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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디오와 컴퓨터 원문보기 글쓴이: 管韻
조지 S. 패튼(George Smith Patton Jr. 1885년∼1945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미합중국 육군의 장군. 미군 최초의 전차 부대 지휘관이자, 30년간 미군 주력 전차의 자리를 차지했던 M46/47/48/60 패튼 시리즈의 네이밍 모델로서도 유명하다.
“생도들 차렷! 당황하지 마라. 지진은 곧 끝난다.”
사관생도 시절, 지진이 일어났을 때 당황해서 이리뛰고 저리뛰는 생도들 앞에 제복을 제대로 차려입고 나타나서 한 말
패튼은 남부의 부유한 군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로버트 E. 리나 스톤월 잭슨 장군의 무용담을 들으며 자랐고 남군 기병대 사령관으로 명성을 떨친 ‘회색 유령’ 존 싱글톤 모스비와 친하게 지냈다. 미국육군사관학교 1909년 졸업생이며 동기생으로 제이컵 데버스, 로버트 에이첼버거, 윌리엄 후드 심슨, 존 클리퍼드 하지스 리, 델로스 에몬스와 비록 중퇴하기는 했지만 코트니 하지스 등이 있는데 모두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상급부대 지휘관으로서 활약한 인물들이다.
흔히들 패튼 하면 ‘욕설을 입에 달고 다니는 활화산 같은 성격의 사고뭉치 지휘관’으로 인상이 강하게 남아있는데, 사실 그 정도까진 아니다.
오죽하면 별명이 싸움닭. 여우라 불리는 에르빈 롬멜과 비교하기 위해 붙인 이름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외에도 사고뭉치 같은 게 별명 중에서 그나마 가장 좋게 불리는 별명이다.
어쨌든 성깔 한번 지랄 맞았기 때문에 1915년 졸업생인 오마 브래들리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보다 늦게 진급했으며, 후배인 이 2명은 자신들의 선배가 사고치고 다니는 걸 수습하느라 애를 먹었다. 졸업성적은 103명 중 46등이었으며 기병 병과로 임관했다.
육군 소위 임관 직후 터진 멕시코 내전에서 토벌군 사령관 존 조지프 퍼싱 육군 원수의 부관으로 참전, 반란군 지휘소를 기습하여 장군 하나를 권총으로 사살한 뒤 자동차 본네트에 매달고 복귀하는 기행을 벌여 일약 유명해졌다.
그가 말하길 처음으로 실전에 참가했을 때 긴장과 겁에 질려 몸이 얼어붙어서 죽기 일보직전이었는데, 갑자기 하늘에 그를 데리러 온 기라성 같은 조상님들이 노려보는 것을 보자 죽어서 그들을 대하는 게 더 무서워져서 용기를 내어 “또 한명의 패튼이 전사할 시간이다!”라고 외치며 돌격했고, 패튼의 부하들은 지휘관이 몸소 돌격하는 모습을 보고 사기가 올라 함께 해당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고 한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에 미군 참전이 결정되자 역시 원정군 사령관이 된 퍼싱 장군의 발탁으로 미군 최초의 기갑부대 지휘관이 된다. 이후 그는 철저한 기동전의 신봉자가 된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종전 후 그를 늘 높이 평가해주던 퍼싱 장군이 퇴역한 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군내에서는 버린 자식 취급받았다. 불같은 성격에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는 안하무인(眼下無人)적 태도는 주변사람들과의 마찰을 항상 불러일으켰으며,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도 포기한 상태라 그나마 나았다. 하지만 전쟁광이란 타고난 성격이 전간기의 군축 분위기와는 상극인지라 별 수 없었다. 거기에 여러 차례 음주사고에 불륜소동을 일으키는가 하면 아돌프 히틀러처럼 단 것에 광분하여 섭식장애 증세까지 보여 건강까지 망치며 상층부의 골치를 썩였다.
