로 나뉘어지는데, 하나는 남쪽으로 흘러 굽이쳐서 구룡연(九龍淵)이 되는데, 이것을 압록강이라 하니 물빛이 오리 머리 같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 서강(西江)이 되고 하나는 중류를 따라 흐르는데, 이것을 소서강(小西江)이라 한다. 검동도(黔同島)에 이르러 다시 합쳐서 하나가 되고 수청량(水靑梁)에 이르러 또 두 갈래로 나뉘어져, 한 갈래는 서쪽으로 흘러 적강(狄江)과 합하고 적강은 압록강 서북쪽에 있으니 오랑캐 땅에서 동북쪽으로 흘러 내려왔다. 한 갈래는 남쪽으로 흘러 큰 강이 되어 위화도를 거쳐 암림곶(暗林串)에 이르러 서쪽으로 흐르다가 미륵당(彌勒堂)에서 다시 적강과 합하여 대총강(大摠江)이 되어 고진강(古津江)과 합한다.
○ 남쪽으로 서해로 들어간다.
○ 안주(安州) 청천강은 혹은 살수(薩水)라고도 하는데, 그 근원은 영변(寧邊) 묘향산에서 나와서 10여 리를 흐르다가 어천(魚川)과 합한다. 어천은 근원이 적유령(狄踰嶺)에서 나와 동쪽으로 10리를 흘러 어천이 되었다. 영원 서쪽 경계에 있는 물이 서쪽으로 40리를 흐르다가 희천(熙川) 봉단성(鳳丹城)에서 합하고 아래로 흘러 영변 장항진(獐項津)이 된다. 이 강은 안주부 동남쪽에 이르러 화천강(花遷江)이 되고, 또 남쪽으로 5, 6리를 흐르다가 안주 무골도(無骨島)에 이르러 또 구음포진(仇音浦津)과 합한다. 구음포진은 근원이 초산과 벽동(碧潼) 지경에서 나와 운산(雲山)의 동천(東川)이 되고 영변을 거쳐 동쪽으로 흐르다가 또 개천(价川) 장항강(獐項江)과 합한다. 장항강은 바로 묘향산 남쪽 분탄(?灘)의 하류인데 동천과 합쳐서 남쪽으로 흐르다가 안주 북성(北城) 아래에 이르러 청천강이 되고 서쪽으로 30리를 흐르다가 박천강(博川江)과 합한다.
○ 박천강은 근원이 창성(昌城)의 부운산ㆍ삭주의 천마산ㆍ청룡산ㆍ옛 구주(龜州)의 팔령산(八嶺山)에서 나오는데 청천강과 합류하여 태천(泰川) 동쪽에서 오지천천(烏知遷川)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 구성(龜城)의 구림천(仇林川)ㆍ팔령천(八嶺川)과 합해서 동쪽으로 흘러 박천(博川) 서쪽에서 곶적강(串赤江)과 합해서 박천강이 된다. 이 강이 가산(嘉山) 동쪽에 이르러 대령강(大寧江)이 되어 정주 가마천(加磨川)과 동쪽으로 흐르다가 합하고, 고성진(古城鎭)에 이르러 청천강과 합하며 남쪽으로 흐르다가 노강(老江)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 평양의 대동강은 그 근원이 둘이 있으니, 하나는 영원(寧遠) 가막동(加幕洞)에서 나와 남쪽으로 흐르다가 맹산현(孟山縣) 북쪽에 이르러서 다시 꺾여 서쪽에서 흘러가다가 덕천 경계에서 삼탄(三灘) 영원 맹산(孟山)의 물이 여기에 이르러서 합쳐 흐르기 때문에 삼탄이라고 부른다. 과 합쳤고 남쪽으로 흘러 개천(价川) 경계에서 순천강(順川江)이 된다. 다시 순천 경계에 이르러 성암진(城巖津)이 되었는데, 위에는 사탄(斜灘)이 있고 밑에는 기탄(岐灘)이 있으며 자산(慈山) 경계에 이르러 우가연(禹家淵)이 되어 은산(殷山)의 대천(大川)과 합했으며 이로부터 다시 동쪽으로 흘러 강동 경계에 이르러 잡파탄(雜派灘)이 된다.
○ 하나는 양덕(陽德) 북쪽 문음산(文音山)과 오강산(吳江山) 및 맹산의 대모원동(大母院洞)에서 나와 다시 합해서 성천(成川)의 비류강이 되어 흘골산(紇骨山) 밑을 지나는데 산 밑에 사석혈(四石穴)이 있어 물이 그 구멍 속으로 통해 흐르다가 솟아 올라 서쪽으로 나왔기 때문에 이름을 비류강이라 한다. 다시 꺾어져 남쪽으로 흐르다가 강동 경계에 이르러서 잡파탄과 합류하여 서진강(西津江)이 되고 다시 웅성강(熊城江)과 합한다.
○ 평양성 동북쪽에 이르러 마탄(馬灘)이 되고, 성 동쪽에 이르러 백은탄(白銀灘)과 대동강이 된다. 이로부터 서쪽으로 흘러 구진익수(九津溺水)가 되고 그 하류는 평양강과 합한다. 평양강은 근원이 순안(順安)의 법홍산(法弘山)에서 나와서 보통문(普通門) 밖을 지나 웅성강과 합류하여 중화 서쪽에 이르러 이진강(梨津江)이 되고, 강서의 구림천(九林川)과 합해서 용강(龍崗) 동쪽에 이르러 동쪽 급수문(急水門)으로 빠진다.
○ 금천(金川)의 저탄(猪灘)은 근원이 수안의 언진산(彦眞山)에서 나오는데 아래로 흘러 흑석탄(黑石灘)이 되고 보음탄(甫音灘)이 되며 신계(新溪) 서쪽을 지나서 사팔적탄(沙八赤灘)이 된다. 이 물은 평산(平山) 북쪽에 이르러 기탄(岐灘)이 되고 또 남쪽으로 가서 전탄(箭灘)이 되며, 저탄에 이르러 비로소 커져 하류는 금천 조읍포(助邑浦)의 조운(漕運)하는 곳이 된다.
○ 남쪽은 말롱포(末籠浦)가 되고, 그 남쪽은 배천(白川), 동쪽은 금곡포(金谷浦)의 조운하는 곳이며, 또 그 남쪽은 광정도(匡正渡)와 벽란도가 된다.
○ 서울의 한강은 옛날에는 한산하(漢山河)라 일컬었고, 고려에서는 사평도(沙平渡)라 일컬었다. 그 근원은 둘인데, 충주의 금천(金遷)으로부터 흘러온 것을 남강이라 일컫고, 춘천의 소양강으로부터 온 것을 북강이라 일컫는다.
○ 남강은 그 근원이 둘이 있으니, 하나는 강릉의 오대산 우통수(于筒水) 금강연(金剛淵)에서 나온다. 한강이 비록 여러 곳의 물을 받아들였지만 우통수가 그 주류이다. 오대산 물이 두타산 북림계(北臨溪)와 삼척의 죽현(竹峴) 물과 합해서 남쪽으로 흘러, 정선 동쪽 여량역(餘粮驛)을 지나 군(郡) 북쪽에 이르러 광탄진(廣灘津)이 되고, 군 남쪽은 대음강(大陰江)이 되고, 군 서쪽은 용암연(龍巖淵)이 된다. 또 흘러가다가 영월 후진(後津)이 되고 금봉연(金鳳淵)에 이르러 금장강(錦障江)과 합한다. 금장강은 바로 평창(平昌)의 연촌진(淵村津) 하류이며, 또 서쪽으로 주천강(酒泉江)과 합하는데 주천강은 바로 원주 동쪽 주천현 거슬산(?瑟山) 여러 물의 하류이다. 또 남쪽으로 흘러 영춘(永春)에 이르러서 눌어탄(訥魚灘)이 되고, 또 남쪽으로 흘러 남진(南津)이 되며, 서남쪽으로 흘러 단양에 이르렀으며, 북쪽으로는 상진(上津)과 하진(下津)이 되고, 서쪽은 소요항탄(所要項灘)이 된다. 또 북쪽으로 꺾어지고 서쪽으로 흘러서 청풍강이 되고, 병풍산 밑에 이르러 북진(北津)이 되며, 제천의 광탄(廣灘) 하류에 와서 합하고, 충주 북쪽 10리에 이르러 북진이 되며, 충주 서쪽 10리 금천에 이르러 달천(達川)과 서로 합한다.
○ 하나는 근원이 보은의 속리산에서 나와 산 위에서 물이 세 줄기로 나뉘어지는데, 그 하나는 구요(九遙) 팔교(八橋)의 냇물이 되어 서쪽으로 흐르다가 북으로 꺾어져 청주 동쪽에 이르러 청천(靑川)이 되고, 청천은 파곶(?串) 하류와 합하여 괴산에 이르러 괴진(槐津)이 되며, 연풍천(延?川)과 합한다. 또 북쪽으로 충주 서남쪽에 이르러 달천이 되고, 서쪽으로 금천에 이르러 청풍강과 합하고, 서쪽으로는 월락탄(月落灘)이 된다. 그 서쪽에 가흥창(嘉興倉)이 있고, 또 그 서북쪽으로는 원주의 흥원창(興元倉)이 있는데, 섬강(蟾江)과 합한다. 섬강은 바로 오대산 서쪽 횡성(橫城)ㆍ원주의 여러 물인데 서쪽에서는 여주의 여강(驪江)이 되고 양근(楊根)의 대탄(大灘)과 월계천(月溪遷)이 된다. 군(郡) 서쪽 45리 병탄(幷灘)에 이르러 북강과 합하기 때문에 세속에서는 이수두(二水頭)라고도 한다.
○ 북강(北江)은 그 근원이 둘이 있으니, 하나는 인제 서화현(瑞和縣) 소파령(所波嶺)ㆍ소동라령(所冬羅嶺)과 춘천 기린현(基麟縣)의 네 냇물이 합쳐서 인제 미륵천(彌勒川)이 된다. 이 물은 서쪽으로 흘러 주연진(舟淵津)이 되고 양구 남쪽에 이르러 초사리탄(草沙里灘)이 되며, 춘천 동북쪽에 이르러 청연(靑淵)ㆍ주연(舟淵)ㆍ적암탄(赤巖灘)이 된다. 또 춘천부 북쪽 6리에 이르러 소양강이 되고, 우두산(牛頭山) 서쪽에 이르러 보제진(菩提津) 하류와 합했다. 그 하나는 회양(淮陽)의 화천(和川) 하류에서 덕진(德津)이 되어 은계(銀溪)와 합했으며, 양구의 대연(大淵) 하류에서 회양ㆍ용연(龍淵)ㆍ남곡(嵐谷)의 물이 되어 금성(金城)의 남천(南川)이 되었고, 철령 남쪽 금강 서쪽에 있는 여러 냇물이 모두 합해서 금성(金城)이 보제진이 되는데 속칭 모천(牟遷)이라고도 한다. 이 물이 서쪽으로 흘러서 통구(通溝) 다경진(多慶津)이 되고 금강 남쪽의 물이 서쪽으로 흘러오다가 양구의 곡계(曲溪)와 합치고 서쪽으로 흘러와 합쳐서 낭천(狼川)에 이르러 마탄(馬灘)이 되고, 남쪽으로는 대리진(大利津)이 된다. 또 춘천 북쪽에 이르러 모진(母津)이 되고 우두촌(牛頭村) 앞에 이르러 소양강과 합해서 서쪽으로 흘러 신연진(新淵津)이 된다. 또 홍천강과 합해서 가평 동쪽에 이르러 안판탄(按板灘)이 되고, 양근(楊根) 서쪽에 이르러 용진(龍津)이 되고 병탄에 이르러 남강과 합한다.
○ 남강과 북강이 합해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광주(廣州) 경계에 이르러서 도미천진(渡迷遷津)이 되고, 광진(廣津)이 되고 또 송파(松波)ㆍ삼전도ㆍ저자도(楮子島)ㆍ뚝섬 두모포(豆毛浦)가 된다. 경성 남쪽에 이르러 한강도가 되고 또 서쪽으로는 서빙고ㆍ동작진ㆍ흑석(黑石)ㆍ노량(露梁)ㆍ용산강ㆍ마포ㆍ남타(南?)ㆍ율도(栗島)ㆍ토정(土汀)ㆍ현석(玄石)ㆍ서강(西江) 농암(籠巖)이 된다. 금천(衿川) 북쪽에 이르러 양화도(楊花渡)가 되고, 양천 북쪽에 이르러 공암진ㆍ행주가 된다. 또 교하(交河) 서쪽에 이르러 임진강과 합하고, 통진 북쪽에 이르러서는 조강(祖江)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임진강은 그 근원이 둘이 있으니, 하나는 안변(安邊)과 영풍(永?) 냇물이 남쪽으로 흐르다가 방장치(防墻峙)를 지나서 이천(伊川)으로 들어간다. 미탄(美灘)의 물은 근원이 박달치(朴達峙)에서 나와서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합해서 옛 성진(城津)이 되며 신계(新溪) 경계를 지나 안협의 제당연(祭堂淵)이 된다. 평강(平康) 분수령 물은 안협(安峽)의 저구리탄(猪仇里灘)이 되고 이 물이 합해서 포리진(浦里津)이 되어 토산으로 들어가서 동천(東川)이 된다. 다시 삭녕에 이르러 삭녕도가 되고 연천 서쪽에 이르러 징파도(澄波渡)가 되며, 마전(麻田)에 이르러 후근도(朽斤渡)가 되어 양주의 대탄(大灘)과 합한다.
○ 그 하나는 철령 물이 서쪽으로 꺾어져 남으로 흐르다가 평강(平康)의 정자연(亭子淵)을 지나서 철원의 체천(?川)이 되는데 양쪽 언덕이 모두 석벽이어서 섬돌 같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이 물은 순담(筍潭) 화적연(禾積淵)을 지나서 영평 북쪽에 이르러 직탄(直灘)이 되고, 또 서쪽으로 흐르다가 영평의 전탄(箭灘)과 합한다. 포천의 여러 물은 북쪽으로 흐르다가 백로주(白鷺洲)가 되고 백운산의 여러 냇물과 합해서 흐르다가 영평 남쪽에 이르러 전탄이 되고, 또 마흘천(磨訖川)이 되며, 양주 북쪽에 이르러 대탄이 되고, 서쪽으로 흐르다가 연천의 아미천(?嵋川)과 합하여 마전으로 들어가서 삭녕강과 합한다.
○ 적성(積城) 북쪽에 이르러 이포진(梨浦津) 구연강(仇淵江)이 되고, 장단 동쪽에 이르러 두기진(頭耆津)이 되며, 사미천(沙彌川)과 합해서 용산진과 임진도(臨津渡)가 되고, 동남쪽으로는 덕진(德津)이 된다. 다시 교하(交河) 북쪽에 이르러 낙하도(洛河渡)가 되고, 봉황암을 지나 오도성(烏島城)에 이르러 한수와 합한다. 오도성은 속칭에 오두현(鼇頭峴)이라 한다.
○ 공주의 금강은 근원이 옥천(沃川)의 적등진(赤登津)에서 나오고, 적등진은 근원이 덕유산 서북에서 나오니, 장수ㆍ진안의 여러 냇물이 합해서 북쪽으로 흐르다가 용담(龍潭) 달계천(達溪川)이 되고, 무주에 이르러 대덕산(大德山)ㆍ적상산(赤裳山) 냇물과 합해서 금산 경계에 이르러 소이진(召爾津)ㆍ지화진(只火津)이 된다. 다시 이 물은 옥천에 이르러 호진(虎津)이 되고, 또 북쪽으로 흘러 적등진이 된다. 상주 중모현(中牟縣) 물은 황간(黃澗)ㆍ영동(永同)을 지나고, 속리산 물은 보은ㆍ청산(靑山)에서 합류해서 북쪽으로 화인진(化仁津)이 되고, 회인(懷仁)을 지나서 말흘탄(末訖灘)이 되며, 서쪽으로 흘러 문의에 이르러서 이원진(利遠津)이 되는데, 이것을 또 형각진(荊角津)이라고도 한다. 이 물은 또 서쪽으로 동진(東津)과 합하고, 연기(燕岐)ㆍ동진ㆍ진천(鎭川)ㆍ청안(淸安)의 여러 냇물이 합류해서 청주 작천(鵲川)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 목천ㆍ전의의 여러 냇물과 합해서 동진이 된다. 다시 공주 북쪽에 이르러 금강이 되고 남으로 꺾어져 웅진과 부여에 이르러 백마강이 된다. 또 은진(恩津)에 이르러 강경포(江景浦)가 되고, 또 서쪽으로 꺾어져 석성의 고다진(古多津)ㆍ임천(林川)의 남당포(南堂浦)ㆍ한산(韓山)의 상지포(上之浦)ㆍ서천의 진포(鎭浦)가 되어 바다로 들어가는데, 임천에서 서천포에 이르기까지를 모두 진포라고 한다.
○ 계룡산 한 골짜기의 물이 동쪽으로 흐르다가 진잠(鎭岑) 남쪽에 이르러 차탄(車灘)이 되고 진산(珍山)의 옥계(玉溪) 하류와 합했으며 또 동쪽으로 공주ㆍ유성에 이르러 여러 냇물과 합해서 회덕의 갑천(甲川)이 되고, 또 선암천(船巖川)이 되며 북쪽으로 흘러서 형각진(荊角津)으로 들어간다.
○ 나주의 영산강은 그 근원이 여덟이 있는데, 하나는 담양의 추월산(秋月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창평(昌平)의 무등산 서봉학(瑞鳳壑)에서 나오고, 하나는 광주의 무등산에서 나와서 합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서쪽으로 꺾어져 칠천(漆川)이 되며, 하나는 장성의 백암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노령 남쪽에서 나오는데 흘러가다가 합해서 선암도(仙巖渡)가 되며, 하나는 능주(綾州)의 여참(呂岾) 북쪽에서 나와서 화순의 물과 합해서 흐르다가 다시 남평(南平)을 둘러 서쪽으로 흐르고, 하나는 영광 수연산(隨緣山)에서 나와서 작천(鵲川)이 되고, 하나는 나주 북쪽 도야산(都野山)에서 나와서 장성천이 되는데, 합해서 흐르다가 나주 동쪽에 이르러 광탄이 되고 나주 남쪽은 영산강이 되는데, 이 강의 본이름은 금강진(錦江津)이다. 다시 서쪽으로 흘러 회진강(會津江)이 되고 무안에 이르러 대굴포(大掘浦)가 되고 덕보포(德甫浦)가 되며, 남쪽으로 흘러 두령량(頭靈梁)이 되고 서쪽으로 흘러 영암해로 들어간다. 고려 때에 이 물을 거슬러 흐르는 3대강(三大江)의 하나라고 하였다.
○ 광양의 섬진강은 근원이 진안(鎭安)의 중대(中臺) 마이산에서 나와서 합하여 임실의 오원천(烏原川)이 되고, 서쪽으로 꺾어져 남쪽으로 흘러 운암(雲巖) 가단(可端)을 지나서 태인의 운주산(雲住山) 물과 합하여 순창의 적성진(赤城津)이 되는데 이것을 ‘화연(花淵)’이라고도 한다. 이 물은 또 저탄(猪灘)이 되고, 또 동쪽으로 흘러서 남원의 연탄(淵灘)이 되며, 또 순자진(?子津)이 된다. 다시 옥과에 이르러 방제천(方梯川)이 되며, 곡성에 들어가서 압록진(鴨綠津)이 되고, 구례에 이르러 잔수진(潺水津)과 합하였다. 잔수진은 근원이 동복(同福) 서석(瑞石) 동쪽에서 나와 현(縣) 남쪽 달천(達川)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 보성 북쪽에 이르러서 죽천이 되는데, 이것을 또 ‘정자천(亭子川)’이라고도 한다. 다시 동북으로 흘러 순천의 낙수진(洛水津)이 되며, 잔수진에 이르러 순자강과 합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화개(花開) 서쪽 경계에 이르러 용왕연(龍王淵)이 되는데, 여기는 바닷물이 들어오는 곳이다. 또 광양 남쪽 60리에 이르러 섬진강이 되는데, 그 동쪽 언덕은 바로 하동(河東)의 악양(岳陽)으로서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려 때에는 이 물이 거슬러 흐르는 3대강의 하나라 하였고, 이름을 ‘두치강(斗峙江)’이라 하였다.
○ 만경(萬頃)의 신창진(新倉津)은 근원이 고산(高山)의 남천(南川)에서 나오는데, 운제산(雲梯山)과 주취산(珠?山)의 물이 현(縣) 남쪽을 지나 흘러서 전주 북쪽으로 들어가 직연(直淵)이 되고 안천(?川)이 된다. 이 물은 또 삼례역(參禮驛) 남쪽에 이르러서 전주 남천의 북류와 합하며 또 서쪽으로 흘러 옥야(沃野)ㆍ이성(利城)을 거쳐 김제 경계에 이르러 신창진이 되는데, 바닷물이 들어온다. 만경현을 지나서 북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 부안의 동진(東津)은 내장산과 노령 북쪽 여러 냇물이 합해서 북으로 흘러서 고부(古阜)의 모천(茅川)이 되며, 서쪽으로 꺾어져 태인의 남천(南川)과 합해서 북쪽으로 흘러 부안의 동진이 된다. 금구(金溝) 상왕산(象王山)의 물은 김제의 벽골제(碧骨堤)가 되고 서쪽으로 흘러 동진으로 들어간다. 흥덕(興德) 우등산(牛登山) 물은 고부의 눌제천(訥堤川)이 되어, 북쪽으로 흐르다가 동진으로 들어가고 서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 경상도의 낙동강은 근원이 태백산에서 나와서 동쪽으로 꺾어져 서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꺾어져 남쪽으로 흘러서 경상도의 중간을 가로지르며, 또 동쪽으로 꺾어져 남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태백산 동쪽 줄기는 바다를 따라 남쪽으로 흐르고 서쪽 줄기는 서쪽으로 흐르다가 남으로 꺾어지며, 남쪽은 지리산에 이르고 다시 동쪽으로 가서 김해에 이른다. 경상도는 모두 한 수구(水口)를 이루니, 낙동강은 상주 동쪽을 말함이다. 낙동강의 상류와 하류는 비록 지역에 따라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 통틀어 낙동강이라 부르며, 이 강은 또 ‘가야진(伽倻津)’이라고도 한다. 강 동쪽은 좌도(左道)가 되고, 강 서쪽은 우도(右道)가 된다. 고려 때에는 이 강과 호남의 섬진강ㆍ영산강 두 강을 거슬러 흐르는 3대강이라고 하였다.
○ 태백산의 황지(黃池)는 산을 뚫고 남쪽으로 나와서 봉화에 이르러 매토천(買吐川)이 되며, 예안에 이르러 나화석천(羅火石川)과 손량천(損良川)이 된다. 또 남쪽으로 흘러 부진(浮津)이 되며, 안동 동쪽에 이르러 요촌탄(蓼村灘), 물야탄(勿也灘), 대항진(大項津)이 된다. 영양ㆍ진보(眞寶)ㆍ청송의 여러 냇물이 모두 합하여 서쪽으로 흘러 용궁(龍宮)의 비룡산(?龍山) 밑에 이르러 하풍진(河?津)이 된다. 풍기ㆍ순흥(順興)ㆍ봉화ㆍ영천의 물은 합하여 예천의 사천(沙川)이 되고, 문경(聞慶)ㆍ용연(龍淵)ㆍ견탄(犬灘)의 물은 남쪽의 함창(咸昌) 곶천(串川)에 와서 합한다.
○ 상주 북쪽에 이르러 송라탄(松蘿灘)이 되며, 상주 북쪽 동북 35리에 이르러 낙동강이 되며, 의성ㆍ의흥(義興) 여러 냇물은 군위ㆍ비안(比安)을 거쳐 와서 합쳐진다.
○ 선산 북쪽에 이르러 견탄(犬灘)이 되며, 선산부(善山府) 동쪽에서는 이매연(鯉埋淵)이 되고 여차니진(餘次尼津)이 되며, 선산부 동남쪽으로는 보천탄(寶泉灘)이 되었다. 속리(俗離)ㆍ황악(黃岳) 동쪽 물은 지례(知禮)의 감천(甘川)이 되어 금산(金山)ㆍ개령(開寧)을 거쳐 합친다.
○ 인동 서쪽에 이르러 칠진(漆津)이 되며, 성주 동쪽에 이르러 소야강(所耶江)이 되고 동안진(東安津)이 되니, 바로 대구 서쪽 경계이다. 영천(永川)ㆍ신령(新寧)ㆍ하양(河陽)ㆍ자인(慈仁)ㆍ경산(慶山)의 여러 물과 합하여 대구의 금호(琴湖) 달천진(達川津)이 되어 모두 합치고, 또 남쪽으로 흘러 무계진(茂溪津)이 되어 현풍(玄風)을 지나 서쪽으로 흐른다.
○ 고령 동쪽에 이르러 개산강(開山江)이 되며, 성주의 가천(伽川)은 고령으로 들어가서 합천의 야천(倻川) 하류와 합하여 동쪽으로 흘러서 다시 합친다.
○ 초계(草溪) 동쪽 창녕 서쪽에 이르러 감물창진(甘勿倉津)이 되며, 거창 덕유산 동남쪽 여러 냇물은 합하여 합천의 남강(南江)이 되고, 또 초계의 황둔진(黃芚津)이 되어 동쪽으로 흘러가서 합한다.
○ 영산(靈山) 서쪽에 이르러 기음강(岐音江)이 되어 촉석강(矗石江)과 합하여진다.
○ 진주의 촉석강은 그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지리산 북쪽 운봉(雲峰) 경계에서 나와서, 함양의 임천(?川)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 용유담(龍遊潭)이 되고 엄천(嚴川)이 된다. 이 물은 산청 경계에 이르러 안의의 동천(東川) 하류와 합하여 진주 서쪽에서 우탄(牛灘)이 되며, 단성(丹城)에 이르러 신안진(新安津)이 되는데, 삼가(三嘉)의 여러 냇물이 흘러 합쳐서 진주 서쪽에 이르러 소남진(召南津)이 된다. 하나는 지리산 남쪽에서 나와서 산을 돌아 동쪽으로 흐르다가 진주 서쪽에서 합쳐서 청천강(菁川江)이 되며, 성(城) 아래에 이르러 촉석강이 된다. 다시 동쪽으로 의령에 이르러 정암진(鼎巖津)이 되며, 영산(靈山)의 기음강(岐音江)에 이르러 낙동강과 합하고, 칠원 북쪽에 이르러 모질포(亐叱浦)가 된다. 이 물은 다시 흘러서 매포(買浦)가 되는 것이니, 이것을 혹은 ‘무포(茂浦)’라고도 한다. 창원 북쪽에 이르러 주물연진(主勿淵津)이 되며, 밀양 남쪽 30리, 김해 북쪽 50리 경계에 이르러서 뇌진(磊津)이 되는데, 이곳은 혹 ‘해양강(海陽江)’이라고도 한다. 청도와 밀양의 물은 응천(凝川)이 되어서 영남루(嶺南樓)를 남쪽으로 돌아서 합쳐진다.
○ 또 동쪽으로는 삼랑창(三浪倉)이 있고 남쪽으로 흘러 왕지연(王池淵) 황산강(黃山江)이 된다. 또 남쪽으로 양산(梁山)의 동원진(東院津)이 되며, 또 남쪽으로는 세 갈래 물이 되어서 김해부 남쪽 취량(鷲梁)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 보충 : 은하수의 형상은 하늘의 반쪽을 가로질렀는데, 동북쪽에서 시작하여 서남쪽에서 그쳤는데, 머리는 간방(艮方)이고 꼬리는 곤방(坤方)이다. 우리나라에 큰 강이 셋이 있는데, 압록강ㆍ대동강ㆍ한강으로서, 이 세 강은 모두 머리는 간방이고 꼬리는 곤방이다. 《성호사설》
○ 보충 : 우리나라 지도가 옛날에는 모두 평평하고 정방형이기 때문에 형세를 알 수 없었다. 영종(英宗) 경인년에 신경준(申景濬)에게 명하여 <동국지도(東國地圖)>를 만들게 하니, 관청에 보관했던 십여 가지를 내어 오고 또 널리 여러 사람들의 금ㆍ고본(今古本)을 찾아 내었으나, 정항령(鄭恒齡)이 가지고 있는 것이 가장 완전하였다. 여기에 약간 교정을 더해서 <열읍도(列邑圖)> 8권과 <팔도도(八道圖)> 1권과 <전국도(全國圖)> 한 폭을 만들었는데, 주척(周尺 주 나라 척도(尺度)를 기준으로 삼음) 두 치로 한 선(線)을 하고 세로는 76선, 가로는 1백 31선으로 하게 하였다. 또 동궁에게 이와 같이 만들어 바치도록 하고, 임금이 친히 짧은 서문을 지어 족자 위에 썼다. 정씨(鄭氏)의 지도는 항령의 아버지로부터 시작하여 항령의 아들 원림(元霖)에 이르러 보충되었으니, 대개 3대(代) 50여 년이 걸려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었다.
