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의 거미줄 아래
아버지의 목도장
이름 세 글자
인주를 찾아서 한번 종이에 찍어보니
문턱처럼 닳아진 성과 이름
이 도장으로 무엇을 하셨나
눈앞으로 뜨거운 것이 지나간다
(중략)
어스름 귀퉁이에 아버지 흐린 이름을 붉게 찍어놓으니
제법 그럴싸한 표구가 되었으나
그림은 비어 있네
- 장석남 '목도장' 부분
한 사람을 증거하는 수많은 사물 가운데 도장만 한 것도 없다. 그 안에 그 사람의 인생이 담겼다. 인주를 묻혀 종이에 찍으면 도장에 새겨진 이름은 무한히 반복되지만, 삶이란 건 언제나 유한한 법이니 떠난 자의 도장은 아무런 힘이 없는 것만 같다. 도장이 전부 닳기도 전에 삶은 종결되기 마련이므로 대개 도장은 사람보다 오래간다.
시인은 종이에 이제 없는 아버지의 도장을 찍으며 '빈 그림'을 본다. 이 시를 이루는 힘은 바로 저 공간의 비어 있음 때문일 것이다. 그건 공허하면서도 충만해지는 무엇이다. 한 번만 불러도 꽉 차는, 그런 이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