게다가 사생활에 있어서도 취미로 승마나 요트 등 돈이 많이 드는 귀족 취향의 것들을 즐겼는데, 세계 대공황 시기에도 그 짓을 하고 다녔다. 그쯤 되자 상관이든 동료들이든 부하들이든 누구나 그를 보는 시선이 고울 리가 없었다. 얼마나 승마를 좋아했느냐 하면, 복장 규정을 무시하고 전투복 하의 대신에 기병 병과 등 말을 타는 인원 이외엔 착용이 금지되어 있는 육군 기병용 승마 바지를 입고, 손에도 승마용 채찍을 들고 다녔을 정도였다.
1931년 일명 보너스 군대(Bonus Army) 사건 당시 상당한 오점을 남겼다. 세계 대공황시기 연금 지급을 요구하는 제대군인 시위대에 전차와 보병을 착검돌격을 시켜서 무려 사상자 100여명이 나온 것. 당시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대선에서 참패했고, 더글러스 맥아더는 예편 후에 필리핀 군사고문으로 떠났다는 것을 생각하면... 말년까지도 패튼은 이 사건에 관해선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이 당시 제대군인 시위대 중에는 1차 세계대전 때 전장에서 총을 맞고 쓰러진 패튼을 구해준 조 안젤로(Joe Angelo)라는 장병도 있었다. 패튼은 이에 대해서도 침묵을 지켰다.
“이기지 못하면 한 명도 살아서 돌아오지 마라.”
―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첫 번째 전투를 벌이기 직전에 부하들에게 한 말
제2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하게 되자 2기갑사단장으로 아프리카 전선으로 향한다. 카세린 계곡 전투에서 미군이 독일-이탈리아 추축군에게 민병대 같은 모습을 보이며 치욕적인 대패를 당해 영국군에게 조롱을 받게 되자 열불이 뻗칠 대로 뻗친 미군 지휘부는 평시에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역겨운 작자지만 전쟁터에서는 승리를 가져오는 광전사인 그를 중장으로 진급시켜 2군단의 지휘를 맡긴다. 패튼은 오합지졸들을 무지하게 갈궈서 카세린의 치욕에서 깨어나게 해준다. 그는 부하들을 그야말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변화시켜 전사로서 바꿔내는데 성공하여 아프리카 군단에 대한 반격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들을 다수 이뤄낸다. 그러나 그는 원하던 롬멜과의 대결이 무산된 것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이후 이탈리아 전선의 시칠리아 상륙전에 미 육군 제7군 사령관으로 참가한다. 몽고메리 장군의 농간으로 조공으로 돌려지나, 오히려 그의 지휘부대가 영국군을 따돌리고 거점도시 메시나와 팔레르모를 점령하는 활약을 펼쳐 주객이 전도되게 만든다. 이후 몽고메리에게 라이벌로 찍힌다. 이 시기 독일군 내에도 그의 명성이 퍼졌으며, 특히 오합지졸인줄 알았던 미군을 영국군 이상의 강적으로 변화시킨 데다 자기들만큼이나 기갑전, 속도전에 능한 그에 대해 필요 이상의 신경을 쓰게 되었다. 덕분에 연합군 첩보부는 패튼이 지휘하는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가짜 부대를 조직하고 빈 상자를 대량으로 배치해서 보급품으로 위장하는 등 공작을 펼쳐 노르망디 상륙작전 전까지 독일 정보부를 속여 먹는다. 실제로 노르망디 상륙 당일에도 “영국 내 패튼 부대가 움직이지 않았으니 노르망디는 페이크다!”라고 독일군이 결론 내렸을 정도였다.
이후 유럽 전선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후속 부대인 육군 제3군을 이끌고 참가해, ‘코브라 작전’을 발동시켜 눈앞의 몽고메리 부대에 정신이 팔려 있던 독일군의 뒤통수를 박살내 패주하게 만들고 중부 프랑스를 쾌진격하며 유럽전선에서 맹활약을 펼친다. 영화에도 잘 나와 있듯이 패튼과 그의 부하들은 폭주기관차마냥 가는 곳마다 독일군을 쳐부수면서 질주했는데, 보급부대가 못 따라가서 아이젠하워 사령관 명의로 특별수송대까지 조직했는데도 부족했을 정도다. 패튼은 ‘우리가 빠른 게 아니라 너네가 느린 것’이라고 취급했다.
