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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씨의 시조 2
평안안씨(平安安氏)
평안안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554가구 2,26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와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평택안씨(平澤安氏)
평택안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29가구 1,07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경주양씨(慶州梁氏)
경주양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990가구 6,274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있는 계림양씨(鷄林梁氏)와의 관계는 상고할 수 없다.
김해양씨(金海梁氏)
김해양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81가구 1,487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나주양씨(羅州梁氏)
나주양씨 시조는 양열(梁悅)의 아들로 조선 중종조에 문과출신으로 도사(都事)를 역임한 양인(梁認)이다. 이 성본의 연원 등은 접할 수 없고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514가구 1,67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남양양씨(南陽梁氏)
남양양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2,173가구 7,28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남원양씨(南原梁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 (始祖本貫由來)
남원 양씨(南原梁氏)의 시조(始祖)는 양을나(良乙那)이며 양 탕(良 宕)의 후손 우량(友諒)이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공(功)을 세워 남원백(南原白)에 봉해졌으므로 제주(濟州)에서 분적(分籍)하여 본관(本貫)을 남원(南原)으로 하였다.
그러나 문헌(文獻)의 실전(失傳)으로 선계(先系)를 상고(詳考)할 수 없어 능양(能讓 : 병부공계)․주운(朱雲 : 용성군계)․윤위(潤渭 : 장영공계)를 각각 일세조(一世朝)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고려 때 견(堅)이 광정대부(匡靖大夫)에 책록되어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진현관 대제학(進賢冠大提學)을 역임하였으며, 동국(東國)의 백이숙제(伯二叔薺)라 불렸던 우(祐)가 판도판서(版圖判書)와 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에 올라 가문(家門)을 중흥시켰다.
조선(朝鮮)에서는 관료파(官僚派) 학자로서 세종(世宗)의 총애를 받았던 성지(誠之)가 유명했는데, 그는 세종(世宗) 때 신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세조(世祖)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내고 대사헌(大司憲)․대제학(大提學)을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그의 손자 연(淵)은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병․이조 판서(兵․吏曹判書)를 거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고, 증손 구신(久信)이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많은 공을 세우고 순절(殉節)하였다.
이외에도 희(喜)가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으로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을 일으켜 구국전선에 앞장선 대박(大樸)과 홍주(弘澍), 그리고 몽열(夢說)과 황(榥),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어영대장(御營大將)과 형․공조 판서(形․工曹判書)를 역임한 헌수(憲洙) 등이 가문을 빛냈다.
근대(近代)에 와서는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분연히 일어나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의병장(義兵將)
상기(相基)와 한규(漢奎), 독립운동가로 광복군 사령부
(光復軍司令部)의 총사령관을 역임한 세봉(世奉) 등이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원 양씨(南原梁氏)는 남한(南韓)에 총 52,230가구, 219,91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한양씨(南漢梁氏)
남한양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737가구 2,25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제주양씨(濟州梁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 (始祖本貫由來)
제주 양씨(濟州梁氏)의 시조(始祖)는 <탐라개국설화(耽羅開國說話)>에 나오는 삼신인(三神人)중의 한 사람인 양을나(梁乙那)이다.「영주지(瀛州誌)」에 의하면 양을나는 아득한 옛날 제주도 한라산 북족기슭 모흥혈(毛興穴 : 삼성혈이라고도 함)에서 고을나(高乙那)․부을나(夫乙那)와 함께 용출(湧出)하여 탐라개국군왕(耽羅開國郡王)이 되었고, 그의 자손 대대로 왕위를 계승하여 938년(고려 태조 28)까지 탐라를 통치해 왔다고 한다.
그후 양을나의 후손 양궁왕자(良宮王子)가 신라(新羅)에 사신으로 예방(禮訪)하니 내물왕(奈勿王 : 제 17대 왕, 재위기간 356~402)이 많은 상을 내리고 성(姓)을 양(梁)으로 하사(下賜)하였다고 하며, 그의 후손 수(洵)이 682년(신문왕 2) 신라에 들어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낸 후 한라군(漢拏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양을나를 시조로 받들고 관향(貫鄕)을 제주로 삼게 되었다.
