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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
유수는 전한 말기인 기원전 6년 남양 채양현에서 태어났다. 유수는 한고조 유방의 9세손으로 명실상부한 황족이었지만 수대를 걸치면서 집안이 쇠락하여 유수의 부친 유흠 때에 와서는 이미 평범한 지현에 지나지 않았다. 유수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으며 숙부인 유량의 양육으로 자랐다. 집안의 막내인 유수는 위로 유연과 유중 두 형을 두었다. 큰형 유연은 호탕하여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는 성품으로 탁월한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에 비하면 유수는 호리호리하고 행동이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한 청년이었다.
서기 9년 전한을 멸망시키고 스스로 황제가 된 왕망의 신나라는 당시 날로 쇠락해 지고 있었다. 그의 일련의 급진적 개혁정책은 모두 실패하였고 상당한 사회적 혼란이 일어나면서 난세의 도래를 예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수는 자신이 그 난세를 통해 황제가 되리라고는 아직 꿈도 꾸지 않고 있었다. 유수는 당시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벼슬을 하려면 집금오, 처를 얻으려면 음려화 정도는 돼야지.” 집금오는 수도의 치안을 맡아보는 관직이었으며 음려화는 당시 미색이 출중하기로 유명한 기생이었다. 장차 황제가 될 인물의 꿈 치고는 너무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집금오가 되는 꿈은 결국 이루지 못하지만 음려화를 얻겠다는 그의 꿈은 훗날 이루어진다.
서기 17년이 되자 홍수, 가뭄, 메꾸기 떼의 습격, 우박 등 각종 자연재해가 일어나며 기근이 이어졌고 정권의 불안정은 극에 달했다. 형주도 그러한 기근을 겪은 지역 중 하나인데 왕광과 왕봉이라는 명망 높은 두 사람이 나타나 형주는 안정을 되찾았다. 왕광과 왕봉은 이 일로 명성이 높아져 수령으로 추대되었으며 순식간에 그들 밑으로 수백명이 모여들었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듣고 죄를 짓고 도망 다니던 이들도 대거 합세하여 그 세력은 더욱 커졌다. 그들은 형주의 녹림산을 점령하고 이를 거점으로 하여 세력을 확장해 나가니 얼마 안 가 8천여명에 달하는 군대가 형성되어 스스로를 녹림군이라 불렀다.
이렇게 되자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된 왕망은 21년 2만 군사를 동원하여 녹림군 토벌에 나섰지만 오히려 형편없이 패하고 북쪽으로 후퇴하는 신세가 되었다. 녹림군은 기세를 몰아 경릉, 안륙을 침공하여 식량을 확보한 다음 녹림산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듬해 뜻하지 않게 녹림산에 전염병이 돌았다. 이때 녹림군의 수는 5만여 가까이 되었는데 역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 수가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다. 사람들은 하는 수 없이 흩어져서 행동하기로 결정했다. 왕광과 왕봉의 인솔 아래 남양으로 북진한 무리는 신시병이라 칭했고 서진하여 남군으로 진입한 군대는 스스로를 하강병이라 불렀다. 신시병이 수현을 공격하자 수현 동북쪽의 평림 사람 진목과 요잠이 수천명을 이끌고 합세하니 이들을 평림병이라 칭했다.
거병
신시병과 평림병이 남양에 점점 가까이 다가갈 무렵 유수의 생활에도 변화가 왔다. 남양 완현 사람 이수는 신나라의 관리였는데 그는 왕망 정권이 얼마 남지 않았으며 세상은 다시 유씨의 천하가 되리라고 직감했다. 이수는 그의 아들 이통에게 자신의 뜻을 전했으며 이통은 남양의 유일한 황실 종친인 유연, 유수의 일가를 찾아갔다. 유연의 강직하고 정의감 넘치는 성격과 유수의 총명하고 신중한 성격을 본 이통은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도참사상까지 들먹이며 열을 올렸고 이들 형제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유씨 형제는 곡식을 판 돈으로 갑옷과 화살을 사들여서 그해 10월 완현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이때 유수의 나이 28세였다.