이것은 패튼이 기갑부대 사령관으로 고속 기동전의 신봉자여서인데, 선두에 서서 달리는 기갑부대와 정찰대는 적의 어려운 저항에 마주치면 그대로 우회로를 찾아 원래 목표로 계속 달려나가고 뒤따라오는 보병과 포병이 적군과 맞서 싸운다. 이런 식으로 틈새를 찾아 계속 전진하다 보면, 어느새 적군은 더 이상 손도 쓸 수 없을 정도로 패튼의 기갑부대가 적진 깊숙하게 들어와 전선을 붕괴시키는 것을 보게 된다. 다만 후속부대들은 패튼이 남겨놓고 우회해버린 적군들을 하나하나 쳐부숴야 했으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 보급선이 연합군의 역량 밖으로 늘어나는 문제도 있었다. 결국에는 보급 문제로 1944년 여름에 진격을 멈추게 된다.
한편 패튼은 야전군사령관이면서도 끊임없이 전선시찰을 나가고, 전선 근처의 동태를 살피는 한편 올라오는 정보보고는 꼼꼼하게 살폈다. 닥돌도 포지션과 타이밍 싸움이기 때문에 정보 분석에 상당히 공을 들이는 편이었다. 그저 적이 보인다고 무조건 닥돌하는 닥돌 바보는 아니었는데 오히려 전선의 틈새, 즉 적이 없는 헛점을 찾기 위해서 부지런히 전선시찰을 한 것에 가깝다. 일례로 밑에 설명될 아르덴 공세 때도 오히려 브래들리 장군보다 독일군의 이상징후를 먼저 파악하고 어느 정도 이에 대한 대비를 해 두었다.
그러나 그 독불장군 같은 성품 덕분에 여전히 상관과 동료들 사이에서의 평판은 바닥을 달렸는데, 특히 영국군 지휘관이자 롬멜 장군을 몰아낸 버나드 로 몽고메리 영국 육군 원수와는 개와 고양이 사이였다고 한다. 안 그래도 몽고메리도 성격이 워낙 꼬장꼬장해서 미군 장성들에게 좋은 소리는 듣지 못했기에, 어찌 보면 동족 혐오나 마찬가지였다. 어느 작전에서 몽고메리가 “패튼이 어느 독일군 장교의 군대를 제압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라고 말한 것을 듣고 “내가 그 독일놈 모가지를 뽑아서 몽고메리 X구멍에 쑤셔버릴 테다!”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다.
1944년 8월 31일 보급을 위해 프랑스 메츠에서 기동을 멈추었고 그 사이 요새를 강화한 메츠의 독일군과 10∼11월에 걸쳐 치열한 교전을 벌인 끝에 11월 23일 메츠를 점령했다.
1944년 12월 독일군의 아르덴 공세를 맞이해서 반격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단 48시간 만에 서쪽으로 진격 중이던 미 제3군예하 3개 사단으로 구성단 1개 군단을 뽑아내어 북쪽으로 이동시키는 초월적인 기동을 보였다. 즉 독일의 공세를 예측하고 반격계획을 미리 짜두었다는 의미. 패튼이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단순한 닥돌 바보가 아님을 보여주는 일화. 반면 브래들리와 그 참모들은 독일의 반격에 대한 대비책을 충분히 세워두지 못했다.
그 이후에는 독일 국내로 진격, 연합군 최초로 라인강을 자력으로 건너버린다. 당시 몽고메리와 아이젠하워간에 라인강 도하는 영국군이 먼저 하기로 합의되어 있었지만, 미군이 먼저 그 유명한 ‘레마겐의 철교’인 루덴도르프 교를 장악해버렸고, 미군이 몰려오자 독일 육군 공병들이 뒤늦게 폭파했는데 폭약량을 잘못 계산해서 부서지지 않았다. 우연의 일치지만 먼저 건넌 후에 벌어진 일이라 상대적으로 묻혔어도 독자적으로 도강작전을 진행해서 기습적으로 라인강 건너편을 제압한 후, 부교까지 설치한 것이라 전술적 의미에서는 더 가치가 높다. 이건 라인강에 오줌 싸면서 인증샷도 찍었다. 대대적으로 작전 계획을 짠 뒤 한참 공수부대를 투입하고 폭격, 포격을 날리며 부산을 떨던 몽고메리는 멍 때려야 했다. 전쟁 후 대선주자 자리를 노리던 아이젠하워는 미군 희생이 늘까봐 노심초사했고... 팬튼 장군은 1945년 4월 14일 대장으로 진급했다.
