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6.25전쟁에 대해 어떻게,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정규 교육을 받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6.25전쟁에 대해 학교에서 배우셨을 겁니다. 제가 학교에서 배운 6.25전쟁에 대한 개략적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과 함께 조//선은 해방을 맞았고, 또한 곧바로 38선이 그어져 남과 북으로 국토가 분단되고 말았습니다.
2. 소련의 군사적 지원을 받은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전격 남침을 감행,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3. 하지만 우방인 미국은 공산권의 발호에서 민주주의 남한을 지킨다는 정당한 명분 하에 북한의 남침을 저지하기로 결정하고 이 전쟁에 참전하게 되며,
4. 곧바로 유엔군도 연합군을 구성하여 전쟁에 참가하게 됩니다. 인//민//군의 압도적인 공세에 밀린 국군과 연합군은 경상도를 제외한 남한 전 지역을 빼앗기게 되지만,
5/6.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감행으로 전세를 회복, 서울을 수복한 뒤 단숨에 압록강까지 치고 올라갑니다.
7. 하지만 통일이 이뤄지려는 그 때 안타깝게도 10월 8일 인해전술로 유명한 중공군이 참전, 전세가 역전되어 국군과 연합군은 경기도 오산까지 밀려 내려오고야 맙니다.
8. 압도적인 숫자의 중공군에 밀리던 연합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반격, 서울을 다시 수복하고 38선 근방에서 전선이 고착화되어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이어지게 됩니다.
9. 이후 1951년 7월에 개성에서 미국과 중국 북한이 참가하여 휴전회담을 시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포로 교환문제로 1년 6개월 이상이나 회담이 이어졌고, 그러는 와중에도 크고 작은 전투는 끊임없이 벌어졌습니다.
10. 1953년 7월 27일, 결국 협정이 체결되었고, 38선을 기점으로 남과 북의 분단이 고착화됨으로써 6.25 전쟁은 휴전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후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영향권에 편입되어 아시아 공산주의 국가로 성장해 나갔고, 남한은 일본ㅡ대만ㅡ필리핀을 잇는 미국의 극동 방위선에 편입됐습니다. 폐허가 되었던 남한은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재건되었고, 스스로 한강의 기적을 일구고 경제발전을 거듭하여 현재는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습니다. 미국은 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 공산주의의 침략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었고, 전후의 피폐해진 경제상황에서 굶주리는 우리 국민들에게 많은 원조를 해주어 우리 국민들이 재기할 수 있도록 인도적 차원에서 도와주었습니다.
이 정도면 제가 학교에서 배운 6.25의 전후사정에서 어긋남이 없고, 여러분들께서 상식으로 알고 계신 내용과도 크게 상치되는 부분이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진상을 과연 제도권에서 알려주는 그대로, 곧이곧대로 받아들여도 좋은 것인지 사례를 들어가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2. 전쟁 전 남과 북의 동향.
가. 북한의 군비증강
1948년 12월 17일, 소련 중국 북한의 3국 비밀 전략회의가 열렸습니다. 이 회의에서 3국은 북한의 군비증강 계획에 관해 원칙적인 합의를 보았으며, 그 합의사항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추후 18개월 동안(49년~50년 6월까지) 아래와 같은 군비증강책을 실시한다.
➀ 북한에 이미 창설한 3개 사단 1개 혼성여단 외 새로 편성될 6개 사단과 1개 돌격사단분, 총 열개 사단 분의 장비를 제공한다.
➁ 3개 기계화부대 분의 장비를 제공한다.
➂ 7개 보안대대 분의 장비를 제공한다.
➃ 공군창설을 위해 정찰기 20대, 전투기 100대, 중/경 폭격기 30대를 제공한다.
➄ 120명의 군사고문단을 평양에 파견한다.
➅ 1949년 5월 말까지 북한통용 화폐가치로 100억 상당의 군수품을 제공한다.
➆ 중공은 만주 동북의용군 3만 명을 무장한 채 입북시켜, 이들을 기간으로 8개 전투사단과 8개 예비사단을 편성케 한다.
➇ 북한은 웅기, 청진, 원산 등 동해안 여러 항구를 소련의 잠수함 기지로 제공한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할 당시엔 보잘 것 없던 북한의 군사력은 급속도로 확장되어서, 전쟁 발발 직전에는 각종 신형 무기를 보유하는 한편 도합 169000명에 이르는 대병력을 갖출 수 있었습니다. 북한이 무력도발 남침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소련과 중국의 전폭적인 원조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 국군의 열악한 상황.
북한이 1950년 6월까지 착착 전쟁준비를 하는 동안, 남한은 무얼 하고 있었던 걸까요? 남한에서는 1946년 1월 15일 남//조//선 국방경비대를 발족하였습니다.
하지만 국방경비대의 무장은 너무 빈약해서 전쟁수행보다는 치안유지에나 적합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경비대를 무시하는 경찰과 사사건건 충돌해서 유혈사태가 벌어지는 일이 많았습니다. 또한 국방경비대에는 남/로/당원들이 대거 침투하여 내부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48년 4월 3일, 제주에서 남/로/당이 주동이 된 4.3사태가 벌어졌는데요, 이를 기화점으로 군 내부의 남로당원들이 호응, 14연대 반란을 시작으로 4연대 일부, 6연대 일부, 15연대가 반란에 가담했습니다. 반란군은 순천, 보성, 광양, 구례를 장악하면서 세를 확장하다가 6개월 만에 진압되었습니다.
이 사건 때문에 남/로/당은 불법단체로 규정됐는데요, 군에서 4749명이 남/로/당원으로 적발돼서 숙청됐고, 숙청기간 동안 탈영한 남/로/당원이 5568명이었습니다. 전군이 98000여 명이었는데, 그 중 10%, 한 개 사단분의 인원이 좌익 공산세력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1949년 5월 4일, 국군 8연대의 표무원, 강태무 두 대대장이 각자의 대대를 이끌고 월북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 밖에도 강동정치학원 출신의 인/민/유격대가 48년 11월부터 50년 6월까지 모두 다섯 차례 남파되어 국군과 전투를 치뤘고, 전쟁 전까지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남파된 인/민/유격대원은 총 2450여 명이었습니다.
또한 38선에서는 49년 한 해 동안만 874회에 이르는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고, 그 대부분은 북한의 도발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6.25 전까지 내전을 치르고 인/민/유격대와 전투를 치르느라 국군은 훈련이 부족했고, 군수물자도 태부족이었습니다.
국군이 미군으로부터 지원받는 군사원조는 65000명 분량이었는데 실제로는 병력이 10만 명으로 증강이 되었기 때문에 물자가 부족하고 무장이 빈약한 것은 어쩔 수가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전쟁 직전, 북한과 남한의 군사력은 북한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 육군참모총장의 정보 묵살 의혹.
“6월 25일, 일요일 새벽을 틈타 인/민/군이 노도처럼 밀려 내려오자 안심하고 장병들에게 휴가를 보냈던 국군은 미리 대비를 하지 못 했기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6.25에 관해 이야기할 때 흔히 듣는 말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육군 수뇌부에서 그러한 남침 징후를 몰랐을까요? 전쟁 전에 육군본부로 보고된 정보들을 살펴보겠습니다.
▪ 1950년 3월 25일 북한 수 개 사단이 38선에서 39선에 전진배치, 만주에서 입북한 전사들이 각 사단에 배속하여 그 수가 증가하고 있음. 북한 전역에서 10만에서 15만에 이르는 강제징집 실시. 3월 중순 38선 일대 주민을 5킬로 북쪽으로 소개시킴.
▪ 1950년 4월 15일 북한의 전면남침 징조 관측됨.
▪ 1950년 4월 28일 북한 공군 중위 이건준이 YKA-9형 전투기를 몰고 월남, “몇 개월 사이에 전쟁이 발생할 것이다.” 라고 진술.
▪ 1950년 6월 10일 춘천 오대산, 강릉 해상을 통해 인/민/유격대 침투, 포로 심문 결과 “전쟁준비는 완료되었고, 명령하달만 기다리고 있다.”는 진술 확보.
▪ 1950년 6월 20일 정보원 김기희를 통해 북의 전쟁준비 사실 입수.
▪ 1950년 6월 22일 동두천 1연대에 인/민/군 전사 귀순, 남진을 위한 38선 지뢰해체 명령을 받고 탈영했다고 진술.
▪ 1950년 6월 22일, 국군 7연대는 유천면 인/민/군 부대에 1개 대대의 전차가 집결하고 포 진지를 만들어 포신을 남으로 지향, 빈번한 차량 이동을 관측, 보고.
▪ 1950년 6월 24일 옹진반도 국군 17연대 전면에 인/민/군 증강, 모든 포신이 남쪽을 지향. 군관들이 남쪽을 지속적으로 관측하는 것이 목격됨.
▪ 1950년 6월 24일 국군 9연대는 양문리 38선 2킬로 전방 고지에 인/민/군 군관들이 지도를 펴고 남쪽 지형을 관찰하는 모습을 목격.
▪ 1950년 6월 24일 국군 1연대 정면 초성리 북쪽 고지에서 인/민/군 군관들이 남쪽 지형을 관찰하는 모습이 목격됨.
6월 22일부터 24일 오후까지 육본 정보과는 전방부대에서 오는 전화를 받느라 24시간 정신이 없었고, 육본 정보국의 장도영 국장은 각종 보고를 종합 분석한 결과 인/민/군의 전면남침 가능성을 채병덕 참모총장에게 보고합니다.
한편 미 군사고문단은 북한의 남침은 불가능하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해 왔고, 채병덕 참모총장은 서울에 가만히 앉아있으면서 전방에서 들어오는 긴급한 보고들을 묵살하고 인/민/군의 남침은 불가능하다는 미군의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었습니다.
라. 이해할 수 없는 인사이동 및 군수후송 조치.
인/민군/의 전면남침 위협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1950년 6월 10일 채병덕 참모총장은 전군에 인사이동 명령을 내렸습니다. 인민군 남침 시 가장 중요한 방어지역인 포천과 의정부의 사단장들을 교체하였고, 서울 방어에 가장 중요한 7사단과 수도사단의 사단장을 전방사단과 맞바꾸는 등, 부대를 혼란케 하였습니다.
또한 전쟁 시 가장 중요한 부서인 작전국의 국장, 차장, 과장을 모조리 갈아치워 버리고 각 부대를 타 부대에 배속시켜 지휘에 혼란을 유도했습니다.
▪ 이형근 준장, 8사단장 -> 2사단장 ▪ 김종오 대령, 참모학교 -> 6사단장
▪ 유재홍 준장, 2사단장 -> 7사단장 ▪ 이상가 대령, 16연대장 -> 8사단장
▪ 신상철 대령, 6사단장 -> 인사국장 ▪ 강문봉 대령, 작전국장 -> 미 참모대학
▪ 김홍일 소장, 육사교장 -> 참모학교장 ▪ 이준식 소장, 7사단장 -> 육사교장
▪ 김점곤 중령, 12부연대장 -> 정보국 차장
▪ 박림항 대령, 3연대장 -> 작전국 차장 ▪ 정래혁 중령, 참모학교 -> 작전과장
▪ 장창국 대령, 참모학교 부교장 -> 작전국장
▪ 이종찬 대령, 국방부 1국장 -> 수도경비사령관
▪ 2사단 25연대 -> 6월 20일 -> 7사단 배속 -> 의정부
▪ 7사단 2연대 의정부 -> 6월 15일 부로 수도사단 -> 6사단 배속 6월 23일 홍천으로
▪ 6사단 8연대 홍천 -> 수도사단 배속 -> 서울
또한 육군 보유 차량 총 1500대 중 500대를 뜬금없이 정비를 해야 한다며 부평으로 후송 명령을 내렸고, 중화기의 일부도 수리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부평으로 후송토록 명령해 전쟁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게 했습니다.
