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게 EPL은 K리그 다음으로 익숙한 리그입니다. 대한민국의 영원한 레전드, 박지성의 경기를 보며 처음 해외축구와 EPL을 접했습니다. 브라운관 너머로 보이던 수많은 관중, 뜨거운 열기, 화려한 플레이를 보며 K리그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며 새로운 느낌을 받았고, 언제 어느 팀 어느 경기장이 됐던간에 꼭 직관을 하고 싶다는 욕구가 조금씩 쌓였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런던 여행을 떠나면서 EPL 직관을 일정에 넣었고, 드디어 꿈 하나를 이뤘네요.
제가 본 경기는 크리스탈 팰리스와 에버턴의 경기였습니다. 원래 아스날과 토트넘의 '북런던 더비'를 보고 싶었으나, 입장권이 비싸고 구하기도 힘든 것 같았고 그나마 지지하는 토트넘의 홈 경기도 아닌지라 깔끔하게 포기했습니다. 티켓은 크팰 공홈에서 구매했고 멤버십까지 포함해서 65파운드정도 들었던 것 같네요. 포항 일반석 시즌권 하나 사고도 남는 가격이고 리투아니아 A리가 경기를 무려 20번 정도 볼 수 있는 금액입니다 ㅎㄷㄷ
경기 시작 전에 크팰 홈 경기장인 셀허스트 파크에서 이것저것 구경하며 기념품도 사고 싶었는데 런던 시내에서 경기장까지 거의 1시간 반정도나 걸리더군요;; 런던 오버그라운드를 타고 갔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었는지 아니면 원래 느린건지 너무 엉금엉금 가서 경기장에 도착하자마자 구경이고 뭐고 입장하려고 줄부터 섰습니다. 역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길래 뽈뽈 따라갔습니다. 평범한 주택가를 지나니 딱 나타나더군요. 정말 북적북적했습니다.

경기장에 들어갔습니다. 양 옆에서 서라운드로 서포팅이 들려 오는데 소름이 쫙 돋더군요. 2만 5천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데 워낙 서포팅이 강렬해서 체감은 그 이상으로 느껴졌습니다.

경기장이 나이가 많다 보니 확실히 많이 낡았습니다. (1924년 완공. 스틸야드보다 무려 70년 전에 지어졌습니다.ㄷㄷㄷ) 그래서 불편한 점도 많더군요. 제가 앉은 구역은 arthur wait stand입니다. E석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중간에 통로가 있긴 하지만 이 구역 관중석이 단층으로 되어 있고, 좌석들이 앞뒤 양 옆으로 다닥다닥 붙어 있어 앉아 있어도 시야 확보가 힘들었던 게 아쉬웠습니다.(사진이 제가 앉은 34열 좌석입니다.) 가까운 쪽에서 크팰이 공격할 때 마다 시야가 가려 거의 조건반사처럼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했습니다ㅋㅋㅋ색다른 체험(?)이긴 했습니다만.. 스틸야드를 다니면서 좁다느니 불편하다느니 불평했었는데 감사하며 살아야 겠어요.


