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다산 정약용에 대한 글을 접했다. 다산은 수필가요, 시인이며, 선비요, 실학자요, 정치가였다. 47세때 전남 강진으로 귀양을 갔다. 겨우 방을 하나 얻었는데 그 방의 이름을 ‘사의재(四宜齋)’라고 지었는데 이 말은 ‘네 가지를 마땅히 해야 할 방’이라는 뜻이다.
‘하나는 생각을 맑게, 또 하나는 용모는 엄숙하게, 다른 하나는 움직일 때는 무겁게 움직이고 끝으로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였다. 이 네 가지를 꼭 지키겠노라고 다짐을 하고 또 다짐을 하였다. 스스로 반성하고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자기의 원칙을 정해 놓고 글을 배우러 오는 이게 글을 가르치고 자기도 공부하여 500여권의 저서를 완성하였다고 한다.
다산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면 빛나는 선생님이 될 것 같다. 생각을 맑게 한다는 것은 긍정적인 생각을 하겠다는 다짐이다. 귀양길에 올랐으니 왕도 밉고 신하도 밉고 그들을 죽이고 싶고 온갖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악하고 더럽고 추한 생각은 자기에게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고 오직 맑고 밝은 생각, 긍정적인 생각만 하고 살겠노라고 다짐했던 것이다. 제자들을 가르치고 열심히 공부만 하겠노라는 생각만 했다. 그러면서 많은 저서를 남기겠노라고 했다. 이런 맑은 생각이 500여권의 주옥같은 저서를 남기게 된 것이다.
우리 선생님들도 언제나 생각은 맑게 하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가득차면 좋을 것 같다. 부정적인 생각, 미워하는 생각, 나쁜 생각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희망적인 생각, 착한 생각, 부드러운 생각, 참된 생각, 생산적인 생각으로 학생들의 가르침에 임하면 좋은 결과를 가져오리라 본다. 부정적인 생각은 파멸이고 긍정적인 생각은 생산이다.
다산은 용모는 엄숙하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용모를 단정하게 하겠다는 말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자세를 흐트러지지 않게 해서 오직 찾아오는 제자를 가르치고 오직 공부하는 일에만 열중하겠다는 다짐의 표시였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오직 공부, 공부하는 일에만 열중하겠다는 것이었다. 용모단정은 마음의 각오를 나타내는 것이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겠다. 앞만 바라보겠다. 오직 가르치고 배우고 하겠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오직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열중하는 것은 우리 선생님들의 본분이라 생각된다.
또 다산은 움직일 때는 무겁게 움직이려고 하였다. 가볍게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지금은 죄인의 몸이지만 그래도 학자요, 선비요, 실학자요, 정치가로서 행동을 가볍게 할 수는 없었다. 자기가 구한 집이 주막집이라 매일 같이 손님들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 신세타령이나 하고 술주정을 부렸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선생님의 행동은 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다. 바른 자세, 바른 행동이 필요하다. 선생님을 존경할 마음이 저절로 생겨날 정도로 행동을 가볍게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추한 모습 보이면 학생들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다산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쓸데없는 말, 비방하는 말, 미워하는 말을 하지 않기도 다짐했다. 주막집에서 매일 같이 술타령 하고 임금님 욕하고 신하들 욕하고 말을 함부로 했다면 살아남았을 리가 없다. 어렵고 힘들수록 말을 함부로 하지 않으려고 했다. ‘다언삭궁’이라 말이 많으면 자주 궁지에 몰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말의 인내, 말의 절제, 말의 훈련이 500여권의 저서를 완성하게 하는 밑바탕이 된 것이다.
우리 선생님들도 문제가 풀리지 않아도, 내 뜻대로 되지 않아도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래도 참고 또 참고 말은 아끼고 또 아낄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면 자신의 부끄러움과 수치를 면할 수 있다.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는 길은 말에 대한 절제다. 언제나 아름다운 말, 좋은 말, 남에게 덕이 되는 말을 하면 자기도 살고 남도 산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은 자기는 통쾌할지 모르나 상대는 죽이는 꼴이 된다. 자신도 결국은 말로 인해 한번은 당하고 만다.
