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범어사에 주석(主席)하시는 원로 지백(智伯)스님께서 <닥터노먼베쑨>이라는 책 한 권과 함께 복사된 몇 페이지의 글 뭉치를 보내왔는데 다름 아닌 <禪房日記>라는 글이었다. 모두 다 읽고는 내용이 너무도 훌륭하여 이 시대를 살아가는 불자로서 한 번쯤 읽기를 권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노스님께 찾아가 내력을 여쭈었더니 이 글은 20여년 전에 탄허 큰스님의 상좌로 지허(知虛)스님이라는 서울대 출신의 훌륭한 납자(衲子)가 쓴 것인데 1973년 봄 <신동아>가 공모한 논픽션 부분에 당선된 작품으로 너무도 진솔하고 시대상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청정한 수행자들의 꾸밈없는 생활상이 잘 반영되어 후학들에게 보여드리고 싶어서 책장에 간직하고 있었던 것인데 책으로는 발간 못하고 복사를 해서 가끔씩 생각나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다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참된 불법을 전하기 위하여 열심히 정진하라 하시며 까마득한 젊은 수행시절의 체험담을 들려주셨다.
본인은 노스님의 후학을 생각하시는 정열에 너무도 감사한 나머지 노스님의 뜻대로 책으로 엮어 많은 불자들에게 나눠드리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훌륭한 글을 후학들이 접할 수 있도록 인연된 "신동아"와 지금은 어두메 계실지 모를 지허스님 그리고 원로 지백스님께 진심으로 감사 드리며 이러한 인연으로 청정한 수행자,신심 충만한 불자들이 가득한 사회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1993년 하안거 金井散人>
상원사행(上院寺行)
十월 一일 나는 오대산(五臺山)의 품에 안겨 상원사 선방(上院寺 禪房)을 향해 걸어 나아갔다. 지나간 전쟁 중 초토작전(焦土作戰)으로 회진(灰塵)되어 황량하고 처연하기 그지없는 月精寺에 잠깐 발을 멈추었다. 1천3백 여년의 풍우에 시달린 九層石塔의 塔身에 매달린 풍경소리에 감회가 수수롭다.
塔前에 비스듬히 자리잡은 반가사유보살상(半伽思惟菩薩像)이 후학납자(後學衲子:禪僧)를 반기는 듯 미소를 지우질 않는다.
收復 後에 세워진 건물이 눈에 띈다. 무쇠처럼 단단하여 쨍그렁거리던 선와(鮮瓦)는 어디로 가고 角木 기둥이 왠일이며, 열두폭 문살 문은 어디로 가고 영창에 유리문이 왠일인가. 당대의 거찰(巨刹)이 이다지도 초라해지다니. 그러나 불에 그을린 섬돌을 다시 찾아 어루만지면서 復元의 역사(役事)를 면면히 계속하고 있는 願力스님들을 대하니 고개가 숙여지면서 禪房을 향한 걸음이 가벼워진다.
月精寺에서 上院寺까지는 三十리길이다. 개울의 징검다리를 건너서 화전민의 독가촌(獨家村)을 지나기를 몇 차례 거듭하니 해발 一千m에 위치한 上院寺에 다다른다.
上院寺는 지금부터 一千三百六十여년전 新羅 善德女王때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초창(初創)한 사찰로서 오늘날까지 禪房으로서 꾸준히 이어 내려온 선도량(禪道場)이다. 고금을 통해 大德스님들의 족적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중대(中臺)에 자리잡은 적멸보궁(寂滅寶宮)때문이다.
적멸보궁이란 부처님의 정골사리(頂骨舍利)를 모신 도량(道場)을 말함인데 이런 도량에서는 佛像을 모시지 않으며 우리나라에는 五大寂滅宮이 있으니 양산 通道寺, 영월 法興寺, 태백산 淨岩寺, 설악산 鳳頂菴 그리고 오대산 中臺이다. 衲子나 佛敎徒들이 기독교의 예루살렘이나 회교의 메카처럼 평생순례를 염원하는 聖地로 꼽힌다. 근세에는 이 도량에서 희대의 道人이신 方漢岩 大禪師가 상주 교화했기 때문에 강원도 특유의 감자밥을 먹으면서도 禪客이라면 다투어 즐거이 앉기를 원한다. 지나간 도인들의 정다운 체취가 도량의 곳곳에서 다사롭고, 靑苔낀 기왓장과 때묻은 기둥에는 도인들의 흔적이 歷然하다.
종각에는 國寶로 지정된 청동제 新羅大鐘이 매달려 있어 一千 수백년동안 佛音을 끊임없이 천봉만학(千峯萬壑)을 굽이져 娑婆세계에 메아리로 전해 주었노라고 알리고 있다. 종문(鐘紋)의 飛天像이 佛心을 계시하면서, 초겨울의 서산에 비켜섰다.
큰방 앞에서 客이 왔음을 알리자 知客스님이 친절히 客室로 안내한다. 객실은 따뜻하다. 감자밥이 꿀맛이다. 무척이나 시장했던 탓이리라. 珍富 버스정류소에서부터 줄곧 걸었으니 피곤이 온몸에 눅진 눅진하다. 院主스님과 立繩스님께 방부(房付 : 중이 남의 절에 가서 좀 있기를 부탁하는 일)을 알리니 즉석에서 허락되었으나 큰방에 참석치 않고 객실에서 노독을 달래었다.
山寺의 겨울채비
十월 二일 아침공양이 끝나자 방부를 드렸다. 장삼(長衫)을 입고 御間(절의 法堂이나 큰방 한복판에 있는 간)을 향해 큰절을 세 번 한다. 本寺와 師僧 그리고 夏安居 처소를 밝히고 法名을 알리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先着스님들은 환영도 거부도 하지 않는다. 그저 담담히 不將不迎할 뿐이다.
法階의 순에 따라 좌석의 次序가 정해진다. 比丘戒를 받은 나는 비구석중 연령순에 따라 자리가 주어졌다. 내가 좌정하자 입승스님이 公事를 발의했다.
공사란 절에서 행해지는 다수결을 원칙으로 하는 일종의 회의를 말함인데 여기서 의결되는 사항은 여하한 상황이나 여건하에서도 반드시 실행되어야 한다. 적게는 울력으로부터 크게는 山門出送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공사를 통하여 채택되고 결정된다. 본래 절 생활이란 主客이 없고 自他가 인정되지 않고 다만 우리들이라는 공동생활만이 강요되는 곳이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질서와 법도의 준수가 요구되며 개인행동이 용납되지 않는다. 그래서 생활의 외양은 극히 共産적이지만 내용은 극히 自主적이라고나 할까.
공사의 내용은 김장 울력이다. 반대의견이 있을 수 없다. 겨울을 지낼 스님들이니 김장을 속결하자는 의견만 구구했다. 오늘 아침공양 대중은 스물 세 명이다. 원주스님과 젊고 건장한 두 스님이 양념 구입차 江陵으로 떠나고 나머지 스님들은 무우 배추를 뽑은 뒤 각자의 소질대로 일에 열중했다.
무우 구덩이를 파고 배추를 묻기 위해 골을 파는 일은 주로 소장스님들이 하고 시래기를 가리고 엮는 일은 노장스님들이 맡고 배추를 절이고 무우를 씻는 일은 장년스님들이 담당했다. 배추 뿌리와 감자를 삶은 사이참을 먹으면서 부지런히들 했다. 해는 짧기도 하지만 무척이나 차가왔다.
五臺山이고 더구나 上院寺 道場의 十월이니까 그럴 수밖에.
김장이 끝난 후 祖室스님은 버린 시래기 속에서 열심히 손을 놀리고 있었다. 김장에서 손을 턴 스님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조실스님은 최악의 경우 최소한도로 먹을 수 있는 시래기를 다시 골라 엮고 있었다.
나도 조실스님을 도와 시래기를 뒤졌다. 조실스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옛날 어느 道人이 주석하고 계시는 토굴을 찾아 두 납자가 발길을 재촉했었다오. 그런데 그 토굴에서 十리쯤 떨어진 개울을 건너려고 할 때 이런 시래기 잎이 하나 떠내려 오더래요. 그러자 두 납자는 발길을 멈추고 이렇게 중얼거리더래요. <흥, 도인은 무슨 도인, 시래기도 간수 못하는 주제인데 도는 어떻게 간수하겠어. 공연히 미투리만 닳게 했구료> 하면서 두 납자가 발길을 되돌려 걷자 <스님들, 스님들, 저 시래기 좀 붙잡아 주고 가오. 늙은이가 시래기를 놓쳐 십리를 쫓아오는 길이라오> 두 납자가 돌아보니 노장스님이 개울을 따라 시래기를 쫓아 내려오고 있더래요. 시래기를 붙잡은 두 납자의 토굴을 향한 발걸음은 무척 가벼웠겠지요]
과묵한 조실스님이 계속해서 시래기를 엮으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어떠한 상황하에서도 食物은 아껴야만 하겠지요. 식물로 되기까지 인간이 주어야 했던 시간과 노동을 무시해 버릴 순 없잖아요. 하물며 남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식물이야 더욱 아껴야 하겠지요]
나는 침묵하면서 시래기를 뒤적일 뿐이었다. 진리 앞에서 군말이 필요할까.
十월 五일 원주스님의 지휘로 메주 쑤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대중생활이고 보니 언제나 분업은 철저히 시행된다. 콩을 씻어 삶는 것으로부터 방앗간을 거쳐 메주가 되어 천장에 매달릴 때까지의 작업과정에서 대중 전체의 손이 분업 형식으로 거치게 마련이다.
입이 많으니 메주의 양도 많지만 손도 많으니 메주도 쉽게 천장에 매달렸다. 스무말 들이 장독에는 수년을 묵었다는 간장이 새까맣다못해 파랗고 흰빛까지 드러내 보이면서 꽉 차 있지만 어느 때 어떤 종류의 손님이 얼마나 많이 모여 와서 간장을 먹게 될지 모르니까 언제나 풍부히 비축해 두어야 한다는 원주스님의 지론이다.
冬安居를 작정한 禪房에서 겨울을 지내자면 김장과 메주 작업을 거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이 禪客들의 불문율로 되어있는 관습이다. 김장과 메주 울력이 끝난 다음에 온 스님들은 송구스럽다면서 낮의 시간에 座禪을 포기하고 땔나무하기에 열중했다. 그러자 전체 대중이 땔나무를 하기에 힘을 모았다.
상원사는 동짓달부터 눈 속에 파묻히면 다음해 삼월초까지는 나뭇길이 막혀버린다. 눈 속에서는 나무와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에 땔나무는 많을 수록 좋았다.
상원사를 기점으로 반경 2km이내의 고목 넘어지는 굉음이 며칠동안 요란하더니 이십여평의 장작이 열사흗날 오후에 나뭇간에 쌓여졌다.
十월 十四일 結制를 하루 앞둔 날이다. 결제란 佛家用語로서 安居가 시작되는 날을 말한다. 안거란 일년 네 철중에서 여름과 겨울철에 山門(절) 출입을 금하고 수도에 전력함을 말한다.
夏安居는 四월 十五일에 시작되어 七월 十五일에 끝나고 冬安居는 十월 十五일에 시작되어 다음해 一월 十五일에 끝나는데 이때 쓰이는 용어가 解制다. 흔히 여름과 겨울은 공부철이라 하고 봄과 가을은 산철이라 하는데 공부철에는 출입이 엄금되고 산철에는 출입이 자유롭다. 그래서 결제를 위한 준비는 산철에 미리 준비되어야 한다.
禪房生活과 兵營生活은 피상적인 면에서 극히 유사한 점이 많다. 출진을 앞둔 임전태세의 점검이 武人의 소치라면 결제에 임하기 위한 제반 준비는 禪客이 할 일이다.
선방에 입방하면 침식은 제공받지만 의류나 그 밖의 필수품은 자담(自擔)이다. 월동을 위한 개인장비의 점검이 행해진다. 개인 장비라야 의류와 세면도구 및 몇 권의 佛書등일 뿐이다. 바랑을 열고 내의와 양말 등속을 꺼내어 보수하면 끝난다. 삭발을 하고 목욕을 마치면 物적인 것은 점검이 완료된다.
오후에 바람이 일더니 해질 녘부터는 눈발이 날렸다. 첫눈이어서 정감이 다사롭다. 오늘도 禪客이 여러분 당도했다. 어둠이 짙어갔다. 결제를 앞두고 좌선에 든 스님들은 동안거에 임할 마음의 준비를 마지막 점검해 본다. 밖은 初雪이 분분하다.
十월 十五일 三冬結制에 임하는 대중이 三十六명이다. 朝供(아침공양)이 끝나자 공사가 열렸고 結制榜이 짜여졌다. 결제방이란 결제 기간에 각자가 맡은 소임이다.
