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문석
화문석은 한자로 풀어보면 꽃화(花) 무늬문(紋) 자리석(席)이다. 즉 꽃무늬 돗자리라 하겠습니다. 화문석의 주재료는 왕골입니다. 왕골을 왕굴 또는 완초라고 합니다. 화문석은 왕골의 줄기를 이용하여 만드는데 잎은 신발과 바구리등 만들고, 줄기는 화문석을 만듭니다.
강화도의 화문석은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어 가내 수공업으로 발전 된 것으로 추정하지만 강화 화문석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에 「세종실록 임원경제지」에 의하면 호조에서 공납으로 인한 민폐를 구제할 목적으로 경기도에서 바치는 왕골자리를 없애기 위해 청한 기록이 있으며 또한 등매석이라 하여 그 모양과 쓰임새도 적혀있다. 「교동 군읍지」문헌에서도 볼 수 있듯이 왕골이 토산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는 용, 학, 거북이, 원앙등의 동물 모양과 수화 복만등의 글 모양으로 표현을 했다. 강화군 송해면 양오리 한충교 선생의 화문석은 120년전에 새로운 도안으로 화려하고 기품이 있는 화문석을 도안했다. 정혜채 선생은 〈강화직물화연조합〉의 창설자이시며, 화문석 개량 업무 및 사업안을 계승하여 화문석의 공예기술 가치로 인정 받았다.
왕골 가공 순서
왕골베기 → 삼변쪼개기 → 건조 → 색바래기 → 엽색가공 → 제작하기
◐화문석 만들기◑
① 왕골을 하루쯤 물에 푹 담갔다가 건조한 곳에 걸어둔다.
② 중간대의 속을 30~50cm 정도를 칼로 훓어 낸다.
③ 물감은 회색, 검은색, 남색, 붉은색, 등 아홉가지 색을 가진 물감을 이용하여 물들인다.
④ 왕골은 자리를 만들기 전에 다시 물에 적셔서 부드럽게 만든다.
⑤ 왕골 매는 사람이 두 사람(3~5자) 세 사람이면(6~7자) 네 사람이면(8~9자) 다섯 사람이면(10~12자) 폭으로 자리를 만들 수 있다.
화문석은 꽃돗자리와 등메라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꽃돗자리는 왕골줄기를 손으로 엮는 방법이고 등메는 골을 한 올씩 가마니 치듯 베틀로 다져서 짜는 방식이다.
화문석 짜는 기법은 두 가지가 있다. 「노경소직법」이라 하여 날줄이 겉으로 드러나게 짜는 기법이고, 강화의 화문석에서 많이 제작했다. 「은경일직법」은 날줄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짜는 기법이며, 전라남도 보성의 용문석이다.
◐화문석 만든는 순서◑
① 날실을 고드레돌에 감고 날실은 두 개를 하나로 묶어 1.5cm 간격으로 자리틀에 맵니다.
② 왕골 속감을 겉감으로 감싸 한데 모아서 엮고, 무늬는 도안에 따라 색왕골을 덧대고 엮습니다.
③ 휘감은 두쪽 왕골은 남겨 두고 ,세번째 왕골을 꺽어 휘감아 안감속으로 넣어 엮습니다.
④ 화문석이 다 짜여지면 나이론 실을 배듭지어 완성을 합니다.
화문석의 장점은 우아하고 정교하며, 실내 장식등 활용가치가 높으며, 윤기가 좋고, 여름철에는 통풍이 잘되어 흡수력이 좋아서 시원하고, 겨울에는 차가운 공기를 차단해 냉기를 방지해 주고 따뜻함과 아늑함을 주며, 오래도록 사용을 해도 부스러짐이 없으며, 화려하면서도 소박한 무늬로 그 자태를 나타내고 있다.
강화의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 민속공예품인 왕골 생산지는 강화군 송해면 당산리.양사면 농가에서 노지로 재배가 이루어졌던 것이 2006년에는 비닐하우스에서도 재배가 가능해 이젠 왕골은 안전적으로 생산 할 수 있게 되었다.
강화도의 대표적 특산품인 화문석은 국내외의 상표등록을 타 지역에서 강화 화문석을 명성을 이용을 막기 위해 출원했다. 강화도에서 생산되는 왕골은 순백색 완초의 지질이 잘 나타나 있고 화문석을 한 장 만드는데 20만번 (7×9자 기준)의 손길이 필요하다.
왕골 돗자리의 유래
왕골 돗자리라는 명칭은 고려 태조 왕건(877~943)과 장화황후의 아들로 태어난 혜종(912~945)의 탄생 설화에서 유래가 되었다 한다.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하기 위하여 출정가는 도중 심한 갈증을 느껴 물 깃는 처녀에게 물을 청하게 되었다. 처녀는 우물가에 늘어진 수양버들 잎을 따서 물에 띄워 주었는데 왕건이 목이 마른 터라 그 잎을 꺼내지 않고 입으로 불어가며 마셨다. 물을 마신 후 왕건은 처녀에게 왜 잎을 띄웠느냐고 물으니 처녀의 말에 급하게 마시다가 체할 것을 염려하여 잎을 띄웠다고 대답했다. 왕건은 처녀의 말과 태도에 반해 그 자리서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한다. 그후 두 사람은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의 얼굴에 돗자리 같은 흉터가 있었다 한다. 그 아들이 고려 2대 해종왕이며, 왕건이 고려의 태자이며 장화황후의 아들인 것이다. 왕건과 처녀가 사랑을 나눈 자리가 해종왕 얼굴이 골이 패였다하여 "왕골 돗자리"라 불렀다 한다.
꽃삼합
꽃삼합 초기에는 단합으로써 종이를 꼬아서 만들었다가 조선말엽부터 왕골(완초)을 이용하여 꽃,태극 봉항등의 무늬를 수를 놓으면서 단합에서 삼합으로 제작이 되었다.
꽃삼합의 용도는 바느질 광주리나 음식을 닫아 두는 것으로 사용을 했다. 현재는 귀금속, 장식용으로 사용하며, 꽃삼합은 같은 모양을 대, 중, 소의 3개의 크기를 제작하여 한 셋트를 완성 시킨다.
꽃방석
화방석은 고려시대 강화도 교동면 화개사의 스님이 불공을 드릴 때 앉았던 것으로 유래가 되었다. 여름철에는 습기를 흡수하여 오래 앉아 있어도 피로감을 느끼지 않으며, 방석 다섯장이 한셋트로 편안함을 더 해 준다.
강화군 송해면 양오리에 위치하고 있는 강화 화문석 문화관은 전국에서 오로지 하나뿐인 왕골공예품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에 고유문화 유산인 유물로써 가치를 높이고 있다.
강화 화문석 문학관 1층은 화문석 작품 전시장과 판매장. 화문석 만들기 체험학습장이고, 2층은 화문석의 상징인 공간, 짚풀과 함께 하는 고유문화공간, 왕골의 재배 과정, 화문석 제작 과정, 공예품 관람공간, 화문석 문양공간등 8개의 주제로 나누어졌 있다. 세련되고 정결한 여인의 섬세한 손길들이 빚어낸 민예품들에서 조상의 얼과 슬기를 맛 볼 수 있었다.
강화토산품판매장은 인천 강화 강화읍 남문로 52이며, 1985년 7월에 옛 성문을 재현한 웅장한 건물로써 1층은 52개의 토산품등 점포와 2층은 문화원이 자리잡고 있다. 넓은 주차장은 무료이며, 휴무는 5, 15, ,20, 25일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