마. 6월 23일의 의혹
6월 23일 낮, 미 군사고문단장 직무대리인 참모장 헨리 대령은 일본에 가 있는 브라운 준장의 전화명령을 받고 채병덕 참모총장을 방문했습니다. 이날의 대화에서 헨리 대령은, 24일 밤 한국 육군참모학교 구내의 장교구락부 개관을 축하하는 성대한 칵테일 파티를 열 것을 제안했습니다. 또한 비상경계령을 해제하도록 설득하여, 채병덕 참모총장은 이를 수락합니다.
(1) 비상경계령 해제와 휴가 외출 실시
채병덕 참모총장은 헨리 직무대리와 만난 후 김백일 참모부장을 불렀습니다. 6월 24일 낮 12시를 기해, 전군에 내려졌던 비상경계령을 해제하고 장병들에게 휴가와 외출을 보내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명분은 농번기이므로 군 장병들이 휴가를 나가 농사일을 돕도록 하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24일 오후, 정보국에서는 참모총장에게 보고하여 경계령 부활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참모총장은 오전에 해제하고 오후에 다시 경계령을 내릴 수는 없다며 요청을 묵살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전방 부대는 텅 비고 주말 도심은 휴가를 나온 장병들로 흥청거렸습니다.
(2) 24일 밤의 성대한 파티
이렇게 하여 24일 밤, 장교구락부 개관 파티가 열렸고, 몇 달째 계속되던 경계령이 해제된 데다 주말 밤이기도 해서 육본 수뇌부와 일선 지휘관을 포함한 50여 명의 고급장교들이 참석했고, 재경 미 군사고문단 장교들도 여럿 참석을 했습니다. 이 파티는 밤 10시경 끝났지만, 참석자들은 장소를 옮기며 25일 새벽 2시경까지 술을 마셨습니다.
즉, 남침이 있기 2시간 전까지 고주망태가 되어 골아 떨어져 있던 겁니다. 이후 국군은 전쟁발발 후 각급 지휘관들이 인사불성으로 자리를 비운 탓에 남침에 대해 명민한 대응과 파악을 할 수 없었고, 육군본부 장교들은 6시간이나 지난 후에야 북한의 전면공격이라는 것을 전달받고 본격적으로 대응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인/민/군/이 포천을 점령하고 의정부를 향해 진격태세를 갖추고 있을 때였습니다.
(3) 도쿄에 가 있던 미 군사고문단장
이 때 한국군을 총 지휘해야 할 미 군사고문단장 브라운 준장은 이미 6월 10일에 정년퇴임을 했고, 24일 밤에는 귀국을 위해 도쿄로 가 있었습니다. 또한 채병덕 참모총장에게 파티를 건의했던 군사고문단장 직무 대리헨리 참모장은 정작 자신은 파티에 얼굴만 비춘 뒤 주말 휴가를 명분으로 밤 비행기를 타고 도쿄로 떠나버렸습니다.
그렇다면 몇 가지 의혹이 생깁니다. 미국은 과연 북한의 남침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을까? 알고 있었다면 왜 미리 방비하도록 하지 않았는가? 채병덕 참모총장은 어째서 정보를 묵살하고 의도적으로 북한의 남침을 도와주었을까?
바. 남로당의 공작인가?
앞서, 충실한 우익인사로 알려져 있던 국군 8연대의 표무원, 강태무 두 대대장은 남/로/당원이라는 그들의 정체가 들통 날 위기에 처하자 49년 5월 4일, 각자의 대대를 이끌고 월북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편 의정부 주둔 7사단 공병대장 최정훈 소령은 6월 25일 오전 9시에 운현궁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주위에 알려, 공병대대 작전과장과 7사단 참모들은 24일에 모두 외출을 했습니다. 상당수 공병대대 장병들도 비상이 해제되자 상관의 결혼식에 참가하기 위해 외출을 나와 서울로 갔습니다.
그러나 최소령의 결혼식은 위장결혼식이었고, 인/민/군 남침으로 비상이 걸렸으나 최정훈 소령과 작전과장은 끝내 부대에 복귀하지 않고 행방불명이 됐습니다. 이 탓에 7사단 공병대는 완전히 마비되어 동두천에서 의정부, 양문리에서 의정부에 이르는 구간의 교량폭파, 장애물 설치 등을 전혀 하지 못 해 인민군에게 성문을 열어준 꼴이 되었습니다. 최정훈 소령과 공병대대 작전과장은 남/로/당 비밀당원이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또한 일부 연구가들에 따르면 채병덕 참모총장도 남/로/당/의 공작을 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49년 무렵엔 이미 남/로/당 세력이 군에서 축출되었지만, 비밀리에 군 수뇌부에 남아있는 자들이 존재했습니다. 사후 조사결과 채병덕 참모총장의 부관인 라엄광은 장교 병적부에도 없는 남/로/당 공작원임이 밝혀져서 채병덕은 남/로/당과 직/간접적으로 분명히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렇다면, 채병덕 참모총장은 남/로/당의 공작을 받아 군의 방비를 스스로 허물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만, 미 군사고문단은 어째서 파티를 건의해서 전쟁직전에 국군 수뇌부를 마비시켰는지 궁금합니다. 단순히 우연히 그렇게 겹친 것이 아니겠느냐는 반박이 있을 수 있겠는데요, 정황상 미국이 북한의 남침을 몰랐으리라고는 판단할 수 없습니다. 미국이 국군으로 하여금 비상경계령을 해제하도록 하면서까지 말도 안 되는 파티를 열게 한 이유가 뭘까요? 다음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3. 미국의 한반도 정책
가. 애치슨 선언과 태도 변화
1950년 1월 12일, 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미합중국의 태평양 지역 방위선은 알류산 열도, 일본 본토, 오끼나와 제도를 거쳐 필리핀 제도로 연결되는 라인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이른바 ‘애치슨 선언’이라는 것인데요, 이 라인을 벗어난 태평양 기타 지역에 있어서는 어떤 군사적 공격으로부터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전에 이미 미국은 49년 초부터 주한미군을 단계적으로 철수, 49년 6월경에는 500여명의 비 전투 병력과 군사고문단만을 남긴 채 모두 철수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반도가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완전히 제외된 셈이었습니다. 또한 트루먼은 애치슨 선언이 있기 일주일 전에 성명을 통해 한국과 대만에 군사적 불개입 정책을 천명했습니다. 또한 미 통합참모본부에서 작성한 아시아에 관한 전략계획서의 한국 부분에 대해 “미국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한대도 결코 무력의 수단으로 한국을 방위하지 않는다.”라고 명시해 이를 국제사회에 공개한 바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정작 전쟁이 터지자 하루 만에 공군을 투입해 전선에 개입했고, 이틀째 되는 27일에는 유엔안보리 이사회를 회동해 연합군 파병 결의안을 통과시킵니다. 그리고 전쟁 발발 5일 뒤인 6월 30일, 지상군 파병을 결정할 정도로 발 빠르게 6.25 전쟁에 깊이 개입함으로써 전쟁 직전까지의 대 한반도 정책을 손바닥 뒤집듯 뒤집어 버립니다. 이 같은 미국의 정책은, 북한과 공산권으로 하여금 남침을 하도록 유도한 것이라는 후대의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정책 돌변에 대한 미국의 변명은 “공산주의의 발호로부터 민주주의 국가를 수호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미국은 “정말 몰랐다. 예상 밖이다.” “남침 준비설은 더러 듣기는 했어도 설마, 믿을 수가 없다.” “주한 미 군사고문단장 브라운 준장으로부터도 남북 간의 급박한 사태는 보고되지 않았다.”라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그것은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중 브라운 준장으로부터 남북 간의 급박한 사태에 관해 어떤 보고도 받지 못했다는 변명은 6.25와 관련된 인사들이 특히 강조하는 단골메뉴입니다.
브라운 준장이 주한미군 군사고문단의 최고책임자였기 때문에, 그의 보고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이러한 주장은 넌센스에 불과하다는 것은 다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 당시 미국의 첩보기관들
당시에는 6.25 직전까지 상당한 조직망을 갖추고 대북 첩보활동을 하던 미국 정보기관이 여럿 있었습니다. CIA는 물론, 주일 미 극동군 총사령부 제2부장 월로비 소장(G2) 휘하의 캐논첩보기관, 역시 G2부장 휘하의 8240첩보부대, 미 공군 특수첩보대 등 최소한 3개 이상의 첩보기관이 북한, 만주, 연해주, 중공, 모스크바까지 원정해 첩보활동을 펼쳐, 워싱턴 통합참모본부와 CIA본부로 막대한 정보를 전송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 맥아더 장군이 사령관으로 있는 극동군 총사령부에서는 휘하의 캐논첩보기관과 8240첩보기관으로부터 올라온 첩보를 검토하여 워싱턴에 보고했습니다. 그 정보 건수는 주한미군이 철수 완료한 다음날인 1949년 6월 30일부터 전쟁 발발 직전까지 1년 간 무려 1195건이었고, 1950년 초부터 전쟁이 일어나기 전날까지 약 6개월 동안 보고된 긴급 정보 건수만 해도 417건에 달합니다.
미국이 극동지역 CIA로부터 보고를 받지 못 했다고 우기더라도, 극동군 총사령부에서 올라온 보고를 받지 못 했다고 변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미국이 북한의 남침계획을 몰랐으리라고는 절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1950년 초 브라운 준장은 “현재의 종합적인 한반도 정세 판단으로는 한국군은 적당한 규모이며 훈련도 아시아에서는 1급 수준이다. 북한군의 훈련은 부실하며 사기는 낮다. 소련의 대규모 원조는 믿기 어렵다. 만약 남침이 일어나도 한국군은 그들을 물리칠 수 있다.” 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워싱턴에 보낸 바 있습니다.
브라운 준장은 1950년 초 북한이 남침을 할 수 있다는 한국 육본의 보고서를 받고도 묵살했습니다. 또 미 군사고문단 휘하에는 정보기관이 없었기 때문에 위와 같은, 한반도는 안전하다라는 보고서를 워싱턴에 보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추측하건대 그와 같은 브라운의 보고서는 전쟁 발발 후를 대비해 만들어 놓은 히든카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현지의 최고 책임자 브라운 장군의 정세 보고서를 믿지 않을 수 없었다.”라는 변명이 가능하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미국은 브라운 준장을 들먹이며 6.25발발을 예측하지 못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다. 걸프전 참전의 예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듯한 태도를 보이다가 막상 일이 터지면 전광석화처럼 개입하는 미국의 이러한 수완은, 걸프전 때도 그대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라크는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가 경제적 압박을 가하자 쿠웨이트 침공을 계획하고, 그 결의를 미국에 알렸습니다. 이 때 미국은 쿠웨이트와의 국경분쟁에 미국은 언급할 입장이 아니라고 대응하여, 사실상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승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태도를 돌변하여 이라크와의 대대적인 전쟁을 준비하면서 평화해결 가능성을 애초에 배제했습니다. 이라크가 중동평화회의를 개최하면 물러날 수도 있다고 제안했지만 부시 대통령이 일언지하에 거절을 했던 것입니다.