삼십육명의 대중을 소임별로 적어보면
祖室 - 山門의 總師 格으로 禪理강화 및 참선지도 1인
維邪 - 포살(戒行과 律儀)담당 1인
秉法 - 諸般施食담당 1인
立繩 - 大衆통솔 1인
住持 - 寺務總括 1인
元主 - 寺中 살림살이 담당 1인
持殿 - 佛供(客殿閣)담당 3인
持客 - 客의 안내 1인
侍者 - 祖室및 住持 侍奉 2인
茶角 - 茶담당 2인
明燈 - 燈火담당 1인
鍾頭 - 打鍾담당 1인
獻食 - 鬼客食物담당 1인
園頭 - 채소밭 담당 2인
火臺 - 火力管理(군불때기) 2인
水頭 - 식수관리 2인
浴頭 - 목욕탕관리 2인
看病 - 환자간호 1인
別座 - 後園관리 1인
書記 - 사무서류담당 1인
供司 - 供養(主食)담당 2인
菜頭 - 副食담당 2인
負木 - 薪炭(땔감)담당 4인
掃地 - 청소 대중일동
나의 소임은 부목(負木)이다. 소임에 대한 불만도 없지만 그렇다고 만족도 없다. 단체생활이 강요하는 질서와 규율때문이다.
결제 불공이 끝나고 조실스님의 법문이 시작되었다.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은 영원하다. 물질의 형태에서 보면 영원성은 부정되고 물질의 본성에서 보면 영원성이 긍정된다. 영원성을 부인함은 인간의 한계상황 때문이요, 영원성을 시인함은 인간의 가능상황 때문이다. 영원성을 불신함은 중생의 고집 때문이요, 영원성을 확신함은 佛陀의 열반(涅槃)때문이다. 인간의 한계성을 배제하고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개발하여 저 눈 속에서 탄생의 기쁨을 위해 조용히 胚子를 어루만지는 동물처럼, 얼어붙은 땅속에서 胚芽를 키우는 식물처럼 우리도 이 三冬에 佛性을 啓發하여 初春엔 기필코 見性하도록 하자. 끝내 佛性은 나의 안에 있으면서 영원할 뿐이다]
법문의 요지 였다.
법문을 하는 스님이나 듣는 스님들이나 견성을 위해 이번 삼동에는 백척간두에 서서 진일보하겠다는 결단과 의지가 충만해 있다. 다혈질인 몇몇 스님들은 이를 악물면서 주먹을 굳게 쥐기도 했다.
법문이 끝나고 차담(茶談)이 주어지면서 입승스님에 의해 시간표가 게시되었다.
오후 一시가 되자 시간표에 의해 동안거의 첫 入禪을 알리는 죽비(佛事의 始終을 알리는 대쪽으로 만든 물건) 소리가 큰방을 울렸다. 각기 벽을 향해 결가부좌(結跏趺座)를 취했다. 고요했다.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이 삼동에 견성하겠다는 소이에서 일까. 외양은 문자 그대로 면벽불(面壁佛)처럼 미동도 없다. 그러나 그 내양(內樣)은 어떠할까.
무장하고 출진하는 武士와 같다. 우열은 전쟁터에서 勇將과 敗將으로 구분되듯이 시간이 지나야 각자의 資糧과 분수가 노출되면서 공부가 익어가는 모습이 비쳐지리라.
禪房의 生態
十월 二十일 선방의 구성원은 극히 복합적이다. 실제적인 이질성과 내용적인 다양성이 매우 뚜렷하다. 먼저 연령을 살펴보면 十六세의 紅顔으로부터 고희(古稀)의 老顔에까지 이른다.
세대적으로 격(隔)이 三대에 이른다. 물론 世壽와 법랍(法蠟 : 중이 된 뒤로부터 치는 나이)과는 동일하지 않지만.
다음에 출신 고장을 살펴보면 八道 출신들이 제각기 제고장의 독특한 방언을 잊지 않고 수구초심(首邱初心 : 고향을 잊지 않음)에 가끔 젖는다. 대부분의 북방 출신들은 老 壯年層이다.
학력별로 살펴보면 사회적인 학력에서는 교문을 밟아보지 못했는가 하면, 대학원 출신까지 있다. 불교적인 학력(講院學習)에서는 初發心自警文도 이수치 않았는가 하면 大敎를 마치고 經藏에 통달한 大家도 있다.
다음으로 출신 문벌로 보면 재상가(宰相家)의 자제가 있는가하면 비복(婢僕)의 자제도 있다. 물론 선방에서는 이러한 조건들이 하나도 문제될 바 아니지만 그래도 견성하지 못한 중생들인지라 유유상종(類類相從)은 어쩔 수 없어 휴게시간에는 끼리끼리 자리를 같이 함을 볼 수 있다. 내분이나 갈등이 우려되지만 출가인들이어서 그 점은 오히려 기우(杞憂)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간과(看過)할 수 없는 사실은 출신성분이 다른 모임이긴 하지만 전체가 무시되고 개인이 위주가 된다는 점이다. 견성이라는 목표를 위해서는 처음도 自我요, 마지막도 자아다. 수단도 자아요, 목적도 자아다. 견성하지 못하고서 大我를 말함은 迷妄이요 위선일 뿐이다.
철저한 자기본위의 생활은 대인관계에 있어서 극히 비정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비정한 자기본위의 생활에 틈이 생기거나 흠결이 생기면 修道란 끝장을 알리면서 선객은 태타(怠惰)에 사로잡힌 무위도식배가 되고 만다. 자기 자신에게 철저하게 비정할수록 견성의 길은 열려지는 것이다. 전후 좌우 상고하찰(上顧下察) 해 보아도 견성은 끝내 혼돈된 자아로부터 출발하여 조화된 자아에서 멈춰질 수밖에 없다. 견성은 끝내 자아의 분방한 연역(演繹)에서 적료(寂廖)한 자아로 귀납(歸納)되어야 한다. 비정 속에서 비정을 씹으면서도 끝내 비정을 낳지 않으려는 몸부림, 생명을 걸고 생명을 찾으려는 비정한 영혼의 편력(모험)이 바로 선객들의 상태다.
진실로 利他적이기 위해서는 진실로 利己적이어야 할 뿐이다. 모순의 극한에는 조화가 있기 때문일까.
十월 二十일 선방에 전래되는 생활규범이 있으니 그것은 頭凉 足煖 腹八分 (머리는 시원하게 발은 따뜻하게 배는 滿腹에서 二分이 모자라는 팔분)이다. 衣食住의 간소한 생활을 표현한 극치이다.
선방에는 이불이 없다. 좌선할 때 깔고 앉는 방석으로 발만 덮고 잠을 잔다. 그래서 선객의 要品중의 하나가 바로 방석이다. 이주 할 때에는 바랑에 넣어 가지고 다닌다.
선방의 하루 급식량은 주식이 일인당 세홉이다. 아침에는 조죽(朝粥)이라 하여 죽을 먹고 점심에는 午供이라 하여 쌀밥을 먹고 저녁에는 약석(藥石)이라 하여 잡곡밥을 약간 먹는다. 부식은 채소류가 위주고 가끔 특식으로 콩을 원료로 한 두부와 김과 미역이 보름달을 보듯 맛볼 수 있다.
선객이 일년에 소비하는 물적인 소요량은 다음과 같다.
주식비 3홉 365일 = 1,095홉
1,095홉 x 15원 = 16,425원
부식 및 잡곡은 자급자족
피복비 僧服 광목 20마 x 50원 = 1,000원
내복 1,500원
신발 고무신 2족 x 120원 = 240원
합계 2만원이면 족하다. 그래서 선객은 모름지기 "三不足"을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있다. 食不足 依不足 睡不足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의 추태는 갖가지 욕망의 추구에서 비롯되는데 욕망에서 해방은 되지 못했으나 외면만이라도 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세속의 七十노파가 산문의 홍안납자(紅顔衲子)에게 먼저 합장하고 고개 숙이는가 보다.
그러나 잘 따지고 보면 납자는 철저하게 욕망의 포로가 되어 전전긍긍한다. 세속인들이야 감히 엄두도 못낼 뿐더러 생사문제까지 의탁해버린 부처가 되겠다는 대욕(大欲)에 사로잡혀 심산유곡을 배회하면서 면벽불(面劈佛)이 되어 스스로가 정신과 육체에서 고혈(膏血)을 착취하는 고행을 자행하는 것이다. 無欲은 大欲 때문일까.
선객은 스스로가 인간은 끝내 견성하지 않으면 안될 고집의 존재임을 자각하고 스스로 苦의 땅위에 苦의 집을 짓고 苦로써 울타리를 치고 苦의 옷을 입고 苦를 먹고 苦의 멍에를 쓰고 苦에 포용된 채 苦의 조임을 받아가면서도 苦를 넘어서려는 의지만을 붙들고 살아간다. 만약 이 의지를 놓친다면 그때는 생의 모독자가 되고 배반자가 된 채 암흑의 종말을 고할 뿐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 운명적으로 붙들 수밖에 없다.
선객은 숙명의 소산이 아니라 운명의 所造이다. 숙명은 자기 이전에 던져진 의지와 주어진 질서여서 생래적으로 어쩔 수 없는 선천적인 사실이지만 운명은 자기 자신의 의지와 자유로이 선택한 후천적인 현실이다. 그래서 숙명은 필연이지만 운명은 당위(當爲)요, 숙명이 불변이라면 운명은 가변이요, 숙명이 한계성이라면 운명은 가능성을 의미한다.
내가 甲富의 아들로 태어나지 못하고 거지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숙명의 소산이라면 내가 자라서 갑부가 된 것은 운명의 소조이다.
내가 내 품속을 기어다니는 이나 벼룩으로 태어나지 않고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숙명의 소치이고 내가 인간이기 때문에 불교에 귀의하고 정진하여 견성 할 수 있다는 것은 운명의 소이에서다.
현재의 나는 숙명의 객체이지만 운명의 주체이다. 숙명은 자기 不在의 과거가 관장했지만 운명은 자기 實在의 현재가 그리고 자신이 관장하는 것이어서 운명을 창조하고 개조할 수 있는 소지는 운명(殞命) 직전까지 무한히 열려져 있다.
숙명의 필연성을 인식하면 운명의 당위성을 절감하게 된다.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숙명적인 것을 피하려고 괴로와 할 것이 아니라 이해해야 하며 운명적인 것은 붙잡고 사랑해야 할 뿐이다.
古集의 표상 같은 누더기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선객이야말로 견성의 문턱에서 문고리를 잡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끝내 운명은 타기 될 것이 아니라 파지(把持)되어야 함은 선객의 금욕생활이 극한에 이를수록 절감되는 상황 때문이다.
十월 三十일 그믐이다. 삭발하고 목욕하고 세탁하는 날이다. 보름과 그믐에는 佛 菩薩이 중생을 제도하는 날이기 때문에 세탁을 한다. 특히 겨울철에는 내복을 입어야 하고 내복에는 이 따위가 있기 때문에 세탁을 하면 살생을 하는 결과가 된다.
날카롭게 번쩍이는 삭도(削刀)가 두개골을 종횡으로 누비는 것을 바라볼 때는 섬뜩하기도 하지만 내 머리카락이 쓱쓱 밀려 내릴 때는 시원하고 상쾌하다. 바라보는 것과 느끼는 것의 차이 때문이다.
겨울철 목욕탕과 세탁장 시설이 협소하니 노스님들에게 양보하고 젊은 스님들은 개울로 나가 얼음을 깨고 세탁을 하고 목욕은 중요한 부분만 간단히 손질하는 것으로 끝낸다. 오후에는 유나(維那)스님의 포살이 행해진다.
三藏(經 律 論)중에서 律藏을 다룬다. 사분율의(四分律儀)에 의해 沙彌 十戒, 比丘 二百五十戒가 나열되고 설명된다.
禪은 원칙적으로 敎外別傳(교설 밖에 따로 전함). 직지인심(直指人心) 見性成佛(곧 바로 자신의 마음을 통해 자기의 본성을 보아 깨달음). 혹은 不立文字 見性性佛(문자를 세우지 않고 자기의 본성을 보아 깨달음)을 외치면서 自性의 悟得을 주장한다. 인위적인 일체의 잡다한 형식을 무시하고 관계를 단절하고 심지어는 佛經까지를 외면한 채 오직 화두에 의한 禪理探究만을 목적으로 한다. 그래서 선객은 괴벽하게 보이고 비정하게 느껴진다. 그런 선객들에게 계율을 말하고 보살행을 설파함은 도로(徒努)일 뿐이라는 걸 유나스님은 잘 알면서도 노파심 때문에 행하고 있고 또 대중들은 듣고 있다. 중생의 모순성 때문인지 모순의 二律性때문인지.
몇몇 스님들은 포살에 참석하기는 하나 유나스님의 開口聲을 마이동풍격으로 처리하면서 자신의 화두에 정진하는가 하면 몇몇 스님들은 아예 밖으로 나가 보행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포살을 폐지하자는 혁신론을 내세우지 않는 이유는 모든 것은 필연성과 당위성 그리고 우연성까지 곁들인 역사성임에 틀림없으니 내가 견성하지 못하는 한 眞否나 可.否可를 판별할 수 없다. 그러니까 두고 보자는 극히 보수적이면서 현실적인 판단 때문이다.
불교의 諸法從本來 때문일까. 실존철학의 존재는 존재를 존재시키기 위한 존재라는 것 때문일까.
중생세계에서 보면 필요성을 주장하면 이유가 되고 타당성을 주장하면 독선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방관자가 된 채 그대로 보고 느끼면서 오직 견성에 매달려 중생계를 탈피하려 한다.
자신이 중생에 머물러 있는 한 모든 판단의 척도가 중생심일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佛家에서는 是非는 타부로 여기지만 그러나 시비가 그칠 때가 없으니 역시 중생인지라 어쩔 수 없을 뿐이다.