한국교육신문 : 2012-07-16 오전 9:40:00
e-리포터문곤섭울산외국어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의 마음가짐 (62)
장마로 인해 폭우가 쏟아졌다. 학교에 큰 피해는 없어 다행이다.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아 폭우가 내리면 주말이 없다. 늘 걱정이 되고 신경이 쓰인다. 아무리 물이 필요해도 지나치면 안 되겠다 싶다. 피해를 줄 정도면 적게 온 것만 못하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이 생각난다. 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는 뜻이다. 무엇이든 지나치는 것은 미치지 못함과 같기에 정도에 지나치는 것은 피해야 할 것 같다. 그래야 피해를 줄일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청장관(靑莊館) 이덕무(1741-1739)의 시를 읽었다. “농부의 별은 새벽녘 공중에서 반짝이고/ 안개 뚫고 서리 맞으며 동편 논으로 나간다./ 시고 짠 세상맛은 긴 가난 탓에 실컷 맛보았고/ 냉대와 환대는 오랜 객지생활에서 뼈저리게 겪었지./ 부모님 늙으셨으니 천한 일을 마다하랴/ 재주가 모자라니 육체노동하기 딱 어울린다./경략의 달변이 없으니 이를 문질러 잡으랴 /온화한 낯빛으로 촌 노인네 마주해야지.”
이 시를 읽으면서 스쳐지나가는 것이 있다. 이덕무는 시인이자 실학자인데도 시골에 가서 농사를 짓는 농부가 되었다. 농부로서 가져야 할 기본 덕목인 ‘근면’을 가지고 있었다. 농부 하면 근면이고 성실이다. 선생님 하면 역시 근면이고 성실이다. 농부의 별이 새벽녘 공중에서 반짝이듯이 서툰 시인인 농부에게도 부지런함이 번뜩인다.
농사를 짓는 게 많지 않아 새벽에 들녘에 나가지 않아도 되는데 새벽을 깨우며 들로 나가는 이가 농부다. 우리 선생님들의 모습도 이와 많이 닮았다. 새벽 같이 출근을 하시지 않아도 되는데 아침 도시락을 싸오기도 하고 차 안에서 아침식사를 해결하는 선생님도 계시고 어떤 선생님은 그렇게 일찍 오지 않으셔도 되는데 택시를 타고 출근을 하신다. 어떤 선생님은 교무실에서 라면으로 아침을 때운다. 오직 학생들 때문이다. 그래서 선생님의 별은 새벽녘 공중에서 반짝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농부는 안개 뚫고 서리 맞으며 동편 논으로 나간다. 안개는 주로 새벽에 많이 낀다. 선생님들은 새벽을 깨우는 선비다. 일터인 학교를 새벽부터 나온다. 학교에 온다고 해서 달고 맛있는 맛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시고 짠맛만 기다린다. 그래도 서둘러 출근한다. 학생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나눈다.
학교에 오면 언제나 환대를 받는 것 아니다. 냉대를 받기도 한다. 학생들이 인사를 하지 않고 외면할 때도 있다. 선생님들끼리도 따뜻하게 대화를 나누지도 않는다. 관리자도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는다. 쓴맛을 볼 대로 다 본다. 그래도 조금도 굴하지 않는다. 참고 잘 이겨낸다. 오직 냉대를 양약으로 삼는다.
시인은 부모님을 효도하는 정성이 극성스럽다. 부모님이 늙으셨으니 부모님께 효도하기 위해 천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땀 흘리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박봉에도 땀 흘리는 선생님들이 많다. 처자식을 먹여 살리고 부모님에게 용돈을 드려야 하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기쁨으로 한다. 원망, 불평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선생님은 많은 사람들의 롤 모델이 아닌가 싶다.