유럽 전선에서 이긴 패튼은 이제 중국으로 보내져서 이번엔 일본군과 싸울 차례였지만 일본이 항복하면서 중국행은 취소되었고 독일에 남게 되었다. 이후 그는 독일 바이에른 지역 군정 사령관으로 임명되지만, 정치적으로는 처신이 워낙 무뎌 결국 힘든 시기를 보낸 듯하다.
나치당을 미국 민주-공화당 정도로 비유하고 나치 인사들을 관대히 처리해 물의를 일으켰고, 오히려 연합국인 공산주의자인 러시아인을 매우 싫어했다. 전직 나치 당원을 정부 요직에 임명한 것에 대해서 비난이 빗발치자 “독일 공무원의 태반이 나치 당원이다. 그러면 정부 일을 까막눈들한테 맡기란 말이냐?”고 항변했다. 베를린에 입성해서는 “우린 괜찮은 민족 하나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러시아의 야만인들로 채워놓았다.”고 투덜거렸다는 일화가 있으며 독일이 항복한 후 베를린에서 벌어진 연합군 퍼레이드에 참석했을 때, 소련군 총사령관 대리인 주코프가 패튼에게 IS-3같은 소련 중(重)전차의 강력함과 전차포의 긴 사정거리를 자랑하자, “제 부하가 그렇게 먼 거리에서 적을 쏘는 비겁한 짓을 한다면, 제가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답해 주코프를 당황하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서 “원수, 원수의 그 배때지를 당신들이 자랑하는 사거리 밖에서 내가 쏘아서 뚫어버릴테니 주둥이 닥치시고 우리의 감시망에 들어오지 마시오(....)”라고 위협했다고 한다. 심지어 자신이 진주한 곳에 소련군을 피해 항복해온 국방군 2개의 사단과 친위대 1개의 사단을 해체하지 않고, 훈장을 받은 독일 장교들이란 장교들은 불러다가 같이 밥까지 먹자 빡친 소련군이 연락장교를 보내 항의를 했다고 한다. 더 막장도 있었는데 앞서 소개한 독일 패잔병들 문제로 욕먹은 소련군이 아이젠하워에게 불평하자 아이젠하워는 브래들리에게 좀 타일러서 독일 패잔병들을 해체하라고 말한다. 그래서 전화를 걸어온 브래들리에게 패튼이 한 말이...“난 이 독일 나치놈들이 좋네! 그들은 진정한 전사란 말이야. 이놈들과 함께 아이젠하워한테 찡찡거리는 소련놈들을 부서버리겠어! 이제 우리의 적은 소련이란 말씀이야!”라고 말했고 브래들리는 도청을 당하고 있을까 봐 전전긍긍했다고...
그러다 결국 라인강 서안 슈파이어로 사냥을 가다가 교통사고로 그가 탄 1939년형 캐딜락이 트럭에 치이면서 중상을 입고 만다. 사고가 난 날은 미국으로 복귀하기 하루 전인 12월 9일. 아우토반을 달리다가 패튼이 동승자(호바트 게이 대령)에게 불에 탄 차량을 가리켰고 운전수도 같이 보면서 전방 부주의로 2.5톤 트럭에 부딪혔다. 운전수와 동승자는 찰과상만 입었지만 패튼은 뒤로 튕겨나가 머리가 뒷유리창과 부딪힌 탓에 목뼈가 부러졌고 두개골이 갈라져 뼈가 보였다 한다. 12일 뒤 하이델베르크 군병원에서 수면중에 향년 60세를 일기로 사망하고 만다. 사인은 색전증(塞栓症, embolism). 전쟁이 끝난지 고작 7달 만이었다. 사망 후 그의 유언대로 룩셈부르크에 있는 벌지전투에서 전사한 제3군 미군묘지에 묻혔다. 어떻게 생각하면 평안한 것을 싫어하고 평안하지 않은 것, 즉 전쟁을 미친 듯이 좋아했고 그 전쟁에서 미친 듯이 싸워 승리했던 자의 최후답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워낙에 유별난 삶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그의 죽음에 관해 일종의 음모론 같은 게 주장되기도 했고 암살설을 바탕으로 한 허접스런 B급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1978년작 Brass Target(암호명 S 비밀지령).
