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뮬리
강 문 석

가을이 열리면서 화사한 분홍빛 세상도 함께 펼쳐졌다. 청명한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이는 핑크뮬리가 만든 풍경이다. 사람들은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에 만나는 꽃이라 핑크뮬리에 더욱 열광하는지 모르겠다. 천지사방에 기화요초 만발하는 봄철이 아닌 나뭇잎들이 단풍으로 시드는 가을에 온 세상을 환하게 분홍으로 물들이는 경이로움이니 탄성을 지를 것이다. 핑크뮬리 축제는 서울 하늘공원을 비롯하여 부산 을숙도와 대저생태공원 그리고 경주 반월성 첨성대까지 이어진다. 그동안 가을이면 억새축제에 몰리던 인파가 핑크뮬리로 발길을 돌리면서 이제 핑크뮬리는 가을을 대표하는 꽃으로 자리매김했다. 전국적으로 핑크뮬리 군락지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다.
제주 서귀포 허브동산 핑크뮬리는 관람료까지 받는데도 흥행은 식을 줄 모르고 포천 평택 고창 등 일일이 지역을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선선한 가을바람 부는 때에 핑크세상을 배경으로 가을 인생샷을 남겨보라’는 광고카피처럼 핑크뮬리로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지역별 경쟁도 뜨겁다. 핑크뮬리는 원래 미국의 서부와 중부지역 따뜻한 평야에 자생하던 여러해살이풀이었다. 그런 풀이 세계 곳곳으로 퍼져 조경용 화초로 귀한 대접을 받고 있으니 참 기이한 현상이다. 사람팔자 시간문제라더니 그 말을 이제 핑크뮬리에게 물려줘야 할 것 같다. 핑크뮬리는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불과 5년 만에 전국에 축구장 16개 면적을 차지할 정도로 빠른 성장세를 보여준다.
인스타그램에서 핑크뮬리를 검색하면 20만 건 이상 사진이 검색될 정도로 인기가 높으니 어쩌면 지자체별로 핑크뮬리 심기에 열을 올린 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라 전체가 핑크뮬리 매력에 푹 빠졌다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데는 축제소식을 전하는 신문도 한몫을 했을 터이다. ‘핑크빛 가을을 남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낙동강가의 핑크뮬리 그라스원은 가족과 연인들로 북적이는 안동의 새로운 명소로 자리 잡았다. 안동시는 <핑크로 물든 길>이란 이름까지 붙이면서 벤치와 바람개비 조형물을 설치했다. 11월 초까지는 분홍물결을 감상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신문기사가 이처럼 바람잡이 역할을 하는 것도 핑크뮬리를 즐기려는 사람들에겐 소중한 정보가 아닐 수 없겠다.
신문에 올라온 핑크뮬리 사진도 안동이 가장 아름다웠다. 가을단풍마냥 울긋불긋한 옷을 차려입은 탐방객들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꽃밭에 들어서서 마치 연출이라도 하듯 사진을 찍거나 꽃을 관찰하고 있었다. 핑크뮬리는 분홍빛과 자줏빛 보랏빛을 보인다고 자랑하지만 이름이 핑크뮬리인데 다른 색상이 있다면 변종이 아닐까 싶다. 자줏빛과 보랏빛은 영어로 purple과 violet을 서로 바꿔가며 쓰는데 우리도 그에 따르는 것 같다. 처음 인터넷에 올라온 초콜릿 색상 핑크뮬리를 보면서 카메라의 문제거나 촬영 후 과다한 색상보정으로 그렇게 색상이 바뀐 줄 알았다. 그런데 부산 어느 시인이 경주 첨성대에서 찍어 페이스북에 올린 핑크뮬리가 완전 보라색이었다.
보라색은 색상 자체가 어두워서 역광으로 찍더라도 분홍색만큼의 풍경을 기대하기 어렵다. 오랜만에 낙동강 하구에서 가까운 대저생태공원을 찾았다. 한때는 전국에서 가장 큰 유채꽃단지를 만들어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던 곳이다. 태풍피해로 공원은 황무지에 가까웠다. 폐허로 변한 바닥을 무연히 내려다보다가 눈을 드니 짙푸른 백양산 자락이 시야에 들어왔다. 산 아래 하얗게 박힌 아파트들이 반짝이는 낙동강 수면과 어우러져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다가왔다. 생태공원 안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따라 강을 거슬러 오르는데 제방 쪽으로 핑크뮬리 단지가 나타났다. 꽃은 햇볕을 받는 위쪽만 분홍색으로 물들었고 아래쪽은 이삭 패기 전 벼처럼 연녹색이었다.