또 시인에게서 겸손의 미덕을 찾아볼 수 있다. 재주가 탁월한데도 재주가 모자라 농사짓는다고 하고 달변이 아니니 방약무인(傍若無人)한 행동을 하고 있다고 노래하였다. 재주가 없으면 학자가 될 수도 없고 선비도 될 수 없다. 시인도 될 수 없고 문장가가 될 수 없다. 이런 재주를 가졌어도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본을 받을 만하다. 우리 선생님들은 실력이 출중하신데도 겸손의 미덕을 보이고 있는 것은 이덕무 시인을 닮았다고 말할 수 있다.
또 시인에게서 배울 점은 이웃 어른들은 존경하는 마음이다. 온화한 낯빛으로 촌 노인네를 맞이하고자 하는 마음자세가 밤하늘의 달빛처럼 너무 빛난다. 우리 선생님들의 어른 공경의 마음과 흡사하다 싶다. 학생들이 웃어른 공경의 마음을 가지는 것도 다 선생님의 영향 때문이다.
한국교육신문 : 2012-07-16 오후 5:54:00
선생님의 마음가짐 (63)
커텐을 열었다.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내 곁을 스친다. 커텐이 열리고 창문이 열리면 행복을 맛보게 된다. 커텐 너머, 창문 너머 행복이 있다. 비 갠 뒤의 생기 얻은 초록빛을 본다. 청량한 바람은 답답한 마음을 시원케 한다. 이 행복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는 커텐을 열어야 한다. 창문을 열어야 한다. 언제나 행복이 내 곁에 있기 위해서는 닫혀 있는 커텐과 문을 열어야 하겠다. 그러면 함께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오늘 아침 시 한 편을 읽었다. “함께 나눠야할 행복이 있어서 벽은 문이 되었다./손잡이에서 작은 온기나마 느낄 수 있어서/문은 아직 희망이다/초인종을 누른다. 손잡이를 놓치기 전에 문이 열렸으면/ 기척을 기다린다. 닫혀있는 문은 동굴 같다/문이 열리면 금세 사라지고 말 동굴 속에서/하나가 되지 못해 끝내 벽이 되어버린 얼굴/부고장보다 차가운 낯빛/표정이 없는 얼굴은 닫혀있는 문보다 견고하다/문을 여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열렸다 닫혀버린 문밖에서 알았다/ 사람아, 사람아/몸과 마음이 따로 드나들 수 있도록. 안팎이 너무 동떨어지지 않도록/세상 모든 문들이 모두 두 개였으면 좋겠다/서둘러 문을 닫는 사람은 문을 외롭게 하는 사람이다.”
행복한 교육, 감동을 주는 교육, 꿈을 주는 교육이 무엇인지 아는 선생님은 이것을 함께 나누기 위해 벽을 문으로 바꾼다. 문이 열리면 동굴 같은 미지의 세계에 숨겨두었던 행복을 함께 나눌 수 있기에 벽을 문으로, 문을 투명한 유리가 있는 문으로 바꾼다. 쉽게 열릴 수 있는 문으로 바꾼다. 행복을 찾는 학생들은 쉽게 문을 열 수 있다.
선생님들은 초인종을 누르기를 바라고, 문고리를 잡고 온기를 느끼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학생들은 용기가 없다. 초인종 누르는 것조차 힘들어한다. 문고리 잡는 것조차 두려워한다. 가까이 하는 것조차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용기를 가진 학생들은 초인종을 누른다. 문고리를 잡으며 선생님의 온기를 느낀다. 선생님이 갖고 있는 행복을 얻는다.
선생님은 언제나 학생들에게 희망이다. 교육이 희망이라고 믿는 학생들은 선생님이 교육을 하기에 희망을 가지게 된다. 언제나 만족을 주고 기쁨을 주고 즐거움을 안겨다 주기에 학생들은 용기를 낸다. 선생님에게 다가가기를 꺼려하지 않는다.
