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평소 형제같이 친교를 교류하며 지내는 나의 고교 후배인 이승율장로가 보내준 메일인데 읽어보니,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한 인간사 변곡점에서 만남의 중요성이 그 얼마나 크며 귀중한지, 다시 한번 뒤돌아보며 이 글을 소개합니다.
그래서 이 글을 읽고 답글을 주고받은 글도 함께 소개합니다
---사랑하는 후배장로님! (내가 답글로 보낸 인사말)--- 아래의 글, 인생의 긴 삶가운데 맞게된 중요한 변곡점에 만남의 인연이 얼마나 주요한 가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캐 하는 인생고백입니다. 예수님과 김진경 박사님과의 만남. 사람이 한평생 살아가면서 善한 만남 惡한 만남, 福된 만남 禍된 만남, 吉한 만남 凶한 만남 등이 있는데, 장로님은 善, 福, 吉한 만남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성공적인 생애를 누릴수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은 생애도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에게 베풀고, 자신을 낮추는 신실한 믿음과 뜨거운 사랑의 자세로 살아가시길 격려하며 기도하겠습니다. 화이팅! 요즘, 코로나 확산불안과 무더위, 앞이 보이지 않는 우울한 시국. 우리를 덮친 이 삶의 三重苦가운데 안전하게 건강히 잘 지내시고 하시는 사업과 맡으신 업무,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히 임하길 기원하면서 좋아지는 시절에 茶한잔 하며 情談을 나누는 행복한 기회가 속히 오길 바랍니다. ---답글(답글에 대한 인사)---
존경하는 선배 장로님 경북고 선후배 가운데 신앙동지로 교류하는 예가 별로 없는데 선배님께서 늘 이렇게 격려해주시고 응원해 주시니 너무나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주신 말씀 마음에 잘 새겨서 남은 생애에도 신실한 삶 살도록 애쓰겠습니다. 코로나가 또 발동을 하는가 봅니다 더욱 건강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이승율 장로 배상 *********************************************
<글로벌 미션의 한 모형> 이승율 동북아공동체문화재단 이사장 #1. 1990년(나이 마흔셋 되던 해)은 내 인생 후반전에 대전환을 일으킨 특별한 해이다. 이전에 만나 보지 못했던 두 분과의 만남을 통해 지금껏 갖고 있던 습관적 행태와 사고를 뛰어넘는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됐다. 한분은 예수님이고 다른 한 분은 중국 연변과학기술대 설립을 준비하고 있던 김진경 박사이다.
먼저 예수님을 만난 얘기부터 해보자. 내가 전도를 받은건 고등학교 입학 직전에 만났던 집사람(박재숙)과 그의 어머니로부터다. 그로부터 10년 후 결혼하고, 결혼 후 15년 만에 교회를 가게 됐으니 나도 어지간히 전도하기 어려운 질긴 놈이었다. 그런 내가 가족들의 손에 이끌려 오산리금식기도원에 따라나선 것이 1990년 1월1일 새벽이었다.
2박 3일간 순복음교회 실업인선교연합회가 주관하는 신년축복성회에 참석한 것이 모든 변화의 시작이 되었다. 기도원 입구에 들어가기 전, 그동안 25년 넘게 피워왔던 담배를, 다른 사람들은 모두 금식하고 있는데 나만 담배를 피우는게 미안해서 그냥 생각없이 논두렁에 집어 던진 것이 그걸로 끝이었다. 그 후 지금까지 한 번도 담배를 만져 보지 않았고 또 피우고 싶은 생각도 전혀 나지 않았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 첫날부터 뭔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진 셈이다.
성회 둘째 날 오후였다. 프로그램 진행 중에 가끔 쉬는 시간이 있는데, 그때마다 장로님들이 오셔서 물도 갖다 주고 친절하게 도움말을 해 주시곤 했다. 그때 예루살렘 성지 순례 다녀오셨다는 분이 계셔서 그분께 물어보았다. "지금 우리가 집회하고 있는 성전 이름이 '실로암'이라고 적혀 있던데 이 실로암의 뜻이 뭡니까? 무슨 암자 이름도 아니고..."