"쿠웨이트와의 국경분쟁에 대해 미국 정부는 의견을 말할 입장이 아닙니다.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가 정부의 보도관에게 이 점을 강조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위의 발언은 1990년 7월 미국 대사 에이프릴 글래스피가 사담 후세인 대통령에게 한말이다. 실제로 미국이 이라크를 자극함으로써 쿠웨이트 침공을 유도해놓고는 오히려 그것을 군사개입의 구실로 삼았다는 증거가 있다. 이라크가 쿠웨이트 침공을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가 자신들에게 혹독한 경제적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다.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쿠웨이트 침공 결의를 미국에 전했을 때, 미국 정부는 후세인에게 사실상의 승인의사를 전달한 셈이다.
그러나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이 시작되자 부시 대통령은 대대적인 이라크와의 전쟁을 준비하면서 평화적인 해결가능성을 애초부터 배재해버렸다. 이라크는 (체면을 세우려는 정도의 의의밖에 없었을지라도) 중동평화회의가 개최되면 쿠웨이트에서 철수할 수 있다고 제안했지만, 부시 대통령은 그 제안을 그 자리에서 거부했다.
라. 중공에 협력한 미국
(1) 대만의 본토 상륙을 저지
전쟁 발발 이틀 후인 1950년 6월 27일, 대만의 장 제스 총통은 본토를 찾을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본토로의 진격 의도를 내비쳤으나 트루먼 대통령은 단호하게 반대를 했습니다. 또한 미국 제 7함대를 대만과 중공 사이의 해상에 배치, 대만군의 본토 진출을 물리적으로 차단했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했습니다.
“미국이 자유중국으로 하여금 중립을 지키게 한다면서 제 7함대를 대만해협에 파견함으로써 중공의 한국전 참전이 가능해졌다. 이것은 장 제스 50만 군을 막아줌으로써 중공을 보호한 결과를 초래했다. 따라서 중공은 본토 중심부를 지켜야 하는 2개 군을 안심하고 동북부 압록강 북쪽으로 뺄 수 있었다.”
(2) 중공군을 끌어들인 워싱턴
국군과 연합군이 압록강까지 치고 올라갔을 때, 1950년 10월 중/공/군은 참전을 선언하고 압록강 도강을 실시했습니다. 이 때 압록강과 두만강의 다리들을 폭파하면 중/공/군의 도강을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있었으나, 미 통합참모본부는 어떤 이유에선지 폭격금지명령을 내린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중/공/군 도강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맥아더 장군은 명령을 어기고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 등 여섯 곳의 교량을 즉시 공중폭격으로 파괴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맥아더는 집결한 중/공/군의 참전을 대비하여 본국에 병력과 군장비, 보급품 지원을 요청했지만 묵살되었기 때문에 중/공/군이 내려온다면 맞서 싸울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맥아더의 폭격 명령은 워싱턴으로부터 날아온 전보로 즉시 철회되고 말았습니다. 마샬 국방장관은 ‘한/만 국경에서 북한 쪽으로 2킬로미터 범위에 있는 모든 목표에 대한 폭격의 금지’ 명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한편 미 극동군 총사령부에는 중공군 제4야전군 지휘하의 제38, 제39 및 제40군단이 교량을 건너 계속 신의주로 들어오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맥아더는 강력한 항의전문을 워싱턴에 보내 교량 폭파를 금지하려면 중/공군/ 대병력에 대응할 수 있는 병력, 무기, 장비 등을 긴급지원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워싱턴에서는 제한적 폭격을 승인했는데, 그 조건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 압록강 교량을 절반으로 나누어 그 이북만을 폭격할 것.
▪ 압록강 이북 영공을 침범하지 말 것.
폭격기가 출격하자 중공군들은 완충지역 일대에 고사포를 늘어놓고 집중포격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폭격제한 때문에 고사포에 대해 반격을 할 수 없었고, 적 미그기가 출격하여 폭격을 방해했지만 추격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서너 차례의 출격에도 불구하고 교량 폭격은 실패하고 맙니다.
또한 통합작전본부는 다음과 같은 명령도 하달했습니다.
▪ 만주 방향으로 도주하는 북한군에 대하여 모든 폭격이나 기총소사를 금지할 것.
▪ 나진을 폭격하지 말 것.
▪ 압록강의 수풍 수력발전소를 폭격하지 말 것.
나진은 블라디보스톡에서 북한으로 투입되는 물자를 집적하는 보급기지로서, 중요한 공격 대상이었고, 수풍 수력발전소는 만주와 시베리아 지역에 전기를 공급하는 곳으로서 폭격 시 중/공/군과 인/민/군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전략적 목표였습니다.
미 극동공군 사령관 스트레이트 메이어 사령관은 후일 이렇게 술회했습니다.
“우리에게는 폭격기 전투기 정찰기 등이 충분해서 압록강 북쪽의 적 보급시설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었으며, 압록광과 목단강 사이에 주둔해 있는 적 주력을 완전히 괴멸시킬 수도 있었다. 또한 중공의 철도시설을 파괴하여 보급을 차단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에게는 그런 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많은 미국 청년들의 피가 한국에 뿌려졌다.”
또한 당시 중/공/군 제4군 사령관 임표는 후일 중공 내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단을 배포했다고 합니다.
“맥아더가 나의 보급기지 및 통신시설과 압록강 교량 등에 대해 공격하는 것을 워싱턴 당국이 금지한다는 보증이 없었던들, 나는 공격을 개시하여 부하들이나 나의 군인으로서의 평가를 위험에 내맡기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맥아더 장군은 자신의 작전 계획이 적군에게 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회고록에 적고 있는데요, 그 가능성을 짚어보겠습니다.
마. 공유하는 작전 정보?
당시 미군은, 군부에서 작전 보고서를 올리면 정부 고위 관료를 통해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대통령의 승인이 떨어지면 계획을 실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UN과의 협약조문 때문에 대통령을 거치고 난 정보를 UN의 ‘정책 및 안전관리국장’에게 보내야 했고, 그는 이것을 UN총장에게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당시 UN의 정책 및 안전관리국장이 누구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1945년에 미국의 스테티니우스 국무장관은 UN이 세계 경찰 활동을 하는 것에 동의하면서 정책 및 안전관리국장이라는 요직에 동유럽 공산국가 출신을 보직하자는 조건에 합의한 바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전 당시 정책 및 안전관리국장은 콘스탄틴 진첸코라는 소련인이었습니다.
또한 소련의 바실리예프 장군은 북한의 군사고문관이자 작전 책임자였는데, 그는 UN에서 정책 및 안전관리국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UN군사위원회’의 의장직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안전보장이사회 밑에서 전세계의 군 활동에 대한 정보를 책임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두 소련인은 UN에서 연합군 쪽의 일에 관여하는 동시에 북한의 편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이들을 통해서 연합군의 작전 기밀이 소련과 중공, 북한으로 유출되었는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그 가능성만은 충분하다고 생각되어 언급했습니다.
바. 적에게 무기를 팔다
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미 극동군 총사령부 G2에는 또다른 첩보가 입수되었습니다. 마카오와 홍콩을 통하는 루트를 거쳐, 연합군과 중공군이 전쟁물자 거래를 하고 있음이 확인된 것입니다. 1950년 초순 캐나다, 일본, 서독, 미국 등 자유진영은 중공과 공공연하게 여러 물자를 거래했으며, 홍콩은 중공의 중요한 전략물자 보급소가 되어 있었습니다.
홍콩은 1950년 현재 총 거래액이 전년도 대비 50%이상 증가했으며, 4/4분기 중 각종 자동차 차량 및 운송시설, 의약품, 세철과 강철, 비철금속 및 그 제품, 전기기계 기타 기계류 등을 광범위하게 구입해 들였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 측은 전쟁을 하면서도 전쟁 당사자인 적군을 상대로 장사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모택동의 중/공/군/은 미국의 장비와 무기로 무장을 하고 있었는데, 이는 소련으로부터 제공받은 것이었습니다. 또한 소련은 그 무기를 2차대전 말기, 연합군에 참전했을 때 미국으로부터 제공받은 것이었습니다. 결국 미국은 조기에 종결된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잉여 군수물자들을 6.25전쟁을 이용해 확실히 처분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4. 전쟁의 종결
1953년 7월 27일, 1년 6개월여를 끌어오던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전쟁의 양상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북의 남침이 있었고, 남쪽으로 내려오며 남한 전국토가 초토화됩니다. 유엔군이 참전하고,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북진을 시작해서 압록강까지 진격합니다. 이 과정에서 마찬가지로 북한 전 지역이 초토화됩니다. 그 시점에서 다시 중공군이 개입, 연합군은 다시 밀려 내려와 38선에서 전선이 고착됩니다. 그리하여 전쟁 전과 똑같은 38선에서 국경이 정해졌고, 전과 마찬가지로 북은 소련과 중국에, 남한은 미국에 예속되게 됩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우리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국군 전사자 227748명, 실종 43572명, 부상 717083명, 총 998341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민간인은 양민학살 128936명, 사망 244663명, 납치 84532명, 행방불명 303212명, 강제의용군 400000명으로 총 1161343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북한도 피해정도는 이와 비슷했으며, 사망한 인/민/군과 중/공/군을 합치면 142000명으로 집계되었으며, 남과 북에 1000만의 이산가족이 발생했습니다.
남한의 물질적 피해는 당시 국민총생산 2년분의 30억 달러, 공업시설 43%, 발전력의 41%, 탄광의 50%가 파괴되고, 공공건물, 학교, 병원 등의 시설은 물론 개인주택과 상가건물까지 전부 파괴되었습니다.
미국은 37개월 동안의 전쟁에서 33629명의 전사자와 103284명의 부상자에 9명의 실종자를 냄으로써 총 136922명의 인명손실을 냈습니다. 또 UN 15개 회원국은 총 15200명의 인명손실을 냈습니다.
미국은 인도적인 차원에서 숭고한 자유와 평화를 위해 자국 청년들의 뜨거운 피를 흘리고 막대한 전비를 소진해가면서 극동의 조그마한 소국인 남한을 사지에서 건져주었다는 것이 지금 우리들, 후대 제도권의 평가입니다.
5. 문제 제기
그러나 저는 이상과 같은 조사를 통해서, 그와 같은 순진한 발상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싶습니다. 6.25전쟁은 열강들의 이익을 위해 사전에 계획된 전쟁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조사한 내용만으론 모든 것을 입증할 수 없고,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가능성만은 제시할 수 있다고 봅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의 예상치 못한 조기 종전으로 인한 잉여 전쟁물자 때문에 경제공황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거대한 군수산업이 아사지경에 이르러 트루먼 행정부를 압박하던 때, 국공내전이 벌어졌습니다. 미국은 국부군에 군수물자를 제공함으로써 경제 공황의 타개책으로 삼았고, 뒤이어 6.25전쟁으로 불황을 극복했습니다.