유연은 봉기 직후 현지의 호족들을 찾아가 왕망의 신나라는 곧 멸망할 것이며 고조의 대업을 되찾아야 한다고 설득했고 많은 호족들이 그의 말에 공감하여 뜻을 함께 하기로 했다. 유씨 형제들의 군대는 순식간에 8천여명으로 늘어났다. 그런데 바로 이때 이통의 수상한 행동이 관가에 포착되는 바람에 그의 일가 전체가 체포되어 무려 64명이 처형을 당했다. 다행히 이통은 미리 달아나 화를 면했지만 이 일로 유연의 세력도 큰 타격을 입었다.
유연은 신시병의 수령인 왕봉과 평림병의 수령 진목에게 지원을 요청해 함께 장취로 쳐들어가 큰 수확을 올렸으며 당자향까지 진격하여 호양 태수를 죽이니 전리품이 점점 늘어났다. 그런데 이때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전쟁에 가담한 군대가 여럿 되다 보니 그들 사이에 재물을 나누어야 하는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에 신시병과 평림병 쪽에서 불만을 품고 유씨 형제의 군대를 공격하려 하였다. 유수는 즉시 재물들을 모조리 그들에게 내주면서 그들의 화를 누그러뜨렸고 이후 유수는 그 넓은 도량을 유명해졌다.
유씨 형제의 다음 목표는 완현이었는데 이 싸움에서는 크게 패하여 병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유수도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 유수의 둘째형 유중을 비롯한 유씨 일족 십여명이 적군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한 차례 좌절을 겪고 나자 연합군은 극양으로 후퇴했고 병사들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다. 신시병과 평림군의 수령들은 유씨 형제에게 극양을 포기하고 계속 후퇴하자고 했지만 유연이 극구 저지했다. 바로 이때 도망쳤던 이통으로부터 뜻밖의 희소식이 전해졌다. 하강병이 부근의 의추까지 도달했다는 것이었다.
유연과 유수는 재빨리 의추로 달려가 하강병의 수령 왕상을 만나 합동 작전을 짰다. 왕상은 하상병을 인솔하고 극양으로 와서 신시병, 평림병 및 유씨 형제의 남양병과 연합하여 비강 서쪽에서 왕망의 군대를 크게 물리치고 완성을 포위했다. 계속하여 승승장구하던 그들은 명령 체계를 통일하고 대의명분을 내세우기 위해 4개의 연합군 공통의 황제를 추대하기로 결정했다. 수령들 중 대부분은 유씨를 옹립하여 한황실을 회복해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고 유연이 최고 수령으로 유력해 지는 듯 했으나 신시병과 평림병은 유연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여 또 다른 황실 종친인 유현을 추대했는데 그가 바로 경시제이다. 유현은 유연, 유수 형제와 비슷한 나이지만 병권이 없었고 지금까지 별다른 활약도 한 것이 없었으며 다소 유약한 성품이었지만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각 수령들은 조종하기 좋은 그를 황제로 지지한 것이었다.
대승
유연은 승상에 해당하는 대사도에 봉해졌으며 유수는 태상편장군이 되었다. 그리고 연합군은 이후 스스로를 한군이라고 칭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봉, 왕상과 유수는 경시제의 명을 받고 곤양과 근처의 정릉, 언성 두 현을 공격했다. 한편 유연은 계속해서 완성을 공략했다. 이때 왕망은 반란군이 이미 황제까지 추대하고 정권을 수립했다는 소식을 듣고 42만의 병력을 모아 곤양으로 진격했다. 당시 곤양에는 겨우 9천여명의 군사밖에 없었는데 그들은 성 밖에 보이는 대군의 모습을 보고는 공포에 떨며 싸우기도 전부터 크게 사기를 잃었다. 그때 유수는 사람들을 달래고 설득하며 자신이 13기만 인솔하여 남문을 빠져나가 포위를 뚫고 정릉과 언성으로 가서 지원군을 데려오겠다고 말했다.