그 장로님께서 한참 껄껄 웃으시더니 성경 요한복음 9장을 펴 보이며, 예수님이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자의 눈에 흙을 침으로 발라 주시고는 "실로암 못에 가서 ?으라.' 하신 대목을 설명해 주셨다. 그 설명을 듣고 있는데 갑자기 (감고 있는 내 눈앞) 망막에 험한 언덕 비탈길을 기어서 내려가는 눈먼 소경의 모습이 파노라마 영상처럼 떠올랐다.
실로암 연못은 산기슭 언덕 아래 골짜기에 있었다. 그곳을 향해 얼굴과 온몸에 피를 흘리며 고통스럽게 기어 내려가고 있는 눈먼 소경의 모습이 마치 나의 젊은 날의 모습으로 연상되어왔다. 좌절감과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갈 바를 모른 채 방황하며 나날을 보냈던 그 잃어버린 십 년 세월의 처절한 고통이 연상되었다. 그러다가 연이어 그 눈먼 소경이 실로암에서 눈을 씻고, 눈을 떠서 언덕 위에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런 경우 남들은 어떻게 했을지 모르지만, 날 때부터 앞을 못보다가 기적적으로 눈을 뜬 사람이 (예수님을 향해) 그냥 점잖게 목례만 하고 갔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함께, 나 같으면 언덕 위 푸른 창공(벽공)을 배경으로 우뚝 서 계시는 예수님을 향해 "예수님" 하며 울며불며 그 비탈길을 도로 뛰어 올라갔을 것만 같은 심정이 들었다. 그러자 마치 화산이 폭발하듯 내 모든 심신의 껍질을 터뜨리며 뜨거운 기운이 속에서 부터 솟구쳐 올랐다. 동시에 복부 저 깊은 곳으로부터 용암이 터져 나오듯 대성통곡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 얼마나 울었던가! 내 평생 그렇게 크게 울어본 적이 없었던 울음을 꺼이꺼이 울면서, 그때 비로소 마음속으로 아, 이게 불교 철학을 전공하면서까지 체득해 보려고 했던 그 '해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편 이것이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부활의 기쁨'이며, 자기 목숨을 악마에게 팔면서까지 진리를 구해 보려고 나섰다가 결국 좌절과 절망에 빠져 버렸던 파우스트가 구원의 여인 크레첸의 손에 이끌려 천상으로 올라가며 외친 "저 밑바닥에서 부터 벽공으로"라는 명제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가지 의미가 한꺼번에 융합적으로 깨우쳐 지면서 영적인 창이 확 열리는 듯한 신비감을 느꼈다. 한마디로, 도통한 사람이 된양 갑짜기 생각하고 판단하는 모든 의식의 방향과 의미체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사는것 처럼 느껴졌다.
그 후, 그다음 주일부터 곧바로 교회(여의도 순복음교회)에 나간 이후 지금까지 부득이한 경우(장거리 국제항공 탑승 중)를 제외하곤 한 번도 예배를 빠뜨린 적이 없다. 나를 이렇게 이끈 힘은 그 '부활의 기쁨'과 함께 샘물처럼 솟아난 생명수 - '성령의 힘(Divine Power)'이 그 비결이었다고 나는 감히 고백한다. 그리고 그걸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게 믿고 지금까지 한마음으로, 한 믿음으로 살아온게 내 인생의 후반전이다.
#2. 1990년에 있었던 변화의 두 번째 얘기를 해보자. 내가 교회를 다닌 후 얼마안되어 순복음실업인선교연합회 식구들 여섯 가족과 함께 부부동반으로 중국여행을 다녀오게 되었다. 한중 간 국교 수교 이전이지만 관광 목적의 여행은 허용되던 때다. 6월 중순에 5박6일 일정으로 북경을 거쳐 심양, 연길,백두산을 다녀 오는 코스였다. 당시 나는 종합건설회사를 운영하면서 골프장 건설사업에 주력할 때다. 마침 중국에 간 김에 가이드에게 물어봤더니 그 넓은 중국 천지에 골프장이 딱 두 곳(북경, 상해)에만 있다고 했다. 그것도 일본사람들이 설계, 시공, 운영하는 곳이라고 했다.