禪房 의 風俗
十一월 三일 禪房의 역사는 뒷방에서 이루어진다. 뒷방의 생리를 살펴보자. 큰방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기다랗게 놓인 방이 뒷방(혹은 지대방)이다. 일종의 휴게실이다. 개인 장구가 들어 있는 바랑이 선반 위에 줄줄이 담을 쌓고 있어서 누구나가 드나든다. 휴게시간이면 끼리끼리 모여 앉아 법담을 주고받기도 하고 잡담도 한다. 길게 드러누워 결가부좌에서 오는 하체의 피로를 풀기도 하고 요가도 한다. 看病室과 겸하고 있어 病氣가 있으면 치료도 한다. 옷을 꿰매는가 하면 佛書를 보기도 한다. 편지를 쓰기도 하고 일기도 쓴다.
어느 禪房이거나 큰방 祖室이 있음과 동시에 뒷방 조실이 있다. 큰방 조실은 法力으로 결정되지만 뒷방 조실은 病氣와 口辯이 결정짓는다. 큰방에서 禪房의 正史가 이루어진다면 뒷방에서는 野史가 이루어진다.
禪房에서는 뒷방을 차지하는 시간에 의해 우세가 결정되기도 한다. 뒷방을 차지하는 시간이 많은 스님은 큰방을 차지하는 시간이 적고 큰방을 차지하는 시간이 적은 스님은 점차로 선객의 옷이 벗겨지게 마련이다.
상원사의 뒷방 조실은 火臺스님이 당당히 차지했다. 위궤양과 十년을 벗하고 海印寺와 梵魚寺에서도 뒷방 조실을 차지했다는 경력의 소유자이고 보니 만장일치의 추대다.
사회에서는 고등교육을 받았고 불가에서는 四敎까지 이수했고 절밥도 십년을 넘게 먹었고, 남북의 대소 禪房을 두루 편력했으니 뒷방조실로서의 구비요건은 충분하다. 금상첨화격으로 달변에다 다혈질에다 쇼맨십까지 훌륭하다. 경상도 출신 이어서 그 독특한 방언이 구수하다. 낙동강 물이 마르면 말랐지 이 뒷방 조실스님의 화제가 고갈되지는 않았다. 때로는 파라독스하고 때로는 페이 소스하다. 때로는 도인의 경계에서 노는 것 같고 때로는 마구니의 경계에서 노는 것 같다. 諸佛祖師가 그의 입에서 死活을 거듭하는가 하면 현재 큰 스님이라고 추앙되는 大德스님들의 서열을 뒤바꾸다가 때로는 캄캄한 밤중이나 먹통으로 몰아붙이기도 한다. 무불통지요 무소부지인체 하면서 거들먹거리지만 그의 천성이 선량하고 희극적인 얼굴모습과 배우적인 소질 때문에 대중들로부터 버림받지는 않지만 추앙 받지도 못했다. 천부적인 뒷방 조실감이라는 명물로 꼽히고 있다.
그런데 이 뒷방 조실이 가끔 치명적으로 자존심에 난도질을 당하고 뒷방 조실의 지위를 위협 당하는 때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원주스님 때문이다. 禪房의 살림살이를 맡고 있는 원주스님은 대중들의 生必品 구입 때문에 江陵 출입이 잦았다. 강릉에 가면 住居가 布敎堂인데 포교당은 각처의 여러 스님들이 들렀다가 가는 곳이어서 전국 사찰과 스님들의 동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더구나 요즈음처럼 교통이 발달되고 보면 신문보다도 훨씬 빨리 그리고 자세히 알 수 있다.
원주스님도 꽤 달변이어서 며칠동안 들어 모은 뉴스源을 갖고 돌아오면 뒷방은 뒷방 조실을 외면하고 원주스님에게 이목이 집중된다. 그때 뒷방의 모든 헤게모니를 빼앗기고 같이 경청하고 있는 뒷방 조실의 표정은 우거지상이어서 초라하다 못해 처량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뉴스가 한토막씩 끝날 때는 막간을 재빨리 이용하여 뉴스에 대한 寸評을 코믹한 사족(蛇足)을 붙이거나 독설을 질타하는 것으로 체면유지를 하다가 원주스님의 뉴스원이 고갈되자 마자 맹호출림의 기상으로 좌중을 석권하기 위해 독특한 제스처로 해묵은 뉴스들을 끄집어내어 재평가를 하면서 日報通(뉴스통)의 권위자임을 재인식시키기에 급급하다. 면역이 된 대중 스님들은 맞장구를 치지도 않지만 삐에로의 후신인양 지껄여댄다.
十一월 七일 견성은 육체적인 자학에서만 가능할까. 가끔 생각해보는 문제다. 우리 대중 가운데 특이한 방법으로 정진하는 스님들이 있다. 흔히들 선객을 怪客이라고 하는데 이 선객들이 괴객이라고 부르는 스님들이다.
처음 방부 받을 때 논란의 대상이 된 스님은 明燈스님이다. 이 스님은 生食을 하기 때문이다. 시비와 논란의 우여곡절 끝에 방부가 결정되어 공양 시간에 뒷방에서 생식하기로 합의되었다. 그래서 소임이 간편한 명등이 주어졌다.
水頭스님은 일종식(하루에 한끼만 먹음)을 하고 원두스님은 午後不食을 한다. 그리고 看病스님은 長座不臥(절대로 눕지 않고 수면도 앉아서 취함)를 한다. 浴頭스님은 默言을 취한다. 開口聲이란 기침뿐이다. 일체의 의사는 종이에 글을 써서 소통한다.
그 초라한 선객의 식생활에서 더욱 절제를 하려는 스님들이나, 하루 열두시간의 결가부좌로 곤혹을 당하는 다리를 끝내 혹사하려는 스님이나, 스스로 벙어리가 된 스님을 대할 때마다 공부하려는 그 의지가 가상을 지나 측은하기까지 한다. 이유가 있단다. 스스로 남보다 두터운 업장을 소멸하기 위하여 또는 無福衆生이라 하루 세끼의 식사는 과분해서라고.
뒷방에서 색다른 시비가 벌어졌다. 도대체 인간이란 육체가 우위냐? 정신이 우위냐? 하는 앙케이트를 던진 스님은 持殿스님이다. 언제나 선방의 괴객들을 백안시하는 理科출신의 스님이다.
[단연코 정신이 우위지요. 선객답지 않게 그런 설문을 던지시요. 입이 궁하면 염불이나 할 일이지요]
文科 출신인 負木스님이 면박했다.
선객들은 대부분 佛敎儀式(특히 불공시식)을 외면한다. 평소에 지전스님이 의식의 권위자처럼 으시대고 중이 탁자밥(佛供食物)은 내려 먹을 줄 알아야 한다는 주장에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부목스님이고 보니 비꼬는 투로 나왔다.
[정신을 지탱하는 것은 뭐요?]
지전 스님이 물었다. 드디어 지전스님(理科)과 부목스님(文科)이 시비의 포문을 열었다.
[그거야 육체지요]
[뿌리 없는 나무가 잎을 피우지 못하고 구름 없는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는 않을게요. 육체를 무시한 정신이 있을 수 있겠소?]
[육체가 있으니 정신이 있는 게 아니겠소. 어찌 상식이하의 말을 하오. 정신과 육체의 우열을 가름하자고 하면서 말이요]
[논리적인 상식에 충실하시요. 우리는 지금 논리를 떠난 화두를 문제삼은 것이 아니고 논리에 입각해서 정신과 육체의 우열을 가름하는 시비를 가리고 있는거요. 결국은 唯物이냐 唯心이냐라는 문제가 되겠소만]
[유심의 宗家격인 선방에서 유물론을 들춘다는 것이 상식이하란 말이요. 육체는 時限性이고 정신은 영원성이란 것은 유물론자들이 아닌 한 상식으로 되어 있는 사실이요. 시간이 소멸됨에 따라 육체의 덧없음에 비해 정신의 승화를 생각해보시오]
[본래적인 것과 결말적인 것은 차치해 두고 실제적인 것에 충실하여 논리를 비약시켜 보도록 합시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생리학적인 상식을 바탕으로 보면 육체가 단연 우위일 뿐이요. 병든 육체에서 신선한 정신을 바란다는 것은 고목에서 잎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을 뿐이요]
[육체적인 외면이 많을수록 정신적인 승화가 가능했다는 진리는 동서고금의 사실들을 들어 예증할 필요도 없이 지금 우리 주위에서도 실증되고 있소. 나는 근기가 약해 감히 엄두도 못내고 있지만 일종식이다 오후불식이다 생식이다 장좌불와다 묵언이다 하면서 육체가 추구하는 안일을 버리고 정신이 추구하는 견성을 위해 애쓰는 스님들을 잘 살펴보시오. 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육체에 대한 사랑스러운 정신의 도전이며 승화인가를]
[그것은 作爲며 위선이요. 내가 구도자임을 표방하는 수단일 뿐이요. 참된 구도자일수록 性命을 온전히 해야 할 것이요. 養生 이후에 良知가 있고 양지 이후에 견성이 가능 할 뿐이오]
[老莊學派의 無爲에 현혹되지 마시오. 그들은 다만 세상을 기피하면서 육체를 오롯이 하는 일에만 급급했지 끝내 그들이 내세운 至人이되지 못했기에 濟世安民을 하려하지 않았고 할 수도 없었소.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는 소멸될 숙명에 놓여 있는 육체를 무시하면서 究竟目的인 見性을 향해 나아갈 뿐이오. 견성은 곧 衆生濟度를 위해서니까요]
[육체가 제 기능을 상실했을 때 정신이 자유로울 수 있으며 또 승화될 수 있겠소? 業苦 속에서 輪廻를 벗어나지 못한 우리 중생이 말이오?]
[가능하지요. 그 가능성 때문에 여기 이 산 속에 있지 않소. 거의 지옥 같은 생활을 하면서 말이오]
[중생에게 절망을 주는 말을 삼가하시오. 스스로 병신이 되어야 견성이 가능하다는 결론인데 우리 佛家에서는 육체적인 불구자는 중이 되지 못하도록 규정짓고 있소. 이 규정은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진리를 웅변으로 대변해주고 있소. 고장을 모르고 조화된 육체야말로 우리 선객에게는 필요 불가결의 요소지요. 見性 悅般 彼岸 寂滅이 있기까지엔 말이오]
[끝내 스님은 그 간사한 육체의 포로가 되어 等身佛처럼 안온한 양지쪽에 서서 업보 중생을 바라보려고만 하는군요]
[나는 등신불이 되지 않기 위해 육체를 건전히 하며 업보중생을 느끼기 위해 극악한 업보중생의 표본 같은 이 선방생활을 하고 있소. 결론에 도달해 봅시다. 나는 스님 말마 따나 그 간사한 육체가 좋아서 다스리는게 아니라 육체가 너무 싫어서 육체를 다스리고 있소. 육체는 바라볼 수 있는 게 아니라 느껴야 하기 때문이오. 마치 우리가 세상이 싫어서 세상을 멀리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너무 좋아서 그래서 세상을 올바로 느끼지도 바라보지도 못할까봐 세상을 멀리 하면서도 세상을 온전히 하기 위해 견성하려고 몸부림치는 것과 같을 뿐이오. 아무리 우리가 세상을 멀리 했다 하더라도 세상이 불완전하더라도 최소한도 현재 상태라도 유지하고 있어야지 근본적으로 와해돼버린다면 우리가 견성을 해도 어쩔 수 없을 뿐이오. 이해가 되는지요? 그만 합시다. 입선시간입니다]
시비는 가려지지 못한 채 끝이 났다.
중생이 사는 세상에서 시비란 가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중생이 바로 是와 非로 구성된 양면적인 존재니까.
本能 과 禪客
十一월 十五일 상원사의 동짓달은 매섭게 차갑다. 앞산과 뒷산 때문에 밤도 무척이나 길다. 불을 밝히고 먹는 희멀건 아침 죽이 꿀맛이다. 오후 다섯시에 먹은 저녁은 자정을 넘기지 못하고 완전소화가 되어 위의 기능이 정지상태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상원사 김치가 짜냐? 주안 염전의 소금이 짜냐?>라고 물을 정도로 상원사 김치는 짜기로 유명하다. 그런 김치를 식욕이 왕성한 젊은 스님들은 나물 먹듯이 먹는다. 식욕을 달래기 위해서다. 하기야 상원사 골짜기의 물은 겨울에도 마르지 않으니까 염도(鹽度)를 용해시킬 물은 걱정 없지만.
선객에게 화두 다음으로 끈질기게 붙어 다니는 생각이 있으니 그것은 食思(먹는 생각)다.
출가인은 욕망의 단절상태에 있지 않고 외면 내지는 留保狀態에 있을 뿐이라고 이 식욕은 강력히 시사해주고 있다. 그러면서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본능이 바로 食本能이라고 알려준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절망적인 공포가 바로 기아(饑餓)에서 오는 공포라고 결론 지어준다.
話頭에 충실하면 見性이 가능한 것처럼 食思에 충실하다보니 먹는 공사가 벌어진다. 대중공사에 의해 어려운 상원사 살림이지만 초하루 보름에는 별식을 해먹자는 안건이 통과되었다. 별식이란 찰밥과 만두국이다.