패튼이 죽고 그의 유품을 치울 때 패튼이 애지중지하던 불테리어 수컷 윌리가 슬퍼하며 그의 유품 곁에 드러누워 먹지도 않고 오랫동안 있었는데 “사람에게는 욕먹어도 기르던 개에게는 자상했다.”라는 비웃음도 나왔다.
❮제군은 전쟁이 끝나 고향에 돌아가면 이것 한 가지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0년 뒤, 난롯가에서 손자를 무릎에 앉히고 손자가 “할아버지는 2차 대전 때 뭐 했어요?”라고 물어보면 헛기침이나 하면서 “응, 할아버지는 루이지애나에서 삽으로 똥이나 펐단다.”라고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지, 제군은 손자를 당당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얘야, 할아버지는 위대한 3군, 그리고 조지 패튼이라는 빌어먹을 개새끼와 함께 용맹하게 진군 했단다!”라고 말해주어라!❯
초반에는 차분한 논조로 함께 싸우게 되어 영광이다 같은 멘트를 하더니 갑자기 이렇게 급발진 해버렸다고 한다. 워낙 인상적이었는지 패튼과 함께 전투에 참전한 용사들은 연설의 다른 부분은 다 잊었어도 패튼이 스스로를 빌어먹을 개새끼라고 지칭한 대목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고 밝혔다.
“나는 지금 진심으로 우리와 싸우게 될 저 불쌍한 거지새끼들한테 애도를 표하는 바이다! 우리는 그냥 쏴 죽이지 않을 것이다. 산채로 내장을 빼서 우리 탱크가 지나가는 길에 기름칠을 할 것이다.”
호평과 악평이 교차하지만, 어쨌든 그가 명장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진정으로 미국다운 장군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호사가는 시대를 잘못 택해 태어난 사람이라고도 한다. 차라리 19세기 프로이센 기병 장군이었다면 더욱 좋았을 거라고. 미 육군은 M4의 후속 주력 전차 M46과, 개량형인 M47, M48, 에 그의 이름을 붙임으로써 그 공로를 기렸다. 워낙 유별난 지라 히틀러조차 그가 참전하기 전에 성격 등을 알고 있었으며 “카우보이 장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부하들로부터는 두터운 인망을 얻었는데, 2차 세계대전 회고록을 보면 본격 타 부대에서는 존경을, 직속 부하들에게는 혐오감을 얻은 상관. “꼴도 보기 싫은 개자식이지만 우리를 전쟁에서 이기게 한다.”는 게 총평.
그는 전투를 피하는 부하들에게는 인정사정없이 군화발로 조인트를 까면서 “내 부대에 너 같은 겁쟁이는 필요 없다! 꺼져버려!”하면서 폭언을 퍼부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반대로, 용감하게 싸워서 큰 전공을 올린 부하들에게는 아낌없이 찬사를 보내면서 그들에게 최대한의 보상을 해줬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는 다혈질이면서 용기와 명예를 중시하는 귀족 취향의 인물이었던 셈. 겁쟁이를 경멸하고 용감한 병사들을 아낌없이 칭찬한 것도 그 때문이었고 부하들을 쉬지 않고 독려한 것도 그가 기갑부대를 현대판 기병대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패튼의 성향은 훗날 미디어에도 반영되어, 조지 C. 스콧 주연의 전기 영화인 ❮패튼(Patton)❯(국내명: 패튼 대전차군단)에서는 독일군 정보장교인 슈타이거 소령이 자신의 상관인 알프레트 요들 상급대장에게 패튼을 평가하면서 “그는 전쟁 역사가이며, 현대에 환생한 기사입니다.”라 말했다.
