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으로 쓰는 산문 외 1편
강 주
어떤 죽음을 기술하는 장면을 발췌한 종이였다. 장밋빛으로 돌돌 말려있는 꾸러미를 풀었다. 꽃밭이 펼쳐지는 것도 같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인 것도 같았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은 빛이 쏟아졌는데 여러 겹의 감정은
순식간에 보였다가 안보였다
누군가 풀숲에 던진 돌멩이로 말했다
‘낮이다. 밤이다. 낮이다. 밤이다. 낮이다. 밤.....’ 마지막 잎사귀가 남을 때까지
떼어내며
덧붙인다. 자세히 읽어보려고 얼굴을 가까이 대고 얼굴은 빨갛게 물들고 얼굴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지만
얼굴은 잊을 수 없는 문장이고
얼굴과 섞여서 장밋빛은 먼 타국의 덧칠한 거리 같다. 낯설고도
흥미로운 장소. 그곳은 꽃병을 닮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꽂아두기 좋고 시들어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슬퍼서
봉오리가 활짝 피지 않는다
무더위와 무서워를 혼합한 무엇은 무엇이어서 찢어졌고 다만 그 무엇을 짐작할 수밖에 없는 여름이라고만 이해했다
깊고 푸른 물방울처럼
콧수염을 가진 사람들이 지나갔지만 콧수염은 금세 사라질 거야. 우리의 기억 속에서 콧수염은 홀씨로 날아가거나 닿거나 자랄 테니까. 어느 날의 폐허는 단 한 사람이 살아서 걸어 나오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단 한 사람은 외롭고 쓸쓸하지. 고드름처럼. 정월엔 해돋이를 보러 갈 거야. 윤슬로 적은 이름은 출렁이겠지. 동해처럼. 깊고 푸른 물방울로 채워진 마음으로 동그랗게 흘러, 흘러.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하는 별들. 별을 노래하자. 기억났어. 한 사람이 폐허 속에서 한 사람을 끌어올리지. 껴안지. 눈동자 속에서 빛나는 우리, 별자리를 궁리하지. 웅크린 뒷모습으로도 노래하는 별이 되자. 저 멀리서 별을 보는 네가 콧수염을 쓰다듬는 것처럼. 길게 숨을 내쉴 때 깊고도 푸른 물방울이 솟아오르는 것처럼. 아득하지만. 환하게 사방이 밝아올 때 공터엔 쓰레기와 낡은 가구, 폐차들이 즐비하지. 어젯밤 우리가 상상했던 공터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지. 반짝일 리 없는 이것들이 어둠 속에서 우릴 자극하고 반짝이고 속삭였던 건 노래였을까. 꿈이었을까. 콧수염은 장난스럽지. 장미 섬과 지하철을 내려가는 계단과 조그만 삽을 꽂아 놓은 화분 속 흙처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한없이 깊고 푸른 물방울처럼. 찢어진 마지막 장 만화처럼. 두 장의 사진을 맞대면 황홀하지. 비밀 같은 별자리가 펼쳐지니까. 이마를 흘러, 목덜미를 흘러, 한없이, 한없이
강 주
2016년 정남진신인시문학상 수상. 시산맥 등단.
2019년 대산창작기금 수혜. 2020년 동주문학상 수상.
시집 흰 개 옮겨 적기 99가지 기분과 나머지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