8] 주(州)와 군(郡)-八道
신라의 9주(九州) : 경덕왕(景德王) 16년 정유(757)에 비로소 9주를 두고 주(州)와 군(郡)의 이름을 고쳤다. 상주 왕성 동북쪽에 있으니, 옛이름은 사벌주(沙伐州)고, 군 10과 현 31을 거느렸다., 양주(良州) 왕성 남쪽에 있으니, 옛이름은 삽량주(?良州)며 지금의 양산(梁山)이니, 소경(小京) 1과 군 12와 현 34와 정소(停所)를 거느리고 있다., 강주(康州) 왕성 서쪽에 있으니, 옛이름은 청주(菁州)이며, 지금은 청주(靑州)이다. 군 11과 현 30을 거느리고 있다. 의 3주(三州)는 본래 신라 땅이다. 한주(漢州) 서쪽에 있으니, 고구려의 남쪽 경계로서 옛이름은 한산주(漢山州)고, 지금은 광주(廣州)이다. 소경 1과 군 28, 현 49를 거느리고 있다., 삭주 한주 동쪽에 있으니, 옛이름은 수약주(首若州)며, 지금은 춘천이다. 소경 1과 군 12, 현 26을 거느리고 있다. 와 명주 삭주 동쪽에 있으니, 옛이름은 서주(西州)며 지금은 강릉이다. 군 9와 현 25를 거느리고 있다. 의 3주(三州)는 옛 고구려 땅이다. 웅주(熊州) 백제 고성(古城) 북쪽에 있으니, 옛이름은 웅천주(熊川州)이며, 지금은 공주이다. 소경(小京) 1과 군 13과 현 39를 거느리고 있다., 전주 웅주(熊州) 서남쪽에 있으니, 옛이름은 완산주(完山州)이다. 소경(小京) 1과 군 10과 현 31을 거느리고 있다. , 무주(武州) 전주의 남쪽에 있으니, 옛이름은 무진주(武珍州)며, 지금은 광주이다. 군15와 현 43을 거느리고 있다. 의 3주(州)는 옛 백제 땅이다. ○ 주(州), 군(郡), 현(縣)은 도합 4백 48이다. 주 9와 소경(小京) 5, 군 1백 20, 현 3백 8, 정소(停所) 6이다.
○ 고려의 10도(十道) : 성종(成宗) 14년 을미(995)에 경내를 나누어서 10도를 만들었다. 개성부 적현(赤縣) 6과 기현(畿縣) 7을 거느렸다.ㆍ관내도(關內道) 양주ㆍ광주(廣州)ㆍ황주(黃州)ㆍ해주 등에 소속된 군과 현으로 도(道)를 만들었으니, 주 29와 현 82를 거느리고 있다.ㆍ중원도(中原道) 충주ㆍ청주 등에 소속된 군과 현으로 도(道)를 만들었으니, 주 13과 현 42를 거느리고 있다. ㆍ하남도(河南道) 공주ㆍ운주(運州)와 지금의 홍주 등에 소속된 군과 현으로 도를 만들었으니, 주 11과 현 34를 거느리고 있다.ㆍ강남도 전주ㆍ영주(瀛州)와 지금의 고부(古阜)ㆍ순주(淳州)ㆍ마주(馬州) 등에 소속된 군과 현으로 도를 만들었으니 주 9, 현 49를 거느리고 있다.ㆍ영남도 상주에 소속된 군과 현으로 도를 만들었으니, 주 12와 현 48을 거느렸다. ㆍ영동도 경주ㆍ금주(金州)와 지금의 김해 등에 소속된 군과 현으로 도를 만들었으니, 주 9와 현 48을 거느리고 있다.ㆍ산남도(山南道) 진주에 소속된 군과 현으로 도를 만들었으니 주 10과 현 37을 거느리고 있다.ㆍ해양도(海陽道) 나주ㆍ광주ㆍ정주(靜州)와 지금의 영광ㆍ승주(昇州), 지금의 순천ㆍ패주(貝州), 지금의 보성ㆍ담주(潭州), 지금의 담양ㆍ낭주(朗州), 지금의 영암 등에 소속된 군과 현으로 도를 만들었으니, 주 14와 현 62를 거느리고 있다. ㆍ삭방도 춘주(春州)와 지금의 춘천ㆍ화주(和州)와 지금의 영흥(永興)ㆍ명주(溟州), 지금의 강릉 등에 소속된 군현으로 도(道)를 만들었으니, 주 7과 현 72를 거느리고 있다.ㆍ패서도(浿西道) 서경에 소속된 군과 현으로 도를 만들었으니, 주 14, 현 4, 진 7을 거느리고 있다. 이니 주ㆍ현ㆍ진이 모두 6백 26이다. 주가 1백 28이요, 현이 4백 91이며, 진이 7이다.
○ 고려의 8도(八道) : 현종(顯宗) 3년 임자(1012)에 주와 현을 더하고 줄여서 8도를 만들었다.
○ 개성부(開城府) 군 1과 현 12를 거느렸다. ○ 현종 9년 무오에 부(府)를 혁파하고 현을 두어 속현 3을 거느리게 했고, 또 장단현은 속현 7을 거느리게 하여 모두 직접 상서도성(尙書都省)에 예속시키고 경도(京都)라 이름했다. ○ 문종 16년 임인에 다시 부(府)를 두어 11현을 도로 예속시키고, 또 우봉군(牛峯郡)을 나누어 예속시켰다.
○ 공양왕 2년 경오에 경기도를 나누어 좌ㆍ우도를 만들었는데, 장단(長湍) 등 8읍(邑)은 좌도가 되고, 개성(開城) 등 5읍(邑)은 우도가 되었다.ㆍ양광도ㆍ충청도 양광도는 경(京) 1, 소경 1목(牧) 5, 도호부 6, 군 1, 현 75를 거느렸다.
○ 예종 원년 병술에 관내(關內)ㆍ중원(中原)ㆍ하남(河南)의 3도를 합쳐서 양광ㆍ충청의 주도(州道)를 만들었다.
○ 명종 원년 신묘에 나누어 2도(道)를 만들었다.
○ 충숙왕(忠肅王) 원년 갑인에 양광도를 만들었다.
○ 공민왕 5년 병신에 충주ㆍ청주 등에 소속된 주현을 나누어 충청도를 만들고 소경 1, 목(牧) 5, 도호부 3, 군 14, 현 70을 거느리게 했다.
○ 공양왕 2년 경오에 양광도를 나누어 둘을 만들고, 한양 등 11읍과 교주도(交州道)ㆍ철원 등 6읍으로 좌도를 삼고, 부평(富平) 등 5읍과 서해도 연안(延安) 등 9읍으로 우도를 삼았다.ㆍ경상도 경(京) 10, 대도호부 1, 목 2, 도호부 6, 군 16, 현 1백 5를 거느리게 하였다.
○ 예종 병술년에 영남ㆍ영동ㆍ산남(山南)의 3도를 합쳐서 경상ㆍ진주도(晉州道)를 만들었다.
○ 명종(明宗) 신묘년에 나누어 경상ㆍ진합천(晉陜川) 2도(道)를 만들었다.
○ 16년 병오에 나누어서 경상주도를 만들었다.
○ 신종(神宗) 7년 갑자에 상진(尙晉)ㆍ안동도라 일컬었다. ○ 그 후에 또 경상진안도(慶尙晉安道)라고 일컬었다.
○ 충숙왕 갑인년에 경상도가 되었다. ㆍ전라도 부 1, 대도호부 1, 목 2, 도호부 3, 군 12, 현 85를 거느리게 하였다.
○ 현종 무오년에 강남ㆍ해남 2도를 합쳐서 전라도를 만들었다.ㆍ교주도(交州道) 도호부 2ㆍ군 3ㆍ현 23을 거느리게 하였다.
○ 명종 8년 무술에 삭방도에 소속된 춘주(春州) 등의 주와 현으로 춘주도(春州道)를 만들었다.
○ 뒤에 동주도(東州道)라고 일컬었다.
○ 원종(元宗) 4년 계해에 교주도(交州道)라고 일컬었다.
○ 충숙왕 갑인년에 회양도(淮陽道)라고 일컬었다.
○ 신우 14년 무진에 영동ㆍ영서를 합하여 교주강릉도(交州江陵道)를 만들었다.
ㆍ서해도 목 1, 도호부 1, 군 8, 현 13, 진 1을 거느리게 하였다.
○ 관내도(關內道)에 소속된 황주(黃州)ㆍ해주 등의 주와 현으로 서해도를 만들었는데, 연대는 자세하지 않다. 동계 대도호부 1, 목 1, 도호부 2, 만호부 3, 군 12, 현 24, 진 9를 거느리게 하였다.
○ 정종(靖宗) 2년 병자에 삭방도에 소속된 화주(和州)ㆍ명주 등의 주와 현을 동계라고 일컬었다.
○ 문종 원년 정해에 동북면이라 일컬었고, 혹은 동면ㆍ동로ㆍ동북로ㆍ동북계라고 일컬었다.
○ 명종 무진년에 연해명주도(沿海溟州道)라고 일컬었다.
○ 원종 계해년에 강릉도라고 일컬었다.
○ 공민왕 병신년에 강릉삭방도(江陵朔方道)라고 일컬었다.
○ 같은 해에 다시 동북면이라는 이름을 회복했다.
○ 9년 경자에 삭방강릉도라고 일컬었다. 북계 경1, 대도호부1, 목 1, 도호부 2, 만호부 3, 군 20, 현 18, 진 9를 거느리게 하였다.
○ 패서도(浿西道)를 북계라고 일컬었으나, 연대는 상세하지 않다.
○ 숙종 7년 임오에 서북계라고 일컬었다. 등 합하여 5백 15이다. 경(京) 3, 소경 1, 부 1, 대도호부 4, 목 12, 도부로 22, 만호부 6, 군 88, 현 3백 59, 진 19이다.
○ 우리나라의 8도는 도합 3백 33고을[官]이다.
연려실기술-주(州)와 군(郡)-경기도
○ 경기도 동계(東界)와 동쪽 강원도 경계의 동남쪽, 남쪽 충청도 경계와 서남쪽 충청도 경계, 큰 바다 서쪽과 서북쪽, 큰 바다 북쪽, 황해ㆍ강원 2도의 경계이다. 는 38고을이다. 좌도 23고을ㆍ우도 15고을이다. 고조선의 땅과 마한(馬韓)의 지역이니, 4군(四郡)으로 있을 때는 낙랑군(樂浪郡) 관할이었다. 그 후에 남쪽 경계는 백제의 소유가 되었다가 다시 고구려와 신라가 나누어 점령했었고, 뒤에는 모두 신라가 병합하였으며 한주(漢州)를 두었다. 말기에는 궁예가 점령하였다. 고려 성종(成宗)이 관내도(關內道)를 두었고, 현종(顯宗)은 경기와 양광도로 나누어 두었으나 충숙왕이 양광도를 만들었으며, 공양왕이 비로소 경기좌도ㆍ우도로 나누어 만들었다. 장단ㆍ임강(臨江)ㆍ토산(?山)ㆍ임진ㆍ송림(松林)ㆍ마전(麻田)ㆍ적성(積城)ㆍ파평은 좌도가 되었고, 개성ㆍ강음(江陰)ㆍ해풍(海?)ㆍ덕수(德水)ㆍ우봉은 우도가 되었다. 한양ㆍ남양(南陽)ㆍ인천ㆍ안산(安山)ㆍ교하(交河)ㆍ양천(陽川)ㆍ금천(衿川)ㆍ과천ㆍ포천ㆍ서원(瑞原)ㆍ고봉(高峯)ㆍ철원ㆍ영평(永平)ㆍ이주(伊州)ㆍ안협(安峽)ㆍ연주(漣州)ㆍ삭녕(朔寧)은 좌도(左道)에 예속되었고, 부평ㆍ강화ㆍ교동(喬桐)ㆍ김포ㆍ통진ㆍ연안ㆍ평주(平州)ㆍ백주(白州)ㆍ곡주(谷州)ㆍ수안(遂安)ㆍ재령(載寧)ㆍ서흥(瑞興)ㆍ신은(新恩)ㆍ협계(俠溪)는 우도(右道)에 예속되었다. 태조 을해년에 고쳐서 좌도와 우도를 두었다. 평주(平州)ㆍ수안(遂安)ㆍ곡주(谷州)ㆍ재령(載寧)ㆍ서흥(瑞興)ㆍ신은(新恩)ㆍ협계(俠溪)는 새 서울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도로 서해도에 예속시키고, 광주(廣州)ㆍ수원ㆍ양근(楊根)ㆍ쌍부(雙阜)ㆍ용구(龍駒)ㆍ처인(處仁)ㆍ이천(利川)ㆍ천녕(川寧)ㆍ지평(砥平)을 나누어 좌ㆍ우도로 만들었다가 무인년에 또 충청도 진위현(振威縣)을 나누어 좌도에 예속시켰다. 태종 임오년에 양도(兩道)를 합해서 경기 좌ㆍ우도라고 부르다가 계사년에 좌ㆍ우도를 합하였다. 도ㆍ리(道里)의 원근을 참작해서 연안(延安)ㆍ백주(白州)ㆍ우봉(牛峯)ㆍ강음(江陰)ㆍ토산(?山)은 도로 풍해도(?海道)에 예속시키고, 이천(伊川)은 도로 강원도에 예속시키며, 또 충청도의 여흥(驪興)ㆍ안성(安城)ㆍ양지(陽智)ㆍ양성(陽城)ㆍ음죽(陰竹)과 강원도 가평현(加平縣)을 분할하여 예속시켰다.
○ 세종 갑인년에 다시 철원ㆍ안협(安峽)을 강원도에 옮겨 예속시켰다.
○ 한성부 : 고구려 때의 북한산군(北漢山郡)이니, 백제 온조왕(溫祚王)이 성을 쌓았고, 근초고왕이 도읍을 옮겼으며,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북한산에 와서 지경을 정하고 북한산주(北漢山州)의 군주(軍主)를 두었다. 경덕왕이 한양군이라 고쳤고, 고려 초기에 고쳐서 양주라 하였으며, 성종이 좌신책군(左神策軍)이란 이름을 지어서 해주와 함께 좌우이보(左右二輔)를 삼았다. 문종이 승격시켜 남경(南京)이라 하였고, 이웃 군(郡) 백성을 옮겨다가 채웠다. 숙종이 장차 도읍을 옮기려 하여 윤관(尹瓘)이 공역을 맡은 지 5년 만에 준공하였다. 충렬왕이 고쳐서 한양부(漢陽府)라 하였고, 우리 태조가 도읍을 정하여 한성부라고 고쳤다.
○ 남평양(南平壤) : 광릉(廣陵)이라 부른다.
○ 좌도 강화부 : 성이 있다. 고구려 때 여혈군(麗穴郡) 혹은 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도 한다. 이니,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해구(海口)라 고쳤고, 고려 초기에 고쳐서 강화현이 되었으며, 고종이 강도(江都)라 이름하였다. 몽고 군사를 피하여 이곳에 들어가서 도읍했기 때문이다. ○ 심주(沁州)라고도 부른다. 17면(面)이며 서울과의 거리가 1백 35리이다.
○ 진강(鎭江)은 폐현(廢縣)이며 고구려 때 수지현(首智縣)이다. 하음(河陰)도 폐현이다. 고구려 때 동음내현(冬陰奈縣)이다.
○ 광주부(廣州府) : 백제의 고도 남한산성이니, 신라 때에 고쳐서 한산주(漢山州)라 하였고, 경덕왕이 한주(漢州)라 고쳤으며, 고려 초기에 광주라 고쳤고, 성종이 봉국군(奉國軍)이라 이름하였다.
○ 회안(淮安)이라고도 부른다. 23면(面)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5리이다.
○ 화성부(華城府) : 성이 있다. 고구려 때의 매홀군(買忽郡)이요, 신라 때의 수성(水城)이니, 고려 태조가 승격시켜 수주(水州)라 하였고, 뒤에 수원으로 고쳤다.
○ 한남(漢南) : 수성(隋城)이라고도 부른다. 52면(面)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88리이다. 옛날 송수부곡(松水部曲)이다.
○ 정송(貞松)과 광덕(廣德)은 폐현이다.
○ 여주 : 고구려 때 골내근현(骨乃斤縣)이니, 신라 때는 황요(黃驍)라 고쳤고, 고려 초기에 황려(黃驪)로 고쳤으며, 뒤에 또 영의(永義)라 고쳤다가 다시 승격시켜 여흥군(驪興郡)이 되었고, 뒤에 신우(辛禑) 때에 와서 황려부(黃驪府)로 승격되었다가 다시 군으로 강등시켰다. 태종이 다시 부 원경왕후(元敬王后)의 고향 로 승격시켰더니, 예종 기축년에 여주목 영릉(英陵)으로 옮겼다. 으로 고쳤다.
○ 여강(驪江)ㆍ여성(驪城)ㆍ황리(黃利)라고도 부른다. 13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90리이다.
○ 천녕(川寧)은 폐현이다. 고구려 때의 술천군(述川郡)이니, 일명 성지매(省知買)이다. 신라 때에 고쳐서 기천(沂川)이라 하였고, 예종이 주에 합쳤다.
○ 부평 : 고구려 때 주부토군(主夫吐郡)인데, 신라 때에 장제(長堤)라 고쳤고, 고려 초기에 수주(樹州)로 고쳤다가 뒤에 안남계양(安南桂陽)으로 고쳤으며, 길주목(吉州牧)으로 승격시켰다가 부평부로 강등시켰다. 15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55리이다.
○ 남양 : 고구려 때의 당성군(唐城郡)인데, 신라 때에 당은(唐恩)이라 고쳤고, 고려 때에는 수주(水州)와 인주(仁州)에 속해 있다가 뒤에 현을 두었다. 다시 익주(益州)로 승격시켰다가 강남(江南)ㆍ안양(安陽) 등으로 고치고 남양부가 되었다.
○ 영제(寧堤) : 과포(戈浦)라고 한다. 12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5리이다.
○ 재양(載陽)은 폐현이다. 옛 안양현(安陽縣)이다.
○ 이천(利川) : 고구려 때의 남천현(南川縣)인데 혹은 남매(南買)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 황무(黃武)라 고쳤다가 고려 태조가 이천군으로 고치고 뒤에 영창(永昌)이라 고쳤다. 우리 태조 계유년에 다시 이천현이라 하고, 세종 갑자년에 부로 승격시켰다. 14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41리이다.
○ 인천 : 고구려 때의 매소홀현(買召忽縣)인데, 혹은 미추홀(彌趨忽)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는 소성(邵城)이라 고쳤다가 고려 때에 수주(樹州)에 예속시켰고, 뒤에 경원군(慶源郡)으로 승격시켰으며, 다시 인천이라 고쳤다. 공양왕이 경원부(慶源府)로 승격시켰다가 7대(代)조의 고향이라 하여 호장과 홍혜(紅鞋)를 하사하였다. 우리 태조 원년에 다시 인주(仁州)라고 하였는데, 군을 강등시켜 현이라 하였다. 태종이 인주군(仁州郡)이라 고쳤고, 세조 경진년(1460)에 다시 부(府)로 승격시켰다.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외향(外鄕)이다. 10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7리이다.
○ 통진 : 고구려 때의 평회압현(平淮押縣)인데, 혹은 비사성(比史城)이라고도 하고, 또는 별사파의(別史波衣)라고도 한다. 신라 때 분진(分津)이라 고쳤고, 고려 때에는 통진이라 고쳤으며, 숙종 갑술년에 현을 부로 승격시켰다. ○ 11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14리이다. ○ 동성(童城)은 폐현이고 고구려 때의 동자홀현(童子忽縣)인데, 혹은 당산현(幢山縣)이라고도 하고, 또는 구사파의(仇斯波衣)라고도 하는데, 공양왕 때에 통진에 속했다. 수안(守安)도 폐현이다. 고구려 때의 수이홀(首爾忽)인데, 신라 때에 수성(戍城)이라 고쳤다.
○ 죽산 : 고구려 때의 개차산군(皆次山郡)인데, 신라 때 개산(介山)이라 고쳤고, 고려 때에 죽주(竹州)로 고쳤으며, 우리 태종이 죽산이라 고쳤다.
○ 음평(陰平)ㆍ연창(延昌)이라고 한다. ○ 1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70리이다.
○ 양근(楊根) : 고구려 때의 양근군(楊根郡)이니, 혹은 항양(恒陽)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 빈양(濱陽)이라 고쳤고, 고려 때는 영화(永化)라고 일컬었다. 뒤에 익화(益和)로 승격시켰다가 지금 명칭으로 다시 고쳤다. ○ 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16리이다.
○ 미원(迷原)은 속현이다. 공민왕이 국사(國師) 보우(普愚)로 하여금 군(郡)의 미원장(迷原莊) 소설암(小雪庵)에 살게 하고, 장(莊)을 현(縣)으로 만들고 감무(監務)를 승격시켰더니, 조금 후에 그곳은 땅이 좁고 사람이 드물다 하여 다시 군에 예속시켰다.
○ 안산 : 고구려 때의 장항구현(獐項口縣)이니, 신라 때 장구군(獐口郡)이라 고쳤고, 고려 초기에 안산으로 고쳤다.
○ 연성(蓮城)이라고 한다. ○ 6면(面)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2리이다. ○ 장항(獐項)은 폐현이다.
○ 안성 : 고구려 때의 제혜홀(祭兮忽)이니, 신라 때 백성군(白城郡)이라 고쳤고, 고려 때 안성현(安城縣)이라 고쳤다. 뒤에 수주(水州) 천안에 예속시켰다가 또 현을 두고 군으로 승격시켰다. 홍건적의 난리에 임금이 남쪽으로 피난하니, 여러 고을이 항복했으나 오직 안성(安城) 사람이 거짓 항복하는 체하고 잔치를 베풀어 취한 것을 이용하여 괴수 6명을 목베어 죽였다. ○ 1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52리이다.
○ 김포 : 고구려 때의 금포현(黔浦縣)이니, 신라 때 김포로 고쳤다. 태종이 양천(陽川)을 나누어서 이 현에 합치고 이름을 금양(金陽)이라 하였더니, 뒤에 양천을 또 금천(衿川)에 합병시키고, 김포는 부평에 합병시켰다가 그 후 2년에 다시 현을 만들었다. ○ 8면(面)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0리이다. ○ 금릉(金陵)이라고 한다.
○ 용인 : 용구(龍駒)는 본래 고구려 때의 구성(駒城)인데, 혹은 멸오(滅烏)라고도 하였다. 신라 때 거서(巨黍)라 고쳤다가 고려 초기에 용구(龍駒)라 고쳤다. 처인현(處仁縣)은 본래 수원의 처인부곡(處仁部曲)이니, 태조가 처음으로 현을 설치하였다. 태종이 2현을 합해서 용인으로 고쳤다. ○ 1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0리이다.
○ 진위(振威) : 고구려 때의 부산현(釜山縣)이니, 신라 때 진위로 고쳤다. ○ 연달(淵達) : 송촌(松村)ㆍ활달(活達)이라고 한다. ○ 11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18리이다. ○ 영신(永新)은 폐현이다. 또는 영풍(永?)이라고도 한다. 송장부곡(松莊部曲)이라고도 한다.
○ 양천 : 고구려 때의 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이니, 신라 때 공암(孔巖)으로, 고려 때 양천으로 고쳤다. ○ 제양(齊陽)ㆍ파릉(巴陵)이라고도 한다. ○ 양평(陽平)ㆍ양원(陽原)이라고도 한다. ○ 4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1리이다.
○ 지평(砥平) : 고구려 때의 지현현(砥峴縣)이니, 신라 때 지평으로 고쳤다. ○ 지제(砥堤)라고도 한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62리이다.
○ 과천 : 고구려 때의 율목군(栗木郡)이니, 신라 때 율진(栗津)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과주로 고쳤다. 태종이 과천으로 고치고, 또 금천(衿川)과 합쳐서 금과(衿果)라고 부르다가 조금 후에 다시 복구하였다.○ 동사혜(冬斯?) : 부림(富林)ㆍ부안(富安)이라고도 한다. ○ 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0리이다.
○ 금천(衿川) : 고구려 때의 잉벌노현(仍伐奴縣)이니 신라 때 곡양(穀壤)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금주(衿州)로 고쳤는데, 혹은 금주(黔州)라고도 한다. 태종 때 금과(衿果)가 되고 또 양천과 합쳐서 금양(衿陽)이 되었다. ○ 시흥(始興)이라고도 한다. ○ 14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1리이다.
○ 음죽(陰竹) : 고구려 때의 노음죽현(奴音竹縣)이니, 신라 때 음죽으로 고쳤다. ○ 설성(雪城)이라고 한다. ○ 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95리이다.
○ 양성(陽城) : 고구려 때의 사복홀(沙伏忽)이니, 신라 때 적성(赤城)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양성(陽城)으로 고쳤다. ○ 사파을(沙巴乙)이라고 한다. ○ 14면(面)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14리이다.
○ 양지(陽智) : 본래 수주(水州) 양양부곡(陽良部曲)이니, 정종이 승격시켜 현을 만들고 양지로 고쳤으며, 태종이 현의 관아를 추계(秋溪)로 옮겼었다. ○ 양산(陽山)이라고 한다. ○ 10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11리이다.
○ 우도 개성부(開城府) : 고구려 때의 부소압(扶蘇押)이니 신라 때 송악군(松岳郡)으로 고쳤고, 고구려 때 동비홀(冬比忽)을 고쳐서 개성군(開城郡)을 만들었다. 고려 태조가 2군을 합친 이 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개주(開州)라 하였다가 뒤에 개성부라 고쳤다. 정주(貞州)ㆍ덕수(德水)ㆍ강음(江陰)ㆍ장단ㆍ송림(松林)ㆍ임진ㆍ토산(?山)ㆍ임강(臨江)ㆍ적성(積城)ㆍ파평ㆍ마전(麻田)의 11현을 관할하였다. 또 서해도ㆍ우봉군(牛峯郡)을 분할하여 이에 예속시켰더니 우리 태조가 도읍을 옮기고 송도라 고쳤다.
○ 개경 : 황도(皇道)ㆍ촉막군(蜀莫郡)이라고도 한다. 《송사(宋史)》에, “고려왕이 개주(開州) 촉막군(蜀莫郡)에 살아 이곳을 개성부라고 하는데, 산을 의지해서 궁실을 짓고, 성벽을 세워서 그 산을 신숭산(神嵩山)이라 하였다.” 하였다.
○ 사부(四部) 동부는 인흥방(仁興坊)이고, 남부는 예안방(禮安坊)이며, 서부는 의흥방(義興坊)이요, 북부는 지안방(智安坊)이다. 또 5부(部) 35방(坊)을 개정하였다. 동부 7방은 안정(安定)ㆍ봉향(奉香)ㆍ영창(令昌)ㆍ철령(哲令)ㆍ양제(楊堤)ㆍ홍인(弘仁)ㆍ창령(倉令)이요, 남부 5방은 덕수(德水)ㆍ덕풍(德?)ㆍ안흥(安興)ㆍ덕산(德山)ㆍ안신(安申)이요, 서부 5방은 삼송(森松)ㆍ오정(五正)ㆍ건복(乾福)ㆍ진안(鎭安)ㆍ향천(香川)이요, 북부 10방은 정원(正元)ㆍ법왕(法王)ㆍ흥국(興國)ㆍ오관(五冠)ㆍ자운(慈雲)ㆍ왕륜(王輪)ㆍ제상(堤上)ㆍ사내(舍乃)ㆍ사자(獅子)ㆍ암내(巖內)ㆍ천왕(天王)이요, 중부(中部) 8방은 남계(南溪)ㆍ흥원(興元)ㆍ홍도(弘道)ㆍ앵계(鸚溪)ㆍ유암(由巖)ㆍ변양(變羊)ㆍ광덕(廣德)ㆍ성화(星化)이다. 우리 세조가 개성은 외관(外官)이므로, 옛 제도 그대로 둘 수 없다 하여 드디어 이것을 줄여서 4부 4방 17면으로 만들었다. ○ 서울과의 거리가 1백 66리이다. ○ 전팔경(前八景) 곡령춘청(鵠嶺春晴)ㆍ용산추만(龍山秋晩)ㆍ자동심승(紫洞尋僧)ㆍ청교송객(靑郊送客)ㆍ웅천계음(熊川?飮)ㆍ용야심춘(龍野尋春)ㆍ남포연사(南浦煙?)ㆍ서강월정(西江月艇)이다. ○ 후팔경(後八景) 자동심승(紫洞尋僧)ㆍ청교송객(靑郊送客)ㆍ북산연우(北山煙雨)ㆍ서강풍설(西江風雪)ㆍ백악청운(白岳晴雲)ㆍ황교만조(黃郊晩照)ㆍ장단석벽(長湍石壁)ㆍ박연폭포이다.
○ 파주 : 파평현(坡平縣)은 고구려 때의 파해평사현(坡害平史縣)이니, 액봉(?逢)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파평으로 고쳤다. 서원군(瑞原郡)은 고구려 때의 술매홀현(述?忽縣)이니, 신라 때 봉성(峯城)으로 고쳤고, 고려 때 다시 고쳐서 서원(瑞原)이 되었다. 태조 무인년에 서원(瑞原)ㆍ파평을 합쳐서 원평군(原平郡)이 되었다. 태종 을미년에 부사로 승격시키고, 세조 경진년에 이름을 파주목 왕비의 고향이다. 이라 고쳤었는데, 연산군 때에 주(州)를 파하여, 그 땅이 비었던 것을 중종(中宗)이 다시 설치하였다. ○ 영평(鈴平)ㆍ곡성(曲城)이라고 한다. ○ 11면(面)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82리이다.
○ 양주(楊州) : 고구려 때의 매성군(買省郡)이니 또는 창화(昌化)라고도 한다. 신라 때 내소(來蘇)라 고쳤고, 고려 초기에 견주(見州)로 승격시켰다. 우리 태조 갑술년에 부(府)의 관아를 동촌(東村)으로 옮기고 양주로 강등시켰다. 태종 을미년에 부로 승격시켰다. 세조 경진년에 목(牧)으로 승격시켰고, 연산군 때 주(州)를 파하여 이 땅이 비었던 것을 중종(中宗)이 다시 설치하였다. ○ 33면(面)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0리이다. 풍양(?壤)은 속현이고, 고구려 때 골의노현(骨衣奴縣)이니, 신라 때 황양(荒壤)으로 고쳤고, 고려 때 풍덕(?德)으로 고쳤는데, 세종 때 와서 양주에 예속시켰다. 사천(沙川)은 폐현이다. 고구려 때의 내을매현(內乙買縣)이니, 또는 내매미(內?米)라고도 하는데, 신라 때 사천(沙川)으로 고쳤다.