가문(家門)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高麗) 현종(顯宗) 때 이부 시랑(吏部侍郞)과 중추부사(中樞副使)를 지낸 진(진)이 상서좌복야(尙書左僕야)로 치사(致仕)했고, 녹사(綠事) 한신(漢臣)의 아들 숙(淑)은 명종(明宗) 때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올라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한편 지지당(知止堂) 송 흠(宋欽)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던 팽손(彭孫)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소장파 현량(賢良)을 특채, 혁신정치를 실현하려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낙향하였다가 권신(權臣) 김안로(金安老)가 실각된 후 복관되어 용담 현령(龍潭縣令)을 지냈다.
명종(明宗) 때 문과에 급제한 응정(應鼎)은 팽손의 아들로 공조(工曹)의 좌랑(佐郞)과 정랑(正郞)을 거쳐 진주 목사(晋州牧使)를 역임했으며,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이어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고, 효행이 뛰어나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응정의 아우 응태(應台)는 동래 부사(東萊府使)를 지냈으며, 응정의 아들 산숙(山璹)은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을 일으켜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진주성(晋州城)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김천일을 따라 남강(南江)에 투신하였고, 그의 처 이씨(李氏)도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목에 칼을 찔러 자살했다.
정암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던 산보(山甫)는 스승이 기묘사화에 화를입자 벼슬을 단념하고 향리로 돌아가 은거(隱居)하며 학문으로 여생을 마쳤으며, 그의 아들 자징(子徵)은 효행(孝行)으로 벼슬에 천거되어 거창(居昌)과 석성 현감(石城縣監)을 역임했고, 장인 김인후(金麟厚)의「하서집(河西集)」에 행장(行狀)을 썼다.
당대의 석학(碩學) 우계(牛溪) 성 혼(成 渾)의 문인(門人)으로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의 폐모론(廢母論)을 개탄했던 천운(千運)은 감찰(監察)과 사섬시 주부(司贍寺主簿)를 역임했고, 부호군(副護軍) 우규(愚圭)의 아들 거안(居安)은 박세당(朴世堂)과 윤 증(尹 拯)의 문하에서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했으며, 일찍부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쌍봉(쌍峯)에 살면서 학문에만 전력했다.
한말에 와서는 회일(會一)이 의병(義兵)을 일으켜 화순(和順)과 동복(同福) 등지에서 일본군(日本軍)과 항전하다가 강진(康津)에서 체포되어 단식 7일만에 순국했으며, 한묵(漢黙)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 중 옥사하여「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창간, 국민의 항일사상 고취에 앞장 섰던 기탁(起鐸)과 함께 제주 양씨(濟州梁氏)의 의맥(義脈)을 살렸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제주 양씨(濟州梁氏)는 남한(南韓)에 총 26,699가구, 113,41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청주양씨(淸州梁氏)
청주양씨 시조는 미상이다. 인물로 조선 숙종조에 양효상의 아들 양성준(梁聖駿)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 성본의 연원 등은 접할 수 없고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2,649가구 8,49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남원양씨(南原楊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 (始祖本貫由來)
남원 양씨(南原楊氏)의 시조(始祖)는 양경문(楊敬文)인데,「남원양씨족보(南原楊氏族譜)」에 의하면 경문(敬文)은 고려(高麗)에서 지영월군사(知寧越郡事)를 역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후손들은 조상(祖上)들의 토착 세거지(土着世居地)인 남원(南原)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조선(朝鮮) 때 집의(執義)를 역임한 자유(子由)와 중종(中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호조 정랑(戶曹正郞)을 지낸 공준(公俊), 그리고 산림은일(山林隱逸)로 당대의 명사들과 이름을 나란히 한 백운거사(白雲居士) 공말(公말)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외에도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거쳐 부사(府使)를 역임한 홍(洪), 경사(經史)에 능통하였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을 일으켜 구국전선에 나섰던 사형(士衡),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한 회영(會榮) 및 의병활동을 하다가 옥사(獄死)한 영(泳) 등이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원 양씨(南原楊氏)는 남한(南韓) 총 9,703가구, 40,99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밀양양씨(密陽楊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 (始祖本貫由來)