막상 문을 열고 선생님을 대하니 마음이 썩 내키지 않는다.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선생님이 아니다. 선생님의 낯빛이 써늘하기 그지없다. 부고장보다 더 차갑게 느껴진다. 학생들은 실망하고 만다. 선생님의 낯빛은 언제나 따뜻한 것으로만 느끼는 학생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준다. 그러기에 선생님의 표정은 언제나 맑고 밝으며 따뜻하고 훈훈하게 느껴지도록 애쓰지 않을 수 없다.
학생들이 원하는 것은 선생님의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 안과 밖이 똑같은 것을 원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학생들이 원하는 행복만 얻기 위해 차라리 문이 두 개가 되기를 바란다. 학생들은 선생님과의 소통을 원한다. 문을 열면 동굴 같은 어두움이 환하게 다가오듯이 언제나 환한 모습 속에서, 쾌적한 환경 속에서 선생님과의 대화를 원하고 배움을 원한다. 새로운 힘을 얻고 생기를 얻으며 시원한 쾌감을 얻기를 원한다.
두 개의 문보다는 하나의 문이라도 언제나 학생들에게 희망을 주는 문, 행복을 주는 문, 즐거움과 기쁨을 주는 문, 만족을 주는 문이 되면 학생들은 기뻐한다. 온기를 느낄 수 있는 문이 되면 학생들은 좋아한다.
선생님의 문은 항상 열려 있으면 더욱 좋고 항상 열어두기가 어려우면 열어두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이 좋다. 서둘러 문을 닫으면 문은 외로워진다. 벽이 된다. 자신이 외롭게 된다. 고독스럽게 된다. 학생들은 행복을 만드는 선생님, 행복을 나누어주는 선생님, 행복을 함께 하는 선생님을 언제나 그리워한다.
한국교육신문 : 2012-07-18 오후 1:47:00
선생님의 마음가짐 (64)
기숙사에서 기상을 알리는 음악이 들려오는 아침, 김종제 시인의 ‘복사꽃 편지’를 읽었다. 시만큼 아름다움을 주는 글은 잘 없다 싶다. 시를 읽으면 여러 생각들이 샘솟듯 솟아오른다.
“지난 생에/ 꽃으로 맺은 약속을/ 잊지 아니하여 왔더니/ 소낙비에/사나운 바람에/ 복사꽃 짧아서/ 붉은 꽃잎 편지는/ 갈기갈기 찢어져/ 바닥에 떨어져 뒹굴고 있네/ 조각난 저 편지/한 잎, 당신의 입술을 읽네/ 한 잎, 당신의 눈을 읽네/ 한 잎, 당신의 가슴을 읽네/ 한 잎 저 글속에/ 내가 저벅저벅 걸어 들어갔더니/ 복사꽃 편지의 나를/ 당신이 읽고 있네/ 한 잎, 거친 손을 읽네/ 한 잎, 뜨거운 혀를 읽네/ 한 잎, 숨 가쁜 나의 뼈를 읽네./”
이 시를 읽으니 우리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바로 복사꽃 편지라는 생각이 든다. 복사꽃은 복숭아꽃이다. 도화라고도 한다. 복사꽃 같이 예쁘고 아름다운 우리 학생들이 소낙비에 또는 사나운 바람에 떨어지고 고운 빛깔과 모양마저 뭉개지고 만다. 갈기갈기 찢어져 사람들의 발에 밟히고 마는 상처투성이의 학생들이 바로 떨어진 복사꽃이 아닌가 싶다. 그래도 낙심하지 않고 실망하지 않고 자신의 모습 그대로 하나의 편지가 되어 선생님에게, 부모님에게, 친구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고 대견스럽다.