무사히 언성과 정릉에 도착한 유수는 두 성의 모든 군대를 소집했다. 현지 장수들은 얼마 전에 손에 넣은 재물이 아까워 일부 병력을 남겨두어 성을 지키고 싶어했지만 유수는 그들을 달래어 3천여명의 병력을 모두 인솔하여 왕망의 군대에서 5리 정도 떨어진 곳에 도착했다. 적군은 수천명을 내보내 유수의 군대를 공격하였지만 오히려 격퇴당했고 그 여세를 몰아 성의 서쪽 강을 건너 적의 주둔지를 기습했다. 갑작스런 공격을 받은 적군은 혼란에 빠졌고 성에 있던 한군도 밖으로 나와 공격에 가담하니 적장 왕심이 전사하고 적군은 대열을 수습하지도 못하고 도주했다. 그 와중에 서로 밟혀 죽는 이가 부지기수였다.
이 곤양전투는 중국 역사상 적은 수로 많은 적을 이긴 유명한 전투로 기록되었다. 이 전투로 인해 왕망의 주력군은 거의 와해되는 치명상을 입었으며 이는 유수의 이름이 유명해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후 각지의 민중들이 잇달아 호응해 현지의 관리를 죽이고 한나라의 연호를 사용하며 경시제의 조서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이후 천하군웅들은 너도나도 반란군에 가담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평소 유연을 경계하던 신시, 평림의 수령들은 유연이 장차 반역을 할 것이라며 그를 죽여야 한다고 경시제를 부추겼고 그 자신도 유연을 경계하고 있던 경시제는 유연에게 군령위반의 죄를 뒤집어 씌워 죽여버렸다. 하지만 유수는 형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속으로 울분을 삼키며 자신에게 닥칠지 모르는 위험을 피해갔다. 경시제는 할 수 없이 곤양대전의 공을 인정하여 유수를 파로장군에 임명하고 무신후에 봉하였다.
한편 곤양대전 이후 왕망은 전의를 상실하고 방어에만 급급하다가 결국 서기 25년 경시제의 부하인 신도건과 이송에게 공략당하던 중 도망치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이로써 신나라는 건국된 지 15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한편 경시제는 또 다른 장수 왕광을 보내 낙양을 공략하게 하여 손쉽게 얻었다. 장안과 낙양을 모두 얻었지만 한군 지휘관 대부분은 관동 출신이었기 때문에 장안에 정부를 수립하기를 꺼려하여 낙양으로 천도할 것을 건의했지만 이때 낙양의 궁전은 모두 파괴된 후였기 때문에 경시제는 수도 장안으로 입성하였다. 그리고 유수를 사례교위로 임명하여 낙양의 궁전과 관청을 재정비하도록 명했으며 낙양 보수공사가 끝나자 그곳으로 천도했다.
평정
그러나 아직 천하는 완전히 평정된 것이 아니었다. 산동의 적미군과 하북지방의 왕랑이 아직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왕랑은 스스로 한나라 성제의 아들 유자여라고 주장하고 있었는데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적지 않은 세력이 모여들고 있었다. 경시제는 하북의 왕랑을 격파하는 임무를 유수에게 맡겼으며 유수는 왕랑을 공략하기 위해 하북으로 향하던 중 일생의 가장 믿을 만한 신하를 얻게 되었다. 그는 바로 등우였는데 그는 뛰어난 군 지휘관이었으며 특히 인물을 꿰뚫어 보는 힘이 탁월하여 유수로 하여금 수많은 인재를 얻게 했다.