어쨌든 자리를 찾아 재빨리 앉았습니다. 동시에 휘슬이 울리면서 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숨도 채 돌리기 전에, 경기장 매점에서 산 햄버거를 한 입 베어물기도 전에 골이 터졌습니다ㅋㅋㅋ 1분이 채 되기 전이었는데, 그 주인공은 다행히 크팰의 맥아더였습니다. 그런데 4분 뒤 에버턴 니아세가 페널티 킥으로 동점 골을 뽑아내면서 초반부터 정신없는 공방전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터진 크팰의 다시 앞서 나가는 골! 이 골 이후에 팬들이 자하 콜을 하는데 '렛츠고 데얀'만큼이나 중독성이 있더군요. (팬도 아닌데 흥얼거리게 하는 위력ㄷㄷㄷ)
이후 에버턴이 전반 종료 직전 크팰 실수를 틈타 다시 동점골을 성공시켰고, 후반전은 득점 없이 끝나 2-2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청용의 몸 상태만 좋았다면 이번 경기에서 볼 수 있었을 텐데, 최근 폼이 너무 아쉽네요. 얼마 전 근육 부상 기사를 보고 안타까웠습니다. 에라이 톰밀러 개객기ㅡㅡ
이번 경기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서포팅. 지난번 잘기리스와 마찬가지로 단순하면서 따라 부르기 쉬운 가사와 멜로디 위주였습니다. 가사가 많고 긴 노래보다는 짧고 단순하고 반복적인 곡이 귀에 쏙쏙 박히고 중독성이 있네요. 라이트 팬들도 이질감 없이 쉽게 동참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K리그에 꼭 필요한 형태가 아닌가 생각이 드네요. 게다가 90분 내내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올해 포항 서포팅에 몇번 동참하면서 생각보다 부르기가 힘들다는 걸 느꼈기에..) 거기에 관중들이 경기장을 가득 메우니 분위기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EPL에서 작은 구장인데도 이 정도면.. 이보다 두 배, 세 배나 더 큰 다른 경기장들은 어느 정도나 될 지 감이 잘 안 오네요.
경기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인도고 차도고 사람들이 다 점령했었습니다ㄷㄷ

기차역 건물은 아예 막아놓고 따로 통로를 열어 통제하더군요. 작은 마을에 이렇게 2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이니까 체감 혼잡도는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상암에서 5만명 가까이 모였던 슈퍼매치가 끝나고 돌아갈 때보다 진심 더 힘들었습니다. 정말 런던 시내에 사는 크팰 팬이 매 경기를 이렇게 오고 간다면 존경하고 싶을, 썩 만족스러웠던 첫 EPL 직관이었습니다.

이틀 뒤에는 첼시의 홈 구장인 스탬포드 브릿지 투어를 했습니다. 당일 현장에서 입장권을 구매했는데 성인 요금은 22파운드지만, ISIC 국제학생증 카드를 보여주고 16파운드에 구매했습니다. 역시 유럽에선 학생 할인이 되는 데가 많아 꿀입니다.
락싸에서 어떤 유저가 집 앞 학교와 스탬포드 브릿지가 닮았다고 쓴 글을 봤는데, 진짜 외관이 학교스러웠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교무실이 있고 음악실도 있고 이래야 될 것 같은데 멋진 축구장이 반겨줬습니다.

첫 느낌은 '생각보다 아담하다'였습니다. 좌석 규모가 대전이나 울산 월드컵 경기장하고 비슷하더군요. 이 경기장들을 처음 갔을 때 먼저 든 생각이 '어? 그렇게 안 크네?'였는데, 스탬포드 브릿지에서도 똑같았습니다. 그리고 좌석 색깔이 통일돼 있으니까 훨씬 멋졌습니다. 스틸야드 좌석 색깔을 여기다 그대로 옮긴다고 생각하면..끔찍하네요(죽기 전엔 스틸야드 좌석 색깔 통일하는거 볼 수 있겠죠ㅡ?)

선수단 벤치는 관중석과 일체형입니다. 숭의가 이런 구조라서 신선했는데 역시 지붕이..그놈의 지붕이 옥의 티입니다. 지붕이 없으니까 훨씬 깔끔했습니다. (강등크리를 피하기 위해 잠시 스핑크스로 빙의했습니다.)

2층 시야도 정말 100점 만점에 100점입니다. 참 매력적인 경기장입니다.

프레스 룸과 락커룸입니다. 여기는 뭐 스틸야드에서도 못 가봤고 사진으로나 봤지 직접 들어가보는건 처음이라 새로웠습니다ㅋㅋㅋ
락커룸에는 선수들의 휴식을 위한 여러 장치들이 있었습니다.


구장 투어를 끝내고 구단 샵으로 갔습니다. 2층 규모로 레플부터 자잘한 기념품까지 다양한 상품들이 있었습니다.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한편으론 그만큼 축구가 흥한다는 게 부러웠네요. 축구장을 다니며 모을 기념품으로 레플을 살까 고민하다가.. 비용이 너무 부담스러워 머플러를 하나 사며 투어를 마쳤습니다.