특히 그는 전투 중에 부상당한 부하들이 입원한 야전병원에 직접 병문안을 가서 자신의 부하들은 물론 다른 부대의 병사들까지 일일이 살펴보면서 격려했다고 한다. 군 사령관이 직접 말이다. 군의관과 헌병이야 죽어나겠지만, 자연스럽게 그와 비슷한 성향의 부하들은 이 괴짜 사령관을 마음속 깊이 존경하게 되었고, 미 3군은 똘똘 뭉쳐 독일군을 상대로 용맹을 떨쳤다. 또한 아이젠하워와 더불어 흑인으로만 이루어진 부대를 차별하지 않았던, 당시 미군에서 몇 안 되는 인종 평등 면모를 보였던 장군이었다. 그것도 남부 상류 집안 출신인데. 의외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당대에 인종평등적인 면모를 보였던 것으로 유명한 인물들 중 상당수가 그냥 철저한 결과지상주의자들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별로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 불같은 성격은 끝끝내 문제를 터뜨리고 말았는데, 바로 패튼의 인생에 커다란 오점을 남긴 부상병 구타사건이었다. 시칠리아 공격이 한창이던 1943년 8월 3일, 제15임시병원을 방문하여 병문안을 위해 사병들의 침대를 일일이 돌던 패튼의 눈에 붕대도 감지 않았고 수술 자국도 없는 멀쩡한 몰골의 병사가 침상에 버젓이 누워있던 장면이 들어온 것이다. 계속 부상당한 병사들에 대한 측은감을 표시하던 패튼은 그 병사에게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다. 문제의 부상병은 제1사단 소속으로, 전쟁 전에는 카펫 전문가로 일하던 인디애나 청년이었는데 패튼에게 전쟁공포증을 호소하며 “견디지 못할 것 같습니다.”라고 무기력하게 대답했다. 패튼은 이걸 겁쟁이의 비겁한 변명으로 간주했고 격노하여 즉각 장갑 낀 손으로 그의 뺨을 후려친 다음에 그를 천막에서 끌어내서 등을 걷어차고 외쳤다.
“이 겁쟁이 새끼야, 넌 다시 전선으로 보내버릴 줄 알아!”
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전쟁공포증이나 PTSD(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란 ‘존재하지 않는’ 질병이었다. 지휘관들은 그런 증세를 보이는 이들을 그저 겁쟁이로 취급할 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발발한 뒤로 군의관들은 거듭된 전투로 인해 인간으로서의 감정이 사라지고 기계처럼 변해가는 군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경악했으며, 사방에서 전쟁에 대한 공포로 미쳐버린 군인들이 속출하면서 비로소 진지하게 다뤄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전장공포는 1차 세계대전 때부터 연합국의 주목을 받았으며, 특히 개전전에 대규모 육군을 보유하지 않아 비숙련 징집병의 비율이 높았던 영국군이 이 문제에 대해 민감했다. 그에 비해 미군은 당시의 영국군과 같은 처지임에도 상대적으로 참전 기간이 짧아 직접적으로 PTSD 문제를 피부로 느끼지 못했고, 다만 동맹국인 영국의 전훈을 이론적으로만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1차 세계대전 당시엔 영국군이 겁쟁이라서 저런 놈들이 많이 나온다고 떠벌였을 정도.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시점이 되면 패튼 같은 행동을 드러내놓고 하는 것은 금기시될 정도까지 인식이 바뀌긴 했다. 전쟁공포증이란 것을 인정하냐 마냐를 떠나서 장군이 병사를 폭행하는 것은 당시 미군에서 군법회의에 즉각 회부되어야 할 중죄였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시 8월 10일에 제93임시병원을 방문한 패튼은 또 다시 멀쩡한 병사가 누워있는 것을 보고 격노하여 병사에게 권총을 겨누고(!) 위협했고 겁쟁이는 쏘아 죽여야 한다고 소리를 질러댔으며 군의관을 불러서 “저놈 군법회의에 회부시켜! 내가 직접 영창에 처넣어주겠어!”하고 소리친 후 곧장 부대로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기자들에게 전쟁공포증 같은 것은 다 유대인들이 지어낸 헛소문(!)이라고 자랑스럽게 떠벌리기까지 했다. 참고로 이분은 나치를 때려 부숴야 하는 입장이다 그 사실이 곧 연합군 총사령부로 전해지면서 아이젠하워 원수는 패튼의 행동에 분노하였으나 신뢰하는 부하이자, 아끼던 육사 선배인 패튼의 구명을 위해 모든 종군기자들에게 정보 관제를 신신당부했고 패튼에게도 그 병사에게 직접 사과할 것을 명령했다. 이 때문에 패튼은 메시나 점령의 기쁨을 제쳐두고 문제의 병사들은 물론, 임시병원의 의료진 전원과 제1보병사단 전체에게 사과해야 했다. 패튼에 대한 감정이 매우 나빴던 제1보병사단 병사들은 패튼의 사과를 조용히 듣기만 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기자들도 그저 실수려니... 하고서 그 요청을 받아들였으나, 비슷한 사건이 또 벌어진다.