왕랑과의 힘겨운 싸움 속에 쫓겨다닐 때 유수에게 콩죽을 끓여 대접하며 말없이 격려하였던 풍이는 대수장군이라 불렸다. 이는 자신의 공로를 전혀 자랑하지도 내세우지도 않았던 성품 때문으로 부하들이 서로 휘하에 가려할 정도로 신망이 두터웠다. 구순은 문무를 겸비하였고 사람을 잘 다루었으며 후일 병량의 조달 등 유수의 창업을 배후에서 빈틈없이 지원하였다. 오한은 호걸형의 우수한 장군으로 맹활약하였다. 왕랑 세력권의 지방 태수였던 임광과 비융은 왕랑에게 쫓기던 유수를 도와주며 왕랑에게 반기를 들었다. 유수는 초반의 불리한 전세를 만회하고 항복해 오는 왕랑의 부하들을 죽이지 않고 기용하여 효과적으로 전력을 증대하였다. 결국 24년 한단은 함락되었고 왕랑은 처형되었다.
승전보가 경시제에게 알려지자 경시제는 유수를 소왕에 봉하고 군대 해산과 장안복귀를 명했다. 그러나 유수는 하북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다는 핑계로 거절하고 하북의 군소세력을 격파하여 수십만의 막강한 병력을 모았다. 이제 경시제와 유수 사이에는 돌이킬 수 없는 깊은 골이 생겼다. 이어 부하들의 간곡한 권유에 따라 드디어 유수는 25년 6월 호남에서 황위에 오르고 연호를 건무라하여 완전한 독립을 이루었다. 이제 천하정세는 크게 유수와 경시제, 적미군으로 갈라져 있었다.
적미군은 장안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경시제를 참살하였다. 그러나 적미군은 원래 도적출신의 집단이라 정치가 형편없이 행해져 약탈과 방화와 살인이 도처에서 행해졌으며 결국 서쪽으로 향하던 중 감숙성에서 외효에게 격파 당하여 패주하다가 하남성에서 유수에게 항복하였다. 이로써 유수는 천하를 삼분하던 경시제와 적미군이라는 양대 세력을 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
유수는 나머지 지방 군소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잠팽을 파견하여 감숙성의 외효를 공격하였다. 외효는 사천성의 공손술과 협력하여 유수에게 대항하였지만 유수의 인품에 반한 외효의 참모 마원의 배신으로 무너졌다. 이 당시 유수는 잠팽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람들의 욕심은 끊임이 없다. 농을 얻는 다면 다시 촉을 바라볼 것이다. 군사들을 전쟁터에 내보낼 때마다 나의 머리에는 흰 머리털이 늘어간다.”라며 부하들을 걱정하며 전쟁에 대한 자신의 심경을 술회하였다. 이것이 나중에 사람의 욕심을 표현하는 득롱망촉의 고사성어가 되었다. 이 말대로 촉지방의 공손술을 토벌하여 36년 마침내 천하를 통일하고 수십 년의 전쟁은 막을 내렸다.
통치
유수는 낙양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한이라 했으며 개국 공신들에게 높은 지위를 줄 경우 나중에 황권이 위협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에게 토지와 재물을 하사하되 정사에는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천하를 평정한 후에는 전쟁이라는 말조차 꺼내지 못하게 하여 백성들의 삶을 보호했고 왕망의 가혹했던 정치를 폐지하고 노비를 해방하고 죄인들을 석방시키고 수리사업을 일으키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인구가 작은 고을을 병합하고 관리의 수를 줄였으며 간전의 측량 등을 행하여 통일국가의 충실을 기하였고 군병을 내어 중앙집권화를 꾀하였다. 또한 학문을 장려하고 명예와 절조를 중히 여기는 유교존중주의를 택함으로써 후한의 특색이 되는 예교주의의 기초를 다졌다. 57년 2월에 유수는 낙양의 남궁에서 붕어하였으니 그 때 나이가 63세였다. 묘호는 세조, 시호는 광무황제였다.