절에서 행해지는 대중 공사의 위력이란 비상계엄령보다 더한 것이어서 일단 통과된 사항이라면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 소를 잡아먹자고 의결되었으면 소를 잡아먹어야 하고 절을 팔아먹자고 의결되었으면 절을 팔아먹어야 한다. 대중공사의 책임은 대중 전체가 지는 것이며 또 토의는 극히 민주적이고 여러 가지 여건에 충분히 부합되어야만 결의되기 때문에 극히 온당하지만 약간의 무리도 있을 수 있다. 상원사 김치를 먹어보면 원주스님의 짭짤한 살림솜씨를 알 수 있지만 대중 공사에서 통과된 사항이고 보니 어쩔 수 없이 원주실에 비장해둔 찹쌀과 팥과 김이 나왔다.
부엌에서 팥이 삶아져가자 큰방에서 좌선하고 있는 스님들의 코끝이 벌름거리더니 이내 조용히 입맛을 다시고 군침을 넘기는 소리가 어간에서나 말석에서나 똑같이 들려왔다. 사냥개 뺨칠 정도로 후각이 예민한 스님들이고 더구나 거듭되는 食思로 인해 상상력은 기막힌 분들이라 화두를 잠깐 밀쳐놓고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찰밥을 기름이 번지르한 김에 싸서 입안에 넣어 우물거리다가 목구멍으로 넘기면 뱃속이 뭉클하면서 등골에 붙었던 뱃가죽이 불쑥 튀어나오는 장면까지 상상하게 되면 약간 구부러졌던 허리가 반듯해지면서 밀쳐 놓았던 화두를 꼭 붙잡게 되고 용기백배해진다. 이 얼마나 가난한 풍경이냐. 이 얼마나 천진한 풍경이냐. 찰밥 한 그릇이야말로 기막히게 청신한 활력소이다.
인간의 복수심과 승리욕은 자기 밖에서 보다 자기 안에서 더욱 가증스럽고 잔혹하다. 별식은 넉넉히 장만하여 제한을 두지 않기 때문에 자기 食量대로 받는다. 주림에 무척이나 고달픔을 겪은 선객들이라 위의 사정은 아랑곳없이 발우(鉢盂) 가득히 받아 이제까지의 주림에 대한 복수를 시원스럽게 한다. 찰밥이고 보니 격에 맞춰 상원사 특유의 산나물인 곰취와 고비나물까지 곁들여 상을 빛나게 해준다. 발우 가득한 찰밥과 나물을 비우고서는 포식과 만복이 주는 승리감에 젖어 배를 내밀고 거들먹거리면서 [평양 감사가 부럽지 않다]고 이구동성으로 합창한다. 생식하는 스님에게 죄송하다고 고하니 자기도 찹쌀을 먹었으니 뱃속에서야 마찬가지라고 대꾸한다.
佛經은 가르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갖지 말라. 미워하는 사람도 갖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만나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자주 만나 괴롭다>라고.
愛憎을 떠나 但無心으로 살아가라는 敎訓이다. 이 經句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선객들이지만 주림에 시달림을 받다보니 스르로 經句를 어기고 포식을 했으니 그 果報가 곧 나타났다.
오후 입선시간에 결석자가 십여명이 넘었다. 좌선에 든 스님 중에서도 신트림을 하고 생목이 올라 침을 처리하지 못해 중간 퇴장을 하는 스님들이 너댓명 되었다. 결가부좌의 자세를 갖춘 스님 중에서는 몇분은 식곤증이 유발하는 졸음을 쫓지 못하여 끄덕거리는 고개짓을 되풀이한다.
통계에 의하면 선객의 九할이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위장병 환자라 한다.
食本能에 무참히 패배당한 적나라한 실상이다. 노년에 이르도록 견성하지 못한 선객은 만신창이가 된 위장을 어루만지면서 젊은 선객들의 눈총을 받아가며 뒷방 신세를 지다가 마침내는 골방으로 쫓겨가서 유야무야(有耶無耶) 사라져 간다. 그래서 선객은 이중으로 도박을 한다. 世間(인생)에 대한 도박, 出世間(僧伽)에 대한 도박.
언제나 모자라는 저녁 공양이 남아돌아갔다. 위가 소화불량을 알리느라 신트림을 연발하는 스님들은 공양시간에 참석하지 않았고 끼니를 걸르기가 아쉬워 참석한 스님들 물에 말아 죽처럼 훌훌 둘러 마신다. 그렇게도 죽 먹기를 싫어하는 스님들인데도.
저녁 시간의 큰방은 결석자가 많이 휑뎅그렁하여 파리 몇 마리가 홰를 치면서 제 세상을 만난 듯 자유롭다. 대신 뒷방은 만원사례다. 뒷방 조실의 코믹한 면상에 희색이 역연하다.
내가 잠자리에 들었을 때, 옆에 누운 지객스님이 말을 걸어왔다.
학부출신에다 이력(大敎科)을 마친 분이지만 과묵해서 시비에 끼어 들지 않는 스님이다.
[인간의 본능억제란 미덕일까요? 부덕일까요?]
[정신적인 기능을 개발하기 위해선 약간의 미덕이 될 수 있지만 육체적인 조화를 위해 선 부덕이겠지요. 자라나는 젊은이들에겐 악덕이겠고 노인들에겐 무덕이겠지요]
한참 후 다시 물어왔다.
[선객은 반드시 본능억제를 행해야만 견성이 가능할까요?]
[본능을 억제한다고 해서 반드시 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선객에겐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이 있지요. 본능억제는 필요조건에 해당되고 견성은 충분조건에 해당되겠지요. 필요조건은 수단 같은 것이어서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본능억제가 하나의 수단이라면 그 역(逆)인 본능개발도 또한 수단이 되겠지요. 필요조건인 본능억제가 없더라도 충분조건인 自性이 투철하면 見性의 요건은 충족되겠지요]
[함수관계에 있어서 하나의 변수가 본능억제라면 다른 하나의 정수는 자성에 해당되겠지요. 그런데 함수관계에서 변수가 없어도 함수관계가 성립될까요?]
[數理學적인 공리를 禪理와 대조 내지는 결부시킬 수는 없잖을까요. 전자는 형이하학적인 것이고 후자는 형이상학적인 것인데]
[선객의 필요조건인 본능억제와 충족조건인 자성에서 필요조건은 없어도 충분조건만 있다면 견성이 가능하다는 결론인가요?]
[그렇지요. 형이상학에 있어서는 가능한 것은 처음부터 가능하고 불가능한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할 뿐입니다. 그래서 모든 형이하학적인 한계성과 가능성은 배제되고 필연성만이 문제되는 거지요. 이렇게 지껄이는 내 자신이 가능성의 존재인지 불가능성의 존재인지 현재의 나로서는 알 수 없기에 가능성 쪽에 매달려 정진하고 있을 뿐이지요. 주사위는 이미 던져져 있으니까요]
[무서운 도박이군요]
[그렇지요. 그리고 무서운 운명이지요]
[퍽 많은 생각을 필요로 하는 命題군요]
[명제가 아니라 문제지요. 해답은 충분조건이 충족될 때 얻어지겠지요. 어서 잡시다. 多思는 정신을 죽이고 포식은 육체를 죽인답니다.]
밖에서는 雪寒風이 굉음을 울리면서 지각을 두들겼다.
[올깨끼] 와 [늦깨끼]
十一월 二十일 조실스님 侍者는 열여섯 살이요, 주시스님 시자는 열아홉 살이다. 스무 살 미만의 스님은 이들 두 사람뿐이다. 나이도 어리지만 나이에 비해 체구도 작은 편이어서 꼬마스님들로 통한다. 조실스님 시자가 작은 꼬마요, 주지스님 시자가 큰 꼬마다.
작은 꼬마스님은 다섯 살때 날품팔이 양친이 죽자 이웃 불교 신도가 절에 데려다 주어서 절밥을 먹게 되었고 큰 꼬마스님은 불교재단에서 운영하는 동해안의 洛山保育院 출신이다. 낙산보육원에서 간신히 중학을 마치고 곧장 절밥을 먹었다고 한다. 모두가 고아다. 작은 꼬마는 절밥을 십이년 먹었고 큰 꼬마는 사년 째 먹는다.
꼬마스님들은 대중들의 귀여움을 받는다. 측은해서도 그렇고 가상해서도 그렇다. 그런데 꼬마스님들이 사이는 여름 날씨 같은 것이어서 변덕이 심하다. 때로는 혀를 서로 물 정도로 다정한 사이인가하면 때로는 원수 대하듯 한다. 다정(多情)과 앙숙(怏宿)이 오락가락 하는 사이다.
다정한 사이일 때는 서로 法名밑에 스님이라는 호칭이 붙지만 앙숙지간일 때는 작은 꼬마가 큰 꼬마를 <늦깨끼>라고 부르고, 큰 꼬마는 작은 꼬마를 <절밥 도둑놈 올깨끼>라고 부른다.
예로부터 성욕의 발동기를 10세 전후로 보았기 때문에 10세 전후에 입사한 스님을 童眞出家 또는 <올깨끼>라고 부른다 그 이후에 입산한 스님을 <늦깨끼>라고 부른다. <올깨끼>는 <늦깨끼>에 대해서 항상 자기의 순결무구한 童眞을 내세우고 관록과 선취득권을 주장하면서 <늦깨끼>를 경멸하는 버릇이 있다.
<늦깨끼>는 入山초에는 갓 나온 송아지격이어서 그저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내면서 <올깨끼>에게 순종하나 절밥 밥그릇 수를 더해가면서 절 생활에 익숙하게 되면 저나 내나 견성 못하고 중생으로 머물러 있는 바에야 절밥만 더 손해 보이게 한 것 이외 무엇이 다르냐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고 그때부터는 <절밥 도둑놈 올깨끼>라고 반격하기 시작한다.
잘 따지고 보면 서로 서로가 어서 빨리 공부해서 견성하자는 탁마(琢磨)의 소리다. <늦깨끼>는 늦게 들어왔으니 어서 공부하라는 의미고 <절밥 도둑놈 올깨끼>는 절밥만 오래먹고 공부하지 않아 아직 중생에 머물러 있느냐, 부지런히 공부하라는 의미이다.
[올깨기]는 정신과 육체가 함께 생성과정을 절간에서 겪기 때문에 혼탁한 사회 생활은 전연 백지여서 순진하기도 하고 특히 算術에 어두운 것은 사실이다. 절 풍속이 몸에 젖어 있어서 가람수호(伽藍守護)와 禮佛獻供에 능숙하고 계율을 무척이나 중요시한다.
그러나 대부분 他意에 의한 입산 길이었지 自意에 의한 입산길이 아니어서 뚜렷한 입산동기가 없고 보니 절 생활이 타성화 되었고 자립심이 결여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반면 <늦깨끼>의 입산길은 뚜렷한 동기가 있다. 흔히 세상 사람들이 비웃으면서 인생의 패배자나 낙오자들이 자살할 용기마저 없어 찾아가는 곳이 절간이라고 한다. 그런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런 삶들이라 할지라도 절 밖에서 머뭇거리다가 일단 절 안으로 들어와 절밥을 먹게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五欲七情이 용납되지 않고 三不足에서 살아야 한다. 彼岸에로의 길이 열려져 있지도 않고 열반(涅槃)이 눈앞에 있지도 않다. 깊이 살펴보지 못하고 겉만 살펴보면 세상에서 느낀 절망보다 더 큰 절망이 절간에 도사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그대로 머무느냐. 하산하느냐이다. 대부분 하산하고 만다. 하산을 포기하고 입주를 결심한 사람에겐 생사를 걸어놓고 결단에 임한다. 이것이 바로 發心이라는 것이다.
또 흔히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라면서 왜 그 사람이 절로 갔을까, 그렇게 유능하고 유족한 사람이 왜 절로 갔을까, 아까와라 이렇게들 지껄인다.
그런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절대로 절 밖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곧장 들어와서 절밥을 먹는다. 그 피눈물나는 절밥을. 절 밖에서는 金枝玉葉이지만 절안에서는 [늦깨끼]로 불리어지면서 온갖 수모가 던져진다. 그러나 그들에게서는 불평과 불만과 반항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이미 어떤 기연(機緣)에 의해 入山길에 올랐고 절 안에 몸이 던져진 것만을 감사히 생각할 뿐이다. 그들은 이미 기연을 포착했을 때 발심이 되어있었다. 절간에는 열반도 피안도 없으며 인간을 육체적으로 거의 박제화(剝製化)시키려는 고통 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끝내는 피안에로의 길을 자기 자신이 열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신하면서 즐거이 受苦할 뿐이다.
佛家에서는 發心과 機緣을 매우 중요시한다. 그래서 법성게는 初發心時便正覺이라고 잘 표현해주고 있고 부처님은 분명히 나로서도 인연 없는 중생은 제도하지 못한다고 했다. 기연과 발심이 없는 修道生活은 불가능하고 또 무익하기 때문이다.
발심은 날로 거듭해야하고 기연은 수시로 더욱 힘차게 붙잡아야 한다. 입산초기의 혼신적인 求道熱이 자꾸 쇠퇴해지는 이유는 발심과 기연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불자는 모름지기 行住座臥에 있어서 발심을 오른손에 기연을 왼손에 꼭 붙들어야 할 뿐이다.