휴전협정 체결 이후 미국은 한미방위협정을 빌미로 하여 우리의 숨통을 조였습니다. 우리의 국군 전력 강화 의지는 반세기 이상이나 미국에 의해 억제되어 왔습니다. 단적인 예로 장거리 미사일 사거리 제한 협정을 들 수 있겠습니다. 한국은 미국에 의해 언제나 북한보다 열세병력으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북한의 위협이 상존하게 되었고, 이를 견제한답시고 미국은 반세기 이상이나 남한에 미군을 주둔시켜 왔습니다.
미국은 1995년에야 평화시 훈련작전권을 한국에 이양했습니다. 전시에는 주한미군사령관이 국군통수권을 행사하게 되니 우리나라가 과연 자주국가라 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스럽습니다. 제가 군 생활을 하면서 가장 회의를 느꼈던 점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나라를 지키러 군대에 갔지만 전쟁이 나면 우리민족의 이익보다는 미국의 이익을 우선시 할 미 군부의 명령에 따라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점에 저는 분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6.25 전쟁을 통해 우리나라는 막심한 피해를 입은 반면에, 다른 나라들은 나름대로 이익을 건졌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중공은 기아로 인해 민중봉기 위험이 있었지만 전쟁을 통해 국민을 단결하여 위기를 넘겼고, 일본은 군수기지로써 막대한 수입을 올려 전후 복구를 하고 경제발전의 터전을 닦았습니다. 미국은 잉여 군수품을 해결하고 군수산업을 부흥시켜 경제난을 타파했습니다. 또한 주한미군을 주둔시키며 남한의 전후 복구는 미국이 도맡아 하게 되었으며, 이것 역시 미국 경제에 이익이 되었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현재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전후복구 사업에 열을 올리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후 남한은 미국에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종속되어 지금은 미국과 떼려야 뗄 수가 없는 형님 아우 사이가 되어버린 것이 기정사실입니다. 지금도 미국은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 불량국가로 낙인찍어 강경책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남과 북의 평화적인 통일을 원하지만, 미국이 존재하는 한 그것은 요원한 일입니다.
전쟁이 있는 곳에 미국의 이익이 있다는 말이 있듯이, 미국은 전쟁을 만들지 않고서는 유지될 수 없는 나라입니다. 미국은 막대한 예산이 투자될 MD 계획을 이미 실행하고 있고, MD계획이 명분을 가지려면 미국을 위협하는 불량국가들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은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에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미국은 국회에서 MD 예산안을 가결할 때마다 온갖 미디어를 동원하여 북한의 미사일 위협을 과장해서 보도해 왔습니다. 때문에 미국은 북한과 화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남과 북의 군사적 대치가 유지되어야 남한에 무기를 팔고 경제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미국은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지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미국이 한반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한, 제2의 6.25전쟁이 발발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 우리들은 우선, 과거에 겪었던 전쟁을 철저히 분석하고 원인과 결과를 따져 현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이상, 여기까지가 제가 준비한 6.25전쟁과 민족분단의 고착에 대한 조사입니다.
❉ 6.25전쟁 개략사
1950년 6월 25일 남침
6월 28일 서울 점령(3일 체류)
6월 27일 미5공군과 20공군 전선 투입
6월 27일 소련 불참 유엔안보리이사회에서 유엔군 결의 통과
7월 14일 이승만, 국군 작전지휘권 미군에 이양(미군은 유엔군과 국군까지 지휘권 장악)
7월 하순 인/민/군 경상남북도 제외한 남한 전지역 점령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감행 전세회복
9월 28일 서울 수복
9월 30일 중국정부 수립 기념식, 외교부장 주은래, 참전의사 살짝 피력
10월 8일 중공군 참전, 전세가 역전되다. 오산까지 철수
1951년 3월 18일 서울 재차 수복, 38선에서 밀고 밀리는 공방전 이어져.
4월 11일 맥아더 유엔총사령관직에서 해임
7월 개성에서 미 중 북 참가하여 휴전회담. 이로부터 포로 교환문제로 1년 6개월 이상 회담이어져.
여러분은 6.25전쟁에 대해 어떻게,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정규 교육을 받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6.25전쟁에 대해 학교에서 배우셨을 겁니다. 제가 학교에서 배운 6.25전쟁에 대한 개략적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과 함께 조//선은 해방을 맞았고, 또한 곧바로 38선이 그어져 남과 북으로 국토가 분단되고 말았습니다.
2. 소련의 군사적 지원을 받은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전격 남침을 감행,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3. 하지만 우방인 미국은 공산권의 발호에서 민주주의 남한을 지킨다는 정당한 명분 하에 북한의 남침을 저지하기로 결정하고 이 전쟁에 참전하게 되며,
4. 곧바로 유엔군도 연합군을 구성하여 전쟁에 참가하게 됩니다. 인//민//군의 압도적인 공세에 밀린 국군과 연합군은 경상도를 제외한 남한 전 지역을 빼앗기게 되지만,
5/6.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감행으로 전세를 회복, 서울을 수복한 뒤 단숨에 압록강까지 치고 올라갑니다.
7. 하지만 통일이 이뤄지려는 그 때 안타깝게도 10월 8일 인해전술로 유명한 중공군이 참전, 전세가 역전되어 국군과 연합군은 경기도 오산까지 밀려 내려오고야 맙니다.
8. 압도적인 숫자의 중공군에 밀리던 연합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반격, 서울을 다시 수복하고 38선 근방에서 전선이 고착화되어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이어지게 됩니다.
9. 이후 1951년 7월에 개성에서 미국과 중국 북한이 참가하여 휴전회담을 시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포로 교환문제로 1년 6개월 이상이나 회담이 이어졌고, 그러는 와중에도 크고 작은 전투는 끊임없이 벌어졌습니다.
10. 1953년 7월 27일, 결국 협정이 체결되었고, 38선을 기점으로 남과 북의 분단이 고착화됨으로써 6.25 전쟁은 휴전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후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영향권에 편입되어 아시아 공산주의 국가로 성장해 나갔고, 남한은 일본ㅡ대만ㅡ필리핀을 잇는 미국의 극동 방위선에 편입됐습니다. 폐허가 되었던 남한은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재건되었고, 스스로 한강의 기적을 일구고 경제발전을 거듭하여 현재는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습니다. 미국은 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 공산주의의 침략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었고, 전후의 피폐해진 경제상황에서 굶주리는 우리 국민들에게 많은 원조를 해주어 우리 국민들이 재기할 수 있도록 인도적 차원에서 도와주었습니다.
이 정도면 제가 학교에서 배운 6.25의 전후사정에서 어긋남이 없고, 여러분들께서 상식으로 알고 계신 내용과도 크게 상치되는 부분이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진상을 과연 제도권에서 알려주는 그대로, 곧이곧대로 받아들여도 좋은 것인지 사례를 들어가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2. 전쟁 전 남과 북의 동향.
가. 북한의 군비증강
1948년 12월 17일, 소련 중국 북한의 3국 비밀 전략회의가 열렸습니다. 이 회의에서 3국은 북한의 군비증강 계획에 관해 원칙적인 합의를 보았으며, 그 합의사항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추후 18개월 동안(49년~50년 6월까지) 아래와 같은 군비증강책을 실시한다.
➀ 북한에 이미 창설한 3개 사단 1개 혼성여단 외 새로 편성될 6개 사단과 1개 돌격사단분, 총 열개 사단 분의 장비를 제공한다.
➁ 3개 기계화부대 분의 장비를 제공한다.
➂ 7개 보안대대 분의 장비를 제공한다.
➃ 공군창설을 위해 정찰기 20대, 전투기 100대, 중/경 폭격기 30대를 제공한다.
➄ 120명의 군사고문단을 평양에 파견한다.
➅ 1949년 5월 말까지 북한통용 화폐가치로 100억 상당의 군수품을 제공한다.
➆ 중공은 만주 동북의용군 3만 명을 무장한 채 입북시켜, 이들을 기간으로 8개 전투사단과 8개 예비사단을 편성케 한다.
➇ 북한은 웅기, 청진, 원산 등 동해안 여러 항구를 소련의 잠수함 기지로 제공한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할 당시엔 보잘 것 없던 북한의 군사력은 급속도로 확장되어서, 전쟁 발발 직전에는 각종 신형 무기를 보유하는 한편 도합 169000명에 이르는 대병력을 갖출 수 있었습니다. 북한이 무력도발 남침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소련과 중국의 전폭적인 원조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 국군의 열악한 상황.
북한이 1950년 6월까지 착착 전쟁준비를 하는 동안, 남한은 무얼 하고 있었던 걸까요? 남한에서는 1946년 1월 15일 남//조//선 국방경비대를 발족하였습니다.
하지만 국방경비대의 무장은 너무 빈약해서 전쟁수행보다는 치안유지에나 적합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경비대를 무시하는 경찰과 사사건건 충돌해서 유혈사태가 벌어지는 일이 많았습니다. 또한 국방경비대에는 남/로/당원들이 대거 침투하여 내부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48년 4월 3일, 제주에서 남/로/당이 주동이 된 4.3사태가 벌어졌는데요, 이를 기화점으로 군 내부의 남로당원들이 호응, 14연대 반란을 시작으로 4연대 일부, 6연대 일부, 15연대가 반란에 가담했습니다. 반란군은 순천, 보성, 광양, 구례를 장악하면서 세를 확장하다가 6개월 만에 진압되었습니다.
이 사건 때문에 남/로/당은 불법단체로 규정됐는데요, 군에서 4749명이 남/로/당원으로 적발돼서 숙청됐고, 숙청기간 동안 탈영한 남/로/당원이 5568명이었습니다. 전군이 98000여 명이었는데, 그 중 10%, 한 개 사단분의 인원이 좌익 공산세력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1949년 5월 4일, 국군 8연대의 표무원, 강태무 두 대대장이 각자의 대대를 이끌고 월북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 밖에도 강동정치학원 출신의 인/민/유격대가 48년 11월부터 50년 6월까지 모두 다섯 차례 남파되어 국군과 전투를 치뤘고, 전쟁 전까지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남파된 인/민/유격대원은 총 2450여 명이었습니다.
또한 38선에서는 49년 한 해 동안만 874회에 이르는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고, 그 대부분은 북한의 도발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6.25 전까지 내전을 치르고 인/민/유격대와 전투를 치르느라 국군은 훈련이 부족했고, 군수물자도 태부족이었습니다.
국군이 미군으로부터 지원받는 군사원조는 65000명 분량이었는데 실제로는 병력이 10만 명으로 증강이 되었기 때문에 물자가 부족하고 무장이 빈약한 것은 어쩔 수가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전쟁 직전, 북한과 남한의 군사력은 북한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 육군참모총장의 정보 묵살 의혹.
“6월 25일, 일요일 새벽을 틈타 인/민/군이 노도처럼 밀려 내려오자 안심하고 장병들에게 휴가를 보냈던 국군은 미리 대비를 하지 못 했기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6.25에 관해 이야기할 때 흔히 듣는 말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육군 수뇌부에서 그러한 남침 징후를 몰랐을까요? 전쟁 전에 육군본부로 보고된 정보들을 살펴보겠습니다.