성품과 일화
유수는 스스로 모범을 보이기 위해 외국에서 바친 천리마를 마차를 끄는데 쓰고 보검은 부하에게 주어버렸다. 음악을 가까이 하지 않고 귀중품을 몸에 지니지 않았다. 엄격하게 법을 집행하는 관리들을 크게 격려했으며 심지어는 자신이나 황실 종친에게도 엄격했다. 한번은 유수가 사냥을 나갔다가 밤늦게야 돌아왔다. 그런데 성을 지키는 관리가 문을 잠그고 열어주지 않는 바람에 길을 돌아 다른 성문을 통해 궁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런데 다음날 유수는 문을 열어주지 않은 관리는 상을 주었으며 자신에게 문을 열어준 관리는 직위를 강등시켰다.
또 엄자릉이라는 유수의 어릴 적 동문수학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유수가 황제가 된 이후 그는 모습을 감추고 나타나지 않았다. 사방으로 수소문해 엄자릉을 마침내 찾았는데 그는 강가에서 낚시를 하며 살고 있었다. 유수는 사자를 보내 싫다는 엄자릉을 설득해 궁궐로 데려왔지만 그는 초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살겠다고 하며 한사코 황제를 보위하는 일을 거절하였다. 심지어 유수와 함께 자면서 그의 다리를 황제인 유수의 몸 위에 올려놓는 무례한 행동을 하기도 했지만 유수는 스스로 황제가 아닌 친구로서 그를 대했다. 결국 엄자릉은 유수의 청을 거절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낚시와 농사로 평생을 보냈다. |
첫댓글 한고조에 비하면 꽤나 대인배 같군요.
공신들의 정치 참여를 막았지만 그 뿐,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처벌하지 않았죠. 게다가 전쟁터에서는 뛰어난 장군이었지만 천하통일 후론 아침부터 저녁까지 국무를 처리하며 근면하게 사는 모습을 보이는 등, 말 그대로 모범 그 자체인 황제 아닐런지.
한고조는 토사구팽을 했지만은 광무제는 상을 주어서 영지로 보내고 나서 정치참여를 막았다고 하던데 역시 가장 모범적인 황제라고 보여지네요.
창업주도 왕조의 수명등과 어느정도 연관이 있을까요? 개인적으로 한이 다시 중흥됐다지만(전 후한대에 후한이란 말이 쓰이지 않았던것으로 압니다....그냥 한이지....) 후한보다 전한이 더... 패기나 활동이 더 넘친다고 느껴지는데....후한은 처음 몇십년만 제외하고 그저 현실에 안주하는 것 같습니다.
위 댓글에 부연한다면 후한시대에도...국호는 그대로 한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후한대의 황제들도....자신들의 세대수를 한고조로부터 몇대등으로 했던것 같고....아무튼 한나라는 400년 천하였던것 같습니다..유방에서.....헌제까지..... 사실 중간의 왕망이도....황제의 친족(외척)이었던것 같음..
이쯤해서 질문하나. 후한의 전성기는 언제쯤(어떤황제)이었나요?
후한은 2대인 효명황제가 사망한 다음부터 '태후'들의 임조칭제(臨朝稱制)가 시작됩니다. 본격적으로 외척정치가 시작된 것은 4대 화제 때부터이고(물론 3대 장제 때도 마황후의 섭정이 있었지만...) '환관정치'는 장제 때부터 이미 싹수가 보이기 시작함...-_-;
명제는 나름 정치도 잘했고, 반초의 서역원정도 있었던 시기가 이때죠. 서역경영은 장제 때부터 균열이 가기 시작했고...
그럼 후한은 황제보다는 거의 외척 or 환관이 득세를 했나 보군요.
예, 쭉~~~~~ 그랬죠. 그러다가 외척정권은 하진이 십상시에게 주살당하면서 끝났고, 환관정치는 원소가 환관들을 몰살시키면서 끝납니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