꽃밭에는 열심히 포즈를 바꿔가며 스마트폰 셔터를 눌러대는 아가씨들도 보였다. 얼마나 촬영에 열중하는지 지나가던 사람이 가까이 다가서서 자신들을 카메라에 담는데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사람들과 나누는 풍경사진엔 사람이 꼭 들어가야 하는데 꽃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 자리에서 북쪽으로 백여 미터 떨어진 곳 핑크뮬리는 개화에 큰 차이를 보였다. 부분적으로 염색한 머리칼처럼 여기저기 찔끔찔끔 물들어 핑크뮬리가 기온에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기회가 닿으면 더 관찰하려고 사진에 나온 9월 19일 날짜를 지우지 않았다. 올봄 물금취수장 인근 황산공원에서 벼를 닮은 핑크뮬리를 처음 만났다.
같은 벼과 식물인 억새와 닮아서 핑크뮬리를 ‘분홍억새’라고도 부른다지만 난 ‘분홍쥐꼬리새’란 이름에 더 애착이 갔다. 조성한지 10년이나 된 명품 잔디밭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다 마른논 벼처럼 잔뜩 심은 핑크뮬리는 그냥 밋밋한 풀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때부터 공원을 산책할 때마다 거리가 좀 멀지만 핑크뮬리의 변화가 궁금하여 죽 관찰했다. 그러다가 핑크뮬리의 생장조건까지 찾아보게 되었다. 핑크뮬리는 햇볕이 잘 들고 배수가 좋은 곳에 자란다고 했다. 핑크뮬리를 식재한 곳은 4대강사업 이전까진 모래사장을 개발하여 채소를 재배하던 곳이었다. 핑크뮬리가 자라기엔 최적의 조건을 갖춘 땅이라 할 수 있었다.
마른땅에 대한 내성도 강해서 척박한 토양에도 시들지 않고 질병에 강하며 그늘에서도 잘 버틴다는 사실도 알았다. 잎은 여름에 자라 가을에 분홍색이나 자주색 꽃이 피는데 길게 꽃차례를 이루며 만발한다. 꽃은 아름답고 관리가 쉬워 정원 식물로도 재배하는데 가을철 바람에 흩날리는 풍성한 분홍색 꽃이 그 중 압권이란다. 11월 초까지 분홍물결을 이루며 몽환적인 가을 정취를 선사하는 핑크뮬리의 꽃말은 ‘고백’이란다. 그러고 학명은 머리카락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이름처럼 가을에 꽃이 피면 산발한 분홍색 머리카락처럼 보인다. 영어로는 ‘헤어리온 뮬리’나 ‘걸프 뮬리’로 불린다. 낱개론 너무 연약하여 뭉쳐서 자라면서 꽃을 피우고 나면 뭉친 하나의 포기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전체가 하나의 물결로 나타난다.
하지만 가까이 접근하여 찍는 사진은 핑크뮬리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여주기도 어렵다. 전국 많은 지역이 핑크뮬리 축제열기로 뜨거운데 직지사 가까운 직지천 둔치에 핑크뮬리단지를 조성한 고향 김천만은 신중한 반응을 보인다. 외래종 핑크뮬리가 확산될 경우 자칫 토종식물들이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우려였다. 여러해살이식물 핑크뮬리가 미국에서 들어와 제주도 휴애리자연생태공원에 처음 식재되었고 2년 후엔 순천만국가정원에도 단지가 조성됐다가 2017년에는 경주 첨성대 옆에도 심으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던 것. 이후 특유의 연한 분홍빛으로 인기를 끌면서 전국에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가까이서 보면 마치 분홍색 솜사탕을 떠올리게 하는 연약한 핑크뮬리지만 번식력이 워낙 강해 가시박처럼 토종식물의 생태계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전문가들까지 우려하고 있다. 급기야 환경부도 핑크뮬리를 관심 외래식물로 분류해놓고 정밀조사를 거쳐 금년 말쯤 위해성 등급판정을 매길 것이라고 한다. 가시박은 1990년 전후 귀화하여 전국적으로 퍼지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가시박을 몹쓸 식물로 낙인찍어서 야단법석이다. 하지만 귀화식물은 이미 이 땅에서 서식 가능하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며 단지 늦게 출현했을 뿐이라는 것. 이러한 귀화식물을 완전히 제거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의 욕심일 뿐 절대로 그리 되지는 않는단다. 핑크뮬리도 수입한 사람들 즐기고 떠난 뒤 산천을 뒤덮는 해악을 보일까봐 심약한 사람은 미리부터 걱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