▪ 1950년 3월 25일 북한 수 개 사단이 38선에서 39선에 전진배치, 만주에서 입북한 전사들이 각 사단에 배속하여 그 수가 증가하고 있음. 북한 전역에서 10만에서 15만에 이르는 강제징집 실시. 3월 중순 38선 일대 주민을 5킬로 북쪽으로 소개시킴.
▪ 1950년 4월 15일 북한의 전면남침 징조 관측됨.
▪ 1950년 4월 28일 북한 공군 중위 이건준이 YKA-9형 전투기를 몰고 월남, “몇 개월 사이에 전쟁이 발생할 것이다.” 라고 진술.
▪ 1950년 6월 10일 춘천 오대산, 강릉 해상을 통해 인/민/유격대 침투, 포로 심문 결과 “전쟁준비는 완료되었고, 명령하달만 기다리고 있다.”는 진술 확보.
▪ 1950년 6월 20일 정보원 김기희를 통해 북의 전쟁준비 사실 입수.
▪ 1950년 6월 22일 동두천 1연대에 인/민/군 전사 귀순, 남진을 위한 38선 지뢰해체 명령을 받고 탈영했다고 진술.
▪ 1950년 6월 22일, 국군 7연대는 유천면 인/민/군 부대에 1개 대대의 전차가 집결하고 포 진지를 만들어 포신을 남으로 지향, 빈번한 차량 이동을 관측, 보고.
▪ 1950년 6월 24일 옹진반도 국군 17연대 전면에 인/민/군 증강, 모든 포신이 남쪽을 지향. 군관들이 남쪽을 지속적으로 관측하는 것이 목격됨.
▪ 1950년 6월 24일 국군 9연대는 양문리 38선 2킬로 전방 고지에 인/민/군 군관들이 지도를 펴고 남쪽 지형을 관찰하는 모습을 목격.
▪ 1950년 6월 24일 국군 1연대 정면 초성리 북쪽 고지에서 인/민/군 군관들이 남쪽 지형을 관찰하는 모습이 목격됨.
6월 22일부터 24일 오후까지 육본 정보과는 전방부대에서 오는 전화를 받느라 24시간 정신이 없었고, 육본 정보국의 장도영 국장은 각종 보고를 종합 분석한 결과 인/민/군의 전면남침 가능성을 채병덕 참모총장에게 보고합니다.
한편 미 군사고문단은 북한의 남침은 불가능하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해 왔고, 채병덕 참모총장은 서울에 가만히 앉아있으면서 전방에서 들어오는 긴급한 보고들을 묵살하고 인/민/군의 남침은 불가능하다는 미군의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었습니다.
라. 이해할 수 없는 인사이동 및 군수후송 조치.
인/민군/의 전면남침 위협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1950년 6월 10일 채병덕 참모총장은 전군에 인사이동 명령을 내렸습니다. 인민군 남침 시 가장 중요한 방어지역인 포천과 의정부의 사단장들을 교체하였고, 서울 방어에 가장 중요한 7사단과 수도사단의 사단장을 전방사단과 맞바꾸는 등, 부대를 혼란케 하였습니다.
또한 전쟁 시 가장 중요한 부서인 작전국의 국장, 차장, 과장을 모조리 갈아치워 버리고 각 부대를 타 부대에 배속시켜 지휘에 혼란을 유도했습니다.
▪ 이형근 준장, 8사단장 -> 2사단장 ▪ 김종오 대령, 참모학교 -> 6사단장
▪ 유재홍 준장, 2사단장 -> 7사단장 ▪ 이상가 대령, 16연대장 -> 8사단장
▪ 신상철 대령, 6사단장 -> 인사국장 ▪ 강문봉 대령, 작전국장 -> 미 참모대학
▪ 김홍일 소장, 육사교장 -> 참모학교장 ▪ 이준식 소장, 7사단장 -> 육사교장
▪ 김점곤 중령, 12부연대장 -> 정보국 차장
▪ 박림항 대령, 3연대장 -> 작전국 차장 ▪ 정래혁 중령, 참모학교 -> 작전과장
▪ 장창국 대령, 참모학교 부교장 -> 작전국장
▪ 이종찬 대령, 국방부 1국장 -> 수도경비사령관
▪ 2사단 25연대 -> 6월 20일 -> 7사단 배속 -> 의정부
▪ 7사단 2연대 의정부 -> 6월 15일 부로 수도사단 -> 6사단 배속 6월 23일 홍천으로
▪ 6사단 8연대 홍천 -> 수도사단 배속 -> 서울
또한 육군 보유 차량 총 1500대 중 500대를 뜬금없이 정비를 해야 한다며 부평으로 후송 명령을 내렸고, 중화기의 일부도 수리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부평으로 후송토록 명령해 전쟁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게 했습니다.
마. 6월 23일의 의혹
6월 23일 낮, 미 군사고문단장 직무대리인 참모장 헨리 대령은 일본에 가 있는 브라운 준장의 전화명령을 받고 채병덕 참모총장을 방문했습니다. 이날의 대화에서 헨리 대령은, 24일 밤 한국 육군참모학교 구내의 장교구락부 개관을 축하하는 성대한 칵테일 파티를 열 것을 제안했습니다. 또한 비상경계령을 해제하도록 설득하여, 채병덕 참모총장은 이를 수락합니다.
(1) 비상경계령 해제와 휴가 외출 실시
채병덕 참모총장은 헨리 직무대리와 만난 후 김백일 참모부장을 불렀습니다. 6월 24일 낮 12시를 기해, 전군에 내려졌던 비상경계령을 해제하고 장병들에게 휴가와 외출을 보내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명분은 농번기이므로 군 장병들이 휴가를 나가 농사일을 돕도록 하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24일 오후, 정보국에서는 참모총장에게 보고하여 경계령 부활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참모총장은 오전에 해제하고 오후에 다시 경계령을 내릴 수는 없다며 요청을 묵살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전방 부대는 텅 비고 주말 도심은 휴가를 나온 장병들로 흥청거렸습니다.
(2) 24일 밤의 성대한 파티
이렇게 하여 24일 밤, 장교구락부 개관 파티가 열렸고, 몇 달째 계속되던 경계령이 해제된 데다 주말 밤이기도 해서 육본 수뇌부와 일선 지휘관을 포함한 50여 명의 고급장교들이 참석했고, 재경 미 군사고문단 장교들도 여럿 참석을 했습니다. 이 파티는 밤 10시경 끝났지만, 참석자들은 장소를 옮기며 25일 새벽 2시경까지 술을 마셨습니다.
즉, 남침이 있기 2시간 전까지 고주망태가 되어 골아 떨어져 있던 겁니다. 이후 국군은 전쟁발발 후 각급 지휘관들이 인사불성으로 자리를 비운 탓에 남침에 대해 명민한 대응과 파악을 할 수 없었고, 육군본부 장교들은 6시간이나 지난 후에야 북한의 전면공격이라는 것을 전달받고 본격적으로 대응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인/민/군/이 포천을 점령하고 의정부를 향해 진격태세를 갖추고 있을 때였습니다.
(3) 도쿄에 가 있던 미 군사고문단장
이 때 한국군을 총 지휘해야 할 미 군사고문단장 브라운 준장은 이미 6월 10일에 정년퇴임을 했고, 24일 밤에는 귀국을 위해 도쿄로 가 있었습니다. 또한 채병덕 참모총장에게 파티를 건의했던 군사고문단장 직무 대리헨리 참모장은 정작 자신은 파티에 얼굴만 비춘 뒤 주말 휴가를 명분으로 밤 비행기를 타고 도쿄로 떠나버렸습니다.
그렇다면 몇 가지 의혹이 생깁니다. 미국은 과연 북한의 남침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을까? 알고 있었다면 왜 미리 방비하도록 하지 않았는가? 채병덕 참모총장은 어째서 정보를 묵살하고 의도적으로 북한의 남침을 도와주었을까?
바. 남로당의 공작인가?
앞서, 충실한 우익인사로 알려져 있던 국군 8연대의 표무원, 강태무 두 대대장은 남/로/당원이라는 그들의 정체가 들통 날 위기에 처하자 49년 5월 4일, 각자의 대대를 이끌고 월북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편 의정부 주둔 7사단 공병대장 최정훈 소령은 6월 25일 오전 9시에 운현궁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주위에 알려, 공병대대 작전과장과 7사단 참모들은 24일에 모두 외출을 했습니다. 상당수 공병대대 장병들도 비상이 해제되자 상관의 결혼식에 참가하기 위해 외출을 나와 서울로 갔습니다.
그러나 최소령의 결혼식은 위장결혼식이었고, 인/민/군 남침으로 비상이 걸렸으나 최정훈 소령과 작전과장은 끝내 부대에 복귀하지 않고 행방불명이 됐습니다. 이 탓에 7사단 공병대는 완전히 마비되어 동두천에서 의정부, 양문리에서 의정부에 이르는 구간의 교량폭파, 장애물 설치 등을 전혀 하지 못 해 인민군에게 성문을 열어준 꼴이 되었습니다. 최정훈 소령과 공병대대 작전과장은 남/로/당 비밀당원이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또한 일부 연구가들에 따르면 채병덕 참모총장도 남/로/당/의 공작을 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49년 무렵엔 이미 남/로/당 세력이 군에서 축출되었지만, 비밀리에 군 수뇌부에 남아있는 자들이 존재했습니다. 사후 조사결과 채병덕 참모총장의 부관인 라엄광은 장교 병적부에도 없는 남/로/당 공작원임이 밝혀져서 채병덕은 남/로/당과 직/간접적으로 분명히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렇다면, 채병덕 참모총장은 남/로/당의 공작을 받아 군의 방비를 스스로 허물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만, 미 군사고문단은 어째서 파티를 건의해서 전쟁직전에 국군 수뇌부를 마비시켰는지 궁금합니다. 단순히 우연히 그렇게 겹친 것이 아니겠느냐는 반박이 있을 수 있겠는데요, 정황상 미국이 북한의 남침을 몰랐으리라고는 판단할 수 없습니다. 미국이 국군으로 하여금 비상경계령을 해제하도록 하면서까지 말도 안 되는 파티를 열게 한 이유가 뭘까요? 다음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3. 미국의 한반도 정책
가. 애치슨 선언과 태도 변화
1950년 1월 12일, 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미합중국의 태평양 지역 방위선은 알류산 열도, 일본 본토, 오끼나와 제도를 거쳐 필리핀 제도로 연결되는 라인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이른바 ‘애치슨 선언’이라는 것인데요, 이 라인을 벗어난 태평양 기타 지역에 있어서는 어떤 군사적 공격으로부터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전에 이미 미국은 49년 초부터 주한미군을 단계적으로 철수, 49년 6월경에는 500여명의 비 전투 병력과 군사고문단만을 남긴 채 모두 철수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반도가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완전히 제외된 셈이었습니다. 또한 트루먼은 애치슨 선언이 있기 일주일 전에 성명을 통해 한국과 대만에 군사적 불개입 정책을 천명했습니다. 또한 미 통합참모본부에서 작성한 아시아에 관한 전략계획서의 한국 부분에 대해 “미국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한대도 결코 무력의 수단으로 한국을 방위하지 않는다.”라고 명시해 이를 국제사회에 공개한 바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정작 전쟁이 터지자 하루 만에 공군을 투입해 전선에 개입했고, 이틀째 되는 27일에는 유엔안보리 이사회를 회동해 연합군 파병 결의안을 통과시킵니다. 그리고 전쟁 발발 5일 뒤인 6월 30일, 지상군 파병을 결정할 정도로 발 빠르게 6.25 전쟁에 깊이 개입함으로써 전쟁 직전까지의 대 한반도 정책을 손바닥 뒤집듯 뒤집어 버립니다. 이 같은 미국의 정책은, 북한과 공산권으로 하여금 남침을 하도록 유도한 것이라는 후대의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정책 돌변에 대한 미국의 변명은 “공산주의의 발호로부터 민주주의 국가를 수호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미국은 “정말 몰랐다. 예상 밖이다.” “남침 준비설은 더러 듣기는 했어도 설마, 믿을 수가 없다.” “주한 미 군사고문단장 브라운 준장으로부터도 남북 간의 급박한 사태는 보고되지 않았다.”라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그것은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중 브라운 준장으로부터 남북 간의 급박한 사태에 관해 어떤 보고도 받지 못했다는 변명은 6.25와 관련된 인사들이 특히 강조하는 단골메뉴입니다.