○ 장단(長湍) : 고구려 때의 장천성현(長淺城縣)이니 신라 때 장단으로 고쳤고, 고려 때 단주(端州)로 승격시켰으며, 태종이 임강현(臨江縣)과 합쳐서 장림(長臨)이라 하였다. 뒤에 다시 장단과 임진을 합쳐서 임단(臨湍)이라고 불렀는데, 세종 기해년에 다시 장단현이 되었다. 세조 기묘년에 군으로 승격시키고, 중궁의 증조 이상의 3묘(墓)가 있다. 관아를 도원역(桃源驛)으로 옮겼더니 예종 기축년에 부로 승격시켰다. ○ 습천(?川)ㆍ야야(耶耶)ㆍ야아(夜牙)라고도 한다. ○ 24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20리이다. ○ 임강(臨江)은 폐현이고 고구려 때의 장항현(獐項縣)이니 또는 고사야홀차(古斯也忽次)라고도 한다., 송림(松林)도 폐현이다. 고구려 때의 약지(若只)ㆍ두치현(頭恥縣)이니, 또는 지섬(之蟾)ㆍ삭두(朔頭)라고도 한다. 신라 때 여비(如?)로 고쳤다. 임진은 폐현이다. 고구려 때 진림성현(津臨城縣)이니, 또는 오아홀(烏阿忽)이라고도 한다.
○ 풍덕(?德) : 고구려 때의 정주(貞州)이니, 고려 때 승천부(昇天府)로 승격시켰다가 뒤에 해풍군(海?郡)으로 강등시켰다. 태종이 군을 줄여 개성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다시 군을 만들었고, 세종이 덕수현(德水縣)과 합쳐서 이름을 풍덕이라고 고쳤으며, 효종 기축년(1649)에 부로 승격시켰다. ○ 하원(河源)이라고도 한다. ○ 8면(面)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80리이다. ○ 덕수(德水)는 폐현이다. ○ 고구려 때의 덕물현(德勿縣)이니, 또는 인물(仁物)이라고도 한다.
○ 교동(喬桐) : 성이 있다. 고구려 때의 고목근현(高木根縣)이니, 대운도(戴雲島) 또는 고림(高林) 또는 달을신(達乙新)이라고도 한다. 이라고도 하는데, 신라 때 교동으로 고쳤다. 태조가 만호를 두었으며 뒤에 현으로 승격시켰고, 인조 기사년에 부로 승격시켰다. ○ 4면(面)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육로로 1백 20리고, 수로로는 50리이다. ○ 삭녕(朔寧) : 고구려 때의 소읍(所邑)ㆍ두현(豆縣)이니 고려 때 삭녕ㆍ승령현(僧領縣)으로 고쳤다. 고구려 승량현(僧梁縣) 또는 빗물(非勿)이라고도 한다. 을 신라 때 동량(?梁)으로 고쳤다. 고려 현종 때에 2현을 모두 동주(東州)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승령현(僧嶺縣)을 두고 삭녕과 합쳤다. 태종 계미년에 군으로 승격시키고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외향(外鄕)이다. 또 안협현(安峽縣)을 줄여서 예속시켜 안삭군(安朔郡)을 만들었더니 조금 뒤에 복구하였다. ○ 7면(面)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95리이다.
○ 마전(麻田) : 고구려 때의 마전천현(麻田淺縣)이니, 신라 때 임단(臨湍)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마전으로 고쳤다. 문종 임신년에 군으로 승격시켰다. 숭의전(崇義殿)이 있기 때문이다. ○ 6면(面)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25리이다. ○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서울과의 거리는 1백 79리이다.” 하였다.
○ 고양(高陽) : 고구려 때의 달을성현(達乙省縣)이니 신라 때 고봉(高峯)이라고 개칭했고, 고구려 때 개백현(皆伯縣)을 신라 때 우왕(遇王)이라고 고쳤는데, 또는 왕봉(王逢)이라고도 하였다. 고려 때 행주(幸州)로 개칭하였으며, 현종 때에 2현을 모두 양주에 예속시켰다. 태조 갑술년에 비로소 고봉현을 두고, 행주와 부원(富原)ㆍ황조(荒調)를 이에 예속시켰다. 태종 계사년에 고양이라 개칭하고, 고봉ㆍ덕양(德陽) 성종 신묘년에 군으로 승격시켰다. ○ 8면(面)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87리이다. ○ 고봉고현(高峯古縣)이라고도 한다. 김부식이 말하기를, “한씨(漢氏)의 미녀가 달을성현(達乙省縣) 높은 산꼭대기에서 봉화를 놓고 안장왕(安藏王)을 맞이했기 때문에 뒤에 이름을 고봉이라 하였다.” 하였다. 왕봉(王逢)은 폐현이고 바로 행주(幸州) 한씨의 미녀가 안장왕(安藏王)을 개백현(皆伯縣)에서 맞았으므로 이름을 고쳐서 왕봉(王逢)이라 하였다. 부원(富原)도 폐현이다. 본래 과주(果州) 용산처(龍山處)인데, 지금은 한성부에 예속되었다. 황조향(荒調鄕) 본래 부평에 예속되었으니 바로 주엽리(注葉里)이다.
○ 교하(交河) : 고구려 때의 천정구현(泉井口縣)이니 또는 굴화(屈火)라고도 한다. 신라 때 교하군(交河郡)이라 고쳤고, 고려 때 양주에 예속시켰는데, 태조 갑술년에 비로소 현을 두고 심악(深岳)ㆍ석천(石淺) 부평의 속향 을 여기에 예속시켰으며 영종(英宗) 계축년에 군으로 승격시켰다. ○ 선성(宣城)ㆍ원정(原井)이라고도 한다. ○ 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90리이다. ○ 심악(深岳)은 폐현이다. 옛날의 보신향(寶新鄕)이다.
○ 가평 : 고구려 때의 근평군(斤平郡)인데, 병평(幷平)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가평이라 고쳤으며, 가평(嘉平)이라고도 한다. 고려 때 춘주(春州)에 예속시켰는데 태조 병자년에 비로소 현을 두었으며 중종 정묘년에 군으로 승격시켰다. ○ 4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37리이다. ○ 조종(朝宗)은 속현이다. 고구려 때의 심천현(深川縣)이니 또는 복사매(伏斯買)라고도 하는데, 신라 때 준천(浚川)이라고 고쳤다.
○ 영평 : 고구려 때의 양골현(梁骨縣)이니, 신라 때 동음(洞陰)이라 고쳤고, 고려 때 영흥(永興)으로 승격시켰으며, 태조 갑술년에 영평이라 고쳤다. ○ 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40리이다.
○ 포천 : 고구려 때의 마홀군(馬忽郡)이니 신라 때 견성(堅城)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포천으로 고쳤으며, 태종 계사년에 포천현으로 고쳤다.
○ 명음(命音) : 청화(淸化)라고도 한다. ○ 광해군 무오년(1618)에 영평(永平)과 합하여 부사로 승격시켰다가 계해년에 도로 혁파하였다. ○ 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97리이다.
○ 적성(積城) : 고구려 때의 칠중현(七重縣)이니, 신라 때 중성(重城)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적성(積城)으로 고쳤다. ○ 내별(乃別)이라고도 한다. ○ 5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20리이다.
○ 연천(漣川) : 고구려 때의 공목달현(工木達縣)이니, 웅섬산(熊閃山)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공성(功成)이라 고쳤고, 고려 때 장주(?州)ㆍ연천이라 고쳤으며, 태종 갑오년에 마전(麻田)과 합해서 마련현(麻漣縣)을 만들었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나누어 연천현을 만들었다. ○ 장포(獐浦)라고도 한다. ○ 5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43리이다.
연려실기술-주(州)와 군(郡)-충청도
○ 충청도 : 동북쪽은 강원도와 경계요, 동쪽은 경상도와 경계로 동남쪽은 경상ㆍ전라 양도의 경계로, 남쪽은 전라도와 경계로 서남쪽 및 서쪽ㆍ서북쪽은 모두 큰 바다이며, 북쪽은 경기도와 경계이다. 54고을 좌도 21고을, 우도 33고을 이니, 옛 마한(馬韓)의 땅으로서 고구려와 백제가 나누어 점거하였다가 뒤에 모두 신라에 병합되었다. 웅주를 두었다. 말기에는 궁예와 견훤이 나누어 점거하였다.
고려 성종이 중원도(中原道)ㆍ하남도(河南道)를 두었는데, 예종이 관내도(關內道)에 합쳐서 양광충청주도(楊廣忠淸州道)라 일컬었다. 다시 명종이 나누어 2도를 만들었고, 충숙왕이 다시 합쳐서 1도로 만들어 양광도(楊廣道)라 하였고, 공민왕이 충청도라고 불렀다. 신우가 평창군(平昌郡)을 나누어서 교주도(交州道)에 옮겨 예속시켰다. 우리 태조 을해년에 양광주(楊廣州)가 거느린 군현을 경기에 예속시키고, 그 나머지는 그대로 충청도라 일컬었다. 태조 무인년에 진위현을 나누어 경기도에 예속시켰고, 정종은 영월군을 나누어 강원도에 예속시켰으며, 강원도 영춘현(永春縣)을 충청도에 예속시켰다. 태종 계사년에 영흥(永興)ㆍ안성(安城)ㆍ음죽(陰竹)ㆍ양성(陽城)ㆍ양지(陽智)를 경기도에 예속시키고, 경상도의 옥천(沃川)ㆍ영동(永同)ㆍ황간(黃澗)ㆍ보은ㆍ청산을 충청도에 예속시켰다.
○ 좌도 충주 : 성(城)이 있다. 고구려 때의 국원성(國原城) 또는 미을성(未乙省)이라고도 하며, 난장성(亂長省)이라고도 한다. 이니, 신라 진흥왕이 소경(小京) 귀족 자제들과 6부(部)의 호민(豪民)들을 옮겨다가 채웠다. 을 두었으며 뒤에 중원경(中原京)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가 고쳐서 충주라 하였고, 성종은 창화군(昌化軍)이라 이름하였다. 세종 기사년에 관찰사로서 목사(牧使)를 겸하게 했다가 얼마 안 되어 혁파하였다. ○ 대원(大原) 결(缺) 예(蘂)는 본래 고구려의 원성(原城)인데, 신라 때 병합하고 진흥왕이 소경을 두었고, 경덕왕이 중원(中原)이라 하였으며, 고려 때 충주라 고쳤다.
○ 청주 : 성이 있다. 백제 때 상당현(上黨縣)이니, 또는 낭비성(娘臂城) 또는 낭우곡(娘于谷)이라 한다. 이라 한다. 신라 때 서경ㆍ소경(小京)을 두었으며, 고려 태조가 청주라 고쳤다가 뒤에 전절군(全節軍)으로 삼았다. 세종 기사년에 관찰사로서 목사를 겸하게 했다가 얼마 안 되어 파하였다. ○ 청주ㆍ낭성(琅城)이라고도 한다. ○ 23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리가 된다. ○ 청주는 속현이다. 옛날 살매현(薩買縣)이니, 또는 청천(淸川)이라고도 한다.
○ 청풍(淸風) : 고구려 때의 사열이현(沙熱伊縣)이니, 신라 때 청풍이라 고쳤고, 현종 경자년에 군을 부로 승격시켰다. ○ 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55리이다.
○ 단양 : 고구려 때 적산현(赤山縣)이니 적성(赤城)이라고도 한다. 고려 때 단산(丹山)이라 고쳤다가 또 단양으로 고치고, 군으로 승격시켰다. ○ 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80리이다.
○ 천안 : 본래 동서(東西) 도솔(兜率)의 땅이니, 고려 태조가 병합하여 천안부를 만들었고, 성종이 환주(歡州)라고 고쳤는데 뒤에 영주(寧州)로 고쳤다. 태종 계사년에 영산군(寧山郡)이라 고쳤다가 조금 후에 천안으로 고쳤다. ○ 임환(任歡)이라고도 한다. ○ 15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19리이다. 풍세(?歲)는 폐현이다. 백제 때 감매현(甘買縣)이니, 또는 제천(?川)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순치(馴稚)라 고쳤다.
○ 괴산 : 고구려 때의 잉근내군(仍斤內郡)이니, 신라 때 괴양(槐壤)으로 고쳤고, 고려에서는 괴주(槐州)라 고쳤는데, 태종 계사년에 괴산군으로 고쳤다. ○ 시안(始安)이라고도 한다. ○ 12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80리이다.
○ 옥천 : 신라 때 고시산군(古尸山郡)이니 뒤에 관성(管城)이라 고쳤고, 고려 때 옥주(沃州)로 승격시켰으며, 태종 계사년에 옥천군(沃川郡)으로 고쳤다. ○ 11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10리이다. ○ 이산(利山)은 속현이다. 신라 때의 소리산현(所利山縣)이다. 안읍현(安邑縣) 신라 때의 아동혜군(阿東兮郡)이니 안정(安貞)이라 고쳤다. 양산현(陽山縣) 신라 때의 조차천현(助此川縣)이니, 고려 충선왕 때 3현을 나누어 여기에 예속시켰다.
○ 문의(文義) : 백제 때의 일모산군(一牟山郡)이니, 신라 때 연산(燕山)으로 고쳤고, 고려 때에는 문의현이라 고쳐서 가림(嘉林)과 합쳤다가 얼마 안 되어 복구하였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26리이다.
○ 제천 : 고구려 때의 내토군(奈吐郡)이니, 신라 때 내제(奈堤)로 고쳤고, 고려 때에는 제주(堤州)라 고쳤는데, 태종 계사년에 제천현(堤川縣)으로 고쳤다. ○ 의천(義川)이라고도 한다. ○ 의원(義原)이라고도 한다. ○ 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20리이다.
○ 직산(稷山) : 본래는 위례성(慰禮城)이니 백제가 도읍을 세웠고, 고구려는 이곳을 차지하여 사산현(蛇山縣)이라 하였으며, 고려 초기에 직산으로 고쳤다. 태조 계유년에 군으로 승격시켰고, 태종 신사년에 다시 강등시켰으며, 연산군 때 경기도로 옮겨 예속시켰다가 중종 때 복원하였다. ○ 12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83리이다. ○ 경양(慶陽)은 폐현이다. 고려 때 하양창(河陽倉)이다.
○ 회인(懷仁) : 백제 때의 미곡현(未谷縣)이니, 신라 때 매곡(昧谷)이라 고쳤고, 고려 때에는 회인이라 고쳤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46리이다.
○ 연풍(延?) : 고구려 때의 상모현(上芼縣)이니, 고려 때에 장연(長延)이라 고쳤고, 태조 갑술년에 장풍현(長?縣)과 합쳤으며, 태종 계미년에 연풍으로 고쳤다. ○ 4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62리이다. ○ 장풍(長?)은 폐현이다.
○ 음성(陰城) : 고구려 때의 잉홀현(仍忽縣)이니, 신라 때 음성으로 고쳤다. ○ 설성(雪城)이라고도 한다. ○ 잉근내(仍斤內)는 선조 임진년에 혁파했다가 광해군 무오년에 다시 두었다. ○ 4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48리이다.
○ 청안(淸安) : 청당현(淸塘縣)이니 청연(淸淵)이라고도 하는데, 고려 때 도안(道安)과 겸하여 다스렸다. 도안현(道安縣)은 본래 고구려 때 도서현(道西縣)이니 신라 때에는 도서(都西)로 고쳤다. 태종 을유년에 양현(兩縣)을 합쳐서 청안으로 고쳤다. ○ 청당(淸塘)이라고도 한다.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93리이다.
○ 진천(鎭川) : 고구려 때의 금물노군(今勿奴郡)이니, 만노(萬弩)라고도 하며 수지(首知) 혹은 신지(新知)라고도 한다. 신라 때 흑양(黑壤)으로 고쳤는데 또는 황양(黃壤)이라고도 한다. 고려 초기에 강주(降州)라 일컬었다가 진주(鎭州)로 고쳤으며, 창의(彰義) 의령(義寧)으로 승격시켰다. 태조 계사년에 진천현으로 고쳤고, 연산군이 경기도로 옮겨 예속시켰는데 중종이 복원하였다. ○ 상산(常山)이라고도 한다. ○ 15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34리이다.
○ 목천(木川) : 백제 때 대목악군(大木岳郡)이니 신라 때 대록(大麓)이라 고쳤고, 고려 때에는 목주(木州)로 고쳤다. 태종 계사년에 목천현이라 고쳤다. ○ 신정(新定)이라고도 한다. ○ 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47리이다.
○ 영춘(永春) : 고구려 때의 을아단현(乙阿旦縣)이니, 신라 때 자춘(子春)으로 고쳤고, 고려 때 영춘으로 고쳤으며, 정종 기묘년에 옮겨 예속시키고 현(縣)을 설치하였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90리이다.
○ 보은(報恩) : 신라 때 삼년산군(三年山郡)을 삼년으로 고쳤고, 고려 때 보령(保齡)으로 고쳤으며, 태종 병술년에 보은현으로 고쳤다. 보령(保寧)과 음(音)이 서로 같기 때문이다. 삼산(三山) ○ 10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76리이다.
○ 영동(永同) : 신라 때 길동군(吉同郡)을 영동으로 고쳤고, 고려 때 계주(稽州)로 승격시켰다가 도로 폐하여 현으로 하였다. ○ 영산(永山)ㆍ계산(稽山)이라고도 한다. ○ 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60리이다.
○ 황간(黃澗) : 신라 때의 소라현(召羅縣)이니, 황간 신라 때 수영(水永)에 속해 있었다. 이라 고쳤고, 태종 갑오년(1414, 태종 14)에 청산(靑山)과 합쳐서 황청현(黃靑縣)을 만들었다가 얼마 안 되어 이전 상태로 회복하였다. ○ 황계(黃溪)라고도 한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90리이다.
○ 청산(靑山) : 신라 때의 굴산현(屈山縣) 삼년군(三年郡)에 속해 있었다. 이니, 돌산(?山)이라고도 하는데 기산(耆山)이라 고쳤고, 고려 때 청산으로 고쳤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23리이다. ○ 주성(酒城)은 속현이다. 보은 북촌(北村)에 들어갔다가 땅이 작다 해서 분할하여 부속시켰다.
○ 우도 공주 : 백제 때의 웅천(熊川)이니, 문주왕(文周王)이 북쪽 한수(漢水)로부터 도읍을 이곳에 옮겼는데,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멸하고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었다. 신라 때 웅천주(熊川州)라 고쳤다가 또 웅주(熊州)로 고쳤고, 고려 태조가 공주로 고쳤다가 뒤에 안절군(安節軍)이라 일컬었다. ○ 회도(懷道)라고도 한다. ○ 2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23리이다. 유성(儒城)은 속현이다. 백제 때 노사지현(奴斯只縣)이다. 덕진(德津)은 폐현이고, 백제 때 소비포현(所比浦縣)이요, 신라 때의 적조(赤鳥)이다. 신풍(新?)도 폐현이다. 백제 때의 벌음지현(伐音只縣)이니, 또는 무부(武夫)라 했다. 신라 때 청음(淸音)으로 고쳤다.
○ 홍주(洪州) : 성(城)이 있다. 고려 때의 운주(運州)이니, 홍주라 고쳤다.
○ 안평(安平)ㆍ해풍(海?)ㆍ해흥(海興)ㆍ홍양(洪陽)이라고 한다. ○ 2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93리이다. 신평(新平)은 속현이다. 면천(沔川)ㆍ동촌(東村)으로 들어갔으니, 백제 때 사평현(沙平縣)이다. 여양(驪陽)은 폐현이고 백제 때의 사시량현(沙尸良縣), 또는 사라(沙羅)라고도 하는데, 신라가 신량(新良)이라 고쳤다. 고구(高丘)도 폐현이며 백제 때의 우견현(牛見縣)이니, 신라 때에 목우(目牛)로 고쳤다. 흥양(興陽)도 폐현이고, 옛 이름은 원군(遠軍)이다. 합덕(合德)도 폐현이다. 본래는 덕풍현(德?縣)에 속하여 부곡이 되었다.
○ 임천(林川) : 백제 때의 가림군(加林郡)이니, 신라 때 가림으로 고쳤고, 고려 때 임주(林州)를 두었다. 태조 갑술년에 군으로 승격시켰다가 태종 신사년(1401, 태종 1)에 도로 강등시켰으며, 계미년에 또 다시 승격했다가 갑신년에 도로 강등시키고, 계사년에 임천(林川)으로 고쳤다. ○ 21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19리이다.
○ 태안 : 백제 때의 성대혜현(省大兮縣)이다. 신라 때 소태(蘇泰)로 고쳤고, 고려 때 태안군으로 고쳤다. ○ 전성(蓴城)이라고도 한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18리이다.
○ 한산(韓山)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마산현(馬山縣)인데, 고려 때 한주(韓州)로 승격시켰고, 태종 계사년에 한산군으로 고쳤다. ○ 마읍(馬邑)ㆍ아주(?州)라고도 한다. ○ 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40리이다.
○ 서천(舒川) : 백제 때의 설림군(舌林郡)이니, 남양(南陽)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서림(西林)으로 고쳤고, 고려 때 서주(西州)로 승격시켰으며, 태종 계사년(1413, 태종 13)에 서천군으로 고쳤다. ○ 10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70리이다.
○ 면천(沔川) : 백제 때의 혜군(?郡)이니, 신라 때 혜성(?城)이라 고쳤고, 고려 때 면주(沔州)로 승격시켰으며, 태종 계사년에 면천군으로 고쳤다. ○ 마산(馬山)ㆍ해종(海宗)이라고도 한다. ○ 14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80리이다.
○ 서산 : 백제 때의 기군(基郡)이니, 신라 때 부성(富城)으로 고쳤고, 고려 때 서산으로 고쳤으며, 서주(瑞州)로 승격시켰다가 서령부(瑞寧府)로 강등시켰었는데, 태종 계사년에 다시 서산군이 되었다. ○ 1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88리이다. ○ 지곡(地谷)은 폐현이다. 백제 때의 지륙현(知六縣)이니, 신라 때 지육(地育)이라 고쳤다.
○ 온양 : 백제 때의 탕정군(湯井郡)이니, 신라 때 주로 승격시켰고 고려 초기에 온수군(溫水郡)으로 고쳤다. 태종 갑오년에 신창(新昌)과 합쳐서 온창(溫昌)이라 일컫다가 병신년에 그전 이름을 회복했고, 세종 임술년에 온양군으로 고쳤다. ○ 온천(溫泉)이라고도 한다. ○ 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33리이다.
○ 대흥(大興) : 백제 때 임존성(任存城)이니 금주(今州)라고도 한다. 신라 때 임성군(任城郡)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대흥으로 고쳐서 현을 만들었다. 숙종 신유년에 군으로 승격시켰다. ○ 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83리이다.
○ 홍산 : 백제 때의 대산현(大山縣)이니, 신라 때 한산(翰山)으로 고쳤고, 고려 때 홍산으로 고쳤다. ○ 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22리이다.
○ 덕산(德山) 덕풍현(德?縣) : 백제 때의 금물현(今勿縣)이니, 신라 때 금무(今武)로 고쳤고, 고려 때 덕풍(德?)으로 고쳤다. 이산현(伊山縣)은 백제 때의 마시산군(馬尸山郡)이니, 신라 때 이산(伊山)으로 고쳤고, 고려 때 현으로 만들었다. 태종 을유년(1405, 태종 5)에 이산의 인물(人物)이 쇠잔하다 하여 두 현을 합쳐서 덕산을 만들었다. ○ 12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93리이다.
○ 평택 : 고하팔현(古河八縣)이니, 고려 때 평택으로 고쳤고, 연산군이 경기도로 이속시키더니 중종이 이전대로 회복시켰다. ○ 팽택(彭澤) 《여지승람》에는 실려 있지 않다. 은 선조 병신년에 혁파하였다가 광해군 무오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73리이다.
○ 정산(定山) : 백제 때의 열기현(悅己縣)이니, 두릉윤성(豆陵尹城)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열성(悅城)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정산으로 고쳤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49리이다.
○ 청양 : 백제 때의 고량부리현(古良夫里縣)이니, 신라 때 청무(靑武)로 고쳤고, 고려 때 청양으로 고쳤다. ○ 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33리이다.
○ 은진(恩津) : 덕은군(德恩郡)이니, 백제 때의 덕근군(德近郡)이며, 신라 때 덕은(德殷)으로 고쳤고, 고려 때 덕은(德恩)으로 고쳤다. 시진현(市津縣)은 백제 때 가지내현(加知奈縣)이니, 또는 가을내(加乙乃)라고도 하고, 또는 신포(薪浦)라고도 한다. 신라 때 시진(市津)으로 고쳤는데, 고려 때 모두 공주에 예속시켰다. 태조 정축년에 두 현을 합해서 덕은으로 하였다. 세종이 은진으로 고쳤더니, 인조 병술년에 이성(尼城)ㆍ연산을 합쳐서 은산(恩山)을 만들었고, 효종 병신년(1656, 효종 7)에 이전 이름을 회복했다. ○ 14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12리이다.
○ 회덕 : 백제 때의 우술군(雨述郡)이니, 오천(汚淺)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비풍(比?)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회덕현으로 고쳤다. ○ 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81리이다.
○ 진잠(鎭岑) : 백제 때의 진현현(眞峴縣)이니 정현(貞峴)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진령(鎭嶺)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진잠으로 고쳤다. ○ 기성(杞城)이라고도 한다. ○ 5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51리이다.
○ 연산 : 백제 때의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이니, 신라 때 황산(黃山)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연산현으로 고쳤다. 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6리이다.
○ 이성(尼城) : 백제 때의 열야산군(熱也山郡)이니, 신라 때 이산(尼山)으로 고쳤다. 태종 갑오년에 석성(石城)과 합쳐서 이산성이라 일컫다가 다시 나누었다. ○ 노산(魯山)ㆍ노성(魯城)이라고도 한다. ○ 11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77리이다.
○ 부여 : 백제 때의 소부리군(所夫里郡)이니, 사비(泗?)라고도 한다. 성왕(聖王)이 이곳에 와서 도읍하고 이름을 남부여라 하였는데, 신라 때 부여군으로 고쳤다. ○ 반월(半月)ㆍ여주(餘州)라고도 한다. ○ 10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96리이다.
○ 석성(石城) : 백제 때의 진악산현(珍惡山縣)이니, 신라 때 석산(石山)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석성으로 고쳤다. 태종 갑오년(1414, 태종 14)에 이산(尼山)과 합쳐서 이성(尼城)을 만들었더니, 얼마 후에 고다진(古多津)이 왕래하는 요충지라 해서 다시 나누어서 현을 만들었다. ○ 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93리이다.
○ 비인(庇仁)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비중현(比衆縣)이니, 신라 때 비인으로 고쳤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43리이다.
○ 남포(藍浦)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사포현(寺浦縣)이니, 신라 때 남포로 고쳤고 공양왕이 진(鎭)을 두었는데, 세조가 진을 없애고 현을 두었다. ○ 마산(馬山)이라고도 한다. ○ 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93리이다.
○ 결성(結城)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결기현(結己縣)이니, 신라 때 결성(潔城)으로 고쳤고, 고려 때 또 결성으로 고쳤다. ○ 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23리이다.
○ 보령(保寧)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신촌현(新村縣)이니, 사촌(沙村)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신읍(新邑)으로 고쳤고, 고려 때 보령으로 고쳤으며, 효종 임진년(1652 효종 3)에 부로 승격시켰다가 을미년에 도로 강등시켰다. ○ 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73리이다.
○ 해미(海美) : 정해현(貞海縣) 세상에서 전하기를, “고려 태조 때, 몽웅역(夢熊驛) 역리(驛吏) 한씨 성을 가진 자가 큰 공이 있어서 대광(大匡)이라고 공호를 하사하고, 고구현(高丘縣) 땅을 나누어 정해현(貞海縣)을 만들었다.” 하였다. ㆍ여미현(餘美縣)은 백제 때의 여촌현(餘村縣)이니, 신라 때 여읍(餘邑)으로 고쳤다. 태종 정해년에 두 현을 합쳐서 해미를 만들었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53리이다. ○ 여미고현(餘美古縣)이라고도 한다.
○ 당진 : 백제 때의 벌수지현(伐首只縣)이니, 부지나(夫只那)라고도 한다. 신라 때 당진으로 고쳤다. ○ 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33리이다.
○ 신창(新昌) : 백제 때의 굴직현(屈直縣)이니, 신라 때 기량(祈梁)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신창으로 고쳤으며, 공양왕이 장포(獐浦)에 성을 쌓고, 이웃 주ㆍ현의 조세를 거두어 비로소 만호(萬戶) 겸 감무(監務)를 두었다. 태조 무신년에 만호를 없앴다. ○ 온창(溫昌)이라고도 한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33리이다.
○ 예산 : 백제 때의 오산현(烏山縣)이니, 신라 때 고산(孤山)으로 고쳤고, 고려 태조가 예산으로 고쳤다. ○ 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63리이다.
○ 전의(全義) : 백제 때의 구지현(仇知縣)이니, 신라 때 금지(金池) 혹은 금지(金地)라고도 한다. 로 고쳤고, 고려 때 전의(全義)로 고쳐서 청주에 예속시켰다. 태조 을해년에 현을 두었고, 태종 갑오년(1414, 태종 14)에 연기와 합쳐서 이름을 전기(全岐)라 하였다가 병신년에 이전 이름으로 회복했다. ○ 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91리이다.