이번의 피해자는 시칠리아 전투 중에 질척질척한 참호 속에 처박혀 있다가 참호족염을 얻어 입원 중인 병사였다. 그는 겉보기에 크게 아파보이지 않는 상태로 입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패튼에게 폭행을 당했다. 그리고 이 병사는 자신의 앞을 다시 지나가던 패튼을 향해 “저는 1주일 넘게 전투화를 신은 채로 흙탕물로 가득찬 참호 속에 처박혀 있었습니다, 장군님.”하고서 그를 노려보면서 또박또박 말대꾸를 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이번에는 분명히 자신이 경솔했음을 깨달은 패튼이 사과했지만 이미 그 소식은 미국 전역에 퍼진 뒤였고, 거기에 기자들이 이전의 폭행사건도 모두 폭로해버렸다. 당연히 여론의 반응은 “이 미친놈아!”였고 전국에서 패튼을 맹렬히 비난하는 기사가 쓰여 지고 그를 퇴역시키라는 압력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다못해 앞의 PTSD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질병이라 변명의 여지라도 있었지만 참호족염은 패튼 자신을 포함해서 수많은 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들이 잘 알고 있었고, 참호족염으로 고생했거나 발가락을 잘라야했던 전상자들도 많았던지라 변명의 여지도 없었다. 결국 또다시 아이젠하워가 나서서 간신히 뒷수습을 했지만 “이제 패튼 선배님께서 또 이런 만행을 저지른다면 나는 선배님을 짤라야 해. 나도 언제까지나 뒤치다꺼리를 해줄 순 없단 말이야.”하고 부관들에게 푸념을 늘어놓을 정도로 정나미가 떨어져버렸다.
이탈리아 전선의 시칠리아 상륙작전에서 한 번 아이젠하워의 뒷목을 잡게 만들었는데, 작전 당시에 예정되었던 두 번째 야간 강하작전이 해안의 대공포 사수와 해상의 지원함대에게 제대로 통보가 되지 않아 어마어마한 팀킬사건이 벌어진 일 때문이다. 원래 해당 공수작전에 따라 2,300명이 강하할 예정이었는데, 이 팀킬로 전사한 사람만 400명, 중경상자까지 포함하면 답이 안 나올 정도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후 강하작전이 진행되는 시간에는 대공사격을 금지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여기에는 패튼이 강하작전에 참여할 82공수사단과 수송기 조종사들에 통보하기를 “만약 지상이나 함정이 포격을 하거든 자신들의 위치와 방향을 알려주기 위한 것. 절대 귀관들을 격추시키려는 것이 아님.”이라고 하는 바람에 어느 정도 사건에 대한 책임이 있었다. 이 사건을 보고받은 아이젠하워는 격노하여 “책임소재를 파악하고 귀관이 직접 명확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귀관의 목이 날아갈 것!”이란 투의 전보를 보냈지만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미군의 삽질에는 아이젠하워의 책임이 가장 큰지라 그냥 넘어갔다.
사실 보직 해임 시기 아이젠하워는 그를 미국 본토로 전출시키려 했으나 조지 마셜 참모총장이 이를 반대, 결국 1년 가까이를 휘하 부대 하나 없는 장군으로 허송해야 했다. 그 사이 자기 부관이었던 브래들리는 중장 진급하여 나중에는 상관으로 모시는 사태마저 벌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