우리 선생님들은 이런 섭섭한 마음, 서운한 마음, 상처 입은 마음, 외로운 마음, 인정받지 못하는 서러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처량한 신세인 학생들에게 찾아가 그들의 편지를 하나하나 읽어주고 답해준다. 조각난 저 편지를 일일이 붙여서 읽고 또 읽는다. 보잘것없는 한 잎 입술을 읽고 눈을 읽고 가슴을 읽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눈물을 짓는다.
학생들의 애절한 사연 속에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니 학생들도 복사꽃 편지가 되어 있는 선생님에게 다가와 선생님의 편지를 읽고 가슴을 놓는다. 함께 울고 함께 웃고 함께 즐기고 함께 내일을 기약한다. 나 못지않게 힘들어하시는 선생님의 편지를 읽고는 다시 힘을 얻는다. 선생님의 한 잎, 거친 손, 뜨거운 혀, 숨 가쁜 선생님의 뼈를 읽고는 울음이 웃음으로 변한다. 슬픔이 기쁨으로 변한다. 실망이 희망으로 변한다.
학생들은 나 때문에 거칠어진 선생님의 손이 생각난다. 칠판에 글을 쓰시는 선생님의 고운 손이 거친 손으로 바뀐 것을 깨닫는다. 예쁜 손이 거친 손이 되어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열심히 판서하시면서 학생들을 가르치시는 모습에 감동된다.
선생님의 나를 향한 입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열정을 가지고 가르치시는 모습이 눈에 어른거려 눈물이 앞을 가린다. 몸이 아파 도저히 수업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도 최선을 다해 가르치시는 따뜻한 선생님의 입술이 생각나서 어쩔 줄 모른다.
거칠 줄 모르는 선생님의 열정이 나를 끓어오르게 만든다. 숨을 몰아쉬면서도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고 애를 쓰시는 선생님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자랑스러운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다. 학생들은 비록 상처를 입고 빛이 사라지고 희망이 없어지고 인정을 받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외면하여도 선생님의 복사꽃 편지를 읽으면서 다시 힘을 얻고 용기를 얻고 기쁨을 얻고 내일을 기약하고 미래를 얻는다.
서로가 복사꽃 편지가 되어 힘을 주고 힘을 얻고 용기를 주고 용기를 얻고 격려를 주고받으면서 연애편지 읽듯이 따뜻하게 읽어 내려간다. 또 다시 편지가 오기를 기다린다. 밤새는 줄 모르고 편지에 답을 한다. 식사를 하면서 편지를 읽기도 하고 편지를 쓰기도 한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편지를 읽기도 쓰기도 한다.
그러면서 삶의 기쁨을 되찾고 희열을 맛본다. 비록 복사꽃 편지라 할지라도 연애하는 이들의 편지 못지않게 아름답고 귀한 편지라 차곡차곡 모은다. 읽고 또 읽는다. 그러면서 어떻게 반응할까 고심한다. 이런 재미로 하루하루 세월을 보낸다. 그러면서 사제관계가 더욱 돈독해지고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삶을 살게 된다.
한국교육신문 : 2012-07-19 오전 11:18:00
선생님의 마음가짐 (65)
태풍이 큰 피해를 주지 않고 잘 지나갔다. 다행이다. 태풍이 우리말을 들어서 피해간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요구한다고 해서 살짝 피해 간 것도 아니다. 어쨌든 고마울 뿐이다. 태풍이 지나간 뒤의 하늘은 너무 멋지다. 시인들은 태풍 후의 하늘을 보면 저절로 노래가 나올 것이다.