○ 연기(燕岐) : 백제 때의 두잉지현(豆仍只縣)이니, 신라 때 연기로 고쳤고, 고려 때 목주(木州)를 여기에 합쳤다. 태종 병술년(1406, 태종 6)에 다시 나누었으며, 갑오년(1414)에 전의(全義)와 합쳤다가 얼마 안 되어 이전대로 하였다. ○ 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91리이다.
○ 아산 : 백제 때의 아술현(牙述縣)이니, 신라 때 음봉(陰峯)으로 고쳤는데, 음잠(陰岑)이라고도 한다. 고려 초기에 인주(仁州)ㆍ아주(牙州)로 고쳤고, 태종 계사년(1413, 태종 13)에 아산현(牙山縣)으로 고쳤다. 세조 기묘년(1459, 세조 5)에 군(郡)을 줄여서 온양(溫陽)ㆍ평택(平澤)ㆍ신창(新昌) 세 읍(邑)에 나누어 예속시켰다가 을유년에 이전대로 하였다. ○ 영인(寧仁)이라고도 한다. ○ 11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24리이다.
연려실기술-주(州)와 군(郡)-전라도
○ 전라도 : 동북쪽은 충청ㆍ경상 두 도와 경계를 이루며, 동쪽은 경상도와 경계를 이루고, 동남쪽은 경상도와 큰 바다로 경계를 이루며, 남쪽과 서남쪽 및 서쪽은 모두 큰 바다이며, 서북쪽은 큰 바다 및 충청도와 경계를 이루고, 북쪽은 충청도와 경계를 이룬다. 56고을 좌도 23고을, 우도 33고을 이니, 본래 변한(卞韓) 땅으로서 백제의 소유였으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쳐서 멸하고 나누어서 5도독부를 두었다. 당 나라 군사가 본국으로 돌아가자, 신라가 그 땅을 모두 병합해서 뒤에 전주ㆍ무주(武州) 두 주를 두었다. 그 말기에는 견훤과 궁예가 나누어 차지했는데, 고려 태조가 신검(神劍)을 멸하였다. 성종이 강남도(江南道)ㆍ해양도(海陽道)를 두었으나, 현종이 합쳐서 전라도를 만들었는데 본조에서도 이를 그대로 두었다.
○ 좌도 능천(綾川) : 백제 때의 이릉부리군(?陵夫里郡)이니, 또는 죽수부리(竹樹夫里) 인부리(仁夫里)라고도 한다. 라고도 한다. 신라 때 능성(陵城)으로 고쳤고, 고려 때 나주에 예속시켰다. 태종 병신년(1416, 태종 16)에 화순현과 합쳐서 순성(順城)이라고 일컬었으나 조금 있다가 도로 회복했다. 인조 임신년(1632, 인조 10)에 능주목(綾州牧)으로 승격시켰다. 왕비의 고향이다. ○ 연주(連珠)라고도 한다. ○ 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백 58리이다.
○ 남원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고룡군(古龍郡)이니, 뒤에 한 나라 대방군(帶方郡)이 되었고, 조위(曹魏) 때 남대방(南帶方)이 되었으며, 신라 때 소경(小京)을 두고 남원으로 고쳤다. ○ 용성(龍城)ㆍ일신(一新)이라고도 한다. ○ 40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55리이다. ○ 유곡(楡曲)은 속현이다. 백제 때의 구차례현(仇次禮縣)이니 지금의 구례(求禮)이다. 거령(居寧)은 폐현이다. 거령이라고도 하니, 백제 때의 거사물현(居斯勿縣)이요, 신라 때의 청웅(靑雄)인데, 별호는 영성(寧城)이다. 유인궤성(劉仁軌城) 소정방이 백제를 멸하니 당(唐)에서 유인궤에게 조서를 내려 검교대방자사(檢校帶方刺使) 겸 도독(都督)으로 임명하여 읍내 이전(里廛)에 정전(井田)을 본받아 9구(區)를 만들었으니 그 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 장흥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오차현(烏次縣)이니 신라 때 오아(烏兒)로 고쳤고, 고려 때 정안(定安)으로 고쳤다가 다시 장흥부(長興府)로 고치고, 회주목(懷州牧)으로 승격시켰으나 조금 후에 이전대로 하였다. 태종 계사년에 관아를 수령(遂寧)으로 옮겼다. ○ 정주(定州)ㆍ관산(冠山)이라고도 한다. ○ 15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8백 86리이다. ○ 회령(會寧)은 폐현이며, 백제 때의 마사량현(馬斯良縣)이니 신라 때 벌로(伐勞)로 고쳤다. 수령도 폐현이다. 백제 때의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이니, 신라 때 마읍(馬邑)으로 고쳤다. ○ 장택(長澤)도 폐현이다. 백제 때의 계천현(季川縣)이니, 신라 때 계수(季水)로 고쳤다. ○ 옛날 장흥은 천관산(天冠山) 남쪽에 있었다.
○ 순천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염평군(?平郡)이니, 사평(沙平)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승평(昇平)이라 고쳤고, 고려 때는 승주(昇州), 연해군(?海軍)으로 고쳤는데, 승화(昇化)라고도 한다. 뒤에 순천부로 고쳤다. ○ 평양(平陽)이라고도 한다. ○ 20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백 96리이다. ○ 여수는 폐현이다. 백제 때의 원촌현(猿村縣)이니 신라 때 해읍(海邑)으로 고쳤다. 돌산(突山)도 폐현이다. 백제 때의 돌산(突山)이니, 신라 때 여산(盧山)으로 고쳤다. 부유(富有)도 폐현이다. 백제 때의 둔지현(遁支縣)이다.
○ 담양 : 백제 때의 추자혜군(秋子兮郡)이니, 신라 때 추성(秋成)으로 고쳤고, 고려 때 담주(潭州)로 고쳤다가 뒤에 담양으로 고쳤으며, 정종이 부(府)로 승격시켰다. 중궁 김씨의 외향(外鄕)이다. ○ 12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76리이다.
○ 무주(茂朱) : 무풍현(茂?縣)인데 신라 때의 무산현(茂山縣)이니, 무풍으로 고쳤고, 고려 때 진례현(進禮縣)에 예속시켰다. 주계(朱溪)는 백제 때의 적천현(赤川縣)이니, 신라 때 단천(丹川)으로 고쳐서 진례현에 예속시켰는데, 고려 때 주계(朱溪)로 고쳤고, 공양왕이 무풍과 병합시켰다. 태종 갑오년에 무주현으로 고쳤고, 현종 갑인년(1674, 현종 15)에 부(府)로 승격시켰다. ○ 12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5백 26리이다.
○ 보성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복홀군(伏忽郡)이니, 신라 때 보성으로 고쳤고, 고려 때 패주(貝州)로 고쳤으나 조금 후에 이전대로 하였다. ○ 산양(山陽)이라고도 한다. ○ 1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8백 51리이다. ○ 조양(兆陽)은 폐현이다. 백제 때의 동로현(冬老縣)이다. 복성(福城)도 폐현이다. 백제 때의 파부리군(波夫里郡)이니, 신라 때 부리(夫里)로 고쳤다.
○ 낙안(樂安)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분차군(分嵯郡)이니, 분사(分沙)라고도 한다. 신라 때 분령(分嶺)으로 고쳤고, 고려 때 낙안으로 고쳤는데, 이는 양악(陽岳)이라고도 한다. ○ 부차(浮?)ㆍ낙천(洛川)이라고도 한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백 86리이다.
○ 순창(淳昌) : 백제 때의 도실군(道實郡)이니, 신라 때 순화(淳化)라 고쳤고, 고려 때 순창으로 고쳤다. ○ 오산(烏山)ㆍ옥천(玉川)이라고도 한다. ○ 1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36리이다. ○ 복흥(福興)은 폐현이며, 적성(赤城)도 폐현이다. 백제 때 역평현(礫坪縣)이다.
○ 창평(昌平) : 백제 때의 굴지현(屈支縣)이니, 신라 때 석양(析陽)으로 고쳤고, 고려 때 창평으로 고쳤는데, 명평(鳴平)이라고도 한다. 성종 5년 이 이를 없애고, 광주에 예속시켰다가 10년에 이전대로 하였다. ○ 명양(鳴陽)이라고도 한다. ○ 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백 6리이다.
○ 용담(龍潭) : 백제 때의 물거현(勿居縣)이니, 신라 때 청거(淸渠)로 고쳤고, 고려 때 용담으로 고쳤다. ○ 옥천(玉川)이라고도 한다. ○ 4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5백 36리이다.
○ 광양(光陽)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마로현(馬老縣)이니, 신라 때 희양(晞陽)으로 고쳤고, 고려 때 광양으로 고쳤다. ○ 12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8백 20리이다.
○ 강진 : 성이 있다. 도강현(道康縣)은 백제 때의 도무군(道武郡)이니 신라 때 양무(陽武)로, 고려 때 도강현으로 고쳤다. 탐진현(耽津縣)은 백제 때의 동음현(冬音縣)이니, 신라 때 탐진으로 고쳤다. 태종 정유년(1417, 태종 17)에 병영을 도강 옛 관아로 옮기고, 두 현을 합쳐서 강진을 만들었다. ○ 금릉(金陵)ㆍ오산(鰲山)이라고 한다. ○ 21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8백 76리이다.
○ 옥과(玉果) : 백제 때의 과지현(果支縣)이니, 과혜(果兮)라고도 하는데, 신라 때 옥과로 고쳤다. ○ 설산(雪山)이라고도 한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66리이다.
○ 구례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구차례현(仇次禮縣)이니, 신라 때 이름을 구례라 고쳤고, 고려 초기에 남원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현을 두었다. 중종 경오년에 현을 폐지하고 유곡부곡(楡谷部曲)을 만들어 다시 남원에 예속시켰다. 고을에 사는 백성 배목인(裵目仁)ㆍ문빈(文彬) 등이 참언으로 여러 사람을 꾀어 모아서 반역할 것을 모의하다가 죽음을 당했다. ○ 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백 66리이다. ○ 《여지승람》에는 남원의 속현에 들어 있다.
○ 곡성(谷城) : 백제 때의 욕내군(欲乃郡)이니, 신라 때 곡성으로 고쳤고, 고려 때 현을 두었다. ○ 욕천(浴川)은 선조 정유년에 없앴다가 광해군 기유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 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76리이다.
○ 운봉(雲峯) : 신라 때의 모산현(母山縣)이니, 경덕(景德) 또는 아영성(阿英城) 아막(阿莫)이라고도 한다. 이라고도 하는데, 뒤에 운봉으로 고쳤다. 고려 때 남원에 예속시키고 태조 임신년에 현을 두었는데, 선조 경자년에 없앴다가 광해군 신해년에 다시 두었다. ○ 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86리이다.
○ 임실 : 백제 때의 임실군(任實郡)이니, 신라 때 이를 그대로 두었고, 고려 때 현을 두었다. ○ 운수(雲水)라고도 한다. ○ 1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5백 82리이다.
○ 구고(九皐)는 폐현이다. 백제 때의 돌평현(?坪縣)이니 누평(淚坪)이라고도 한다.
○ 장수(長水) : 백제 때의 우평현(雨坪縣)이니, 통일 신라 때 고택(高澤)으로 고쳤고, 고려 때 장수로 고쳐서 장계(長溪)까지 겸해서 맡겼다. 태조 임신년에 다시 나누어 장수라고 하였다. ○ 장천(長川)이라고도 한다. ○ 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68리이다. ○ 장계는 속현이다. 백제 때의 백해군(百海郡)이니, 신라 때 벽계(璧溪)로 고쳤는데, 따로 장세(長世)라고도 한다.
○ 진안(鎭安) : 백제 때의 난진아현(難珍阿峴)이다. 또는 월량(月良)이라고도 하는데, 신라 때 진안으로 고쳤다. ○ 월랑(越浪) 월량(月良)이 이렇게 전해졌다. ○ 13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5백 86리이다. ○ 마령(馬靈)은 폐현이다. 백제 때의 마돌현(馬突縣)이니, 마진(馬珍)이라고도 하고, 마등량(馬等良)이라고도 하는데 별명은 영천군(?川郡)이다.
○ 동복(同福) : 백제 때의 두부지현(豆夫只縣)이니, 신라 때 동복으로 고쳤다. 태조 갑술년에 화순(和順)까지 겸하여 정무를 감독하게 했으며, 태종 을유년(1405, 태종 5)에 화순과 합쳐서 복순(福順)이라 하였고, 병신년에 다시 이전대로 하였다. ○ 구성(龜城)ㆍ옹성(甕城)ㆍ복천(福川)ㆍ나복(蘿?)이라고도 한다. ○ 11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백 26리이다. ○ 수촌(水村)은 폐현(廢縣)이고, 압곡(鴨谷)도 폐현이다.
○ 화순(和順) : 백제 때의 잉리아현(仍利阿縣)이니, 신라 때 여미(汝湄)로 고쳤는데, 여빈(汝濱)이라고도 한다. 고려 때 화순으로 고쳤고, 뒤에 남평(南平)을 겸해서 맡겼다. 태조 갑술년에 나누어서 두 현을 만들었고, 태종 때 동복(同福)과 합쳤다가 다시 동복은 분리하고 능성(綾城)과 합하여 순성(順城)이라 일컬었는데, 얼마 후에 이전대로 하였다. 선조 갑오년에 폐하였다가 광해군 신해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 해빈(海濱)ㆍ오성(烏城)ㆍ산양(山陽)이라고도 한다. ○ 3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백 53리이다.
○ 흥양(興陽) : 본래 장흥부(長興府) 고이부곡(高伊部曲) 방언(方言)으로는 묘(猫)라 한다. 이니, 고려 때 고흥현(高興縣)으로 승격시켰고, 태조 을해년에 왜구의 침입으로 인하여 진을 설치하였다. 세종 때에 첨사(僉使)로 고쳤으나 곧 흥양현으로 고쳤다. ○ 고양(高陽)이라고도 한다. 13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8백 96리이다. ○ 남양(南陽)은 폐현이다. 백제 때의 조조례현(助助禮縣)이니, 신라 때 충렬(忠烈)로 고쳤다. 태강(泰江)도 폐현이다. 백제 때의 비사현(比史縣)이니, 신라 때 백주(柏舟)로 고쳤다. ○ 풍안(?安)도 폐현이다. 보성군 식촌부곡(食村部曲)이니, 고려 충선왕 때에 현으로 승격시켰다. 도화(道化)도 폐현이다. 보성군 타주부곡(他州部曲)이다. 두원(荳原)도 폐현이다. 백제 때 두혜현(豆?縣)이니, 신라 때 강원(薑原)으로 고쳤다. 도양(道陽)도 폐현이다. 장흥부 도량도부곡(道良道部曲)이니, 세종조 때 병합하여 목장을 만들었다. 고흥(高興)도 폐현이다. 묘부곡(猫部曲)이니 고려 때 묘부곡 사람이 조정에 벼슬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참언이 있었다.
○ 우도 전주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완산(完山)이니, 비사성(比斯城) 혹은 비자화(比自火)라고도 한다. 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 완산주를 두었고, 뒤에 전주로 고쳤다. 견훤이 도읍을 세우고 후백제라고 일컬었다. 고려 태조가 신검(神劍)을 쳐서 평정한 후에 안남(安南)으로 고쳤다. 뒤에 또 승화(承化)라 부르고 순의군(順義軍)이라고도 하였다. 태조 임신년에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로 승격시켰고, 태종 계미년(1403, 태종 3)에 전주 부윤으로 고쳤다. ○ 진성(甄城)이라고도 한다. ○ 3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5백 16리이다. ○ 우주(紆州)는 폐현이다. 백제 때의 우소저현(于召渚縣)이다. 이성(伊城)은 폐현이다. 백제 때의 두이현(豆伊縣)이니, 왕무(往武)라고도 하는데, 신라 때에 두성(杜城)으로 고쳤다. 이성(利城)은 폐현이다. 백제 때 내리아현(乃利阿縣)이다.
○ 나주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발라군(發羅郡)이니, 통의(通義)라고도 하는데, 신라 때 금산군(錦山郡)으로 고쳤다. 금성이라고도 한다. 고려 태조가 수군을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여 점령하고, 나주로 고쳤으며, 뒤에 진해군(鎭海軍)이라 일컬었고, 목(牧)으로 승격시켰다. ○ 3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가 7백 42리이다. ○ 영산(榮山)은 폐현이다. 흑산도 사람이 육지로 나와 남포(南浦)에 살아서 영산현(榮山縣)이라 일컬었는데, 공민왕이 승격시켜 군을 만들었다. 압해(壓海)는 폐현이다. 압해(狎海)라고도 하는데 바다 가운데의 섬이다. 백제 때의 아차산군(阿次山郡)이다. 여황(艅?)은 폐현이다. 백제 때의 수천현(水川縣)이니, 수입이(水入伊)라고도 한다. 회진(會津)은 폐현이다. 백제 때의 두혜현(豆?縣)이다. 안로(安老)도 폐현이다. 백제 때의 아로곡현(阿老谷縣)이니, 신라 때 야로(野老)로 고쳤다. 복룡(伏龍)은 폐현이다. 배룡(杯龍)이라고도 하는데, 신라 때 용산(龍山)으로 고쳤다. 반남(潘南)은 폐현이다. 백제 때의 반내부리현(半奈夫里縣)이다. 장산(長山)은 폐현이다. 안릉(安陵)이라고도 하는데 바다 가운데의 섬이다. 백제 때의 거지산현(居知山縣)인데, 신라 때 안파(安波)로 고쳤다.
○ 제주 : 성이 있다. 본래 탐라국이니, 혹은 탁라(?羅)라고도 한다. 신라 때의 이름은 성주(星州)라고 하는데, 고려 때 고쳐서 군을 만들었다가 현으로 낮추었다. 충렬왕 때에 원(元) 나라에서 말을 기르는 목장을 만들었으나 조금 후에 도로 고쳐서 제주목(濟州牧)으로 하였다. 태종 임오년에 좌우도지관(左右都知管)을 두었고, 세종 을축년에 상부진무(上副鎭撫)로 고쳤으며, 세조 병술년에 절제사를 두었고, 예종 기축년에 목사(牧使)로 고쳤다. ○ 탐탁라(眈?羅)ㆍ동영주(東瀛州)라고도 한다. ○ 10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육로(陸路)로 9백 36리이고, 수로(水路)로 9백 70리이다. ○ 고내현(高內縣)ㆍ애월현(涯月縣)ㆍ곽지현(郭支縣)ㆍ귀덕현(歸德縣)ㆍ명월현(明月縣)ㆍ신촌현(新村縣)ㆍ함덕현(咸德縣)ㆍ금령현(金寧縣) 이상의 각현(各縣)은 모두 직촌(直村)이다.
○ 광주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무진주(武珍州)이니, 노지(奴只)라고도 한다. 신라 때 무주(武州)로 고쳤고, 고려 태조가 광주로 고쳤으며, 뒤에 해양현(海陽縣)으로 낮추었다가 다시 익주(翼州)로 승격시켰다. 또 화평부(化平府)로 낮추었다가 무진부(茂珍府) 혜종(惠宗)의 휘(諱)는 무(武)이다. 로 고쳤고, 뒤에 광주라 일컬었다. 세종 경술년에 무진군으로 낮추었고, 문종 신미년에 이전대로 하였으며, 성종 기유년에 낮추어 광산현(光山縣)을 만들었다가 연산군 신유년에 이전대로 하였다. ○ 익양(翼陽)ㆍ서석(瑞石)이라고도 한다. ○ 40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25리이다.
○ 여산(礪山) : 여량현(礪良縣) 또는 양(陽)이라 한다. 은 백제 때의 지량초현(只良肖縣)이니, 신라 때 여량(礪良)으로 고쳤고, 고려 때 전주에 예속시키고 낭산(朗山)까지 겸하여 맡았다. 낭산현은 백제 때의 알야산현(閼也山縣)이니, 신라 때 야산(野山)으로 고쳤다. 정종 경진년에 2현의 이름을 떼어다가 여산이라고 일컬었다. 세종 병진년(1436, 세종 18)에 군으로 승격시켰고 원경왕후(元敬王后)의 외향(外鄕)이다. 충청도로 이속되었다가 조금 후에 도로 전라도에 속했으며, 숙종 기묘년에 부사로 승격시켰다. ○ 호산(壺山)이라고도 한다. ○ 11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36리이다. ○ 낭산(朗山)은 폐현이다. 군(郡) 서쪽 토성(土城)의 옛터이다.
○ 장성 : 백제 때의 고시이현(古尸伊縣)이니, 신라 때 압성군(押城郡)으로 고쳤고, 고려 때 장성으로 고쳤으며, 본조에서 현으로 고쳤다. 선조 정유년에 진원(珍原)과 합쳤고, 효종 을미년(1655, 효종 6)에 부로 승격시켰다. ○ 오산(鰲山)ㆍ이성(伊城)이라고도 한다. ○ 15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66리이다. ○ 진원(珍原)은 폐현이다. 백제 때의 구사진혜현(丘斯珍兮縣)이니, 신라 때 진원(珍原)으로 고쳤는데, 구진(丘珍)이라고도 한다.
○ 익산 : 본래 마한국(馬韓國)이니, 온조왕(溫祚王)이 땅을 병합해서 이름을 금마저(金馬渚)라 하였고, 신라 때 금마군(金馬郡)으로 고쳤다. 고려 때 익주(益州)로 승격시켰으며, 태종 계사년에 익산군으로 고쳤다. ○ 10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56리이다.
○ 고부(古阜)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고사부리현(古沙夫里縣)이니, 신라 때 고부로 고쳤고, 고려 태조 때 영주(瀛州)라 일컬었다. 뒤에 안남(安南)으로 고쳐서 영광과 합쳤다가 조금 후에 다시 이전대로 하였다. ○ 1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가 6백 6리이다.
○ 영암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월내군(月奈郡)이니, 신라 때 영암으로 고쳤고, 고려 때 낭주(郞州)ㆍ안남(安南)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낮추었다. ○ 낭산(郞山)이라고도 한다. ○ 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8백 22리이다. ○ 곤미(昆湄)는 폐현이다. 백제 때의 고미현(古彌縣)이다.
○ 영광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무시이부(武尸伊部)이니, 신라 때 무령(武靈)으로 고쳤고, 고려 때 영광으로 고쳤다. ○ 오성(筽城)ㆍ정주(靜州)라고도 한다. ○ 2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99리이다. ○ 삼계(森溪)는 폐현이며, 백제 때의 소비혜현(所非兮縣)이니, 소을부(所乙夫)라고도 한다. 임치(臨淄)도 폐현이다. 백제 때의 고록지현(古祿只縣)이니, 신라 때 염해(鹽海)로 고쳤다. 육창향(陸昌鄕) 백제 때의 아로현(阿老縣)이니, 갈초(葛草)ㆍ가위(加位)라고도 하는데, 신라 때 갈도현(碣島縣)으로 고쳤다.
○ 진도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인진도군(因珍島郡)이니, 신라 때 진도로 고쳤다. 태종 기축년에 해남현과 합하여 해진군(海珍郡)으로 하였다가 세종조에 이전대로 하였다. ○ 옥주(沃州)라고도 한다. ○ 13면, 서울과의 거리는 1천 20리이다. ○ 가흥현(嘉興縣) 백제 때의 도산현(徒山縣)이니 원산(猿山)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뇌산(牢山)이라고 고쳤다. 이 있다. 임회(臨淮)는 폐현이다. 백제 때 여기에 구리현(九里縣)을 두었고 신라 때 첨탐(瞻眈)으로 고쳤다.
○ 금산(錦山) :백제 때의 진내군(進乃郡) 진잉을(進仍乙)이라고도 한다. 이니 신라 때 진례(進禮)로 고쳤고, 고려 때 금주(錦州)로 올렸다. 태종 계사년에 금산군으로 고쳤다. ○ 경양(景陽)ㆍ금계(錦溪)라고도 부른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86리이다. ○ 부리(富利)는 폐현이다. 백제 때의 두시이현(豆尸伊縣)ㆍ부시이(富尸伊)라고도 한다. 신라 때 이성(伊城)으로 고쳤다.
○ 진산(珍山) : 백제 때의 진동현(珍同縣)이니 신라 때에도 그대로다. 태조 때 진주로 승격시켰고 왕실의 탯줄을 안치하였다. 태종 때에 진산군으로 고쳤다. ○ 옥계(玉溪)라고도 부른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56리이다.
○ 김제(金堤) : 백제 때의 벽골군(碧骨郡)이니 신라 때 김제라고 고쳤다. 고려 때 현으로 하였으나 태종 계미년에 군으로 승격시켰다. ○ 23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41리이다. ○ 회원고현(會原古縣)이라고도 부른다. ○ 평고(平皐)는 폐현이다. 백제 때의 수동산현(首冬山縣)이다.
○ 임피(臨陂)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시산군(屎山郡)이니 피산(陂山)ㆍ흔문(?文)ㆍ소도(所島)ㆍ실조출(失鳥出)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임피라고 고쳤다. 고려 때 군을 현으로 낮추었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96리이다.
○ 만경(萬頃)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두내산현(豆乃山縣)을 만경으로 고쳤다. 광해군 경신년에 고을을 없앴다가 인조 정축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 두산(杜山)이라고도 부른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16리이다. ○ 부윤(富潤)은 폐현이다. 백제 때의 무근촌현(武斤村縣)이니, 신라 때 무읍(武邑)으로 고쳤다.
○ 금구(金溝) : 백제 때의 구지지산현(仇知只山縣)이니, 신라 때 금구라고 고쳤다. ○ 봉산(鳳山)ㆍ금계(金鷄)라고도 부른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26리이다. ○ 거야(巨野)는 폐현이다. 백제 때의 야서이현(也西伊縣)이니, 신라 때 야서(野西)로 고쳤다. 역양(?陽)도 폐현이다.
○ 용안(龍安) : 고려 때 함열현(咸悅縣)의 도내산은소(道乃山銀所) 창산소(蒼山所)라고도 한다. 이니 충숙왕(忠肅王)이 용안현으로 승격시켰다. 태종 기축년(1409, 태종 9)에 함열과 합하여 안열(安悅)이라고 부르다가 병신년에 이전대로 회복시켰다. ○ 칠성(七城)이라고도 부른다. ○ 3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48리이다. ○ 풍제(?堤)는 폐현이다. 풍성(?城)이라고도 한다. 공양왕 때에 속현이 되었다.
○ 함열(咸悅) : 백제 때의 감물아현(甘勿阿縣)이니, 신라 때 함열로 고쳤다. 태종 기축년에 용안(龍安)과 합하였다가 곧 다시 이전대로 고쳤다. ○ 함라(咸羅)라고도 부른다. 9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66리이다.
○ 부안(扶安) : 성이 있다. 부령현(扶寧縣)은 백제 때의 개화현(皆火縣)이니 신라 때 부령(扶寧)으로 고쳤다. 혹은 계발(戒發)이라고도 일컬었다. 보안현(保安縣)은 백제 때의 흠량매현(欽良買縣)이니, 신라 때 희안(喜安)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이 두 고을을 나누기도 하고 합하기도 하였다. 태종 병신년(1416, 태종 16)에 합하여 부안현으로 하였으며, 다음해에 부안현을 폐지하고 흥덕진(興德鎭)으로 옮겼으며, 부안진(扶安鎭)을 설치하였다가 뒤에 현감으로 고쳤다. ○ 낭주(浪州)라고도 부른다. ○ 20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77리이다. ○ 보안(保安)은 폐현이다. 현의 남쪽 30리의 거리에 있다.
○ 함평(咸平) : 함풍현(咸?縣)은 백제 때의 굴내현(屈乃縣)이니 신라 때 함풍으로 고쳤다. 모평현(牟平縣)은 백제 때의 다지현(多只縣)이니 신라 때 다기(多岐)로 고쳤다. 태종 기축년에 두 현을 합하여 함평현으로 하였다. ○ 모양(牟陽)ㆍ기성(箕城)이라고도 부른다. ○ 4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백 62리이다. ○ 해제(海際)는 폐현이다. 백제 때의 도제현(道際縣)이니 음해(陰海)ㆍ운화(云火)라고도 한다.
○ 고산(高山) : 백제 때의 고산현(高山縣)이니 또는 난등량(難等良)이라고도 한다. ○ 봉산(鳳山)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76리이다. ○ 운제(雲梯)는 폐현이다. 또는 운산(雲山)이라고도 한다. 백제 때의 지벌지현(只伐只縣)이다.
○ 태인(泰仁) : 태산군(太山郡)은 백제 때의 대시산군(大尸山郡)이니, 신라 때 태산(太山)으로 고쳤다. 인의현(仁義縣)은 백제 때 빈굴현(賓屈縣)이니 부성(賦城)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무성(武城)으로 고쳤다. 태종 기축년에 두 고을을 합하여 태인현으로 하였다. ○ 19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63리이다. ○ 인의(仁義)는 폐현이다.
○ 옥구(沃溝)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마서량현(馬西良縣)이니 신라 때 옥구로 고쳤다. 태조 때 진을 두었고 세종 계묘년에 현으로 고쳤다. ○ 옥산(玉山)이라고도 부른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23리이다. ○ 회미(澮尾)는 폐현이다. 일명 연강(連江)이라고도 한다. 백제 때의 시부리현(矢夫里縣)이다.
○ 남평(南平) : 백제 때의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이니, 신라 때 현웅(玄雄)으로 고쳤고, 고려 때 남평(南平)으로 고쳤다. ○ 오산(烏山)ㆍ영평(永平)이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46리이다. ○ 철야(鐵冶)는 폐현이다. 백제 때의 실어산현(實於山縣)이다.