이렇게 쓰다보니 <늦깨끼>만이 발심과 기연이 있고 <올깨끼>에게는 없다는 결론인데 천하의 <올깨끼>스님들이 이 <늦깨끼>를 잡아 치도고니를 줄까봐 변명아닌 사실을 써야겠다.
옛날의 <올깨끼>스님들은 어떻게 발심했는지 현재의 나로서는 보지 못했으니 알 수 없지만 요즈음 <올깨끼>스님들은 대부분 수도물을 먹은 뒤에야 비로소 발심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하기야 20대가 발심하는 확률이 제일 많으니 연령탓이기도 하겠지만.
[올깨끼]스님들이 바라보는 사회는 절대로 지옥일 수 없다. 관광객들의 표정에서는 이지러진 것을 볼 수 없고 건강하고 행복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상에서 살면서 세상을 느껴보지 못하고 다만 경전이나 연상의 스님들의 입을 통해서 人生苦海니 娑婆世界니 業報衆生이니 하는 말만 들었지 실제로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열반(涅槃), 極樂, 彼岸, 寂滅을 동경하고 거기에 미치기(及)위해 견성하려고 몸부림치는 것은 우리가 거기에 들어 느껴보기 위해서다.
요즈음 승려교육기관은 佛敎專門講院이 몇몇 本寺에 있긴 있지만 內典인 佛經만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강원을 졸업한 스님들이 外典을 공부하기 위해서 갖은 방법으로 도회지로 침투한다. 宗立大學인 동국대학校內에 佛敎大學이 있고 마산대학과 裡里 원광대학이 있어서 다소 외전을 익힐 수 있는 문화가 개방되어 있기는 하지만 僧家爲主의 대학이 아니고 일반학생 위주의 대학이고 보니 여기 드나드는 스님들은 수적 물적 열세 때문인지 아니면 신심이 퇴락해서인지 俗化의 길을 걷기 십중팔구다. 도시의 무슨 학원이다, 강습소다 하는 곳에서도 <올깨끼>스님들이 때로는 僧服 때로는 俗服을 걸친 채 드나들면서 외전의 열세를 만회하려고 몸부림친다.
도시에 진출하여 면학하는 <올깨기>스님들의 학자금이 문제다. 恩師스님이나 本寺의 보조를 받아 기숙사나 등록사찰에서 기거하면서 통학하는 스님들도 있지만 극히 소수이고 대부분은 영리위주의 사설불당에서 <부전살이>(불당을 맡아서 받드는 일)나 해주고 몇푼 얻어 학업을 이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가 하면 외전이나 도시를 외면하고 <올깨끼>스님답게 산간에서 청정하게 수도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스님들을 국방부가 그대로 보아 넘겨주지 않는다.
스물한살만 되면 틀림없이 입대영장이 나온다. 어쩔 수 없이 승복을 벗고 군복을 입으면 군대에서는 고문관 취급을 받는다. 좋은 의미에서도 받고 불쌍한 의미에서도 받는다. 그 복잡다단하고 음담패설이 상용어로 되어있는 사병생활을 삼년간 마치고 다시 절간을 찾아 돌아오는 <올깨끼>스님들은 군진(軍塵)을 털고 위대한 발심과 함께 선방으로 돌아온다. 몇할이나 돌아올까.
대학을 졸업하고 學院을 마치고 돌아오는 <올깨끼>스님들은 속진(俗塵)을 씻고 위대한 발심과 함께 돌아온다 얼마나 돌아올까.
강원을 마치고 책장을 던지고 선방을 향해 돌아오는 <올깨기>스님들은 얼마나 될까.
모든 대답은 "극히 소수지요"다.
불교의 輪廻說 때문일까. 경제학의 수요공급의 법칙 때문일까. 공기의 대류작용의 원리때문일까. 남방 소승불교를 닮아 가는지 알 수 없지만 어쩔 수 없이 행해지고 있는 世間과 出世間의 교류현상이다.
우리 상원사 대중은 <올깨끼>의 바로미터를 一五세로 잡는다면 三할은 <올깨끼>고 七할은 <늦깨끼>다. 바로미터를 20세로 잡는다면 七할은 <올깨끼>고 三할은 <늦깨끼>가 된다. 20대 전후에서 발심하는 확률이 많다는 것이 증명된다.
꼬마스님들이 오후부터 앙숙지간이 되었다. 발단은 걸레때문이다.
작은 꼬마스님은 책임감이 강하고 자기 생활에 질서를 유지시킨다. 그러므로 무척 개인적이어서 우직하고 내향성이고 정결하다. 절밥을 일찍부터 먹은 명실상부한 <올깨끼>의 생활태도다.
반면에 큰 꼬마스님은 이유가 많고 눈치가 비상하다. [적당히]를 요령있게 요리하면서 약육강식에 철저하고 이해타산이 예리하다. 모든 것에 사시(斜視)적이어서 절밥을 四년이나 먹었지만 아직도 보육원출신의 명분에 투철한 편이다.
작은 꼬마스님이 조실스님방 청소 전용으로 사용하는 걸레는 언제나 깨끗하고 제자리에 놓여있다. 방을 닦고 깨끗이 빨아 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큰 꼬마스님은 자기 책임인 주지실의 전용걸레가 없다. 주지스님은 출타가 잦아 가끔 청소를 하는데 그때마다 이방 저방 걸레를 갖다 쓰고서는 제자리에 두지 않고 기분대로 팽개쳐 버린다. 여러 차례 주의를 받고도 고치지 못한 습성이다.
오늘도 걸레 때문에 입승스님으로 부터 호된 책망을 들었다. 작은 꼬마스님의 고자질로 간주했다. 작은 꼬마스님방 전용 걸레를 쓰고 제자리에 갖다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입승스님의 훈계에서 풀려나온 큰 꼬마스님의 눈초리는 작은 꼬마스님의 눈초리와 마주쳤다. 이때부터 앙숙지간을 알리는 저기압이 무섭게 깔리기 시작했다.
오후의 뒷방에서다. 저기압은 끝내 먹장구름을 불러온다. 먹장구름은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다. 드디어 번개가 치며 천둥이 울린다. 그리곤 비가 쏟아지게 마련이다.
뒷방에서 이제 막 放禪한 스님들이 편한 자세로 각자가 아랫도리를 달래면서 잡담이 한창이다. 큰 꼬마스님이 복수의 집념이 가득한 표정으로 누워있는데 작은 꼬마스님이 선반에 있는 자기 바랑을 내리다가 큰 꼬마스님의 발을 건드렸다. 큰 꼬마스님에게는 요행이요, 작은 꼬마스님에게는 불행이었다. 시비가 시작되고 [늦깨끼] [올깨끼]로 수작하다가 욕설을 주고받고 마주 앉아 서로 꼬집고 발길질이 오가더니 드디어 큰 꼬마스님의 일격이 작은 꼬마스님의 면상에 가해지자 작은 꼬마스님이 저돌적으로 혼신의 힘을 다한 박치기로 응수했다. 큰 코와 작은 코에서 선지피가 흘러 옷과 방바닥에 갖가지 수를 놓았다. 대중들에 의해 혈전은 곧 제지되고 꼬마스님들은 입승스님 앞에 꿇어앉아 訓話調의 경책(警責)을 들은 다음에 佛前의 百八懺悔로 들어갔다.
九시에 취침을 알리는 인경소리가 끝나가 탁자 밑의 꼬마스님들의 잠자리에서는 오손도손한 얘기소리가 들렸다. 그들 사이는 틀림없이 여름 날씨 같은 것이어서 날이 바뀌기도 전에 벌써 多情之間이 되어 있었다.
食欲 의 背理
十一월 二十三일 겨울철에 구워먹는 상원사의 감자 맛은 逸味다. 선객의 위 사정이 가난한 탓도 있겠지만 장안 갑부라도 싫어 할리 없는 맛이 있다.
요 며칠 전부터의 일이다. 군불을 아궁이에 꽃불이 죽고 알불만 남으면 고방에서 감자를 몇 되박 훔쳐다가 아궁이에 넣고 재로 덮어버린다. 저녁에 방선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 날 감자구이 담당 스님이 아궁이로 감자를 꺼내러 간다. 뒷방에서는 공모자들이 군침을 흘리면서 기다린다.
감자는 아궁이에서 몇 시간 동안 잿불에 뜨뜻하게 잘 구워졌다. 새까만 껍질을 벗기면 김이 모락모락 오른다. 맛은 틀림없이 삶은 밤맛이다. 서너개 먹으면 허기가 쫓겨간다. 잘 벗겨 먹지만 그래도 입언저리가 새까맣다. 서로를 보며 웃는다. 스릴도 있고 위의 사정도 좋아지니 여유가 생겨서다.
처음에는 火臺스님이 주동이 되어 몇몇 스님만 방선 후에 아궁이 앞에서 재미를 보았는데 이제는 뒷방에서 재미를 본다. 살림살이 책임자인 院主스님은 큰 방에서 자지 않고 별채에 있는 원주실에서 잔다. 그러기 때문에 뒷방의 감자구이가 가능하다.
규모가 커졌다. 공모자가 많으니 감자의 절취량도 많아야 한다. 감자껍질 뒤처리는 당번스님이 철저히 한다.
그러나 計量心의 천재인 원주스님이 감자가 없어지는 것을 오래도록 모를 리 없다. 그렇다고 대중공사를 열어서 감자를 구워먹지 못하게 할 정도로 꽉 막힌 스님은 아니다. 그래서 고방 문에는 문고리가 박아지고 자물통이 채워졌다. 그러나 감자구이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감자구이 공모자 가운데 못과 손톱깍기만 있으면 웬만한 자물통은 다 따는 스님이 있다. 이 스님의 재주를 미처 몰랐던 원주스님의 실책이었다.
아무 말 없이 감자 유출을 막기 위한 비상책을 강구하던 원주스님이 강릉을 다녀왔다. 손에는 큼직한 번호 자물통이 들려있었고 틀림없이 고방에 채워졌다.
그러나 감자구이는 계속되었다. 그 날 감자구이 당번은 40대의 園頭스님인데 이 스님은 묘한 습성이 있는 분이다. 어느 절엘 가거나 절간 방에 문이 채워져 있으면 돌쩌귀를 뽑아 버린다. 중이 감출게 무엇이 있으며 도둑맞을 것은 무엇이 있느냐면서 중생의 업고와 무명을 가두어 놓은 것 같아 갑갑하다는 지론을 가진 스님이다.
원주스님이 회심의 미소를 띠면서 잠갔던 고방 문이 돌쩌귀째 뽑혀버린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원주스님은 언짢아서 우거지상을 지우질 못했지만 감자구이 동호인들의 희색은 만면하다. 원주스님의 판정패다.
그렇다고 판정패를 당하고 선선히 감자를 대중에게 내맡길 원주스님은 아니다. 와신상담의 며칠간 고심 끝에 묘책은 강구되었고 드디어 실천에 옮겨졌다. 주부식의 원료가 감자 편중(偏重)이다.
쌀과 감자의 비율이 六대 四이던 점심이 四대 六으로 뒤바뀌고 잡곡과 감자가 비율이 반반이었던 저녁은 三대 七로 되었다. 부식도 매끼마다 감자국에다 감자나물이 올랐다. 대중이 항의를 하자 원주스님은 다음과 같이 대꾸했다.
[감자 먹기가 얼마나 포원이 되었으면 그 부족한 밤잠을 줄여가면서까지 감자를 자시겠소. 스님들의 원을 풀어드리기 위해 감자 일변도의 메뉴를 짰을 뿐입니다. 일주일 내로 메뉴표를 고칠 것을 약속합니다]
대중들은 틀림없이 감자에 질리고 말았다. 감자구이는 끝이 나고 동호인들이 뿔뿔이 헤어졌다.
인간 食性의 간사함을 잘 파악하고 이용한 원주스님에게 판정승이 돌아갔다. 역시 살림꾼인 상원사 원주스님다운 책략이었다. 우리는 그때부터 상원사 원주스님을 조계종 원주감으로는 제일인자라고 공인해 주었다.
十一월 二十五일 달포가 지나니 선객의 우열(優劣)드러났다. 선객은 話頭와 함께 살아간다.
話頭란 참선할 때 정신적 통일을 기하기 위해 붙드는 하나의 공안인데 철학의 命題, 논리학의 題材라고 말할 수 있다.
話頭는 처음 禪房에 入房할 때 조실스님으로부터 받게 되는데 그 종류가 무한량이다. 흔히들 세상에 話頭아닌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 많은 話頭 가운데서 자기에게 필요한 話頭는 단 하나이다. 단 하나 일 때 비로소 話頭다 라는 결론이다.
대부분의 선객들이 붙드는 話頭는 시심마(是甚마 : 이게 무었이냐)이다. 예로부터 경상도 출신의 스님들이 가장 많아서 강원도 절간에서도 경상도 사투리가 판을 친다. 그래서 시심마가 불교에서는 <이 뭐꼬>로 통한다.
話頭는 철학적인 명제가 아니라 종교적인 신앙이다. 그러니까 분석적인 것이 아니고 맹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話頭는 견성의 목표가 아니라 방편이다. 여하한 수단도 목적이 달성되면 정당화되는 것처럼 여하한 話頭도 견성하고 보면 정당해진다. 話頭가 좋으니 나쁘니, 話頭다 아니다 라고 시비함은 迷妄일 뿐이다. 훌륭한 선객은 話頭에 끌려다닌다. 절대로 끌어서는 안된다.