그때 섬광처럼 지나가는 생각이 '이제 곧 한중수교가 된다고 하는데, 내가 빨리 와서 침 발라 놔야 되겠구나'하는 생각이었다. 그때부터 매월 두차례씩 산동반도 위하이, 옌타이, 칭다오를 방문하면서 골프장 만들기에 적합한 부지를 찾다가 최종 선택한 곳이 칭다오 '석노인관광지구' 내 18홀 골프장으로 허가난 곳이었다. 그후 (혼자 힘으로 하기엔 리스크가 크다고 판단하여) 대만 팀과 함께 골프장 부지를 인수하려고 추진하던 중 농민들의 토지보상문제가 하도 어려워, 할 수 없이 사람을 넣어 당시 국가 주석이었던 양상쿤 주석의 아들 양샤오밍이란 분을 만나 로비를 하러 간 자리에서 우연히 만났던 분이 바로 앞서 언급한, 연변과기대 설립을 준비하고 계시던 김진경 박사이셨다.
약속이 공교롭게 더블로 잡혀 있었다, 나보다 훨씬 연세가 많아 보여서 그분더러 먼저 말씀을 하시라 하고 나는 그 옆에 앉아 경청했다. 기실 나는 골프장 사업을 해서 돈 벌려고 중국에 왔는데, 그때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나는 한국 출신이고 유럽으로 유학을 가서 학위를 한 다음 미국에 건너가 20년이 넘도록 대학 교수와 무역을 해서 제법 성공한 시람이다. 그리고 나는 크리스찬이다. 나는 다른 어떤 반대 급부를 얻어려고 여기에 오지 않았다. 다만 최근 중국이 개혁개방으로 문호를 열고 있어서, 미국에 있는 재산을 팔아와서 길림성 연길에 조그만 기술전문대학을 세워 중국 사회에 봉사하려고 왔다. 장기적으로 중국의 과학기술 발전과 조선족 후예들을 위해 힘 닿는대로 교육사업을 해 보고 싶어서 왔으니, 당신 아버지가 권력자이니, 부친께 잘 부탁하여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도와 주시기 바란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게 아닌가?
나는 그때 마음속으로 크게 반성이 되면서 깊은 감동을 느꼈다. 명색이 나도 진리를 찾아보겠다고 불교 철학까지 공부했던 철학도인데, 그런데 나는 지금 한낱 속물이 되어있고, 이분은 자신의 소유물까지 팔아서 이웃을 위해 대학을 세우겠다고 먼 길을 찾아 왔으니 이런 분이야말로 인생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깨닫고 사는 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나도 이분과 같은 꿈과 비전을 갖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치밀었다.
그 후 2주 후 서울에서 김 총장님을 대학건립후원회 사무실에서 다시 만났을 때, 내가 먼저 "제가 뭐 도울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분이 "당신 같은 건설업자가 조금만 도와주면 큰 도움이 되겠소"라고 하셨을 때 선뜻 동의했던 것은, 나도 무엇인가 새롭고 가치 있는 좋은 일을 해보고 싶다는 선한 충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금 돕는다고 시작했던 일이 벌써 30년을 동역하는 관계로 발전해 왔으니 김진경 총장과의 인연도 참으로 기이한 '운명적 만남'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돌이켜 보면 그때 북경에서 우연히('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고 말하는 게 더 옳을 것 같다') 만났지만 그때 느낀 그 영적 감동의 힘이 지금껏 나를 이끌어 온 또 하나의 보이지 않은 큰 위력이 되고 있다. 이것이 내가 기독 인생으로 거듭나면서 깨달은 두 번째 '만남의 축복'이었다. 1990년 한해가 지나기 전에 일어났던 두 분과의 '만남', 즉 예수님과 김진경 총장과의 만남을 통해 나는 그 후 내 인생 후반전을 헤쳐나가면서 참으로 기이한 대전환의 역사를 맛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크신 은혜요, 선물이었다.
#3. 순복음교회 실업인선교연합회 일원으로서 조용기 목사님을 모시고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며 선교 활동에 참여했던 일과 연변과기대 캠퍼스 건설을 지원하기 위해 연길을 오가면서 대학 설립에 동참했던 일을 회상해 보면 나로선 이전에 상상도 할수 없었던 기이한 일로 가득찬다.