○ 흥덕(興德) : 백제 때의 상칠현(上漆縣)이니, 신라 때 상질(尙質)로 고쳤고, 고려 때는 장덕(章德) 창덕(昌德)이라고도 한다. 으로 하였다가, 흥덕으로 고쳤다. ○ 흥성(興城)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36리이다.
○ 정읍 : 백제 때의 정촌현(井村縣)이니, 신라 때 정읍으로 고쳤다. ○ 정촌(井村)ㆍ초산(楚山)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91리이다.
○ 고창(高敞)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모량부리현(毛良夫里縣)이니 신라 때 고창으로 고쳤다. ○ 모양(牟陽)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28리이다.
○ 무장(茂長) : 무송현(茂松縣)이니 백제 때의 송미지현(松彌知縣)이며, 신라 때 무송으로 고쳤다. 장사현(長沙縣)은 백제 때의 상로현(上老縣)이니 신라 때 장사로 고쳤다. 태종 정유년(1417, 태종 17)에 두 고을을 합하여 무장진을 두었다가 뒤에 고쳐서 현으로 하였다. ○ 송산(松山)ㆍ사도(沙島)라고도 한다. ○ 16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76리이다.
○ 무안 : 백제 때의 물아혜군(勿阿兮郡)이니, 신라 때 무안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 물량(勿良)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무안이라 고치고 현으로 하였다. ○ 면주(?州)라고도 한다. ○ 13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96리이다.
○ 해남 : 백제 때의 새금현(塞琴縣)이니, 신라 때 침명(浸溟)으로 고쳤는데 투빈(投濱)이라고도 한다. 고려 때 해남으로 고쳤다. 태종 기축년에 진도(珍島)와 합하여 해진(海珍)이라고 하였다가 세종 정미년에 다시 이전대로 하였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96리이다.
○ 정의(旌義) : 본래는 제주의 동도(東道)인데, 태종 병신년에 제주 안무사(濟州按撫使) 오식(吳湜)의 건의를 받아들여 한라산 남쪽의 넓이 90여 리의 땅을 나누어 동쪽을 정의, 서쪽을 대정(大靜)이라고 하여 현을 두었다. ○ 3면, 제주와의 거리는 1백 30리이다. ○ 토산현(兎山縣)ㆍ호아현(狐兒縣)ㆍ홍로현(洪爐縣)이라고도 한다.
○ 대정(大靜) : 본래 제주의 서도(西道)이다. ○ 4면, 제주와의 거리는 백 40리이다. ○ 예래현(猊來縣)이라고도 한다.
연려실기술-주(州)와 군(郡)-경상도
○ 경상도 동북은 강원도 경계와 바다이고, 동남과 남은 모두 바다이며, 서남은 바다와 전라도 경계이고, 서쪽은 전라도 경계, 서북쪽은 충청도 경계, 북쪽이 강원도 경계다. 71고을 좌도 40고을, 우도 31고을 본래 진국(辰國)의 땅으로 북쪽은 진한(辰韓)이 되고 남쪽은 변한(卞韓)이 되었었다. 신라가 그 땅을 모두 차지하고, 통합한 뒤에 상주ㆍ양주(良州)ㆍ강주(康州)의 3주(州)를 두었다. 말기에는 궁예와 견훤이 상주와 양주 두 고을을 나누어 점거하였다. 고려 태조는 여기에 동남도(東南道)를 두고 관사를 경주에 두었다. 성종 때는 영남도ㆍ영동도(嶺東道)ㆍ산남도(山南道)의 3도로 나누었으며, 예종 때는 경상진주도(慶尙晉州道)라고 하였고, 명종 때는 경상주도(慶尙州道)와 진합주도(晉陜州道)로 나누었으며, 신종(神宗) 때는 상진안동도(尙晉安東道)라고 고쳤다가 또 경상진안도(慶尙晉安道)로 고쳤다. 고종 때 명주도(溟州道)의 화주(和州)ㆍ등주(登州)ㆍ정주(定州)ㆍ장주(長州)의 네 주를 몽고에게 빼앗겼으므로 본도의 평해(平海)ㆍ영덕(盈德)ㆍ덕원(德原)ㆍ송생(松生)을 떼내어 명주도에 예속시켰고, 충렬왕은 또 덕원ㆍ영덕ㆍ송생을 옮겨 동계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본도로 돌려주었다. 충숙왕(忠肅王)이 경상도라고 정하였고, 본조에서 이를 그대로 수용하였다. 태종 계사년에 옥천(沃川)ㆍ영동(永同)ㆍ황간(黃澗)ㆍ보은ㆍ청산(靑山)을 충청도에 이속시켰다.
○ 좌도 경주 : 성(城)이 있다. 신라의 옛 수도이다. 국호를 서야벌(徐耶伐) 혹은 사라(斯羅)라고 부르고, 또 사로(斯盧)라고도 일컬었다. 뒤에 신라라고 일컬었고, 탈해왕(脫解王) 때에는 다시 계림(鷄林)이라고 이름하였다. 고려 태조 때, 신라가 없어지면서 경주로 되었다. 뒤에 동경유수라고 고쳤으며, 또 계림부라고 고쳤다. 태종 때에 다시 경주라고 불렀다. ○ 진한(辰韓)ㆍ낙랑(樂浪)ㆍ월성(月城)ㆍ금오(金鰲)ㆍ문천(蚊川)이라고도 한다. ○ 18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80리이다. ○ 안강현(安康縣)은 속현이다. 신라 때의 비화현(比火縣)이다. 기계현(杞溪縣)이 있고, 신라 때의 모혜현(芼兮縣)이니 화계(化鷄)라고도 한다. 자인(慈仁)은 폐현이다. 현재 다시 현을 두었다. 다음에 나온다. 신광현(神光縣) 신라 때의 동잉음현(東仍音縣)이니, 신을(神乙)이라고도 한다. 뒤에 이어진(?於鎭)ㆍ신광진(神光鎭)이라고 일컬었다. ㆍ진량현(珍良縣) 신라 때의 진량현이니 여량(餘粮)이라고 고쳤다가 뒤에 구사부곡(仇史部曲)으로 강등시켰다.ㆍ장진현(長鎭縣)이 있다. 신라 때의 장진현이니 고려 때 죽장부곡(竹長部曲)으로 낮추었다.
○ 안동 : 성이 있다. 신라 때는 고타야군(古?耶郡)이라 하다가 고창(古昌)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가 안동부로 승격시켰다가 뒤에 영가군(永嘉郡)으로 고치고, 길주(吉州)ㆍ복주(福州)로 고쳤으며, 다시 안동부로 승격시켰다. ○ 능라(綾羅)ㆍ지평(地平)ㆍ석릉(石陵)ㆍ일계(一界)ㆍ화산(花山)ㆍ고장(古藏)ㆍ창녕(昌寧) 옛 창녕국ㆍ고령(古寧)이라고도 한다. ○ 24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14리이다. ○ 임하현(臨河縣)은 속현이다. 고구려 때의 굴화군(屈火郡)이니 신라 때 곡성(曲城)이라 고쳤다. 풍산현(?山縣) 신라 때의 하지현(下枝縣)이니, 영안(永安)으로 고쳤으며, 순주(順州)로 승격시켰다가 뒤에 현으로 낮추었다. 신라 때에는 예천에 예속되었다.ㆍ일직현(一直縣) 신라 때의 일직현인데 뒤에 직녕(直寧)으로 고쳤다. 도 속현이고, 감천현(甘泉縣)ㆍ길안현(吉安縣) 원래는 부곡이다. ㆍ내성현(奈城縣) 퇴곶부곡(退串部曲)인데 고려 때 현으로 승격시켰다.ㆍ춘양현(春陽縣) 가야향(加也鄕)인데 고려 때 현으로 올렸다.ㆍ재산현(才山縣) 덕산부곡(德山部曲)인데 고려 때 현으로 올렸다.ㆍ일계현(日谿縣)이 있다. 본래는 열혜현(熱兮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 영해(寧海) : 고구려 때의 우시군(于尸郡)이니 신라 때에 유린(有隣)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예주(禮州)로 고쳤으며 덕원부(德原府)로 올렸다가 영해부로 고쳤다. ○ 덕원(德原)이라고도 한다. ○ 4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45리이다. ○ 청기(靑杞)는 속현이다. 대청부곡(大淸部曲)이니, 예전에는 청도현(靑島縣)에 예속되었다. 고려 때 청기현(靑杞縣)을 두었다. 다른 이름으로 청계(靑溪)라고도 한다.
○ 밀양 : 성이 있다. 신라 때의 추화군(推火郡)인데 밀성(密城)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밀주(密州)로 고쳤다가 귀화부곡(歸化部曲)으로 낮추어 계림에 예속시켰으며, 뒤에 밀성현이라고 하다가 밀양부로 고쳤다. 태조 때에 도로 밀성군으로 하였다가 뒤에 밀양부로 올렸다. 태종 때에 군(郡)으로 낮추었다가 곧 다시 올렸다. ○ 응천(凝川)ㆍ밀산(密山)이라고도 한다. ○ 16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12리이다. ○ 수산현(守山縣)은 속현이다. 천산부곡(穿山部曲)인데 고려 때 현으로 올렸다. 풍각현(?角縣)이 있다. 상화촌현(上火村縣)이니, 다른 이름은 유산(幽山)이다. 중종 무인년에 현으로 낮추고 부(府)의 땅을 나누어 청도(淸道)ㆍ경산(慶山)ㆍ영산(靈山)ㆍ현풍(玄風)에 예속시켰다. 밀양부의 사람이 그의 아비를 죽인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임오년에 도로 이전대로 하였다. ○ 밀진현(密津縣) 죽산(竹山)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이 있다. ○ 신라에서는 불[火] 자를 넣은 고을 이름이 많다. 불[火]자는 곧 불(佛)의 전음(轉音)이요, 불(佛)은 곧 벌(伐)의 전음이다. 방언에 들판을 벌이라고 한다.
○ 청송(靑松) : 고구려 때의 청기현(靑己縣)이니, 신라 때에 적선(積善)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는 부이(鳧伊)라고 하였고, 또 운봉(雲鳳)으로 고쳤다가 청부(靑鳧)로 고쳤다. 태조 갑술년에 진보현(眞寶縣)과 합하였고, 세종 기해년(1419, 세종1)에는 청보군(靑寶郡)으로 올렸다. 소헌왕후(昭憲王后)의 고향이다. 뒤에 진보(眞寶)를 떼내고 송생현(松生縣)과 합하여 청송이라 고쳤으며, 세조 때에 부(府)로 올렸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30리이다. ○ 안덕(安德)은 속현이고 고구려 때의 이화혜현(伊火兮縣)이니, 신라에서 연무(緣武)라고 고쳤다. 송생(松生)은 폐현이다.
○ 대구 : 성이 있다. 신라 때의 달구화현(達句火縣)이니 달불성(達弗城)이라고도 하다가 대구로 고쳤다. 세종 때에 군으로 올렸고, 세조 때에 부로 올렸다. ○ 달성(達城)이라고도 한다. ○ 33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70리이다. ○ 수성현(壽城縣)은 속현이다. 계화군(界火郡)인데 상촌창군(上村昌郡)이라고도 한다. 수창군(壽昌郡)으로 고쳤다. 가창(嘉昌)이라고도 한다. 해안현(解顔縣) 치성화현(雉省火縣)인데 미리(美里)라고도 한다.ㆍ하빈현(河濱縣) 다사지현(多斯知縣)인데 답지(沓只)라고도 한다. 이 있다.
○ 울산 : 신라 때의 굴아화촌(屈阿火村)이니, 뒤에 현을 두고 이름을 하곡(河曲) 하서(河西)라고도 한다. 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가 흥려부(興麗府)로 올렸다가, 뒤에 공화현(恭化縣)으로 낮추고, 울주(蔚州)로 고쳤다. 태조 때에 진을 두었고, 태종 계사년에 울산군으로 고쳤다. 세종 정사년에 부(府)로 올렸다가 도로 낮추었으며, 선조 무술년에 다시 부로 올렸다. ○ 학성(鶴城)ㆍ개지변(皆知邊)ㆍ화성(火城)이라고도 한다. ○ 11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50리이다. ○ 우풍(虞風)은 고현(古縣)이다. 우화(?火)는 우불(于佛)이 바뀐 말이다. 경덕왕(景德王)이 현으로 고쳐서 안동에 예속시켰다. 동진(東津) 율포현(栗浦縣) 도 고현이다.
○ 동래(東萊) : 성이 있다. 옛날의 장산국(?山國) 내산(萊山)이라고도 한다. 인데, 신라가 차지하여 거칠산군(居漆山郡)을 두었다가 동래로 고쳤다. 태조 때에 진을 두었고, 세종 때에 첨사(僉使)를 두었다가 뒤에 현령으로 고쳤다. 명종 정미년에 부로 올렸다. 선조 때 현으로 낮추었다가 곧 다시 올렸으며, 임진년에 또 낮추었다가 기해년에 다시 올렸다. ○ 봉래(蓬萊)ㆍ봉산(蓬山)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9백 62리이다. ○ 동평(東平)은 속현이다. 신라 때의 대증현(大甑縣)이다.
○ 인동(仁同) : 신라 때의 사동화현(斯同火縣)인데, 인동으로 고쳤다. 선조 갑진년에 부로 올렸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리이다. ○ 수동(壽同)ㆍ옥산(玉山)이라고도 한다. 약목현(若木縣)은 속현이고, 신라 때의 대목현(大木縣)이니, 칠촌(七村) 또는 곤산(昆山)이라고도 한다. 계자현(谿子縣)이라고 고쳤다. 소목현(小木縣)이 있다. 견훤이 벽진(碧珍)을 침공할 때, 대목ㆍ소목 두 고을의 곡식을 베어 버렸다고 하였는데 지금 어디인지 상세하지 않다.
○ 순흥(順興) : 성이 있다. 고구려 때의 급벌산군(及伐山郡)이니, 신라 때에 급산(?山)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흥주(興州)로 고쳤다가 순정(順政)으로 고쳤다. 뒤에 순안(順安)에 이속되었다. 흥녕현(興寧縣)으로 고치고 흥주(興州)라고 올렸으며 또 순흥부로 고쳤다. 세조 정축년에 고을을 폐지하여 마아령(馬兒嶺)의 물 동쪽 땅은 영주(榮州)에 예속시키고, 문수산(文殊山)의 물 동쪽 땅은 봉화(奉化)에 예속시켰다. 풍기(?基)에 예속시켰다가 숙종 계해년에 이전대로 하였다. ○ 13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47리이다. ○《여지승람》에는 풍기군의 폐촌에 들어 있다.
○ 칠곡(漆谷) : 성이 있다. 신라 때의 팔거현(八居縣)이니, 인리(仁里)라고도 하다가 팔리(八里)로 고쳤다. 고려 때에 다시 팔거(八居)라고 일컬었는데 바뀌어 팔거(八?)가 되었다. 칠곡(七谷)이라고도 한다. 뒤에 성주(星州)에 예속되었다. 인조 경진년에 비로소 부를 두었다. ○ 가산(架山)이라고도 한다. ○ 10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70리이다. ○ 《동국여지승람》에는 팔거는 성주(星州)의 속현이라 하였다.
○ 청도(淸道) : 성이 있다. 이서소국(伊西小國)인데 신라가 벌취(伐取)하고 구도성(仇刀城)의 경내에 있는 솔이산(率伊山)ㆍ경산(驚山) 가산(?山)이라고도 한다.ㆍ오도산(烏刀山) 등의 3성(城) 3성은 신라 때 밀성(密城)에 속해 있었다. 을 합하여 대성군(大城郡)을 두었다. 경덕왕 때, 구도는 오악현(烏岳縣)이라 고쳤고, 경산은 형산현(荊山縣)으로, 솔이산은 소산현(蘇山縣)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3성을 합하여 청도군을 만들었다. ○ 도주(道州)ㆍ오산(鰲山)ㆍ마악(馬岳)이라고도 한다. ○ 13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42리이다.
○ 영천(永川) : 신라 때에 절야화군(切也火郡)이라고 하다가 임고(臨皐)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도동(道同)과 임천(臨川)의 두 현을 합하여 영주(永州)로 고쳤는데 고울부(高鬱府)라고도 일컬었다. 태종 계사년(1413, 태종 13)에 영천군으로 고쳤다. ○ 익양(益陽)ㆍ영양(永陽)이라고도 한다. ○ 20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87리이다. ○ 도동(道同)은 폐현이며, 신라 때의 도동대현(刀冬大縣)이다. 임천도 폐현이다. 골화소국(骨火小國)이니 신라 때에 현을 두었다.
○ 영천(榮川) : 고구려 때의 내기군(奈己郡) 혹은 내기(己)로 쓴다. 이니, 신라 때에 내령(奈靈)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강주(剛州)로 고쳤다가 순안현(順安縣)이라 고쳤으며, 영주(榮州)로 올렸다. 태종 계사년(1413, 태종13)에 영천군으로 고쳤다. ○ 구성(龜城)이라고도 한다. ○ 13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70리이다. ○ 선곡현(善谷縣)이 있다. 고구려 때의 고곡현(賈谷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 예천(醴泉) : 신라 때에 수주현(水酒縣)이라 하다가 예천군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보주 (甫州)로 고쳤다가 기양현(基陽縣)으로 고쳤다. 태종 계사년에 보주군으로 고쳤다가 곧 다시 예천이라고 하였다. ○ 청하(淸河)ㆍ양양(襄陽)이라고도 한다. ○ 23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98리이다. ○ 다인(多仁)은 속현이며, 신라 때의 달기현(達己縣)이니 혹은 다기(多己)라고도 한다. 용궁(龍宮)의 동촌(東村) 너머[越]에 있다. 인양(仁陽)이라고도 한다.신라 때는 상주에 속하였다. 안인(安仁)은 폐현이다. 난산현(蘭山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 흥해(興海) : 성이 있다. 신라 때에 퇴화군(退火郡)이라고 하다가 의창(義昌)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흥해로 고쳤다. ○ 미질부성(彌秩夫城)ㆍ곡강(曲江)ㆍ오산(鰲山)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26리이다.
○ 양산(梁山) : 성이 있다. 신라 때에 상주(上州)와 하주(下州)의 땅을 나누어서 삽량주(?良州)를 두었다가 뒤에 양주(良州)로 고쳤다. 고려 태조가 양주(梁州)라고 고쳤으며 뒤에 밀성(密城)과 합하였다가 곧 다시 이전대로 하였다. 태종 때에 위산군(爲山郡)으로 고쳤고, 선조 임진년에 동래와 합쳤다가 갑진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90리이다.
○ 풍기(?基) : 신라 때의 기목진(基木鎭)이다. 고려 초기에는 기주(基州)라고 일컬었으며, 뒤에 은풍(殷?)을 예속시키고 기천현(基川縣)으로 고쳤다. 문종 때에 풍기군으로 올렸다. 은풍에 태실(胎室)을 봉안하였기 때문이다. ○ 영정(永定)ㆍ안정(安定)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40리이다. ○ 은풍현은 속현이며, 신라 때에 적아현(赤牙縣)이라 하다가 은정(殷正)이라고 고쳤다. 다른 이름은 은산(殷山)이다. 인풍현(??縣)이 있다. 고구려 때의 이벌지현(伊伐支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 경산(慶山) : 성이 있다. 압량소국(押梁小國)이니, 압독(押督)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 군을 두었는데, 뒤에 장산(獐山)으로 고쳤다. 고구려 초기에 장산(章山)으로 고쳤다가 경산으로 고쳤다. 태조 때에 현으로 낮추었고, 선조 신축년에 폐읍하였다가 정미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 옥산(玉山)이라고도 한다. ○ 5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10리이다. ○ 신라 때에 고포성(古浦城)ㆍ금성(金城)ㆍ우곡성(?谷城)의 3성을 합하여 압량군(押梁郡)으로 하였다.
○ 의성(義城) : 소문국(召文國)이었는데, 신라가 차지하여 문소군(聞韶郡)으로 만들었다. 고려 초기에 의성부로 고쳤다가 뒤에 곧 다시 현으로 낮추었다. 또 대구와 합하였다가 곧 다시 이전대로 회복시켰다. 19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90리이다. ○ 고구(高丘)는 고현(古縣)이다. 신라 때에 구화현(仇火縣)을 고쳐서 고구로 하였다. 혹은 고근(高近)이라고도 한다.
○ 영덕(盈德) : 성이 있다. 고구려 때의 야시홀군(也尸忽郡)이니, 신라 때에 야성(野城)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영덕현으로 고쳤다. ○ 5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4리이다.
○ 하양(河陽) : 고려 때에 하주(河州)라 하다가 뒤에 하양현으로 고쳤다. ○ 화성(花城)이라고도 한다. 선조 신축년에 고을을 폐지하였다가 정미년에 다시 두었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42리이다.
○ 용궁(龍宮) : 신라 때의 축산(竺山)이니, 원산(園山)이라고도 한다. 고려 때 용주(龍州)로 승격시켰다가 또 용궁현으로 고쳤다. ○ 10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44리이다.
○ 봉화 : 고구려 때의 고사마현(古斯馬縣)이니, 신라 때에 옥마(玉馬)로 고쳤고, 고려 때는 봉화로 고쳤다. ○ 10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20리이다. ○ 봉성(鳳城)이라고도 한다.
○ 청하(淸河) : 성이 있다. 고구려 때의 아혜현(阿兮縣)이니, 신라 때에 해아(海阿)로 고쳤고, 고려 때에는 청하로 고쳤다가 뒤에 경주에 예속시켰다.태조 때에 비로소 현을 두었다. ○ 덕성(德城)이라고도 한다. ○ 5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41리이다.
○ 언양(彦陽) : 성이 있다. 신라 때에 거지화현(居知火縣)이라 하다가 헌양(?陽)으로 고쳤고, 고려 때에 언양으로 고쳤다. 헌산(?山)이라고도 한다. 선조 기해년에 고을을 폐지하였다가 광해군 임자년(1612, 광해군 4)에 이전대로 하였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47리이다.
○ 진보(眞寶) : 칠파화현(漆巴火縣)을 신라 때에 진보로 고쳤고, 조람현(助攬縣)은 진안(眞安)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두 고을을 합하여 남성부(南城府)를 두었는데, 재암성(載巖城)이라고도 한다. 태조 때에 보성현(甫城縣)을 두었고, 세종 때에 청부(靑鳧)에 합하여 청보(靑寶)라고 이름했다가 곧 폐지하고 진보현으로 고쳤다. 성종 때에 폐읍하였다가 지방 사람들의 진정에 의하여 다시 현을 두었다. ○ 재암(載巖)ㆍ진해(眞海)라고도 한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16리이다.
○ 현풍(玄風) : 신라 때에 추량화현(推良火縣)이라고 하다가 현효(玄驍)로 고쳤으며 고려 때 현풍으로 고쳤다. ○ 포산(苞山)ㆍ현풍(玄?)이라고도 한다. ○ 17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80리이다. ○ 신라 때에는 지금의 창녕(昌寧)인 화왕군(火王郡)에 속하였다.
○ 군위(軍威) : 신라 때에 노동멱현(奴同?縣)이라 하다가 군위로 고쳤다. ○ 적라(赤羅)라고도 한다. ○ 10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75리이다. ○ 효령(孝靈)은 속현이다. 효령(孝令)이라고 쓰기도 한다. 신라 때의 모혜현(芼兮縣)이다.
○ 비안(比安) : 신라 때의 아화옥현(阿火屋縣)이니, 또는 병옥(幷屋)이라고도 한다. 비옥(比屋)으로 고쳤으며, 뒤에 안정현(安貞縣)과 합하였다. 세종 신축년(1421, 세종 3)에 비안이라고 개칭하였다. ○ 병산(屛山)이라고도 한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38리이다. ○ 안정(安貞)은 속현이다. 신라 때 아시혜현(阿尸兮縣)이니 안현(安賢)이라 고쳤다. 세종 때에 안비(安比)라고 고쳤으며, 뒤에 고을의 관아를 비옥(比屋)으로 옮기고 비안이라고 개칭하였다.
○ 의흥(義興) : 고려 때의 의흥군이니, 뒤에 안동에 예속시켰다가 다시 현을 두었다. ○ 구산(龜山)ㆍ구성(龜城)이라고도 한다. ○ 11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26리이다. ○ 부계(缶溪)는 속현이다. 삼국 시대의 부림현(缶林縣)이다.
○ 신녕(新寧) : 신라 때에 사정화현(史丁火縣)이라 하다가 신녕으로 고쳤다. 연산군 정사년에 폐읍하였다. 현의 아전이 현감 길수(吉脩)의 엄격하고 사나운 것을 싫어하여, 고을을 비우고 도망한 일이 있었으므로, 폐읍하여 영천(永川)에 예속시키고, 땅을 분할하여 의성ㆍ하양(河陽)ㆍ의흥(義興)에 나누어 예속시켰다. 계해년에 다시 고을을 설치하였다. ○ 화산(花山)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50리이다. ○ 민백현(?白縣)이 있다. 신라 때의 매열차현(買熱次縣)이니, 민백으로 고쳤다. 신녕과 합하였다. 이지(梨旨)는 폐현이다. 영주(永州)의 이지은소(梨旨銀所)이니, 고려 때에 현으로 하였고 태조 때 신녕(新寧)의 속현이 되었다.
○ 예안(禮安) : 고구려 때의 매곡현(買谷縣)이니, 신라 때 선곡(善谷)으로 고쳤으며, 고려 태조 때 예안군으로 고쳤다. 우왕(禑王) 때 주(州)로 승격시켰다가 왕실의 태(胎)를 간직해 두는 곳이기 때문이다. 곧 현으로 고쳤다. ○ 선성(宣城)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45리이다. ○ 의인(宜仁)은 폐현이다. 안덕현(安德縣)의 지도보부곡(知道保部曲)이다.
○ 장기(長?) : 성이 있다. 신라 때 지답현(只沓縣)이라고 하다가 기립(?立)으로 고쳤고, 고려 때 장기로 고쳤다. ○ 봉산(峯山)이라고도 한다. ○ 3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20리이다.
○ 영일(迎日) : 성이 있다. 신라 때의 근오지현(斤烏支縣)이니 오량우(烏良友)라고도 한다. 임정(臨汀)으로 고쳤으며 고려 때 영일로 고쳤다. 태종 때 진을 두었다가 세종 때 첨사로 고쳤고 뒤에 현감으로 고쳤다. ○ 오천(烏川)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80리이다.
○ 창녕(昌寧) : 신라 때의 비자화군(比自火郡)이니 비사벌(比斯伐)이라고도 한다. 뒤에 하주(下州)를 두었다가 곧 폐지하고 화왕군(火王郡)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가 창녕으로 고쳤고 뒤에 진(鎭)으로 삼았다. ○ 창산(昌山)ㆍ창성(昌城)ㆍ하성(夏城)ㆍ하산(夏山)이라고도 한다. ○ 13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20리이다.
○ 영산(靈山) : 신라 때 서화현(西火縣)이라고 하다가 상약(尙藥)으로 고쳤으며, 고려 때 영산으로 고쳤다. ○ 취산(鷲山)ㆍ취성(鷲城)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50리이다. ○ 계성(桂城)은 폐현이다.
○ 기장(機張) : 신라 때 갑화양곡현(甲火良谷縣)이라고 하다가 기장으로 고쳤다. ○ 거성(車城)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9백 40리이다. ○ 신라 때에는 동래에 속하였다.
○ 자인(慈仁) : 신라 때의 노사화현(奴斯火縣)이니 기화(其火)라고도 한다. 자인으로 고쳤고 경주에 예속시켰다. 인조 정축년에 비로소 현을 두었다. ○ 자주(慈州)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30리이다. ○ 《동국여지승람》에는 경주 조에 들어 있다.
○ 영양(英陽) : 고은현(古隱縣)이라고 하다가 뒤에 영양군으로 고쳤다. 연양(延陽)이라고도 쓴다. 고려 때는 예주(禮州)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현을 두었으며 다시 영해(寧海)에 예속시켰다. 숙종 병진년에 비로소 현을 설치하였다가 정사년에 도로 폐지하였고, 계해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50리이다. ○ 《동국여지승람》에는 영해 조에 들어 있다.
○ 우도 창원 : 성이 있다. 의창현(義昌縣)은 신라 때 굴자군(屈自郡)이라고 하다가 의안(義安)으로 고쳤으며, 회원현(會原縣)은 신라 때 골포현(骨浦縣)이라고 하다가 합포(合浦)로 고치었다. 고려 때에 의창(義昌)ㆍ회원의 두 고을로 하다가 태종 때 합하여 창원부라 하였다. ○ 회산(檜山)ㆍ환주(還珠)라고도 한다. ○ 16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44리이다.