어떤 시인의 ‘시인과 독자’라는 시 한 편을 읽었다. 더운 여름에는 시 한 편을 읽고 음미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땀을 식힐 겸 정서적인 안정을 찾기에는 시를 읽는 것이 최고인 것 같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화려한 것을 보면/ 사람들은 시인에게/ 멋진 시를 지으라고 요구를 한다// 좋은 것을 보면 시가 나오고/ 즐거운 것을 보면 노래가 되려면/ 슬픈 것들은/ 하찮은 것들은/ 어찌 할거나!// 슬픔을 삭여 아름다운 시를 낳고/ 혼자만의 아픔 속에서 사랑을 노래할진대/ 시인은 시시하게 살고/ 독자는 무리한 요구를 한다.//
선생님들은 교직생활을 하면서 만족을 느끼기도 하고 한편으로 힘들어할 때도 있다. 어떻게 하라고 요구를 할 때 힘들다. 교장이 요구한다. 교감이 요구한다. 학부모님들이 요구한다. 학생들이 요구한다. 요구사항이 어찌 그리도 많은지? 어떤 때는 짜증이 날 때도 있다.
자율성과 책무성이 보장되어 있는데도 자율성을 자꾸만 제약하면서 책무성만 강조한다. 이럴 때 선생님들은 정말 화가 난다. 그래도 참는다. 선생님의 멋진 면을 이런 데서 찾아볼 수 있다.
학생들은 교복에 대한 요구사항이 많다. 두발에 대한 요구사항도 많다. 학교식당 식단에 대한 요구사항도 많다. 수업에 관한 요구사항도 많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들은 얼굴이 일그러진다. 마음이 상하기도 한다. 그래도 학생 중심의 교육, 고객 만족의 교육, 수요자 중심의 교육이란 측면에서 참고 또 참는다. 최대한 수용하고 수용한다. 만족을 주기 위해서다.
독자는 시인들도 가만두지를 않는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멋진 시를 지으라고 요구하고 화려한 것을 보면 또 역시 멋진 시를 지으라고 요구한다. 그럴 때마다 짜증이 날 것이다. 그래도 짜증을 내지 않고 모든 것을 잘 참고 잘 이겨낸다. 속으로만 ‘그건 아닌데’ 하면서 말이다. 우리 선생님들도 그러하다. 요구사항이 있을 때마다 속으로만 ‘그건 아닌데’ 하면서도 잘 참고 넘어간다. 그렇게 하는 것이 교직생활의 지혜이다.
좋은 것을 보면 시를 지으라 하고 즐거운 것을 보면 노래하라는 것은 독자 입장에서는 당연한 요구인지도 모른다. 독자들은 시를 짓고 노래하는 것이 서툴기 때문이다. 독자들이 요구할 때 그것을 이해하면서도 ‘좋은 것, 아름다운 것, 즐거운 것만 시를 짓고 노래하면 슬픈 것, 하찮은 것은 어쩌란 말인가?’ 하고 속으로만 되뇐다. 슬픈 것을 잘 이겨내고 아름답게 시를 짓고 하찮은 것 가운데서도 귀함을 깨달아 노래하는 것이 시인의 사명인데 독자들을 그것을 모른다. 그래도 독자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선생님들은 시인과 같다. 학생들, 학부모님들의 요구사항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참고 견뎌내어야 하며 너무 무리한 요구다 싶어도 시인처럼 속으로만 되뇔 뿐 학생들, 학부모님들의 요구사항에 귀를 기울이며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입장에서 이해하면서 해결책을 찾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와 같은 자세가 우리 선생님들의 바른 자세다.
학생들과 학부모님들의 요구사항을 다 들어주면서 사는 것이 시시하게 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근사하게 사는 것이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고 따질 필요도 없다. 수요자 중심의 교육을 진행하는 것이 나아갈 방향이다.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것들이 있다면 알아듣기 쉽도록 설명하고 설득해 나가면 된다. 시인이 독자에게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요구할 때 ‘혼자만의 아픔 속에서 사랑을 노래할진대‘ 식으로 이해가 되도록 설명해 주었다.
그러면 학생들도 학부모님들도 수긍을 한다. 이해를 한다. 불평을 하지 않는다. 더 이상 요구하지 않는다. 학교 교칙에 맞게 생활한다. 적응을 한다. 질서를 배운다. 법을 배운다. 학교생활에서 만족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