브라운 준장이 주한미군 군사고문단의 최고책임자였기 때문에, 그의 보고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이러한 주장은 넌센스에 불과하다는 것은 다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 당시 미국의 첩보기관들
당시에는 6.25 직전까지 상당한 조직망을 갖추고 대북 첩보활동을 하던 미국 정보기관이 여럿 있었습니다. CIA는 물론, 주일 미 극동군 총사령부 제2부장 월로비 소장(G2) 휘하의 캐논첩보기관, 역시 G2부장 휘하의 8240첩보부대, 미 공군 특수첩보대 등 최소한 3개 이상의 첩보기관이 북한, 만주, 연해주, 중공, 모스크바까지 원정해 첩보활동을 펼쳐, 워싱턴 통합참모본부와 CIA본부로 막대한 정보를 전송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 맥아더 장군이 사령관으로 있는 극동군 총사령부에서는 휘하의 캐논첩보기관과 8240첩보기관으로부터 올라온 첩보를 검토하여 워싱턴에 보고했습니다. 그 정보 건수는 주한미군이 철수 완료한 다음날인 1949년 6월 30일부터 전쟁 발발 직전까지 1년 간 무려 1195건이었고, 1950년 초부터 전쟁이 일어나기 전날까지 약 6개월 동안 보고된 긴급 정보 건수만 해도 417건에 달합니다.
미국이 극동지역 CIA로부터 보고를 받지 못 했다고 우기더라도, 극동군 총사령부에서 올라온 보고를 받지 못 했다고 변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미국이 북한의 남침계획을 몰랐으리라고는 절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1950년 초 브라운 준장은 “현재의 종합적인 한반도 정세 판단으로는 한국군은 적당한 규모이며 훈련도 아시아에서는 1급 수준이다. 북한군의 훈련은 부실하며 사기는 낮다. 소련의 대규모 원조는 믿기 어렵다. 만약 남침이 일어나도 한국군은 그들을 물리칠 수 있다.” 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워싱턴에 보낸 바 있습니다.
브라운 준장은 1950년 초 북한이 남침을 할 수 있다는 한국 육본의 보고서를 받고도 묵살했습니다. 또 미 군사고문단 휘하에는 정보기관이 없었기 때문에 위와 같은, 한반도는 안전하다라는 보고서를 워싱턴에 보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추측하건대 그와 같은 브라운의 보고서는 전쟁 발발 후를 대비해 만들어 놓은 히든카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현지의 최고 책임자 브라운 장군의 정세 보고서를 믿지 않을 수 없었다.”라는 변명이 가능하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미국은 브라운 준장을 들먹이며 6.25발발을 예측하지 못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다. 걸프전 참전의 예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듯한 태도를 보이다가 막상 일이 터지면 전광석화처럼 개입하는 미국의 이러한 수완은, 걸프전 때도 그대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라크는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가 경제적 압박을 가하자 쿠웨이트 침공을 계획하고, 그 결의를 미국에 알렸습니다. 이 때 미국은 쿠웨이트와의 국경분쟁에 미국은 언급할 입장이 아니라고 대응하여, 사실상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승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태도를 돌변하여 이라크와의 대대적인 전쟁을 준비하면서 평화해결 가능성을 애초에 배제했습니다. 이라크가 중동평화회의를 개최하면 물러날 수도 있다고 제안했지만 부시 대통령이 일언지하에 거절을 했던 것입니다.
"쿠웨이트와의 국경분쟁에 대해 미국 정부는 의견을 말할 입장이 아닙니다.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가 정부의 보도관에게 이 점을 강조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위의 발언은 1990년 7월 미국 대사 에이프릴 글래스피가 사담 후세인 대통령에게 한말이다. 실제로 미국이 이라크를 자극함으로써 쿠웨이트 침공을 유도해놓고는 오히려 그것을 군사개입의 구실로 삼았다는 증거가 있다. 이라크가 쿠웨이트 침공을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가 자신들에게 혹독한 경제적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다.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쿠웨이트 침공 결의를 미국에 전했을 때, 미국 정부는 후세인에게 사실상의 승인의사를 전달한 셈이다.
그러나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이 시작되자 부시 대통령은 대대적인 이라크와의 전쟁을 준비하면서 평화적인 해결가능성을 애초부터 배재해버렸다. 이라크는 (체면을 세우려는 정도의 의의밖에 없었을지라도) 중동평화회의가 개최되면 쿠웨이트에서 철수할 수 있다고 제안했지만, 부시 대통령은 그 제안을 그 자리에서 거부했다.
라. 중공에 협력한 미국
(1) 대만의 본토 상륙을 저지
전쟁 발발 이틀 후인 1950년 6월 27일, 대만의 장 제스 총통은 본토를 찾을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본토로의 진격 의도를 내비쳤으나 트루먼 대통령은 단호하게 반대를 했습니다. 또한 미국 제 7함대를 대만과 중공 사이의 해상에 배치, 대만군의 본토 진출을 물리적으로 차단했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했습니다.
“미국이 자유중국으로 하여금 중립을 지키게 한다면서 제 7함대를 대만해협에 파견함으로써 중공의 한국전 참전이 가능해졌다. 이것은 장 제스 50만 군을 막아줌으로써 중공을 보호한 결과를 초래했다. 따라서 중공은 본토 중심부를 지켜야 하는 2개 군을 안심하고 동북부 압록강 북쪽으로 뺄 수 있었다.”
(2) 중공군을 끌어들인 워싱턴
국군과 연합군이 압록강까지 치고 올라갔을 때, 1950년 10월 중/공/군은 참전을 선언하고 압록강 도강을 실시했습니다. 이 때 압록강과 두만강의 다리들을 폭파하면 중/공/군의 도강을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있었으나, 미 통합참모본부는 어떤 이유에선지 폭격금지명령을 내린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중/공/군 도강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맥아더 장군은 명령을 어기고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 등 여섯 곳의 교량을 즉시 공중폭격으로 파괴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맥아더는 집결한 중/공/군의 참전을 대비하여 본국에 병력과 군장비, 보급품 지원을 요청했지만 묵살되었기 때문에 중/공/군이 내려온다면 맞서 싸울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맥아더의 폭격 명령은 워싱턴으로부터 날아온 전보로 즉시 철회되고 말았습니다. 마샬 국방장관은 ‘한/만 국경에서 북한 쪽으로 2킬로미터 범위에 있는 모든 목표에 대한 폭격의 금지’ 명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한편 미 극동군 총사령부에는 중공군 제4야전군 지휘하의 제38, 제39 및 제40군단이 교량을 건너 계속 신의주로 들어오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맥아더는 강력한 항의전문을 워싱턴에 보내 교량 폭파를 금지하려면 중/공군/ 대병력에 대응할 수 있는 병력, 무기, 장비 등을 긴급지원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워싱턴에서는 제한적 폭격을 승인했는데, 그 조건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 압록강 교량을 절반으로 나누어 그 이북만을 폭격할 것.
▪ 압록강 이북 영공을 침범하지 말 것.
폭격기가 출격하자 중공군들은 완충지역 일대에 고사포를 늘어놓고 집중포격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폭격제한 때문에 고사포에 대해 반격을 할 수 없었고, 적 미그기가 출격하여 폭격을 방해했지만 추격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서너 차례의 출격에도 불구하고 교량 폭격은 실패하고 맙니다.
또한 통합작전본부는 다음과 같은 명령도 하달했습니다.
▪ 만주 방향으로 도주하는 북한군에 대하여 모든 폭격이나 기총소사를 금지할 것.
▪ 나진을 폭격하지 말 것.
▪ 압록강의 수풍 수력발전소를 폭격하지 말 것.
나진은 블라디보스톡에서 북한으로 투입되는 물자를 집적하는 보급기지로서, 중요한 공격 대상이었고, 수풍 수력발전소는 만주와 시베리아 지역에 전기를 공급하는 곳으로서 폭격 시 중/공/군과 인/민/군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전략적 목표였습니다.
미 극동공군 사령관 스트레이트 메이어 사령관은 후일 이렇게 술회했습니다.
“우리에게는 폭격기 전투기 정찰기 등이 충분해서 압록강 북쪽의 적 보급시설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었으며, 압록광과 목단강 사이에 주둔해 있는 적 주력을 완전히 괴멸시킬 수도 있었다. 또한 중공의 철도시설을 파괴하여 보급을 차단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에게는 그런 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많은 미국 청년들의 피가 한국에 뿌려졌다.”
또한 당시 중/공/군 제4군 사령관 임표는 후일 중공 내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단을 배포했다고 합니다.
“맥아더가 나의 보급기지 및 통신시설과 압록강 교량 등에 대해 공격하는 것을 워싱턴 당국이 금지한다는 보증이 없었던들, 나는 공격을 개시하여 부하들이나 나의 군인으로서의 평가를 위험에 내맡기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맥아더 장군은 자신의 작전 계획이 적군에게 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회고록에 적고 있는데요, 그 가능성을 짚어보겠습니다.
마. 공유하는 작전 정보?
당시 미군은, 군부에서 작전 보고서를 올리면 정부 고위 관료를 통해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대통령의 승인이 떨어지면 계획을 실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UN과의 협약조문 때문에 대통령을 거치고 난 정보를 UN의 ‘정책 및 안전관리국장’에게 보내야 했고, 그는 이것을 UN총장에게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당시 UN의 정책 및 안전관리국장이 누구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1945년에 미국의 스테티니우스 국무장관은 UN이 세계 경찰 활동을 하는 것에 동의하면서 정책 및 안전관리국장이라는 요직에 동유럽 공산국가 출신을 보직하자는 조건에 합의한 바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전 당시 정책 및 안전관리국장은 콘스탄틴 진첸코라는 소련인이었습니다.
또한 소련의 바실리예프 장군은 북한의 군사고문관이자 작전 책임자였는데, 그는 UN에서 정책 및 안전관리국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UN군사위원회’의 의장직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안전보장이사회 밑에서 전세계의 군 활동에 대한 정보를 책임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두 소련인은 UN에서 연합군 쪽의 일에 관여하는 동시에 북한의 편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이들을 통해서 연합군의 작전 기밀이 소련과 중공, 북한으로 유출되었는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그 가능성만은 충분하다고 생각되어 언급했습니다.