○ 상주(尙州) : 성이 있다. 사벌국(沙伐國)이니 또는 사불(沙佛)이라고도 한다. 신라가 차지하여 주(州)로 하였다가 상주(上州)로 고치고 군주(軍主)를 두었는데, 상락군(上洛郡)으로 고쳤고 또 상주(尙州)ㆍ사벌주(沙伐州)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상주로 고쳤고, 절도사를 두어 귀덕군(歸德軍)이라고 부르다가 또 상주로 고쳤다. 세종 때 관찰사로서 목사를 겸임하게 하다가 곧 폐지하였다. 세조 때 진(鎭)을 두고 목사로서 우도병마부사(右道兵馬副使)를 겸임하게 하였다가 곧 폐지하였다. ○ 사량벌(沙梁伐)ㆍ상산(商山)ㆍ타아(?阿)라고도 한다. ○ 34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77리이다. ○ 화령현(化寧縣)은 속현이다. 신라 때의 □ 달비군(達匕郡)이니 화령으로 고쳤다. 중모현(中牟縣) 신라 때의 도량현(刀良縣)이니 도안(道安)이라 고쳤다.ㆍ단밀현(丹密縣) 신라 때의 무동미지현(武冬彌知縣)이니 갈동미지(曷冬彌知)라고도 한다. ㆍ산양현(山陽縣) 신라 때의 근품현(近品縣)이니 근암(近巖)이라고도 쓴다. 가유(嘉猷)로 고쳤다.ㆍ화창현(化昌縣) 지내미지현(知乃彌知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이 있다. 공성(功成)은 폐현이고, 신라 때의 대병부곡(大幷部曲)이다. 영순(永順)도 폐현이며 북면 임하촌(林下村)인데 고려 때에 태(太)씨라는 이 마을 사람이 도적을 잡아 공로가 있었으므로 현으로 승격시켰다. 청리(靑里)도 폐현이다. 신라 때의 석리대현(昔里大縣)이니, 청려(靑驢)ㆍ고려(高驢)ㆍ청리라 고쳤다.
○ 성주(星州) : 성이 있다. 신라 때 본피현(本彼縣)이라고 하다가 신안(新安)으로 고쳐 성산군(星山郡)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벽진(碧珍)으로 고치고, 고려 태조 때 경산부(京山府)로 고쳤다. 광평군(廣平郡)으로 낮추었다가 대주(垈州)로 고쳤고, 흥안부(興安府)로 올렸다. 뒤에 성산목으로 고쳤다가 부(府)로 강등시켰으며, 태종 때 목으로 올렸다. 조곡산(祖谷山)에 왕실의 탯줄을 봉안하였다. ○ 가야(伽倻)라고도 한다. 성산가야(星山伽倻)는 6가야 중의 하나이다. ○ 40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27리이다. ○ 가리현(加利縣) 신라 때의 일리현(一利縣)이니 이름을 성산군(星山郡)이라 고쳤다. 기성(岐城)이라고도 한다.ㆍ팔거현(八?縣) 지금의 칠곡부이다.ㆍ화원현(花園縣) 신라 때의 설화현(舌火縣)이니 금성(錦城)이라고도 한다.ㆍ도산현(都山縣) 적산현(狄山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이 있다.
○ 진주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거열성(居列城)인데 거타(居?)라고도 한다. 신라가 차지하여 진주(晉州)라고 하였다가 강주(康州)ㆍ청구(菁州)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절도사를 두고 정해군(定海軍)이라고 불렀다. 태조 때 진양부(晉陽府)로 올렸다가 현비(顯?)의 고향이다. 태종 때 다시 진주목으로 하였다. ○ 청주(菁州)ㆍ진산(晉山)ㆍ진강(晉康)이라고도 한다. ○ 70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66리이다. ○ 반성현(班城縣)은 속현이다. 편월(片月)이라고도 한다. 수선현(水善縣) 신라 때의 일선현(一善縣)이니 상선(尙善)이라 고쳤다.ㆍ악양현(岳陽縣) 신라 때의 소다사현(小多沙縣)이다. ㆍ화개현(花開縣)이 있다. ○흥선(興善)은 폐현이다. 흥선도(興善島)이니 고려 때의 유질부곡(有疾部曲)이다. 창선현(彰善縣)으로 고쳤는데 지금의 직촌(直村)이다. 굴촌(屈村)도 폐현이다. 《삼국사》에서도 상세하지 않다고 하였다.
○ 김해 : 성이 있다. 가락국(駕洛國)이니 혹은 가야(伽倻)라고도 일컬었다. 뒤에 금관국(金官國)으로 고쳤다. 신라 때에 금관군을 두었으며 뒤에 소경을 두었고, 다시 김해라 고쳤다. 고려 태조 때 낮추어 부로 하였다가 뒤에 낮추어 임해현(臨海縣)으로 하였다. 군으로 올렸다가 금주(金州)로 고쳤고 금녕부(金寧府)ㆍ금주목(金州牧)으로 올렸는데 다시 김해부로 하였다. ○ 분성(盆城)이라고도 한다. ○ 18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84리이다.
○ 태산(太山)은 속현이다. 엄산(嚴山)이라고도 한다.
○ 선산(善山) : 성이 있다. 신라 때 일선군(一善郡)이니 주(州)로 올렸다가 숭선군(嵩善郡)으로 고쳤고, 고려 때 선주(善州)로 고쳤다. 태종 때 선산군으로 고쳤으며 뒤에 부(府)로 올렸다. ○ 화의(和義)라고도 한다. ○ 18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36리이다. ○ 해평(海平)은 속현이다. 파징(波澄)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의 병평현(竝平縣)인데 고려 초기에 평군(平郡)이라 고쳤다.
○ 거제(巨濟) : 성이 있다. 바다 가운데의 섬이다. 신라 때 상군(裳郡)이라고 하다가 거제로 고쳤다. 뒤에 관성(管城)과 합하였다가 곧 폐지하였다. 태종 갑오년에 폐읍하고 거창에 합하여 제창현(濟昌縣)이라고 부르다가 또 곧 폐지하였다. 세종 임자년에 다시 현을 두었고 숙종 신묘년에 부로 올렸다. ○ 기성(岐城)이라고도 한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1천 44리이다. ○ 아주(?州)는 폐현이며 신라 때의 거로현(居老縣)이다. 송변(松邊)도 폐현이며 신라 때 남수(南垂)라 고쳤다. 명진(溟珍)도 폐현이다. 신라 때의 매진이현(買珍伊縣)이다. 정종 때 강성현(江城縣)과 합하여 진성(珍城)이라고 일컬었다.
○ 하동(河東) : 신라 때 한다사군(韓多沙郡)이라고 하다가 하동으로 고쳤다. 고려 때 현을 두었다. 태종 때 남해현(南海縣)과 합하여 하남현(河南縣)이라고 불렀으나 뒤에 다시 분할하였다. 숙종 갑신년에 부로 올렸다. ○ 청하(淸河)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36리이다.
○ 함양(咸陽) : 성이 있다. 신라 때의 속함군(速含郡)이니 함성(含城)이라고도 하다가 천령(天嶺)으로 고쳤다. 고려 때 허주(許州)로 올렸다가 함양군(含陽郡)으로 낮추었으며, 뒤에 함양으로 고치고 현으로 낮추었다. 태조 을해년에 군으로 올리고 영종 기유년에 부로 올렸다. ○ 18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46리이다.
○ 거창(居昌) : 신라 때의 거열군(居烈郡)이니 거타(居?)라고도 하다가 거창으로 고쳤다. 고려 때 현을 두었다. 태종 때 거제와 합하여 제창(濟昌)이라고 부르다가 곧 이전대로 회복시켰다. 연산군 초기에 군으로 올렸다. 왕비의 고향이다. 중종 병인년에 다시 현으로 낮추었다가 영종 기유년에 부로 올렸다. 거창 신씨(愼氏)인 단경왕후(端敬王后)가 복위한 때문이다. ○ 아림(娥林)이라고도 한다. ○ 22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35리이다. ○ 가조(加祚)는 속현이다. 신라 때의 가소현(加召縣)이니 함음(咸陰)이라고 고쳤다.
○ 초계(草溪) : 신라 때 초팔혜현(草八兮縣)이라고 하다가 팔계(八溪)로 고치었다. 고려 때 초계로 고치고 군으로 올렸다. ○ 청계(淸溪)라고도 한다. ○ 11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45리이다.
○ 함안(咸安) : 성이 있다. 아시량현(阿尸良縣)이다. ○ 18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10리이다. ○ 현무현(玄武縣)이 있다. 신라 때의 소다현(召多縣)인데 뒤에 낮추어 부곡으로 하였다.
○ 금산(金山) : 신라 때의 금산현(金山縣)이다. 정종 때 군으로 올렸다. 왕실의 태(胎)를 봉안(奉安)하였다. ○ 금릉(金陵)이라고도 한다. ○ 16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13리이다. ○ 어모(禦侮)는 폐현이다. 신라 때의 금물현(今勿縣)이니 음달(陰達)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는 개령(開寧)에 속하였다.
○ 곤양(昆陽) : 성이 있다. 고려 때의 곤명현(昆明縣)인데 신라 때의 이름은 상세히 알 수 없다. 세종 때 남해현(南海縣)과 합하여 곤남군(昆南郡)으로 올렸다. 왕실의 태(胎)를 고을의 북쪽 소곡산(所谷山)에 봉안하였다. 정사년에 다시 나누어 남해군을 두고, 진주의 금양부곡(金陽部曲)과 합하여 곤양으로 고쳤다.
○ 철성(鐵城)ㆍ곤산(昆山)이라고도 한다. ○ 10면, 서울과의 거리는 9백 6리이다. 하읍(河邑)은 폐현이다. 포촌현(浦村縣)이다.
○ 합천 : 신라 때 대량주군(大良州郡)이라고 하다가 대야주군(大耶州郡)이라고도 쓴다. 강양(江陽)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 합주(陜州)로 올렸으며, 태종 때 합천군으로 고쳤다. ○ 20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35리이다. ○ 야로(冶爐)는 속현이다. 신라 때의 적화현(赤火縣)이다.
○ 고성(固城) : 성이 있다. 본래 가야국(伽倻國)이니, 신라가 차지하여 고자군(古自郡)을 만들었다가 고성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 고주(固州)로 고쳤다가 뒤에 현으로 낮추었다. 또 남해와 합하였다가 곧 이전대로 하였다. ○ 철성이라고도 한다. ○ 14면, 서울과의 거리는 9백 10리이다. ○ 교화량(蛟火良)은 폐현이다.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 남해(南海) : 성이 있다. 바다 가운데의 섬이다. 신라 때 전야산군(轉也山郡)이라고 하다가 남해로 고쳤다. 고려 때에 현을 두었다. 태종 때 하동(河東)과 합하여 하남현(河南縣)이라고 하다가 뒤에 분할하여 해양현(海陽縣)이라고 일컬었다. 진주의 금양부곡(金陽部曲)을 예속시켰다가 얼마 안 가서 도로 진주에 환속시켰다. 세종 때 곤명현(昆明縣)과 합쳤다가 다시 분할하였다. ○ 전산(轉山)ㆍ화전(花田)ㆍ윤산(輪山)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1천 45리이다. ○ 난포(蘭浦)는 폐현이며 신라 때의 내포현(內浦縣)이다. 평산(平山)도 폐현이다. 신라 때의 평서산현(平西山縣)인데 서평(西平)이라고도 한다.
○ 삼가(三嘉) : 성이 있다. 삼기현(三岐縣)은 신라 때 삼지현(三支縣)이라고도 하고 마장(麻杖)이라고도 하다가 삼기로 고쳤다. 태조 때 군으로 올렸다가 태종 때 현으로 낮추었다. 가수현(嘉壽縣)은 신라 때 가주화현(加主火縣)이라고 하다가 가수라고 고쳤으며, 가수(嘉樹)라고도 한다. 태종 때 두 고을을 합하여 삼가현으로 하였다. ○ 기산(岐山)ㆍ봉성(鳳城)이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83리이다.
○ 의령(宜寧) : 성이 있다. 신라 때 장함현(獐含縣)이라고 하다가 의령으로 고쳤다. ○ 의춘(宜春)ㆍ의산(宜山)이라고도 한다. ○ 19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95리이다. ○ 신번(新繁)은 속현이다. 신라 때 신니현(辛?縣)이니 주오촌(朱烏村)이라고도 하고, 천천현(泉川縣)이라고도 하다가 의상(宜桑)으로 고쳤다.
○ 칠원 : 성이 있다. 신라 때 칠토현(漆吐縣)이라고 하다가 칠제(漆堤)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칠원(漆原)으로 고쳤다. 칠원(漆園)이라고 쓰기도 한다.
○ 구성(龜城)ㆍ무릉(武陵)이라고도 한다. ○ 4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80리이다. 구산(龜山)은 속현이다. 본래 성법부곡(省法部曲)이니 고려 때 올려서 현을 만들었다. 은산(銀山)이라고도 한다. 창원부의 서촌(西村)에 넘어서 들어 있다.
○ 진해(鎭海) : 성이 있다. 고려 때의 진해현이다. 선조 신축년에 폐읍하였다가 광해군 때 다시 두었고, 인조 정묘년에 폐읍하였다가 기묘년에 다시 두었다. ○ 팔진(八鎭)ㆍ우산(牛山)이라고도 한다. ○ 3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87리이다.
○ 문경(聞慶) : 신라 때의 관문현(冠文縣)이니 고사갈이성(高思曷伊城)이라고도 하다가 관현(冠縣)으로 고치고 또 관산(冠山)으로 고쳤다. 고려 때 문희군(聞喜郡)으로 고쳤다가 뒤에 문경으로 고쳤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77리이다. ○ 가은(加恩)은 속현이다. 신라 때 가해현(加害縣)이라고 하다가 가선(嘉善)이라고 고쳤다. 호계(虎溪)는 폐현이다. 신라 때의 호측현(虎側縣)인데 신라 때에는 고령에 예속되었었다. 배산성(拜山城)이라고도 한다.
○ 함창(咸昌) : 본래 고령가야국(古寧伽倻國)이니 신라가 차지하여 고동람군(古冬攬郡)으로 만들었다. 고릉(古陵)이라고도 하다가 고령(古寧)으로 고쳤다. 고려 때 함령(咸寧)으로 고쳤고 또 함창으로 고쳤다. 6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37리이다.
○ 지례(知禮) :신라 때 지품천현(知品川縣)이라고 하다가 지례로 고쳤다. ○ 구성이라고도 한다. ○ 4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24리이다. ○ 두의곡부곡(頭衣谷部曲)은 속현이다.
○ 고령(高靈) : 본래 대가야국(大伽倻國)이니 신라가 차지하여 대가야군을 만들었다가 고령으로 고쳤다. ○ 고양(高陽)ㆍ영천(靈川)이라고도 한다. ○ 14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84리이다.
○ 단성(丹城) : 강성현(江城縣)은 신라 때 궐지군(闕支郡)이라고 하다가 궐성(闕城)으로 고쳤고, 고려 때에는 강성현(江城縣)으로 고쳤다. 태종 때 영선(永善)에 임시 예속되어 있던 명진현(溟珍縣)과 합하여 진성현(珍城縣)이라고 불렀다. 단계현(丹溪縣)은 신라 때 적촌현(赤村縣)이라고 하다가 단읍(丹邑)으로 고쳤고, 고려 때 단계(丹溪)로 고쳤으며, 공양왕 때에는 강성(江城)에 예속시켰었다. 세종 때 두 고을의 이름을 따서 단성으로 고쳤다. 선조 기해년에 폐읍하였다가 광해군 계축년에 다시 두었다. ○ 구성(龜城)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46리이다. ○ 단계는 폐현이다.
○ 개령(開寧) : 감문소국(甘文小國)이니 신라가 차지하여 청주(淸州)를 설치하고 군주(軍主)를 두었다가 감문군(甘文郡)으로 고쳤고 개령으로 또 고쳤다. 고려 때 현으로 고쳤다. ○ 감주(甘州)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58리이다.
○ 사천(泗川) : 성이 있다. 신라 때 사물현(史勿縣)이라고 하다가 사수(泗水)로 고쳤는데, 고려 때에 사주(泗州)로 고쳤다. 태종 때 사천현으로 고쳤다가 뒤에 진을 설치하였다. 첨사로 삼았다. 뒤에 다시 현으로 고쳤다. ○ 동성(東城)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86리이다.
○ 웅천(熊川) : 성이 있다. 신라 때 웅지현(熊只縣)이라고 하다가 웅신(熊神)으로 고쳤다. 고려 때는 금주(金州)에 예속되었다. 세종 때는 이 고을에 요새지를 설치하고 첨사를 두었다. 문종 때 웅천현으로 고쳤으며, 중종(中宗) 5년에 부로 올렸다가 왜구를 평정한 곳이기 때문이다. 곧 이전대로 하였다. ○ 웅구(熊口)ㆍ병산(屛山)ㆍ웅산(熊山)이라고도 한다. ○ 5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70리이다.
○ 안의(安義) : 이안현(利安縣)은 신라 때 마리현(馬利縣)이라고 하다가 이안으로 고쳤다. 고려 말기에는 감음(感陰)에 이속시켰다. 감음현은 신라 때 남내현(南內縣)이라고 하다가 여선(餘善)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감음이라고 고쳤으며, 뒤에는 부곡으로 낮추었다가 다시 현으로 하였다. 태종 때 관아를 이안에 옮기고 안음(安陰)이라고 하였다. 영종 기유년에 폐읍하였다가 종단(終丹)이라는 계집아이가 7세에 아들을 낳았다 병진년에 다시 현을 두고 이름을 안의로 고쳤다. ○ 화림(花林)이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52리이다. ○ 감음은 폐현이다.
○ 산청(山淸) : 신라 때 지품천현(知品川縣)이라고 하다가 산음(山陰)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합천에 예속되었다가 공양왕 때에 현을 설치하였다. 영종 때 산청으로 고쳤다. 산양(山陽)이라고도 한다. ○ 14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6리이다.
연려실기술-주(州)와 군(郡)-강원도
○ 강원도 : 동북쪽과 동쪽은 바다이고, 동남쪽은 경상도와 경계이며 남쪽은 경상도와 충청도의 경계이고, 서남쪽은 충청도와 경계, 서쪽은 경기도와 경계이며 서북쪽은 경기ㆍ황해도의 경계이고, 북쪽은 함경도와 경계이다. 26고을이다. 동도 9고을, 서도 17고을 본래 예맥(濊貊)의 땅인데 한4군(漢四郡) 때에 임둔(臨屯)이 되었다가 뒤에 고구려와 신라가 차지하게 되었고, 신라가 통합하여 명주(溟州)ㆍ삭주(朔州)의 두 주를 두었다. 말기에 궁예가 점거하였다. 고려 때에는 삭방도를 두었다. 성종이 화주(和州)ㆍ명주 등의 군ㆍ현으로 삭방도를 만들고 춘주(春州) 등의 군ㆍ현에 예속시켰다. 뒤에 연해명주도(沿海溟州道)라고 고쳤고, 춘주(春州) 등의 군ㆍ현은 비로소 춘주도 혹은 동주도(東州道)라고 불렀다. 명종 때 명주도(溟州道)를 강릉도로 고쳤고, 동주도를 교주도(交州道)라 하였다. 뒤에 또 교주도를 고쳐 회양도(淮陽道)라고 부르고, 강릉도를 고쳐서 강릉삭방도라고 불렀다. 우왕 때 비로소 강릉도를 분할하여 교주도와 합하여 드디어 교주강릉도(交州江陵道)라고 불렀다. 충주의 관할인 평창군(平昌郡)을 교주강릉도에 예속시켰으며, 공양왕은 철원ㆍ영평(永平) 등의 현을 옮겨서 경기에 예속시켰다. 태조 을해년에 강원도라고 개칭하였다. 정종 때 영춘(永春)과 영월을 서로 교환하였으며, 태종 때 가평(加平)과 조종(朝宗)을 분리시켜 경기도에 예속시키고, 경기도의 이천(伊川)을 강원도에 예속시켰다. 세종 때 철원과 안협(安峽)을 도로 강원도에 예속시켰다.
○ 동도 강릉 : 성이 있다. 본래 예국(濊國) 철국(鐵國) 또는 예국(蘂國)이라고도 한다. 이니 한 무제의 한4군(漢四郡) 때에는 임둔(臨屯)이었다. 고구려 때에는 하서량(河西良)이라고 일컬었는데 하슬라주(河瑟羅州)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는 소경으로 하였다가 뒤에 명주(溟州)로 고쳤다. 고려 태조는 동원경(東原京)이라고 이름했다가 뒤에 하서부(河西府)라고 일컬었다. 명주목으로 고쳤으며, 경흥도호부로 올렸다가 다시 강릉부로 고쳤다. 본조에서도 이를 그대로 하였다. ○ 임영(臨瀛)ㆍ동온(東溫)ㆍ명원(溟源)ㆍ예국 이하는 이곡(李穀)의 <염양정기(艶陽亭記)>에 나온다.ㆍ철국(鐵國)ㆍ도원경(桃源京)ㆍ북빈경(北濱京)이라고도 한다. ○ 18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30리이다. ○ 연곡(連谷)은 속현이다. 고구려의 지산현(支山縣)이니 양곡(陽谷)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는 명주의 영현(領縣)이었다. 우계(羽溪)는 속현이다. 고구려 때의 우곡현(羽谷縣)이니 옥당(玉堂)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는 삼척군의 영현이었다.
○ 양양(襄陽) : 고구려 때의 익현현(翼峴縣)이니 이문(伊文)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는 익령현(翼嶺縣)으로 고쳤고, 고려 때에는 양주(襄州)로 올렸다가 덕령현(德寧縣)으로 낮추었으며 다시 양주(襄州)라 일컬었다. 태조 정축년에 부로 올렸다. 임금의 외향(外鄕)이다. 태종 때 양양으로 고쳤다. ○ 양산(襄山)이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50리이다. ○ 동산(洞山)은 속현이다. 고구려 때의 혈산현(穴山縣)이니 신라 때 동산(洞山)이라 고쳤다.
○ 삼척 : 성이 있다. 실직국(悉直國)이니 신라 때 실직주군주(悉直州軍主)를 두었다가 뒤에 삼척군으로 고쳤다. 고려 때 척주(陟州)로 고쳤다. 뒤에 현으로 낮추었다가 또 군으로 올렸다가 태조 계유년에 부로 올렸다. 목조(穆祖)의 외향(外鄕)이다. ○ 직주(直珠)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32리이다. ○ 죽령은 고현(古縣)이다. 고구려 때의 죽현현(竹峴縣)이니 신라 때 죽령이라고 고쳤다. 만경현(滿卿縣) 만경현이라고도 한다. 고구려 때의 만방현(滿芳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ㆍ해리현(海利縣) 고구려 때의 파리현(陂利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등으로 되어 있다.
○ 평해(平海) : 성이 있다. 고구려 때의 근을어군(斤乙於郡)이다. 고려 초기에 평해군으로 고쳤다. ○ 기성(箕城)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80리이다.
○ 통천(通川) : 고구려 때의 휴양군(休壤郡)이니 금뇌(金惱)라고도 한다. 신라 때 금양(金壤)으로 고쳤다. 고려 때 현을 두었다가 통주(通州)로 올렸다. 태종 계사년(1413, 태종 13)에 통천군으로 고쳤다. ○ 금란(金蘭)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40리이다. ○ 임도(臨道)는 폐현이고 고구려 때의 도림현(道林縣)이니 조을포(助乙浦)라고도 한다. 벽산(碧山)도 폐현이며 고구려 때의 토상현(吐上縣)이니 신라 때 제상(堤上)으로 고쳤다. 운암(雲巖)도 폐현이다. 고구려 때의 평진현(平珍縣)이니 변현(邊縣)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편검(偏儉)이라 고쳤다.
○ 고성(高城) : 고구려 때의 달홀(達忽)이니 신라 때 달홀주군주(達忽州軍主)를 두었다. 뒤에 고성군으로 고쳤다. 고려 때 현으로 고쳤다. 세종 때 군으로 올렸다. ○ 풍암(?巖)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99리이다.
○ 간성(杆城) : 고구려 때의 변성군(邊城郡)이니 가라홀(加邏忽)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수성군(守城郡)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간성현으로 고쳤으며, 뒤에 군으로 올렸고 고성(高城)을 겸임시켰다가 조금 후에 다시 분할하였다. ○ 수성(水城)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55리이다.
○ 울진(蔚珍) : 성이 있다. 고구려 때의 우진야현(于珍也縣)이니 고우이군(古?伊郡)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울진으로 고쳤고, 고려 때에는 현으로 낮추었다. ○ 선차(仙?)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85리이다. ○ 해곡현(海曲縣) 고구려 때의 파조현(波朝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이 있다.
○ 흡곡(?谷) : 고구려 때의 습비곡현(習比谷縣) 곡(谷)을 탄(呑)으로 쓰기도 한다. 이니 신라 때 습계(習磎)로 고쳤고, 고려 때에 흡곡으로 고쳤다. 선조 병신년에 폐읍하였다가 무술년에 다시 두었다. ○ 학림(鶴林)이라고도 한다. 3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70리이다.
○ 서도(西道) 원주 : 고구려 때의 평원군(平原郡)이니 신라 때 북원소경(北原小京)을 두었다. 고려 태조 때 원주로 고쳤다. 뒤에 낮추어 일신현(一新縣)으로 하였다가 조금 후에 이전대로 하였다. 또 정원부(靖原府)로 올렸다가 익흥부(益興府)로 고치고, 성안부(成安府)로 고쳤으며 다시 원주목으로 하였다. ○ 평량경(平?京)이라고도 한다. ○ 20면, 서울과의 거리는 3백 82리이다. ○ 주천(酒泉)은 속현이다. 학성(鶴城)이라고도 한다. 고구려 때의 주연현(酒淵縣)이니 신라 때 주천(酒泉)이라 고쳤다.
○ 회양(淮陽) : 고구려 때의 각련성군(各連城郡)이니 가혜아(加兮牙)라고도 한다. 신라 때 연성(連城)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이물성(伊勿城)이라고 부르다가 교주(交州)로 고쳤다. 회주목(淮州牧)으로 올렸다가 회양부로 낮추었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3백 80리이다. ○ 화천(和川)은 속현이다. 고구려 때의 수왕천현(藪往川縣)이니 신라 때 수천(藪川)으로 고쳤다. 남곡현(嵐谷縣) 고구려 때의 적목진(赤木鎭)이니 사비근을(沙非斤乙)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단송(丹松)으로 고쳤다. 이 있다. 질운(?雲)은 고현이고 고구려 때의 관술현(管述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희령(稀嶺)도 고현이다. 고구려 때의 저수현현(猪守峴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 춘천 : 본래 맥국(貊國)이었는데, 신라 때 우수주(牛首州) 우두주(牛頭州)라고도 한다. 를 설치하고 군주(軍主)를 두었다가 수약주(首若州)로 고쳤는데 오근내(烏斤乃)ㆍ수차약(首次若)이라고도 한다. 뒤에 삭주로 고치고, 광해주(光海州)로 고쳤다. 고려 태조 때에는 춘주(春州)라고 하였다가 안양부(安陽府)로 올렸다. 태종 계사년(1413, 태종 13)에 춘천군으로 고쳤고 을미년에 부로 승격시켰다. ○ 수춘(壽春)ㆍ봉산(鳳山)이라고도 한다. ○ 11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5리이다. ○ 기린(基鱗)은 속현이다. 고구려 때의 기지군(基知郡)이다. 난산(蘭山)은 고현이다. 고구려 때의 석달현(昔達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 철원(鐵原) : 고구려 때의 철원군(鐵圓郡)이니 또는 모을동비(毛乙冬非)라고도 한다. 신라 때 철성(鐵城)이라고 고쳤다. 궁예가 와서 도읍을 정하고 태봉(泰封)이라고 이름하였다. 고려 태조 때 동주(東州)로 고쳤다. 뒤에 현으로 낮추었다가 또 목으로 올렸으며, 철원부로 고쳤다. ○ 육창(陸昌)ㆍ창원(昌原)이라고도 한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21리이다.
○ 영월 : 고구려 때의 내생군(奈生郡)이니 신라 때 내성군(奈城郡)으로 고쳤고 고려 때 영월군으로 고쳤다. 숙종 기묘년에 부로 올렸다. 단종을 복위하였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37리이다.
○ 이천(伊川) : 고구려 때의 이진매현(伊珍買縣)이니 신라 때 이천으로 고쳤다. 광해군 초년에 부로 올렸고, 인조 계해년에는 도로 낮추었다가 숙종 정묘년(1687, 숙종13)에 다시 올렸다. ○ 화산(花山)이라고도 한다. ○ 10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80리이다.
○ 정선(旌善) : 고구려 때의 잉매현(仍買縣)이니 신라 때에 정선으로 고쳤고, 고려 때 군으로 올렸다. ○ 삼봉(三鳳)ㆍ주진도원(朱陳桃源)ㆍ침봉(沈鳳)이라고도 한다. ○ 4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30리이다.
○ 평창(平昌) : 고구려 때의 욱오현(郁烏縣)이니 우오(于烏)라고도 한다. 신라 때 백오(白烏)로 고치고, 고려 때에는 평창으로 고쳤다. 뒤에 군으로 올렸다가 도로 현(縣)으로 낮추고 태조 임신년에 다시 군으로 올렸다. 목조(穆祖)의 왕비 효비(孝妃)의 고향이다. ○ 노산(魯山)이라고도 한다. ○ 5면, 서울과의 거리는 3백 70리이다.
○ 금성(金城) : 고구려 때의 모성군(母城郡)이니 야차홀(也次忽)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익성(益城)으로 고쳤다가 뒤에 금성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현으로 낮추고 또 도령(道寧)이라고 일컬었다. 본조에서 다시 금성이라고 하였다. ○ 금양(金壤)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70리이다. ○ 통구(通溝)는 속현이다. 통구(通口)라고도 쓴다. 고구려 때의 수입현(水入縣)이니 매이(買伊)라고도 한다. ○ 기성(岐城)은 폐현이다. 고구려 때의 동사홀군(冬斯忽郡)이다.
○ 평강(平康) : 고구려 때의 부양현(斧壤縣)이니 어사내(於斯內)라고도 한다. 신라 때 광평(廣平)으로 고쳤고, 고려 때 평강으로 고쳤다. ○ 평강(平江)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40리이다.
○ 금화(金化) : 고구려 때의 부여군(夫如郡)인데 신라 때 부평(富平)으로 고치고, 고려 때 금화로 고쳤다. ○ 화산(花山)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20리이다.
