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한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외치고 실천한 사목자, 지학순 주교. 무엇이 지학순 주교를 어떤 때는 힘없는 사람들을 말없이 보듬으면서, 또 어떤 때는 불의한 정치권력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진리와 사랑을 실천하고 요구하게 했을까? 이런 모습의 지학순 주교를 형성한 중요한 배경으로 청년시절에 자신이 직접 겪었던 고난의 체험과 주교 서품 직후의 제2차 바티칸공의회 참석이 눈에 뜨인다.
첫째, 지학순 주교는 한국전쟁 전후의 정치상황 속에서 덕원신학교 폐쇄, 백여 일에 걸친 감옥살이를 포함한 고통스러운 월남 과정, 한국전쟁과 피난살이 등, 여느 사람 못지않게 고난을 직접 몸으로 체험했다. 한마디로, 가난과 고통이 무엇을 뜻하는지 실제로 체험한 것이다.
둘째, 주교로 서품된 1975년 9월에 지학순 주교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마지막 회기에 참여할 수 있었다. 공의회의 주요 주제는 ‘교회론’이었다. 교회는 현대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쇄신되어야 하며, 세상 사람들의 희망과 기쁨, 아픔과 고통에 함께 해야 하며, 이를 위해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읽어야 한다는 공의회의 교회론에 깊이 공감한 지학순 주교는 귀국 후 공의회 정신의 보급을 위해서 애썼다.
고난이 무엇인지 직접 체험한 지학순 주교는 고난 받는 사람들에 깊은 공감과 연민을 느꼈으며, 이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껴안았다. 교회에 대한 공의회의 가르침에 깊이 공감한 지학순 주교는 이를 교회의 핵심적인 사명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삥땅은 죄가 아니다.”
|
|
|
▲ 원주교구 초대교구장 지학순 다니엘 주교 | 1970년 봄, 서울 시내버스 차장이던 안젤라는 한국노사문제연구소를 방문하여, 박청산 회장에게 다음과 같은 고민을 털어놓았다. “나는 어머니 병 치료비와 동생의 학비 때문에 하루에 3백원씩 ‘삥땅’을 해왔는데, 양심의 가책으로 교회에 나가지 못하고 있다. 이 삥땅이 죄가 되는가?” 박 회장은 제일교회에 찾아가 문의를 했지만, 명쾌한 답을 얻지 못한다. 이어 가톨릭노동청년회를 방문한 박 회장은 지학순 주교께 찾아가보라는 권유를 받는다.
박회장은 원주에 내려가 지학순 주교를 만나 이 문제를 상의했다. 지학순 주교는 이 문제를 듣고는 자신의 방에 들어가 잠시 숙고한 후 결론을 내린다. “그런 경우 삥땅은 죄가 안 됩니다. 안젤라 양은 교회에 나올 수 있습니다.” 이후 삥땅 문제와 관련해 서울 YMCA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지학순 주교는 다음과 같이 확인한다. “하루에 3,4백 원의 삥땅을 하는 것은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며, 기업주들의 운영 불합리에서 나오는 책임을 여차장들이 질 수는 없다. [...] 교환정의에서 볼 때도, [...] 법적 정의에서도, 누구나 살 권리가 있는 사회정의에서도 삥땅은 죄악이 아니다.”
지학순 주교는 삥땅에 대해 어떻게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었을까? 이런 경우, 대개는 “사정은 딱하지만 그래도 삥땅은 죄”라는 것이 결론이다. 그리고는 이른바 “정상 참작”의 논리가 이어지게 마련이다. 어쨌든, 삥땅을 한 사람이 잘못이라는 거다. 하지만 지학순 주교는 잠시의 숙고 후 이 문제에 관해 거침없이 단호해졌다. 통쾌할 정도로 분명하다. 안젤라 같은 경우, “삥땅은 죄가 안 됩니다.” 지학순 주교는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이 문제에 대해 누가 근본적으로 책임이 있는지 분명히 지적한다. 죄는 오히려 차장들의 “정당한 권리를 부인하려는 자들”, 버스 회사의 경영진들에게 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신 그리스도와 같이”
지학순 주교의 이 같은 과감하고 단호한 결론은 어디서 비롯되는 걸까? 이에 대한 중요한 실마리를 지학순 주교의 교구장 취임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신 그리스도와 같이 고생할 결심은 이미 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나의 영광과 행복을 찾고 싶습니다.” 1965년, 지학순 주교가 신설된 원주교구의 교구장직을 맡았을 때 취임사의 일부다.
취임사는 맡게 될 직무에 대한 자신의 전망과 직무를 수행하는 근본 원리나 원칙을 담기 마련이다. “십자가를 지고 가신 그리스도와 같이”라는 표현은 지학순 주교의 앞으로의 삶의 방향과 성격을 잘 요약해주며, 교구장으로서 행할 다양한 일들과 겪어나갈 다양한 사건들에게 어떤 일관성을 부여해준다.
|
|
|
▲ 지학순 주교 문장 | 그리스도 중심의 삶에 대한 의지는 지학순 주교의 문장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문장 윗부분에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상징인 삼각형이 있고, 아랫부분에는 세상의 상징인 원이 있는데, 하느님과 세상은 십자가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을 십자가에서 드러난 사랑으로 하느님께 이끈 것이다. 지학순 주교의 문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요청하는 삶과 사랑을 받아들이겠다는 다짐의 상징이다.