처음 선방에 앉은 선객이 유식하면 유식할수록 話頭에 대해 분석적이다. 有無가 단절된 絶對無의 觀照에서 견성이 가능하다는 禪理를 납득하려고 하면 할수록 現存在인 육체의 有無에 얽매이게 되고 사유를 가능케 하는 정신의 유무에 얽매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방의 연륜을 더해가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유식과 함께 분석이 떠나가고 그 자리에 무식과 함께 話頭가 들어 있음을 알게된다. 이때 비로소 선객이 되는 것이다.
어느 절에를 가더라도 입구에서 다음과 같은 글귀를 볼 수 있다.
"入此門內 莫存知解"
유무에 얽매인 세간의 지식은 무용하다는 뜻이다.
선객을 끌고 가던 話頭는 마침내 선객을 백치가 아니면 천재 쪽으로 끌어놓는다. 백치는 백치성 때문에 고통에서 해방되고 천재는 천재성 때문에 번뇌에 얽매인다. 그래서 大愚는 大賢이 되고 大苦는 大脫이 된다.
선객의 우열은 話頭에 끌리느냐 끄느냐가 결정한다. 話頭에 끌린 선객은 閑閑하나 話頭를 끄는 선객은 間間하다.
우리 상원사 대중 스님은 우열이 반반이다. 아무래도 상판 쪽이 한가롭고 하판 쪽이 분망하다. 상판과 하판은 비구계 받은 순으로 결정된다. 좌선의 몸가짐이 상판 쪽은 태산처럼 如如不動이나 하판 쪽은 여름 날씨처럼 변화무상하다.
헛기침을 하는가 하면 마른기침을 하고 가부좌의 고통을 달래보느라 발을 바꾸어 보기도 하고 허리에 힘을 줘보기도 하고 몸을 좌우로 혹은 앞뒤로 흔들어 보기도 하고 눈을 감았다가 떴다가 하는가 하면 포개어진 손을 위아래로 바꾸어 보기도 한다. 話頭에 끌리지 않고 끌려고 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빚어지는 것이다. 이들에게 방선의 죽비소리가 틀림없는 복음성으로 들린다. 그러나 이들도 선방을 떠나지 않으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죽비소리가 아쉬워지다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있게된다.
스님이라면 누구나가 선방 밥을 먹지 않은 스님이 없다. 왜냐하면 禪이 불교의 요체(要諦)이고 견성의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방을 외면한 이유는 이 초기의 고통을 넘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 대중 가운데 신경통을 몹시 앓은 스님이 있다. 이 스님은 話頭에 끌려다니는 스님인데 신경통의 고통이 너무 심하니까 매 세시간의 좌선시간 중에서 한 시간 정도 앉고 나머지 두시간은 도량에서 보행하면서 行禪을 한다.
새벽시간이나 밤 시간에도 누더기를 의지하여 雪寒風속에서 행선하면서 대중스님과 꼭 같이 참선기간을 지키는 열의는 대단하다. 話頭에 끌리지 않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행위다.
병든 스님
十一월 二十八일 결핵에 신음하던 스님이 바랑을 챙겼다. 몸이 약하지만 그래도 꿋꿋이 선방에서 배기던 스님이다. 어제 저녁부터 각혈이 시작되었다. 부득이 떠나야만 한다. 결핵은 전염병이고 선방은 대중 처소이기 때문이다.
각혈을 하면서도 표정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童眞出家한 40대의 스님이어서 의지할 곳이 없다.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다면서도 절망이나 고뇌를 보여주지 않는다. 조용한 체념뿐이다.
뒷방 조실스님의 제의로 모금(募金)이 행해졌다. 선객들에게 무슨 돈이 있겠는가.
결핵과 함께 떠나는 스님이 평소에 대중에게 보여준 인상이 극히 좋아서 대중스님들은 바랑 속을 뒤지고 호주머니를 털어 비상금을 몽땅 내놓았다. 모으니 九千八百五十원이다. 寺中에서 五千원을 내놓았고 시계를 차고 있던 스님 두 분이 시계를 풀어놓았다.
나는 마침 내복이 여벌이 있어서 떠나는 스님의 바랑 속에 넣어 주었다.
결핵요양소로 가기에는 너무 적은 돈이며 장기치료를 요하는 병인데 병원에 입원할 수도 없는 돈이다. 응급치료나 받을 수밖에 없는 돈이다.
모금해준 성의에는 감사하고 공부하는 분위기에는 죄송스러워 용서를 바랄 뿐이라면서 바랑을 걸머졌다. 눈 속에 트인 외가닥길을 따라 콜록거리면서 떠나갔다. 그 길은 마치 세월같은 길이어서 다시 돌아옴이 없는 길 같기도 하고 명부(冥府)의 길로 통하는 길 같기도 하다.
人生何處來 人生何處去가 무척이나 처연하고 애절하게 느껴짐은 나의 중생심 때문이겠다. 나도 저 길을 걷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답답하다. 아직 견성하지 못한 나로서는 당연한 감정이기도 하다.
현대의 우리 佛敎界 풍토에선 병든 스님이 갈 곳이 없다. 더구나 화두가 전부인 선객이 병들면 갈 곳이 없다. 날마다 수를 더해 가는 약국도, 시설을 늘려가는 병원도 그들이 표방하는 표제는 <仁術>이지만 화두뿐인 선객을 맞아 들일만큼 어질지는 못하다.
慈悲門中이라고 스스로가 말하는 절간에서도 병든 선객을 위해 베풀 慈悲는 없다. 고작해야 독살이 절에서 뒷방이나 하나 주어지면 임종길이나 편히 갈까.
그래서 훌륭한 禪客일수록 훌륭한 保健者이다. 견성은 절대로 단시일에 가능하지 않고 견성을 시기하는 것이 바로 病魔라는 걸 잘 알기 때문에 섭생에 철저하다. 견성이 생의 超越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생의 調和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건강한 선객은 부처님처럼 위대해 보이나 병든 선객은 대처승(帶妻僧)보다 더 추해진다.
화두는 멀리 보내고 비루(鄙陋)와 비열(卑劣)의 옷을 입고 약을 찾아 헤맨다. 그는 이미 선객이 아니고 흔히 세상에서 말하는 人間廢物이 되고 만다.
<身外가 無物> 차원 높은 정신성 속에서 살아가는 선객일수록 唯物적이고 俗漢적이라고 타기할게 아니라 화두 다음으로 소중히 음미해야 할 잠언(箴言)이다.
十二월 一일 섣달이다. 冬安居의 반 살림을 끝내고 반 살림을 시작할 때는 어느 선방에서나 용맹정진을 한다. 용맹정진이란 수면을 거부하고 長座不臥함을 말한다. 주야로 일주일동안 정진한다.
저녁 九시가 되자 습관성 수마(睡魔)가 몰려왔다. 첫날 첫 고비다. 경책스님의 장군 죽비소리가 간단없이 들리지만 자꾸만 눈까풀이 맞닿으면서 고개가 숙여진다. 장군죽비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린다. 눈을 떳다가 감았다가 하기를 삼십분 가량하면 수마가 물러간다. 밖에 나가 찬물로 세수하니 心機一轉이다. 자정이 되면 차담이 나오고 잠깐 휴식이다. 보행으로 하체를 달랜 후 다시 앉는다. 밤은 길기도 하다. 그러나 틀림없이 아침은 왔다.
하루가 지나가 몸이 약한 스님 두 분이 탈락했다. 이틀이 지나자 세분이 탈락했다.
사흘이 왔다. 용맹정진의 마지막 고비다. 저녁이 되니 뼈마디가 저려오고 신경이 없는 머리카락과 발톱까지도 고통스럽단다. 수마는 전신의 땀구멍으로 쳐들어온다. 화두는 여우처럼 놀리면서 달아나려 한다.
입맛은 소태같고 속은 쓰리다 못해 아프기까지 한다. 정신이 몽롱해진다.
큰 대자로 누우면 이 고통에서 해방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萬事休矣다.
고행의 극한상황(極限狀況)들을 연상해본다.
<雪山에서 六년간> 눈이 떠지고 허리가 펴진다. 얼마나 지나면 또 눈이 감겨지고 허리가 굽어진다.
<골고다의 十字架> 눈이 떠지고 허리가 펴진다. 그러나 얼마가 지나면 다시 눈이 감겨지고 허리가 굽어진다.
그러다가 비몽사몽간에 뒷방에서 잠자는 스님의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이 번쩍 뜨인다. 수마도 고통도 물러갔다. 화두가 앞장서며 빨리 가잔다. 길은 멀고 험하지만 쉬지 않고 가면 된다면서.
부처님은 가르치고 있다.
[분명히 열반(涅槃)은 있고 또 열반에 가는 길도 있고 또 그것을 敎設하는 나도 있건만 사람들 가운데는 바로 열반에 이르는 이도 있고 못 이르는 이도 있다. 그것은 나로서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나(如來)는 다만 길을 가리킬 뿐이다]
불교의 인간적임을 그리고 인간의 自業自得을 교시하신 극치다.
중생이 고뇌에서 해방되는 것은 엉뚱한 機緣 때문이다. 잡다하고 평범해서 무심히 대하던 제현상 가운데서 어느 하나가 기연이 되어 한 인간을 해탈시켜준다. 佛陀는 효성(曉星)에 기연하여 大覺에 이르렀고 元曉大師는 촉루(觸루)에 西山大師는 계명(鷄鳴)에 기연하여 견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을 해탈시키는 그 기연이 지적처럼 오는 것은 아니다. 고뇌의 절망적인 상황에 이르러 끝내 좌절하지 않고 고뇌할 때 비로소 기연을 체득하여 해찰하는 것이다. 극악한 고뇌의 절망적인 상황은 틀림없는 평안이다. 왜냐하면 극악한 고뇌의 절망적인 상황은 두 번 오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죽음을 이긴 사람에게 죽음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과 같다. 죽음은 결코 두 번 오지 않는다.
나는 뒷방에서 들려오는 코고는 소리로 인해 수마를 쫓을 수가 있었다. 평소에는 코고는 소리를 들으면 나도 잠이 왔었는데.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다섯 스님이 또 탈락했다.
사흘을 넘긴 스님들은 끝까지 잘 버티고 견디었다.
납월(臘月 : 음력 섣달) 八일은 부처님 성도일이다. 우리도 새벽에 용맹정진을 마쳤다.
아침공양은 찰밥이다. 전대중이 배불리 먹고 산행길에 나섰다. 몸을 풀기 위해서다. 中臺에 올라 寶宮에 참배하고 北臺를 거쳐 돌아왔다. 눈길이라 힘이 들었지만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十二월 十일 섣달이 깊어 가면서 폭설이 자주 왔다. 산하는 온통 白雪一色이다.
용맹정진에서 탈락했던 스님들은 자꾸만 나태해져갔다. 탈락했다는 심리작용의 탓인지 스스로가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뒷방을 차지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입승스님으로부터 몇 차례 경책도 받고 시간을 지켜달라는 주의도 받았건만 잘 지키질 못한다. 그때마다 몸이 아프다면서 괴로운 표정을 지어보이면 그것으로 끝난다.
경책은 세 번까지 주어지는데 그래서도 효과가 없으면 그만이다. 세 번 이상의 경책은 군더더기요, 중노릇은 자기가 하는 것이지 남이 대신 해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용맹정진을 무사히 넘긴 스님들은 힘을 얻어 더욱 분발하여 공부에 박차를 가했다.
뒷방에 죽치고 앉았던 스님 세분이 바랑을 지고 떠나갔다. 결제기간이니 갈 곳은 뻔하다. 지면이 있는 어느 독살이 절로 갈 수밖에. 선방은 영영 하직하는 스님들이다. 육신의 병보다 마음의 병이 깊이 든 스님들이다.
別食의 막간
十二월 十五일 만두국을 먹는 날이다. 원주스님의 총지휘로 만두 울력이 시작되었다.
숙주나물 표고버섯 김치 김을 잘게 썰어서 혼합한 만두속이 만들어지자 몇몇 스님들이 밀가루를 반죽하여 엷게 밀어주면 밥그릇 뚜껑으로 오려내어 대중 스님들이 빙 둘러앉아 속을 넣어 만두를 빚어낸다. 여러 스님들의 솜씨라 어떤 것은 예쁘고 어떤 것은 투박하고 또 어떤 것은 속을 너무 많이 넣어 곧 터질 듯 하여 불안한 것도 있다.
장난기가 많은 스님들은 언제나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기회만 오면 갖은 방법으로 장난기를 발휘한다.
만두를 여자의 그것을 흉내내어 오목하게 빚는가 하면 남자의 그것을 흉내내어 기다랗게 빚기도 한다. 극히 희화적이다.
성본능이 억제된 상황하에서의 잠재의식의 발로라고나 할까. 그래서 종교적인 미술일수록 남녀의 뚜렷한 선을 투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장난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만두 속을 아무도 모르게 고추가루를 넣어서 빚는가 하면 깨소금을 넣어서 빚기도 하고 무우쪽을 넣어서 빚기도 했다. 드디어 만두국 공양이 시작 되었다. 별식이어서 발우 가득히 받아 간사한 식성을 달래가면서 식욕이 허락하는 대로 맛있게 먹는다.
드디어 장난기의 제물이 된 스님들의 입에서 비명과 탄성이 폭발한다.