먼저, 교회에 나오자마자 조용기 목사님을 수행하여 세계 방방곡곡을 안 다녀 본데가 없다고 할 정도로 숱하게 다녔다. 남미, 아프리카, 유럽, 이스라엘, 인도, 태국, 대만, 러시아. 일본 등 조 목사님을 모시고 다닌 그 해외 성회 현장에서 일어난 영적 부흥의 물결은 나의 초신자 신앙에 기름을 갖다 부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선교에 대한 비전과 열정을 고양시키는데 결정적 힘을 더해 주었다. 세계를 이해하고 각 나라와 민족의 현황을 아는 식견과 안목을 틔워 주었고, 나아가 한국 기독교가 세계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선교전략의 대안을 일깨워 주기까지 했다. 그것은 한마디로 헐벗은 영혼을 위한 '복음전도'와 다음 세대 육성을 위한 '교육선교'가 그 솔루션이라고 믿어지게 되었다. 이 두 가지, 복음전도와 교육선교가 하나의 현장을 통하여 전개된 곳이 (나의 경우에) 바로 연변과학기술대라고 할 수 있다.
연변과기대는 한국 교회의 헌금과 국내 기독실업인 및 해외(특히 미국)교포사회의 후원으로 설립, 운영되어 왔다. 1992년 9월에 개교하여 지금까지 28주년에 이르는 동안 만명 이상의 졸업생들을 배출했으며, 중외합작 국제대학(캠퍼스 랭귀지는 영어,중국어,한국어 3개국 언어를 겸비토록 했다)으로서의 면모와 기량을 키우기 위해 외국인 교수 유치와 졸업생들의 해외 유학 및 재학생들의 교환학습(3 +1 제도)을 장려하는 정책을 펴 세계 명문대학과의 관계증진에 주력하는 한편, 영국식 튜터시스템(Tutor system)과 더불어 중국 내에서는 처음으로 무감독 시험 제도를 실시하는 등 인성(특히 정직성) 교육에 치중했으며 또한 이웃과 지역사회를 돌보는 소그룹 자원봉사활동에도 적극 참여토록 계도했다.
결과적으로 중국 100대 중점대학의 하나로 선정되었으며, 졸업생들은 (중국에 진출한 외국 대기업을 포함하여) 학생 본인이 직장을 골라서 갈 정도로, 거의 100% 취업을 자랑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연변과기대가 그렇게까지 발전할 수 있었던 근간에는 국제대학으로서의 훈육방침위에 기독교 신앙과 선교적 열정을 갖춘 한인 및 외국인 교수들이 자비량으로 봉사하며 헌신한 '순수한 복음적 사랑‘(이를 김진경 총장은 '사랑주의'라고 표현한다)의 영향이 절대적 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연변과학기술대가 있는 연길시 북산가 언덕을 올라갈 때마다 구약 열왕기하 2장에 나오는 엘리사 선지자의 행적을 되새기곤 한다. 엘리사가 여리고 성에 갔을 때 그 성읍 사람들이 '성읍의 위치는 좋으나 물이 나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진다.'고 진언했다. 이 말을 듣고 엘리사가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오라고 해서 갖고 오자, 이를 들고 '물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에 던지며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하셨다고 선포했다. 그러자 그 후 엘리사의 말대로 물이 고쳐져서 토산이 익고 생명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땅으로 변화되었다는 얘기다.
연변과기대를 생각할때 마다 이 '엘리사의 기적'을 한번도 잊어본 적이 없다. 다시 말해 이 '엘리사의 기적'은, 곧 조선족 공동묘지의 터위에 세운 연변과기대를 상징하고 특화하는 예시적 사건이라고 믿어졌다. 즉,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변화된 역사'가 바로 연변과기대의 역사요 정체성이라고 늘 간증하는 이유다. 이와 동시에 더 큰 은혜로 와 닿은 것은, 연변과기대 사역을 수행하는 가운데 스스로 실감하는 하나님의 섭리 즉, 지난 젊은 날에 있었던 '죽음의 삶'에서 '생명의 삶'으로 변화된 역사' 이것이 후반전 내 인생의 진수임을 깨닫고 얼마나 감사했는지!
