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야 참으로 사는 길이 열립니다.
요한복음 10장 17절에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죽어 없어지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고”,
이것 때문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고 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말씀도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옛사람의 정욕도 죽고 육에 속한 욕심도 죽어야 합니다.
죽어야 진정으로 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12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 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정말 뜻 깊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죽는 만큼 예수님의 생명이 많이 나타난다는 말씀이고
우리가 죽는 만큼 다른 생명을 살릴 수 있기 때문에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요단강은 건널 때 그냥은 갈라지지 않았습니다.
법궤를 맨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발을 들여놓을 때
갈라지기 시작했고 그 요단강에 들어가 굳게 버티고 서 있을 때
강물이 갈라져 모든 백성이 건널 수가 있었습니다
요단강은 죽음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죽으면 교회가 살고 내가 살면 교회가 죽는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약삭빠르게 내 욕심만 채우고 내 잇속만 채우려고 하면
많은 사람을 살릴 수가 없고 내가 우직하게 손해를 보면서도
죽으려고 하면 진정으로 내가 살고 남도 살립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어차피 다 버리고 갈 터인데
미리 버리고 죽으면 영원히 살고
영원한 내 것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가복음 16장에 청지기의 직분을 반납하라고 할 때
그때야 정신 차리고 영원한 미래를 위해 베풀고 반납했더니
주인이 칭찬하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오늘도 창골산과 함께 좋은시간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