[아이고 매워] 고추가루를 씹은 스님이 탄성이다. [아이고 짜] 소금만두를 씹은 스님의 비명이다.
한쪽에서는 비명과 탄성인데 한쪽에서는 키득거리며 우스워 죽겠단다. 그러다가 웃는 쪽에도 예의 장난 만두가 씹혔는지 상이 금방 우거지상으로 변한다.
하필이면 선방의 호랑이 격인 입승스님의 그릇에 고추가루 만두가 들어갔는지 후후거리면서 국물을 훌훌 마시고 입맛을 쩍쩍 다신다. 그러나 비명은 없다. 역시 선방의 백전노장답다.
스님들의 공양태도는 극히 조용하다. 그래서 엄숙하기까지 하다. 입안에 食物이 들어가면 그 식물이 보이지 않도록 입을 꼭 다물고 씹는다. 훌훌거리거나 쩝쩝거리지 않고 우물우물 씹어서 삼킨다. 그렇다고 잘 씹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오래 씹되 조용히 씹고 숟가락 젓가락 소리가 없어야 하고 발우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없어야 한다.
그리고 극히 위생적이다. 발우는 자기 발우를 사용하고 또 자기 손으로 씻어 먹는다. 숟갈과 젓가락을 넣은 집이 천으로 되어 있고 발우 보자기와 발우닦개가 있어서 식사도구에 먼지 같은 건 침입할 틈이 없다. 발우닦개는 며칠만에 빨기 때문에 항상 깨끗하다. 발우는 가사와 함께 언제나 바랑 속에 넣어가지고 다닌다. 그래서 몇대를 물린 발우도 있다. 대를 거듭한 발우일수록 권위가 있다.
장난기 많은 스님들 때문에 만두국 공양시간이 어지럽고 소란했다.
공양이 끝나자 과묵하신 조실스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옛날 어느 회상(큰스님을 모시고 공부하는 도량)의 공양시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간에 앉아 공양하는 조실스님의 눈길이 공양하는 행자에게 주어졌대요. 그런데 그 행자의 국그릇에 생쥐가 들어 있었어요. 행자는 대중이 알까봐 얼른 국그릇을 입에 대고 생쥐를 삼켜버리더래요. 그러자 탁자위의 부처님이 손을 길게 뻗어 행자의 머리를 쓰다듬으시더래요. 행자가 국 그릇에서 삶아진 생쥐를 꺼낸다면 대중들의 비위가 어떻게 되겠어요. 먹지 못하는 생쥐도 감쪽같이 먹었는데 짜고 맵고 뜨거워도 먹는 것인데 비명과 탄성을 지르면서 공양시간을 어지럽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먹는 음식에 장난을 한 스님들이 施恩에 배반한 업보에 대해 우리 다 같이 참회하도록 합시다.]
장난질을 했던 스님들의 고개가 숙여졌고 비명과 탄성을 질렀던 스님들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었고 입승스님의 표정은 곤혹함이 가득했다. 別食이 罪食같은 기분이었으나 조실스님의 訓誥는 심성도야에 훌륭한 청량제였다.
十二월 三十일 섣달 그믐날이다. 낮의 시간은 울력으로 보냈다. 떡방아도 찧고 대청소도 했다. 세탁도 하고 목욕도 했다.
잠자리에 들었으나 얼른 잠이 오지 않았다. 歲暮라는 감정 때문이다.
세모는 날 일깨우면서 돌아다보라고 한다. 인간은 直立이기 때문에 동물과 다른 것이 아니라 지나간 날을 돌아보고 비쳐볼 줄을 아는 의식의 거울을 가졌기에 비로소 인간일 수 있다고 하면서.
일년이 하루같이 단조로왔던 禪客生活이었는데 돌아다 볼 필요가 있을까.
그러니까 더욱 돌아다 보라고 세모는 말하고 있다.
돌아다보니 하자(瑕疵)투성이다.
나는 정초에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계획을 세울만큼 희망적인 계기도 없었지만 계획을 세워 계획이 달성되지 못했을 때 가져야 하는 절망감을 맛보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담담한 마음으로 돌아다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었으나 그렇질 못했다. 무엇보다도 아쉬움이 앞섰다.
正初는 太白山 토굴에서 화두와 함께 맞이했었다. 화두는 어떤 의미와 내용으로 살펴보아도 정초와 똑같을 뿐인데 나의 等身은 많은 변화를 주었다. 이가 하나 뽑혀나갔고 이마의 주름살은 수를 더해가면서 골을 깊이 했고 머리숱은 수를 줄여가면서 윤기를 빼앗겨버렸다.
받은 것이 있었다면 주어야 하고 준 것이 있었다면 받아야 하는 이 세모에 나는 갚지는 못하고 또 빚만 지고 말았다. 佛恩을 무한히 입어 禪房에 머무를 수 있었고 施恩으로 육신을 지탱할 수 있었음에도 견성을 하지 못했으니 어떻게 報恩하리. 회한이 몸서리 쳐진다.
그러나 세모는 나에게 알려 온다. 이제 한해의 시간은 다 가고 除夜가 가까왔음을. 그러면서 타이른다. 한해의 것은 한해의 것으로 돌려주라고. 그러면서 마지막 달력장을 미련 없이 뜯어버리고 새 달력장을 거는 용기를 가지라고.
인간이란 과거의 사실만을 위해 서 있는 望頭石이 아니라 내일을 살려고 어제의 짐을 내려놓으려는 자세가 있기에 비로소 인간이라고.
話頭는 어서 변화를 보여달라고 하면서도 깊은 잠속으로 끌고 간다.
밤에 우는 산비둘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올드랭사인>처럼 아쉽게 들렸다.
스님의 僞善
正월 一일 신년 정초다. 버렸거나 버림을 받았거나 血緣과 鄕關이 망막 깊숙이서 점철되어지는 것은 선객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누구보다고 비정하기에 누구보다도 다정다감 할 수도 있다.
오늘은 쉬는 날이다. 뒷방이 만원이다. 여러 고장 출신의 스님들이라 각기 제 고장 특유의 설 茶禮와 설빔 등에 관해 얘기들을 나눈다. 평소에도 禪客들의 먹는 얘기는 반 이상을 차지한다. 그러다보니 끼리끼리 앉아 있게 마련이다. 南方출신은 그들대로. 北方출신은 그들대로. 胡馬依北風이요 越鳥巢南枝때문이겠다.
오후에는 윷놀이가 벌어졌다. <감자 구워내기>를 걸고서. 떡국을 잘 먹어 평양감사가 부럽지 않는 위의 사정인데도 구운 감자가 또 다시 식성을 돋우니 상원사 감자 맛은 역시 美食家도 大食家도 거부할 수 없는 특이한 맛이 있나 보다.
경상도 사투리가 판을 치는 윷놀이가 끝이 나고 구운 감자도 먹었다.
어둠이 깃드니 무척이나 허전하다. 어제는 歲暮여서 허전하다 하겠지만 오늘은 정초인데 웬 일일까. 고독감이 뼈에 사무치도록 절절하다. 세속적인 기분이 아직도 소멸되지 않고 잠재되어 있다면서 불쑥 고개를 치민다. 이럴 때마다 유일한 방법은 話頭에 충실할 수밖에. 그래서 선객은 모름지기 고독해야 한다.
열반경은 가르치고 있다.
[수행자는 모름지기 고독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한다는 것 그 차체만도 벅찬 일이기 때문이다]
고독할 수록 자기 자신에게 충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李白은 월하독작(月下獨酌)에서 고독을 노래했다.
[꽃이 만발한 숲속에 한동이 술이로다
그러나 친구가 없어 홀로 마실 수밖에
잔을 들어 돋아오르는 달을 맞이하고
그림자를 대하니 세사람이 되었구나
달은 본디 술을 못하고
그림자는 부질없이 나를 따라 움직일 뿐이로구나]
(花間一壺酒 獨酌無相親 擧杯邀明月 對影成三人 月개不解飮 影從隨我身)
"니체"는 탄식했다.
[언제나 나는 나의 입이 노래하면 나의 귀가 들을 뿐이로다]
이 얼마나 잔혹할이 만큼 절절하게 표현한 고독의 극치인가. 고독 속에서 고독을 먹고 고독을 노래하면서도 끝내 고독만은 낳지 않으려는 의지가 바로 선객의 의지이다.
화두는 거북이 걸음인데 세월은 토끼뜀질이다. 어찌 잠시라도 화두를 놓을 수가 있을까.
선객은 옹고집과 이기와 독선으로 뭉쳐진 아집(我執)의 응고체라고 흔히들 비방삼아 말한다. 그러나 비방이 아니라 사실이며 또한 實相이어야 한다.
불교의 經句는 가르치고 있다.
[아집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그렇다면 나(如來)만이 그(衆生)을 제도할 수 있다는 我執까지 버려야 할까. 그래서 수보리(須菩提)는 물었다.
[여래는 여래이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원한다면 我相에 떨어지고 원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중생을 건지나이까?]라고.
我執없는 선객은 話頭없는 선객과 같다. 見性하지 못하고 선객으로 머무는 한 아집은 공고히하고 또 충실해야 한다.
잠자리에 들었을 때 옆에 누운 지객스님이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年輪을 더했군요]
[그렇게 되었네요]
[지난해엔 제자리걸음도 못한 것 같아요. 금년엔 제자리걸음이나 해야 할텐데 별로 자신이 없군요]
[어려운 일이지요. 평범한 인간들은 시간을 많이 먹을수록 그것으로 인해 점점 빈곤해지고 분발없는 스님들은 절밥을 많이 먹을수록 그것으로 인해 점점 나태와 위선을 쌓아가게 마련이지요. 나아가지 못할 바에야 제자리걸음이라도 해야 할텐데.....]
一월 三일 생식을 하는 스님이 山神閣에서 단식기도에 들어가겠다고 한다. 생식을 시작한지 六개월이 된다고 하는데 몸이 무척이나 약했다. 상원사에서 처음 만났을 때보다도 더 두드러지게 약해 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입산했다는 스님인데 독서량이 지나치게 많아 정돈되지 못한 지식이 포화상태를 지나 과잉상태다. 그래서 두루 깊이 없이 博識하다. 극히 내성적이어서 집념이 강하고 몸이 약하니 극히 신경질적이고 여러 가지로 博識(?)하기 때문에 오만하고 僞善氣가 농후하다.
절밥을 오른손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의 햇수밖에 먹지 않았는데도 도인행세를 하려고하니 구참 선객들에게는 꼴불견이다. 틀림없는 삐에로다. 남과 얘기 할때는 上下나 先後 구별없이 가부좌를 한 채 눈을 지그시 감고 말을 느릿느릿 짐짓 만들어서 하고 걸음걸이도 느릿느릿 갈지자로 걷는다. 그러다가도 누가 자기 자존심에 난도질을 하면 신경질이 발작하여 총알 같은 말씨로 갖은 제스처를 써 가면서 응수한다. 생식은 공부하기 위해서 하는게 아니라 하나의 相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의 언행이 대변해 주고 있다.
지기를 싫어하는 뒷방 조실스님도 이 스님에게는 손을 들고 말았다.
약간 병적인 그의 言行이 대중들로부터 지탄을 받다가 끝내는 버림을 받았다. 개밥에 도토리격이 된 그가 마지막으로 자기는 아무래도 대중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과시해보려고 착상한 것이 바로 단식기도이다.
그의 건강으로 보아 위험천만한 일이다. 이 엄동에는 더구나 안될 일이다.
점심공양을 마친 나는 처음으로 그 스님과 마주 앉았다.
[스님, 단식기도를 하신다면서요? 이 엄동에 냉기 감도는 산신각에서....]
[예, 모두가 따뜻한 방안에서 시주밥이나 얻어먹고 망상만 피우면서 시비만 일삼으니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어서입니다]
기가 콱 막힌다. 그러나 시비할 계제는 못된다. 그와 나는 여러 가지로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님이 우매한 대중의 업장을 도맡아서 녹여볼까 하는군요]
[그렇습니다. 단식하면서요]
[고마운 생각이요. 하지만 스님, 莊子經을 독파했다니 한전지보(한戰之步)를 기억하시지요? 燕나라 소년이 趙나라 도성인 한단에 가서 趙나라 걸음걸이를 배우려다가 조나라 걸음걸이를 배우기 전에 자기나라 걸음걸이까지 잊고 필경 네발로 기어 자기 고국으로 돌아갔다는 故事말이외다]
[예, 알고 있지요]
나는 서서히 그의 虛를 찔러 相을 벗겨보기로 했다.