주교 서품과 교구장 취임에서 드러나는 지학순 주교의 삶의 지향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강조하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중심의 삶과 정확히 일치한다. 하지만 이는 우연이 아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중심의 삶으로 초대받은 것이다. 지학순 주교는 주교로 서품되며, 교구장직을 맡으며,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새기고 다짐한 것이리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엇을 뜻하는가? 하느님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자신을 비우고, 자신 밖으로 나와 세상의 일부가 되어 우리와 함께 하셨다. 육화 사건의 결실인 나자렛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곁으로 다가갔다. 예수가 우선적으로 함께 했던 이들은 바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다.(마태 25,40) 그들과 함께 하며, 세상에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을 선포했다, 죽기까지. 십자가는 그런 하느님의 사랑의 상징이고,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사랑을 요청한다.
그리스도 중심은 탈자기중심화를 뜻한다. 하여, 우리에게 자신의 밖으로 나갈 것을, 보호자의 사명을 수행할 것을, 그리고 이를 위해 식별을 요구한다. 지학순 주교는 E. 스킬레벡스를 인용하여 “그리스도께 가기 위한 교회의 비중심화”, “하느님의 백성에게 향하기 위한 성직자의 비중심화”, “세계와 인간들의 문제에 향하기 위한 교회 내적인 관심의 비중심화”를 언급한다.(지학순, <정의가 강물처럼>, 형성사, 1983) 그리스도에게 다가가는 것은 곧 세상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을 뜻하며, 자신의 문제에서 벗어나 세상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근심을 함께 하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를 직접 체험한 지학순 주교는 교회가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그리스도를 내세워야함을 깊이 깨닫고 있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 생활한다는 것은 [...]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 모든 형의 자기중심주의의 배제를 요구한다. [...]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지혜와 사랑이 깊이 뿌리박고 있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생활하는 교회가 실현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중심의 삶, 이에 수반되는 탈자기중심화와 밖으로의 움직임에 대한 깊은 인식을 프란치스코 교황과 지학순 주교는 정확히 공유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실험실(lab)’이 아니라 생생한 ‘현장(frontier)’에서
십자가의 사랑은 우리가 밖으로 나가 특히 힘없는 존재들의 보호자가 되어주기를 요청한다. 보호자의 첫째 요건은 ‘함께 있음’이다. ‘함께 있음’은 물리적인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는 그 사람의 처지에 함께 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를 위해서는, ‘힘없음’의 실제 체험이 중요하다. 실제의 체험이 있을 때, 우리는 머리만이 아니라 온몸과 마음으로 그 사람에 대한 공감과 연민을 느낄 수 있다. 그 사람의 문제를 그 사람이 처한 상황 속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표현에 따르면 ‘실험실(lab)’이 아니라 생생한 ‘현장(frontier)’에서, 바라보고 처리할 수 있다.(“A Big Heart Open to God”, 12.)
이런 이유로 가난의 직접 체험은 중요하다. 아마도 지학순 주교는 자신의 체험에 비추어 안젤라의 사정을 몸으로 이해하지 않았을까? 당시, 버스 차장들은 누구인가? 한창 귀여움을 받으며 지낼 어린 나이에 가족의 생계를 떠맡을 수밖에 없었던 가난한 처녀들, 부당한 대우에도 정당한 권리 주장을 할 목소리조차 없는, 힘없는 사람들이다. 지학순 주교는 주교의 입장이 아니라 힘없는 차장 안젤라의 상황으로 들어가 그녀와 함께 했고, 안젤라의 딱한 처지에 대한 공감과 연민 속에서 사안을 숙고하고 결정하였다. “그런 경우, 삥땅은 죄가 아니다.” 그렇게 지학순 주교는 안젤라의 목소리, 안젤라의 보호자가 되었다.
버스 차장의 삥땅은 죄가 아니라는 지학순 주교의 결론은 상식을 깨는 파격적인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결코 자의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결론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창조적 충실성에서 비롯되는 개방성과 유연함의 결과다. 그리고 그 중심에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가 있음은 물론이다.
서로 다른 두 남자에게서 얻은 일곱 자녀를 둔 과부가 어느 날 주교를 찾아왔다. 이 여인은 자기 아이들이 세례를 받도록 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했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된 것은 이 여인이 대부들을 오도록 할 여비도, 세례식 비용도 없었고, 자신은 늘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대표로 대부 둘만 세우고 전부 한꺼번에 세례를 줍시다.” 지금은 교황이 되신 베르골료 추기경의 해법이다. 여인은 감동하고 말았다. “이 일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주교님은 제가 소중한 사람이라고 느끼게 해줍니다.”(<세상 끝에서 온 교황 프란치스코>) 살기 위해서 삥땅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버스 차장 안젤라, 그리고 “그런 경우, 삥땅은 죄가 아니다.”라고 단언하는 주교. 안젤라도 지학순 주교에게서 위의 과부와 마찬가지의 감동을 받지 않았을까? (계속)
조현철 신부(예수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