(*나의 청년 시절 '잃어버린 십 년'을 보상하듯, 왜정시대 독립운동가들의 후예들이지만 중국 변방에서 역사의 고난 가운데 버려져 있던 조선족 청년들을 가슴에 끌어안고 그들에게 꿈과 비전을 가르쳐 주려고 애썼던 그 참된 기쁨의 나날이 내 인생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던가! 또한, 그 이후 2001년부터 평양과학기술대 건설을 시작하여 2009년 9월 준공 및 개교식에 이르기까지, 그 긴 세월 동안 중국 조선족 건설업체를 데리고 어렵사리 공사를 진행하면서 북한 청년들(청년돌격대)을 때로는 노무자로, 때로는 품어야 할 미션의 대상자로 바라보며 그들 스스로 자존심을 지키고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도록 기도하며 손잡아 주었던 일이 지금까지도 마음을 다해 통일의 꿈을 지피도록 끝없이 추동하고 있지 않은가!)
아마도 내가 연변과기대를 도운 것이 열이라면 그 연변과기대가 내게 준 용기와 지혜와 은혜의 산물은 백, 천, 만도 넘을 것이리라. 그 누구보다도 어린 자녀들과 함께 연변과기대에 와서 헌신하는 젊은 청년 교수 가족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이야말로 나를 하나님의 '물근원'으로 이끈 엘리사와 같은 선지자들이요 이 세상에서 무엇이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인지를 가르쳐준 진정한 스승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은 좋으나 세상을 통해 마신 물이 나빠 토산이 익지 못하고 황폐했던 나의 삶을 고치고 거듭나게 하는데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 그 '물근원'에서 흘러내린 물결이 지금도 삶 전반을 적시며 흘러가고 있으니, 아! 연길시 북산가 언덕 위에 푸른 창공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연변과기대 캠퍼스를 생각만 해도 절로 가슴 떨리는 감동이 밀려 온다.
그 연변과기대 '물근원'에서 흘러내린 물결이 두만강, 압록강을 넘어 평양 땅에까지 이르러 세운 남북합작 국제대학이 곧 평양과학기술대학이다. 지금은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내가 믿기에) 평양과기대는 장차 남북한 통일과 한민족 통합을 이끄는 '갈등을 통합하는 리더십'으로 자라날 것이다. 그뿐 아니라 한반도 주변국가들, 즉 중국,러시아,몽골,일본 및 미국도 포함하는 동북아지역 역사 발전에 기여하는, 새시대를 준비하는 소통과 화합의 창(窓)이 되어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4. 이외에도 연변과기대와 관련된 일들이 많지만 특별히 한국기독실업인회(CBMC)를 소개함으로써 기업인으로서의 나의 선교적 삶에 대해 잠시 돌아보고 싶다. 내가 CBMC를 알게 되고 '서울영동지회'라는 커미티에 참여한것은 1992년 봄이었다. 인도어 골프장에서 함께 운동을 했던 지인으로 부터 초청을 받고 처음으로 CBMC전도초청 모임에 참석했을 때다. 그날 주제 말씀을 전하신 분이 당시 서울영동지회 지도목사를 하고 계시던 김동호 목사(당시 동안교회 담임)이셨다. 창세기 1장 27-28절 말씀을 근거로 '땅을 정복하라'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셨다. 그런데 말씀 도중에 느닷없이 "공부해서 남 주자. 돈벌어서 남 주자. 출세해서 남 주자" 라는 말씀을 하시는게 아닌가!
이전에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그 말씀을 깜짝 놀라는 심경으로 받아들였는데, 그 이후 지금껏 그 말씀이 내 가슴에 깊이 박힌 비수인 양 박혀 있어서 한시도 잊어 버린 적이 없다. 기독실업인으로서의 인생을 살아가는데 지킬만한 사명적 표어로 그 말씀이 늘 생각과 행동의 준거할 기준이 되어 온 셈이다.
그런 도중에 중국 연길에 한인기독실업인회(CBMC)를 세울수 있는 기회가 왔다. 내가 1994년에 서울영동지회 총무가 되었을 때다. 그동안 연변과기대 본부동 및 학사동 건축을 독려하고 1992년 9월 개교 준비 및 개교후 후속 업무를 지원하느라 연길에 자주 드나드는 과정에, 연길에 사업차 와 있던 한인 기업인들을 여러명 알게 되었다. 나중에 그분들을 중심으로 CBMC를 창립하게 되었는데, 그때 기업인은 아니지만 전문인으로서 CBMC 창립을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도움을 주신분들이 연변과기대 1기 교수진으로 참여했던 분들이다.