[서시빈목(西施빈目)을 기억하시지요? 美人 西施가 病心때문에 눈살을 찌푸리고 마을을 지나가는 것이 예뻐 보이자 그 마을 醜婦도 흉내로 눈살을 찌푸리고 다니니 부자는 폐문한 채 외출을 금하고 빈자는 처자를 이끌고 그 마을을 떠나갔다는 고사말이외다]
[그것도 기억하고있지요]
그는 아니꼽다는 듯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스님, 누워서 한시간 취하는 수면은 앉아서 취하는 세시간의 수면보다 勝하고, 서서 취하는 다섯시간의 수면보다 殊勝할 것입니다. 自性을 무시하고 인간의 작위에 性命을 맡기는 자는 언제나 허위에 사로잡히기 마련이요, 구도자를 표방하고 고행을 한다면 養生을 외면하는 행위는 종교적 의식으로 齊戒는 될지언정 심적 재계는 되지 못할 것입니다. 苦行은 끝내 자기학대가 아니라 자기위주가 아닐까요]
[무서운 兩刀論法이군요. 마치 문턱에서 두 발을 벌리고 入이냐 出이냐를 묻는 것과 같군요]
[논리적인 是와 非를 떠나 시비를 가려 보자는 거요]
[표준의 상대성 때문인가요]
[아니요, 다만 언어의 한계성때문이지요]
[그럼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드리지요. 고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학대임에 틀림없습니다. 자기학대는 자기 훼손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老子도 언급했습니다. "爲道함에 日損이니 損之 又損之하여 以至於無爲하면 無爲而無不爲矣라"라고. 損에 損이 거듭하여 손함이 없을때 비로소 得道할 수 있음을 말하는게 아니겠어요. 自己爲主면 他人은 벌서 안목 밖이 아니겠어요]
[타인을 무시한 자기위주야말로 진실한 고행이 아닐까요?]
[蓋연적 판단을 떠나 단도직입적으로 결론하시지요. 개연성은 회색적인데 회색적인 것은 언제나 기회와 위선을 노릴 뿐이니까요]
[스님, 그럼 간단히 묻겠소. 스님은 지금 "日損"을 거듭하면서 고행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느끼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고행을 생각하기도 하고 느끼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면 철저하게 고행을 할까 하고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고, 오늘처럼 단식기도를 결심하고 每食을 생식으로 대할 때마다 고행을 절실히 체감하고 있습니다]
[스님, 스님의 고행은 벌서 고행이 아닙니다. 老子는 실제로 고행을 하지 않고 다만 노자의 지혜로 고행을 類推하고 그런 말을 했을 뿐이요. 그러니까 스님의 고행은 고행을 체득은 커녕 체감도 못한 노자의 道를 위해 던진 무의미한 희생에 불과합니다. 본래 고행이란 것은 고행을 생각한다거나 느낀다면 이미 고행은 아닐 것입니다. 고행이란 것을 전혀 잊고 무의식적으로 고행하게 되어야 참된 고행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육체를 오롯이 하고서 고행이 가능하겠습니까?]
[身外에 無物이며 我生然後에 萬事在其中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얼핏 듣고 생각하면 극히 유물적이고 유아독존적인 것 같지만 자세히 음미해보면 존재의 보편타당성을 표현한 극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한한 空間, 무량한 元素, 무진한 시간, 무궁한 活力(에너지)의 부단한 작용에 의해 生滅하는 무수한 존재중의 하나인 나를 의식했을 때 비로소 나는 나를 찾아보게 됩니다. 나를 찾는 동안 나는 양생해야 하며 양생하기 위해선 修身해야합니다. 이렇게 하여 나를 찾았을 때는 이미 나는 없고 다만 적멸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엄동에 병약한 스님이 단식기도를 해야 하겠어요?]
[그런데 그 적멸이라는게 뭔가요? 우리를 이 산속에 까지 유혹해 온 그 적멸이라는 것 말입니다]
[나는 적멸을 모릅니다. 그러나 적멸은 문자로서 표현할 수 없으며 적멸을 말하면 벌써 적멸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적멸을 말함은 마치 장님들이 코끼리를 만지면서 지껄였다는 萬話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만 惺惺히 悟得해야 할 뿐입니다. 적멸이니 피안이니 하는 사치스러운 용어를 쓰는 것은 나의 노파심 때문입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처음부터 끝까지 어휘로서 빌려쓴것 뿐입니다]
[그래도 저는 단식기도를 강행하렵니다. 저는 스님이 아니니까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로서는 역부족이다. 道人이 아닌 바에야 누가 선객의 고집을 꺾을 수 있으랴. 돌아앉으면서 고소를 금치 못할 언어의 유희와 시간을 생식하는 스님과 내가 가졌다는 것은 나의 迷妄때문이었을까.
그러나 생식하는 스님은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바랑을 걸머진채 떠나고 말았다. 문자 그대로 作心三日이었다. 뒷방조실스님이 떠나는 스님의 등 뒤에 대고 하는 말이 걸작이다.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남아 있었구만]
解制 그리고 會者定離
一월 十四일 뒷방에서는 바랑 꾸리기에 바쁘다. 내일이면 冬安居가 끝나기 때문이다. 나도 바랑을 꾸려 놓았다.
봄이 밀려오는 탓인지 陽光이 따사로운 오후다. 지객스님과 같이 빨래터에서 내의를 빨아 널고 양지쪽에 앉았다.
내일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앞선다. 앉을 때도 잠자리도 바로 이웃이었고 며칠 만큼씩 얘기도 나누었던 사이인 탓이다.
지객스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가 스스로를 완성시켜야 한다는데 선방에서의 햇수를 더할수록 알 수 없는 어떤 他意에 그리고 신비에 끌려가는 기분이 가끔 드는데 그게 정상일까요]
[어려운 질문이군요. 그러나 선객에게 가끔씩 찾아오는 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阿含經을 통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 한사람이 독이 묻은 화살을 맞아서 쓰러져 있다고 하자. 친구들은 의사를 부르려고 하였으나 그 사람은 먼저 화살은 누가 쏘았는지, 이 화살을 쏜 활은 어떤 모양인지, 그리고 독은 어떤 종류의 것인지 등을 알기 전에는 그 화살을 자기의 몸에서 빼내서 치료해서는 안된다고 하자.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는 그 사실들을 미처 알기 전에 죽고말 것이다." 형이상학적 문제만 붙잡고 空論에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 사람은 죽어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은 유한한가, 무한한가, 또 神이 있는가, 없는가 라는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지금 괴로와하고 있는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부처님 敎說의 意趣입니다. 극히 實存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란 자기의 存在에 있어서 자기의 존재가 문제가 되는 존재"라고 "샤르트르"가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나는 타인에 대하여 필요 이상의 존재이며 타인도 나에 대하여 필요 이상의 존재"라고 그러면서 결론을 내립니다. "原罪란 타인이 있는 세계 중에 내가 태어난 것"이라고. 비정하나마 人間實在의 참된 표현입니다. 인간은 자기의 존재를 문제삼아야 하고 또 자기 자신이 그 문제를 풀이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출발점이며 實存主義의 출발점이기도합니다. 현대의 지식인들이 불교에 귀를 기울이는 이유는 실존주의가 背後世界의 망상(神學)을 거뜬히 파괴하기도 하고 타기했다면서도 신의 율법을 제정하지 못하고 인간은 무책임하게 던져진 단독자라고 하기 때문이며 (하기야 그들은 아무리 현명해도 중생이기 때문에 인간의 實相을 적나라하게 파헤칠 순 있었지만 수습하고 구원할 수 없을 뿐입니다만), 또 하나의 보다 큰 이유는 근래의 기계문명이 인간을 평균화하고 집단의 한 단위로 화함으로써 인간 실존을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百八煩惱를 지적하면서 열반(涅槃)의 길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님, 인간은 끝내 인간의 범주 내에서 인간의 조건과 같이할 뿐이지 초월하거나 탈피할 수는 없잖을까요]
[물론이지요. 인간은 초월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완성될 수 있고 인간의 조건은 조화될 수 있습니다. 불교는 인간의 완성을 위해 禪을 내세웠고 인간은 선을 통하여 완성을 가능케 하고 있습니다. 선은 신비가 아니고 절대자의 조종을 받는 그 어떤 것도 아닙니다. 인간완성을 위한 길입니다. 즉 열반으로 이르는 길입니다]
[인간완성을 열반에 귀결시키는데 그렇다면 열반은 現實態입니까? 可能態입니까?]
[실존주의는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現實態로 있는 것이지 可能態로 있는 것은 없다" 즉 일원론적인 현상인 현실 밖에 없다고 하면서 현상 뒤의 어떤 실재 ,어떤 영원한 세계를 말하는 것은 잠꼬대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현실에서 인간이 완성될 수 있는 길을 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실존주의의 함정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은 생명이 단절된 죽음의 저편에 따로 존재하는 세계를 말함이 아니고 부조리하고 무분별한 실재(백팔번뇌)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조화시킨 생명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無의 認識에서 般若를 밝히는 힘이 열반인 것입니다. 이 무여열반(無餘涅槃)은 我執의 色相에서 해방된 세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眞諦는 열반이고 俗諦는 有無입니다. 유무에 얽매임은 현실적인 생사이나 열반에 들어옴은 永劫에 의해 해탈된 것입니다. "열반이란 神없는 신의 세계이며 施興함이 없는 신의 施興"라고 "하일러"는 말했습니다. 신 없는 세계의 신 이것은 곧 완성된 인간을 의미함이요, 주는 자 없이 주어지는 것은 완성된 인간의 내용을 의미합니다]
[완성된 인간이 곧 신이 아닐까요. 그래서 인간의 의식이 가능했던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신이 창조되고 군림했던게 아닐까요?]
[전지전능하다는 신을 동경하고 메시아 재림(再臨)의 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일 그런 시일이 미리 결정되어 있다면 인간은 자유 없는 꼭두각시에 불과합니다. 절대자의 괴뢰(傀儡), 신의 노예, 그러한 천국이 있다면 나는 차라리 고통스러워도 자유로운 지옥을 택하겠습니다. 그러한 극락이 있다면 나는 차라리 도망쳐 나와 끝없는 업고의 길을 배회하렵니다]
[극히 인간적이군요]
[불교인이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衆生)으로 시작해서 인간(道人)으로 끝납니다. 부조리한 백팔번뇌의 인간이 조화된 열반에 이르기까지의 길을 닦아놓고 가르치는 것이 바로 불교니까요]
[좀 더 화두에 충실해야 하겠군요]
[그렇지요. 순간의 생명도 보장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어찌 순간인들 화두를 놓을 수가 있습니까. 화두를 놓으면 중생이요, 화두를 잡고 있는 한 열반의 길에 서 있는데.....]
저녁 공양을 알리는 목탁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일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걸었다. 천천히 걸어가지만 선객은 내심 그렇게도 무서운 절박감 속에서 살아간다.
一월 十五일 解制날이다. 새벽 두시다. 모두들 들뜬 기분이어서 벌써들 일어났다.
도량석을 하는 지전스님의 염불소리가 무척이나 청아하다. 산울림도 청아하다. 新羅 大鍾이 울린다. 무겁고도 은은하다. 산울림도 은은하다.
아침 공양이 끝나자 곧 조실스님의 해제 법문이 시작되었다. 법상에 앉아 주장자를 짚은 조실스님은 언제나처럼 자비롭다.
[一卽多 多卽一, 色卽是空 空卽是色은 불교의 中道를 표현한 극치다. 중도란 가치의 변증법적인 종합이요 통일이다. 大小와 高低의 가치를 분간하여 自他를 넘어서 크고 높은 가치를 실현하는 일이다. 여기에 大乘의 진리가 잠겨져 있다. 兩極에 부딪쳐 相剋分?에 그치지 않고 더 높고 큰 가치에로 止揚綜合하여 나아간다. 중도란 단순한 중간이나 중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무궁무진한 불교의 정신에서 多卽一의 진리를 선양하는데 그 본의가 있다. 一卽多이다]
법문의 요지다. 불교의 중도는 易의 太極이나 子思의 中庸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에도 상통한다. 상극(相剋)의 초극(超克)이야 말로 진실로 인간의 가장 긴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비로소 인간의 純化. 지상의 淨化가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개개인의 마음에 달려있을 뿐이다. 개인의 純淨한 마음 없이 사회의 복지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점심 공양을 일찍 마친 스님들은 가사와 발우를 바랑 속에 넣고 꾸렸다. 사중에서 떠나는 스님들에게 여비조로 천원씩 주어졌다.
會者定離다 그러나 離者定會를 기약한 이별이기도 하다. 선객은 어느 선방에서든지 또 만나게 된다. 선객으로 있는 한.
나도 바랑을 걸머졌다. 황금색 낙엽 길을 밝고 올라왔었는데 은색의 눈길을 밟으며 내려 걸었다. 지객스님과 나란히. 갈곳이 무척이나 멀어서 일까. 갈 길이 무척이나 바빠서 일까. 반가이 맞이해 줄 사람도 곳도 없는데 대부분의 스님들이 걸음발을 빨리하여 우리들을 앞질러 갔다.
지객스님이 물어왔다.
[스님, 어디로 가시렵니까?]
[설악산으로 가렵니다. 그리고 토굴생활을 하렵니다. 권태와 나태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입니다. 나태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나태의 온상같은 토굴로 들어가서 권태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권태의 표본같은 기계적인 생활을 하렵니다. 견성은 대중처소에서보다 토굴 쪽에서 가능하다 것을 저는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객스님에게 물었다.
[스님은 어디로 가시렵니까?]
[저는 남방으로 갈렵니다. 그리고 선방으로 갈렵니다. 내가 나태해질 때마다 탁마(琢磨)가 필요했고 권태로울 때는 뒷방이 필요했습니다. 뒷방을 들여다 볼때마다 공부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으니까요]
우리는 월정사 층층계 밑에서 헤어졌다.
[成佛하십시오]
[成佛하십시오]
남방행인 그 스님은 월정사로 들어갔고 나는 월정사를 뒤로 한 채 강릉을 향해 계속 걸어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