바. 적에게 무기를 팔다
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미 극동군 총사령부 G2에는 또다른 첩보가 입수되었습니다. 마카오와 홍콩을 통하는 루트를 거쳐, 연합군과 중공군이 전쟁물자 거래를 하고 있음이 확인된 것입니다. 1950년 초순 캐나다, 일본, 서독, 미국 등 자유진영은 중공과 공공연하게 여러 물자를 거래했으며, 홍콩은 중공의 중요한 전략물자 보급소가 되어 있었습니다.
홍콩은 1950년 현재 총 거래액이 전년도 대비 50%이상 증가했으며, 4/4분기 중 각종 자동차 차량 및 운송시설, 의약품, 세철과 강철, 비철금속 및 그 제품, 전기기계 기타 기계류 등을 광범위하게 구입해 들였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 측은 전쟁을 하면서도 전쟁 당사자인 적군을 상대로 장사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모택동의 중/공/군/은 미국의 장비와 무기로 무장을 하고 있었는데, 이는 소련으로부터 제공받은 것이었습니다. 또한 소련은 그 무기를 2차대전 말기, 연합군에 참전했을 때 미국으로부터 제공받은 것이었습니다. 결국 미국은 조기에 종결된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잉여 군수물자들을 6.25전쟁을 이용해 확실히 처분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4. 전쟁의 종결
1953년 7월 27일, 1년 6개월여를 끌어오던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전쟁의 양상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북의 남침이 있었고, 남쪽으로 내려오며 남한 전국토가 초토화됩니다. 유엔군이 참전하고,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북진을 시작해서 압록강까지 진격합니다. 이 과정에서 마찬가지로 북한 전 지역이 초토화됩니다. 그 시점에서 다시 중공군이 개입, 연합군은 다시 밀려 내려와 38선에서 전선이 고착됩니다. 그리하여 전쟁 전과 똑같은 38선에서 국경이 정해졌고, 전과 마찬가지로 북은 소련과 중국에, 남한은 미국에 예속되게 됩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우리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국군 전사자 227748명, 실종 43572명, 부상 717083명, 총 998341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민간인은 양민학살 128936명, 사망 244663명, 납치 84532명, 행방불명 303212명, 강제의용군 400000명으로 총 1161343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북한도 피해정도는 이와 비슷했으며, 사망한 인/민/군과 중/공/군을 합치면 142000명으로 집계되었으며, 남과 북에 1000만의 이산가족이 발생했습니다.
남한의 물질적 피해는 당시 국민총생산 2년분의 30억 달러, 공업시설 43%, 발전력의 41%, 탄광의 50%가 파괴되고, 공공건물, 학교, 병원 등의 시설은 물론 개인주택과 상가건물까지 전부 파괴되었습니다.
미국은 37개월 동안의 전쟁에서 33629명의 전사자와 103284명의 부상자에 9명의 실종자를 냄으로써 총 136922명의 인명손실을 냈습니다. 또 UN 15개 회원국은 총 15200명의 인명손실을 냈습니다.
미국은 인도적인 차원에서 숭고한 자유와 평화를 위해 자국 청년들의 뜨거운 피를 흘리고 막대한 전비를 소진해가면서 극동의 조그마한 소국인 남한을 사지에서 건져주었다는 것이 지금 우리들, 후대 제도권의 평가입니다.
5. 문제 제기
그러나 저는 이상과 같은 조사를 통해서, 그와 같은 순진한 발상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싶습니다. 6.25전쟁은 열강들의 이익을 위해 사전에 계획된 전쟁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조사한 내용만으론 모든 것을 입증할 수 없고,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가능성만은 제시할 수 있다고 봅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의 예상치 못한 조기 종전으로 인한 잉여 전쟁물자 때문에 경제공황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거대한 군수산업이 아사지경에 이르러 트루먼 행정부를 압박하던 때, 국공내전이 벌어졌습니다. 미국은 국부군에 군수물자를 제공함으로써 경제 공황의 타개책으로 삼았고, 뒤이어 6.25전쟁으로 불황을 극복했습니다.
휴전협정 체결 이후 미국은 한미방위협정을 빌미로 하여 우리의 숨통을 조였습니다. 우리의 국군 전력 강화 의지는 반세기 이상이나 미국에 의해 억제되어 왔습니다. 단적인 예로 장거리 미사일 사거리 제한 협정을 들 수 있겠습니다. 한국은 미국에 의해 언제나 북한보다 열세병력으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북한의 위협이 상존하게 되었고, 이를 견제한답시고 미국은 반세기 이상이나 남한에 미군을 주둔시켜 왔습니다.
미국은 1995년에야 평화시 훈련작전권을 한국에 이양했습니다. 전시에는 주한미군사령관이 국군통수권을 행사하게 되니 우리나라가 과연 자주국가라 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스럽습니다. 제가 군 생활을 하면서 가장 회의를 느꼈던 점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나라를 지키러 군대에 갔지만 전쟁이 나면 우리민족의 이익보다는 미국의 이익을 우선시 할 미 군부의 명령에 따라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점에 저는 분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6.25 전쟁을 통해 우리나라는 막심한 피해를 입은 반면에, 다른 나라들은 나름대로 이익을 건졌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중공은 기아로 인해 민중봉기 위험이 있었지만 전쟁을 통해 국민을 단결하여 위기를 넘겼고, 일본은 군수기지로써 막대한 수입을 올려 전후 복구를 하고 경제발전의 터전을 닦았습니다. 미국은 잉여 군수품을 해결하고 군수산업을 부흥시켜 경제난을 타파했습니다. 또한 주한미군을 주둔시키며 남한의 전후 복구는 미국이 도맡아 하게 되었으며, 이것 역시 미국 경제에 이익이 되었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현재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전후복구 사업에 열을 올리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후 남한은 미국에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종속되어 지금은 미국과 떼려야 뗄 수가 없는 형님 아우 사이가 되어버린 것이 기정사실입니다. 지금도 미국은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 불량국가로 낙인찍어 강경책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남과 북의 평화적인 통일을 원하지만, 미국이 존재하는 한 그것은 요원한 일입니다.
전쟁이 있는 곳에 미국의 이익이 있다는 말이 있듯이, 미국은 전쟁을 만들지 않고서는 유지될 수 없는 나라입니다. 미국은 막대한 예산이 투자될 MD 계획을 이미 실행하고 있고, MD계획이 명분을 가지려면 미국을 위협하는 불량국가들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은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에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미국은 국회에서 MD 예산안을 가결할 때마다 온갖 미디어를 동원하여 북한의 미사일 위협을 과장해서 보도해 왔습니다. 때문에 미국은 북한과 화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남과 북의 군사적 대치가 유지되어야 남한에 무기를 팔고 경제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미국은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지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미국이 한반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한, 제2의 6.25전쟁이 발발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 우리들은 우선, 과거에 겪었던 전쟁을 철저히 분석하고 원인과 결과를 따져 현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이상, 여기까지가 제가 준비한 6.25전쟁과 민족분단의 고착에 대한 조사입니다.
❉ 6.25전쟁 개략사
1950년 6월 25일 남침
6월 28일 서울 점령(3일 체류)
6월 27일 미5공군과 20공군 전선 투입
6월 27일 소련 불참 유엔안보리이사회에서 유엔군 결의 통과
7월 14일 이승만, 국군 작전지휘권 미군에 이양(미군은 유엔군과 국군까지 지휘권 장악)
7월 하순 인/민/군 경상남북도 제외한 남한 전지역 점령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감행 전세회복
9월 28일 서울 수복
9월 30일 중국정부 수립 기념식, 외교부장 주은래, 참전의사 살짝 피력
10월 8일 중공군 참전, 전세가 역전되다. 오산까지 철수
1951년 3월 18일 서울 재차 수복, 38선에서 밀고 밀리는 공방전 이어져.
4월 11일 맥아더 유엔총사령관직에서 해임
7월 개성에서 미 중 북 참가하여 휴전회담. 이로부터 포로 교환문제로 1년 6개월 이상 회담이어져.
단지 미국의 이익만을 위해서 한국전쟁을 했다면, 우리민족은 참으로 억울할것 같네요. 별볼일도 없는 민족인데, 미국이 이익좀 보자고 밟아버린 거니까.ㅉㅉㅉ 그런 별볼일없는 민족을 밟을려고 일본땅에는 수많은 군수공장을 미리미리 준비하고, 오키나와 비행장도 미리미리 건설하고 그랬나~?//,
전체적으로는 당시 역사를 일방적인 관점에서만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글이라 봅니다. 다만 남로당 부분 특히 채병덕이 이후 전사하기까지의 과정을 안다면 남로당일지 모른다는 생각은 맞지 않는것 같습니다. 채병덕이나 신성모 같은 인물들은 지금의 보수세력과 같은 반민족 친외세 기회주의자들로 보는 것이 적당하다고 봅니다.
서양의 경제는 스파이 이라는 것입니다 스파이는 다른 면에서 보면 도둑질과 같은 맹락인 것입니다. 국가적인 도둑질을 좋은 말로 스파이 인것뿐이죠 미국의 정치는 스파이적(도둑)의 정치 성향을 무시할수 없습니다. 육이오동란도 국가적인 명령은 북에서 먼저 시작했다 하지만 삼팔선을 오가던 우리네 민간인들 까지도 허락 안받고 다니면 사살 하고 무력을 먼저 사용한 것은 미군이 먼저 시작하여 전쟁을 일으키려 한것은 기정 사실로 드러나고 있는데도 결론을 중시하는 풍으로 몰아가버리기 때문에 말이 안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의 생활에서는 중간의 행동(원인제공)도 중요하다고 생각 합니다.
결국 해방 후, 남북연방 혹은 통일정부 수립이 무산된데 미국이 개입했는가? 란 질문으로 거슬러 올라가야겠지요.. 민족자결우의를 외쳐놓고도 임시정부세력을 외면한채 권력욕에 눈이 먼.. 갖고 놀기 딱 좋은 이승만을 세운 것..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요.. 즉각 철수했어야 할 주둔군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한 남한단독정부가 수립되고야 철수하고.. 통일세력의 중심 김구는 암살당하고.. 비참합니다.
중공 모택동은 한국전 전까지 대륙을 완전히 지배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전 전에는 지금의 만주땅은 조선족 군벌들이 장악하고 있었어요, 그 조선족 군벌들을 한국전쟁에 몰아넣어서 코안풀고 제거한후에야 모택동이 지금의 동북삼성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한국전쟁으로 일타삼피한거죠,, 즉 만주의 조선족군벌들을 한반도로 몰아넣어서 제거해서 모택동세력이 대륙을 완전히 장악하게 해서 대륙의 고려역사를 완전히 제거할 수 있도록 해줬고,,,한반도는 남과북이 서로 죽고죽이게 만들어서 영원히 원수로 만들어버림으로서, 한반도를 영원히 분단시켜 놓는 수법을 쓴겁니다. 이것이 바로 일타삼피라는 것이죠
한국전쟁에 미군장교로 참전한 김모대령이 쓴 자서전을 읽어보면,,,자신이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진하면서 참혹한 장면들을 목격하게 되는데...어느 산모퉁이를 돌아서자...수백,수천의 중공군이 무릅을 끓은채로 앉아서 하늘쪽으로 두손을 들고 서서 죽어있는데...참혹한 것은 그들이 숯덩이처럼 탄채로 죽어있었다는 겁니다. 미군 폭격기가 네이팜탄으로 한 지역을 불구덩이로 만들어 버린것이죠.. 참혹해서 정신적으로 너무 괴로웠다는 글을 읽은적이 있죠 그는 미군장교로 출전한 재미교포였기 때문에 그들을 중공군으로 생각했지만, 그들중 상당수는 만주에서 참전한 조선족 군인들이었을 겁니다.