1994년 8월1일, 중국 공안의 눈을 피해 학교 안에서 '한중경제협력세미나'를 열고, 그 명분으로 한국에서 오신 기독기업인들(서울영동지회 회원)과 연길에서 사업하고 계시던 분들을 별도의 장소로 모이게 한 다음 거기서 창문을 꽁꽁 닫아 놓고 땀과 눈물을 뻘뻘 흘리면서 개최했던 중국 최초의 기독실업인회(연길한인기독실업인회)창립대회가 지금도 눈에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선명히 떠오른다.
그때부터 연변과기대(YUST)사역과 기독실업인회(CBMC)사역은 내에게 '복음 실은 수레의 양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며 인생 후반전에 거대한(?) 세계선교사역의 활로를 열어가는 중심축(린치핀)이 되었다.
연길지회 창립 이후 연변과기대 교수 몇 가족들과 함께 청도, 북경, 천진, 심양, 상해, 심천 등 여러 곳을 직접 찾아다니며 각 지역에 진출해 있는 한국 기업인들 가운데 교회 다니는 분들을 중심으로 한인기독실업인회를 홍보하고 창립하는 일에 열중했다. 이와 함께 중국 심양,청도,상해 지역에 진출해 있는 조선족 기업인들을 격려하고 육성하는 차원에서 조선족기독실업인회를 창립 지원하는 한편 한국에 유학갔다가 돌아 와서 회사를 창업한 엘리뜨(북경대,칭화대,천진 남개대,상해 복단대 출신 등) 청년기업인들을 중심으로 중국기독실업인회 창립을 유도하는 등 지역별로 산학협력이 가능한 범위 안에서 '비즈니스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매진했다. 그 결과로 1992년 연길지회 창립 이후 10년만에 중국 전 지역에 한인CBMC가 60여개,조선족CBMC가 10여개,중국 한족CBMC가 20개 가량 생겨 나면서 전국적으로 90개 이상의 기독실업인회(CBMC) 커미티가 창립,운영되어 왔다.
'일터 사역'을 지향하는 이런 CBMC사역의 물결은 그후 천산산맥을 넘어 카작스탄 알마티에 고려인CBMC를 세우고, 우즈베키스탄 타시켄트에 한인CBMC를 창립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리고 마침내 2001년 터키 이스탄불에 한인·터키인 합동CBMC를 창립하기까지 리더십을 발휘해온 일은 인생 후반전에 있어서 기념할 만한 또 하나의 큰 성과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아시아 대륙 맨 오른쪽 도시인 연길로 부터 아시아 대륙 맨 서쪽 이스탄불에 이르기까지 'CBMC실크로드 사역'을 이끌어 온 것은 스스로 생각해도 더할 나위 없는 선교사적 공헌이요 큰 보람이 되었음을 굳이 감추고 싶진 않다. 아! 이 모든게 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이 아니겠는가!
#5. 여기까지 글을 이끌어 오는 동안 '숨어 있는 기획자'처럼 생각의 저변에 깔려 있던 '야구' 얘기를 이제 해보자.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님을 수행해서 세계선교의 많은 현장을 다녔고, 또한 연변과기대 대외부총장을 역임하면서 교수 리쿠르팅, 해외 나온 유학생 돌보기,학교 재정을 위한 후원 모금 활동, 대학 장기발전을 위한 산학협동프로젝트 추진, 환황해경제기술교류회의 및 두만강 포럼 참석, 연변과기대 주최 국제컨퍼런스 기획 및 유치 등 이루 말 할수 없는 일을 수행해 오는 과정에 마침내 CBMC사역과 연합하면서 온누리에 세계선교를 펼치고 민족복음화를 위한 사역을 기획할 때 마다 전략적 기반으로 삼은 '글로벌 미션의 한 모형'은 'Baseball Play-maker Mission Strategy(BPMS)'이다.