○ 낭천(狼川) : 고구려 때의 생천군(?川郡)인데 야시매(也尸買)라고도 한다. 신라 때 낭천으로 고쳤고, 고려 때에 현(縣)으로 하고 양구를 겸임했다. 본조에서는 도로 분할하였다. 인조 갑신년에 폐읍하였다가 효종 계사년(1653, 효종 4)에 다시 설치하였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35리이다.
○ 홍천(洪川) : 고구려 때의 벌력천현(伐力川縣)인데 신라 때 녹요(綠繞)로 고쳤고, 고려 때에 홍천으로 고쳐 현을 두었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30리이다.
○ 양구(楊口) : 고구려 때의 양구군인데 요은홀차(要隱忽次)라고도 한다. 신라 때 양록(楊麓)으로 고쳤고 고려 때에는 양구(楊溝)로 고쳤다가 양구로 고쳤다. 뒤에 낭천과 병합하였다가 태조 계유년에 도로 분할하였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3백 10리이다. ○ 방산(方山)은 속현이다. 고구려 때의 삼현현(三峴縣)인데 밀파혜(密波兮)라고도 하였다. 신라 때 삼령현(三嶺縣)으로 고쳤다.
○ 인제(麟蹄) : 고구려 때의 저족현(猪足縣)인데 오사회(烏斯回)라고도 한다. 신라 때 희제(?蹄)로 고쳤고, 고려 때 인제로 고쳤다. 4면, 서울과의 거리는 3백 67리이다. ○ 서화(瑞和)는 속현이다. 서화(瑞禾)라고 쓰기도 하며, 서성(瑞城)이라고도 한다. 고구려 때의 옥기현(玉岐縣)인데 신라 때 치도(馳道)로 고쳤다.
○ 횡성(橫城) : 고구려 때의 횡천현(橫川縣)인데 또는 어사매(於斯買)라고도 한다. 신라 때 횡주(橫州)로 고쳤고, 고려 때에는 횡천이라고 일컬었다. 태종 갑오년에 홍천(洪川)과 발음이 비슷하다고 하여 횡성으로 고쳤다. ○ 화전(花田)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30리이다.
○ 안협(安峽) : 고구려 때의 아진압현(阿珍押縣)인데 궁악(窮岳)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안협(安峽)으로 고쳤다. 태종 갑오년에 경기도의 삭녕과 합쳐서 안삭(安朔)이라고 부르다가 병신년(1416, 태종 16)에 도로 이전대로 하였다. ○ 3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20리이다.
연려실기술-주(州)와 군(郡)-황해.함경,평안도
○ 황해도 : 남과 북은 함경도의 경계요, 동은 강원도 경계이며 동남은 강원도와 경기도의 경계이고, 남은 경기도의 경계이며, 서남과 서는 바다이고, 서북은 바다와 평안도의 경계이며, 북은 평안도의 경계이다. 23고을이다. 좌도 14고을, 우도 9고을 조선과 마한의 옛 땅이니 한4군(漢四郡) 때에는 낙랑군(樂浪郡)의 관할이었다. 뒤에 고구려가 차지하였는데 당(唐) 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니 그 땅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마침내 신라가 이 땅을 병합하였다. 한주(漢州)를 두었다. 신라의 말기에는 궁예가 점거하였다. 고려 때에는 관내도(關內道)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서해도로 고쳤다. 뒤에 수안(遂安)ㆍ곡주(谷州)ㆍ은율(殷栗) 등의 고을을 원(元) 나라에 빼앗겼다가 충렬왕 4년에 원 나라에서 돌려 주었다. 뒤에 황주목ㆍ안악군(安岳郡)ㆍ철화현(鐵和縣)ㆍ장명진(長命鎭) 등을 서북면에 옮겨 예속시켰다가 우왕 때에 도로 본도에 예속시켰다. 태조 을해년에 풍해도(?海道)로 고쳤고, 태종 정유년에 황해도로 고쳤다. 태조 을해년에 평주(平州)ㆍ수안(遂安)ㆍ곡주(谷州)ㆍ재령(載寧)ㆍ서흥(瑞興)ㆍ신계(新溪)ㆍ협계(俠溪)를 경기도로부터 도로 본도에 예속시켰다. 태종 계사년에 연안ㆍ배천ㆍ우봉ㆍ강음(江陰)ㆍ토산(?山)을 경기도로부터 도로 본도에 예속시켰다.
○ 좌도 황주(黃州) : 성이 있다. 고구려 때의 동홀(冬忽)인데 우동어홀(于冬於忽)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취성(取城)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황주로 고쳤다가, 뒤에는 절도사를 두고 천덕군(天德軍)이라고 일컬었다. 고령군(固寧郡)으로 낮추었다가 다시 황주목이라고 일컬었다. ○ 제안(齊安)ㆍ용흥(龍興)ㆍ성성(聖城)ㆍ대룡(大龍)ㆍ동울(冬鬱)ㆍ대홀(大忽)이라고도 한다. ○ 18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65리이다. ○ 철화(鐵和)는 폐현이다. 고려 때 현을 두었다가 뒤에 폐지하였고, 태조 병자년에 다시 현을 두었다가 태종 때 또 폐지하였다.
○ 평산(平山) :고구려 때의 대곡군(大谷郡)인데 다지홀(多知忽)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영풍(永?)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평주(平州)로 고쳤으며 부흥군(復興郡)과 합하였다가 조금 후에 이전대로 하였다. 태종 계사년에 평산부로 고쳤다. ○ 연덕(延德)ㆍ동양(東陽)이라고도 한다. ○ 17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71리이다.
○ 서흥(瑞興) : 고구려 때의 오곡군(五谷郡)인데 우차탄홀(于次呑忽)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오관(五關)이라 고쳤다. 고려 때는 동주(洞州)로 고쳤다가 서흥현으로 고쳤다. 태종 을미년에는 군으로 올렸고 세종 갑진년(1424, 세종 6)에는 부(府)로 올렸다. 현종 신해년에는 백년 동안 현으로 낮추라는 처분이 있었다. □ 부로 올렸다. ○ 농서(?西)ㆍ서성(瑞城)ㆍ옥곡(玉谷)이라고도 한다. ○ 13면, 서울과의 거리는 3백 45리이다
○ 곡산(谷山) : 고구려 때의 십곡성(十谷城)이니 덕돈홀(德頓忽)이라고도 하고, 곡성(谷城)이라고도 한다. 고곡군(古谷郡)이라고도 하는데, 신라 때 진서(鎭瑞)로 고쳤고 고려 때에는 곡주(谷州)로 고쳤다. 태조 계유년(1393, 태조2)에 곡산부로 고쳤다. 현비(顯?) 강씨(康氏)의 고향이다. 태종 임오년에 군으로 낮추었다가 현종 기유년에 다시 올렸다. 본관이 곡산인 신덕(神德)왕후가 복위하였기 때문이다. ○ 상산(象山)이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34리이다.
○ 봉산(鳳山) : 고구려 때의 휴암군(?巖郡)인데 휴류성(??城)이라고도 하고, 조파의(租坡衣)라고도 한다. 신라 때 서암(棲巖)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는 봉주(鳳州)로 일컫다가 봉양(鳳陽)으로 고쳤으며, 태종 계사년(1413, 태종 13)에 봉산군으로 고쳤다. ○ 지하(池河)라고도 한다. ○ 15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20리이다.
○ 안악(安岳) : 고구려 때의 양악군(楊岳郡)인데 고려 때 안악으로 고쳤다. 뒤에 현으로 하였다가 군으로 올렸다. ○ 양산(楊山)이라고도 한다. ○ 18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86리이다.
○ 재령(載寧) : 고구려 때의 식성군(息城郡)인데 한성(漢城)이라고도 하고, 내홀(乃忽)이라고도 하며, 한홀(漢忽)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중반(重盤)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안주(安州)라고 일컬었고 뒤에는 현을 두었고 재령으로 고쳤다. 태종 을미년에 군으로 올렸다. 중종 때 옛 읍에 질병이 많이 유행한다고 하여 관아를 옛 고을의 서쪽 60리 되는 곳에 옮겼다. ○ 안릉(安陵)ㆍ안풍(安風)이라고도 한다. ○ 13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65리이다. ○ 삼지(三支)는 폐현이다.
○ 수안(遂安) : 고구려 때의 장새현(璋塞縣)인데 고소어(古所於)라고도 한다. 고려 초기에 수안으로 고쳤고, 수주(遂州)로 올렸다. 본조에서 수안군으로 고쳤다. ○ 저새(猪塞)ㆍ요산(遼山)ㆍ장률(獐栗)이라고도 한다. ○ 13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35리이다.
○ 신천(信川) : 고구려 때의 승산군(升山郡)인데 고려 때에는 신주(信州)로 고쳤다가 뒤에 현으로 하였다. 태종 계사년에 신천으로 고쳤고 예종 기축년에 군으로 올렸다. ○ 신안(信安)ㆍ신성(信城)ㆍ화산(花山)ㆍ승주(升州)라고도 한다. ○ 10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95리이다.
○ 금천(金川) : 우봉현(牛峯縣)은 고구려 때 우잠군(牛岑郡)이니 우령(牛嶺)이라고도 하고, 수지의(首知衣)라고도 한다. 신라 때 우봉(牛峯)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 평주(平州)에 예속 되었다가 개성부에 예속되었으며 뒤에 현을 두었다. 태종 계사년에 본도에 예속되었다. 강음현(江陰縣)은 고구려 때의 굴압현(屈押縣)이니 강서(江西)라고도 한다. 신라 때 강음(江陰)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개성부에 예속되었다가 뒤에 현을 두었다. 태종 계사년에는 본도에 예속되었다. 효종 신묘년에 두 현을 합하여 금천군을 만들었다. ○ 금릉(金陵)이라고도 한다. ○ 16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5리이다.
○ 신계(新溪) : 고려 때의 신은현(新恩縣)인데 담주(覃州)로 고쳤다가 뒤에 옛 이름대로 회복하고 곡주(谷州)에 예속시켰다. 태조 병자년에 비로소 현을 두었으며 협계(俠溪)를 여기에 예속시켰다. 세종 을축년(1445, 세종 27)에 두 현의 이름을 따서 신계라고 하였다. ○ 신성(新城)이라고도 한다. ○ 13면, 서울과의 거리는 3백 48리이다. ○ 협계(俠溪)는 폐현이다. 고구려 때의 수곡성현(水谷城縣)이니 매차홀(買且忽)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단계(丹溪)로 고쳤다.
○ 문화(文化) : 고구려 때의 관구현(關口縣)인데 고려 때 유주(儒州)로 고쳤다. 뒤에 현으로 하였으며 문화로 고쳤다. ○ 시령(始寧)ㆍ문성(文城)이라고도 한다. 중종 경진년에는 관아자리에 질병이 많다고 하여 관아를 현의 남쪽 13리로 옮겼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25리이다.
○ 장련(長連) : 장명진(長命鎭)은 본래 황주(黃州)에 예속되었고, 연풍장(連?莊)은 본래 안악(安嶽)에 속하였었다. 태조 병자년에 장명진을 폐지하고 연풍에 예속시켰으며, 태종 갑오년(1414 태종 14)에 장련현으로 고쳤다.
○ 토산(?山) : 고구려 때의 오사함달현(烏斯含達縣)인데 신라 때 토산(?山)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개성부에 예속되었으며, 태종 계사년에 본도에 예속시켰다. ○ 월성(月城)이라고도 한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30리이다.
○ 우도 해주 : 성이 있다. 고구려 때의 내미홀군(內未忽郡)인데 지성(池城)이라고도 하고, 장지(長池)라고도 한다. 신라 때 폭지(瀑池)로 고쳤고, 고려 태조 때 해주로 고쳤다. 뒤에 절도사를 두고 우신책군(右神策軍)이라고 일컬었다. 양주(楊州)와 더불어 좌우보(左右輔)가 되었다. 안서(安西)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해주목으로 하였다. ○ 대령(大寧)ㆍ서해(西海)ㆍ수양(首陽)ㆍ고죽(孤竹)이라고도 한다. ○ 35면, 서울과의 거리는 3백 65리이다.
○ 연안(延安) : 성이 있다. 고구려 때의 동음홀(冬音忽)인데 시염성(?鹽城)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해고군(海皐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염주(鹽州)라 일컬었고 뒤에 영응현(永膺縣)이라고도 하였다. 복주(復州)로 올렸다가 석주(碩州)로 고쳤으며 온주목(溫州牧)으로 올렸다가 또 낮추어 연안부로 하였다. 태종 계사년(1413, 태종 13)에 도로 본도에 예속시켰다. ○ 오원(五原)ㆍ양원(陽原)이라고도 한다. ○ 22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55리이다.
○ 풍천(?川) : 고구려 때의 구을현(仇乙縣)인데 굴천(屈遷)이라고도 한다. 고려 초기에 풍주(?州)로 고쳤다. 태조 정축년에 비로소 진(鎭)을 두었으며, 태종 계사년에 풍천군으로 하였다. 은율(殷栗)과 합하여 풍율(?栗)이라고 일컫다가 얼마 안 되어 폐지하였다. 예종 기축년에 부로 올렸다. 왕후의 외가의 고향이다. ○ 서하(西河)ㆍ성해(成海)ㆍ안주(安州)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35리이다.
○ 옹진(甕津) : 성이 있다. 고구려 때의 옹천(甕遷)인데 고려 초기에 옹진으로 고치고 현을 두었다. 태조 정축년에 진을 두었다가 세종 때 다시 현을 두었으며 숙종 기해년(1719, 숙종45)에 부로 올렸다. ○ 5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85리이다.
○ 장연(長淵) : 고구려 때의 장연인데 신라ㆍ고려가 모두 그대로 따랐다. 태조 임신년에 만호를 두었으며, 태종 때에 영강현(永康縣)과 합하여 연강(淵康)이라고 일컬었으나 얼마 안 되어 폐지하였다. 세종 5년에 첨사를 두었다가 뒤에 현으로 하였고, 광해군 계해년에 부로 올렸다. ○장담(長潭)이라고도 한다. ○ 11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13리이다. ○ 해령(海寧)은 폐현이다. 고려 때 현을 두었다가 뒤에 청송에 예속시켰다. 태종 병신년에 그 땅을 장연현의 서쪽 경계에 예속시켜 직촌(直村)이라 하고 해령현의 아전들은 송화(松禾)에 배속시켰다.
○ 배천(白川) : 고구려 때의 도랍현(刀臘縣)이니 치악성(雉嶽城)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구택(?澤)으로 고쳤었다. 고려 초기에 백주(白州)라고 일컬었으며 개흥부(開興府)로 올렸다가 뒤에 이전대로 하였다. 충익현(忠翊縣)으로 고쳤다가 부흥군(復興郡)으로 올렸다. 태종 계사년에는 배천군으로 고치고 도로 본도에 예속시켰다. 중종 병술년에 현으로 낮추었다가 도로 회복시켰다. ○ 은천(銀川)이라고도 한다. ○ 16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35리이다.
○ 송화(松禾) : 청송현은 고구려 때의 마경이(麻耕伊)이고, 가화현(嘉禾縣)은 고구려 때의 판마곶(板麻串)인데, 고려 때에는 두 곳에다 각각 현을 두었었다. 태종 무자년에 두 고을을 합하여 송화라고 하였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95리이다. ○ 영녕(永寧)은 폐현이다. 고구려 때의 웅한이(熊閑伊)이다. 가화(嘉禾)는 고현(古縣)이다.
○ 강령(康翎) : 영강현(永康縣)은 고구려 때의 부진이(付珍伊)인데 고려 초기에 영강(永康)으로 고치고 현을 두었다. 태종 갑오년에 장연(長淵)과 합하였다가 얼마 후에 이전대로 하였다. 백령도(白翎島)는 고구려 때의 곡도(鵠島)인데 고려 때에는 백령진을 두었다. 세종 무신년(1428, 세종 10)에 영강(永康)과 백령을 합하여 강령현으로 하였다. 백령은 고려 공민왕 때에 곡령도의 수로가 험하다고 하여 진(鎭)이 육지로 나와 문화현의 동촌 가을산(加乙山)에 임시로 붙여 그곳을 그냥 백령이라고 일컫고 본섬을 백령에 예속시켰다. 인조(仁祖) 정축년에 폐읍하였다가 효종 기해년에 다시 현을 두었다. ○ 5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55리이다.
○ 은율(殷栗) : 고구려 때의 율구(栗口)인데 또는 율천(栗川)이라고도 한다. 고려 때 은율로 고쳤고, 태조 병자년에 비로소 현을 두었다. 태종 갑오년(1414, 태종 14)에 풍천(?川)에 병합하였다가 얼마 후에 다시 현을 두었다. 숙종 무진년에 폐읍하였다가 경오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 4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85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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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 동북과 동은 두만강이고, 동남과 남은 바다이며, 서남은 강원도 경계이고, 서와 서북은 평안도 경계이며, 북은 여진의 경계이다. 23고을이다. 남도(南道)가 13고을이었는데, 지금은 14고을이고, 북도가 10고을이다. 본래는 옥저(沃沮)의 땅인데 한4군(漢四郡) 때에는 현도군(玄?郡)이 되었다가 뒤에 고구려가 소유하였는데 신라가 3국을 통합할 때 남쪽 지방만을 차지하고, 명주(溟州)를 두었다. 북쪽 땅은 발해가 차지하였다. 고려 때는 삭방도라고 하다가 뒤에 동계(東界)로 개칭하였고, 또 동북면이라고도 일컬었다. 뒤에 함주(咸州) 이북은 동여진에게 빼앗겼다. 윤관이 개척하여 9성을 쌓았으며, 뒤에 연해명주도(沿海溟州道)라고 일컬었으나 후에 화주(和州) 이북을 원(元) 나라에 빼앗기게 되니, 원 나라에서 쌍성총관부를 두었다. 공민왕이 쌍성을 쳐서 함락하고 다시 동북면이라고 이름하다가, 또 강릉삭방도라고 일컬었으며 삭방강릉도로 고쳤다. 공양왕 때에 비로소 강릉도와 분할하여 한 도(道)를 이루었다. 태종 계사년에 영길도(永吉道)로 고쳤으며, 또 함길도로 고쳤다. 성종 때에는 영안도(永安道)로 고치고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으로 인하여 길주를 낮추어 현을 만들었고, 함흥을 낮추어 군으로 하였다. 감영을 영흥으로 옮겼다가 중종 기사년(1509 중종4)에 함흥을 부로 복구시키고 감영을 옮겨왔으며 함경도라고 개칭하였다.
○ 남도(南道) 함흥 : 고구려의 옛 땅인데 오랫동안 동여진이 점거하였다. 고려 예종 때에 윤관이 여진을 쫓아내고 함주를 두었다가 대도독부를 두어 진동군(鎭東郡)이라고 부르고 성(城)을 쌓았다. 남쪽 지방의 장정 1천 9백 48호를 옮겨다가 채웠다. 다음해에 성을 철폐하고 그 땅을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뒤에 원 나라가 차지하여 합란부(哈蘭府)라고 일컬었다. 환조(桓祖)가 쌍성을 쳐서 깨뜨렸다. 뒤에 함주로 고쳤다가 얼마 후에 만호부로 고쳤으며 또 목(牧)으로 올렸다. 태종 병신년에 함흥부로 고치고 감영을 두었다. 성종 때 군으로 낮추었다가 중종 때 이전대로 하였다. ○ 함평(咸平)ㆍ함산(咸山)이라고도 한다. ○ 24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20리이다.
○ 영흥(永興) : 고구려 때의 장령진(長嶺鎭)인데 혹은 당문(唐文)이라고도 하고 혹은 박평군(博平郡)이라고도 한다. 고려 초기에 화주(和州)라고 하였고 성과 보루를 쌓았다. 원 나라가 여기에 쌍성총관부를 두었으며 등주(登州)에 합하였다가 뒤에는 통주(通州)에 합하였다. 수복한 뒤에는 화주라고 하였고 화령부(和寧府)로 올렸다. 태조 계유년에 영흥으로 고쳤다. 외조 최씨(崔氏)의 고향이다. 태종 계미년에 군으로 낮추었다가 다음해에 이전대로 하였으며, 병신년에는 화주목으로 낮추었다가 세종 병오년에 영흥부로 고쳤다. 성종 경인년에 감영을 설치하고 부윤으로 올렸다가 연산군 무오년에 도로 낮추었다. ○ 역양(歷陽)이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85리이다. ○ 평주진(平州鎭) 본래는 영흥진인데 태조 때 평주(平州)로 고쳤다. ㆍ정변진(靜邊鎭)ㆍ영인진(寧仁鎭) 청원(淸源)이라고도 한다.ㆍ장평진(長平鎭) 예전에는 고질달(古叱達)이라고 일컬었다. 공민왕이 현으로 고쳤다.ㆍ요덕진(耀德鎭) 본래는 현덕진(顯德鎭)인데 공민왕이 현으로 고쳤다. 이 있다.
○ 안변(安邊) : 고구려 때의 비열홀군(比列忽郡)인데 천성(淺城)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비열주(比列州)라 하고 군주(軍主)를 두었다가 삭정군(朔庭郡)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등주안변부(登州安邊府)로 고쳤다. 태종 계미년에 현으로 낮추었다가 부(府)의 사람 조사의(趙思義)가 반란을 일으켰다. 다음 해에 도로 부로 복구하였다. ○ 삭방ㆍ학성(鶴城)이라고도 한다. ○ 25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10리이다. ○ 학포(鶴浦)는 속현이며, 고구려 때의 곡포현(鵠浦縣)이다. 영풍현(永?縣) 본래 증대이(甑大伊)인데 고려 때 진을 두었다가 뒤에 현으로 고쳤다.ㆍ문산현(文山縣)은 폐현이고 고구려 때의 가지달현(加支達縣)으로 신라 때 청산(菁山)으로 고쳤다. 익곡(翼谷)도 폐현이며, 고구려 때의 어지탄현(於支呑縣)인데 신라 때 익계(翊溪)로 고쳤다. 서곡(瑞谷)도 폐현이고, 고구려 때의 원곡현(原谷縣)이다. 궁탄(弓呑)이라고도 한다. 파천(派川)도 폐현이다. 고구려 때의 기연현(岐淵縣)이다. 위산(衛山)도 폐현이고, 복령(福令)도 폐현이며, 복령(福靈)이라고 쓰기도 한다. 복평향(福平鄕)이다. 상음(霜陰)도 폐현이다. 고구려 때의 살한현(薩寒縣)이다.
○ 북청(北靑) : 고구려의 옛 땅인데 오랫동안 여진이 점거한 지역이었다. 윤관이 9성을 쌓을 때의 칭호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뒤에 원 나라에 빼앗겨 삼살(三撒)이라고 일컬었다. 공민왕 때 안북천호(安北千戶)를 두었다가 북청주(北靑州)로 고쳤다. 태조 무인년에는 청주부(靑州府)로 고쳤고, 태종 때 다시 북청이라 일컬었다. 청주와 발음이 같기 때문이다. 세조 때 남도병영(南道兵營)을 두었다. ○ 청해(靑海)라고도 한다. ○ 19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10리이다.
○ 덕원(德源) : 고구려 때의 천정군(泉井郡)인데 어을매(於乙買)라고도 한다. 신라 때 정천(井泉)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 용주(湧州)라고 일컬었고 뒤에 의주(宜州)로 고쳤다. 태종 계사년에 의천(宜川)으로 고쳤다. 세종 정사년에 덕원군으로 고쳤고 을축년에 부로 올렸다. 사조(四祖)의 고향이다. ○ 덕주(德州)ㆍ동모(東牟)ㆍ의춘(宜春)ㆍ의성(宜城)ㆍ춘성(春城)이라고도 한다. ○ 20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60리이다. ○ 진명(鎭溟)은 폐현이고 원산현(圓山縣)이라고도 하고 수강(水江)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진명사(鎭溟社)라 한다. 용진(龍津)도 폐현이다. 고호포(古狐浦)이다. 고려 때 용진진(龍津鎭)으로 고쳤고 뒤에 현을 두었다. 세조 때 나누어 덕원과 문천(文川)에 예속시켰다.
○ 정평(定平) : 옛날에는 파지(巴只)라고 일컬었으며 선위(宣威)라고도 한다. 고려 때 천정만호부(千丁萬戶府)를 두었고, 뒤에 성을 쌓고 관문을 설치하여 정주(定州)라고 하였다. 태종 계사년에 정평부로 고쳤다. 평안도의 정주와 이름이 같기 때문이다. ○ 중산(中山)이라고도 한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70리이다. ○ 장곡(長谷)은 폐현이며, 고려 때의 장주(長州)이니 가림(?林)ㆍ단곡(端谷)이라고도 한다. 세종 때 폐읍하고 사(社)로 하였다. ○ 예원(預原)도 폐현이다. 고려 때 생천(牲川)에 성을 쌓아 원흥진(元興鎭)이라 하고, 또 예주(預州)에 성을 쌓아 방어사를 두었다. 태조 때 예주와 원흥을 합하여 예원군(預原郡)을 만들었다. 세조 무인년에 군을 폐지하고 정평에 예속시켜 독산사(禿山社)라고 일컬었다. 원성(原城)이라고도 한다.
○ 갑산(甲山) : 성이 있다. 본래 허천부(虛川府)인데 오랫동안 여진에게 점거되었다. 여러 차례 병화를 겪어 사람이 살고 있지 아니하였다. 공양왕이 처음으로 갑주만호부(甲州萬戶府)를 두었다. 태종 계사년에 갑산군으로 고쳤고 세종 때 진을 두었으며, 세조 신사년에 부로 올렸다. ○ 이산(夷山)이라고도 한다. ○ 13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2백 75리이다.
○ 삼수(三水) : 성이 있다. 본래 갑산군 삼수보(三水堡)인데 세종 신유년에 만호를 두어 적병의 길목을 막게 하였고, 병인년에 다시 삼수군을 두었다. 단종 갑술년에 다시 만호로 하였다. 세조 임오년에 부로 올렸고 갑신년에 다시 군으로 낮추었다가 숙종 경인년에 다시 부로 올렸다. ○ 삼강(三江)이라고도 한다. ○ 3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3백 65리이다.
○ 단천(端川) : 성이 있다. 본래 오림금촌(吳林金村)인데 오랫동안 여진에게 점거되었었다. 윤관이 성을 쌓고 복주(福州)를 두었다가 얼마 후에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뒤에 원 나라에 빼앗겨 원 나라가 이곳을 독로올(禿魯兀)이라고 일컬었다. 우왕 때에 단천으로 고쳤고, 태종 계사년에 단천군으로 고쳤으며, 숙종 경자년에 부로 올렸다. ○ 증산(甑山)이라고도 한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2백 5리이다.
○ 고원(高原) : 옛날의 덕녕진(德寧鎭)이니 홍원군(洪源郡)이라고도 한다. 고려 때 성을 쌓고 고주(高州)라고 하였다. 태종 계사년에 고원군으로 고쳤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45리이다.
○ 문천(文川) : 옛날에는 매성(妹城)이라고 불렀는데 고려 때 성을 쌓고 문주(文州)라고 하였다. 뒤에 의주(宜州)와 합하였다가 얼마 후에 다시 분할하였다. 태종 계사년에 문천군으로 고쳤다. ○ 이균(伊均)이라고도 한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95리이다.
○ 홍원(洪原) : 옛날에는 홍긍(洪肯)이라고 일컬었으며 혹은 홍헌(洪獻)이라고도 한다. 고려 말기에 현을 두었으나 태조 무인년에 홍원으로 고치고 함흥에 예속시켰다. 태종 임오년에 다시 분할하여 현을 두었다가 얼마 후에 폐읍하고 도로 함흥에 예속시켰다. 세종 계축년(1433 세종 15)에 다시 현을 두었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9백 20리이다.
○ 이성(利城) : 옛날에는 시리(時利)라고 일컬었다. 고려 때에는 복주(福州)에 예속되었다. 세종 병진년에 단천의 마운령(磨雲嶺) 남쪽에 있는 두 사(社)와 동사(東社)를 떼내어 이성현을 두었다. ○ 시질간(時叱間)ㆍ다보(多甫)ㆍ아사(阿沙)ㆍ관성(觀城)이라고도 한다. ○ 3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백 15리이다.
○ 장진(長津) 결(缺)
○ 북도(北道) 길주(吉州) : 성이 있다. 고구려의 옛 땅인데 오랫동안 여진에 점거되었다. 윤관이 여진을 쫓아내고 국경선을 획정하니 동쪽은 화곶령(火串嶺)에 이르고, 북쪽은 궁한령(弓漢嶺)에 이르며 서쪽은 몽라골령(蒙羅骨嶺)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강토가 되었다. 궁한촌(弓漢村)에 6백 70칸(間)을 쌓고 길주라고 이름하였다가, 얼마 후에 여진에 돌려 주었다. 뒤에 원 나라에 빼앗겨 해양(海洋)이라고 일컬었다. 공양왕이 길주 등처관 군민 만호부(吉州等處管軍民萬戶府)를 두고 영주(英州)ㆍ선화(宣化) 등의 진을 모두 여기에 예속시켰다. 태조 무인년에 길주목으로 고쳤다. 예종 기축년에 현으로 낮추어 길성(吉城)이라고 부르고, 이 주(州) 북쪽 영평 등 땅을 분할하여 따로 명천현(明川縣)을 두었다가 중종 임신년(1512, 중종 7)에 다시 올렸다. 선조 을사년에 다시 올렸다. ○ 삼해(三海) 혹은 삼양(三洋)이라고도 하였다.ㆍ웅성(雄城)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3백 85리이다.