모택동이 무슨 대단한 혁명가로 한국인들은 알고 있는데...모택동 이색히는 원래부터 양놈들이 키운 장학생에 불과합니다. 화적질하던 화적떼의 두목이었는데...양놈들한테 선발되서 갑자기 키워지기 시작하죠,, 그래서 모택동이 이색히가 가지고 다니던 무기,차량 대부분 양놈들이 제공한 것이고,,아예 미군이 모택동이를 비행기태워서 대륙 이곳저곳 데리고 다니면서 공산세력 확장하도록 도와줍니다. 한국에 그런 자료가 금지된것 같지만 서양에 가보시면 관련자료 엄청나게 많아요,, 서구 금융자본이 대륙의 이씨조선과 고려를 멸하고, 그 잔재를 없애고 식민지로 만들고자 공산주의를 배후에서 지원해서 대륙을 공산화한 겁니다.
모택동이가 문화혁명을 일으킨것이 한국전참전으로 인한 민심흉흉이라는건 한마디로 한국민들 세뇌시킬려고 만든 소설에 불과하구요,,,문화혁명의 원 목적은 대륙에 남아있는 역사를 아는 지식인들을 제거하고, 대륙에 남아있는 고려,조선의 잔재를 완전히 없애는 작업이었어요,,그래서 글을 알고 과거사를 아는 지식인들을 모택동이가 대대적으로 죽여버린 것이구요,,모택동이가 굷겨죽이고, 살해한 대륙인들이 2천만명이 훨씬 넘는걸로 압니다. 그럼에도 서구 언론이 언제 모택동이 인종학살범이라고 하는거 들어봤나요? 스탈린과 소련공산당이 7천만명 넘게 러시아,우크라이나인을 죽였지만, 서구언론이 언제 그거 따지던가요?
중국 공산당은 손문의 무덤을 황제의 무덤처럼 만들어놓고 중국국민들에게 추앙받도록 만들어놓고 있죠? 아니 손문은 장개석의 장인이고,,,손문,장개석은 공산당과 원수관계나 마찬가지인데...어떻게 손문을 중국공산당이 영웅으로 추앙하지???? 상식적으로 보면 이해가 안되지요? 하지만 손문이나 모택동이나 두넘다 그 뿌리는 서양의 금융자본의 똥개들이란 것에서 두넘은 태생이 동일합니다. 원래 그 출신과 성공배경의 뿌리가 서양 금융자본 이기 때문에....중국공산당이 손문이라는 넘을 추앙하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첫댓글 좋은 글 읽었습니다
제목도 마음에 들구요
미국이 6.25 전쟁을 유발한 원인과 목적도
잘 설명해주셨네요
온갖 방구뀌는 식자시키들이 왜 남침이면 남침이지, 굳이 남침설이라 갖다붙이는 이유 알랑가 몰라...참고루다가 북침설 들먹여도 꾹뽀뻡은 안걸릴걸요...
단지 미국의 이익만을 위해서 한국전쟁을 했다면, 우리민족은 참으로 억울할것 같네요.
별볼일도 없는 민족인데, 미국이 이익좀 보자고 밟아버린 거니까.ㅉㅉㅉ
그런 별볼일없는 민족을 밟을려고 일본땅에는 수많은 군수공장을 미리미리 준비하고,
오키나와 비행장도 미리미리 건설하고 그랬나~?//,
전체적으로는 당시 역사를 일방적인 관점에서만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글이라 봅니다. 다만 남로당 부분 특히 채병덕이 이후 전사하기까지의 과정을 안다면 남로당일지 모른다는 생각은 맞지 않는것 같습니다.
채병덕이나 신성모 같은 인물들은 지금의 보수세력과 같은 반민족 친외세 기회주의자들로 보는 것이 적당하다고 봅니다.
소미연님의 노고에(방대한자료)찬사를보냅니다'
그러라 왠지 2%빠진 그것은 무엇일까요?
태평양 전쟁 중, 일본의 제로센과 미국의 무스탕이 것 옷만 달리 입은 일란성 쌍둥이 였다는 것을 안다면,
한국전쟁의 기획된 이면에 대입 시킬 수도 있을 것 입니다.
서양의 경제는 스파이 이라는 것입니다 스파이는 다른 면에서 보면 도둑질과 같은 맹락인 것입니다. 국가적인 도둑질을 좋은 말로 스파이 인것뿐이죠 미국의 정치는 스파이적(도둑)의 정치 성향을 무시할수 없습니다. 육이오동란도 국가적인 명령은 북에서 먼저 시작했다 하지만 삼팔선을 오가던 우리네 민간인들 까지도 허락 안받고 다니면 사살 하고 무력을 먼저 사용한 것은 미군이 먼저 시작하여 전쟁을 일으키려 한것은 기정 사실로 드러나고 있는데도 결론을 중시하는 풍으로 몰아가버리기 때문에 말이 안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의 생활에서는 중간의 행동(원인제공)도 중요하다고 생각 합니다.
유도된전쟁이란것을 김일성은 생각했을까? ...난 정말로 궁금한게 있다. 왜 서울에와서 3일간 놀고자빠졌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3일이면 당시 인민군부대의 능력 이면 부산까지 두번은 같다왔을텐데... 왜 3일간 자빠져 잤을까?
삭제된 댓글 입니다.
부르스는 처음에 미국의 남침 유도설을 주장했는데 요즘 와서는 자기는 그런말을 한 적이 없다고
발뺌을 하더군요
한국전당시 소련의 바실리에프 장군이 북한의 군사작전 책임자였는데 이 사람이 당시 un의 군사
작전 책임자였습니다
세계의 모든 군사 정보를 꽤차고 있었던 사람이죠
결국 해방 후, 남북연방 혹은 통일정부 수립이 무산된데 미국이 개입했는가? 란 질문으로 거슬러 올라가야겠지요.. 민족자결우의를 외쳐놓고도 임시정부세력을 외면한채 권력욕에 눈이 먼.. 갖고 놀기 딱 좋은 이승만을 세운 것..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요..
즉각 철수했어야 할 주둔군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한 남한단독정부가 수립되고야 철수하고.. 통일세력의 중심 김구는 암살당하고.. 비참합니다.
미국이 전쟁으로 먹고사는건 상식이고
중공이 한국전으로 덕보았다는건 검토가 필요하네요
기아로 인해 민중봉기 날뻔한걸 한국전 참여로 뭉치게 했다는건데
모택동의 목적이 그거였다면 대만과 전쟁 계속하면 되죠.
결과적으로 그런효과가있었는지 몰라도 목적이엇다고보기는 힘듭니다
지금까지 알려진바로는 한국전 참전으로 민심이 훙흉해져
문화대혁명을 일으킨것으로 알려져있지요
중공 모택동은 한국전 전까지 대륙을 완전히 지배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전 전에는 지금의 만주땅은 조선족
군벌들이 장악하고 있었어요, 그 조선족 군벌들을 한국전쟁에 몰아넣어서 코안풀고 제거한후에야 모택동이
지금의 동북삼성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한국전쟁으로 일타삼피한거죠,,
즉 만주의 조선족군벌들을 한반도로 몰아넣어서 제거해서 모택동세력이 대륙을 완전히 장악하게 해서
대륙의 고려역사를 완전히 제거할 수 있도록 해줬고,,,한반도는 남과북이 서로 죽고죽이게 만들어서
영원히 원수로 만들어버림으로서, 한반도를 영원히 분단시켜 놓는 수법을 쓴겁니다.
이것이 바로 일타삼피라는 것이죠
한국전쟁에 미군장교로 참전한 김모대령이 쓴 자서전을 읽어보면,,,자신이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진하면서
참혹한 장면들을 목격하게 되는데...어느 산모퉁이를 돌아서자...수백,수천의 중공군이 무릅을 끓은채로 앉아서
하늘쪽으로 두손을 들고 서서 죽어있는데...참혹한 것은 그들이 숯덩이처럼 탄채로 죽어있었다는 겁니다.
미군 폭격기가 네이팜탄으로 한 지역을 불구덩이로 만들어 버린것이죠..
참혹해서 정신적으로 너무 괴로웠다는 글을 읽은적이 있죠
그는 미군장교로 출전한 재미교포였기 때문에 그들을 중공군으로 생각했지만,
그들중 상당수는 만주에서 참전한 조선족 군인들이었을 겁니다.
모택동이 무슨 대단한 혁명가로 한국인들은 알고 있는데...모택동 이색히는 원래부터 양놈들이 키운 장학생에 불과합니다. 화적질하던 화적떼의 두목이었는데...양놈들한테 선발되서 갑자기 키워지기 시작하죠,,
그래서 모택동이 이색히가 가지고 다니던 무기,차량 대부분 양놈들이 제공한 것이고,,아예
미군이 모택동이를 비행기태워서 대륙 이곳저곳 데리고 다니면서 공산세력 확장하도록 도와줍니다.
한국에 그런 자료가 금지된것 같지만 서양에 가보시면 관련자료 엄청나게 많아요,,
서구 금융자본이 대륙의 이씨조선과 고려를 멸하고, 그 잔재를 없애고 식민지로 만들고자
공산주의를 배후에서 지원해서 대륙을 공산화한 겁니다.
모택동이가 문화혁명을 일으킨것이 한국전참전으로 인한 민심흉흉이라는건 한마디로 한국민들 세뇌시킬려고
만든 소설에 불과하구요,,,문화혁명의 원 목적은 대륙에 남아있는 역사를 아는 지식인들을 제거하고, 대륙에 남아있는 고려,조선의 잔재를 완전히 없애는 작업이었어요,,그래서 글을 알고 과거사를 아는 지식인들을 모택동이가
대대적으로 죽여버린 것이구요,,모택동이가 굷겨죽이고, 살해한 대륙인들이 2천만명이 훨씬 넘는걸로 압니다.
그럼에도 서구 언론이 언제 모택동이 인종학살범이라고 하는거 들어봤나요? 스탈린과 소련공산당이 7천만명
넘게 러시아,우크라이나인을 죽였지만, 서구언론이 언제 그거 따지던가요?
중국 공산당은 손문의 무덤을 황제의 무덤처럼 만들어놓고 중국국민들에게 추앙받도록 만들어놓고 있죠?
아니 손문은 장개석의 장인이고,,,손문,장개석은 공산당과 원수관계나 마찬가지인데...어떻게 손문을 중국공산당이
영웅으로 추앙하지???? 상식적으로 보면 이해가 안되지요? 하지만 손문이나 모택동이나 두넘다 그 뿌리는
서양의 금융자본의 똥개들이란 것에서 두넘은 태생이 동일합니다. 원래 그 출신과 성공배경의 뿌리가 서양 금융자본
이기 때문에....중국공산당이 손문이라는 넘을 추앙하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