나는 모든 선교전략의 중추적 기능을 배정할 때 야구 경기의 유형을 본받으려는 경향이 컸다. 즉, (예를 들자면) 나는 서울을 홈 베이스로 하여 퍼스트 베이스를 연길, 세컨 베이스를 북경, 서드 베이스를 우루무치, 그 다음 베이스를 알마티,타시겐트,이스탄불에 두는 형태로 사역의 망을 짠 다음 거기에 적재적소의 인물을 배치하고 관리함으로써 게임(선교사역)의 성패를 가늠하고 리드하려는 자세를 견지해 왔다. (*궁극적으로 나의 마지막 파이널 베이스는 평양이 되리라. 평양과기대를 통해 남북한 소통과 화합의 새 길을 열어가려는 것이 꿈에도 잊지못할 통일을 향한 필생의 비전이 아닌가!)
자신이 어느 사역지에 나가 한곳에서 다년간 봉사를 하는 방식은 솔직히 말해 마음에 내키지도 않았고, 또한 돌아 다니기를 좋아하는 타입이라 스스로 유목형 리더십(Nomad Leadership)을 존중하며 살아온 케이스다. 그런 경향은 초등학교 때 부터 야구부 캐쳐를 했고, 나중에 '경북고 야구'선수 시절에도 주전 후배선수를 보조하는 역할로 캐쳐 연습을 계속하면서 몸에 밴 습성 때문인지 모르지만, 홈 베이스를 지키면서 선수(조직원)들을 적정한 역할의 베이스 맨으로 기용하여 자리매김을 한후, 필요한 시점에 잠깐씩 넓게 펼쳐 놓은 각종 베이스를 돌아 다니며 일(게임)의 상태를 점검하고 격려하는 그런 방식이 더 몸에 맞고 잘하는 일이 되었다.
특히 (나 스스로 생각해 볼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내가 제일 관심있어 하고 잘 하는 일)는, 아마도 선수들(플레이어) 또는 전문가들에게 일(게임)을 잘 하도록 여건을 만들어 주고 자리 깔아 주는 역할/ 각자가 갖고 있는 장점과 장점(강점과 강점)을 연결하고 서로 연합해서 더 큰 시너지를 창출토록 만드는 역할인것 같다. 이런일을 하라면 자다가도 일어나서 뛰어 나갈 판이다. 나는 비록 못나고 부족하지만, 홈 베이스를 지키면서 선수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잘 뛸 수 있도록 소통하고 배려하는 일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천성이라서 그럴까? 암튼 나는 그렇게 야구의 플레이 메이커(play-maker) 역할 방식으로 사업을 영위해 왔고 연변과기대와 평양과기대 및 CBMC의 '일터 사역'을 포함한 각종 해외선교사역을 힘들지만 재미있게 감당해 왔다.
그런 뜻에서 캐쳐로서의 경험을 살려, '강타자가 되는 비결'을 나름대로 터득한게 있어서 여기에 정리해 보고자 한다. 첫째, 높은 선구안을 가져라. (변별력) 둘째, 쟈스트 미팅에 강해야 한다. (타이밍, 기회 창출 능력) 셋째, 데드볼(dead ball)을 해서라도 퍼스트 베이스를 밟아라. (게임 기여도) 넷째, 반드시 홈으로 돌아와야 득점을 한다. (투철한 목적의식)
이런 네 가지 강점을 유지하며 자신의 타율을 높이고 게임에 대한 기여도와 함께 팀을 승리로 이끌어 가는데 앞장 선 '강타자'를 단 한 명만 추천하라면 나는 서슴지 않고 추신수 선수를 든다. 그는 2000년 8월 계약금 135만 달러의 조건으로 「시애틀 매리너스」에 입단한 이후 2013년 12월 7년 총액 1억 3천만 달러를 받으며 「텍사스 레인저스」로 이적하기까지 그가 쌓은 '강타자'로서의 면모와 기량은 가히 ’기적을 연출하는 선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렇다. 야구를 통해, '야망과 구원'의 길목에서 서성거리며 세상살이의 여러 진면목을 많이 배웠다. 그리고 마침내 '플레이 메이커'로서 하늘나라의 영광을 위해 주어진 은사를 다 소진하며 일하다가 저세상으로 떠나고 싶다. 그게 인생을 통해 얻는 진정한 가치이고 의미라면. 남은 인생도 데드볼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퍼스트 베이스를 밟아서 게임을 주도하는 감독(하나님)이 그 게임을 잘 리드할 수 있도록 돕다가, 마침내 홈(돌아갈 본향)으로 돌아와 천상의 복을 누리며 영생을 사는 그런 신실한 야구인(신자)이 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