밀양 양씨(密陽楊氏)의 시조(始祖) 양 근(楊 根)은 청주 양씨의 시조인 상당백(上黨伯) 기(起)의 다섯째 아들로 고려 말에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청주 양씨에서 분적(分籍), 본관(本貫)을 밀양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 후 근(根)의 아들 문(文)이 조선 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고, 손자 세경(世經)이 전서(典書)를 지냈으며, 8세손 자부(自敷)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의영고 주부(義盈庫主簿)를 역임했고, 12세손 허국(許國)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가문을 중흥시켰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밀양 양씨(密陽楊氏)는 남한(南韓)에 총 1,161가구, 5,18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화양씨(中和楊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 (始祖本貫由來)
중화 양씨(中和楊氏)는 고려(高麗) 고종(高宗 : 제 23대 왕, 재위기간 : 1213~1259) 때 정승(政丞)을 역임하고 당악(唐岳 : 중국의 옛 지명)군(君)에 봉해진 포(浦)를 시조(始祖)로 하고 중화(中和)를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후 포(浦)의 아들 동무(東茂)가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경무(慶茂)가 문하시중(門下侍中)을, 견무(堅茂)가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고, 5세손 원격(元格)이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8세손 희지(熙止)는 성종(成宗)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혔고 대사간(大司諫)과 관찰사(觀察使)․도승지(都承旨)를 거쳐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올랐다.
또한 학자(學者)로 이름난 덕록(德祿)은 임진왜란 때 종질(從姪) 의직(懿直)의 증손 현망(顯望)은 현종(顯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군수(郡守)․부사(府使) 등 외직(外職)을 역임하면서 선정(善政)을 베풀어 명망(名望)이 높았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중화 양씨(中和楊氏)는 남한(南韓)에 총 1,154가구, 4,72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청주양씨(淸州楊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 (始祖本貫由來)
양씨(楊氏)는 중국(中國)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원(元)나라에서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올라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에 이른 양 기(楊 起)가 황제(皇帝)의 명(命)을 받고 제국대장공주(薺國大長公主 : 충령왕비)를 배종(陪從)하여 고려(高麗) 원종(元宗) 때에 들어와서 정착(定着)하게 된 것이 우리 나라 양씨(楊氏)의 시조(始祖)가 된다.
그 후 삼한창국공신(三韓昌國功臣)으로 상당백(上黨伯)에 봉해졌고 관적(貫籍)을 하사(下賜) 받음으로서 후손들이 본관을 청주(淸州)로 항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기(起)의 아들 지수(之壽)가 광정대부(匡靖大夫)에 올라 도첨의 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으며, 손자 백연(伯淵)이 동강 도지휘사(東江都指揮使)와 서강 부원수(西江副元帥)로서 왜구(倭寇)를 격퇴하여 찬성사(贊成事)가 되어 정방 제조(政房提調)를 겸했고, 증손 영수(英秀)가 밀직부사(密直副使)와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하여 가문(家門)을 중흥시켰다.
조선(朝鮮)의 무신(武臣)으로 무예에 뛰어났던 정(汀)은 세조(世祖) 때 좌익공신(左翼功臣)으로 양산군(楊山君)에 봉해졌고 공조 판서(工曹判書)와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를 거쳐 평안도 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에 이르렀다.
또한 안평대군(安平大君)․김 구(金 絿)․한 호(韓 濩)와 더불어 조선(朝鮮) 전기(前期)에 사대명필(四大名筆)로 일컬어졌던 사언(士彦)은 명종(明宗)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강릉 부사(江陵府使)와 함흥 부윤(咸興府尹)을 지냈으며 시문(詩文)에도 뛰어났다.
이 외에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을 일으켜 금산(錦山) 전투에 참가하였다가 칠백의사(七百義士)와 함께 장렬하게 전사한 응춘(應春)과, 호종공신(扈從功臣)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내고 홍농군(弘農君)에 봉해진
순민(舜民), 그리고 서예(書藝)에 뛰어났던 만고(萬古) 등이 청주 양씨(淸州楊氏)의 가문(家門)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청주 양씨(淸州楊氏)는 남한(南韓)에 총 6,856가구, 27,83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양양씨(南陽樑氏)
남양양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창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957가구 3,21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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