○ 옛 웅주(雄州) 윤관이 여진을 쫓아내고 화곶령(火串嶺) 아래에 성을 쌓은 뒤 영해군웅주방어사(寧海郡雄州防禦使)를 두었다. 공양왕 때 길주(吉州)와 합하였다.《고려사》에 이르기를, “길주는 북쪽에 있고 웅주는 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지금 그 땅을 상세히 알 수 없다. 가 있고, 옛 영주(英州) 윤관이 몽라골령 아래에 성을 쌓고 안령군 영주 방어사(安嶺軍英州防禦使)를 두었다. 지금 그 땅을 상세히 알 수 없다. 가 있으며, ○ 옛 선화진(宣化鎭) 윤관이 진을 두었다. 공민왕 때 수복하여 길주와 합하였다. 이 있다.
○ 경원(慶源) : 성이 있다. 옛날의 공주(孔州)인데 광주(匡州)라고도 한다. 오랫동안 여진에 점거되었었다. 윤관이 성채를 설치하고 공험진(公險鎭)이라고 하였다. 태조 무인년에 경원부로 고쳤다. 경성(鏡城)ㆍ용성(龍城) 이북을 분리시켜 여기에 예속시켰다. 태종 기축년에 관아를 소다로(蘇多老)의 옛 진영에 옮기고 경인년에 민가들을 옮겨 경성에 합하고 마침내 그 땅을 비우게 하였다. 정축년에는 경성의 두롱이현(豆籠耳峴) 이북 땅을 분리시켜 부가참(富家站)에 다시 고을을 설치하였다. 세종 무신년에는 또 부의 관아를 회질가(會叱家)의 땅 남쪽 지방의 백성들을 옮겨다가 이곳에 채웠다. 추성(楸城)에 옮겼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2천 2백 9리이다. ○ 거양성(巨陽城)이 있다.
○ 회령(會寧) : 성이 있다. 고구려의 옛 땅 알목하(斡木河)이니 오음회(吾音會)라고도 한다. 태종 때 알타리(斡朶里)의 동맹가(童孟哥)가 허술함을 틈타서 들어와 살았다. 세종 갑인년에 알목하에 성과 보루를 설치하고 영북진(寧北鎭)으로 하여금 겸하여 관장하게 하였다. 이해 여름에 따로 진을 두어 회령진이라고 일컫고 첨사를 두었다. 겨울에 부로 승격시켰다. ○ 오산(鰲山)ㆍ회산(會山)이라고도 한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9백 35리다. 공험령(公?嶺)이 있다. 지금은 상고 할 수 없다.
○ 종성(鐘城) : 성이 있다. 수주(愁州)이다. 세종 을묘년(1435, 세종 17)에 영북 본진(寧北本鎭)에 군을 두고 백안수소(伯顔愁所)이다. 종성이라고 불렀다. 경신년에 관아를 수주(愁州)로 옮기고, 본진은 도절제사의 행영으로 하였다. 신유년에 부로 올렸다. ○ 종산(鐘山)이라고도 한다. ○ 5면, 서울과의 거리는 2천 32리이다.
○ 온성(穩城) : 성이 있다. 다온평(多溫平)이다. 세종 경신년에 처음으로 군을 두어 온성으로 고치고 신유년에 부로 올렸다. ○ 전성(氈城)이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2천 백 2리이다.
○ 경흥(慶興) : 성이 있다. 옛 공주(孔州)의 땅이다. 경원의 관아를 회질가(會叱家)로 옮겨 공주의 옛 성에 만호를 두었다. 을묘년에 따로 현을 두어 공성현(孔城縣)이라고 일컫다가 정사년에 군으로 올렸다. 목조(穆祖)가 처음으로 터전을 마련한 곳이다. 경흥으로 고치고 계해년에 부(府)로 올렸다. ○ 공성(孔城)ㆍ광성(匡城)이라고도 한다. ○ 서울과의 거리는 2천 3백 64리이다.
○ 부령(富寧) : 성이 있다. 경성군 석막(石幕)의 땅이다. 세종 신해년에 처음으로 영북진(寧北鎭)을 두고 경성을 겸하여 관장하게 하였다. 갑인년에 진을 백안수소(伯顔愁所)로 옮기고, 석막의 옛 땅을 토착 관리인 천호(千戶)가 지켰다. 기사년에 부거현(富居縣)을 폐지하고 백성들을 석막으로 옮겨 부령부라고 이름하였다. ○ 영산(寧山)이라고도 한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6백 95리이다. ○ 부거(富居)는 폐현이다. 경성의 부가참(富家站)이니 지금의 회유역(懷綏驛)이다.
○ 명천(明川) : 성이 있다. 길주(吉州)의 명원역(明原驛)이다. 예종 기축년에 길주의 장덕산(長德山) 이북의 땅을 분할하여 따로 명천현을 두고 명원을 관아로 삼았다. 중종 임신년에 현을 폐지하고 길주에 예속시켰다가, 계유년에 다시 분할하고 고을을 두었으며 선조 을사년에 부로 올렸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4백 55리이다.
○ 무산(茂山) : 성이 있다. 숙종 갑자년에 처음으로 부를 두었다. ○ 삼산(三山)ㆍ오대(鰲戴)라고도 한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8백 40리이다.
○ 경성(鏡城) : 성이 있다. 우롱이(亐籠耳)인데 목랑고(木郞古)라고도 한다. 태조 무인년에 처음으로 경성이라고 일컫고 만호를 두었다. 정종 경진년에 군으로 올렸고 세종 병진년(1436 세종 18)에 부로 올렸다. 세조 정해년에 북병영을 두었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5백 95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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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안도
: 동북과 동은 함경도의 경계이고, 동남은 함경도ㆍ황해도 두 도(道)의 경계이며, 남은 황해도의 경계이고, 서남과 서는 바다이고, 서북은 압록강, 북은 여진(女眞)의 경계이다. 42 고을, 남도 22고을, 북도 20고을 본래 조선 땅인데 한4군 때에는 낙랑군(樂浪郡)이다. 뒤에 고구려의 땅이 되었다.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당 나라의 장수 이적(李勣)과 더불어 고구려를 쳐서 멸망시키고 마침내 그 땅을 병합하였다. 패강(浿江) 대동강 이남의 땅은 한주(漢州)에 예속되고 강 북쪽은 모두 발해와 여진에 들어갔다. 신라 말기에 궁예가 이 땅을 나누어 패서(浿西) 13진(鎭)을 두었다. 고려가 점차로 수복하여 성종 때에는 패서도를 두었다. 뒤에 북계(北界)라고 일컬었고 숙종 때에는 서북면이라고 일컬었다. 뒤에 황주목(黃州牧)ㆍ안악군(安岳郡)ㆍ철화현(鐵和縣)ㆍ장명진(長命鎭)을 여기에 예속시켰다. 우왕 때에 다시 예속하였다. 본조의 초기에 압록강 안의 땅을 모조리 개척하였다. 태종 계사년에 평안도로 고쳤다. 병신년에 여연군(閭延郡)을 설치하였고, 세종 때에 자성(慈城)ㆍ우예(虞芮)ㆍ무창(茂昌)을 설치하였다. 여연ㆍ무창ㆍ우예는 본래 영길도(永吉道)ㆍ갑산(甲山)의 땅인데 여기에 예속시켰다. 세조 을해년에 모두 폐지하고 그 땅을 비워버렸다.
○ 남도 평양 : 성이 있다. 단군이 평양에 도읍을 정하여 전조선(前朝鮮)이 되었고, 기자(箕子)가 와서 여기에 도읍을 정하여 후조선(後朝鮮)이 되었으며, 위만(衛滿)이 왕험성(王險城) 왕검성(王儉城)이라고도 한다. 에 도읍을 정하여 위만조선(衛滿朝鮮)이 되었다. 한 무제가 왕검성을 낙랑군으로 삼았다. 고구려의 장수왕(長壽王)이 국내성(國內城)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적(李勣)이 신라와 합력하여 고구려를 쳐서 멸망시키고 여기에 안동도호부를 두었다. 고려 태조 때에는 서경이라고 하였다. 평양이 황폐하다고 하여 염주(鹽州)ㆍ백주(白州)ㆍ황주(黃州)ㆍ해주(海州)ㆍ봉주(鳳州) 등 여러 고을의 백성들을 옮겨다가 이곳을 채웠다. 뒤에 서도(西都)로 고쳤다. 혹은 호경(鎬京)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뒤에 몽고에 빼앗겨 동녕부(東寧府)라 하였고 파령(?嶺)을 경계로 삼았다. 원 나라가 우리에게 돌려주어 다시 서경이 되었다. 공민왕이 여기에 만호부(萬戶府)를 두었고 뒤에 평양부로 고쳤다. 본조에서는 감영을 설치하였다. ○ 기성(箕城)ㆍ장안(長安)ㆍ유경(柳京)이라고도 한다. ○ 36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66리이다.
○ 안주(安州) : 성이 있다. 고구려 때의 식성군(息城郡)인데 신라 때 중반군(重盤郡)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팽원군(彭原郡)으로 고쳤으며, 또 안북부(安北府)를 두었다가 영주 안북부(寧州安北府)로 고쳤다. 공민왕이 안주 만호부를 두었다가 뒤에 목(牧)으로 올렸다. ○ 안릉(安陵)ㆍ밀성(密城)이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36리이다. ○ 옛날의 맹주(孟州) 맹산(孟山)이 본주의 속향일 때의 관아이다. 이다.
○ 성천(成川) : 비류왕 송양(松讓)의 옛 수도인데 고구려의 동명왕이 다물도(多勿都)를 두었다. 송양을 다물후로 봉하였다. 고려 태조가 여기에 강덕진(剛德鎭)을 두고 뒤에 성천군으로 고쳤으며 태종 을미년에 성천부로 고쳤다. ○ 졸본 부여(卒本扶餘)라고도 한다. ○ 25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6리이다.
○ 숙천(肅川) : 고려 때의 평원군(平原郡)인데 태조가 진국성(鎭國城)을 이곳으로 옮겨 쌓고 통덕진(通德鎭)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뒤에 숙주(肅州)라고 일컫다가 군으로 고쳤다. 태종 병신년에 숙천부로 올렸다. ○ 평원(平原)이라고도 한다. ○ 14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76리이다.
○ 중화(中和) : 고구려 때의 가화압(加火押)인데 신라 때 당악현(唐岳縣)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서경의 속촌이 되었다가 뒤에 중화현으로 하였다. 묘청의 반란이 있은 뒤에 경기의 4도(四道)를 나누어 6현으로 하였다. 뒤에 군으로 올렸다가 선조 임진년에 부로 올렸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16리이다. ○ 송현(松峴)은 폐현이다. ○ 고구려의 부사파의현(夫斯波衣縣)이다.
○ 자산(慈山) : 고려 때의 문성군(文城郡)인데 태안주(太安州)로 고쳤다가 자주(慈州)로 고쳤으며 다시 군으로 하였다. 태종 계사년에 자산으로 고쳤다. 연산군 을축년에 폐읍하였다가 중종 초년에 다시 그전대로 두었다. 숙종 계미년(1703, 숙종 29)에 부로 올렸다. ○ 자모(慈母)라고도 한다. ○ 10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56리이다.
○ 삼화(三和) : 고려 때 경기를 나누어 삼화현을 만들었다. 금당(金堂)ㆍ호산(呼山)ㆍ칠정(漆井)의 세 부곡을 합한 것이다. 숙종 병인년(1686, 숙종 12)에 부로 올렸다. ○ 11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36리이다.
○ 상원(祥原) : 고구려 때의 식달현(息達縣)인데 신라 때에는 토산(土山)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황주(黃州)에 예속시켰다가 상원군이라 고쳤고 뒤에 본도에 예속시켰다. ○ 금달(今達)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36리이다.
○ 함종(咸從) : 고려 때의 아선성(牙善城)인데 뒤에 함종현으로 고쳤다. 경종 신축년에 부로 올렸다. ○ 아산이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36리이다.
○ 덕천(德川) : 고려 때의 요원군(遼原郡)인데 장덕진(長德鎭)이라고도 한다. 덕주(德州)로 고쳤다가 태종 계사년에 덕천으로 고쳤다. 얼마 안되어 맹산과 합하여 덕맹현(德孟縣)이라고 일컫다가 얼마 후에 이전대로 하였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46리이다. ○ 옛 무산현(撫山縣) 옛날에는 영변에 예속되었으나 세조 때에 덕천에 예속되었다. 이 있다.
○ 개천(价川) : 고려 때의 안수진(安水鎭)인데 연주(連州)로 고쳤다가 조양진(朝陽鎭)으로 고치고, 다시 익주(翼州)로 고쳤으며 또 개주(价州)로 고쳤다. 태종 계사년에 개천군으로 고쳤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91리이다.
○ 순천(順川) : 고려 때의 정융군(靜戎郡)인데 순주(順州)로 고쳤다. 뒤에 덕주(德州)에 합하였다가 다시 나누어 군으로 하였고 태종 계사년(1413, 태종 13)에 순천군으로 고쳤다. ○ 15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21리이다.
○ 용강(龍岡) : 옛날의 황국(黃國)인데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고려 때에는 황룡성(黃龍城)이라고 일컬었고 군악(軍岳)이라고도 한다. 뒤에 용강현으로 고쳤다. ○ 오산(烏山)이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56리이다.
○ 영유(永柔) : 고려 때의 정수현(定水縣)인데 뒤에 영청(永淸)으로 고쳐 용강(龍岡)에 예속시켰으며, 또 현을 폐지하고 안인(安仁)의 진장(鎭將)이 겸임하게 하였다. 태조 계유년에 안인진을 안주(安州)에 이속시키고 통해현(通海縣)과 영원(寧遠)ㆍ유원(柔遠) 두 진(鎭)과 합쳐서 영녕현이라고 일컬었다. 세종 계묘년(1423, 세종 5)에 영유로 고쳤다. ○ 청계(淸溪)라고도 한다. ○ 14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36리이다. ○ 유원진(柔遠鎭)이 있고 고려 때의 평로진(平虜鎭)이다. ○ 옛 영원이 있다. 세조가 영원은 요해지라고 하여 별도로 군을 두었다. 통해(通海)는 폐현이다.
○ 증산(甑山) : 본래 강서현(江西縣)의 증산향인데 태조 갑술년에 분할하여 현으로 하였다. ○ 서하(西河)라고도 한다. ○ 선조 을미년에 폐읍하였다가 정미년에 다시 두었다. ○ 5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56리이다.
○ 삼등(三登) : 고려 때 서경기(西京畿)에서 분할한 성주(成州)의 삼부곡(三部曲) 신성(新城)ㆍ나평(蘿坪)ㆍ구아(狗牙) 을 합하여 삼등현(三登縣)을 만들었다. 6현(縣) 중의 하나이다. 세종 때 강동현(江東縣)과 합하였다가 세조 을해년에 폐지하였다. ○ 능성(能城)이라고도 하고 양양(陽壤)이라고도 한다. ○ 3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56리이다.
○ 순안(順安) : 고려 때 서경기(西京畿)에서 분할하여 순화현(順和縣)을 만들었다. 6현 중의 하나이다. 태조 병자년에 관아를 평양의 안정참(安定站)으로 옮겼다. ○ 평교(平郊)라고도 한다. ○ 10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60리이다.
○ 강서(江西) : 고려 때 서경기(西京畿)에서 분할하여 강서현을 만들었다. 6현 중의 하나이다. 태조 갑술년에 증산향(甑山鄕)을 나누어 따로 증산현을 만들었다. ○ 무학(舞鶴)이라고도 한다. ○ 11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16리이다.
○ 양덕(陽德) : 본래 고려 때의 양암(陽巖)ㆍ수덕(樹德) 두 진인데, 태조 병자년에 합하여 양덕현을 만들었다. ○ 동양(東陽)이라고도 한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96리이다.
○ 맹산(孟山) : 고려 때의 철옹현(鐵甕縣)인데 뒤에 맹주(孟州) 맹주(猛州)라고도 쓴다. 라고 일컬었다. 뒤에 은주(殷州)에 합하였다가 또 나누어 현을 두었다. 태종 신사년에 안주와 합하였다가 갑오년에 다시 예전대로 하였다. 또 맹주ㆍ덕주(德州)와 합하여 덕맹(德孟)이라고 일컫다가 다음해에 분할하여 맹산현으로 하였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46리이다.
○ 강동(江東) : 고려 때 서경기(西京畿)에서 분리하여 강동현을 만들었다. 6현 중의 하나이다. 뒤에 성주에 예속되었다가 다시 현을 두었다. 세종 을묘년에 폐읍하고 삼등에 예속시켰으며, 삼등현의 관아를 이 고을에 옮겼다. 성종 임인년에 다시 현을 두었다. ○ 송양(松壤)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56리이다.
○ 은산(殷山) : 고려 때의 흥덕군(興德郡)인데 동창(同昌)이라고도 한다. 뒤에 은주(殷州)라고 일컬었다. 태종 갑오년에 폐읍하고 자산(慈山)에 예속시켰다가 을미년에 분할하여 은산현으로 하였다. 인조 계미년(1643, 인조 21)에 부로 올렸다가 얼마 후에 도로 낮추었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86리이다.
○ 북도(北道) 의주 : 성이 있다. 고려 때의 용만현(龍灣縣)인데 화의(和義)라고도 한다. 거란이 압록강의 동쪽 언덕에 성을 쌓고 보주(保州)라고 일컬었으며, 또 궁구문(弓口門)을 설치하고 포주(抱州)라고 일컬었다. 파주(把州)라고도 한다. 그곳의 요(遼) 나라 사람이 우리나라에 귀화하였으므로 의주(義州)라고 고치고, 남쪽 지방 사람들을 데려다가 이곳을 채웠다. 다시 압록강을 경계로 삼았다. 뒤에 낮추어 함신(咸新)이라고 일컫다가 얼마 후에 복구하고 또 목(牧)으로 올렸다. 또 만호부를 두고 좌정(左精)ㆍ우정(右精)ㆍ충신(忠信)ㆍ의용(義勇)의 4군(軍)을 두었다. 선조 계사년에 부윤으로 올렸다. 태종 임오년에 정주(靜州)와 함원진(咸遠鎭)을 예속시켰다. ○ 송산(松山)이라고도 한다. ○ 21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96리이다.
옛 정주(靜州) : 본래 고려의 송산현(松山縣)인데 덕종(德宗) 때 성을 쌓고 정주진이라고 하였다. 태종 때 의주(義州)에 예속시켰다. 세종 때에 또 석성(石城)을 쌓았다.
옛 인주 : 본래 고려의 영제현(靈蹄縣)인데 현종 때 인주(麟州)라고 일컬었고 토성을 쌓았다. 세상에서는 오여(烏餘)라고 불렀다. 뒤에 함인군(含仁郡)이라 낮추어 불렀고, 본조에서는 의주에 예속시켰다가 세종 때 인산진을 두었다.
옛 영주(靈州) : 본래, 고려 때의 흥화진(興化鎭)인데 현종 때에 영주로 올렸다.
옛 정령현(定寧縣) : 태종 5년에 현령을 두었다. 세종 때 방산(方山)으로 옮기고 군으로 올렸다. 세조 원년에 옛 읍으로 돌아왔으나 2년에 폐읍하고 의주에 예속시켰다.
○ 영변(寧邊) : 성이 있다. 영주(迎州)는 고려 때의 밀운군(密雲郡)인데 연주(延州)로 고쳤다가 연산부(延山府)로 올렸다. 무주(撫州)는 고려 때의 운남군(雲南郡)인데 또는 고청산(古靑山)이라고도 한다. 뒤에 현을 두었다. 태종 계사년에 무산현(撫山縣)으로 고쳤다. 세종 기유년에 영산(迎山)과 무산(撫山)을 합하여 영변부라 하고 약산성(藥山城)에 읍(邑)을 두었다. 단종 때 병영을 설치하였다. 세조 때 옛 연주의 땅을 분할하여 운산(雲山)에 예속시켰다. ○ 안삭고청산(安朔古靑山)이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96리이다. ○ 옛 위주(渭州)가 있으며 낙릉군(樂陵郡)인데 옛날에는 덕성(德城)이라고도 하였다. 고려 때 위주로 고쳤으며, 위천성이 있다. 행인국(荇人國)이 있다. 태백산의 동쪽에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 그 땅을 자세히 알 수 없다.
○ 정주(定州) : 성이 있다. 고려 때의 구천군(龜川郡)인데 정원부(定遠府)로 올리고 또 정주목으로 고쳤다. 세조 을해년에 분할하여 옛 구주(龜州)의 땅에 구성군(龜城郡)을 두고 정주의 관아를 수주(隨州)로 옮기고 마침내 수천군(隨川郡)을 폐하였다. ○ 조천(鳥川)이라고도 한다. ○ 19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56리이다. ○ 수천(隨川)은 폐현이다. 고려 때의 수주이니 곽주(郭州)를 겸하게 하였다가 뒤에 다시 분할하여 곽주를 두었다. 태종 계사년에 수천군으로 고쳤고, 세조 때 폐읍하고 정주의 관아를 이곳으로 옮겨 왔다.
○ 강계(江界) : 성이 있다. 옛날에는 독로강(禿魯江)이라고 일컬었다. 고려 때에는 만호를 두고 강계로 고쳤다. 진변(鎭邊)ㆍ진성(鎭城)ㆍ진안(鎭安)ㆍ진녕(鎭寧)의 네 군을 만들었다. 태종 신사년에 입석(立石)ㆍ등이언(等伊彦)의 두 땅을 합하여 석주(石州)라고 일컫고 부로 고쳤다. 세종 때 도절제사의 진영을 두었으나 조금 후에 폐지하였다. ○ 청원(淸源)이라고도 한다. ○ 11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3백 46리이다. ○ 여연(閭延)은 폐부이며 본래 함길도 갑산부(甲山府)의 여연촌인데, 태종 병신년에 부(府)와의 거리가 너무 멀다고 하여 소훈두(小薰豆)의 서쪽을 떼내어 여연군을 만들어 본도에 예속시켰다. 세종 때 부(府)로 올렸으며, 세조 을해년에는 그 땅을 비워 버리고 그곳의 백성들을 구성으로 옮겼다. 무창(茂昌)은 폐군이고, 본래 여연부의 상무로보(上無路堡)인데 세종 병진년에 만호를 두었다. 뒤에 또 무창현을 두었다가 군으로 올렸다. 세조 때 그 땅을 비워 버렸다. 우예(虞芮)도 폐군이며 본래는 여연보(閭延堡)이니 처음에 만호(萬戶)를 두었다가 세종 때 우예군을 두었다. 세조 때 그 땅을 비워 버리고 그곳의 백성을 부로 옮겼다. 자성(慈城)도 폐군이다. 본래 여연 때, 번강(番江)의 자작리(慈作里)였다. 세종 때 자성군을 두었으며 세조 때 그 땅을 비워버렸다.
○ 창성(昌城) : 성이 있다. 창주(昌州)는 고려 때의 장정현(長靜縣)인데 창주로 고쳤으며, 이성부(泥城府)에는 만호를 설치하였다. 진평(鎭平)ㆍ진강(鎭康)ㆍ진정(鎭靜)ㆍ진원(鎭遠)의 4군(四軍)을 만들었다. 태종 임오년에 이성을 창주에 합하여 창성군으로 고쳤다. 계사년에 현으로 고쳤다가 세종 때 부(府)로 올렸다. 7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백 6리이다.
○ 삭주(朔州) : 성이 있다. 고려 때의 영새현(寧塞縣)인데 삭주로 고쳤다가 부로 올렸다. 태조 갑술년에 땅의 경계가 서로 어긋난다 하여 옛 구주와 그 부근의 12촌(村)을 분리하여 여기에 합쳤다. 군으로 낮추었다가 태종 계사년에 부로 올렸다. 세종 기미년에 군으로 낮추었다가 경신년에 다시 부로 올렸다. 세조 병술년에는 고을의 관아를 소삭주(小朔州)로 옮겼다. ○ 3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36리이다.
○ 구성(龜城) : 성이 있다. 고려 때의 만년군(萬年郡)이며 구주(龜州)로 고쳤다. 정원부로 올렸다가 또 정주목으로 고쳤다. 뒤에 주의 관아를 마산(馬山)의 남쪽으로 옮겼다. 세조 을해년에 옛 구주를 떼내어 구성군을 만들고 여연과 무창을 없애고, 그곳의 백성들을 구성군으로 옮겨 왔다. 병술년에 부로 올렸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96리이다. ○ 안의진(安義鎭)이 있다. 옛날에는 수주에 예속시켰다가 세조 때 구성에 예속시켰다.
○ 선천(宣川) : 성이 있다. 본래 안화군(安化郡)인데 고려 초기에 통주(通州)로 고쳤다가 선주(宣州)로 고쳤다. 태종 계사년에 선천군으로 고쳤으며, 명종 계해년에 부로 올렸다가 조금 후에 도로 낮추었으나 인조 계해년에 다시 올렸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9백 23리이다. ○ 동림성(東林城)이 있다. 옛 선주성(宣州城)이다.
○ 철산(鐵山) : 고려 때의 장녕현(長寧縣)인데 동산(銅山)이라고도 한다. 철주(鐵州)로 고쳤다가 태조 임신년에 지주(知州)라 하고 영삭 만호(寧朔 萬戶)를 겸하게 하였다. 태종 계사년에 철산으로 고쳤다. 을미년에 만호를 폐지하고 그대로 군으로 하였다. 광해군 임술년(1622, 광해군 14)에 부로 올렸다. ○ 철천(鐵川)이라고도 한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9백 76리이다. ○ 옛 영삭성(寧朔城)이 있다. 옛날에는 만호영(萬戶營)이 있었다.
○ 용천(龍川) : 성이 있다. 고려 때의 안흥군(安興郡)인데 용천으로 고쳤다가 용만부로 고쳤다. 태종 계사년에 용천으로 고쳤고 광해군 경신년에 부로 올렸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6리이다. ○ 유등정(柳等井)은 폐현이다.
○ 초산(楚山) : 성이 있다. 본래 여진이 살던 두목리(豆木里)이다. 태종 임오년에 산양회(山羊會) 등의 땅을 합하여 이주(理州)라고 하였다가 계사년에 이산(理山)으로 고쳤다. 세종 때 관아를 앙상리(央上里)로 옮겼다. 경종 갑진년에 군을 부로 올렸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백 96리이다.
○ 가산(嘉山) : 고려 때의 신도군(信都郡)인데 고덕현(古德縣)이라고도 한다. 가주(嘉州)로 올렸다가 무령(撫寧)이라고 낮추어 불렀다. 태종 계사년에 가산군으로 고쳤다. ○ 고덕진(古德鎭)이라고도 한다. ○ 5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96리이다.
○ 곽산(郭山) : 고려 때의 장리현(長利縣)인데 곽주(郭州)로 고쳤다가 정양(定襄)이라고 낮추어 불렀었다. 태종 계사년에 곽산군으로 고쳤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86리이다.
○ 희천(熙川) : 고려 때의 청새진(淸塞鎭)인데 위주(威州)로 올렸다가 희주(熙州)로 고치고 개주(价州)에서 겸하여 관리하게 하였는데, 태조 병자년에 분할하고 군을 두었다. 태종 계사년에 희천으로 고쳤다. ○ 위성(威城)이라고도 한다. 8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1리이다. ○ 봉단성(鳳丹城)이 있다.
○ 벽동(碧潼) : 성이 있다. 여진이 살던 임토(林土)ㆍ벽단(碧團)의 땅인데 공민왕이 이성만호(泥城萬戶) 김진(金進) 등을 보내어 쳐서 쫓아버리고 임토를 음동(陰潼)이라고 고친 뒤에 벽단을 여기에 예속시켰다. 남쪽 지방의 사람들을 뽑아 이곳을 채웠다. 태종 계미년에 벽동군(碧潼郡)으로 고쳤다. ○ 10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백 21리이다.
○ 운산(雲山) : 고려 때의 운중군인데 고원화진(古遠化鎭)이라고도 한다. 위화진(威化鎭)으로 고쳤다가 운주(雲州)로 개칭하고 태종 계사년에 운산으로 고쳤다. 운양(雲陽)이라고도 한다. 세조 기묘년에 폐읍하고 영변부에 예속시켰다가 임오년에 복구하였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56리이다.
○ 박천(博川) :고려 때의 박릉군(博陵郡)인데 고덕창(古德昌)이라고도 한다. 박주(博州)로 고쳤다가 태종 계사년(1413, 태종 13)에 박천으로 고쳤다. 세조 기묘년에 폐읍하고 영변부에 예속시켰다가 갑신년에 예전대로 하였다. ○ 5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76리이다.
○ 위원(渭原) : 본래 초산군(楚山郡)의 도을한보(都乙漢堡)인데, 세종 계해년(1443 세종 25)에 사방이 모두 멀리 떨어진 곳이어서,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을 때에 구원하기 어렵다고 하여, 강계ㆍ초산(楚山)의 땅을 분할하여 위원군을 만들었다. 세조 경진년에 폐읍하고 이산(理山)에 예속시켰다가 계미년에 이전대로 하였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2백 36리이다. ○ 봉화대(烽火臺) 보루가 있다.
○ 영원(寧遠) : 고려 때의 영원진인데 태조 병자년에 영청현(永淸縣)과 합하여 영령(永寧)이라고 일컫다가 세조 병술년에 옛 영원 땅에 따로 군을 두었다. ○ 요원(遼原)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91리이다.
○ 태천(泰川) : 고려 때의 광화현(光化縣)인데 영삭(寧朔)ㆍ연삭(連朔)이라고도 하였는데 태주(泰州)라고 고쳤다. 공민왕 때 무주(撫州)ㆍ위주(渭州) 두 주를 이 군에 예속시켰고 뒤에 다시 분할하여 두 주를 두었다. 태종 계사년(1413, 태종 13)에 태천군으로 고쳤고, 성종 임인년에 현으로 낮추었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36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